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승 모어댄 뱅크 회장: 제가 기마민족과 몽고 군대에 대해 잠깐 설명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몽고 군대는 1240년에 헝가리까지는 진격을 했지만 유럽 내륙까지는 진출하지 않았습니다. 헝가리 군대는 몽고한테 처참하게 패했습니다.
당시 유럽에서는 헝가리 군대가 절대 강자였습니다. 헝가리는 기마민족 국가로써 896년 카스피해 북부에서 민족 대이동을 통해 80만명에 가까운 인구가 헝가리 평원으로 가서 정착하면서 만들었습니다. 당시 이동한 인구가 80만 명이라면 말타고 싸울 수 있는 사람이 20만 명 정도됐을 겁니다. 그 당시 유럽의 전체 인구는 약 2000만 명이 될까말까였습니다.
이때 유럽 기사들은 헝가리 마자르족의 기병부대를 당해낼 수가 없었습니다. 몽고 군대와 유럽 기마병이 직접 붙은 적은 없었습니다만 마자르족과 유럽 기사들의 전쟁을 보면 짐작할 수 있습니다. 헝가리에 가면 당시의 무기나 여러 가지 전쟁유물을 전시한 무기 박물관이 있습니다. 이 유물을 통해 보면, 마자르족이 처음 유럽으로 들어갔을 때 유럽의 기사들과 전투를 벌였습니다. 그런데 이건 싸우는 게 아니었습니다. 유럽 군대와 마자르족 군대의 싸움은 전쟁이 아니라 사냥이라고 표현하는 게 맞습니다. 당시 유럽의 기사들이 입던 갑옷의 무게가 馬具를 빼고도 약 40㎏이었습니다. 나중에 총이 나오면서는 60~80㎏에 육박합니다. 그 정도 무게니까 실질적으로 싸움을 하지 못했습니다. 마자르족은 유럽 기사들의 주변을 돌면서 화살로 공격한 반면 기동성이 떨어지는 기사들은 상대방을 칼로 칠 기회도 없고 대응도 못했습니다. 당시 유럽 기사단의 전투라는 것은 어떻게 보면 일종의 스포츠 경기였습니다. 같이 갑옷 갖춰입고 馬上 경기하는, 룰(Rule)을 정해놓고 승패를 가르는 게임같은 것이었습니다.
신성로마제국이 형성되는 게 유럽이 마자르족한테 50년 동안 수치를 당했기 때문입니다. 마자르족은 봄과 여름에는 자기 농사를 짓다가 가을철 수확기가 되면 5000명에서 2만 명 정도씩 떼를 지어 다니며 프랑스와 독일의 유수한 지역을 약탈하거나 조공을 받으러 돌아다녔습니다.
나중에 오토 대왕의 신성로마제국은 마자르족을 막기 위해서 모인 겁니다. 신성로마제국은 모든 병력을 집결시켜서 결국 마자르족을 敗退(패퇴)시켰습니다. 이긴 게 아니라 침략을 처음으로 막아낸 겁니다. 그후 마자르족은 침략, 약탈 경제 쪽은 쉽지 않겠다고 생각해 기독교로 개종을 하고 약탈 습관을 버리게 됐습니다. 그후 마자르족은 유럽의 수문장 역할을 합니다. 오스만 투르크 제국이 강대했을 때 유럽에서는 마자르족의 헝가리가 독자적인 힘으로 오스만 제국을 막아냈습니다. 물론 200년 동안 오스만 투르크를 막아내느라고 인구가 줄어들 정도였다고 합니다만.
당시에는 싸우려면 무기도 그렇고 갑옷도 그렇고 철이 가장 필요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제철방법이 발달하지 않아 쇠라는 게 지금의 귀금속 정도로 희소가치가 높아서 전쟁 시에는 일반 생활도구라든지 농기구에는 쇠를 쓰지 못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도 제철 기술은 일찍부터 발달했었지만 제철 과정에 필요한 연료, 목탄이 부족해서 실제 철 생산량은 많지 않았다고 합니다. 삼국 시대에는 나라에 있는 철은 모조리 갑옷과 무기로 활용됐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아까 유적들을 보셨지만 품앗이를 할 때면 쇠를 모두 녹여서 농기구를 만들었다고 하니 쇠붙이로 된 유물은 원형대로 보존하기 어려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사실을 바탕으로 보면 당시 백제인구가 300만 명이라는 이야기가 나오고 신라 인구가 100만 명이라는 것을 볼 때 백제가 더 강성했던 것 같지만 신라는 5만 명을 무장시킬 정도의 능력이 있었다는 겁니다. 백제가 농업 능력은 있었지만 병력 동원은 안 됐던 겁니다. 인력을 동원하려면 어느정도 무기가 있어야 되는데 무기 보충도 안되는 상태였다는 겁니다. 15세부터 40세 남성이 전쟁을 할 수 있다고 가정했을 때 이론상으로는 300만 인구 중에서 50~60만 명까지 동원할 수 있지만 실제로는 전성기에 동원했을 때라고 해도 3만 명 정도밖에 동원을 못했습니다. 백제에는 무기 보급에 절대적인 문제가 있지 않았느냐 하는 생각이 듭니다.
