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천주 성부 마리아 대축일입니다. 천주라는 말을 강조했습니다.
분명히 천주라는 말을 강조한 것은 신성에 방점을 찍고 있다고 말씀을 드릴 수 있고 아울러 오늘은 세계 평화의 날입니다. 세계 평화의 날은 분명히 인성에 방점을 찍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계 평화의 날이 왔는데 왜 오늘 세계 평화의 날이 될 수 있는가? 묻는 사람도 대답하는 사람도 없고 아무런 문제 없습니다.
그러면 사제 생활이 엄청 쉽습니다. 대통령이 무슨 말을 하는 것은 쉽지만 기자들과 함께 인터뷰하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은 아닙니다.
문제점을 자꾸 지시하고 그 때문에 우리는 왜? 라는 질문을 던지면서 그 왜? 에 대한 답을 스스로 내릴 수 있길 바랍니다.
그 왜? 라는 말을 부르심이라고 말할 수 있고 거기에 대한 답을 응답이라고 생각하면 어떨까 이런 생각도 해보게 되었습니다.
오늘은 성탄 팔일 축제 7주일 마지막 날이며 오늘은 새해 첫날입니다.
여기에 바로 성모 마리아를 강조시키고 성모 마리아께서 세계의 평화를 향해서 움직이는 것도 함께 깊이 헤아려 볼 필요가 있습니다. 세계라는 말이 평화가 강조되면서 우리는 움직이는 그 축일을 지내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면 어떨까 생각합니다.
성모 마리아라는 우리 어머니들과 같이 깊은 한과 아픔을 안고 살아가신 한 가정의 평범한 어머니였습니다. 은총이 가득하신 성모님께서는 하느님과 우리를 위해서 당신 생명과 모든 것을 바쳐 우리를 보호하시고 돌보시는 모든 어머니 표상이고 귀감이라고 전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성모 마리아가 단순히 예수님이 나오셨기 때문에 예수님의 어머니라 일컫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명심하시고 그 뜻에 따라 성실하게 사셨기에 예수님의 어머니로, 우리 인류의 어머니로서 공경하는 오늘이었습니다.
성모 마리아는 굳은 믿음과 겸손한 마음을 지니셨기에 예수님과 우리를 잉태하실 수 있는 어머니로 선택받으신 것으로 저는 이해합니다.
그리고 성모 마리아는 이스라엘 백성이 겪은 역사를 그 누구보다도 뼈저리게 느끼시고,
이 땅에 한 만한 우리의 역사를 체험하시고 하느님의 전능하심을 굳게 믿고 후세들을 기다리셨기에 그리스도의 어머니요, 우리 어머니가 되려는 초대에 간절히 또 절대적으로 순종하실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주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 믿으셨으니 정녕 복되십니다.
전능하신 주님의 말씀을 굳게 믿고 겸손하게 자신을 완전히 비우신 성모 마리아의 깨끗한 마음속에 그곳이 바로 하느님 내 아들이 거처하는 성전이오, 우리가 새로운 태어날 모태라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현대 가톨릭 문학의 거장인 프랑스의 소설가 조르주 베로나노스가 쓴 ‘어느 시골 신부의
쓴 일기’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소설은 시골 본당에 부임한 젊은 신부가 거룩하고 온 길을 걸으면서 겪은 고뇌와 고통을 담고 있었습니다. 이 시골 신부는 사목 생활을 하면서 수많은 고통과 시련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고통 속에서 하느님 은총의 참다운 뜻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소설은 신부의 이러한 독백으로 끝을 내고 있습니다. “아무려면 어떠한가, 모든 게 은총인 것을” 이 시골 신부가 어떤 것도 다 주님의 은총이라고 받아들이는 그 장면은 참으로 놀랍기 그지없습니다. 우리는 모든 것이 잘 됐을 때는 은총 같은 느낌이 들고, 잘 안 됐을 때 마치 유혹에 빠진 것 같은 인상을 받는데, 오히려 그 상황을 그대로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적극적으로 거기에 임하는 그 모습은 참 아름다운 모습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갈멜 수도원 수도자인 십자가의 성 요한은 갈멜 수도회가 왜 이 지경이 되었을까? 세속에 아주 접목하면서 무언가 잘못됐음을 인식하고 그는 얘기합니다. 갈멜의 영성이 예전에 그 영성을 그대로 잘 살리기를 바라고 그 삶에 동참하기를 간절히 바랬지만, 그 갈멜의 수사들은 십자가의 성요한이 이렇게 말하는 것이 몹시 못마땅해서, 그렇게 하지 말라고 얘기하고 욕을 하고 또 없으면 그렇게 했다고 계속해서 진행되니까, 바로 갈멜의 수사들이 끌고 가서 지하 감방에 쳐 넣었습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십자가를 지겠다는 그분들이 어찌 이랬는가, 이런 생각이 들지만 십자가의 성요한이 본인이 끌려간 감방에 들어가지 않았다면 그 엄청난 신비의 세계를 몰랐을 것입니다. 나는 그 어두움 앞에서 무언가를 깨달았습니다.
