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초석: 교회신문 > 제 1266호 야성을 잃은 독수리가 되지 말라 (창1:25~28)
어느 소년이 산에 나무를 하러 갔다가 나무 위 둥지에서 알 몇 개를 들고 집에 왔습니다. 소년의 아버지는 아들에게 마침 암탉이 알을 품고 있으니 거기에 가져온 알을 넣어주라고 했습니다. 소년은 암탉이 잠시 자리를 뜰 때 가져온 알을 둥지에 넣었습니다. 암탉은 자기가 낳은 알과 소년이 가져온 알을 정성껏 품었고,때가 되매 하나둘 부화하기 시작했습니다. 병아리가 삐악삐악하며 나오는데, 놀랍게도 조금 큰 알에서는 독수리가 나왔습니다. 소년이 가져온 알은 독수리 알이었던 것입니다.
독수리 새끼는 병아리와 같이 어미 닭을 쫓으며 구구거리며 자랐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이었습니다. 평화로운 울타리 위로 커다란 독수리 한 마리가 나타났습니다. 엄마 닭은 다급히 ‘다들 피해!’라고 소리쳤지만, 결국 닭 한 마리가 희생되었습니다. 닭 속에서 살던 독수리들도 도망을 쳤는데, 그중 하나가 흘낏 보니까 닭을 채간 놈이 자기랑 너무 똑같이 생긴 겁니다.
그래서 독수리 형제에게 말합니다. “아까 우리 형제 닭을 채간 그놈 말이야. 우리랑 너무 똑같이 생겼어. 우리는 늘 다른 형제랑 좀 다르게 생겨서 주어온 자식인가 갈등했잖아. 혹시 우리는 독수리가 아닐까?” 그러자 다른 독수리 형제들이 말했습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마. 우리는 닭이야. 그놈들이 나타나면얼른 도망가야 한다고 엄마가 그러셨어.” 다음날 또 독수리가 나타났습니다. 다른형제들은 도망치기 바빴지만, 어제 독수리를 보고 자각하기 시작한 녀석은 꼼짝하지 않고 독수리를 쳐다봤습니다. ‘아무리 봐도 나랑 똑같은데….’
다음날도 또 독수리가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닭을 채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유심히 바라보는 닭 속의 독수리에게 다가와 말합니다. “너는 나와 같은 독수리인데, 왜 닭 속에서 사는 거니?”, “내가 독수리라고?”, “그래, 넌 닭이 아니야. 하늘을 나는 독수리야.”
이 대화를 엿들은 어미 닭은 “너 미쳤니? 넌 닭이야. 내가 낳았어. 빨리 숨기나 해!”라고 했지만, 닭 속의 독수리는 자신의 신분이 확실해지자 엄마의 만류를뿌리치고 날개를 퍼덕거렸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하늘로 날아오르는 것 아닙니까. “와~ 나는 닭이 아니었어. 독수리였어.”
여러분, 우리는 사람의 자녀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친히 낳으셨습니다(요1:12~13). 하나님은 우리에게 “너는 내 자식이야. 너 자신을 알라.”고 누차 말씀하시는데, 우리가 깨닫지 못하니 하나님이 너무 답답하셔서 급기야 당신의 아들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은 “잘 봐라.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듯, 너도 하나님의 아들이야. 내가 행한 것을 봐라. 너도 똑같이 할 수 있어.” 하시며 기사와 표적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독수리가 창공을 날아 닭을 채가는 것을 보여주듯 말입니다.
독수리는 독수리에게 배워야 독수리답게 살 수 있습니다. 아무리 새 중에 왕인독수리도 닭에게 배우면 닭처럼 사는 겁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께 배워야 하 나님 자녀답게 사는데, 사람에게 배우니 하나님 자녀의 본성을 잃어버리고 사람처럼 사는 것입니다.그런데 세상 어디서 ‘네가 하나님의 자녀야.’라고 가르치겠습니까? 교회에서, 주의 종이 가르쳐야 하건만, 교회가, 주의종이 세상의 지식과 문화나 가르치고 있으니 당연히 모를 수밖에요. 자고로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 다 벼랑에 떨어지고 마는 겁니다.
제가 해외집회에 나가면 세미나를 겸하는데, 그때면 이런 질문을 자주합니다. “당신의 자녀는 사람입니까, 짐승입니까?”