鄭淳台(정순태) 월간조선 편집위원이라고 월간조선에 역사스페셜을 쓰시는 분이 있습니다. 조 편집위원님과는 절친한 친구십니다. 저도 그 분과 여행을 한두 번 정도 함께 한 적이 있는데 이분이 술을 좋아하셔서 여행을 같이 하다보면 맨날 새벽 2시까지 붙잡혀서 술을 마시기도 합니다. 술을 마시고 이야기를 하다보면 옛날 전쟁 이야기, 역사 이야기를 많이 해주십니다. 삼국 시대 인구에 대해서도 그 분께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삼국사기를 보면 백제의 戶數(호수)가 76만 戶(호), 고구려가 69만 戶(호)였다고 합니다. 한 가구당 5,6명 정도의 식구가 있었다고 보면 백제 인구를 약 300만 명으로 봅니다만 다른 기록들이 여기저기 있습니다. 인구에 대한 기록은 삼국 시대도 있고 고려 시대도 있습니다. 조선 시대에 가면 인구에 대한 기록은 많습니다만 기록의 신뢰도가 문제가 됩니다.
당시 중국의 인구는 5000만 명 정도 됐었다고 합니다. 기원전 2세기부터 기원 2세기까지가 漢나라입니다. 그 후에 隋(수), 당나라 때도 전쟁 등을 거치는 바람에 인구가 크게 늘지 않았습니다. 결국 10세기, 11세기까지도 인구가 5000만 명을 넘은 적이 없었던 것으로 현재 추정하고 있습니다. 로마도 전성기 때 인구가 5000만 명 정도였다고 합니다.
현재 우리나라 인구와 중국 인구를 비교해보면 우리나라가 7000만 명, 중국이 13억 명 정도니까 약 20분의 1정도 되죠. 당시 중국에는 개발이 안된 곳들이 있었고 우리나라도 함경도 등 개발되지 않은 곳들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 우리나라 인구가 아무리 많아봐야 중국 인구의 10분의 1을 넘을 수 없었고 15분의 1정도가 유지됐었다고 봅니다. 그렇게 추측하면 당시 우리나라 인구는 300만 명 정도로 유지됐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 당시 유럽 지역은 우리보다 훨씬 후진국이었으니까 비교가 안됩니다. 10세기 영국 인구가 100만 명에서 150만 명이었고 프랑스 인구가 400만 명이 안됐다고 하니까 우리나라 삼국 시대의 인구가 500만 명을 넘었다는 것은 좀 무리한 해석이 아니냐 생각합니다.
그래서 백제 인구는 최대 300만 명 이상으로 잡을 수도 있지만 150만 명 정도로 보는 게 타당하지 않겠느냐 하는 추측도 나오고 있습니다. 고구려 인구는 백제보다 많을 수가 없습니다. 옛날 마자르족이 유럽을 약탈하던 것처럼 고구려의 지배계층도 이런 약탈 경제를 영위한 것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고구려의 영토는 넓지만 실제 인구는 많지 않았다고 봅니다. 신라도 100만 명 정도까지 추산할 수 있습니다만 백제 인구를 반 정도로 평가 절하한다면 신라 또한 그렇게 추산할 수 있을 겁니다.
이처럼 과거 인구에 대한 통계는 많은데 통계가 각각 고무줄 같습니다. 여러 연구자들이 낸 통계가 다릅니다. 세금을 거둘 때는 터무니없이 적게 보고를 하고 식량을 준다고 하면 몇 배가 늘어나고 하는 게 당시의 통계들이니까요. 인구증가는 농업 생산력과 절대적으로 관계가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조선 중종 시대가 농업 생산력이 많이 향상됐던 시기라고 합니다. 농기구도 발전하고 작물도 개량되고 이모작이 정착된 것이 그 시대입니다. 그렇게 해서 조선 중종 때 인구가 많이 늘어납니다. 늘어난 인구가 약 1000만 명입니다. 많이 보면 1200만 명까지 볼 수 있습니다.
조선 초기 인구는 500만 명 정도로 봅니다. 하여간 서기 원년부터 1300~1400년까지는 세계적으로 인구증가가 많지 않았습니다. 특히 疫病(역병)이 돌고 飢餓(기아)가 생기기도 하면서 인구가 늘어나질 않았습니다. 전쟁도 하나의 원인입니다. 징기스칸의 몽고군 침략 당시 중국 인구는 반절 정도 줄었습니다. 宋나라 전성기 때 중국 인구는 1억2000만 명까지 갔다가 明이 개국할 때는 9000만 명 정도로 줄었습니다. 우리나라도 40년 동안 對蒙(대몽) 항쟁을 했으니까 그 때 인구가 절반 정도로 줄었다면 300~400만 명까지 줄었을 거라는 그런 추정도 가능합니다. 저도 아마추어라 정확할 수는 없지만 아는 범위 내에서 말씀드렸습니다. 감사합니다.
<부소산성에 도착>
조갑제: 여기 김무환 부여군수님을 소개합니다. 일요일인데도 尙美會를 위해 일부러 마중을 나오셨습니다.
김무한 부여군수: 우리 대한민국 언론의 최일선에서 일하시는 趙자, 甲자, 濟자 대기자님, 세계적인 대기자님이시죠. 그 일행분들께서 저희 백제 역사와 문화를 보기 위해서 이 작은 도시인 부여에 와 주신 것에 대해 부여군민과 함께 환영의 말씀을 드립니다.
