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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 글에서, 오류 지적하는 글을 올리면 듣도 보도 못한 무지렁이들이 갑자기 툭 튀어나와서 아무 말이나 내뱉는다고 했는데, 그 증거를 보여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이 무지렁이들은 아무래도 평가원 관계자의 지령을 받았거나 알아서 충성하는 분자겠죠? 어떻게든 연결이 되어 있을 겁니다. 왜냐하면 평가원에 이권이 많이 걸려 있거든요.
왜 이들이 아무 말이나 지껄이고 있다는 것인지, 보여드리겠습니다.
문제된 윤리와 사상 12번은 이황(갑)과 이이(을) 중 한 사람이라도 긍정하는 질문을 고르라는 것입니다. 문제된 건 ㄴ 선지입니다. ㄴ 선지를 써보겠습니다.
ㄴ. 이(理)는 작용이 없으며 만물에 두루 갖추어져 있는가?
여기서 ‘리의 작용’은 ‘리지용(理之用)’의 번역입니다. 선지는 두 가지를 묻고 있습니다. ‘리는 용(작용)이 없는가?’, ‘리는 만물에 두루 갖추어져 있는가?’ 여기서 후자는 모든 주자학자들이 인정하고 있고, 교육과정에서도 충분히 다루고 있기 때문에 일단 거론하지 않겠습니다.
‘리에 用이 있다[理之用]’는 것은 이미 주자가 말했기 때문에, 주자 학문의 계승을 표방하는 주자학자 이황, 이이 모두 ‘리에 용이 있다’는 것을 얘기합니다. 문제는 그 ‘리지용(理之用)’에 대한 해석입니다. 그런데 문제된 ㄴ 선지는 이 ‘리지용’에 대한 해석이 갑(이황), 을(이이) 간에 다른지 어떤지 묻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리지용’을 인정하는지 안 하는지만 묻고 있어요.
그런데 사실 ‘리의 체용’ 문제는 교육과정 이탈입니다. 교육과정 이탈이지만, 평가원에서는 이것을 ‘이황’을 제시할 때 출제했습니다. 이황의 ‘리발(理發)’을 응용하는 차원에서 그렇게 한 겁니다. 사실 이황이 ‘리발’을 설명하기 위해 ‘리지용’ 이론을 동원했기 때문에 학문적으로는 문제가 안 됩니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평가원 기출(2016학년도 9평 14번 ㄷ 선지)을 살펴봅시다. 발문은 갑(이황)은 긍정, 을(이이)은 부정하는 질문을 고르는 것입니다.
ㄷ. 측은‧수오‧사양‧시비의 감정은 이(理)의 작용으로 생기는가?
정(情:4단 7정)을 ‘리의 용(작용)’으로 보는 것은 이미 주자가 한 말이기 때문에 이황과 이이 모두 동의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이이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溫和慈愛者 情也 所以溫和慈愛者 理也 是乃仁也…理之在溫和慈愛者 乃理之用也…理之發用而在於溫和慈愛者 則所當然者也(온화 자애한 것은 정情이고, 온화 자애한 소이는 리이니, 이것이 바로 仁이다. … 리가 온화 자애[情] 속에 있는 것은 리의 용(用)이지, 온화 자애가 곧 리라는 것이 아니다. 리가 혼연하여 이름 할 수 없는 것은 그러한 까닭이며, 리가 발용되어 온화 자애[情] 속에 있는 것은 마땅히 그러한 것이다.)(“栗谷全書”, 券12, ‘答安應休’)
그러므로 문제된 저 선지에 대해 이황뿐만 아니라 이이도 동의하게 됩니다. ‘온화 자애’는 사단이 아니지 않느냐고 할지 모르지만, ‘온화 자애’도 당연히 사단입니다. ‘리의 작용[用]’으로 온화 자애 같은 감정(사단)이 생겼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당시에 평가원에서는 이 선지에 대해 이황은 긍정하지만, 이이는 부정한다고 봐서 정답으로 발표했습니다. 이이는 ‘리의 작용[理之用]’에 대해 언급하지 않은 줄 알았기 때문에 정답을 그렇게 발표한 겁니다. 믿기지 않겠지만, 현재 윤리교육과의 학문 수준이 이 정도입니다.
