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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론강단-464 태초부터 계셨던 로고스(요한복음1장1-5절)
성경말씀은 요한복음 1장 1절에서 5절까지 봉독합니다.
[요한복음 1장]
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5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신약성경 중에서 맨 나중에 가장 늦게 기록된 문서들인데, 요한복음, 요한1,2,3서, 요한계시록 이렇게 다섯권의 책이 요한문서인데, 이 다섯권의 문서들은 예루살렘성이 멸망하고 그리고도 한 20년 가까이 세월이 흘러서 거의 AD90경에 기록되지 않았겠나. 그렇게 봅니다.
우리가 연대기 순으로 읽을려고 하면 나중에 읽어야 하는데, 지금 우리가 복음서 네 복음서를 함께 종합적으로 보면서 예수님의 모습을 좀 더 구체적으로 좀 더 입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른 복음서와 함께 보는게 좋겠다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항상 책을 볼 때 언제 기록되었느냐?
어디에서 기록되었느냐?
‘언제’하는 것은 말씀드린 대로 예루살렘 멸망후 한 20년 지나서..
그리고 ‘어디에서 기록되었느냐’ 할 때, 대체로 에베소에서 기록되었다 하는 것은 학자들의 이견이 별로 없습니다.
누가 기록했나 할 때에도 요한사도의 기록이란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고,
그의 제자였던 익나티우스 그리고 폴리캅 이런 분들이 요한의 기록이라고 하기 때문에 요한사도 외에 다른 분이 기록했다고 생각하는 분이 없습니다.
‘무엇을 기록했느냐’고 할 때는 조금 설명이 필요한데,
다른 복음서에서 마태 마가 누가복음서에서 빠뜨린 것을 우선으로 하고, 또 빠뜨리지 않았다 할지라도 어떤 특색이 있는 경우에는 다시 한번 더 기록하는 거죠.
예수님 사건을 기록하되 마태도 모르고 잊어버렸거나 마가 누가 이런 분들이 챙기지 못한 그런 부분을 한는 17-18가지 정도를 더 기록하고,
그리고 예수님께서 얼마나 많은 기적을 행하셨느냐? 얼마나 병자를 많이 고쳤느냐? 이런 것은 별로 관심이 없는 것 같아요.
이적 기사 이런 것을 다 기록할려면 이 세상이라도 그 기록물을 두기에 부족할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신 것을 보면,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말씀 예수님께서 이루신 어떤 이적 표적 기사 이런 것들을 낱낱이 챙기는 방향으로 쓰지 않고,
요한의 관심은 ‘이런 예수님이 누구시냐? 예수님이 어떤 분이시냐? 예수님의 정체가 무엇이냐?’ 거기에 훨씬 더 큰 관심을 보이고 있습니다.
‘어떻게 쓰게 되었느냐’ 하면, 요한사도도 나이가 많아 가고 있고 자기 보다 앞서서 기록한 것을 볼 때 더러 빠뜨린게 있고 빠뜨리지는 않았다 할지라도 뭘 알고 쓰는 것과 모르고 쓰는 것은 차이가 나잖아요.
그래서 예수님을 알되 앞에 세 복음서를 가지고 예수님을 아는 정도는 예수님을 하나님까지 인식이 안 되어 있습니다. 다른 복음서가..
예수님을 하나님으로까지는 미치지 못하는 정도의 글들인데, 요한사도의 글을 읽어보면 ‘예수님이야말로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이시다.’ 그런 쪽에다가 포커스를 맞추고 있는 것을 보면, 이분이 지금까지 사도들이 쓴 것을 가지고는 예수님을 믿는 믿음의 수준이 못 미친다는 거야.
그래서 그런 면에서 요한복음을 썼다 이렇게 보고요..
또 왜 썼는가도 마찬가지죠.
그 당시에 예수님을 바르게 이해 못하게 되면 유대인들이 주축이 된 유대교에서 신앙을 가지고 있다가 거기에서 나와서 예수님을 믿었다고 할 때는 예수님을 똑바로 알아야지, 어정쩡하게 알고 말면 유대교에서 나오는 의미가 없죠.