하느님의 신비가 거기에 내재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십자가의 어두움을 잘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뭐든지 잘 되면 모든 것이 되리라 생각하지만, 가장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도 우리는 이것을 하느님의 신비를 받아들일 수 있고 그 신비를 먹은 내가 세상에 계시로 등장할 수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이 신비는 신성이요, 이 계시는 인성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신성과 인성이 아름다운 작품을 만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십자가의 수직선는 신성이요, 십자가의 수평선는 인성입니다. 그 신성은 신비, 그 인성은 계시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신비는 계시로 가야 되고, 계시는 신비로부터 왔다는 사실을 명심하시고 동전의 양면처럼 항상 함께 있어야 된다. 이런 측면을 강조해 드리고 있습니다.
또한 대 데레사 성녀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렵고 힘든 상황을 잘 받아들이고 이것을 다 하느님께서 계획한 것이니 그것을 잘 받아들이라고 말씀하시며 우리는 성가를 부르면서 이런 내용을 들은 적 있습니다. ‘모든 것은 다 지나가리라 그 또한 지나가리라’ 들어본 적 있습니까 바로 대 데레사 성녀께서 생각해서 하신 말씀입니다. 어떠한 것도 다 지나가는 것이니, 또 너무 마음을 많이 두지 마라. 집착하지 마라. 이런 뜻으로 생각합니다. 제가 성복동 성당에 가서 행복할 수도 있고, 불행할 수도 있지만, 행복에도 신비가 있고 불행에도 신비가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이 섭리한 대로 저는 그렇게 살아야 될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을 해봅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불평불만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섭리에 어떻게 불평불만을 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그 십자가에 처형되셨을 때 예수님은 하느님께 불평불만이 있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서 그것을 받아들이고 그대로 실행에 옮겨 나갔던 것입니다.
받아들이는 것은 순종이요, 내어놓는 것은 순교입니다.
순종은 신비요, 순교는 계시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 주시기 바랍니다.
성모님께서는 예수님께서 겪으신 모든 것을 함께하셨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예수님이 탄생 예고부터 십자가 아래에서 주님의 종으로서 하느님의 뜻을 충실히 따르셨습니다.
따라서 주님 종으로서 겪어야 할 모든 고통을 감수하셔야만 했습니다.
성모님께서는 누구보다도 예수님의 제자 직분을 성실히 수행하신 분이십니다.
그분께서는 일생 자신을 비우시고 하느님의 뜻을 따르셨기에 하늘에 오르시는 영광과 행복을 누리실 수 있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성모님의 생의 모든 것이 하느님의 은총이었습니다. 시골 어느 사제가 ‘아무려면 어떠한 가 모든 것이 은총인 것을’ 한 것처럼 바로 성모님도 모든 것은 다 은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은총이고 내가 원치 않은 것은 은총이 아니라는 그런 생각을 갖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은총이다. 바로 성모님의 삶이었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은총의 전구자이십니다. 허영자(마리 로사) ‘자비로운 전구자’ 시의 일부를 묵상하면서 성령님의 승천을 함께 기뻐해 보고 싶습니다.
하늘과 땅 사이를 잇는
아름다운 다리는 무지개입니다.
천주님과 사람 사이를 잇는
무지개 다리는
성모 마리아 당신이십니다.
우리가 기쁘고 즐거울 때도
당신은 함께 하시지만
더 많이 우리가 슬프고 괴로울 때
근심의 이마를 짚어주시는 어머니
그러하기에
자비로운 전구자이신
당신의 승천의 영광은
저토록 광휘롭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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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은 오히려 행복하다. 듣는다. 지킨다. 듣는다는 것은 나에게 받아들인다는 것이고, 지킨다는 것은 너희에게 행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체를 올릴 때는 받아 먹어라, 이렇게 표현하고, 성혈을 올릴 때는 우리는
행하여라. 이런 말이 있는데 듣고 지킨다 이렇게 해석하면서, 이것이 듣는다는 십자가의 수직선이고, 행한다는 것은 십자가의 수평선이요. 이 십자가 신앙 외에는 우리는 어떤 것도 없습니다.
