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주 기행](5)‘경주 교동법주’
혀 끝에 착 감기는 달콤한 맛, 노르스름하고 투명한 빛깔, 곡주 특유의 향긋한 냄새. 경주최씨 가문에서 대대로 빚어온 교동법주는 조상 제사와 손님 접대를 위한 가양주(家釀酒)로 우리나라 민속주의 대표주자로 꼽히고 있다.
맛과 빛깔, 향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경주 교동법주는 화학주가 아닌 살아 있는 술이다. 그래서 과음을 해도 취하는 줄 모르고, 마시고 난 뒤에도 숙취를 거의 느낄 수 없다. ‘경주 가서 교동법주 맛보지 못했으면 경주 헛갔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애주가로부터 찬사를 받고 있다. 1986년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받은 이 술은 경주최씨 가문에서 며느리의 손끝으로 전해져 독특한 맛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경주 최부자 집과 교동법주
교동법주는 만석꾼 집안으로 유명한 경주 최부자 집에서 350여년간 빚어오고 있다. 초기에는 제사용, 손님접대용으로 제조했으나 독특한 맛으로 인기를 더하면서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최부자 집은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준수하면서 인심을 쌓아왔다. 예부터 분에 넘치는 벼슬을 탐하지 말고 필요 이상의 축재를 멀리하라는 가르침을 따르고 있다. ‘진정한 부자소리 들으려면 사방 100리 안에 굶어죽는 사람이 없어야 한다’는 게 최씨 집안의 가훈이다. 사람 사는 집의 인심 소문은 과객의 입에서 난다는 말처럼 손님을 따뜻하게 대접해 왔다.
법주를 처음 빚은 사람은 현재 기능보유자인 배영신씨(89)의 남편 최종씨(작고)의 9대조인 최국선으로 전해져 온다. 그는 조선 숙종 때 임금님의 수라상 및 궁중음식을 감독하는 사옹원(司甕院)의 참봉을 지냈다. 그는 사옹원의 실무 책임자로 봉직하다가 낙향하여 법주를 빚었다. 이는 법주가 궁중으로부터 유래된 술임을 시사해 준다.
#민속주의 대명사
찹쌀 특유의 진득한 감촉이 돋보이는 교동법주는 은은한 향기와 입에 달라붙는 맛이 일품이다. 놋잔에 담긴 교동법주는 밝고 투명한 미황색을 띠면서 고급스러움을 더해준다. 술을 마시지 못하는 사람도 시각적으로 술맛을 음미하게 한다. 황남빵과 함께 경주의 대표적인 특산품으로 꼽히는 교동법주는 고종때 진상품으로 오르기도 했다. 경주시가 1998년부터 매년 주최하는 ‘한국의 술과 떡잔치’에 매년 출품되는 교동법주는 국내는 물론 외국인으로부터도 인기품목으로 인정을 받아왔다.
#맛의 비밀은 토종찹쌀과 우물물
최상의 술을 빚기 위해 원료부터 차별화를 꾀한다. 원료는 비교적 간단하다. 찹쌀과 밀누룩, 우물물이 전부다. 그러나 일반 술은 멥쌀로 제조하는 데 비해 교동법주는 토종 찹쌀을 고집한다. 누룩도 엄선된 밀누룩만 쓴다. 물은 100년 넘은 구기자 나무 뿌리가 드리워진 집안 우물물만 사용한다. 배할머니는 ‘명주는 명수에서 나온다’고 믿는다. 술 담그기를 시작해서 끝날 때까지 석달 열흘은 잠시도 긴장을 늦출 수 없다. 술은 원재료 못지않게 정성이 들어가야 한다.
하루에 20여병(900㎖들이)만 생산하고 별도의 유통망도 갖추지 않고 있다. 그래서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한다. 제조시설이 재래식인 탓도 있지만 최고의 술은 희소성과 품격이 따라야 하기 때문이다. 대리점이 없는데다 인터넷이나 우편으로도 구입할 수 없고 교동마을 최씨 고택에 가야만 살 수 있다.
술 빚을 양의 10분의 1에 해당되는 찹쌀과 누룩 물로 밑술을 만들어 약 10일간 발효시킨다. 밑술이 익으면 덧술을 만드는데 밑술에 물을 붓고 끓여서 식힌 뒤 찹쌀로 지은 고두밥을 섞어 넣는다. 20여일이 지난 뒤 용수(술 거르는 기구)로 거른 뒤 두 차례의 숙성단계를 거치면 술이 완성된다. 미황색을 띠며 찹쌀 특유의 진득한 감촉과 더불어 순하면서도 곡주만의 강한 맛을 느낄 수 있다.
