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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 9일 광주광역시 동구의 한 재건축단지 옆 버스정류장에 버스가 약 5초간 정차했다 출발하려는 순간 정류장옆 재건축단지에서 건물해체작업중이던 5층짜리 건물이 도로쪽으로 무너져 버스를 덮쳤습니다. 사고를 당한 버스는 동구 무등산국립공원과 북구 전남공무원교육원을 오가는 ‘운림54번’ 시내버스였습니다. 총 17명이 타고 있던 것으로 파악된 버스 승객중 9명은 그 자리에서 숨지고 8명이 중상을 입어 중환자실에서 치료를 계속 받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사망하신 분들 중 한 명은 고등학교 2학년 학생 김모군인데 이 날 온라인 수업을 받는 날이라 등교하지 않아도 되었던 김군은 “교내 동아리 친구들과 만나기 위해 학교를 다녀와야한다”며 나갔다가 귀가길에 사고를 당하였습니다. 2대독자이면서 늦둥이였던 김군은 이 날 학교에서 버스를 타며 아버지에게 전화해서 “아빠, 나 이제 가요. 버스 탔어요”라고 전화했는데 도착할 시간이 한 참 지났는데도 오지 않아 걱정하던 중 아버지가 버스가 무너진 건물에 깔렸다는 뉴스를 보게 되어 사고현장으로 달려와 아들의 시신을 확인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또 한 분의 희생자 60대 곽모씨는 큰 아들의 생일날에 목숨을 잃었습니다. 광주 동구 지산동에서 자신이 운영중인 곰탕집에서 일한 후 귀가하다가 사고를 당했다고 합니다. 큰 아들과 둘이서 함께 살고 있고 다른 가족은 따로 살았는데 당일 오전 출근하면서 그 날 생일인 큰 아들에게 “생일 밥 차려놓고 갔으니 챙겨 먹으라”고 전화를 했다고 합니다. 그 날 생일상을 차려줬는데 그 생일상이 어머니가 차려준 마지막 생일상이 되었습니다. 대구에서 일하다가 소식을 듣고 달려온 둘째 아들은 사고 현장은 보지도 못했다며 “지난 주말에 내려와서 어머니를 뵈었는데, 그게 마지막이 될 줄은 몰랐다고 눈을 붉혔다고 합니다.
또 한 명의 희생자는 요양원에 계신 어머지 병문안하기 위해 아버지와 함께 버스를 타고 가던 딸이었습니다. 버스를 타고가던 서른 살 김모씨는 마냥 기다리고 있을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어서 “엄마, 조금 있으면 도착해요.”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게 딸인 김씨와의 마지막 대화였습니다. 취직준비생이었던 김씨는 취직시험을 준비하며 바쁘게 하루하루를 보냈는데 그럼에도 정규직에 취직되기전이라도 가계에 부담이 안되려고 카페와 독서실 등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부지런히 가계살림을 도왔던 딸이었습니다. 또한 어머니의 건강, 아버지의 일상생활까지 챙기는 살가운 딸이었습니다. 함께 타고 있던 아버지는 중환자실에서 잠시 눈을 뜨게 되었을 때 “딸은 어떻게 되었냐” 물었다고 합니다. 딸은 사고현장에서 바로 생명을 잃고 아버지는 중환자실에 누워있는 안타까운 상황이 알려졌습니다.
사망자 9명 모두 어디 사연이 없는 분이 있겠습니까 하지만 그래도 이렇게 사고를 통해 알게된 가족들의 일면을 이야기 들으면서 정말 가슴이 먹먹하게 미어집니다. 정말 가족이라는 이름은 애뜻하고 뭔가 특별한 감정으로 하나되어 있는 존재입니다. 아무리 가족관계가 좋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가족을 잃으면 정말 가슴이 아프고 엄청난 충격을 받기도 하고 그간 미웠던 감정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금방 풀리게 되는 것이 가족이라는 관계의 사람들인 듯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자신의 어머니와 동기들이 예수님을 찾아왔는데도 가족을 외면하고 오히려 진짜 가족들은 지금 자신과 같이 생활하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듯 말하며 가족을 무시하는 듯 보여주고 있습니다.