그래서 똑바로 알아야 되는데,
예수님의 정체부터, 예수님의 하신 일 예수님이 하신 말씀 다 중요한데,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정체를 제대로 알아야 되겠다.
그런 마음이 굉장히 강하게 느껴지는 책이 요한복음이예요.
그래서 요한복음을 저와 함께 21장까지 있으니까 우리가 한번에 한장씩을 살펴본다고 할지라도 21주.. 21주 이면 한주에 세번씩하니까 두달 정도하면 끝날텐데, 제가 강단을 안 비우면 그렇게 될 건데.
바라기는 성탄절 전에 요한복음이 정리가 되고, 새해부터는 사도행전을 봤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을 갖는데요,
오늘 첫시간에는 서론 혹은 총론적인 얘기가 아주 중요하기 때문에 요한의 관심은 예수님의 정체에 관심이 있었다.
이 분이 어디까지 이야기를 끌고 가느냐 하면, 예수님을 ‘나의 주 나의 예수님이시니이다.’ 하는 고백, 도마의 고백인데 그 고백이 나오는 데까지 이야기를 끌어간다는 겁니다. 방향을..
그리고 맨 첫 구절부터 예사롭지 않습니다.
여러분 어떤 책을 쓸 때에 이런 글과 이런 구절은 지구상에 있는 모든 책을 다 뒤져도 이런 말은 나올 수 없는 그런 말들이 1장에 나오는데, 엄청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먼저 이게 요한복음 전체를 다시 한번 압축을 해서 말한다고 하면, 하나님이신 로고스가 인간이 되었다는 거예요.
쉽게 말하면 ‘하나님이 인간이 되었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어서 오셨다.’
이런 청천벽력같은 그런 선포가 요한복음 1장에 나옵니다.
그 다음에, 그 하나님이 십자가에 달렸다.
그냥 그저 인간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린것으로 해서는 이 문제가 해결이 안 돼요.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렸다.
지금도 독일의 튀빙겐 대학의 몰트만이라는 유명한 교수가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이라는 책을 썼어요.
그 다음에 세 번째는 죽음의 권세가 깨졌다.
이것은 우리가 복음서마다 부활기사를 읽을 때 함께 공부한 것이고,
그 다음에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셨다.
승천하신 것은 매우 중요한 사건인데, 우리 교회에서는 승천절은 별로 관심 안 갖고 지나가버리죠.
그리고 다섯 번째는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것이다. 승천하신 예수님께서 다시 재림하실 것이다.
그리고 그 때는 성도들도 예수님처럼 부활할 것이고 또 변화되어서 휴거될 것이다.
그리고는 최후의 심판과 천국이 있을 것이다.
이런 이야기가 요한문서속에 요한복음과 요한계시록 속에 있는데,
조금 더 부연하자면 다른 복음서에는 종말론적인 소스가 복음서 뒷부분에 배치가 되어 있는데, 요한복음안에는 종말론적 소스가 하나도 나오지 않고, 종말론적 소스는 별권으로 묶어서 요한계시록에 나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과 요한계시록을 함께 연결해서 읽어야 제대로 되겠죠.
[요한복음 1장]
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맨 첫 구절이 ‘태초에 로고스가 계시니라.’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하는데, ‘말씀’이란 말도 좋은 번역이죠.
영어로 번역해도 별 수가 없이 ‘인 더 비기닝 워즈 더 워드(In the beginning was the Word)’라고.
‘로고스’를 ‘워드(Word)’라는 것 외에 달리 번역이 안 되어서 ‘말씀’이라고 했으니까..
그래서 이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
굉장한 이야기죠.
이런 이야기는 인류가 지구상에 존재하면서 많은 말들을 하고 많은 이론을 펼치고 많은 사상을 펼치고 했지만, 이런 선포는 없었던 것 같아요.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
대단한 이야기죠.
..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태초에 말씀이 계셨는데,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는데 이 말씀이 바로 하나님이다.