#교동법주와 사연지 ‘맛있는 만남’
경주최씨 집안에 대대로 전해오는 사연지는 교동법주에 딱맞는 안주다. 싸서 넣은 김치라는 뜻의 사연지는 큰 새우 속살 등을 배추잎으로 싼 것으로 담백하고 시원한 맛이 일품이다. 실고추에 버무린 해산물이 맛을 더해준다. 시원한 국물 맛도 빼놓을 수 없다. 톡쏘듯 찡한 맛으로 겨울철 별미 보쌈김치를 연상케 한다. 북어포를 참기름에 버무린 북어포무침, 송화·깨 등을 갈아 만든 다식, 전과 등도 교동법주와 궁합이 맞는 안주로 꼽힌다. 최씨 집안에서 내놓는 안주는 모두 손수 만들어 정성이 묻어나 입맛을 더욱 돋운다.
〈경주|글 박태우기자 taewoo@kyunghyang.com〉
〈사진 김영민기자 viola@kyunghyang.com〉
[전통주 기행]교동법주 기능보유자 배영신할머니
“재료도 중요하지만 정성이 들어가야죠.”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인 경주 교동법주 기능보유자 배영신 할머니. 22살에 최씨 집안으로 시집와 시어머니 밑에서 도제(徒弟)식으로 술 제조법을 배워 지금까지 명맥을 잇고 있다. 평소 눈썰미가 빼어나고 음식 솜씨도 뛰어난 그는 가양주를 고급 술로 업그레이드시켰다. 아흔을 앞둔 나이지만 아직도 손수 술을 빚으면서 며느리 서정애씨(59)에게 꼼꼼하게 기능을 전수하고 있다. 지금도 술을 빚을 때는 늘 쪽진 머리를 가다듬은 뒤 재료 선정에서 채주까지 전 과정을 일일이 챙긴다.
장인답게 그는 술 익는 소리와 냄새만 맡아도 술의 상태를 가늠해낸다. 그러나 정작 그는 술을 마시지 못한다. 술을 마시지 못하면서도 명주를 빚어내고 있으니 프로라는 타이틀이 아깝지 않다. 며느리 서씨는 시어머니에 대해 “주위사람에게는 부드럽지만 자신에게는 엄격한 분으로 술을 빚을 때 한치의 오차도 허용하시지 않는다”며 “자상하시고 조그마한 일에도 최선을 다하시는 분”이라고 소개했다.
배할머니는 일제강점기에 대구의 최고 명문여고인 대구여자공립보통학교(현 경북여고)를 졸업했고 처녀시절에는 한때 교편을 잡았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그는 지금도 간간이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면서 여가를 즐긴다. 얼굴에는 늘 웃음기가 묻어나고 유머감각도 겸비하고 있다. “이렇게 사진을 많이 찍을 줄 알았더라면 배우가 됐을 텐데….” 기자의 촬영협조 요청에 농을 던지면서 분위기를 부드럽게 이끌었다.
“제조과정은 순간순간이 중요해. 조금만 방심해도 명주가 나올 수 없지.”
그의 철저함과 꼼꼼함, 완벽성을 기하는 모습에서 장인정신을 엿볼 수 있었다. 배할머니는 “손자가 식품영양학을 전공, 대를 잇게 돼 다행스럽다”고 말하고 “계속 애주가로부터 인정받는 술로 남기를 바란다”며 환하게 웃었다.
〈경주|박태우기자〉
[전통주 기행]혈액순환에 탁월한 효과
술은 예부터 비일상의 특정한 날과 유명(幽明)의 신과 인간이 만나는 종교적 의례, 조상과 만나는 의례, 사람과 사람이 부부로서 일체화하는 의례 등 예식이 행해지는 날에 마시는 신성한 음료였다. 법주에 대한 기록은 중국의 ‘제민요술’이나 우리나라의 ‘고려도경’ ‘고려사’에 있다. 옛 문헌에는 ‘옛날 임금이나 종족 대표가 제사지낼 때 예를 다해 법식대로 빚은 법주를 하늘에 올렸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된 교동법주는 경주 향교가 있는 교동마을에서 제조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토종 찹쌀과 누룩으로 빚는 발효주로, 희석-발효-숙성하는 과정을 거치며 술 한 병을 만들기 위해 5개의 항아리가 필요하다. 주모(밑술) 만들기에 10일, 발효기간 60일, 숙성기간 30일 해서 100일 정도가 소요되는 진귀한 술이다.
색은 밝고 투명한 미황색을 띠며 살아서 움직이고 숨쉬는 하나의 생명체로서 ‘생술’로 명성을 날리고 있다. 어느 정도 세균이 침입하더라도 대부분 원상 복귀하는 힘이 있다. 많이 마셔도 뒤탈이 없고 혈액순환과 입맛을 돋워 반주로도 인기를 끌고 있다. 특히 술 만드는 전 과정이 수작업으로 진행되고 물은 100년 수령을 넘긴 구기자나무의 뿌리가 드리워진 우물물을 사용한다. 구기자의 약효성분으로 혈액순환과 피로회복 등에 좋은 게 특징이다.
봄날 따스한 햇볕 받으며 마음 맞는 사람끼리 흉금을 터놓고 허심탄회하게 얘기 나누는 자리에는 교동법주가 안성맞춤이다. 교동법주를 곁들이면서 삶의 고뇌를 털고 잠시나마 여유와 즐거움을 가져보는 것은 어떨까.
〈이연정/경주대학교 관광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