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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 - 세상을 읽는 신학] (2) 신학적 사유와 성찰
신학, 삶의 자리에서 신앙에 비춰 나를 돌아보는 것
신앙적 사유와 성찰로서의 신학
한 시절 철학과 신학은 학문의 중심이었다. 하지만 근현대에 이르러 학문의 주도권은 사회과학과 자연과학으로 전이되고 있다. 인문학의 영역에서마저도 철학과 신학은 심리학에 밀리는 듯한 인상이다. 신학은 중심에서 멀어진 변방의 학문이 되었다. 어쩌면 오히려 변방에서 신학은 자신의 진정한 정체성을 찾을 수 있는지도 모르겠다. 예수께서 변방의 갈릴래아에서 당신의 일을 시작했듯이 말이다.
학문으로서의 신학은 자신의 고유한 역할을 가진다. 신학은 신앙을 탐구하고, 교회를 성찰하며, 세상을 읽어내야 한다. 신학은 신앙과 영성의 성장과 성숙에, 교회와 사목의 현장에 도움이 되어야 한다. 물론 학문의 쓸모는 실제적 효용성과 실천적 효과성에만 좌우되는 것은 아니다. 지금 당장 실용성이 보이지 않는다고 해도, 사유의 폭을 넓힐 수 있는 인식적 앎의 축적으로서의 학문은 그 자체로 의미를 지닌다.
좁은 의미에서의 학문은 체계적인 방법과 전문적인 언어와 개념을 매개로 전업적 학자들에 의해 전개된다. 하지만 넓은 의미에서의 학문, 즉 사유와 성찰로서의 학문은 모든 사람이 할 수 있고, 또 해야 하는 것이다. 아카데미의 학문은 점점 사람과 삶과의 관계성을 놓치고 자기들만의 리그에 머무는 경향을 보인다. 넓은 의미의 학문, 즉 삶의 자리에서 발생하는 사유와 성찰로서의 공부가 절실히 필요한 시대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그 본성상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이다. 신앙은 이성을 배제하지 않는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맹목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신앙이 아니라 언제나 이해하는 신앙, 해석하는 신앙, 식별하는 신앙이다. 신앙은 사유와 탐구와 성찰의 행위를 포함한다. 모든 신앙인은 자신이 살아가는 그 자리에서 사유하고, 탐구하고, 성찰해야 한다. 신앙인은 모두가 신학자다.
신앙은 무조건 믿는 것이라고 오랫동안 오해했다. 생각은 믿음을 방해한다고, 진정한 믿음은 단순한 믿음이라고 강조해왔다. 물론 믿음은 사유와 탐구와 성찰을 넘어선다. 하지만 사유하지 않는, 질문하지 않는, 성찰하지 않는 믿음은 왜곡되고 변질될 위험이 많다. 삶과 신앙의 자리에서 우리의 말, 행동, 태도가 정말 복음적(신앙적)인지 끊임없이 물어야 한다. 그 실제적 내용을 생각해보지도 않고 기계적으로 하는 신앙의 말들과, 그저 종교적 관습에 따라 습관적으로 하는 행동과 태도들이 신앙의 징표일 수 없다. 생각하고 공부하고 성찰하는 사람만이 참다운 신앙으로 나아갈 수 있다. 신앙적 사유와 성찰로서의 신학은 모든 신앙인에게 요청된다.
신학적 행위
신학하는 일은 신앙과 복음의 시선으로 우리의 말과 신념, 감정과 행동, 관점과 태도를 사유하고 성찰하는 과정이다. 신학적 행위는 우리 일상 속에서 이루어진다. 신학적 행위 안에는 경험(experience)과 탐구(exploring)와 성찰(reflecting)과 반응(responding)이 포함된다. 신학적 사유는 경험에서 출발한다. 무언가를 사유한다는 것은 어떤 경험을 통해 받은 느낌과 감정과 인상들이 우리를 자극하기 때문이다. 탐구한다는 것은 그 경험이 발생시킨 생각이나 감정이나 이미지들을 곰곰이 살피는 것을 뜻한다. 왜 그런 생각과 감정과 느낌이 들었는지, 그것들이 어떤 의미인지 분석하고 해석하는 것이다. 탐구 안에는 정치·경제적, 역사·사회적, 문화·종교적 맥락에서 분석하는 것과 자신의 관점에서 해석하는 것이 포함된다. 성찰한다는 것은 자신의 분석과 해석을 다시 숙고하는 것이다. 혹시 자신의 선입견과 편견에 의해 왜곡되는 건 아닌지, 분석하고 해석하기 위해 사용한 자신의 관점들이 복음적이고 신앙적인지 다시 살펴보는 일이다. 학문적 관점에서 말하면, 성찰하는 행위는 현재 상황을 복음과 교회의 가르침과 연결하는, 상관관계적(correlational) 과정이다. 반응한다는 것은 탐구하고 성찰한 내용을 구체적 삶의 자리에 적용하는 일이다. 신학은 사유이며 동시에 실천이다. 진정한 신학은 언제나 실천적이며 변혁적이다.
