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관화와 문학성
권대근
문학박사, 대신대학원대학교 교수
미적 감흥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본격수필의 생명이다. 이는 수필이 단순한 체험의 나열이나 기록이 아니라 체험의 문학적 형상화로 승화된 글이어야 한다는 뜻이다. 수필이 자기고백적이고 체험적 문학이다 보니 본 것을 실감의 유리 없이 그대로 상대에게 사건을 이야기하는 수준에 머물러서는 좋은 수필이라 할 수 없다. 문학으로서 또 예술로서 가져야할 전달차단성이 주는 수준 높은 미적 쾌감을 줄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수필가는 독자에게 연상과 상상을 불러일으키는 상관성 있는 제재를 선택하고 그 제재와 자신의 체험을 버무려 그 속에 주제를 구현하는 전략을 세워야 한다. 이때 필수적으로 고려해야 하는 것이 제재와 주제의 상관성이다.
제재와 주제의 상관성이란 사물을 바라보는 주체적 수필가가 나타내려는 주제의식과 대상 사이에 얼마나 유사성이 있느냐를 말한다. 유사성이 있는 제재를 통해 주제를 내포하도록 하게 되면 독자는 상상과 연상을 통해 숨어있는 주제를 찾아가며 미적쾌락을 맛볼 수 있게 된다. 본격수필이라면 문학의 쾌락성 외에 또 다른 목적인 효용성을 별개로 따져보아야 함은 물론이다. 제재와 주제와의 유사성은 적을수록 효과적이다. 제재를 보고 누구나 떠올리는 주제라면 이미 식상하여 글을 읽고 깊은 맛을 느끼기는 어려울 것이다. 도저히 연결 짓기 어려운 제재를 가지고 참신하고 창의적인 시각으로 주제를 표현해 낸다면 문학적 감동은 증폭되기 마련이다.
김영미의 「먹줄을 튕기다」
먹물에 잠긴 먹줄을 풀어본다. 내 영혼이 자랐던 옛집에도 먹줄을 놓았다. 낯설고 환한 새 길이 또 하나 생겨 할아버지의 옛길과도 이어졌다. 곧게 그어진 먹줄을 밟으며 나는 부지런히 새로 난 길을 오르내릴 참이다. 무서리 내린 창밖에는 한평생 먹줄을 튕기던 김 목수의 너털웃음이 겨울햇살에 녹아들고 있다.
작가에게 먹줄을 잡히고 ‘요놈이 속은 시꺼멓지만 경우 하나는 바른 놈이여.’라고 말하는 김목수가 은연 중 주제를 풀어낸다. 그 끈을 잡고 작가의 체험이 뒤따른다. 새로 이사 온 작가네를 잘 돌봐주면서도 인사 한 마디 하지 않는 작가를 괘씸하게 여긴 할아버지의 속내를 먹줄을 치듯 바른 경우를 가르쳐 주며 인도하려는 어른의 일침으로 받아들인다. 집짓기에서 마주친 먹줄치기의 곧은 선을 마주하고 삶의 경우 바른 태도를 이끌어낸 작가의 노력이 수필 전체에 문학성을 답보하고 있다.
김준태의 「당랑」
대선이 임박했다. 역사의 수레바퀴에 거철하는 당랑 같은 후보자들이 보인다. 건널목에서 싱싱 달리는 차도 겁내지 않고 신호등도 무시한 채 길을 건너다 차에 친 버마재비같이 보인다. 차에 치어 나뭇잎처럼 납작해진 몸을 끌고 죽을힘을 다해 버둥거리는 불쌍한 버마재비가 그래도 어디에 살아 있었으면 좋으련만 낙엽인 줄 알고 거리 청소부 아저씨가 쓸어버렸을 것만 같다.
사마귀는 그 특이한 생태로 인해 작가들이 문학작품에 많이 사용하는 제재다. 어울리는 거처인 숲으로 가지 않고 상처 입은 몸으로 도심을 헤매는 당랑을 보고 작가는 자기의 역량을 헤아리지 않고 함부로 무모하게 덤벼드는 선거에 나선 후보자들을 떠올린다. 사마귀의 처지와 후보자들의 상황이 절묘하게 어울려 제재 간의 상관화를 이루고 주제의 구현에 이바지하였다. 넌지시 사회비판의 현미경을 갖다대는 작가의식이 엿보이는 수필이다.
