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판엔 바닥이 보일 때까지 한 우물만 파는 감독들이 있다.
우리 영화판에선 홍상수(1960-) 감독이 그중 하나다. ‘바람(외도)’에 대해 열심히 팠다. 가진 건 없어도 가방-줄 하나 긴 것을 위안으로 삼는– 시간강사/삼류 작가/망한 감독 등 찌질한 남자들이 열심히 바람을 핀다.
일본 영화판에선 고레에다 히로카즈(1962-) 감독이 그랬다. ‘가족’에 대해 열심히 팠다. 데뷔작 <환상의 빛>부터 2022년의 <브로커>까지.
고레에다 히로카즈
1995년 <환상의 빛> 데뷔. 2004년 <아무도 모른다>는 14세의 야기라 유야에게 칸 국제 영화제 최연소 남우주연상을 안겨주었고, 본인은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와 <어느 가족>으로 칸 국제 영화제에서 심사위원상/황금종려상을 안았다.
주구장창 가족에 몰입했던 고레에다 감독의 작품을 연대기로 살펴보면 (사자死者가 생자生者의 삶에 미치는 영향 등의 부가적 주제들은 일단 접어두기로 한다.)
*재혼 가족의 이야기 <환상의 빛(1995)>
“도무지 모르겠어. 그 사람이 왜 자살을 했는지.”
“바다가 부른다고 하더라. 혼자 바다에 나가면 멀리서 예쁜 빛이 보인대.”
데뷔작 <환상의 빛>은 갑작스레 남편을 잃은 여자의 이야기다. 몇 년이 지나 재혼을 하고 새로운 삶을 살지만, 자살한 전 남편에 대한 마음의 정리가 완전하지 못해 혼란스러워하며 갈등을 빚는다. 바닷가에서 마주친 낯선 장례행렬을 따라가는 여자, 부모의 재혼으로 남매가 된 아이들의 뛰노는 모습... 히로카즈 감독은 과거와 분리되지 못한 여주인공을 통해 바닷가 마을에서 살아가고 있는 한 가족을 세밀하게 들여다본다.
*아빠가 다른 남매들의 이야기 <아무도 모른다(2004)>
“엄마, 나 학교 가고 싶은데...”
“학교 가봤자 재미없어. 그리고 아빠 없는 아이는 학교에 가봤자 왕따 당해.”
크리스마스엔 돌아오겠다는 엄마를 기다리는 네 남매 이야기. 아이가 많다는 이유로 쫓겨나 새로운 집으로 이사를 한 가족. 이삿짐을 푼 엄마는 아이들에게 ‘조용히 할 것, 밖에 나가지 말 것’ 등 주의사항만 알려주고 집을 나간다. 1달 만에 돌아와선 “크리스마스엔 올 거야” 다시 집을 나가 영영 돌아오지 않는다. 맏이 아키라가 동생들의 아빠를 찾아 생활비를 융통하고, 유통기한이 지난 편의점 음식들을 얻어 먹이며 고군분투해보지만 결국...
*남겨진 가족의 이야기 <걸어도 걸어도(2008)>
“미안해, 능력 없는 아들이라.”
“왜 남자들은 현재를 사랑하지 못하는 건지.”
비명에 간 장남을 잊지 못하는 엄마, 차남이라도 의사가 되길 원했던 아빠, 부모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아들, 애 딸린 과부로 재혼한 며느리, 핏줄이 다른 손자. 죽은 장남의 15주기週忌에 모여 1박2일을 함께 보내는 5인의 모습을 담은 영화다. 「인생은 언제나 조금씩 어긋난다(박애희)」는 수필집 제목을 연상시킨다.
*아이가 바뀐 가족의 이야기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2013)>
“일부러 그랬습니다. 노노미야씨 가족이 너무 행복해 보여서”
“왜 여태 몰랐을까. 난 엄마인데...”
소재만으로도 오만 가지 상상을 불러일으키는- 아이가 바뀌어버린 두 가족 이야기. 애지중지 키우던 아이가 6살이 되었을 때 조산원에서 연락이 온다. 아이가 바뀐 것 같다고. 청천벽력 같은 소식에 친자 검사를 해보지만 역시나! 양쪽 부모는 ‘하룻밤 자고 오기’ 미션 등 최선을 다해 교환(?) 프로젝트를 진행해보지만...
