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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년 다해 9월19일 한가위
[청주] 만남의 의미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제1독서 : 요엘 2, 22 -24. 26ㄱㄴㄷ
† 제2독서 : 묵시 14, 13 - 16
† 복음 : 루카 12, 15 - 21
오늘 전례
오늘은 우리 민족의 대명절 한가위입니다. 조상에게 햇곡식과 햇과일을
바치는 전통을 이어받아, 주님께서 지금까지 우리에게 베푸신 것들을
주님께 도로 바치도록 합시다. 더 나아가, 밤하늘에 떠 있는 둥근달처럼
우리도 주님의 사랑을 더욱 환히 비추는 사람이 될 것을 다짐합시다.
★ 주님께서는 요엘 예언자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님의 날’이
왔을 때 얼마나 큰 축복을 주시는지 알려 주신다. 그날에는 주님의 은혜로
풍성한 곡식과 과일을 맺으며 온갖 풍요를 누리게 된다(제1독서).
★ 파트모스의 요한은 마지막 날에 관한 환시를 본다. 그날에는 주님께서
땅의 곡식을 수확하시는데, 이는 의인의 구원과 악인의 심판을 상징하는
것이다(제2독서).
★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탐욕을 경계하라고 이르시며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말씀하신다. 부자는 많은 소출을 거두고 난 뒤 그것을
모아 두며 먹고 마실 생각에 기뻐한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의 재산도,
그의 생명도 모두 당신의 것이라고 밝히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즐거운 명절 한가위입니다. 그러나 오늘이 달갑지 않은 사람들도 적지
않습니다. 만나는 사람들에게서 수없이 되풀이되는 질문들 때문입니다.
“대학은 어디 갈 거야?” “연봉은 얼마나 되니? “결혼은 언제 할 거니?”
더 나아가 다른 사람과 비교하기도 합니다. “○○는 어느 학교에 들어갔어.”
“○○네는 이번에 고급 아파트 장만했더구먼.” “○○는 이번에 부장으로
승진했다고 하더라.”
이렇게 비교하고 또 자랑을 늘어놓는 가운데 상대적으로 ‘너는 잘 사는
게 아니야. 분발해야지.’ 하는 식으로 무시하는 것 같아 속상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잘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이에 대하여 그리스도인은
사회의 기준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알아들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드셨습니다. 그
부자는 부지런히 살았고, 땅에서 소출도 많이 거두었습니다. 그리고 이를
잘 보관해 두고는 먹고 즐길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주님께서는
이 사람을 가리켜 어리석다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소출을 많이 거두어
무언가를 얻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의 생명은 이미 다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생명이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는 사실을 강조하시고자
이러한 비유를 드셨습니다. 사람의 생명은 하느님께 달려 있습니다. 그러니
그 생명이 풍요로워지려면 생명의 주인이신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그 뜻이란 서로 사랑하고 나누는 것입니다.
결국 복음에서 말하는 ‘잘 산다는 것’은, 땅의 소출이 아니라 사랑의 소출을
많이 거두는 것입니다.
- 매일 미사 -
◈ [청주] 만남의 의미 / 반영억라파엘 감곡매괴 성모성당 신부님
2013년 다해 9월19일 한가위
<사람의 생명은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
+ 루카 12,15-21
추석 명절미사
추석명절을 맞이하여 기쁨과 평화가 충만한 날 되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무엇보다도 감사하는 날입니다. 하느님과 조상님들을 기억하고
베풀어 주신 은혜에 감사하는 날입니다. 부모와 이웃에 감사하고 그 감사의
마음을 표현하는 데 명절의 의미가 있습니다. 특별히 우리보다 앞서 세상을
떠난 이들을 기억합니다. 천상에서 영원한 삶을 누리시길 기도합니다.
그리고 그분을 만납니다. 하느님을 만나고 그 안에서 부모, 형제, 친척,
이웃을 만나고 서로의 마음을 주고 받으며 사랑의 정을 키우는 날입니다.