신학적 행위에는 네 가지 요소가 있다. 첫째,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 즉, 자신의 경험, 말, 감정, 정서, 행동, 태도를 살핀다. 둘째, 자신의 이야기가 어떤 입장과 관점에서 구성되고 있는지 헤아린다. 즉, 자신이 가진 신념, 주장, 확신, 의견 등이 어디에서 기인되고 있는지 숙고한다. 셋째, 자기 삶의 환경과 문화를 탐구한다. 넷째, 성경과 교리, 교회의 전통과 역사, 앞선 신앙인들의 신학적 사유와 성찰을 공부한다. 신학적 행위에 있어서 네 번째가 가장 중요해 보이지만, 앞의 셋을 포함하지 않는다면 죽은 신학이 된다.
신학적 태도 – 정직함, 섬세함, 겸손함, 자기성찰, 경청과 대화
공부는 정직한 질문을 던지고 그 답을 찾아가는 여정이다. 신학 역시 정직한 신앙적 질문을 던지는 일에서 시작된다. 신앙적 전통에 대한 질문이든 오늘의 상황에 대한 질문이든, 정직한 질문을 던지지 못하면 참다운 신학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정직한 질문은 듣고 배우는 공부의 길로 나서게 하고, 사유하고 탐구하고 성찰하고 응대하는 신학적 실천의 길로 나아가게 한다.
신학은 성급하지 않고 섬세하게 살피고 헤아리는 자세와 태도를 요청한다.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 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루카 2,19). 성모님의 태도는 신학하는 사람이 본받아야 할 핵심 태도다. 서둘지 않고 한 호흡을 쉬는 마음과 태도는 기도의 멈춤과 닮아있다. 기도하기 위해 잠시 멈춰서야 하는 것처럼, 신학하기 위해서 때때로 여유의 시간이 필요하다. 분주한 경쟁의 세상에서 사유와 성찰로서의 신학하기가 어려운 이유다.
신학은 확실성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절대적 진리이지만, 신앙적 진리에 대한 교회의 해석과 전통은 당대적 확실성일 뿐이다. 모든 것은 종말론적 완성을 향해 가는 여정 속에 있다. 이념적 확신이든 학문적 확신이든, 모든 확신은 폐쇄적이고 배타적이다. 신학은 겸손하고 개방적인 태도에 그 방점이 있다.
신학은 먼저 자기를 성찰하는 일이다. 성찰은 자신을 성찰하는 일이지 타자를 성찰하는 일이 아니다. 타자를 규정하고 판단하고 비판하는 일은 율법학자와 바리사이의 일이었다. 신학은 언제나 자기반성적이어야 한다.
신학은 가르치는 일이라기보다는 경청하고 배우는 일이다. 신학은 개인적이기도 하지만 상호적이기도 하다. 신학은 교회 공동체 안에서 이루어진다. 신학은 공동체 안에서 서로 경청하고 배우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열린 대화다.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 - 세상을 읽는 신학] (3) 세상을 읽는 신학
세상 속에서 하는 신학, 어떻게 살지 질문 · 성찰 · 탐구하는 일
“세상을 읽는 신학이란”
신학은 무엇을 할 수 있고 또 무엇을 해야 하는가? 신학은 우리가 신앙의 내용을 이해하고 신앙을 성숙시키는 데에 어떤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가? 신학은 오늘의 현실 교회 안에서 실제로 작동되고 있는가? 신학은 교회 공동체의 형성에, 교회의 사명을 수행하는 데 어떤 모습으로 기능하고 있는 것일까? 신학은 신앙인이 일상의 삶을 살아가는 데에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도움을 주고 있을까?
학문적 이야기는 자칫 딱딱하고 살짝 지겨울 수 있다. 물론 체계적인 학문으로서의 신학과 신앙적 사유와 성찰로서의 신학의 경계가 늘 뚜렷하지는 않다. 둘은 자주 겹쳐진다. 그래도 가능한 한 신앙적 사유와 성찰로서의 신학이라는 관점에 무게중심을 두고 싶다. 의도와 실제가 늘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신앙을 탐구하는 신학
전통적으로 신학의 과제는 신앙의 기원과 내용을 탐구하는 일이다. 신앙의 내용을 명제적으로 설명하는 교리의 형성과 변천 과정을 연구하고, 신앙과 교리의 전통 속에 담긴 진리와 그 현재적 의미를 탐구하는 일이다. 신학은 언제나 신앙과 교리와 긴밀히 연결된다.