그러면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과 함께 계신 하나님이 계시고 이렇게 되는 거예요.
여러분 보통 우리가 새신자가 나오면 읽기 쉬운게 요한복음이니까 요한복음부터 읽으라 이렇게 하는데, 큰일 날 일이죠.
신약문서 전체를 통틀어서 가장 어렵고 가장 수준높은 거예요.
수준과 차원을 달리하는 책이 요한복음예요.
벌써 1절부터 어렵지 않습니까?
말씀이 계셨다는 말도 어려운데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하고, 또 이 말씀이 바로 하나님이시다. 이렇게 비약을 하니까..
나머지 모든 이야기는 이 말씀을 증빙하고 설명하기 위해서 덧붙여진 말씀이다. 그렇게 해도 과언이 아니예요.
요한복음의 모든 말씀은 요한복음 1장을 증빙할려고, 증명하고 증거할려고 풀어 말씀하셨다. 이렇게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요한복음 1장 1절은 중요한 말씀이죠.
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그가’ 할 때 말씀이죠.
그러니까 하나님이 계시고, 말씀이라는 하나님이 또 함께 계셨다니까..
그리고 나중에 더 가보면 성령 하나님이 계시니까, 그래서 마침내 ‘삼위로 계셨다’ 하는 사실이 드러나게 되는데,
다른 복음서를 가지고는 삼위가 일체로 하나님이시다 하는 그런 것은 아주 개운하지가 않습니다. 미흡해요.
그런데 요한복음을 보면 아주 극명하게 보입니다. 첫장부터..
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만물’은 피조물이고, 창조주가 바로 말씀이다.
말씀이라는 하는 하나님이 창조주가 되신다..
우리가 여태까지 하나님 아버지만 창조주로 생각하지, 아들 하나님인 예수님이 창조주 되신다는 것은 거의 생각에 못 미치거든요.
그런데 요한복음과 골로새서를 보면 예수님이 창조주가 되신다. 창조에 함께 하셨다는 겁니다.
..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예배당 안에서 보이는 것도 마찬가지이고 밖에서는 마찬가지죠.
우리 눈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까지 존재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 아버지와 또 그 아들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이 함께 창조하신 것입니다.
4 그 안에,
그 예수님 안에 그 로고스 안에,
..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조금 추상적이죠.
‘생명이 사람들의 빛이라.’
가끔 사람들의 얼굴이 아주 어둡게 보이는 수가 있어요.
반면에 어떤 사람의 얼굴은 얼굴에서 어떤 광채가 나요.
어떤 서광과 서기가 느껴지는 광채가 나는 수가 있어요.
실제로 생명력이 넘치면 거기에 어떤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여러분 아무리 아름답던 것이라도 생명이 떠나버리거나 하면 그런 아름다움은 다 사라져요.
아름다운 것 꺼내봐요.
아름다운 게 뭐가 있어요? 뭐가 아름다워요?
꽃이 아름답죠.
꽃이 아름답기는 한데, 생명이 떠나버리면 거름이 되고 맙니다.
그렇게 아름다운 장미도 생명이 떠나가면 그냥 시들어서 그 빛이 다 사라지게 됩니다.
꽃보다 사람이 더 아름답죠.
영화도 안 봅니까?
요새는 ‘꽃보다 남자’ 그런 말도 있더라고..
저를 쳐다보지 말고 딴데를 봐요.
사람이 꽃보다 정말 아름다운데 사람에게도 생명이 있을 때 아름다운 거죠.
생명이 떠나버리고 나면 사람이 어떻게 변해요?
죽음을 안 봤구만..
목회자들은 일반 성도들보다 죽음을 많이 접해보는데, 계시록 공부 했잖아요.
여러분 사람에게서 생명이 떠나버리면 청황색으로 변합니다. 그렇죠?
경상도 식으로 하면 푸르딩딩하고 누르팅팅하게 변해버려요.
시체가 그래요. 푸르딩딩하고 누르팅팅하게 변합니다.