아무쪼록 지금 내가 여기에 있음을 감사하고 기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처지와 환경이 어떠하든 주님과 함께라면 모든 것을 얻은 것이니 만큼
찬미의 노래를 부르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우리생명의 근원이신 부모의 은혜에 대한 보은에 남다른 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조상들은 부모에 대한 효의 실천은 세가지
양상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첫째가 부모로부터 받은 신체를 잘 보전하여
후손에게 길이 전해야 한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벼슬길에 올라서 부모의
이름을 드높여 부모에게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모를 정성껏
봉양하고 공경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부모님을 정성껏 봉양하고 효도함은
돌아가신 후에도 제사를 통해서 계속되었습니다.
그것은 죽음으로써 생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어떤 형태로든지 생이
계속됨을 믿었고 살아계실 때와 같이 가족공동체와 계속적인 유대 관계를
유지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제사는 죽은 이들을
계속 공경함으로써 효도를 이어가는 방법이며 결국 제사의 의의는 은혜를
갚음에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부모에게 효도하라”는 하느님의 계명과
아무 마찰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부모님이나 조상을 공경하는
마음으로 절을 하고 예를 드리는 것은 신앙에 위배되지 않습니다. 이는
죄나 우상숭배가 아닙니다.
김수환 추기경님께서 ‘성균관’에서 명예학위를 받게 되셨는데 매스컴은
추기경님께서 과연 성균관의 예법에 따라 절을 할 것인가? 에 관심을
두었습니다. 그런데 추기경님께서는 서슴없이 절을 하셨습니다. 공경하는
마음으로 예를 갖추었다면 그게 우상숭배가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 천주교는 제사문제로 박해를 받았습니다. 조상공경에 대한
이해부족으로 우상숭배로 판단하였기 때문에 조상제사를 철폐하였고
이는 부모의 은덕을 망각하는 인륜을 저버린 짐승만도 못한 무리라고
하여 천주교신자는 죽어야 된다는 결론에 이르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1939년 12월8일에 이르러서야 교황청은 “조상의 제사는 우상숭배가
아닌 조상에게 효성을 표시하는 미풍양속이며 민족의 훌륭한 유산이므로
수용해야 하고 토착화해야 한다.”는 평가를 내리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문화의 차이에서 오는 아픔이 컸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제사를 지냄에 있어서 유의할 점이 있습니다. 첫째로
신주 문제입니다. 신주는 밤나무로 만들었는데 구멍이 뚫려있습니다.
그 신주에는 조상의 혼이 마물러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죽음은
혼백(넋)의 갈림길이라고 믿었고, 이 혼이 의지할 곳이 없어서 떠돌아
다니는데 떠돌아 다니게 그냥 두는 것은 자식의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 혼이 머무르도록 하기 위해서 안식처를 만들어
주었는데 이것이 바로 신주의 형태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리고 제사 때는 바로 그 신주를 모셨습니다. 신주를 모신 것은 돌아가신
이를 섬기기 위해서는 볼 수 있는 상이 필요했고 신주는 바로 돌아가신
이의 상이었습니다. 그것을 통해 돌아가신 이를 만나는 하나의 장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세상을 떠났을 때는 그 영혼이 돌아다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앞으로 가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대로 “사람은 단 한번 죽게
마련이고 그 뒤에는 심판을 받게 됩니다.”(히브9,27) 그리하여 천국이나
지옥, 아니면 연옥에 가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따라서
죽은 이의 혼이 떠돌아 다닌다는 것은 우리의 믿음과 근본적으로
대치됩니다. 만약 죽은이의 혼이 떠돌아다닌다면 세상은 난리판이
될 것입니다. 그 말은 곧 지옥으로부터의 탈출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이런 일이 가능하다면 하느님은 더 이상 하느님이 아니십니다. 그렇게
허술한 하느님을 누가 하느님으로 인정할 수 있겠습니까? 살아있는
사람이나 죽은 사람이나 다 하느님의 권능 안에 속해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주를 모시는 것은 잘못입니다. 이번은 제대 앞에 기억하는
분들의 이름을 달지 않았습니다. 바로 신주를 연상하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제사날에 세상을 떠난 사람이 음식을 잡수시러 온다는
사상과 조상들을 잘 공경하면 조상이 복을 준다는 사상은 바꿔야
합니다. 만약 여러분이 돌아가신 분들이 음식을 잡수러 오시기 때문에
음식을 차렸다면 신앙과 위배되는 것입니다.