과연 예수님의 본심이 그런 것일까? 그래서 이 땅에서의 가족은 아무 필요없고 뜻을 같이 하며 천국을 소망하며 사명을 함께 하는 사람만이 가족이라고 보는 것인가? 우리는 이런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은 것을 우리는 오늘 본문과 성경 전체의 흐름속에서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예수님과 진정한 가족이 되는 사람들을 살펴보고 저와 여러분 또한 진정한 가족의식속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의 가족인 사람은, 첫째로 혈육이기에 안부에 관심가지고 찾아오는 사람입니다.
마가복음 3장 31절입니다.
“그 때에 예수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와서 밖에 서서 사람을 보내어 예수를 부르니”
예수님의 어머니와 동생들은 예수님의 사역지까지 찾아왔습니다. 예수님께서 지금 하시는 일이 어떤 지 궁금하고 어떻게 생활하는 것인지도 궁금해서 찾아온 것입니다. 가족이라면 당연히 이런 것이 궁금할 것입니다. 저도 대학교때 집과 학교가 거리가 꽤 떨어져서 학교 통학하는데 안 막혀도 두 시간 가까이 걸려서 너무나 힘들었던 때 한 학기정도 자취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다가 대학생 때 자취해보니 영적인 관리도 안되고 육적인 측면에서도 오히려 좋지 못한 일들이 생기는 듯 해서 졸업할 때까지는 그냥 ‘시간 많이 걸려도 집에서 다니자’라고 결정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대학원에 진학하면서부터는 학교생활과 교회전도사사역을 경기도권에서 하게 되니 어쩔 수 없이 따로 집을 구해서 지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신학대학원은 1,2학년때는 부산에 주민등록이 되어 있고 기숙사도 거의 모든 지방생들을 수용가능해서 기숙사생활을 하였는데 신학대학원 3학년 한 학년 동안은 기숙사 수용이 불가능해서 지방생이라고 하더라도 생활하기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교회에서도 주일사역뿐 아니라 매일 새벽기도, 수요일 저녁예배등도 참여하기를 원하는 상황에서 그냥 자취를 하기로 했습니다. 아무튼 대학교에서 한 학기 자취생활할 때나 신학대학원생 자취생활할 때나 부산에 계신 가족들은 같이 잠을 자기도 힘든 쪼그만 단칸 방이 뭐가 그리 궁금한 지 수시로 찾아와서 집안살림 들춰보고 밥은 제대로 먹고 다니는 건지 제 때 집에 들어가는 건지 참 관심이 참 많았습니다. 왜 그럴까요? 가족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오늘 본문의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도 예수님을 가족이라고 생각하기에 찾아오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찾아온 김에 얼굴이라고 한 번 보려고 부던히 노력하였습니다.
누가복음 8장 19절입니다.
