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왜 공부하나?
고린도전서 강의를 신청한 이유는 '기운싸움'에서 밀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에요.
한몸 이뤄 서로 사랑하는 관계로 살아보자고 지인들에게 전도하면서도 정작 스스로 이 삶과 부르심에 대한 확신이 부족한 스스로를 마주했고,
자본주의 사회의 죄인(?), 백수로 살아가면서 가슴을 옥죄는 실업상태의 불안, 경제적 안정&사회적 인정을 향한 두려움과 싸울 힘이 필요했어요.
내가 믿고 사는 만큼 전할 수 있을 텐데... 이런 기운, 실력 가지고는 안 되겠다 싶은 위기감에 신청하게 되었어요. 잘 배우고 몸과 마음에 새겨 생기 가득한 일상, 해방을 누리고 전하는 삶 되기를 바라봅니다.
# 밖으로 부름받은 무리, 교회
교회의 어원인 에클레시아는 문자적으로는 '밖으로 불러 모으다'는 뜻이라고 해요. 나답게 생명답게 살지 못하게 하는 착취와 억압의 구조, 소모적 노동과 일탈적 소비의 쳇바퀴에 갇힌 애굽적 삶 밖으로 불러내신 것이죠. 오늘도 야훼 하나님은 '더 괜찮은 나'라는 감옥에 갇혀 우월감과 열등감 사이를 오가고, 긍정받기 위해 눈치보고 분투하다 번아웃이 온 현대인들을 그 구조 밖으로 부르십니다. 물리적으로든 관념적으로든 우리는 우선 '출애굽'해야 합니다.
"지금도 이스라엘 자손이 부르짖는 소리가 나에게 들린다. 이집트 사람들이 그들을 학대하는 것도 보인다.
이제 나는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나의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게 하겠다."(출3:9-10)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
얼마 전, 교회 지체의 추천으로 <설국열차>라는 영화를 다시 보게 되었어요. 민중들은 꼬리칸에서 머리칸까지 돌진하여 엔진을 점령하면 세상이 달라질 거라고 믿었지만... 결국 열차라는 불의한 구조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모든 존재들이 기능과 역할로 분절되어 제자리를 지켜야만 한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열차 밖으로 나가는 선택을 해요. 열차 밖으로 나가면 설국, 차가운 죽음 뿐이라는 것은 주입받은 전제일 뿐이예요. 그 전제를 부수지 않는 한, 변화는 불가능해요. 우리가 지금 부수지 못하고 있는 전제는 무엇일까요?
출애굽이 끝은 아닙니다. 출애굽한 무리(교회) 안에서도 또 애굽적 문화, 착취구조가 생겨나고 결국 애굽과 다를 바 없어지는 것을 우리는 경험했지요. 그래서 바울이 에베소교회 장로들에게 안밖으로 오는 유혹과 핍박에 대해 그렇게 신신당부했나 봅니다. 교회공동체로 사는 삶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보다는 가나안으로 가는 광야길에 더 가까운 것 같아요(물론 그 여정이 곧 가나안이기도 하지요). 제가 살고 있는 '없이있는마을 교회'도 끊임없이 예언자적 공동체로 살아가기 위해 서로 깨워주는 과정에 있어요.
"여러분은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그들 가운데 여러분을 감독자로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느니라."(행20:28)
# 부르심의 목적, 서로 사랑하라
예수님은 혼자 일하지 않으시고 제자공동체를 부르셨어요. 그리고 성경은 그들을 부른 목적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지요. 1) 먼저 함께 살고 관계맺고, 2) 우리가 걸어가고 있는 이 길을 전하며, 3)귀신을 쫒아내는 권능을 가지게 하시려고 부르셨대요. 특히 요즘에는 3번째 목적에 주목하게 되어요. 20대 초중반 선교단체, 인권단체 활동을 함께 하던 지인들이 졸업 후에 성윤님 표현대로 '야생'에서 각개전투하며 결국 주류적 흐름에 휩쓸려 소시민적 삶을 살게 되는 모습을 보면서... 자본주의 구조가 심은 두려움에 일희일비하는 스스로를 보며... 우리를 옴짝달싹 못하게 하는 '거대한 힘'(귀신)이란 것이 정말 있구나 실감하고 있어요. 강사님이 "지금 우리에게는 귀신을 쫒아낼 능력이 있느냐"고 물으실 때에는 부끄러움과 간절한 마음에 가슴이 뜨거워졌어요.
그리고 예수님은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주셨어요. 사랑은 추상적인 연애감정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치열한 관계맺음이예요. 사랑은 모험이자 상처받는 일이며, 인내하고 용서하고 소망하고 책임지는 거라고 하셨어요. 그러자면 구체적인 사랑의 대상이 필요해요. 내 곁에 있는 사람부터 사랑할 수 있어야 하지요. 공동체로 살면서 내가 얼마나 사랑에 무능한 사람인지를 자주 경험합니다. 나와 취향과 기질이 달라서, 내 소유에 대한 인색함과 집착으로, 체력이 부족해서... 참 많은 이유로 사랑하지 못하는 스스로를 마주하게 되요. 그럴 때마다 하나님은 제게 가만히 십자가 못자국 난 손을 내밀어 보이십니다.
“힘을 내어라. 나 주의 말이다. 내가 너희와 함께 있으니, 너희는 일을 계속하여라. 나 만군의 주의 말이다. 너희가 이집트에서 나올 때에, 내가 너희와 맺은 바로 그 언약이 아직도 변함이 없고, 나의 영이 너희 가운데 머물러 있으니,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아라.”(학2:4-5)
주님의 영이 함께 있으니 두려워 말라며 ‘언약’을 상기시켜주십니다. 출애굽하여 가나안 해방의 길을 가자는 언약. 그리고 그 모든 여정 가운데 우리와 함께 하시겠다는 언약. 그리고는 묵묵히 예수님은 자신의 길을 걸어가십니다. 그를 따르는 이들과 함께 당신 나라의 일을 이루어 가셔요. 강사님은 부르심의 목적에 대한 간절함과 절박감, '빚진 마음'이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어요. 주의 일을 하다가 힘에 부친다 느낄 때, 가만히 그분의 따스하고도 결의에 찬 음성에 귀기울여야 하는 이유입니다. 그 음성은 때로는 내면의 음성으로 때로는 지체의 애정어린 권면으로 다가오는 것 같아요. 한 마음, 한 뜻, 한 몸된 관계가 중요한 이유예요. 하나님은 뛰어난 개인(one man hero)이 아닌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통해, 서로 사랑하는 관계를 통해 하나님나라를 드러내길 원하셨어요.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이렇게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계시고, 또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가운데서 완성된 것입니다.“(요일4:11-12)
함께 공부하게 된 분들 모두 반갑습니다. 모쪼록 이 시간이 교회된 우리 모두에게 '부르심의 소망', '함께하는 관계의 풍성함', '약속을 성취하시는 능력의 크심'에 대해 깊이 알고 경험하는 시간이길 기도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에베소서 1장 18-19절)
첫댓글 서로 사랑하기 위해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를 찾고 부르고 계십니다. 매일이 사랑하기 위한 날입니다!
내 목숨보다 더 중요한 그분이 내 안에 그리고 우리 안에 계십니다. 그분을 항상 잊지말고 사랑하고 공경하여 높임 받으시도록 매순간 깨어 있기를 기도합니다.
사랑은 하나님께서 주신 힘으로 할 수 있는 것같아. 그래도 그분은 항상 우리를 돕고 계시니까 힘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