*엄마가 다른 자매들의 이야기 <바다마을 다이어리(2015)>
https://www.youtube.com/watch?v=te_VOdb1NBQ
“부인이 있는 남자를 사랑하다니. 그러면 안 되는 건데...”
“아버지, 진짜 밉지만... 다정한 분이셨나 봐. 이런 동생을 우리한테 남겨주셨잖아.”
이복자매들이 가족이 되어가는 과정을 그린 영화. 틀딱이지만 책임감 강한 맏이, 지지리도 남자 보는 눈이 없는 둘째, 둥글둥글한 성격의 막내. 바람난 아버지는 집을 나가고 열 받은 엄마는 재혼을 하고. 남겨진 세 자매에게 15년간 연락이 없던 아버지의 부고가 전해진다. 연락을 한 사람은 아버지의 세 번째 여자로, 두 번째 여자는 딸 하나를 두고 먼저 하직했다. 장례에 참석한 3자매가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된 아이를 거두며 4자매의 파란만장한 잔잔한 공생이 앵글에 담긴다.
cf. 낭만배달부가 꼽은 최고의 신
나무 기둥에 스즈의 키를 재는 장면. (강조되진 않았지만) 완전한 가족이 된 의례!
*무능한 이혼남의 이야기 <태풍이 지나가고(2016)>
“그렇게 열심히 아빠 노릇할 거였으면 같이 살 때 잘하지 그랬어.”
이혼남이 한 달에 한 번 아들을 만나는 날. 태풍이 몰아치고, 아이를 데리러 온 이혼녀 역시 발목이 잡혀 엑스-시댁에서 하룻밤을 묵는다. 푼돈으로 도박장을 찾지만 대박 소설로 재혼을 꿈꾸는 남자, 옛 남편엔 일말의 미련도 없는 여자, 은근히 재결합을 바라는 아들과 할머니. 이 영화 역시 「인생은 언제나 조금씩 어긋난다」를 연상시킨다.
*무연고 가족들의 이야기 <어느 가족(2018)>
“아이에게 도둑질시키고 양심의 가책은 없었나요?”
“가르쳐줄 게 도둑질밖에 없었어요.”
제71회 칸 국제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작품.
부부 같은 일용직 남녀, 노모 같은 할머니, 자식 같은 아이들 셋. 도쿄 변두리에서 혈연으론 생판 남인 여섯 식구가 할머니의 연금과 잔 도둑질로 생계를 꾸려나간다. 아버지 같은 남자는 아이들에게 도둑질을 가르치고, 노모 같은 할머니가 죽자 연금 수령을 위해 몰래 땅에 묻는다. 하루하루가 전쟁인 현실 앞에서 자본주의의 눈물 같은 죄책감 따위는 없다. 하지만 도둑질을 하던 쇼타가 도망치던 와중에 다리가 부러지고, 경찰의 조사를 받는 가운데 가족의 숨겨진 비밀들이 밝혀지는데...
사실 고레에다 감독은 구라를 쳤다.
<태풍이 지나가고>의 인터뷰에서
“이 작품을 끝으로 당분간 가족 드라마는 연출하지 않겠다.”
라고 했는데 2년 후 <어느 가족>, 다시 4년 후 <브로커>를 내놓았다.
아쉽게도 <브로커>는 지난달 75회 칸영화제에서 (작품에 대한) 수상을 못했다. 하지만 남우주연상을 배우만 보고 주나? 송강호가 남우주연상을 안은 것 자체로 작품에 대한 평가는 이미 내려졌다고 볼 수 있다.
이달 8일 개봉될 <브로커>
한국의 자본&배우와 손을 잡은 고레에다 감독이 이번엔 어떤 가족 영화를 선보일지 자못 기대가 된다.
첫댓글 저도 기대해요~
해밀 방장&둥지 식구들 꼬셔서 단체 관람? ㅎㅎ
@낭만배달부 오웃 🤭 단관이라. . 🤔
이 영화는 봐야지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