“사람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의 자녀는 사람입니다. 개새끼는 개요, 소 새끼는 소입니다.맞지요? 그렇다면 하나님의 자녀는 무엇입니까?”
여기서 백이면 백 모두가 얼버무리거나답을 못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이다’라고 답해야 하는 줄은 알지만, 차마 말을 못하는 것입니다. 안 배웠거든요. 맥락상으로는 답을 아는데, 그렇게배우지를 않아서 입을 못 떼는 겁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 함은 우리의 신분을 말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자녀가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은 ‘신분에 맞는 권세’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는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도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예수님의 형제가 된 것입니다. 우리 신분이지요. 그런데 하나님이 죽기까지 순종하신 예수님께 모든 권세를 넘기셨지 않습니까(마28:18)? 모든 권세를 이양하신 예수님이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하나님의 자녀들, 곧 우리에게 당신의 권세를 이양하셨고요(눅22:29).그러니 ‘하나님의 자녀가 하나님’이란 공식이 성립되는 것이고, 예수님이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요14:12)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일본이 침략하여 우리나라를 식민지 삼았을 때 가장 먼저 한 게 뭡니까? 정체성을 잃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한민족’임을 잃어버려야 독립할 생각하지 않고, 일본에 순종하기 때문입니다. 마귀란 놈이 그랬습니다. 마귀는 우리가 ‘하나님 자녀’라는 것을 모르게 하려고 온갖 노력을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자녀인 것을 알게 되면 그에 맞는 권세를 찾게 되고, 그러면 그 권세 앞에 쫓겨나가게 되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목회 초에 일본 오끼나와에 있는 세계 최대의 수족관에 간 적이 있습니다. 거기에는 상어와 작은 물고기들이 한 공간에서 놀고 있었습니다. 본시 상어는 물고기를 잡아먹고 사는 법인데,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의아해하자 담당자가 그 이치에 대해 설명해주었습니다. 큰수족관에 상어와 물고기를 넣어놓으면당연히 상어가 그것들을 잡아먹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상어와 물고기 사이에보이지 않는 유리벽을 쳐놓는답니다. 이것을 모르는 상어가 여느 때처럼 물고기를 잡아먹으려고 덤비면 유리벽에 부딪쳐 깜짝 놀라게 됩니다. 이 일이 반복되다 보면 상어는 ‘물고기를 잡아먹으려 하면 다치는구나. 절대 잡지 말아야지.’하고 각인된답니다. 그래서 유리벽을 제거해도 물고기를 잡아먹지 않고 조련사가주는 먹이만 먹는다고 합니다.
악한 마귀가 우리를 이렇게 조련하고 있는 겁니다. 보이지 않는 유리벽을 쳐놓고상어를 조련하듯 하며, ‘이건 안 돼. 그냥살아야지.’ 합니다. 본성과 야성을 잃어,그저 팔자려니, 운명이려나 하고 살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가 오셔서 보이지않는 유리벽을 치우시고는 ‘뭐든 지배하고 정복하고 누려라’ 하십니다. 물고기가당연히 상어의 밥이듯, 세상의 것들은 하나님 자녀를 위해 예비된 것이니 당연히누리고 정복하라 하십니다. ‘너 자신을 알라’는 소크라테스의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요15:5).’라고 하셨습니다.
팔이 나이듯, 포도나무가지도 포도나무입니다. 가지가나무에서 떨어져 나가면 아무것도 아니지만, 나무에 붙어있으면 포도나무 자체이듯, 우리가 예수에게서 떨어져 나가면예수와는 무관한 그저 사람에 불과하지만, 예수님께 붙어있는 한, 우리는 예수님과 하나라는 것입니다. 제가 ‘하나님의아들은 하나님’이라고 말하는 핵심이 여기에 있습니다.신분을 알았다면 권세도 찾으셔야죠.
세상의 왕자와 공주들의 권세도 어마어마한데, 하물며 만왕의 왕이시며,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자녀의 권세는 어떻겠습니까?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찌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막16:17~18). 어디 그뿐입니까? 하나님이 아버지 되시니 필요한 것을 ‘아버지~’ 하며 구하면 됩니다.
내 신분을 알면 인생이 바뀝니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의 자녀는 곧 하나님입니다. 할렐루야!
용장 밑에 약졸 없다 누구에게 배웠는가
팔자타령 그만하고 네 신분을 알라
♣ 은혜로운 찬양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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