돌아가신 분은 음식을 잡숫지도 않고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생전에
좋아하셨던 음식이나 못해드린 음식을 차려 대접함으로써 부모를
공경하는 마음을 표현하고 기억하는 것이지 조상이 와서 잡숫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그리고 복을 주고 안 주고는 조상이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손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혼을 부르고 음식을 차리고 거기에 복을 기원하고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가 그분들이 천상에 들지
않았다면 천상에 오르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물론 천상에 계시다면
그분들이 우리를 위해 전구해 주심을 믿습니다. 제사의 핵심은 효요,
웃어른을 공경하는 마음을 표현하는 것이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우리 천주교회의 전통적인 제사는 무엇입니까? 미사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하느님 아버지께 온전히 바치신 십자가의
죽음을 제사로 받아들이셨습니다. 그리고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하시며 이 제사가 계속 이어지기를 명하셨습니다.
명절에는 특별히 세상을 떠난 이들을 기억하며 아직 천상의 영복을
누리지 못하는 이들, 연옥에 계시는 분이 있다면 우리의 기도와
희생으로 하루빨리 하느님나라에 갈 수 있게 기도해야 합니다.
위령미사는 바로 교회공동체가 한마음으로 세상을 떠난분들을
위해 자비를 간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주 미사봉헌을 하여 효를 실천하시기 바랍니다. 아니면
가족들이 한 자리에 모여 고유한 미풍양속인 제사를 봉헌하며 세상을
떠난 조상이나 부모, 형제를 위해 기도하는 시간을 꼭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합니다.
참고로 불교의 49재를 말씀 드립니다. 49재는 한마디로 사람이 죽은
뒤 49일째에 치르는 불교식 제사의례, 즉 불공입니다. 석가모니께서는
25세에 출가하여 6년의 고행을 한 후 득도하여 48년간 설법을 하셨고
49년째에 세상나이 80세에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그래서 49라는
숫자가 중요하고 또 불교에서는 윤회설을 믿는데 사람이 죽은 날로부터
49재를 치르는 날 사이의 기간을 ‘중유’라고 하여 이 기간에 생전의
업에 따라서 다음세계가 결정된다고 봅니다. 즉 모든 중생은 천상,
인간, 축생, 아수라(싸우다), 아귀(다툼),지옥의 여섯 세계를 윤회하며
이 가운데 아수라, 아귀, 지옥을 ‘삼악도’라 하여 고통과 지옥으로
가득찬 세계로 보고 있습니다. 바로 49재는 죽은 자가 삼악도에 들어가지
않고 보다 나은 세상에 태어나기를 비는 불공입니다. 49일째 모든 것이
마지막으로 결정되기 때문에 그날을 중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49재 미사를 봉헌해 달라는 말은 하지 않으시기 바랍니다.
명절귀신
명절 때 쫄쫄 굶은 조상 귀신들이 모여
서로 신세를 한탄했다.
씩씩거리며 한 조상귀신이 말했다.
“설날 제사 음식 먹으러 후손 집에 가보니,
아, 글쎄 이 녀석들이 교통체증 때문에
처갓집에 갈 때 차 막힌다고,
새벽에 벌써 지들끼리 편한 시간에
차례를 지내버렸지 뭔가?
가보니 설거지도 끝나고 다 가버리고 없었어,”
두 번째 분통터진 조상귀신이 말했다.
“자넨 그래도 나은 편이여,
나는 후손 집에 가보니 집이 텅 비었더라구.
알고보니 해외여행 가서 거기서 제사를 지냈다는 거야.