“예수의 어머니와 그 동생들이 왔으나 무리로 인하여 가까이 하지 못하니”
이 본문에서 예수님의 가족들은 가족이지만 사역에 방해될까봐 조심합니다. 그리고 자신들보다 지금 더 예수님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있을까봐 가까이 하지도 못하고 그냥 쳐다보고 있습니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흘러서 모여있는 사람들이 흩어지고 조금 잠잠해질 때 만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을 성경에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 가족이기에 예수님께서 어떤 사역을 하시는 지 관심을 가지고 주변에서 살펴보고 있는 예수님의 어머니와 동생들을 볼 수 있습니다. 가족이기 때문에 이런 저런 형편을 살펴보고 안부를 물으려는 의지를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가족이 아니었으면 조금 불편하거나 어려운 형편이면 돌아갔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부산에 사시는 저의 어머니께서 엊그제 6월 11일에 코로나백신 1차접종을 받으셨습니다. 1차접종을 받고 나서 정말 기분좋답니다. 뭐가 기분좋으냐? 백신을 맞아서 이제 조금 안심할 수 있는 상황이 되어서 기분좋았을까요? 아뇨 어머니께서 하시는 말씀은 백신맞아 좋은 이유가 “백신맞으면서 괜찮았냐?”, “백신맞은 이후에 이상증세는 없냐?” “조금이라도 이상있으면 해열진통제도 먹고 그래도 안되면 빨리 병원가라” 등등... 경기도 사는 아들 목사가 전화해줘서 좋답니다. 그 아들목사가 누구냐면 바로 저입니다... 그리고 평소에 자주보는 옆에 사는 딸도 평소에 자주 보는 상황이라 평소때에는 따로 전화는 잘 안하는데 그 날은 거의 한 시간마다 전화해서 “열안나냐?” “몸은 안 쑤시냐?” “해열제 먹었냐?” 등등 그 날 하루에 대여섯번 전화하더랍니다. 멀리 떨어져 사는 아들목사에, 며느리인 사모에, 근처에 사는 딸까지... 여기저기 흩어사는 아들 딸 내외가 전화해서 몸상태를 물어주니 정말 기분좋답니다. 이게 가족입니다. 성경에는 가족들을 돌보는 것이 신앙인으로서 당연한 것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디모데전서 5장 8절입니다.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육신적인 가족은 이제 필요없게 되었다’고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본문을 통해 진정한 가족의 의미를 재정립하며 참다운 가족이 어떤 것인지를 가르쳐주시기 위해 본인의 가족에 대해 잠시 무관심을 표현하였습니다. 만약 가족부양에 대한 책임을 거부하고 육신적인 가족의 필요를 부정했다면 바리새인들에게 그렇게 ‘고르반’이라고 말하며 가족을 부정하는 것에 대해 책망하지 못하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성경속에서 혈통으로서의 가족을 중요시하셔서 요셉과 마리아를 통해 가족으로 이 땅에 오신 것을 강조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가족을 이야기하면서 우리가 육신적인 관계의 가족을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가족을 돌보지 않고 내가 주님의 일꾼이라고 말하는 것은 어쩌면 정말 하나님을 너무 모르는 인생이 하는 잘못된 말입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이단 사이비는 신앙을 위해 가족을 버리라고 말하고 신앙을 위해 집에서 가출하도록 독려하고 어떤 경우는 아예 육신의 가족과 연락을 끊고 지내라고 가르칩니다. 그런데 우리가 깨달아야 하는 것은 가정을 파괴하는 것은 절대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이 하는 짓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오히려 더 열심히 가족의 안부를 묻고 근황을 살피며 서로 협력하는 진정한 가족이라는 것을 아시고 그리스도를 믿는 가족의 모습을 아름답게 만들어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의 가족인 사람은, 둘째로 예수님과 함께 둘러앉아 함께 먹고 마시는 사람입니다.
마가복음 3장 34절입니다.
“둘러 앉은 자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내 어머니와 내 동생들을 보라”
예수님께서는 어머니와 동생들이 와서 예수님을 찾는다는 이야기를 듣자 “누가 나의 어머니이며 나의 동생들이냐”라고 반문하며 지금 자신과 같이 대화하고 함께 식사하며 함께 지내고 있는 사람들을 가리켜 나의 어미와 나의 동생들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이 되면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육신의 가족을 무시하고 함께 동역하고 함께 지내고 있는 사람들이 가족이라고 보시는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참된 가족의 의미를 다시 세우시기 위해 육신의 가족들이 어떻게 지내는 것이 맞는 것인지를 보여주시기 위해 함께 있는 “동역자들을 가족이라고 표현”한 것으로 보는 것이 성경적으로 맞는 해석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가족이라는 단어의 다른 표현으로 식구라는 단어를 쓰기도 합니다. 한국인에게는 가족이란 ‘한솥밥을 먹는 식사공동체’라는 뜻이 강합니다. 그래서 남에게 자기 아내나 자식을 소개할 때 ‘우리 식구’란 말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볼 때, 한 집에 살아도 한 상에 밥을 먹지 않거나, 식사를 할 기회가 없다면 엄밀한 의미에서 ‘핏줄’이기지만 ‘식구’는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반면 한 집에 살면서 한 번에 지은 밥으로 한 끼를 해결하는 한 집안의 노비나 이웃들이 있다면 그들도 식구라고 표현한 것을 역사속에서 볼 수 있습니다. 