여기에 있는 백제의 역사와 문화는 부여군 것도 아니고 넓은 의미에서는 인류의 유산이라고 할 수 있는데 저희가 너무 큰 것을 맡아 심부름을 하고 있어서 어떨 때는 죄송하기도 하고 저희가 함부로 건드릴 수 없다는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단, 백제의 역사, 문화하면 의자왕의 失政, 痛恨의 눈물, 亡國 뭐 이런 부정적인 시각으로만 보는 게 아쉽습니다. 저희 부여군에서는 사비·백제 문화가 과연 부정적이었나 하는 것을 생각해서 삼국 중에서 가장 우수했던 역사, 일본보다 우수했던 역사를 캐봤습니다. 그랬더니 열두 개 정도가 나왔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우수한 것 스무 개를 캐기 위해서 역사를 공부하신 분들께 부탁해 연구를 하고 있습니다. 이번에 ‘서동요’라는 드라마 세트장도 저희 부여군에서 유치를 했습니다.
저희 郡은 양송이 버섯 특산지로도 유명합니다. 전국 유통량의 45%를 차지합니다. 그 다음에 전국 밤 생산량의 9%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특히 저희 부여군에서 나는 밤은 젊은 밤나무에서 나기 때문에 제일 품성이 좋다고 그래요. 그래서 오늘 여러분들께 약소한 선물로 조금 준비를 했습니다.
저희가 세계 사물놀이 대회를 유치해서 매년 열리게 됩니다. 올해는 13개국에서 왔습니다. 내년에는 25개국에서 올 것으로 생각됩니다.
저희들은 앞으로 정성을 다해 후손들과 전문가들, 여행자들을 위해 심부름을 할 수 있도록 백제 역사와 문화를 열심히 보전하겠습니다.
또 저희는 羅濟 동맹을 통해서 백제에서 삼국의 복덕방 역할을 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합니다. 이런 생각에서 저희도 백제를 본받아 평양, 경주와 함께 정치적인 것보다는 문화적인 교류를 먼저 하는 것이 좋겠다 해서 현재 평양, 경주와 교류를 추진 중입니다. 앞으로도 과거 삼국 지역의 통합을 위해 노력할 것입니다.
박경남 부여군청 문화관광 해설사: 안녕하세요. 안내를 맡게 된 부여군청의 문화관광해설사 박경남입니다. 저는 오늘 관광객이 오시니까 나오라고 해서 나왔는데 군수님께서 직접 소개를 하셔서 놀랐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이쪽으로 오시죠.
여러분 풍납토성, 몽촌토성 아시죠. 백제가 그곳을 수도로 해서 한강 유역에서 약 500년 가까이 스무 명의 왕이 재위에 있었어요. 그런데 광개토 대왕의 아들인 장수왕의 南進정책에 의해 공격을 당해 바둑을 좋아했던 개로왕이 아차산성으로 피신했다가 죽임을 당합니다. 그래서 급하게 수도를 옮긴 것이 지금의 공주, 公山城(공산성)에 왕궁을 세우신 겁니다. 그런데 공주에서는 문주왕, 상근왕, 동성왕, 우리가 잘 아는 무녕왕, 성왕까지 다섯 명의 왕에 걸쳐 64년밖에 거주하지를 못했어요. 급하게 왕실을 옮긴 것도 있지만 공주의 지형상 위에서 내려오는 적을 방어하기는 쉬웠지만 백제의 기상과 뜻을 넒히기에는 공간이 좁았습니다. 게다가 요즘 표현으로 하면 백성들이 水害를 당해 먹고 살기가 힘들었습니다. 공주에서 수도를 옮기신 성왕의 아버지가 무녕왕이시고 할아버지가 동성왕이세요. 동성왕 때부터 수도를 좀 더 넓은 곳으로 옮겨야겠구나 생각을 하십니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사냥을 갑니다. 그때부터 부여에 扶蘇山城(부소산성)도 쌓으시고 반대편에 聖興山城(성흥산성)도 쌓으시구요. 여기저기 계속 사냥을 나가면서 수도를 옮길 계획을 하셨습니다. 아들인 무녕왕 때는 가장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구요. 그의 손자 되시는 성왕 때 15년 정도를 공주에 계시다가 재위 16년 되는 해 과감하게 수도를 지금의 부여로 옮기세요. 그래서 부여는 538년 성왕 16년부터 의자왕 20년인 660년 7월 뜨거운 여름에 羅唐 연합군에 의해서 나라가 망할 때까지 약 123년 동안 백제의 수도를 했던 곳입니다.
백제는 700년 왕조이고 서른 한 명의 왕이 계신데 지금의 서울을 수도로 했을 때를 한성 시기라고 하구요. 공주에 잠시 머물렀을 때를 웅진 시대라고 하구요. 여기 오신 것을 사비 시대라고 합니다. 여기에는 부소산성도 있구요, 정림사지 백제탑도 있구요. 그리고 의자왕의 아버지이신 무왕 서동과 선화공주, SBS '서동요' 보시나요? 그 전설이 깃들어 있는 金堂址(금당지)도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를 수도로 했던 여섯 명의 왕과 왕의 가족들의 무덤이 있는 능산리 고분군도 있거든요. 이곳들을 모두 다 가시겠지만 부소산성에 오셨으니까 부소산성과 주변 유적에 대해 간단하게 설명을 해드릴께요.