우리는 하느님을 가톨릭적 방식으로 믿는다. 하느님을 신앙하지만, 그 신앙의 방식이 가톨릭적 방식이라는 뜻이다. 우리가 신앙하는 내용이 무엇인지,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 신앙하는지, 체계적이고 조직적으로 탐구하는 일이 신학의 과제였다. 계시와 신앙이 무엇인지, 그리스도교가 하느님을 어떻게 이해해왔는지, 하느님의 창조가 어떻게 진행되는지,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교회의 본질과 사명이 무엇인지, 죄와 은총 속의 인간이 무슨 의미인지, 왜 가톨릭은 칠성사를 수행하는지, 종말론적 완성이 무엇을 뜻하는지, 신학은 탐구한다. 이러한 탐구가 조직신학의 기본 틀이다. 조직신학의 이 전통적인 프레임은 여전히 오늘의 우리에게도 필요하다. 문제는 기존의 조직신학이 탐구해왔던 내용들이 오늘의 우리에게 과연 실제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에 대한 고민이다. 솔직히 말해, 많은 신학책들을 읽어 보지만, 신앙의 내용에 대해 더 깊이 알게 된다는 느낌이 잘 들지 않는다. 무엇이 문제일까.
하나의 신학적 진술이 어떤 구체적 실재를 지시하고 있는지에 대한 정직한 고민 없이 그저 추상적인 개념과 명제를 남발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하느님을 믿어 구원을 받는다”라는 명제를 생각해보자. 우리가 그 명제를 진술할 때, 과연 무슨 생각과 상상을 하는 것일까?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이, 그저 하느님에 대한 교리적 명제를 내가 수용하고 동의한다는 뜻일까? 하느님이라는 개념을 생각하고 말하기만 하면, 그것이 믿는다는 뜻일까? 우리는 ‘구원’이라는 단어를 통해 무엇을 상상하는가? 구원이라는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구체적으로 생각해보지도 않고, 그저 구원이라는 말을 습관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처럼 하나의 신학적 진술은 정직한 질문들을 통해서 그 의미가 분명해지고 다양해질 수 있다.
신학한다는 것은 신앙 내용에 대한 질문을 재구성하는 일이다. 자신의 정직한 질문을 던지는 데서 신학은 시작된다. 신앙의 내용에 대한 나의 관심과 질문은 무엇인가? 나는 하느님을 어떻게 믿고 있는가? 어떤 방식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체험하고, 닮으려고 노력하고 있는가? 하느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사실이,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나에게 어떤 의미로 작동되고 있는가? 신앙의 내용에 대한 우리 자신의 실존적이고 구체적인 질문을 던질 때, 우리의 신학은 좀 더 살아있는 신학이 된다.
교회를 성찰하는 신학
신학은 자기성찰적이다. 성찰은 언제나 자기반성적이다. 신학은 교회의 변화와 쇄신에 도움이 되어야 한다. 하느님의 백성, 그리스도의 몸, 성령의 궁전으로서 교회는 가시적 실재를 넘어서 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교회는 교계제도와 다양한 기관으로 구성되는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실재다.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을 끊임없이 지향해야 한다. 현실 교회는 종말론적 완성을 향해 가는 순례의 여정 속에 있다. 현실 교회에 대한 성찰과 반성이 신학의 과제와 사명이기도 하다. 오늘의 교회 현실이 정말 복음적인 모습인지, 교회 안의 많은 규범과 제도들이 복음과 신앙의 의미를 제대로 반영하고 있는지, 교회 안에서 평신도와 여성의 역할에 관한 규정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 질문을 던지고 성찰하며 새로운 현실 교회의 모습을 찾아가는 일이 신학의 과제다.
시대의 징표를 읽는 신학
하느님은 세상 모든 곳에서 우리와 함께하신다. 우리의 생각과 마음 안에서, 우리가 신앙생활 하는 교회 안에서,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과 사회 안에서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하신다. 신학은 당연히 세상 속에 계신 하느님에 대해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나의 일상생활이 복음적인지, 가족과 이웃과 직장 속에서 맺고 있는 관계들 속에서 자신의 마음과 행동과 태도가 예수님을 닮은 모습인지, 오늘의 사회적 현상들과 현실이 복음과 신앙의 눈으로 보았을 때 과연 바람직한 모습인지, 신앙인으로서 자신의 일상적 삶과 사회적 삶을 어떻게 수행해야 하는지, 질문하고 성찰하고 탐구하는 것이 세상 속에서 신학하는 일이다. 신학적 탐구의 대상은 이성적 사유와 교회의 영역에만 매몰될 수 없다. 세상을 복음과 신앙의 눈으로 읽는 일 역시 신학의 과제이며 사명이다.
신앙과 교회는 세상을 넘어 초월을 지향한다. 하지만 동시에 신앙과 교회는 언제나 세상 속에 있다. 세상을 읽는 신학이란 신앙을 탐구하는 신학, 교회를 성찰하는 신학, 시대의 징표를 읽는 신학, 그 모두를 말한다. 신학은 탐구와 성찰과 읽기를 포함한다. 탐구한다는 것은 질문한다는 것이고, 성찰한다는 것은 반성한다는 것이고, 읽는다는 것은 해석하고 관계를 맺는다는 것이다.