생명이야말로 사람들의 빛이야.
생명에서 빛이 나옵니다.
여러분 ‘빛이 있으라!’ 하는 말도 생명의 원천되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온 거예요.
생명이 사람들의 빛입니다.
그래서 이 다음에 생명에 대해서 따로 한 번 던 특강 시간을 가질려고 하는데, 이 안에 예수님 안에 생명이 있었다는 거예요.
그 로고스 안에 무엇이 있었다고 하느냐 생명이 있었다고 합니다.
여러분 속에 생명이 있다면 그 생명이 전부 다 우리 주 예수님께로부터 나온 것인줄 믿습니다.
생명이 예수님으로부터 나온 거예요.
교회에 안 나와도 마찬가지야.
교회에 안 나오는 사람의 생명도 그 근본은 예수님에게로부터 받은 겁니다.
5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진리일 수도 있고 생명일 수도 있는데, 이것이 어둠의 세상 캄캄한 세상 가운데 비취는데,
..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이렇게 되어 있는데, ‘깨닫지 못한다’ 하는 말을 헬라어로 볼 때는 ‘이기지 못하더라’ 하는 말과 비슷해요.
‘깨닫지 못하더라. 이기지 못하더라.’ 비슷한 말인데..
그러니까 여러분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하나님 말씀 안에서 진리와 생명의 빛이 계속 비취는데, 사람들이 깨닫지 못해요.
여러분 오늘 예배 마치고 집에 돌아가시거든 에스라 하우스 홈페이지에 보면, 간증방인가 은혜와 진리방인가에 보면 한분이 교회에 발도 안 대어봤던 분인데, 성경강좌에 참여 했어요. 이분이..
연세가 60이 넘었어요. 올해 64세인가 하는 분인데, 국어교사로 평생을 보냈던 것 같은데, 이분이 인터넷 서핑을 하면서 소리바다에서 음악파일을 다운 받을려고 팝송을 하도 좋아해서 그것을 받을려고 하다가, 어디에서 제가 라디오로 해가지고 진화론을 비판하는 김성윤 아나운서와 둘이서 도란도란 이야기 했던 그 파일을 받아서 들었다는 거예요.
듣다가 아 이렇게 말씀하는 분도 있구나 하면서 2007년도에 성경강좌에 한번 다녀갔어요.
그분 이야기를 전에 한번 우리 예배때에 소개 했습니다. 간단하게..
그런데 이분이 210회때에 다시 온 거예요. 2년 지나서..
다녀와서 그 다음에 듣고 깨닫고 한 것을 A4용지 세 페이지 정도 되게 장문의 간증을 보내왔어요.
그런데 얼마나 깊이 있게 깨달았는지 역시 나이도 자산이다 그런 생각이 들어요.
정말 그만한 연세가 있으니까 또 그 정도 깊이 있게 듣는구나..
‘인격’이라는 말 한마디 때문에 성경 전체의 진리가 다 연결되어서 정리가 된 이야기를 써서 보낸 거예요.
한번 꼭 읽어보시기를 바랍니다.
너무 글을 잘 쓰고 물론 국어교육을 해서 그런지 깊이 있게 들은 거예요.
어떤 분이 저에게 전화를 해 오기를 ‘아이고 목사님 이 정도 글을 지금 교회에 다니는 분들 중에 알아듣는 사람이 몇사람이 되겠는가..’ 이렇게 말할 정도로 깊이 있게 듣는 거예요.
이분의 말 속에 이런 말이 있어요.
성경강좌를 가만히 듣는 중에 깨달은 것은 하나님이 차라리 어떤 사람을 죽여 없애버릴지언정 하나님께서 어떤 의지를 가지고 인격을 조작하거나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믿는 기계로 만들지는 않는 분이시다.
그만큼 하나님을 사랑하되 수준이 있는 그런 사랑을 원하시기 때문에 인격대 인격이 통하는 그런 믿음과 사랑을 원하는 것이지, 하나님이 능력을 가지고 인격을 조작을 해가지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존재로 만들지는 않으시겠다는 의지가 너무 분명하다. 그렇게 들었다는 거예요.