여러분들이 관광안내소에서 걸어 올라오실 때 왼쪽에 보면 지금 잔디가 깔려있고 우물이 하나 있습니다. 그 일대 부소산성의 남쪽을 공주에서 수도를 옮긴 그 왕궁터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지금 발굴 조사를 하고 있습니다. 이 부소산성은 왕궁지의 북쪽에, 부여의 鎭山(진산)이라는 부소산에 산성을 쌓은 것이거든요. 이 부소산을 평상시에는 임금님이 산책도 하던 궁궐의 後苑(후원)으로 활용했고 위급시에는 수도를 보호하는 성의 역할도 했습니다. 그러니까 성에 대해서 간단히 설명을 해드리면 성이 보호하는 주체가 누구냐에 따라서 궁성일 수도 있고 행정구역을 보호하는 성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중국에는 만리장성도 있고 우리나라에는 천리장성도 있죠. 국경을 보호하기 위해서 쌓은 성을 長城(장성)이라고 하거든요. 그런 의미에서 이 부소산성은 왕궁이나 수도를 보호하는 궁성의 역할을 했습니다.
그리고 성이 위치한 입지에 따라서 분류하기도 합니다. 중국의 경우에는 평지가 많잖아요. 그래서 평지에 성을 쌓았을 때는 平山城(평산성)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나라는 면적에 비해서 산이 많다보니 산성이 많이 발달했어요. 그리고 성벽 재료를 뭘로 하느냐에 따라서 土城(토성)일수도 있고 石城(석성)일 수도 있어요. 그리고 중국 같은 경우는 벽돌 하나하나를 구워서 접착제로 쌓은 塼築城(전축성)이라는 것도 있습니다.
부소산성은 산에 있으니까 산성이고 보호하는 주체가 왕궁을 보호하기 때문에 궁성입니다. 그리고 흙과 돌을 함께 재료로 사용한 土石 混築城(혼축성)이거든요.
부소산성의 위치를 엄밀하게 말씀드리면 산성이 우리 발 밑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길을 죽 가다보면 둔덕같은 오솔길이 보일 거에요. 그게 백제 시대 산성의 성벽이거든요. ‘에게, 이게 무슨 성이야. 너무 낮아’ 그렇게 생각하지 마시구요. 1400년 전에 都城(도성)을 보호했던 성벽이지만 지금은 여러분이 다니시기 쉽게끔 잘 다져놔서 낮게 보이는 것이지 성벽에 올라가서 밑을 내려다보시면 경사가 져서 충분히 성으로써의 기능을 합니다. 그러니까 산이 많이 경사진 부분에는 굳이 성벽을 높이 쌓을 필요가 없었습니다. 가파르지 않고 평평한 지역에는 성벽을 좀 높이 쌓아서 인력도 덜 들고 자연지세를 잘 이용해서 성을 쌓았던 것 같습니다.
이 부소산성을 돌아보시면 백제 시대 임금이 동쪽에 떠오르는 해를 보면서 하루의 국정을 계획하셨다는 迎日樓(영일루)도 있구요, 밝은 달빛 아래 임금께서 술도 한잔 하셨다는 送月臺(송월대), 지금은 泗疵樓(사자루)라고 하는 곳도 있거든요. 사자루 밑에는 여러분들께서도 잘 아시는 落花巖(낙화암)도 있어요. 낙화암은 잘 아시죠. 삼천 궁녀가 뛰어내렸다는 이야기를 많이 하시죠. 조선 시대 임금님이 거느렸던 궁녀의 숫자가 약 400~500명밖에 안됐다고 해요. 그런데 과연 삼국 시대에 백제가 아무리 왕성했기로서니 3000명의 궁녀가 있었겠는가 하는 것은 우리가 한 번 생각해봐야 할 것 같구요.
백제가 무너질 때 부여 시내는 일주일 동안 불바다가 되고 백마강은 피바다가 됐다고 합니다. 그때 신라군의 총사령관 김유신은 육군으로 쳐들어오고 당나라의 총사령관 소정방은 수군으로 쳐들어와요. 이렇게 점점 수도가 위험해지니까 도성 안에 있던 아낙네들과 궁녀들이 모두 부소산성으로 들어와 있었겠죠. 그래서 성문을 굳게 잠그고 있는데 결국 백제가 나당 연합군에 의해서 무너지면서 의자왕은 북문을 이용해서 웅진성으로 피신합니다.
그때 도성에 남아있던 아낙네들과 궁녀들이 쫓겨쫓겨 올라간 곳이 부소산에서 가장 높은 낙화암으로 갔다고 보는 겁니다. 삼국 시대에는 그랬어요. 그 나라가 지면 상대편 나라의 종이나 노예가 되죠. 여자들은 어떻게 될지 잘 아시잖아요. 그러니까 ‘나는 차라리 그렇게 더럽게 살다 죽느니 깨끗하게 국운과 함께 하겠다’해서 궁녀뿐만 아니라 도성에 살던 여인들까지 함께 떨어져 죽었기 때문에 삼천궁녀라는 말이 나왔다고 하거든요. ‘3000’이라는 숫자는 3000명이라는 의미보다는 많은 여인들이 떨어져 죽었다고 해서 붙은 겁니다.