그런데 당시만 해도 저는, 평가원 윤리 문제의 오류 사태를 해결하기 위한 정의의 횃불을 들기 전이었기 때문에 이 선지의 문제점을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관심을 갖지 않았다는 뜻입니다(이 선지의 문제점을 나중에 인지하게 됐습니다.). 이 선지가 아무 문제 제기 없이 지나갔기 때문에, 학문적 역량이 부족한 윤리교육과 사람들(여기에는 윤리교육과 출신은 아니지만 학원가에서 윤리를 가르치고 있는 인강강사들도 포함됩니다.)은 ‘리의 작용[理之用]’은 오직 이황만 얘기했는 줄 알게 됐고 그런 잘못된 지식 상태로 현재까지 오게 된 겁니다. 기가 막힌 현실입니다.
이번에 문제된 선지도, 평가원 출제자들, 검토자들은 물론이고, 윤리교육과와 관계된 모든 사람들(오직 홀로, 저만 예외입니다.)이 ‘리의 작용[理之用]’은 오직 이황만 얘기한 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 의심 없이 제시한 거예요.
이 선지가 오류라는 글을 올리자, 아니나 다를까, 예전에도 늘 그래 왔듯이, 물타기를 위해 동원된 사람들이 갑자기 툭 튀어 나옵니다. 두 사람입니다. 이 사람들이 뭐라고 하는지 들어봅시다.
첫 번째 갑툭튀 A씨 글 :
[이의게시판에 들어와서 내용을 보면 참 열심히 공부하시는 윤리 선생님들이 많다는 것에 뿌듯함을 느낍니다. 이런 노력들과 공부 속에 한국 윤리가 더욱 발전하기를 기대해봅니다^^ 덕분에 많이 배웁니다.
1. 이는 작용이 없으며 만물에 두루 갖추어져 있는가?에 대해 이이가 긍정의 대답을 한다고 생각합니다. 근거는 “서울대학교 이이[율곡전서]에 pp.66-67에 보면 이이가 이황의 ‘이가 움직인다’[理動]이의 작용(用)에 반박하면서 이황이 말하는 이의 작용이란 이가 움직인다는 의미가 아니라 ‘만 가지로 다른(萬殊)’가 이의 작용으로 만물에 두루 갖추어져 있다는 것으로 이는 움직이지 않는다는 반박할 때 이황이 쓴 이의 작용(用)을 끌어들여 이는 움직이지 않는다라는 자신의 주장을 강조하기 위해 쓴 것입니다. 상대방의 용어를 반박하기 위해 끌어들여온 개념을 이이가 주장한 이론이라고 하는 것은 긴 문장의 맥락을 무시하고 한 문장만을 들어낸 주장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이가 '이'에 대해 주장하는 것은 이렇게 요약할 수 있습니다. ‘이의 작용은 없다. 굳이 이황의 말을 빌어온다면 만수(萬殊)의 리 즉, 만물에 두루 갖추어져 있는 것으로 이황이 이를 이의 용으로 오해한 것이다.’ 이와 관련된 원문과 해석을 올립니다. 긴 내용이라 죄송합니다.]
이분은 내가 전체 맥락을 무시하고 이이 주장의 일부만을 인용했다고 하는데, 그거야 이이가 ‘리의 작용’을 얘기했다는 사실만 증거로 제시하면 되니까 전체 문장을 다 인용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죠. 이분 주장에 의하면 이이가 ‘리의 작용’을 얘기한 것은 이황이 ‘리의 작용’을 얘기했기 때문에 이이가 이황의 용어[리의 작용]를 사용하여 반박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저는 이이가 ‘리의 작용’을 얘기한 것은 이황이 ‘리의 작용’을 언급했기 때문이 아니라, 주희가 ‘리의 작용’을 얘기했기 때문에 주자학의 충실한 계승자로서 당연히 그것을 언급한 것이라는 증거를 부연설명을 통해 제시했습니다. 이이는 이황이 주희가 얘기한 ‘리의 작용’ 개념을 자신의 ‘리발’을 정당화하기 위해 사용하는 것의 문제점도 지적하지만, 이황과 무관하게 주희가 얘기한 ‘리의 작용[理之用]’ 개념을 다양한 예를 들어 설명합니다. 이것은 이전의 부연설명을 통해 제가 충분히 증거를 제시했습니다.