거길 내가 어떻게 알고 찾아가누?”
아까부터 찡그리고 앉은 다른 조상귀신,
"상은 잘 받았는데 택배로 온 음식이 죄다 상해서
그냥 물만 한 그릇 먹고 왔어."
뿔난 또 다른 귀신,
"나쁜 놈들!
호텔에서 지낸다기에 거기까지 따라 갔더니,
전부 프라스틱 음식으로 차려서 이빨만 다치고 왔네."
열 받은 다른 조상귀신이 힘없이 말했다.
“난 말야. 아예 후손 집에 가지도 않았어.
후손들이 인터넷인가 뭔가로 제사를 지낸다고 해서,
나도 힘들게 후손 집에 갈 필요없이
편하게 근처 PC방으로 갔었지.”
“그래, 인터넷으로라도 차례상을 받았나?”
“먼저 카페에 회원가입을 해야 된다잖아.
귀신이 어떻게 회원가입을 하노?
귀신이라고 가입을 시켜 줘야지!
에이 망할 놈들!”ㅎㅎㅎ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 [인천] 하늘에 재산을 쌓아 둘수 있도록
2013년 다해 9월19일 한가위
우리 민족의 가장 큰 명절인 한가위입니다. 농경민족인 우리 조상님들은
봄부터 여름까지 곡식과 과일을 열심히 가꾸고 이제 가을이 되어 수확하게
됩니다. 따라서 이렇게 수확하게 될 때가 얼마나 즐겁고 마음이
풍족했겠습니까? 더군다나 여름처럼 덥지도 않고 겨울처럼 춥지도
않으니 살기에 가장 알맞은 계절이라고 할 수 있었지요. 그래서 속담에도
‘더도 말도 덜도 말고 한가위만큼만 되어라.’라는 말이 생겼던 것입니다.
이렇게 즐겁고 풍요로운 날, 우리 선조들은 그저 자기만을 만족하는
시간을 만들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쉬는 날이라고 편안한 하루를
보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조상님을 향한 감사의
마음을 전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추석날 아침 일찍 일어나 첫
번째로 한 일이 조상님을 기억하면서 차례를 지내는 일이었지요. 그리고
차례가 끝나면 차례에 올렸던 음식으로 아침식사를 하고 조상님 산소에
가서 감사의 마음을 담아 성묘를 했습니다.
한가위는 국가 공휴일로 지정된 단순히 편하게 쉬는 날이 아닙니다. 긴
휴일이라면서 여행을 다녀오는 날도 아닙니다. 그보다는 감사의 마음을
간직하는 날이며, 그 감사의 마음으로 가족들과 함께 더욱 더 뜻 깊은
시간을 갖는 날인 것입니다. 특히 조상님뿐 아니라 사랑이신 주님께
대해서도 감사의 마음을 간직해야 합니다.
전에 알고 있던 청년을 만났을 때, “요즘 어때?”라는 질문을 던지곤 합니다.
그런데 이 질문에 대해서 “아주 좋아요. 정말로 즐겁습니다.”라고 긍정적으로
말하는 청년이 있는 반면에, “사는 게 뭐 그렇지요. 지옥 같아요.”라면서
부정적으로 말하는 청년이 있습니다. 제가 객관적으로 볼 때, 둘의 환경
차이는 그렇게 많지 않은데도 말이지요. 그렇다면 누가 더 잘 살까요?
긍정적으로 말하는 청년이 당연히 행복하게 잘 삽니다. 이들을 보며 이런
생각이 듭니다. 행복은 환경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감사하는 태도에게
결정되는 것이라고 말이지요.
오늘 한가위를 보내면서 지금의 환경과 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었는지를 생각해보셨으면 합니다. 혹시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서 내
이웃과 조상님과 더 나아가 주님을 향해서 온갖 불평불만을 던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이제 조금만 더 긍정적으로 또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이 바로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하늘나라에 재화를 쌓는 사람입니다.