삼국유사에 보면 墮死巖(타사암)이라고 돼 있습니다. 사람이 떨어져 죽은 바위라는 뜻입니다. 조선 시대에는 우암 송시열 선생께서 낙화암이라고 표현을 하셨습니다. 거기서 아래를 한 번 내려다 보시는 것도 괜찮습니다. 낙화암 바로 밑에는 잘 아시는 皐蘭寺(고란사)도 있습니다. 백제 시대 임금님이 거기에서 나는 약수를 즐겨 마셨다고 하구요, 그 약수를 마셔서 위장병도 없었고 피부병도 안걸리고 원기왕성하게 지냈다고 합니다. 참고로 그 옆에 간단하게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겠지만 가서 보시고 약수를 드셔보세요. 약수 한 잔에 세 살씩 젊어진다고 하니까 계산 잘 해서 드시구요.
먼저 여기 있는 三忠祠(삼충사)에 대해서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삼충사는 백제 말기 의자왕 때 세 명의 충신을 기린 사당입니다. 왼쪽부터 成忠(성충), 興首(흥수), 階伯(계백)의 영정입니다. 성충이라는 분은 어떤 분이냐. 의자왕이 재위 말기에 어느 정도 나라가 안정기에 들어서니까 국정에 조금 소홀했습니다. 이때 ‘임금님 국정에 전념하십시오’하고 충언을 했더니 감옥에 가둡니다. 성충은 감옥에서도 단식투쟁을 하면서 충언을 계속 합니다. 결국 굶어 죽으면서 마지막에 유서를 남깁니다. ‘충신은 죽어도 임금님을 잊지 못합니다’라고 하면서 ‘지금 국운으로 보면 외적이 처들어올 것 같은데 만약 수군이 쳐들어 오면 기벌포-지금의 장항이라고 합니다-를 막으시고 육군이 쳐들어오면 탄현-지금의 논산 부근-을 막으십시오’라며 유서를 남기고 죽습니다.
그렇게 성충이 죽어도 계속 임금님이 그러시니까 이번에는 흥수라는 분이 충언을 드립니다. 그러자 귀양을 보냅니다. 흥수라는 분이 귀양을 가 있을 때 나당연합군이 쳐들어 옵니다. 그때 임금님이 당황해서 다른 신하를 흥수라는 분에게 보냅니다. ‘흥수에게 물어보라,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랬더니 흥수라는 분도 성충이라는 분과 마찬가지로 육군이 쳐들어오면 어디를 막으시고 수군이 쳐들어오면 어디를 막으시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나 중간에 간신들이 이 말을 전하면서 말하죠. ‘임금님, 성충과 흥수는 임금님에게 미움을 받고 죽거나 귀양간 사람들입니다. 과연 맞는 말을 했을까요’하고 임금님에게 말합니다. 결국 나라가 망하려는 운명이었는지 그렇게 망했거든요. 계백 장군은 잘 아시죠. 김유신 장군과의 전투에서 5戰 4勝 1敗를 했던 장군입니다. 삼충사는 이렇게 세 분을 모신 사당입니다. 사당으로 들어가실 때는 내가 보는 방향에서 오른쪽으로 들어가서 왼쪽으로 나오시면 됩니다. 이 사당은 1957년에 생겼습니다. 지금 보시는 건물은 1981년도에 다시 세운 겁니다.
백제에는 신하의 관등이 16관등이 있었습니다. 고구려는 14관등, 신라는 중앙은 16관등, 지방은 하나의 관등이 있었다고 합니다. 아까 설명드린 성충, 흥수, 계백입니다. 여기 자세히 보시면 백제 佐平(좌평) 흥수공이라고 써있습니다. 그러니까 임금님 밑에 제일 높은 관직이 좌평이고 그 다음이 達率(달솔)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계백 장군은 좌평이 아니라 달솔이었습니다. 아까 말씀하셨는데 이 영정은 초상화는 아닙니다. 이분들에 대해 요즘처럼 사진이 있거나 한 게 아니기 때문에 이분들 얼굴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문신과 무신의 특징을 생각해서 그린 게 아닌가 생각됩니다.
여기는 영일루입니다. 현판에는 ‘寅賓出日(인빈출일)’이라고 해서요 ‘삼가 동쪽으로 태양을 맞이한다’는 뜻이 쓰여 있습니다. 저기 보이는 산이 계룡산 연천봉입니다. 여기 보면 백제 시대 임금께서 해가 떠오르는 것을 쳐다보면서 하루의 국정을 계획하고 정리하셨다고 합니다. 지금은 영일루라고 하지만 원래 백제 시대에는 迎日臺(영일대)라고 했습니다. 지금 여러분들께서 오르신 건물은 백제 시대 건물이 아닙니다. 조선시대에 부여 관내에 있는 鴻山(홍산)이라는 관아의 문루를 옮겨다 지은 겁니다. 그러니까 이 건물은 조선 시대에 만든 것으로 보시면 됩니다.
