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과 다른 시쓰기 동인 {길이의 슬픔}의 시들
이서빈, 이진진, 글보라, 글이랑, 장정희, 정구민, 최이근, 고윤옥, 권택용의 시
길이의 슬픔
이 서 빈
인간 욕망을 재고 있는 자벌레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둘둘 말린 욕망
몸속 자 다 풀어 재고 또 재고 평생을 잰다
밭고랑 풀보다 수북하게 웃자라는 욕망
자란 평수만큼 그늘은 더 무성무성 짙어진다
우주 몇 바퀴 돌고도 남을
욕망길이 재는 일 자신의 욕망 재는 일인가?
끝을 알 수 없는 욕망터널속에서
욕망 재다가 욕망에 갇혔다
한 치 더 재면 굴러굴러 떨어질 절벽
깨꽃보다 붉게 핀 아찔한 비명
신은 지구별 꽁지에 ‘멸종’ 시치미 달고 욕망은 시치미 뚝 떼고 있다
그 푸르던 지구눈동자 작살 맞은 물고기처럼 심장 움켜쥐고 울부짖자
바다는 핏물 끓이기 시작하고
동‧식물 배 뒤틀며 하혈한다
경전 목차에도 없는 부고(訃告)장
달력에 기록하지 못한 나머지 날짜들 수수수 새떼처럼 날아내린다
말라서 토막 난 지구 끌고 가는 개미떼 인광(燐光)을 뿜어내고
종들의 울음소리 삭제되었다 마치 영원히 휴가를 떠나듯
드디어, 마침내, 기어이
잴 수도 멈출 수도 되돌릴 수도 없는 슬픔의 자벌레
---남과 다른 시쓰기 동인 시집 이서빈 외, {길이의 슬픔}에서
물의 혁명
이진진
나무 한 포기 품지 못해 가슴 따가운 사막이 되었다
팜주메이라 거리에 야자수는
심청이 아비가 동냥젖 얻어 먹여 키우듯
하루에 두 번씩 물 얻어 먹인다
꿀떡꿀떡 잘도 받아삼키는 소리, 우주가 숨쉬는 소리
두바이 큰 솥에 바닷물 넣고 물을 만든다
무역과 금융 빌딩은 모두 물위에 서있다
쌀은 쌀나무에서 나오고
물은 공짜로 생긴다 생각하는 사람들
수도꼭지 틀면 콸콸 쏟아지고
쌀이 되기까지 모를 기르는 물
인간의 마음대로 쥐락펴락하는 물
물을 물로 보지마라
낭비벽 심한 사람 물 쓰듯 한다는 핀잔은 모독이다
지금 지구촌은 물 전쟁 중이다
물이 혁명을 일으켜 지구에 물 거꾸로 쏟아버리면
거대한 바다도 사막이 된다
신이 인간에게 선사한 물
풀 한 포기도 숨 한 방울도
물이 없으면 끝장이다
---남과 다른 시쓰기 동인 시집 이서빈 외, {길이의 슬픔}에서
목가牧歌
글보라
우듬지에 걸터앉은 구름
속눈썹이 파르르 떨린다
소슬소슬 부딪히는 자장가 소리
눈썹에 걸린 자장가 들으며 깜박 잠들고 나면
외롭거나 슬프거나 아픈 그 모든 일이 치유된다
마음에 냉기가 스미면
숲속으로 가 숲을 귀에 꽂고
나무의 노래를 듣는다
노랫가락을 잘라다
솜털구름 포근히 감싸 안고
소슬소슬 불러주는 평온
살그머니 불을 끄는 숲
밤새 꿈속에서 들은 노래는
네이버 메일 앱에서 보낸 목가였다
---남과 다른 시쓰기 동인 시집 이서빈 외, {길이의 슬픔}에서
물의 노래
글 이 랑
가만히 귀 기울여 봐요
시작이 어디서부터인지
나는 알지 못해요
햇살이 보여준
무지갯빛 풍경과
지나가는 바람이 전해준
향긋한 풀냄새와
빗소리에 실려온
따스한 온기로
나는 매일 꿈을 꾸어요
어떤 날엔
구름이 되었다가
또 어떤 날엔
꽃잎도 되었다가
다른 날엔
새하얀 눈송이도 될 수 있어요
내게 보여지는 모든 것들이
나로 인해
아름답게 보여지기를
그래서 내가
더 아름다워지기를
나는 매일 꿈을 꾸어요
내 이야기에 귀 기울여 봐요
---남과 다른 시쓰기 동인 시집 이서빈 외, {길이의 슬픔}에서
무성한 하루
장 정 희
봄빛을 뚫고 나오는 새싹처럼
물소리 파랗게 자란다
새싹에 봄바람이 매달려 있다
새싹에 봄향기가 매달려 있다
바람과 향기는
새 노래소리에
온몸에 피가 도는지
양날개를 휘저으며 날아오른다
고성산* 오르는 길에 만난 푸른빗소리
목젖을 적셔주고
어느 먼 곳에 있어 아직 당도하지 못하는
강물과 만나 또 다른 별이 될
속눈썹 사이로 봄 싹트는 소리가
파랑파랑 날아드는 봄
*강원도 고성에 있는 산이름
---남과 다른 시쓰기 동인 시집 이서빈 외, {길이의 슬픔}에서
물
정 구 민
입이 말라 잠깬 새벽 생명수 한 모금에
샘물처럼 새롭게 돌아나는 결핍
쓰나미가 밀어내도 인류와 같은 쪽으로 치닫는
바이러스꽃(the virus flower)
지구에서 붉은절정 피워 올린다
로봇노예가 될 과학 나침반 흔들흔들
신의 심술일까?