지금 순간의 만족을 위해 욕심과 이기심을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재산을 쌓아둘 수 있도록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특히 조상님과 주님께서
보여주신 좋은 모범을 기억하면서 먼 훗날 주님 앞에서 어떤 모습으로
나아가야 할지를 다시금 생각해봐야 할 것입니다.
만족을 찾아 헤매지 말라. 그보다는 항상 모든 일에서 만족을 발견하려는
마음의 자세가 중요하다.(존 러스킨)
백석 천주교 하늘의 묘원에서 한가위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추석 명절에 지킬 수칙
어제 인터넷을 검색하다가 ‘추석 고향에서 지킬 수칙’이라는 제목의
글을 보게 되었습니다. 글쎄요... 꼭 맞다고는 할 수 없지만, 참조는
될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대로 올려 봅니다. 한번 지켜보도록 하세요.
즐겁고 기쁜 명절이 되지 않을까요?
1. 절대 싸우지 않기
2. 감당 못할 정도로 먹지 않기
3. 부모님 섭섭하게 하지 않기
4. 한 사람만 일하게 하지 않기
5. 과속, 졸음운전 하지 않기
6. 기분 나쁜 질문 하지 않기(예; 너 여태 시집(장가) 못 갔니?/
너 왜 갑자기 늙었니?)
7. 고스톱 안치면 좋고, 친다면 판돈 안올리기.
- 인천 교구 성소 국장 조명연 마테오 신부 -
◈ [기타] 행복한 한가위 되세요.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행복한 한가위 되세요. 고맙습니다.'
2013년 다해 9월19일 한가위 목요일 복음묵상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 (루카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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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한가위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
일년 중 가장 크고 밝은 모습을 한 보름달을 바라보며, 오랜 역사
동안 이어져 온 희망을 담은 민속 기도이다.
어떤 희망이 담겨있었을까?
먹을 것 귀하던 시절 어린아이들은 온 동네가 잔치 분위기에 맛난
음식 먹을 수 있고 동무들과 쥐불놀이를 하며 가을걷이 끝난 논밭을
뛰어다니며 놀 수 있는 이런 날이 매일 계속 되었으면 하는 동심의
소망이 깃들여 있었으리라.
농민들과 어민들은 한 해 거두어들인 것에 대한 감사의 마음과 결실에
대한 자축의 마음,
그리고 다음 해에 대한 희망의 마음을 담고 있었으리라.
늙은 부모들은 제 살길 찾아 흩어져있던 자식들이 모인 기쁨에 마냥
기쁠 수밖에 없는 이런 날이 많아졌으면 하는 바람이었으리라.
이처럼 각기 다른 처지에서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휘영청
밝은 한가위 보름달을 머리 앞에 두고 빌었을 것이다.
우리는 무엇을 담은 기도를 드려야 할까?
둘.
완벽한 원을 만들고 환하게 비치는 달을 보며 생각한다.
그 보름달도 늘 그랬던 것처럼, 크기를 줄여가며 사라져 갈 것이다.
깜깜한 밤하늘만을 남긴 채 사라질 것이다.
그리고 다시 조금씩 크기를 만들어가며 둥근 달로 변해 간다.
문득 우리 인생과 참 많이 비슷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둥근 달을 우리 삶에 대한 만족의 시간이라고 생각해보자.
그리고 달이 그 모습을 보이지 않는 깜깜한 밤을 우리의 어둠의
시간이라고 하자. 꽉 찬 보름달만을 바라보는 것도 깜깜한 밤하늘만
바라보는 것도 어리석음이다. 보름달에 마냥 기뻐하고 어두운 밤에
마냥 슬퍼하는 것은 너무도 동물적인 반응이다.
달의 움직임을 이해하듯이 신앙은 삶 전체를 읽게 하는 힘이다.
꽉 찬 달은 기울어지다가 사라질 것이고, 다시 모양을 찾아 돌아올
것을 아는 평범한 지혜를 의식하게 한다.
삶의 어려움에 부딪쳤을 때 절망보다는 희망을 선택한다.