부소산은 높이가 106m밖에 안됩니다. 부여는 백제하면 떠오르듯 완만한 지형을 가진 곳입니다. 이 지역의 전형적인 지형입니다. 자, 그러면 다음 코스로 이동하겠습니다.
부소산이라는 이름은 백제 시대 말로 부소는 소나무를 의미한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부소산은 솔뫼가 되는 거죠. 백제 시대에는 사비성, 소부리성이라고 불리다가 부소산이라는 명칭이 조선 시대에 세종실록 지리지에서부터 나왔기 때문에 그때부터 산 이름을 따서 부소산성이라고 부르고 있어요. 사비는 소부리라는 말과 연관이 있답니다. 소부리가 수도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나온 말이라고 합니다.
조갑제: 일본 사람들이 관광오면 고향에 온 것 같다는 이야기 안합니까?
박경남: 그런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일본 사람들은 부여에 오면 부소산과 정림사지는 꼭 들릅니다. 부소산은 하나의 산으로 된 게 아니라 두 개의 산으로 이뤄져 있습니다. 조금 작은 산이 있고 높은 산이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높은 산으로 가고 있거든요. 거기에 낙화암과 고란사가 있습니다.
半月樓(반월루)라는 곳에 한 번 가보시겠어요. 생긴 지는 얼마 안됐습니다. 1972년에 만들었습니다. 여기 가시면 부여 시내를 한 눈에 보실 수 있습니다.
저기 보시는 곳이 宮南池(궁남지)입니다. 신라 雁鴨池(안압지)보다 40년이 앞서는 우리나라 최초의 인공연못입니다. 박물관에 가면 거기서 나온 쇠조각 등 유물이 있습니다. 논바닥에도 수로 흔적 같은 것이 보입니다. 낙화암은 조금 더 올라가야 합니다.
조갑제: 지금 보시는 강이 백마강입니다. 부여 시내를 한 바퀴 돌고 군산으로 빠집니다.
박경남: 의자왕도 조금만 달랐으면 어떻게 됐을까 질문을 하시는데요. 의자왕도 재위 15년 때까지는 해동공자라고 해서 중국에서도 소문날 정도로 정치를 잘하셨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나라가 안정기에 들어서고 긴장이 풀어지면서 그렇게 된 겁니다. 이런 말씀 드려도 될지 모르겠지만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지금 우리들 집안도 男과 女가 서로 화합을 잘 해서 꾸려가야겠지만 왕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당시 의자왕의 첩실 중에 恩古(은고)라는 여자가 있어 의자왕을 뒤에서 조종했다고 합니다. 그것도 한 원인이 됐고 하여튼 여러 가지 복합적 원인으로 인해서 백제가 망했다고 생각됩니다.
그런데 잘 아시죠. 백제는 660년에 망했지만 백성들은 3년 동안 광복 운동을 해서 城을 여러 개 되찾기도 했답니다. 하지만 그 지도부의 내분으로 인해서 완전히 망했다고 합니다. 그때 일본이 백제의 광복을 지원하기 위해서 병력 등을 많이 지원해 줬다고 합니다. 그걸 보고 어떤 분은 만약 백제가 삼국 통일을 했다면 일본과 지금 이런 관계도 아니고 한 나라일 텐데라고 말씀하시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건 역사의 결과를 가지고 假定(가정)하는 것에 불과할 뿐입니다.
이쪽이 제가 아까 말씀드렸던, 음양의 조화를 위해서 만들었다는 송월대입니다. 임금이 달빛 아래서 술도 한 잔 하고 했다는 곳입니다. 한 번 올라가 보시죠. 여기가 송월대입니다. 지금은 사자루라고 부릅니다.
여기가 낙화암입니다. 높이를 정확히는 잘 모르겠는데요 100m는 안될 거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정확한 높이는 저도 한 번 알아볼께요. 낙화암에 왔던 초등학생들은 ‘왜 치마를 이렇게 뒤집고 떨어졌을까요’ 묻기도 하는데 그건 겁이 나니까 그렇게 했다고 생각되네요. 그리고 여기를 보시면 알 수 있지만 다이빙 선수, 넓이뛰기 선수라도 여기서 뛰어내리면 바로 강에 닿지 않습니다. 나중에 배를 타고 지나가시면서 보시면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부소산이 자랑하는 멋진 경치로는 백마강에 얽힌 것들도 볼 수 있지만 달이 비치는 백마강이 출렁이는 모습, 부소산에 내리는 저문 비, 낙화함에서 슬피 우는 두견새, 고란사의 새벽 종소리, 노을에 비치는 백제탑, 귀암津에 들어오는 돛단배, 저녁 어스름에 비가 내리는 장면 등 부여 팔경이 있어요. 너무나 멋진 장면들입니다.
여기가 고란사입니다. 고란사에 오셨으니까 '皐蘭寺 曉鐘(고란사 효종)'에 대한 시조를 들려드릴께요. 시조 제목이 '고란사의 새벽 종소리(효종)에요.
고란사 흰 구름이 천년이라 생각났다.
흐르는 저 종소리 망국한을 아는 듯이
옛 강산 울려만 주고 고요히도 사라져라.