신학을 한다는 것은 자신이 무엇을 신앙하는지, 그리고 그 실제적 내용과 의미가 무엇인지 탐구하는 일이다. 자신이 속해 있는 현실 교회의 모습이 복음적인지 식별하는 일이며, 교회 공동체 형성을 위해 자신이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지 반성하고 성찰하는 일이다. 자신이 살아가는 가정과 직장과 사회 안에서 신앙이 어떻게 표현되고 고백되고 실천되고 수행되는지 곰곰이 들여다보는 일이다.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 - 세상을 읽는 신학] (4) 신앙에 대한 신학적 성찰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모습으로 사는 것이다
코로나 시절, 언론을 통해 종교 단체와 관련된 코로나 확산 소식을 자주 접한다. 한국 사회에서 코로나 대유행의 촉매제는 모두 그리스도교 이단 단체와 공격적인 선교 단체와 관련이 있다고 어떤 사람들은 분석한다. 신천지 교회, 사랑제일교회, 인터콥 선교회, 아이엠(IM) 선교회. 잊을만하면 한 건씩 발생한다고 사람들은 냉소적으로 말한다.
종교집회금지 명령에도 불구하고 대면 예배를 강행하는 일부 개신교 교회의 모습을 심심치 않게 발견한다. 신앙 공동체 구성원들이 함께 모여 기도하고 예배하는 것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이다. 하지만 기도와 예배만이 신앙의 전부는 아니다. 신앙은 그 어떤 단 하나의 요소로 축소 환원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신앙은 신비이며 다양한 요소들을 포괄하는 총체적인 것이다.
신앙은 총체적 신비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벌어지는, 즉 신앙과 관계된 사건들과 현상들과 사람들을 목격할 때마다 과연 사람들은 신앙을 무엇으로 여기고 있는지 궁금해진다. 세상 속의 숱한 신앙인들은 과연 신앙을 어떻게 이해하면서 신앙하고 있을까? 모두가 다 저마다의 신앙을 주장하고 고백한다. 대부분 다 자기 신앙의 정당성을 옹호한다. 자신의 신앙은 정통 신앙이고 교회의 신앙이라고 말이다.
신앙(faith)은 믿음(belief)과 구별된다. 신앙(信仰)은 믿음을 포함하며 넘어선다. 한자어 표현처럼 신앙은 믿고 받드는 일이다. 믿음은 어떤 확신, 신념, 신조와 관련된다. 문자적이고 맹목적인 확신, 종교적 윤리 규범에 대한 교조적 신념, 배타적 신념과 확신에 관한 우렁찬 고백, 개신교 일각에서 발견하는 신앙의 풍경이다. 한편으로 신앙은 받드는 일과 관련된다. 신앙은 하느님을 받들기 위해 제정된 제도와 관습과 전통을 수행하는 것이다. 제도와 전통에 대한 습관적이고 영혼 없는 따름, 형식적이고 기계적으로 예식에 참여하는 행위의 반복, 가톨릭 일각에서 발견하는 신앙의 풍경이다.
종교사회학적 관점에서 보면, 신앙(faith)은 신념(belief)과 행동(action)과 태도(attitude)와 소속되기(belonging)를 포함한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교리적 신념을 갖는 것이며, 종교적 행위와 신앙 윤리적 행동을 하는 것이며, 올바른 신념을 추구하고 신앙적 행동을 반복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쌓이는 어떤 태도와 덕(德)을 지니는 것이며, 혼자서 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 공동체에 소속되어 사람들과 더불어 하느님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신앙은 이 네 요소를 다 포함하며 그것들을 넘어서는 총체적인 신비다. 단순히 종교적 확신과 신념에 가득 차 있다고 해서 신앙이 깊은 것이 아니다. 습관적으로 기도와 예배 등 종교적 행위를 반복하고 있다고 해서 신앙이 충만한 것도 아니다.
동사적으로 생각하는 신앙
무엇인가를 구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명사적으로 사유하기보다는 동사적으로 사유하는 것이 더 좋다. 전통적으로 신학은 많은 것들을 개념적으로, 즉 명사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을 지녔다. 신앙, 믿음, 구원, 부활 등의 추상명사에 대한 신학적 설명을 읽다 보면, 어지럽고 난해한 느낌을 받는다. 정확한 이해를 위해서는 가능한 한 동사적으로, 또는 문장을 만들어서 파악하는 것이 더 좋다. ‘신앙’이라는 명사에 대한 추상적인 설명보다는 ‘신앙한다’(have faith in) 또는 ‘믿는다’(believe)라는 동사의 의미가 무엇인지 탐구하면, 신앙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신앙한다’는 동사의 주체가 누구인지 그 동사의 목적어가 무엇인지 생각하게 된다.