삶의 환희에 쌓여있을 때 교만보다는 감사와 타인의 어려움에 마음을
기울인다. 우리 모두 그러한 신앙을 가졌음을 기억해야 한다.
셋.
한가위는 가을걷이의 결과에 상관없이 하늘에 감사하고, 먼저 가신
어른들을 기억하고,
살아있는 자들이 희망을 갖고 결심을 다지고자 하는 삶의 지혜에서
만들어진 날이다. 이 세 가지 뜻이 이루어지는 오늘이기를 진심으로
청한다.
- 사이타마 교구 오타(太田)본당 주임
김 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 -
https://www.facebook.com/WithfatherPinetree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 [서울] 한가위
2013년 다해 9월19일
명동 교구청 마당에서 하늘을 보는데, 달이 무척 밝았습니다. 저
둥근 달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마음은 저 마다 다를 것입니다. 분명
둥근 달은 하나인데 그 달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저 마다 다른 의미로
생각할 것입니다. 제게는 새로운 둥근 달입니다. 용인에서 명동으로
자리를 옮겼기 때문입니다. 밝은 둥근 달입니다. 어머니도 건강해
지셨고, 모처럼 형님 가족들과 함께 지내는 추석이기 때문입니다.
멀리 외국에 나가 있는 분들에게 오늘 둥근 달은 그리움으로 다가
올 것입니다. 순간의 잘못으로 교도소에 있는 분들에게 오늘 둥근
달은 아쉬움과 후회의 모습을 보일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오늘 추석의
둥근 달은 어떤 모습으로 보이는지요?
달하면 떠오르는 글이 있습니다. ‘월인천강지곡’입니다. 불가에서는
달은 부처님을 상징하고, 강은 중생을 상징한다고 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하나이지만 모든 중생들의 마음에 비친다는 뜻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달은 예수님을 의미한다고 하겠습니다. 강은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신앙인들을 뜻한다고 하겠습니다. 우리들 모두의 마음에
예수님이 계시면 오늘 보이는 달이 희망의 달, 믿음의 달, 사랑의 달로
보일 것입니다.
‘황금의 제국’이라는 드라마가 끝났습니다. 분명 돈이 많고, 그래서
행복할 것 같은데 드라마에 나오는 부잣집 가족들은 행복해 보이지
않았습니다. 모두들 삶의 기준은 ‘돈’이었습니다. 돈 때문에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살아야 하고, 돈 때문에 고개를 숙여야 하고, 돈 때문에
원치 않는 행동을 해야 했습니다. 평범한 사람들은 만족할 것 같은
돈인데도, 그들에게는 더 높은 곳으로 가야하는 판돈 밖에는 되지
않았습니다. 분명 황금의 제국인데, 그곳에는 사랑도, 나눔도, 희생도,
기쁨도, 행복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하긴 그런 것들은 결코 돈으로 사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며칠 전에 ‘예비 신학생’들을 만났습니다. 2학기 장학금 지급을 하기
위해서 만났습니다. 100여 명의 학생들이 동성고등학교 예비신학생
반에서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한 학년에 30여명의 학생들이 사제가
되기 위해서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저는 예비 신학생과정을 거치지
않았습니다. 제가 신학교에 들어갈 때, 그런 제도가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중학생 때부터 신학교에 가려는 학생들, 사제가
되려는 학생들을 위해서 ‘예비 신학생’ 제도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신학생들과 수녀님 그리고 부제님들께 학생들을 위해서 봉사하고
있습니다. 전체 예비 신학생들은 1000여명이 됩니다. 그 중에서
신학교에 입학하는 친구들은 대략 30여명 됩니다. 장학금을 드리면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개구쟁이라도 좋습니다. 튼튼하게, 건강하게
지내시기 바랍니다.’ 어릴 때 들었던 광고 문구였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황금의 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 공부를 하고, 취업을
하고, 결혼을 하고, 자녀를 낳고 살아갑니다. 분명 황금의 제국은
매력이 있습니다. 돈이 주는 힘과 보상은 아주 크기 때문입니다. 좋은
집, 멋진 차, 화려한 식탁을 마련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좋은
집으로만은 화목한 가정을 이룰 수는 없습니다. 멋진 차만으로는
어려운 이웃을 위한 봉사를 할 수 없습니다. 화려한 식탁으로만은
맛있는 식사를 할 수 없습니다. 거기에는 감사하는 마음, 고마워하는
마음, 나누려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예비 신학생들은 황금의 제국으로는 들어 갈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가는 곳은 황금으로는 얻을 수 없는, 명예로는 가질
수 없는, 권력으로는 뺏을 수 없는 나라입니다. 짧은 이 세상의 소풍을
마치고,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삶입니다. 예비 신학생들에게
오늘 추석의 둥근 달은 어떤 모습으로 보일까요?