이어지는 A씨의 글 :
[(e1.3.2.1) 이황은 ‘이는 움직인다’(理動)고 주장하면서 이것이 ‘이의 작용(用)’이라고 말한다. 그는 이에 운동 능력을 부여함으로써, 이가 상징하는 도덕적 이념이 스스로 ‘움직여’ 현실 세계에 개입함으로써 현실을 도덕적인 공간으로 바꾸어 놓기를 희구한다. 이는 현상에 드러나는 이의 자기 전개 양상을 휘황한 인드라망의 이미지로 포착하는 이일분수설의 발상을 적극적으로 밀고나간 것이다. 이이의 이통기국설은 이 같은 이황의 이동설에 대한 강력한 반명제가 된다. 이와 기, 본체와 현상을 엄격하게 이원적으로 분리하는 이통기국의 구도에서는, ‘이가 움직여’ 현실에 개입하는 것이 근본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e1.3.2.2) 이 점에서 이이의 이통기국설은, 이념에 대한 현실의 대등한 고려를 청하는 것으로서, 이황의 세계관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훨씬 강한 현실 지향적 성격을 갖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같은 맥락은 이이가 제자인 안천서(安天瑞)의 질문에 답한 글에 잘 나타난다. 안천서는 이황의 이동설과 비슷하게, 이에 움직임이 있다는 견해를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이이는 안천서를 이통기국설의 견지에서 반박한다.]
A씨가 어떤 책에서 인용했다는 위 글을 잘 보세요. 이 책에서 저자는, 이이의 이통기국설은 이황의 ‘리발설’을 반박하기 위한 것이라고 하고 있지, ‘리의 작용[理之用]’을 이이가 부정했다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A씨는 과연 인용된 위 글의 취지를 몰라서 마치 이 책의 저자가 이이가 ‘이의 작용’ 개념을 부정했다고 말한 것처럼 쇼를 한 것일까요? 모르지 않았을 겁니다. 그래도 평가원 윤리 문제의 오류 지적을 물타기 하기 위해 등장한 사람인데 그 정도로 바보는 아닐 거라고 믿고 싶습니다. 알았는데도 왜 저랬을까요? 어차피 물타기가 목적이니까, 팩트는 어찌 됐건 상관이 없었던 겁니다. 그래서 의도적으로 아주 길게 인용하고 있죠. 누가 저렇게 길게 인용된 글을 하나하나 읽겠습니까? 저도 안 읽었다가, 이 글을 쓰기 위해 처음으로 읽었습니다. 그러니 길어서도 안 읽고, 몰라서도 안 읽는 사람들은 이이가 ‘리의 작용’을 언급했는지 여부가 ‘해석의 문제’인 것으로 오해할 겁니다. 그렇게 오해하면 A씨와 평가원은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는 것입니다. 더욱이 이들에게는 강력한 지지자들이 있습니다. 바로 "실력 없는" 인강강사들입니다. 이들 역시 학생들에게 ‘리의 작용’은 오직 이황의 주장일 뿐이라고 가르쳤을 것이기 때문에, 이것이 오류로 드러나면 큰일 나는 거죠. 이 사람들은 갖은 수법을 동원해서 어떻게든 문제된 선지가 오류가 아니라거나 최소한 논란의 여지가 있는 것으로 몰아갈 것입니다.
이들 "실력 없는" 인강강사들은 무엇이 오류인지 모르고 가르치는 자들입니다. 나중에 오류라는 사실이 드러나면 ‘평가원 입장대로’ 가르치느라고 그랬다고 변명할 사람들입니다. 만일 처음부터 오류라는 것을 알았다면, 당연히 "“이것은 오류이지만, 평가원 입장대로 해야 한다”"고 말을 했어야 합니다. 처음부터 오류라는 사실을 알았는데도 그 사실을 얘기하지 않고 강의한다는 게, 있을 수 있나요? 나는 2년 전 정의의 횃불을 들었을 때, 평가원과 "실력 없는" 인강강사들이 이런 식으로 이해관계가 일치할 수도 있다는 것을 꿈에라도 몰랐습니다.
A씨는 더 길게 글을 인용하고 있지만, 무의미한 글이기 때문에 더 이상 소개하지 않겠습니다.
