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문이 희붐할 때 가끔 단잠을 떨치고 일어난다. 새날 포근하게 감싸주는 햇귀의 기운을 받고 싶어서다. 일출을 영접한 아침은 감회가 다르다.
장엄한 태양은 닫힌 문을 한꺼번에 여는, 화해와 용서의 열쇠다.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주고, 허물 드러내기가 민망해 어둠에 감춘 것들을 사랑으로 안아준다. 천지에 빛을 골고루 나눠주기 위해 24시간 구르고 달린다. 곳곳을 눈부신 빛으로 어루만져주고 습한 데를 뽀송뽀송하게 해 주려고. 그 무엇이 거대한 태양만큼 부지런하고 바쁠까. 가장 할 일이 많고 베풂의 공이 크지 않겠는가.
위대한 태양은 누구에게나 무상으로 햇빛 통장을 만들어 준다. 많을수록 더욱더 부유해지는 건 차곡차곡 들여놓은 마음의 햇볕이다. 그 볕살로 우리는 삶을 윤택하게 만들어간다. 햇빛이 누구에게나 재산이라면, 마음의 빛은 자신만이 지닌 최고의 보물이다. 빛을 먹고 산다고 해도 무리는 아닐 테다. 사람뿐이랴. 생물도, 식물도, 새들도, 가축들도 해바라기를 즐기지 않던가. 빛은 만물에 양식이다.
몇 해 전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여행 갔을 때다. 겨울이라 흑야로 인해 오전 열 한 시가 돼서야 환해졌다. 낯선 나라의 산재한 볼거리를 목전에 두고 마음이 여삼추였다. 동틈을 기다리는 시간이 허투루 흘러가는 것 같았다. 더 특이한 건 여름엔 백야가 있어 밤에도 전깃불 없이 글자를 읽는다는 점이었다. 거기에 연중 햇빛을 종일 누릴 수 있는 날이 겨우 70여 일밖에 안 된다고 하여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우리 일행도 나흘 만에 아주 잠깐 반짝 해를 보았다. 구름을 뚫고 살그머니 얼굴 내민 태양이 이내 사라져 아쉬움이 컸다. 꿈결같이 펄펄 내리는 애먼 눈雪한테 고리 눈길을 보냈다. 햇빛의 소중함을 새삼 뼈저리게 느꼈다. 그곳의 사람 수명이 우리나라보다 현저히 낮은 건 햇빛이 부족한 탓이라는 엉뚱한 생각을 오랫동안 떨칠 수 없었다.
새 녘의 동틀 무렵 잠자던 동물이 번쩍 눈뜨고, 흙 속의 씨앗이 살며시 움트고, 잠자던 꽃잎이 사르르 벙글고, 식물과 풀잎들이 기지개를 쭉 켤 테다. 날마다 새날 태양의 역동적인 저력에 무엇이면 가만히 있을 수가 있으랴. 태양이 모든 생명에 성숙을 채찍질해 주는 사랑의 매다. 태양처럼 한결같은 것이 없을 성싶다. 바람도 강도가 다르고, 구름도 크다 작다 옅다 짙다 한다. 달도 가득 차면 기울고 달 가림도 한다. 별들도 다시 태어나고 죽는다. 달과 별의 삶엔 굴곡이 있고, 비와 구름과 바람은 변덕이 심하다. 태양은 밝음도 색깔도 모양도 거의 똑같은 것 같다. 아픈 데도 없는 모양이다.
구름과 비가 태양을 꼭꼭 숨길 때는, 바쁜 태양을 쉬게 하려는 배려일 테다. 비는 인간의 메마른 가슴을 촉촉하게 해주고, 온갖 생명이 자라는 대지를 적셔준다. 생명의 근원이 되는 비의 지대한 공은 크다. 하지만 구름과 비가 태양을 자주, 오랜 시간 안 보여 줄 땐 우리는 빛에 목말라 애간장이 타고 태양을 연인처럼 기다린다. 특히 지루한 장마철엔 태양이 가장 그리운 존재로 떠오른다.
사람들은 해마다 첫 일출을 친견하려고 깜깜한 밤중에 높은 산길 걷는 것도, 해변의 맵찬 바람 맞는 것도 마다치 않는다. 너도나도 태양을 경배하기 위해 동틈의 기다림에 길들여진 듯하다. 숨죽이고 마음 모으는 모습은 엄숙하고도 경건하다. 새벽빛이 옅어지면서 서서히 동살이 퍼질 때, 솟아오르는 장엄한 태양과 마주하는 것만큼 가슴 충만해지는 일은 흔치 않다. 나쁜 액을 새 빛이 스르르 녹여 주고, 세상만사 엉킨 일들도 실타래처럼 순조롭게 풀어줄 것 같고, 꽃길로만 인도해 줄 것 같은 희망이 요동친다. 내 안에 든 모난 마음, 아집, 욕심을 떨치게 해 주고, 삶을 돌아보게도 해준다.
새해의 일출이 유독 붉다고 느끼는 건 만인이 한꺼번에 바라보기 때문이 아닐까. 뭐든지 해보라고 모두에게 빛을 비추며 염원을 듣고 새기느라 태양도 온몸이 화끈 달아오르지 않겠는가. 지난해 일출 때 태양은 덜 붉었는지도 모른다. 해마다 해맞이 명소마다 사람이 북적거렸다. 그 공간이 코로나19로 텅 빈 것을 티브이에서 보았다. 열기가 후끈했던 운동 경기장에서 관객들이 빠져나간, 운동장의 쓸쓸한 광경이 그 공간에 오버랩 됐다. 태양도 허허로운 그 장소만큼 외로워 보였다. 많은 사람이 함께 바라봐 주는 걸 좋아하나 보다.
동틈과의 소통은 가슴에 불씨를 심는 일이다. 그 불씨가 어렵다고 생각한 일에 도전하게끔 부추긴다. 하고 싶은 일을 종이 접듯 접어 두면 가슴이 묵정밭이 된다고 일침을 놓아준다. 그 밭의 돌과 자갈을, 묵은 잡초를 걷어내는 일부터가 도전이다. 도전한 일에 몰입하면 사그라든 불씨가 드디어 되살아 난 게다. 사람마다 자기 자신에게 가장 큰 의미를 부여한 동틈은 오래 꿈꾸어 왔던 일에 싹을 틔운 것이리라. 깊은 학문, 고도의 기술, 혼을 다하는 예술, 모든 직업의 시발점도 마음의 동틈에서 첫 삽을 뜨게 되니 말이다.
도전과 배움에는 끝이 없다. 사방에 배움의 문은 항상 열려 있다. 여든이 넘은 어른들도 갈망하는 분야에 도전하여 꿈을 동살처럼 펼친 이가 세상에는 많다. 지속으로 배움배움 해서 얻은 알찬 열매다. 하지만 코로나19가 세계를 침범해 온 이후부터 그런저런, 소통과 꿈을 키우는 생활 리듬이 사금파리처럼 깨졌다. 자연스레 삶의 탄력은 바닥이었다. 마음을 살찌워 주는 귀한 문화 공간에 코로나가 자물쇠를 채웠기 때문에. 자연스레 마음의 자물쇠도 서서히 잠기고 만 셈이었다.
‘밤은 어두워도 해는 다시 뜬다’라는 격언이 있다. 아무리 역병이 우리 삶에 검은 그림자를 드리워도 찬란하게 빛나는 저 태양이 어둠을 거두어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