누가 신앙하는가? 동사는 주어에 따라 그 모습이 달라진다. 신앙하는 주체에 따라 신앙의 모습과 풍경이 달라진다. 나의 신앙, 너의 신앙, 우리의 신앙, 교회의 신앙. 신앙은 하나이지만 나의 신앙과 너의 신앙의 모습은 다를 수 있다. 같은 신앙을 고백하고 실천하고 수행하고 있지만, 나의 신앙 고백과 실천이 너의 신앙 고백과 실천의 모습과는 다를 수 있다. 구체적 삶 안에서 신앙은 언제나 다양한 모습으로 표현된다.
무엇을 신앙하는가? 동사는 목적어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진다. “교리를 믿는다”라고 말할 때, ‘믿는다’는 ‘동의한다’ 또는 ‘확신한다’의 의미를 지닌다. “사람을 믿는다”라고 말할 때, ‘믿는다’는 ‘신뢰한다’는 의미가 강하다. “하느님을 믿는다”라고 말할 때, ‘믿는다’는 더 복잡하고 포괄적인 의미를 지닌다. 생각한다, 느낀다, 체험한다, 관계 맺는다, 닮는다, 재현한다 등의 의미를 다 포함한다. 하느님을 머리로, 마음으로, 몸으로, 삶으로 믿는가? 동사는 수식하는 부사에 따라 의미가 달라진다.
하느님을 신앙한다. 이 표현에는 숱한 의미가 담겨져 있다. 그 깊은 의미는 단순히 하나의 문장으로 포획될 수 없다. 하느님에 관한 교리에 동의하는 것, 하느님을 느끼고 체험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 하느님과 인격적 관계를 맺고 그분을 닮고 재현하기 위해 애쓰는 것을 포함한다. 하지만 모든 것이 다 동시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어떤 때는 교리적 확신이 부족하고, 어떤 때는 하느님과의 관계와 체험이 흐릿하기도 하고, 또 어떤 때는 하느님을 닮기보다는 관습과 규범에 얽매이는 율법학자를 더 닮기도 한다. 이처럼, 신앙이 다양한 차원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되고 수행된다는 것을 알게 되면, 우리는 신앙에 대해 조금 더 겸손한 견해와 태도를 지니게 될 것이다.
신앙은 삶, 희망, 사랑이다
신앙은 머리와 마음과 몸, 즉 온 삶으로 하는 것이다. 신앙은 이성과 감정과 의지를 포함하는 총체적인 것이다. 신앙한다는 것은 주님을 생각하고 고백하는 것, 주님을 마음으로 신뢰하고 따르는 것, 온몸과 모든 의지를 다 해 주님을 닮은 방식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신앙은 맹목적 확신이 아니다. 신앙은 종교적 형식과 예식의 기계적 반복이 아니다. 신앙에 대한 언어적이고 고백적인 정의는 하나로 표현될 수 있지만, 실제 삶 안에서 신앙인들이 신앙하는 모습은 다양하다. 우리는 언제나 누가 신앙하는지, 어떻게 신앙하는지를 물어야 한다. 즉, 누구의 신앙인지, 어떤 신앙인지 질문해야 한다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모습으로 사는 것이다. 신앙은 교조적 확신이라기보다는, 숱한 의심과 회의와 흔들림에도 불구하고, 의지적으로 주님을 신뢰하고 희망하는 일이며 지금 여기서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일이다.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 - 세상을 읽는 신학] (6) 영성, 신앙의 색깔
영성, 신앙 살아내고 실천할 수 있는 내면적 의지이며 힘
‘영성’이란 말에 관한 오해와 편견
솔직히 고백하면, 신학생 시절 ‘영적 독서’라는 용어에 조금 비판적이었다. 일반적으로 영적인 것은 거룩하고 초월적인 것과 관련된다고 여겨진다. 따라서 신학생의 어떤 행위들에 세속과 구별되는 특권의식을 심어주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영적 독서란 읽는 대상의 거룩함과 읽는 방식의 거룩함 그 어디에 무게중심이 있는 걸까? 성경을 제외한 다른 책들은 그저 읽는 방식의 거룩함에서 영적 특성이 발생하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감히 하곤 했다. 그래서 영적 독서 시간에 몰래 본 회퍼의 「옥중서간」을 읽기도 했다.
전통적으로 교회에서는 영성의 수덕적인 측면과 신비적인 측면을 강조했다. 일반적으로 종교적 관습과 행위에 충실하고 외형적으로 경건한 태도를 취하는 사람들에게, 성체 앞에서 오랜 묵상과 관상을 통해 특별한 내면적 체험을 하는 수도자적 태도를 보이는 사람들에게 ‘영성적이다’라는 표현을 흔히 사용한다. 영성이라는 말이 외적 경건함과 내적 특수함에만 좁혀서 적용되는 경향이 많다.