이 시조는 부여 팔경 중에서 고란사에 얽힌 시조입니다. 다음에 부여에 오시게 되면 하룻밤 주무시고 새벽에 여기를 한 번 올라와 보세요. 너무 멋있습니다. 저는 출근하면 부소산의 멋진 모습이 너무 좋아서 혼자서 뛰어다닙니다. 이걸 누군가에게 알려 드려야 되는데 안타까워요. 그러니까 다음에는 부여에 오셔서 하룻밤 주무시고 아침에 부소산에 와보세요. 정림사지 5층 석탑같은 경우에도 눈발이 날릴 때는 너무 멋지거든요. 계절을 달리해서 가보셨던 유적지에 가시면 자연도 계절에 따라 옷을 달리 입듯이 문화재도 계절에 따라 옷을 달리 입는 걸 보실 수 있답니다. 너무 멋져요.
이제 마지막으로 定林寺址(정림사지)에 가실 겁니다. 정림사지는 백제가 538년에서 600년 사이 공주에서 부여로 수도를 옮긴 후 지어진 것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정림사라는 절에 있는 5층 석탑과 石佛坐像(석불좌상)을 보러 가실 건데요, 거기 석탑을 이야기하실 때는 정림사지 5층 석탑이라고 하셔야 됩니다. 그 탑은 백제 시대 탑입니다. 백제 시대 나당 연합군에 의해서 부여가 일주일 내내 불바다가 될 때 그 절은 다 타버리고 탑만 유일하게 남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1400년 전에 백제의 흥망성쇠를 다 보고 그 자리를 묵묵히 지키고 있는 석탑을 보시게 될 겁니다.
나라가 망하고 통일신라를 거쳐서 고려 시대에 다시 절이 그 자리에 들어서게 됩니다. 그 절의 기와에서 고려 시대 절 이름이 정림사라는 게 밝혀집니다. 그래서 탑을 이야기할 때는 정림사지라는 절 터에 있는 5층 석탑이라고 부릅니다. 저희끼리는 百濟塔(백제탑)이라고 부릅니다.
처음에 절이 세워진 것은 백제 시대지만 우리가 부르는 정림사라는 이름은 고려 시대에 중건된 절 이름이거든요. 도표를 보시면 이해가 쉬우실 텐데요, 다시 중건될 때 백제 시대의 강당 자리를 고려 시대에는 金堂(금당)으로 보고 석불좌상이 모셔져 있습니다. 가서 석불과 석탑에 얽힌 이야기를 해드리겠습니다.
저 앞에서 신호를 받아 좌회전을 하면 정림사지고 우회전을 하게 되면 國南池(국남지)라고 있습니다. 매년 7월 말에 국남지 연꽃 축제를 하거든요. 사진작가들이 많이 와서 사진을 찍어 갑니다. 우리나라 여러 곳을 돌아봐도 국남지만큼 예쁜 연꽃이 있는 곳이 없다고 하십니다. 국남지 이번에는 못보셨죠. 기회가 되시면 내년 축제 때 오셔도 좋습니다. 개인적으로는 5월 말이나 6월이 연꽃이 가장 예쁘더라구요. 그때 오시면 제가 자신있게 설명드릴 수 있으니까 그때 한 번 꼭 와주세요.
여기가 정림사지입니다. 지금 하고 있는 공사는 정림사지 전시관 공사입니다. 원래는 2005년 올해 완공이 예정이었는데 내년 10월 정도에 완공될 예정이라고 합니다. 이 모습은 礎石(초석) 위치에 따라서 복원한 겁니다. 연못도 원래 연못터가 있어서 만든 겁니다. 저기 입구에 비치된 안내문에 보시면 국보 9호 5층 석탑이 있다고 돼 있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사찰 내 연못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산에 있는 절에 가다보면 꼭 다리나 물을 하나 건너게 되요. 그 물을 건너면서 세속의 때를 벗고 간다는 洗心川(세심천)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 蓮池(연지)도 그런 뜻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간단히 설명드리겠습니다. 이 절이 처음 세워진 것은 공주에서 부여로 수도를 옮긴 다음입니다. 이 강당 건물 뒤쪽으로 보이는 산이 아까 가셨던 부소산입니다. 여기는 왕궁의 바로 남쪽입니다. 그러니까 백제 시대의 시가지에 있었다고 보시면 될 겁니다. 그리고 이 남쪽으로 내려가면 국남지가 있는 것으로 봐서 백제에 많은 사찰이 있었겠지만 이 사찰은 그 중에서도 중요한 사찰이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백제 사찰의 전형적인 특징이 탑 하나에 금당 하나, 강당 하나, 그리고 이 문에서 강당까지 이렇게 回廊(회랑)이 있는 겁니다. 일본의 사천왕사같은 경우에도 이런 형식을 그대로 따라 했다 해서 일본 사람들도 정림사지에는 많이 옵니다. 이 연못은 부처님의 세계에 오기 전에 속세의 나쁜 마음과 때를 벗고 들어간다는 세심천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저기를 지나서 부처님의 세계에 들어가게 됩니다. 요즘은 절에 가면 불상이 중심이지만 삼국시대만 해도 절의 중심은 탑이었습니다. 그래서 삼국시대에 만든 탑이 많습니다. 탑은 쉽게 말해서 부처님의 무덤이에요.