첨단 과학시대 거리두기 양팔 벌린다
제한급수시대 초래한 인간 욕망
망초꽃 눈동자마저 건조하다
기후를 이길 수 없는 자연
자연을 이길 수 없는 인간
바다를 마시고 전설을 낳은 갈매기, 검푸른 바다 와글 거린다
바닷물 염분 빼는 고육지책
수위 낮아지는 바다
물은 재생에 재생을 한다
자연이 몸을 바꾸는 소리 아찔하다
---남과 다른 시쓰기 동인 시집 이서빈 외, {길이의 슬픔}에서
악 몽
최 이 근
둠벙에 갇혔다
주위는 깜깜하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물을 푸우푸우 뿜어내며
무언가를 잡으려고 손을 휘저어도
아무것도 잡히지 않는다
발버둥에 힘 빠지고
두려움 떼가 엄습해온다
웅덩이를 꽉 채울 것처럼 큰 물뱀 한 마리
혀를 날름거리며 내게로 다가오는데
아무리 발버둥 쳐도 꼼짝하지 못한다
뱀은 점점 가까이 오고
아무리 소리 질러도 아무도 오지 않는다
드디어 뱀은 내 다리를 꽉 물고
내 잠속에서 말한다
나는 지구다
---남과 다른 시쓰기 동인 시집 이서빈 외, {길이의 슬픔}에서
대한민국
고윤옥
집토끼 산토끼 어울려
깡충깡충 사는 나라
동방의 자그마한 땅에서
춤과 노래 흥을 들썩이며
세계를 누빈다
나도 귀하고 너도 귀하다며
짝짜꿍 합덕으로 민주주의를 잉태하고
여당 야당 소수당
저마다 소리 높여
도개걸윷모 떠들썩한 나라
국민 잘 모시려는 대표는
궁으로 들어가 도리도리
도의 이치 찾아 귀를 쫑긋 세우고
남과 다른 시 쓰는 시인들
지구를 살리려 지구환경 살피며
처방을 모색한다
자연보호에 골몰하는 나라
으뜸을 향해 전진하는 나라
훨훨 훨훨 질라래비 훨훨 신나는 도약에
세계가 이곳으로 몰려든다
구전(口傳) 따라 우르르 몰려든다
---남과 다른 시쓰기 동인 시집 이서빈 외, {길이의 슬픔}에서
물결
권택용
인간 정도 깊고 얕음이 있고
물에도 깊고 얕음이 있다
세계에서 제일 깊은 바다는
마음바다
그 깊이는 죽을 때까지 재도 다 잴 수 없다
지구에서 가장 큰 호수는
눈 속에 있는 호수
짭짜름한 물이 호수에 가득하지만
눈이 절여지지 않는다
세상에서 가장 깊고 깨끗한 호수는
갓 태어난 아기의 눈속 호수다
세상에서 길이가 긴 강은 눈물강이다
죽을 때까지 마르지 않는 길이의 강이다
물에도
인간에게도 결이 있다
숨결 잠결 꿈결
곱디고운 단어들
최고의 문장은 비단결 같은 마음결을 가진 물결이다
---남과 다른 시쓰기 동인 시집 이서빈 외, {길이의 슬픔}에서
플라스틱 수프
우재호
매년 바다 버려진 1천 3백여만 톤 플라스틱
해류 따라 흘러 태평양 한가운데
한반도 일곱 배 쓰레기 왕국 만들었다
합성수지 플라스틱 발명한 19세기에
세계가 플라스틱 뒤덮일 것
예상했을까?