영성에 관한 종교사회학적 이해
영성적이라는 것은 개인적이고 인격적인 것, 친밀하고 내면적인 것, 경험적인 것과 긴밀한 관련이 있다. 종교적이라는 말을 주로 공식적인 것, 외형적인 것, 제도적인 것과 관련시키는 것과는 대조된다.
현대인들에게 종교는 자주 부정적인 뉘앙스로 사용된다. “종교의 시대에서 영성의 시대로.” 요즘 쉽게 듣는 말이다. 종교의 몇몇 부정적 현상들이 종교적이라는 것과 영성적이라는 것을 구별하게 한다. 하지만 종교(성)와 영성은 언제나 깊이 연결되어 있다. 진정한 의미에서 종교적이라는 것은 영성적이라는 것을 의미해야만 한다.
신앙생활, 종교생활, 영성생활. 통상적으로 서로 다른 뉘앙스로 우리는 이 말들을 사용한다. 종교생활은 성당에 가서 성사와 전례와 본당 공동체 생활을 하는 것, 영성생활은 일상 안에서 개인적이고 내면적인 기도생활을 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외형적 신앙생활은 종교생활이고, 내면의 신앙생활은 영성생활이라고 너무 쉽게 구별해버린다. 더욱이 많은 경우, 신앙생활을 종교생활로 좁혀서 이해한다. 이것은 신앙이 외적이고 규범적인 것, 즉 종교 관습과 규범을 지키는 것이고, 영성은 정신적이고 내면적인 것이어서 개인적 차원에서 행하는 것으로 오해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 하지만 신앙생활은 종교생활과 영성생활을 포함하는 것이다. 신앙, 종교, 영성. 구별은 해 볼 수 있지만, 진정한 맥락에서 그 셋은 하나일 것이다.
영성(spirituality)은 몸(body), 마음(정신, mind, spirit), 영혼(soul) 모두와 관련이 있다. 오랫동안 영성은 몸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오해했다. 현대적 이해 안에서 몸과 마음과 영은 언제나 연결되어 있다. 영성수련은 몸의 수련, 마음의 수련, 영의 수련 모두를 포함한다.
영성에 관한 신학적 이해
성서적 관점에서 보면, 영성은 하느님의 영에서 오는 것을 받아들이는 일이며(1코린 2,14), 육에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로마 8,13),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사람”(콜로 1,28)이 되는 것이다. 결국, 성령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불성’(佛性)이라는 말처럼, 그리스도교에서 영성이란 세례 받은 신앙인 모두에게 주어진 신앙의 속성이라고 볼 수도 있다.
신학이 이성적인 이해를 추구한다면, 영성은 내면적이고 주관적인 체험을 강조한다. 하느님을 이해하기보다는 하느님을 체험하고 경험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긴다. 초월적 경험과 신비 체험과 같은, 특별한 체험을 자꾸만 영성과 결부시키는 경향이 있다. 영성과 신비주의를 혼동한다. 환시와 환청을 통한 내면적이고 신비한 체험을 하는 신비가들이 영성가의 대명사로 흔히 지칭되고 있다. 하지만 신비주의는 영성의 한 형식일 뿐이다. 하느님 체험은 특별하고 특수한 형식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일상의 경험 속에서 발생한다. “‘옆집’의 성인들”(프란치스코 교황 권고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7항)이라는 표현은 영성적 체험, 즉 거룩한 체험은 꼭 특수한 상황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 속에서도 이루어진다는 뜻이다. 어쩌면 일상의 영성이 더 중요한지도 모르겠다.
영성은 관계성을 의미한다. 영성은 하느님과 관계를 맺는 것이며, 하느님과의 관계를 토대로 자기 자신과 이웃과 세상과 관계 맺는 일이다. 영성은 개인적이고 내면적인 차원뿐만 아니라 공동체적이고 사회적인 측면을 포함한다.
영성은 하느님과 일치를 뜻한다. 일치해서 하느님처럼 되는 것이다. 전통 신학에선 이것을 성화(santification), 신성화(deification), 신화(神化, divinization)라고 불렀다. 일치한다는 것은 단순히 관상적 체험을 통한 내면의 일치만을 뜻하지 않는다. 인간의 내면은 얼마나 변덕스러운가. 삶 안에서 생각과 행동과 태도의 일치를 통한 전인적 합일이다. 생각과 마음과 행동과 태도가 하느님과 예수님을 닮아 일치하는 것이 진정한 성화의 길이다.
영성은 신앙을 살아내는 방식이다
영성이란 삶 속에서 신앙을 고백하고 표현하고 실천하고 수행하는 방식이다. 신앙을 살아내고 실천할 수 있는 내면적 의지이며 힘이다. 신앙은 결국 예수를 생각하는 것, 따르는 것, 닮는 것, 재현하는 것, 예수와 일치하는 것, 예수와 인격적 관계를 맺는 것이다. 예수의 생각, 시선, 행동, 태도, 삶의 방식, 그 모두를 닮는 것이다. 영성이란 예수처럼 사는 것이며, 예수처럼 살게 하는 내면적 의지와 힘이다.