이 정림사지 5층 석탑은 우리나라 국보 9호고 익산 미륵사지탑과 함께 유일하게 現存(현존)하는 백제의 탑입니다. 익산의 탑이 먼저다 정림사지 탑이 먼저다 제가 정확하게는 잘 모르겠습니다. 이 탑은 149개의 돌로 쌓은 것입니다. 목탑의 양식을 그대로 석탑에 적용시켰다고 해서 예술성을 인정받는 탑입니다. 지금 이렇게 보시면 잘 안보이실 텐데 1층 塔身(탑신)의 기둥을 隅柱石(우주석)이라고 하는데 여기에 백제의 양식인 배흘림 기법이 남아있다고 해요. 그리고 4층 위에 깨진 부분이 있어요. 일제 시대에 누군가가 사리함을 도굴해가면서 뚜껑을 떨어뜨려 깨졌다고 하거든요. 여기 탑이 있고 저기 아이들이 뛰어노는 곳이 금당터입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불상을 모시는 곳입니다. 그 뒤에 크게 殿閣(전각)을 만들어 놓은 게 백제 시대 강당터입니다. 스님들이 기거하는 장소였죠.
이 정림사라는 이름은 고려 시대의 절 기와에 나오면서 이 절을 정림사라고 불렀다는 것을 알게 된 겁니다. 저 강당은 백제 시대의 형식에서 보면 강당이고, 고려 시대에는 저곳을 금당으로 봤어요. 그래서 저기에 들어가면 큰 석불좌상이 모셔져 있습니다. 천천히 가시면서 보세요.
여기 보시면 글자가 보이실 거에요. ‘大唐平百濟國碑名(대당평백제국비명)’이라는 제목으로 글이 새겨져 있습니다. 1단의 네 면에 쓰여 있습니다. 한때는 이 탑이 平濟塔(평제탑)이라고 불렸습니다. 그러니까 나당 연합군에 의해서 백제가 망하고 소정방이 이 탑을 세워 자기 승전기념문을 새겼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건 시기적으로 안맞구요, 이미 세워진 탑에 ‘미개한 백제를 친 소정방이 승리를 하고 의자왕과 大小臣僚(대소신료) 88명과 12300여 명의 백성을 이끌고 당으로 돌아간다’고 씌여 있습니다. 이렇게 탑이 거뭇거뭇한 것은 당시 나당 연합군에 의해서 절이 탈 때의 흔적이라고 합니다. 이 탑은 1400년 전에 백제의 흥망성쇠를 보면서 그 자리를 꿋꿋하게 지키고 있는 겁니다.
조갑제: 여기 쓰여있는 글귀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삼국사기만 해도 백제가 멸망한 다음 500년 뒤에 쓰여진 책이거든요. 하지만 이 글귀는 소정방이 자기 공적에 대해 백제가 망한 지 한 달 뒤에 쓴 겁니다. 660년 8월에 쓴 거죠. 거의 실시간으로 쓴 중요한 자료입니다. 이것은 거의 해독이 됐습니다. 글 내용은 거의 자기 자랑뿐입니다. 왜 신라와 백제가 싸웠느냐, 어떻게 백제를 쳤는지, 의자왕의 부인이 어떤 잘못을 했는지 욕하는 내용 등 백제의 멸망 원인과 함께 당시 백제의 인구 등 현황에 대해 자세히 써놨습니다. 이 글귀는 8월에 썼다고 합니다. 탑을 한 달 만에 만들 수가 없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이미 있던 탑에 글귀를 새겼다고 하는 게 정설입니다.
박경남: 부여 박물관에 가시면 중앙에 야외 전시실이라고 해서 石槽(석조)가 있습니다. 그 석조는 부소산성 아래의 왕궁터 추정지에서 나온 겁니다. 그러니까 아마 왕궁에서 睡蓮(수련) 같은 거 심고 봤던 石蓮池(석연지) 같아요. 그런데 거기에도 이것과 똑같은 ‘대당평백제국비명’이라는 글귀를 새기다가 그게 만만치 않으니까 이 탑에다 새긴 걸로 추측하거든요. 다음 번에 오시면 부여박물관도 한 번 가보세요.
여기가 백제 시대의 형식으로 따지면 강당터지만 고려 시대에 重建(중건)하면서 금당으로 만들었습니다. 이때부터 절의 중심이 탑에서 붙상으로 점점 옮겨갑니다. 이 불상도 보물 108호입니다. 이 불상을 보시면 많이 마모되고 가슴 윗 부분이 몸통과 다르잖아요. 머리가 떨어져 나간 걸 고려 시대 후에 누군가가 얼굴이 연자방아 돌리던 돌을 올려놓은 것이라고 합니다. 여기 오래 사셨던 분들 말씀에 따르면 그냥 露天(노천)에 널려있었던 것을 보호하기 위해 보호각을 만들어 모셨다고 합니다.
이것은 고려 시대에 만들어졌다고 하지만 백제의 부드러운 선이라든지 이런 걸 느낄 수 있습니다. 불상의 손이 많이 마모돼 오른손은 거의 안보이는데 원래의 손모양을 보면 지혜를 상징하는 毘盧舍那佛(비로자나불)이라고 합니다. 한 번 둘러보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