맞는 말이죠?
그래서 우리가 이 진리의 말씀이 성경에 담겨 있다할지라도 이것이 지금 창세기라든지 오경에 기록된 대로 같으면 3천몇백년이 되었을텐데, 그것이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에게 1천년을 비춰도 깨닫지 못하는 거예요. 1천년을 비춰도..
모세부터 말라기까지 1천년을 비춰도 깨닫는 사람이 별로 없다는 겁니다.
지금도 저는 성경에 있는 올바른 진리가 일반 교회에 바르게 비취지 않고 있다는 겁니다.
제가 가끔 드리는 말씀인데, 열왕기하서라든지 예언서 끝날 때 무지와 고집과 오해와 편견과 욕심과 이런 것들이 진리의 광채를 비치지 못하게 하는 거예요.
또 때로는 악한 영들이 사람들의 마음을 혼미케해서 진리를 분별하지 못하게 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이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하는 것은 참 안타까운 얘기죠.
그래서,
6 하나님께로서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났으니 이름은 요한이라
여러분 ‘요한’이라는 이름이 구약 공부할 때 ‘여호하난’이라고,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분이다.
왜 이런 이름이 필요하겠느냐?
구약시대에는 여호하난이라는 이름이 흔치 않습니다.
대개 이스라엘 백성이 하도 죄만 짓고 하다보니까 ‘하나님은 그저 두려운 하나님으로 가까이 가기만 하면 죽어버리고, 음성만 들어도 죽을 정도로 무서운 분이다’ 이렇게만 인식되어 있지, 여호와 하나님은 은혜로운 분이다 이런 의식은 잘 안 되어 있었는데,
예수님의 선구자, 예수님을 소개하기 위해서 앞서 나타난 세례요한의 이름이 여호하난이죠.
여호하난에서 요한네스 요한 이렇게 하는데, 이 여호하난은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다.
이렇게 이름을 지어왔는데, 제가 볼 때는 세례요한이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다. 이렇게 외친것 같지는 않아요.
‘회개하라 독사의 자식들아!’
‘이 사람아 당신 이름이 여호하난이오. 좀 부드럽게 이야기 하시오.’
그런데 전혀 부드럽게 안 하는 거예요.
얼마나 무섭게 외치는지..
하나님은 참 은혜로우신 분인데 항상..
인간들이 엄청난 어두움과 죄와 무지와 오해와 고집과 편견과 욕심에 찌들어서 눈을 뜨지 못하고 빛을 보지 못하니까 세례요한이 그렇게까지 외친것이 아니겠는가..
7 저가 증거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거하고 모든 사람으로 자기를 인하여 믿게 하려 함이라
요한의 목적은 요한 자기를 믿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인하여 로고스를 예수님을 믿게 하려 하는 것이라..
8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거하러 온 자라
9 참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10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11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12 영접하는 자,
‘영접하는 자’라는 것은,
.. 곧 그 이름을 믿는 자,
‘예수’라는 말은 ‘여호와는 구원이시다.’
여러분 요한이라는 말은 여호하난,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다.’ 예수스라는 말은 여호수아, 여호하난, 여호수아 이렇게 이어지는 거거든요.
헬라어로 음역을 하니까 그렇지, 히브리어 이름 그대로 하면 여호하난 여호수아,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다. 여호와는 구원이시다. 이렇게 연결되어 있어요.
여호하난 여호수아..
또 더 연결하면 ‘여호와는 은혜로 우리를 구원하신다.’
이게 요하네스에서 예수님까지 연결하면 여호와는 은혜로 우리를 구원하신다.
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라. 나중에 조금 더 나가야 알텐데..
다시 한번 여기까지가 13절까지가 한 단락으로 하고,
다시 한번 무슨 얘기를 하느냐?
14절에,
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육신’이라는 말과 ‘육체’라는 말이 비슷합니다만
육체가 되어서,
..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자칫하게 되면 우리가 실수하게 되는데, ‘육신을 입어’ 그러면 큰일 납니다.