영성은 다양한 스타일로 표현된다
영성은 신앙이 수행(고백, 표현, 실천)되는 색깔과 모습이다. 당연히 다양한 색깔, 다양한 모습이 있다. 학문적 관점에서 역사 속의 영성의 스타일을 금욕적이고 수도자적 영성, 신비주의 영성, 능동적이고 실천적인 영성, 예언자적이며 비판적 영성으로 분류하기도 한다.
신앙이 다양하게 표현되는 것처럼, 신앙의 특성인 영성 역시 다양하게 표현될 수 있다. 생태 영성, 사제 영성, 수도자 영성, 평신도 영성 등등의 표현에서 볼 수 있듯이 영성의 색깔은 다양하고 다채롭다. 신앙을 살아내는 저마다의 모습은 자기 삶의 자리에서 다양할 것이다.
자신의 신앙이 어떤 모습인지, 어떻게 신앙을 살아내고 있는지, 신앙을 고백하고 실천하는 자기 내면의 의지와 힘이 어떤지에 대해 성찰하며 신앙을 실천적으로 살아낼 수 있는 역량을 키우는 일이 영성수련이다.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 - 세상을 읽는 신학] (7) 일상의 신학 - 늙어감과 소멸에 대한 신학적 단상
신앙 안에서 걸어가는 노년의 길은 곧 완성을 향한 길
늙어가는 몸을 바라보며
언제부터인지 부쩍 나이를 의식하고 죽음을 생각하는 일이 잦아졌다. 모든 것들에서 소멸과 죽음의 흔적을 발견한다. 새해를 시작한다는 설렘은 사라졌고 달력의 날들이 가는 것이 그리 반갑지 않다. 미래에 대한 희망과 기대를 갖지 못한다. 의식 속의 나는 늘 그대로의 나인데, 몸은 세월의 풍화를 고스란히 견뎌내고 있다. 공부할 수 있는 체력도 예전 같지 않고 몸은 곳곳에서 반란을 일으킨다. 하지만 내 생을 지탱하며 나를 끌고 온 내 몸이 고맙고 대견하다. 타인과 세상의 시선 속에서 불편해지는 노년의 몸이라 할지라도, 내 자신만이라도 그 늙은 내 몸을 사랑하고 고마워해야 한다고 다짐을 한다.
늙는다는 것은 몸이 노화된다는 뜻이다. 더 읽지 못하게 하는 노안, 감각들의 전반적인 약화, 몸의 균형과 조절 능력의 쇠퇴가 괜히 서럽다. 늙은 몸은 타인의 시선에서 배제된다. 때때로 혐오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물론 노년의 시기가 길어진 오늘의 세상은 늙음과 늙은 몸에 대해 조금은 관대해지고 있다. 그래도 슬픈 것은 어쩔 수가 없다.
산다는 건 감각의 향연
늙어가면서 뜻밖에도 몸의 중요성을 깨닫는다. 흔히 정신과 영혼이 더 중요하다고 말한다. 오랫동안 철학과 신학은 몸보다는 정신과 영혼을 더 강조해왔다. 하지만 적어도 이승의 삶 안에서는 정신과 영혼은 몸이 없다면 존재하지 않는다. 몸은 정신과 영혼이 깃드는 자리이며 토대다.
몸은 감각이다. 우리는 몸을 통해 보고(시각), 듣고(청각), 맛보고(미각), 만지고(촉각), 냄새를 맡는다(후각). 우리의 생은 어쩌면 이 감각을 통해 살아있음을 느낀다. 욕망의 감각이라기보다는 생동함의 감각이다. 죽음은 이 감각의 상실을 뜻한다. 더 이상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 맛보지 못하고 만질 수 없고 그리운 향기를 맡지 못하기 때문에 소멸은 슬프다.
황동규 시인의 최근 시집 「오늘 하루만이라도」에는 소멸이 가까워지는 시간 앞에서 감각의 즐거움이 사라질 수 있다는 안타까움과 아쉬움이 가득하다. 시인이 사랑했던 감각은 무엇보다 청각과 시각의 즐거움이었다. 시집 안에는 여전히, 사랑하는 음악을 듣는 일, 차를 타고 가서 조우하는 다양한 장소의 풍경들을 응시하는 일, 일상에서 마주하는 사물들의 우연한 정경을 바라보는 일에 관한 즐거움이 가득하다.
