ㅡ 조분순 칼국수
수원 권선동에 조분순 칼국수 라는 이름의 식당이 있는데...
80세가 넘은 할머니가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는 혼자서 쉬엄 쉬엄 칼국수를 밀어 팔아 손님도 띠엄 띠엄, 그러나 토요일과 일요일에는 아들 내외와 대학생 손자 손녀가 와서 도와 손님이 북적인다.
밀가루에 콩가루를 섞어 소금을 한줌 넣어 물을 붓고 반죽 기계에 넣으면 골고루 잘 섞이면서 얇게 밀어 서너번을 왕복, 곱게 두루말이로 나오게 한다.
이 두루말이 뭉치를 국수로 뽑아 간밤에 끓여 놓은 국물 가마솥에 넣고 애호박을 잘게 썰어 넣고 긴 국자로 휘저으며 끓인다.
국수를 그릇에 담고 김가루와 쑥갓을 고명으로 위에 얹어 쟁반에 내놓으면 평일에는 손님들이 들고가서 먹고 여자 손님들은 빈그릇을 씻어놓고 간다.
주말에는 손님이 밀려 할머니와 아들 내외와 손자 손녀 다섯명이 정신없이 일한다.
토요일 한바탕 점심손님이 끝날 즈음이면 용주사 신도회 무량심 회장이 차에 열무와 얼갈이 고추 들을 잔뜩 싣고 운전기사와 들어온다.
아들이 작은어머니 오셨느냐고 반기며 무량심의 손을 잡고 방으로 안내한다. 수원지방법원 판사인 아들은 토요일과 일요일에는 아무리 바쁜 일이 있어도 식당에 나와 앞치마를 두르고 머리에 수건을 동이고 어머니를 돕는다.
그러지 않아도 자꾸 손님이 느는데 법원 사람들까지 가족들을 데리고 와서 주말 점심때면 난리를 치른다. 어떤 때는 손자 손녀 대학생 친구들이 몰려와서 일을 도와주기도 한다.
1970년, 화재로 집을 잃은 조분순 모자가 팔달문옆 천막에 노숙을 하며 채소 좌판으로 연명할 때 용주사 신도 무량심이 권선동에 가게를 얻어주고 국수장사를 시켰고 아들 정현섭을 공부시켰다.
수원고 출신 정판사, 조할머니 국수집 아들 정현섭 판사의 소년 시절을 기억하는 사람이 많다. 학교에서 일찍 돌아와 어머니를 도와 국수를 팔고 밤이면 수원역과 시외버스터미널 주변을 돌며 찹쌀떡을 팔던 소년이다.
소년은 야간대학을 나와 어려운 시험에 합격해 어머니를 기뻐서 울게 만들었다. 정판사는 무량심을 작은어머니라고 부르며 극진히 모신다.
이제 그만 가게를 접고 쉬라고 정판사가 어머니께 말씀드리면 저 보살님이 저렇게 정정하게 내집에 와서 맛있게 먹고 가는데 어떻게 그만두느냐, 끝까지 할란다고 한다.
어떤 여자 손님이 칼국수를 끓이는 정판사를 보고 선비같이 귀골로 생긴 사람이 고생한다며 막일하는 사람 손이 어찌 그리 고우냐고 하자 제가 아이들이 많아 월급으로는 대지를 못합니다고 하며 싱긋이 웃는다.
조분순 칼국수식당 앞에는 대형 옹기 단지 하나가 뚜껑이 닫혀 있고 비닐로 싼 종이 안내문이 붙어 있다. '쌀 읍는 사람 조곰씩 퍼 가시오, 나중에 돈벌면 도로 채우시오, 조분순식당' 어머니가 쓴 글씨인데 아이들이 새로 컴퓨터로 출력해다 준다고 해도 정판사는 그냥 두라고 한다. 처음에는 오가는 사람들 화제가 되고 퍼가는 사람도 많더니 요새는 밤에만 한두명 퍼 간다.
하늘같은 은혜를 베풀어 준 무량심에게 국수장사 수익금으로 얼마씩이라도 갚아야 한다고 가지고 갔더니 무량심이 운전수를 시켜 큰 단지를 식당앞에 가져다 놓게 하고 그 돈으로 쌀을 부어놓으라고 시켰다.
한때는 단지가 달랑달랑 바닥 긁는 소리가 날 때도 있었고 넘쳐서 옆에 봉지 쌀을 놓고 가는 사람도 있었고, 김문수 도지사가 국수를 먹고 나가다 슈퍼에서 한포대를 사서 메고 와 부어놓은 적도 있다.
참 살기 좋은 세상이 되었다. 쌀을 퍼가지 않는다.
가끔씩 독 밑바닥이 드러날 때가 있는데 고약한 심성으로 퍼가는 사람을 어쩔수 없으나 권선동 주민들이 뚜껑을 열어보고 쌀봉지를 들고 와 부어놓는다.
국수 수익금으로 쌀을 채울 일이 없어 어머니는 이제 그만 단지를 치울까 무량심에게 물어보려고 한다. 넉넉하고 좋은 세상이 이리 빨리 올 줄 꿈에도 몰랐다.
정판사는 은퇴하면 용인에 장만해 놓은 땅에 집을 짓고 두 어머니를 모시고 살려고 계획중이다.
(대경거사)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