같은 밥을 지어 한 번에 함께 나눠먹는 사람이 ‘식구’요 ‘가족’인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안에서 밥을 같이 먹고 그리스도안에서 함께 나눌 수 있으면 그것은 바로 가족이 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1장 5,6절입니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우리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 모두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안에서 한 형제, 한 자매입니다. 사실 우리가 교회에서 목사님, 사모님, 집사님, 권사님, 장로님.. 이런 호칭에 익숙하지만 직분으로 우리의 정체성이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 그리스도안에서 자매라는 것이 우리의 정체성입니다. 우리가 직분을 받지 않았던 초중고대학생 그리고 결혼 전 대학청년부때까지 그냥 우리 주변의 그리스도인들은 남자이면 형제요, 여자이면 자매였습니다. 그리스도안의 형제와 자매가 우리의 정체성이었습니다. 그것은 지금도 우리의 정체성입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우리의 직분이 우리의 정체성이 되어버렸습니다. 사실 우리의 직분으로 우리의 정체성이 세워지는 것보다 더 의미있는 정체성은 바로 우리가 그리스도안에서 한 형제요, 한 자매라는 것이 더 의미있는 것입니다. 원래는 형제가 될 수 없었고 원래는 자매가 될 수 없었던 관계가 이제는 그리스도안에서 한 형제가 되었고 그리스도안에서 한 자매가 되었습니다. 한 형제, 한 자매라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그리스도안에서 가족이라는 말입니다. 원래는 형, 동생이 될 수 없었던 존재가 그리스도안에서 형, 동생이 되었습니다. 원래는 언니, 동생이 될 수 없었던 존재가 그리스도안에서 언니, 동생이 된 것입니다.
우리는 한국인으로서 한국문화권이기 때문에 이런 의식이 별로 안 와닿습니다. 왜냐면 우리 한국문화에서는 그리스도인이 되지 않더라도 일반인들끼리 조금만 친해졌을 때 나보다 나이가 많으면 형, 언니가 되고 나보다 나이가 적으면 그냥 동생이 됩니다. 친해지면 어느 누구나 형 언니 남동생 여동생이 됩니다. 하지만, 서양문화에서는 안 그렇습니다. 아무리 친해져도 그냥 이름만 부르지 절대 brother, sister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오직 그리스도인이 될 때에만 교회에서 brother, sister로 불립니다. 이전에는 전혀 관계없던 사람들이 이제 그리스도를 믿게 되고 교인이 되면서 brother가 되고 sister가 된다는 것이 정말 신기하고 놀라운 일입니다. 대단한 일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정말 그리스도를 믿었기 때문에 전혀 모르는 사람이 이제는 그리스도안에서 한 형제, 한 자매 되어지고 자매로서 형제로서 한 가족이 된 것이 얼마나 놀라운 것이고 감사한 것인지를 깨닫고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요한복음 1장 12,13절입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안에서 함께 먹고 함께 자고 함께 나누고 함께 베푸는 사람들입니다. 정말 그리스도안에서 서로 교제한다면 그것이 바로 가족이 되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그리스도와 함께 먹고 마시며 그리스도안에서 참다운 교제를 하는 가족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의 가족인 사람은, 셋째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대로 함께 일하는 사람입니다.
마가복음 3장 35절입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하나님께서는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안에서 가족이 되는 것을 원하셨습니다. 이 땅에 아담과 하와를 만드시고 그 이후로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인류가 하나님안에서 한 가족으로 사시기를 원하시며 이 땅에 인간이라는 존재를 만들어주셨습니다. 하지만 아담과 하와 이후에 죄가 인간에게 들어온 이후로 하나님과 떨어진 영원한 죄옥형벌의 죄인들이 이 땅에 살게 되고 결국 하나님과의 가족이라는 의미는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혈육적 의미의 가족은 있을 지 몰라도 참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며 영적인 가족으로 영적 소통이 되는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의 가족으로 만들어주신 하나님안에서 하나님과의 한 가족은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이런 결과는 인류가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존재가 되었고 하나님의 뜻을 알더라도 그 뜻을 따르지 않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안에서 하나님과 가족이 되는 것은 불가능한 존재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이 땅에서 이루시려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가족관계 회복이었습니다. 혈육적인 가족관계는 하나님의 창조이래 세상에서 끊어지지 않고 존재하였지만 하나님과의 영적인 가족관계는 끊어졌고 회복되기 불가능한 것이었는데 예수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시면서 그것을 가능하게 만드시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본문과 병행이 되는 성경본문 누가복음 8장 21절을 보십시오. 같이 읽겠습니다.