플라스틱 부서지고 녹아
바다가 플라스틱 수프 되었다
제주 남방큰돌고래 비닐봉지 지느러미에 감고
폐비닐과 놀던 어린 돌고래
쓰레기에 휘감기거나
몸이 껴 움직이지 못하고
그물에 걸린 해양 동물 뱃속엔 플라스틱 쓰레기 잔뜩 쌓여있다
지난 48년간 해수 온도 오른 한국 바다
세계 평균 두 배 이상 급격하게 뜨거워졌다
플라스틱 만드는 과정 이산화탄소 배출
지구온난화 부채질하고
소비된 플라스틱 바다로 버려지는 악순환 반복
죽은 새끼 대왕고래에서 맹독성 화학물질 검출되었다
플라스틱 쓰레기
지구온난화
맹독성 폐기물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모든 생명 직접 위협
세상은 비명 내지르는데
귀 막고 눈 막은 인간들 종말 향해
끝없이 내달리고 있다.
---남과 다른 시쓰기 동인 시집 이서빈 외, {길이의 슬픔}에서
물의 집
이정화
물의 집이 어디에 있는지 아무도 아는 이가 없다
입에서는 침이라는 이름으로
코에서는 콧물이란 이름으로
눈에서는 눈물이란 이름으로
도깨비처럼 이름 바꿔가며 살아가는
담기는 그릇마다 달라지는 물
물 내리면 숲의 몸부림이 심해지고
물오르면 푸르름 아우성이 시작되어도
끄떡도 않고
지구를 휘젓고 다니는 물 물 물
지구를 뒤흔들며 괴물도 되었다가 생명수도 되었다가
횡포를 부리는 전지전능한 신(神)
냄새도 맛도 없이 늘 젖어 있는 물
집앞 골목처럼 낯익지만
시공을 넘나드는 물
뜨거운 여름이나 추운 겨울을 밀어내는 건
미지근한 가을이나 봄이듯
사람이 태어나게 하는 것도 죽게 하는 것도
늘 맛도 냄새도 없는 맹물이다
갈증이 나 물 한 사발 벌컥벌컥 들이킨다
---남과 다른 시쓰기 동인 시집 이서빈 외, {길이의 슬픔}에서
목마른 늪
글 빛 나
습지식물의 천국
하늘로 올라가는 용이 쉬었다 가는 곳
이무기 눈물 다 마르자
사시사철 마르지 않던 늪이 말랐다.
생물들 썩지 않는 이탄층 출렁거리는 곳
람사르 협약*의 고층습원
하늘빛 멱 감는
푸른 속살도 파래서
금강초롱꽃 피고
지구주름 거르던 늪지
탐방로
닻꽃 비로용담 수런거림
가을 채비를 서두르는 뚝사초
전설 속에 가둘 수 없다는 몸부림은
목마른 늪비린내 파고든다.
무심한 행인
용머리 약수 물맛이 꿀맛이란다.
*국제 습지보호 협약
---남과 다른 시쓰기 동인 시집 이서빈 외, {길이의 슬픔}에서
물방울꽃
김 일 순
모든 것의 몸속을 들락거리며 목숨을 관장하는 물
산속 땅 틈바구니 퐁퐁 솟아
토끼 노루 목축이고 새 부리 씻고
도란도란 흐르다 모이고 또 흐르며
모난 돌멩이 다듬는다
살아있는 모든 것에 물냄새가 나는 이유다
바다에는 많은 것들이 모여든다
물보라 하늘 날고
장미는 가시를 세우며
갖가지 색으로 피어난다
너무 작거나 흔해 이름도 없이
그냥 들꽃이라 불리다 사라지는 것들
무명들 설움이 모여 구름이 된다
구름이 바람에 실려온다
구름안에 스며있던 무명꽃향기
서러운 물방울로 맺혔다
흠 없는 물방울꽃에 삼라만상이 다 들어있다
---남과 다른 시쓰기 동인 시집 이서빈 외, {길이의 슬픔}에서
물고개
안 태 희
올라간 것은 반드시 떨어진다
직선으로 혹은 곡선으로
우주가 먹고 사는 물
푸른바람 몸 씻고
서성이다 서성이다
몸부림치며 넘어가는 눈물고개
生, 뿌리엔 푸르름 영글고
死, 뿌리엔 푸르름 시드는
생,사는 물이 오르내리는 물고개
물은 물끼리
바람은 바람끼리
곤두박질치다
흘러가다 사라지는 순환고개
삶을 밀어올리고 끌어내는
물고개
이 목마른 아침
나뭇잎 벌컥벌컥 물 마시는 소리
---남과 다른 시쓰기 동인 시집 이서빈 외, {길이의 슬픔}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