문희봉의 「새로운 시작」
이동 중 고난은 이미 예견된 것들이다 강을 건너면서 악어들의 습격을 받는다. 어미 누우는 악어에게 뒷발이 물려도 쉽게 생을 포기하지 않는다. 필사적인 노력으로 물속을 빠져 나와 ‘휴우’한숨을 쉰다. 그러고도 절벽을 뛰어내려야 한다. 꽤 높은 절벽도 뛰어내리지 않으면 안 된다. 어린 누우는 악어의 습격에 기진맥진 생을 포기하고 물속으로 끌려 들어간다. 그 광경을 바라보는 어미 누우들은 물론이고 내 눈에도 물기가 고인다.
건기에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누우떼의 영상을 보며 작가는 자신의 인생을 생각한다. 인생의 건기에 겪었던 수난들이 예사롭지 않지만 작가는 자신의 삶에 꿈을 입히고 긍정하며 도전을 결심한다. 인생의 건기를 지혜롭게 이겨낸 경험을 통해 다가오는 삶을 찬란하게 엮어내리라는 다짐이 아름답다. 목숨을 위협하는 위기를 견디며 신천지로의 이동을 실행하는 누우의 행진을 인간의 삶과 멋지게 상관화시켰다. 누우가 신천지에 도착하여 생명수를 마시게 되듯 작가는 인생의 건기를 극복하고 멋진 내일을 영위할 수 있을 것이다. 수필이 고백문학이고 성찰의 특성을 가지기는 하지만 글의 뒷부분 삼분의 일 가량을 자신의 결심을 피력하는데 배분하였다. 주제가 직접적으로 드러나면 비문학적 특성들이 나타나게 된다. 이왕 상관화시킨 누우의 이동을 주제 구현에 좀더 활용했다면 더욱 문학성을 지닌 글이 될 수 있었겠다는 아쉬움을 갖는다.
김옥순의 「부부송」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부부송은 억척같이 뿌리를 내리며 살아 있다. 작고 초라한 몸피까지 영락없이 엄마와 아버지를 닮았다. 때마침 한 줄기 바람이 사납게 불어온다. 우람하고 튼튼하지 않지만, 억세고 험악한 바람에 맞서도 부러지지 않는다. 휘청거리던 소나무는 제자리에 서서 숨고르기를 할 뿐이다.
부부송(夫婦松)은 대체로 주제를 쉽게 예측할 수 있는 소재에 속한다. 유사성이 높다는 말이다. 따라서 낯설게 하기를 통한 참신성을 획득하고 글의 문학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주제구현을 위해 천착해가는 과정이나 서사의 내용이 남달라야 한다. 살아생전 다정하셨던 작가의 부모님은 두 분의 추억이 어린 바다에 수장되기를 원하셨다. 돌아가신 부모님이 그리워 그 바닷가를 찾은 작가는 우연히 부부송을 보게 되고 그것에 이름을 붙여놓고 엄마 아버지로 생각하고 싶어한다. 흔적이라도 있으면 좋겠다고 갈망하는 작가의 그리움이 눈물겹다. 소나무를 통해 부모님의 부부애와 자신이 가지는 그리움을 잘 엮어내었다. 또한 문단의 자연스러운 짜임이나 사건에 의미를 부여하는 작업, 문단구성, 주제를 매력적으로 상기시키는 결말의 여운적인 처리 등의 형식면에도 능숙하여 작가의 의도대로 독자를 이끌어갈 수 있는 능력을 보인다.
이상으로 제재와 주제의 상관성 측면으로 몇 작품을 살펴보았다. 일상적인 소재를 제재로 변용시켜 주제표현의 매개로 삼겠다는 수필가의 의지와 제재를 찾아내는 날카로운 시선이 본격수필을 쓸 수 있게 하는 바탕이 된다. 경험을 있었던 이야기로만 풀어내거나 경험을 문학적 사건으로 변용시켜 체험으로 활용한다 하더라도 색다른 전략으로 형상화해내지 않는다면 독자에게 문학적 감동을 안겨줄 수 없다. 수필은 ‘제재로 주제를 겨냥하는 문학’이다. 주제를 나타내기 위해 어떤 것이 가장 적재인지 고르는 눈을 갖고, 수필적 사유를 통해 형이하학적인 것을 형이상학으로 승화시킬 때 본격수필이 탄생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