누가복음 8장 21절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 어머니와 내 동생들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이 사람들이라 하시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면 이제는 그리스도의 가족이 되는 것이고 모두가 형제, 자매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안에서 한 가족이 되어져서 하나님과 소통하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 땅에 그리스도가 오셨기 때문에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가진 자나 없는 자나 강한 자나 약한 자나 하나가 되어지고 가족이 되어진 것입니다. 이제는 전혀 상관없던 사람들도 그리스도안에서 한 가족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의 어머니가 제자들의 어머니가 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9장 25~27절입니다.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어머니와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 / 예수께서 자기의 어머니와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서 있는 것을 보시고 자기 어머니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
예수님의 어머니와 제자들은 어떤 혈연관계도 아니고 가족이 될 수 있는 조건은 없습니다. 그냥 내가 따르는 선생님의 어머니이시니 나도 그 분을 어머니로 생각하며 모시겠다라고 생각하는 차원에서 우리가 존경하는 분의 부모님을 내 부모님으로 모시는 경우는 있지만 그렇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 부분이 그냥 어머니로 생각하고 모셔달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제는 진짜로 어머니가 될 수 없는 분이 어머니가 되고 아들이 될 수 없는 사람이 아들이 되면서 그리스도안에서 한 가족이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로운 관계가 생겨난 것입니다. 이런 관계로 가족이 된 사람들이라는 표징은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뜻대로 살아가는 사람이 하나님안에서 한 가족이 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7장 21절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예수님께서는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욕망대로 살아가는 존재가 아닙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살아가는 인생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실현시키는 것이 우리의 삶의 현장인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가족으로 부르시고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도록 우리를 가족으로 만들어주신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는 주님의 뜻에 동참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시키기 위한 일을 행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뜻을 알고 행하는 사람이 예수님의 가족이 되는 것입니다. 정말 주님안에서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을 따라 살아갈 때 진정 참 신앙의 한 가족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을 맺을까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찾아온 가족들을 통해 진짜 가족들이 어떤 가족인지를 가르쳐주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육신의 가족은 진짜 가족이 아니라는 의미로 받아들이면 잘못된 삶을 살게되고 이단의 미혹들처럼 신앙을 위해 가족을 무시하고 가족을 멸시하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절대 육신의 가족은 무시하고 영적인 가족만 강조하신 분이 아니십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우주론적인 가족, 영적인 의미에서의 넓은 가족의 의미를 말씀하셨지만 그럼에도 항상 육신의 가족도 챙기시며 결국 십자가의 죽으심에서는 남게된 어머니를 제자들에게 돌보라고 명하시고 제자와 어머니 마리아가 영적인 의미에서 또 가족이 되었음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주님안에서 더 큰 의미의 가족을 말씀해주신 것이지 그렇다고 해서 협소한 의미의 혈연관계의 가족은 무시하거나 인정하지 않으신 것은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세상의 모든 사람은 자기 가족만 가족으로 생각하지 좀 더 넓은 의미의 가족을 위해서 헌신하고 도와주고 함께 하는 것은 생각하지 않는데 예수님께서는 이웃과 동료, 신앙공동체의 모든 사람들이 가족같은 존재라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오늘 말씀을 듣고 정말 우리 주변의 사람들에게 섬김과 나눔의 풍성한 사랑을 보여주며 서로 주안에서 하나되어 가족같은 공동체의 모습으로 하나님의 뜻으로 사람들을 인도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