저렇게 둥근 달처럼, 오늘 우리들 모두의 마음도 그렇게 넉넉했으면
좋겠습니다.
- 서울 대 교구 성소 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부유한 사람
2013년 다해 9월19일 한가위 미사
< 사람의 생명은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 >
복음 : 루카 12,15-21
< 부유한 사람 >
인도에서 선교하던 한 여 선교사가 몇 번이나 전도하려고 했던
힌두교 여인을 어느 날 아침 만났습니다. 그녀는 두 아들을 그녀의
팔에 안고 있었습니다. 하나는 아주 잘 생기고 똑똑하고 건강해
보였습니다. 그러나 좀 더 나이가 많아 보이는 아이는 침을 흘리고
몸을 떨고 있었습니다.
선교사는 힌두 여인에게 어디로 가느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저의 아이를 우리 신에게 제물로 드리기 위해 강으로 갑니다.”
그 여인은 선교사의 말을 듣지 않고 갈 길을 가버렸습니다.
어느 날 그 여인을 다시 만났을 때 그 여인은 한 명의 아이를
데리고 있었습니다. 역시 한 명의 아이를 제물로 바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여인과 함께 있는 아이는 병약한 아이였습니다. 선교사는
놀라며 물었습니다.
“그 건강한 아이를 바쳤단 말입니까?”
힌두 여인도 역시 놀란 듯 이렇게 대답합니다.
“당신의 종교에서는 그렇게 하는지 모르지만 우리 힌두교는 우리
신에게 가장 좋은 것을 바칩니다.”
성경에서 입타라는 판관이 나옵니다. 그는 무척 힘센 장사였지만,
이복형제들에게 따돌림을 받아 건달패 두목이 됩니다. 그를 구해
주신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그를 통해 암몬에게 박해를 당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고자 하신 것입니다. 자신을 써 주신 하느님께
감사하기에 자신도 만약 암몬과의 전투에서 승리하게 해 주시면
자신도 자신을 가장 처음 마중 나오는 사람을 제물로 바치겠다고
합니다. 그리고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오는 길에 자신을 가장 처음에
마중 나온 사람은 자신의 유일한 자녀인 딸이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하느님도 우리에게 은총만 주시기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은총의 대가를 원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은총의 대가는 자신의 가장 귀한 것을 바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죄를 지었습니다. 그리고 그 죄의 용서를 청했습니다.
하느님은 인간의 죄를 용서해 주십니다. 그리고 그 대가를
요구하십니다. 그러나 누구도 그 죄의 용서에 대한 대가를 지불하기를
원치 않습니다. 이에 하느님 스스로 인간이 되시어 십자가라는 제단에서
당신 자신을 제물로 바칩니다. 이에 용서가 완성된 것입니다.
모든 관계에서 기본적으로 제물이 요구됩니다. 어디에서 들은 건데
성탄 전 날 남자들이 여자들에게 선물을 사 주기 위해 받는 스트레스가
전쟁 때 싸우러 나가는 군인이 받는 스트레스와 비슷하다고 합니다.
돈은 없는데 상대는 만족시켜야 하기 때문에 그렇게 힘든 것입니다.