“오디오에선/ 청각을 뿌리까지 잃은 베토벤이/ 소리의 어둠 속에서/ 소리로 노래하고 소리로 몸부림치고/ 소리로 깊어진다.”(‘이 겨울 한밤’)
“세상이 느닷없이 모습 바꾸는 곳과 만나는 일은/ 삶이 어쩌다 던져주는 짜릿한 선물.”(‘홍천 구룡령九龍嶺길’)
“산책길 언덕, 흰 눈 막 비집고 나온 노란 복수초 보고/ 이런 게 바로 사는 맛 어쩌고 하며 자리 뜨지 못하다니.”(‘대낮에 밤길 가듯’)
감각을 느낄 수 있는 한 우리는 살아있다.
“그 어디서고 삶의 감각 일깨워주는 자에게/ 죽음의 자리 삶의 자리가 따로 있겠는가?”(‘죽음의 자리와 삶의 자리’)
늙어가는 몸이 서러운 이유는 감각은 시들어가고 몸의 아픔만 선연하기 때문이다. 늙은 몸의 감각은 생동하는 감각이 아니라 고통의 감각이다.
“감각은 시들어도/ 아픔은 방금 뱀 입에 물린 개구리같이 생생하다.”(‘일곱 개의 단편斷片’)
늙은 몸이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오늘 하루만이라도” 감각의 향연을 만끽하는 일이다. “그래, 다시 하루다/ … /언젠가 몸이 망설이다 마음 덜컥 내려놓으면/ 그 방향에서 생판 모를 형상으로 죽음이 동틀 거다.”(‘삶의 앞쪽’)
신앙 안에서 잘 늙어간다는 것은
늙음은 몸과 마음을 위축시킨다.
“삶의 폭 점점 졸아들다/ 조그만 포구 되었다.”(‘조그만 포구’)
“노인들은 자신이 예전과 다르기 때문에 환영받지 못할 것을 두려워한다. 그리고 남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주체성과 자아가 작아진 느낌을 받는다.”(마사 누스바움 「지혜롭게 나이 든다는 것」 중) 이 비대칭적 의존이 주는 두려움과 위축감이 역설적으로 공격성과 폐쇄성을 낳는다. 지혜롭고 관대한 노인에 대한 이상(理想)은 오늘의 시대에 더 이상 작동되지 않는 것 같다.
많은 허울들을 벗어버리고, 때론 탈속한 포즈를 취해보기도 하지만, 잠깐의 허세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노년을 담담하게 수용하고 잘 늙어가는 사람이 되는 일은 여전히 어렵다. 신앙인은 매일의 삶을 예수의 이야기에 관계시키고 준거점을 두는 사람이다. 그런데 젊은 예수의 이야기에서 노년에 관한 함의를 찾는 일은 쉽지 않다. 신앙의 전통 속에서 지혜롭게 노년과 소멸을 맞이한 신앙의 선인들에게서 배울 수밖에 없다.
로마노 과르디니는 늙어간다는 것에 대한 내면적이고 신앙적인 수용을 강조한다. 청년이든, 중년이든, 장년이든, 노년이든, 모든 세대는 그 자체로 고유한 양식과 가치를 지닌다. 생을 계획하고 미래를 준비하는 세대는 하느님에 대해 생각하기 어렵다. 삶의 끝자리에서 우리는 자기 생의 전체 맥락을 생각하게 된다. 노년의 시기는 용기와 정직성을 갖고 삶의 전 문맥을 돌아보는 시간이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죽음의 의미와 가치를 직시하는 시간이어야 한다. 죽음은 이승에서의 소멸을 뜻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신앙적 완성을 의미한다.(로마노 과르디니 「삶과 나이」) 신앙 안에서 노년의 길을 걸어간다는 것은 완성을 향한 길이라는 것을 희망하며, 노년의 시간 역시 기쁨으로 살아야겠다고 의지를 다잡는다.
살아온 방식으로 죽음을 맞이한다
그래도 늙는다는 것은 쓸쓸하고 서러운 일이다. 여전히 소멸이 무섭고 두렵다. 이성과 의지는 노년과 소멸에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지만, 감정과 정서는 이성적 성찰과 의지적 신념을 따라가기가 쉽지 않다. 지난 시절 감각의 기억들이 향수처럼 떠오른다.
하지만 기억과 추억으로 살아가긴 싫다. 청춘의 시기가 탈렌트 다섯의 시간이라면, 노년의 시기는 탈렌트 하나의 시간일 것이다. 다섯 탈렌트를 부러워하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한 탈렌트를 땅에 숨겨두는 어리석은 종의 모습으로 살고 싶진 않다.(마태 25,14-30) 늙음의 시기 역시 그 나름의 역할과 의미가 있으리라 희망한다.
죽는 그 순간까지 공부하고 성찰하고 일상적 수행을 계속해야 한다. 삶이 아름답지 않으면 죽음도 아름답지 않다. 사람은 자신이 살아온 방식과 모습으로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삶과 죽음은 언제나 연결되어 있다. 오늘을 신앙으로 살아낸다면, 내일도 신앙으로 맞이할 것이다. 그 언젠가의 내일이 죽음이라 할지라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