우리 찬송가 어디에 보면 ‘육신을 입어’라는 말이 나와요.
‘육신을 입어’가 아니고 ‘육체가 되어..’
‘입어’ 하면 바로 영지주의라는 이단사상으로 마무리가 돼요.
그리스도 따로 있고 육체를 입었다 하면 바로 영지주의 이단이 되는데, 육체가 되어.
영어로 비커밍(becoming)으로 되어 있을 거예요.
..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예수님을 바라볼 때 세상 초라한 모습으로 오셨던 분이고, 죽는 것은 초라한 것을 넘어 비참하게 돌아가셨는데, 그런데도 불구하고 요한의 눈에는 그 영혼을 봤다는 거예요.
‘예수님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을 보았다.’
세상 사람들은 그게 안 보이는 거예요.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 안에서 그 영광을 보지 못해요.
기껏한다는게 예수님께서 ‘네 원수를 사랑하라 했다.’ 그 한절하고 아니면 ‘대접받고자 하면 먼저 대접하라.’
세상 사람들은 그 두 구절 정도 예수님 하신 말씀 두 구절 정도만 알지..
그 두 구절 가지고 어떻게 예수님이 하나님 되신다는 것까지 알게 되겠어요?
그러니까 이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의 영광을 전혀 보지 못해요.
그 광채를 보지 못합니다.
그 영광의 광채를 보지 못하는 사람들은 아무 희망도 없고, 그저 이 세상에서 태어나서 예수 믿는 사람들을 위해서 노동이나 하다가 마는 거야.
아무 것도 아니야.
만약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광의 광채를 보지 못한다고 하면 이 세상에서 보조역으로 태어나서 예수 믿는 사람들을 위해서 도로나 닦고 집이나 짓고 하다가 별 볼일 없이 죽는 거야.
더 심하게 말하면 예수님 같으면 ‘너는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을 뻔 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광채를 접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아무런 존재의 의미가 없어요. 사실은..
그만큼 요한이 여기에서 말할 때 요한복음에서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하는 그 빛이 그리스도안에 있는 영광의 광채가 비춰가지고 예수님 안에서 아버지 하나님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제가 가끔 어디가서 강의하거나 설교하거나 이렇게 하면 사람들이 와서 인사할 때 ‘목사님 큰 은혜 받았습니다.’ 속으로 ‘진리는?’
전혀 사람들이 은혜를 사모하면서 진리는 별로 안 듣는 것 같아요.
예수님 안에 뭐가 들었다고?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진리가 없는 은혜는 싸구려 은혜예요.
내가 볼 때는 ‘아 전에 알지 못하던 진리를 깨달았습니다.’ 이렇게 해야 더 합당한 인사 같은데, 은혜는 받았다하면서 진리는 깨달았다는 말을 한번도 인사하는 것 들어본 적이 없어요.
우리 성도들은 달라져야 하겠어요. 오늘 요한처럼..
‘목사님 오늘 진리가 있었습니다.’ 그러면 나도 한없이 위로가 될 거야.
맨날 값싼 은혜만 생각하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했다는 거야.
사실은 저는 은혜나 복이나 이런 것보다는 가능하면 진리쪽에 강조점을 둘려고 하는 편인데, 듣는 사람은 맨날 습관적으로 은혜받았다. 아니면 은혜스러웠다. 상당히 분위기만 생각하는 거야.
그러면 안 되거든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한은 다르죠?
우리가 보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까?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여러분 우리 샤론교회 성도님들이 은혜도 받고 진리도 깨닫기를 바랍니다.
왜냐하면 예수님 안에 그 둘 다 있으니까..
은혜도 있고 진리도 있으니까 은혜만 받아가지 말고, 진리를 가져가야 됩니다.
여러분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은혜를 받을찌니라’가 아니고, 뭐죠?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하리라.’
맨날 은혜만 받을려고 하니까 유치한 수준에서 머물고 마는 거예요.
