박치기 하나로 세계를 제패한 사나이 (feat 김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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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일본 레슬링 커리어
젊은 시절에 무작정 일본으로 밀항하여 형무소에 갇히는 고초 끝에 역도산의 제자가 되었다. 일본에서는 오
키 긴타로(大木金太郎)라는 링네임으로 활약했으며 박치기를 필살기로 삼았다. 전성기 시절 역도산의 단체 일본 프로레슬링(JWA)에서 자이언트 바바, 안토니오 이노키과 함께 젊은 삼총사(若手三羽がらす)로 불리는 등 거물로 손꼽혔다. 바바와 이노키가 훗날 일본을 넘어 전세계 프로레슬링계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고 려해보면 큰 의미를 갖는 부분.
하지만 스승 역도산이 1963년에 사망한 이후 석연치 않은 이유로 인하여 한국으로 귀국하여 대한 프로레슬 링의 에이스로 활동한다. 이후 안토니오 이노키와 자이언트 바바 등 간판스타들이 이탈하는 혼란스러운 와중 에 일본 프로레슬링의 참전 요청을 받아들여 다시 일본으로 건너간다. 김일은 "스승님의 단체인 일본 프로레 슬링을 저버릴 수는 없다!"는 이유로 일본 프로레슬링을 끝까지 지키는 길을 선택했다. 하지만 '일본 프로레 슬링'은 방송권을 전일본 프로레슬링과 신일본 프로레슬링에 모두 빼앗겨 TV중계가 전혀 되지 않는 등 여러 요인으로 인하여 결국 몰락하고 만다.
이후 전일본 프로레슬링, 신일본 프로레슬링, 그리고 제3의 단체인 국제 프로레슬링 등을 전전하며 경기를 가 졌지만 그다지 탄력을 받지 못하고 서서히 활동이 줄어들게 된다. 하지만 그러한 와중에서도 신일본 프로레 슬링에서 열린 1974년 안토니오 이노키와의 NWF 헤비급 챔피언 결정전에서 명경기를 펼치는 등 큰 활약을 남긴다. 1989년 고혈압 투병 이후 선수 생명이 끝난지 오래인 1995년 4월 2일 6만 관중이 모인 도쿄돔에서 은퇴식을 가졌다. 은퇴식은 신일본, 전일본, UWFi, FMW 등 당시 일본 최고의 프로레슬링 단체들이 함께 개최한 올스 타 흥행인 '꿈의 가교(夢の懸け橋)' 가운데 열렸다. 잠시 라이벌이기도 했던 전설 루 테즈가 밀어주는 휠체어 에 앉아 입장, 역도산 등과의 일화를 이야기 한 뒤 최후의 10카운트 공을 들으며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마지 막으로 중립 링포스트를 몇 차례 두드린 뒤 링을 뒤로 했다. 3. 한국 프로레슬링의 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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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프로레슬러) - 나무위키 https://namu.wiki/w/%EA%B9%80%EC%9D%BC(%ED%94%84%EB%A1%9C%EB%A0%88%EC%8A%AC%EB%9F%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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