십자가는 나의 모든 것이고, 그리스도 이외에는 모든 것을 쓰레기로 여긴다 하는 바로 우리의 삶도 사도 바울의 모습도 볼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본인이 그리스도가 아니면 본인 자신도 쓰레기라고 표현하는 그 모습이 참 놀라운 게 그지없습니다. 성모님께서는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잉태하신 것처럼 우리도 하루하루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그것을 가슴 속에 품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저는 잉태라고 생각합니다. 성모님께서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낳으신 것처럼 우리도 일상 안에서 주님의 말씀을 실천함으로써 그 말씀을 마음속에만 간직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드러내야 한다 이렇게 볼 수 있습니다.
그런 행동을 내가 한다면 나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잉태한 것과 유사하지 않나 저는 이렇게 생각해 보고 있습니다. 성모님께서 예수님을 기르신 것처럼, 우리도 세상에 드러낼 말씀의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 또한 제2의 성모 마리아가 되어 말씀을 잉태하고 낳고 길러야 할 사명을 지니고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돼지고기 진주 목걸이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아무리 고귀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 물건도 그 가치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아무 소용이 없다는 뜻이 되겠습니다.
진주같은 보물은 그 가치를 알고 그에 맞는 격식의 옷을 입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을잉태하시고 그 품에서 키우셨던 성모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 아드님 예수님을 성모님께 맡기셨을 때 성령님께서는 성자의 신성이 훼손되지 않도록 깊은 믿음을 잃지 않으셨다는 사실입니다.
제2의 성모 마리아로 부르심을 받은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날마다 말씀과 성체를 받아 모시는 우리 또한 예수님을 품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예수님을 모신 사람다운 품격을 갖추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할 때 성령님께서 하늘에 오르신 것처럼 우리 또한 천상의 주위를 차지할 수 있으리라 이렇게 생각해 보고 싶습니다.
어쩌면 성령님의 삶은 임마누엘, 알렐루야, 아멘이라고 표현합니다.
임마누엘은 주님께서 나와 함께 있다, 알렐루야는 내가 주님과 함께 있다. 똑같은 말 같지만 다릅니다.
주님께서 나와 함께 있는 것은 주연이 주님이시고, 내가 주님과 함께 있는 것은 주연이 바로 나라는 사실입니다. 두 가지가 합쳐져서 아멘을 만들어냅니다.
임마누엘은 성부와, 알렐루야는 성자와, 아멘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입니다.
특별히 레지오 마리애 단원들은 항상 임마누엘, 알렐루야, 아멘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첫 번째는 주님이 나와 함께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그다음에 두 번째는 내가 주님과 함께 있는 것이고, 그래서 얻어지는 것이 아멘이라고 생각해 주시기 바랍니다.
임마누엘은 성모님의 ‘곰곰이’라는 단어가 어울리고, 알렐루야는 성모님의 ‘묵묵히’라는 단어가 어울리지 않을까 이렇게 생각해봅니다.
결국은 성모님의 삶은 항상 과정이 있습니다.
알파에서 오메가로 넘어가는 그 과정을 보는 데, 우리는 그 점을 깊이 헤아리시기 바랍니다. 첫 번째 것은 알파고 두 번째 것은 오메가이니 어떻게 변화되는지 한번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마음에서 행동으로, 태초에서 최후로, 받음에서 줌으로, 맑음에서 밝음으로, 침묵에서 인내로, 순종에서 순교로, 믿음에서 사랑으로, 하늘에서 땅으로, 죄 없음에서 공덕을 쌓는 상태로, 은총에서 평화로, 충실에서 성실로, 서로에서 함께로, 종에서 벗으로, 고통에서 영감으로, 성탄에서 부활로, 이렇게 이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깊이 헤아려주시고 내가 지금 어디로 목표 지점이 어딘지 정확히 감지할 수 있을 때에 우리는 진정한 신앙인이 될 수 있을 겁니다.
차에만 탄다고 무조건 목적지까지 가는 건 아닙니다. 바로 이렇게 이 몸은 당신의 종입니다.
그대로 이루어지길 바랍니다. 무슨 말입니까 새해 첫날에 여러분들은 이 점을 꼭 기억하고 한 해를 보내면 좋겠다 생각합니다.
나는 누구인가? 두 번째 나는 무엇하는 사람인가? 이 둘을 항상 염두에 두셔야 겠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이 몸은 당신에게 종입니다.
나는 무엇하는 사람인가 주님의 말씀을 그대로 이루어지는 사람입니다.
맞습니까? 바로 성모님께서 말씀하신 겁니다.
먼저 말씀한 것은 임마누엘입니다. 두 번째 말씀하신 것은 알렐루야입니다. 두 가지가 합쳐져 아멘으로 끝을 맺는 것이니 여러분들이 항상 임마누엘, 알렐루야, 아멘을 항상 염두에 두고 주님과 함께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