은혜만 받을려고 하다가 진리가 조금 날카롭게 찌르면 그만 마음 탁 닫아버리고 눈 감아버려요. 부담된다면서..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은혜와 함께 진리를 우리 속에 심어서 우리를 참 자유케 할려고 하시는 거죠.
15 요한이 그에 대하여 증거하여 외쳐 가로되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니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하니라
이것도 참 놀라운 얘깁니다.
여러분 아무리 봐도 누가복음을 보면 세례요한이 예수님보다 6개월 먼저 태어났죠.
먼저 태어난 사람이 와서 말하기를 예수님이 자기보다 먼저 있었대..
여기서부터 우리가 고민을 해야 되거든요.
어떻게 자기보다 6개월 뒤에 태어난 사람을 자기보다 먼저 있었다고 하느냐?
나중에 나오는 것을 보면 세례요한보다 먼저가 아니고, 아브라함 있기 전부터 내가 있었다니까..
이렇게 해서 무슨 말씀을 할려고 하느냐 하면, 이분이 바로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태초부터, 아브라함이 문제가 아니라 태초부터 있었던 분이라니까.. 태초부터..
이렇게 하는 이 요한의 신학이라는 것은 대단한 신학을 갖고 있는 거예요.
앞에 우리가 복음서 세권을 다 공부했어도 다 위대하지만, 요한의 차원에는 전혀 이르지 못하는 거야.
지금 여러분은 어떻게 듣는지 몰라도 저는 이 요한복음을 여러분과 함께 나누게 된 것을 굉장히 고맙게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굉장히 설레는 마음으로 살필려고 하는 거예요.
가능하면 여러분 요한복음 끝날 때까지 결석도 하지 말고 지각도 하지 말고 늙지도 말고 죽지도 말고 아프지도 말고 결석도 하지 말고 다 들어야 돼요.
여러분 요한이라는 분이 예수님의 마지막 그림을 그릴려고 하거든요.
만약에 복음서 네권 중에 요한복음이 빠져버리면 아무 것도 아니야.
그냥 예수님이 위대한 선지자 중에 한 사람으로 끝나버려요.
그만큼 요한복음이 중요합니다.
아마 이 정도 깨닫는 데는 시간이 필요한 거야.
그래서 요한이 그렇게 눈매가 매섭고 깨닫는 감각이 아주 영감이 뛰어나고, 그리고 듣는 귀도 다른 사람이 듣지 못하는 말씀을 듣는 그 정도 실력이지만, 80-90이라는 연륜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여러분 지금 우리가 하는 얘기는 교회에 처음 나오는 사람은 이해하기 어렵겠죠.
어렵겠지만 지금 이렇게 설교해놔야 언젠가, 이제는 알지 못하지만 때가 되면 알 수 있겠죠.
16절,
16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제가 창원극동 방송국에서 9년여 라디오 방송을 매일 나가는 방송으로 9년여 가까이 했는데, 맨 마지막 프로그램이 ‘은혜와 진리’였어요.
꼭 3년 걸렸어요. 매일 해가지고 3년 걸렸습니다.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쭉 흘러갔던 방송인데, 그 때 은혜와 진리예요.
제목이 좋지 않습니까? 은혜와 진리..
맨날 은혜만 얘기하지 말고, 은혜와 진리를 동시에..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요한이 생각할 때 예수님은 그저 뭐 하루 공부해가지고 하루 설교하고 때거리 걱정하듯이 날품팔이처럼 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 안에는 그야말로 모든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데에서 받으니까 은혜 위에 은혜였다.
17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그래서 율법이 필요없다는게 아닙니다.
그러면 율법과 은혜와 진리, 이 세가지를 함께 생각해야 돼요.
그래서 우리가 어설프게 복음주의가 잘못될 때에는 율법은 다 무시해버리고, 진리도 부담되니까 그냥 은혜만 은혜만..
‘오직 은혜로’ 하면 잘못된 거예요.
바로 마르틴 루터 같은 분이 오직 은혜.. ‘쏠라 그라시아.’ 이렇게 해가지고 잘못되는 거예요.