제가 A씨를 넌지시 훈계하는 글을 올리자, 이번에는 두 번째 갑툭튀 B가 등장합니다. 갑툭튀 B는 제가 올린 이이에 관한 글과 갑툭튀 A씨의 글을 그대로 복붙하고는 말미에 다음 말만 덧붙여 댑니다.
“결국 윗글은 이이가 주자가 이의 용을 말한 것은 이의 독자적 작용을 말한 것이 아니라...”
그러니까 갑툭튀 B의 주장은, 이이가 ‘리의 용[작용]’을 말하기는 했지만 이것은 ‘리의 독자적 작용’을 말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마도 이황은 리의 독자적 작용을 말한 것이지만 이이는 그렇지 않으니 문제된 선지는 오류가 아니라고 말하는 듯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독자적 작용’은 또 뭘 말하는 것일까요? 문제된 선지를 다시 써 봅시다.
ㄴ. 이(理)는 작용이 없으며 만물에 두루 갖추어져 있는가?
여기서는 ‘리의 작용[用]’이 있는지 없는지에 대해서만 묻고 있을 뿐, 리가 독자적 작용을 하는지 어떤지에 대해서는 묻고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왜 느닷없이 ‘독자적 작용’ 타령일까요? B는 이것을 몰랐을까요? 알았다고 믿고 싶습니다. 그런데 갑툭튀 A처럼, 어차피 팩트는 애초에 관심이 없고 오직 물타기만이 목적이기 때문에 그냥 아무 말이나 내뱉는 겁니다. 더욱이 ‘독자적 작용’이라는, 선지에서는 묻고 있지도 않은 그 용어에 대해서는, 개념이 무엇인지 먼저 설명되어야 합니다. 이황은 리의 ‘독자적 작용’이라는 것을 주장한 것일까요? 다양한 해석이 있을 수 있습니다. 사실 리의 ‘독자적 작용’이라는 개념은 존재하지도 않습니다. 이황이 ‘리발기수’를 얘기했는데, 이것은 리의 독자적 작용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니까요. 그런데 여기서 이것을 따질 이유가 전혀 없죠. 선지에서 그것을 묻고 있지도 않으니까요. 이렇게 선지에서 묻고 있지도 않은 개념을 들고 나와서 아주 길게 글을 씁니다(그것도 내가 쓴 글을 그대로 복붙해서 말입니다.). 어차피 그런 글을 누가 읽겠어요? 그리고 읽어 주길 원하지도 않을 겁니다. 읽히는 게 목적이 아니라, 논란이 있는 것처럼 몰아가는 게 목적일 뿐이니까요.
이런 짓 좀 하지 맙시다. 물타기를 하려면, 좀 체급이 되는 사람을 등판시킵시다. 물론 체급이 되는 누가 이런 더러운 물타기 작업에 동원되겠습니까? 학문적 양심상 절대로 그런 짓은 못하리라고 봅니다. 아무리 평가원과 관계된 이권에 눈이 멀더라도 말입니다.
첫댓글 간단하게 이이가 리지용(理之用)을 부정하는 글을 가져오면 될 터인데 하나같이 그러지를 못하고 있네요. 물론 그런 글이 없지만요. 물론 출제자가 왜 저렇게 출제했는지는 이해하지만... 큰 실수를 했네요. 이것을 어떻게 평가원이 대처할지 궁금합니다. 이황과 달리 이이는 이의 발, 리의 운동성을 부정하기에(저도 이황이 말한 이의 발이 운동성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대학때 은사님에게 호되게 배운 부분이라서 ㅎㅎ) 선지에는 '발'이라고 표현하기에는 너무 직접적이라 비슷하다고 생각한 용어인 작용을 쓴 것 같은데... 너무 안일했네요...
정말이요? 이황이 말한 리의 '발'이 운동성을 뜻하지 않는다는 건 저 혼자만의 해석인 줄 알았는데요? 물론 그런 해석을 하는 과정에서 이황 이론에 대한 나름대로의 분석이 선행했습니다만. 그분이 누군지 궁금하네요.