헤어지면 그만이지만 계속 만나려면 계속 제물을 바쳐야 하는
것입니다. 자꾸 피곤해 하고 아끼기 시작하면 상대도 사랑이
떨어졌다고 생각하며 조금씩 멀어지려 할 것입니다.
오늘은 한가위입니다. 저희 집도 어렸을 때 돈이 없어 라면만 먹어야
할 때에도 제삿날만 되면 상다리가 부러지게 제사상이 차려지는 것을
기억합니다. ‘이미 돌아가신 분들에게 그럴 필요까지 있나?’라는 생각이
들지만 아버지에겐 그 정도도 부족해 보였습니다. 그만큼 우리를
태어나게 해 준 것에 대해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이 풍부한
이 때 조상들에게 감사를 드림은 말로만이 아니라 우리의 정성 또한
바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과부의 헌금을 보고 매우 칭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성적으로 계산하여 당신께 감사함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당신도
당신 자신을 온전히 바치셨듯이 당신과 온전한 관계를 맺기를 원하는
우리들도 아끼며 제물을 바치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에 나오는 부자는 실제로는 부유했지만 하느님
앞에서는 한없이 가난한 사람이었습니다. 창고는 크게 넓히려고
하지만 제물은 바치기를 거부하는 구두쇠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하느님 앞에서 부유하지 못한 사람에겐 하느님도 똑같이
은총을 부어주시지 않고 거두겠다고 하십니다.
은총을 많이 받고 싶다면 매 순간 제물을 바쳐야합니다. 제물은
살아 있어서는 안 됩니다. 제단 위에서 불살라져야합니다. 이 제물은
실제로 우리 자신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당신을 따르려거든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당신 자신을 바치신 것만큼 큰 제물은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아버지 뜻’을 위해 당신 자신을 바치신 것입니다. 즉 아버지
뜻을 위해 내 자신의 뜻을 봉헌하는 것이 가장 큰 제물이고 하느님
앞에서 부유한 사람인 것입니다.
성녀 제르뚜르다에게 누가 와서 기도를 청했다고 합니다.
제르뚜르다는 수많은 기도들을 일일이 기억하지 못할 때도 있었는데
사람들은 성녀의 기도 때문에 은총을 받게 되었다고 감사를
드렸습니다. 성녀가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예수님, 제가 기도도 해 준 적이 없는데 어떻게 그런 일들이
일어났지요?”
예수님은 대답하셨습니다.
“네가 내 뜻을 따르기로 결심한 순간부터, 나도 네 뜻을 따르기로
결심했기 때문이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제물을 바치는 이에게 당신 제물인 은총을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우리가 드릴 가장 중요한 제물, 그것은 매 순간
내 뜻을 버리고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것입니다. 참으로 부유해지는
방법, 그것은 우리를 부유하게 하시는 하느님 앞에서 부유한 사람이
되는 것뿐입니다.
또 예수님은 부정한 제물로라도 친구를 사귀라고 하십니다. 이것
또한 사람들 앞에서 구두쇠가 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같이
풍요로운 날, 절대 하느님과 이웃들에게 가난한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부유한 사람이 됩시다.
오산 성당 홈페이지: http://cafe.daum.net/ca-osan
- 수원 교구 오산 성당 전삼용 요셉 신부 -
◈ [서울] 삶의 기(氣)
2013년 다해 9월19일 한가위
삶의 기(氣)
삶의 기(氣)를 하늘에서 돈이나 재물로 산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삶의 기(氣)로 세상에서 돈이나 재물을 위해 다 써버리면 적자입니다.
삶의 기(氣)를 잘 활용하여 하늘에 재물을 쌓아야 하는 데 말입니다.
썩지 않고 영원히 보존되는 재산만 하늘에 쌓을 수 있습니다.
그 재산은 무형의 재산이요 무변의 재산이며 줄지 않을 재산입니다.
이런 재산을 벌 수 있는 삶의 기(氣)를 세상탐욕에 다 써버리다니요.
“사람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주의하여라.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
(루카 12,15)”
-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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