그렇게 하니까 루터교회가 지금 흔들거리는 거예요.
‘오직 은혜’만 하면 안 되고, 은혜는 은혜인데, 은혜와 진리와 율법이 잘 균형을 맞춰야 돼요.
모세가 세운 것을 예수님이 폐한 것이 아닙니다.
폐한 것이 아니라 더 업그레이드 할려고 왔어요.
그래서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다.
18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독생하신 아들’ 하지 않고, ‘독생하신 하나님이다.’ 하나님의 품 속에 있는 하나님의 아들.. 독생하신 하나님. 예수님이죠.
그래서 예수님이 오신 목적을 우리가 복음서 사복음서 시작하기 전에 예수님이 오신 목적을 이야기 할 때,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보지 못하는 하나님을 도무지 믿지 못하고 자꾸 우상을 만드니까 볼 수 있는 하나님으로 보여질 수 있는 하나님으로 오셨다 해서 육체가 되어서 오신 분이예요.
그래서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지만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다.
한번은 예수님께서 승천하실 때가 다 되어갈 때 십자가를 얼마 앞두고 몇말씀 하시는데, 빌립이 참 공부를 열심히 했던 것 같아요.
다 열심히 했는데, 딱 한가지가 아쉬운 거야.
‘주여 아버지를 보여 주시옵소서.’ 꼭 우리 한국교회 성도들 같죠?
좀 봤으면 좋겠다는 거예요.
예수님 말씀은 뭐예요?
‘빌립아 네가 이렇게 나와 함께 오래 있어놓고 아버지를 보여달라 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본 것이야. 아버지와 나는 똑같다.’
예수님과 조금도 안 틀리니까 똑 같애..
그래도 그 빌립이 그 때까지만 해도 ‘안 같을텐데, 아버지가 좀 연세가 많을 텐데..’
아버지가 계급이 높을 텐데.. 이런 생각을 했을 거예요. 그렇죠?
빌립도 우리와 성정이 똑 같거든요.
그런데 여러분 아버지와 아들이 똑 같다는 것을 깨닫는데 300년 걸렸습니다.
나중에 우리가 교회사 이야기를 할 시간이 있을지 모르겠는데, 325년 니케아 회의에서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와 그 성령과 영광과 능력과 권능이 똑같다.’
똑같다 한게 정통이 된 거예요.
그 때 비스무리 하다 해가지고 이단이 된 거예요.
비슷하다만 해도 이단이 됩니다.
예수님과 하나님 아버지는 똑같은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을 잘 보시면 하나님을 본 겁니다.
우리는 잘못하면 ‘하나님은 연세가 많고 머리가 허옇게 세었고, 예수님은 30살 밖에 안 되었으니까 젊고, 또 하나님 아버지는 굉장히 율법을 가지고 사람 때려잡는 분이고, 예수님은 우리가 아무리 죄를 지어도 용서하는 분이다..’
그렇게 믿으면 완전히 미신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과 성령님은 영광과 권능이 똑같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복음서를 잘 보면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볼 수 있게 오셨거든요.
그래서 그것을 딱 기록했어요.
이 기록한 네 복음서를 잘 보고 예수님을 원만하게 이해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자비로우신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영적으로 눈멀고 또 귀도 막히고 마음도 둔하여서 깨닫지도 못하고 보는 눈도 듣는 귀도 깨닫는 마음도 없던 저희들에게 보여주시고 만져보게 하시고 들려주시고 그리고 구체적으로 깨닫게 하시려고 로고스로 계시던 하나님께서 육체가 되어서 우리 가운데 오시고, 정말 우리와 같이 대화 하시고 먹고 마시고 그렇게 하나님 아버지를 나타내어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또한 이것을 네 복음서에 기록해서 예수님이 누구신지 어떤 분이신지 또 그를 앎으로서 하나님 아버지까지 알게 하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우리가 이 네 복음서를 다 공부한 후에는 하나님 아버지와 그 아들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을 원만하게 알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