@힉스 대화 내용은 명확하게 기억이 안나기에 어줍잖게 제가 기억한 내용을 올리면 은사님에게 민폐가 될 듯하여 자세하게는 못올리겠고... 은사님께서 이황이 사단이 리발이라고 하면 따라올 공격들(비판들)을 몰랐을리가 없고 인간의 순선함을 위해 의도적으로 그렇게 표현한 거라고 말하시더군요. 그리고 이이가 이황을 오해하고 있다고 말씀하셨구요. / 기대승과의 편지내용을 보면 이황이 기밖에 리가 있는게 아니고 리밖에 기가 있는게 아니라고 말한걸 보면 처음부터 끝까지 이황은 리의 운동성을 주장하지 않았다는 걸 파악할 수 있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합니다.
@플라톤 이황의 이의 발함과 기의 발함이 운동성이나 작용성이 아닐 수 있군요 ...
그렇다면 지금까지 수능 문제에서 이의 운동성이란 표현을 사용한 것에 대한 검토가 있어야할 것 같군요^^;;
@플라톤 은사님이라는 분하고 저하고 유사한 결론을 얻은 것 같네요. "인간의 순선함을 위해 의도적으로 그렇게 표현한 것"이라는 부분은 오늘날 한국 주자학자들 모두 그렇게 해석하는 것 같습니다. 저는 그것도 확신을 하지 않는 편이고요. 그러니까 두 가지, 즉 '이황이 리발이라고 하면 그것에 대한 비판을 몰랐을 리 없다(리발이라고 할 때의 문제점을 몰랐을 리 없다)'는 부분하고, '이이가 이황을 오해하고 있다'는 부분이 저하고 같은 결론입니다.
전자의 경우, 저는 아이들에게 그렇게 말하죠. "이황이 바보가 아니다." 후자의 경우 저는 그렇게 말합니다. "양자 사이에 개념에 대한 공유가 안 되어 있다" 그런데 이이가 이황을 비판할 시점에
@플라톤 이황은 이미 죽었기 때문에 양자 사이에 개념에 대한 합의가 안 되어 있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이이가 이황을 오해한 것이 됩니다.
@힉스 그런데 이황은 기대승에게 이발을 설명할 때 상당히 자신감을 가지고 설명하는 듯 했습니다 특히 주자의 '사단이발 칠정기발'을 발견한 뒤에는 더 확신에 찼었구요
@힉스 그리고 이이는 이황의 이발을 비판했고 정약용도 처음 정조의 질문에 대해선 이황의 이발은 틀렸고 이이의 기발만이 옳다고 했지만 이후 이황의 이발이 지닌 의미를 설명하며 이황의 입장에선 이발도 긍정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이충 맞아요. 그렇지 않아도 방금 평가원에 글 올렸습니다. 이보람이라는 사람이 자꾸 헛소리를 해서...여기에도 그 글 올리겠습니다.
@힉스 오늘 책 이것저것 뒤지다가 이때 생각이 나서 댓글 달아 놓습니다.
우선 퇴계의 리발설이 리의 운동성 얘기가 아니라는 해석은, 한자경의 『한국철학의 맥』 207쪽 각주 내용에 관련 논의들이 정리되어 있습니다. 거기 소개된 것들 중 문석윤의 「퇴계에서 이발과 이동, 이도의 의미에 대하여」라는 논문이 대표적인 연구물인 듯합니다.
그리고 김형찬의 「내성외왕을 향한 두 가지 길」이라는 논문에서도 퇴계의 '리발'이 말 그대로의 운동성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는 지적이 나오네요. 이 입장이 최근의 저서인 『율곡이 묻고 퇴계가 답하다』에도 정리되어 있고요(111쪽 전후 등).
정약용도 '이발기발변2'로 기억하는데 이이와 이황의 개념이 다른 것으로 설명하더군요...그래서 이황의 개념에서는 이황도 일리가 있고 이이의 개념에서는 이이의 주장도 일리가 있다구요
이황과 논쟁한 기대승도 사단이 이발이라는 이황의 주장은 비판하지 않고 동의했습니다
오히려 칠정이 기발이라는 이황의 주장을 비판하며 칠정 역시 이발임을 주장했습니다
이로 보건대 이황 당시 주자학자들 사이에선 사단이 이발이라는 견해도 어느 정도 인정이 된 것 같습니다
@이충 그 이유는 주자가 사단을 이발이라고 주장한 것에 상당 부분 근거하는 것으로 판단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