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성인의 날 대축일 (1101)
묵시 7,2-4.9-14 1요한 3,1-3 마태 5,1-12
2024. 11. 1. 금.
주제 : 세상과 신앙의 행복
오늘은 하느님의 축복을 입어, 하늘나라에서 하느님과 함께 사는 영혼들을 기억하는 ‘모든 성인의 날’입니다. 우리가 신앙인으로 살면서 우리의 삶에 이루어지기를 원하는 것을 말하라면, 세상의 삶을 마친 다음에 하느님과 함께 사는 일을 말할 것입니다. 제가 표현은 이렇게 하지만, 실제로 어떤 영혼이 하느님과 함께 살 수 있는지, 세상에 사는 우리가 알 방법은 없습니다.
사람이 자기의 인생을 끝내고, 하느님과 함께 살고 싶다고 말하는 의미는 무엇이겠니까? 우리가 우리의 세상의 경험과 지식으로는 알 수 없는 것을 알고 싶다고 말한다면서, 누구나 알아들을 평범한 표현으로 그 내용을 말하지 못하거나 말하는 것이 어렵다면 몹시 안타까운 일입니다.
이렇게 모른다고 하면서 설명하기도 힘든 일을 마치도 경험할 수 있는 것처럼 세상에 사는 우리가 이해하거나 받아들일 방법은 무엇이겠습니까? 이런 내용은 사람의 경험하는 세계를 해석하는 표현인 다섯 가지의 감각(=오감/五感)으로는 확인할 수 없는 일이기에, 실제로 믿음과 신앙의 차원이 아니라면, 하느님의 축복과 성인에 관련된 내용은 말하거나 생각하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여러분은 무엇이나 어떤 상황을 행복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특별히 삶에서 힘겨운 상황을 먼저 말하고, 그저 보이는 대로만 해석하지 않고, 그 상황을 극복한 다른 과정을 행복으로 설명하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우리는 행복에 관한 다른 자세를 말할 수도 있습니다. 행복에 관해서 반복해서 말하기에 우리가 잘 안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만, 이때 우리가 생각하는 행복은 무엇이겠습니까?
신앙에서 말하는 행복은 우리가 세상의 삶을 통해서 아는 행복과는 뜻이 다르다는 것이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래서 행복에 관하여 세상의 기준으로 먼저 해석하고 알아듣는 사람이라면, 신앙에서 말하는 행복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고, 세상의 삶을 우선하면 신앙에서 말하는 행복은 엉터리나 거짓이라고 생각하는 단점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세상의 기준을 따라 사는 사람이 신앙의 정신을 받아들여 올바르게 살도록 말하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축복을 알아듣기 위해서는 반드시 세상에서 흔히 말하는 불행이라는 과정과 친숙하게 지내야만 하는 것일까요? 저는 그렇다고 말씀드리지 않습니다만, 다른 사람의 사정은 몇 마디의 말로 삶의 자세를 바꾸게 하거나 이끌 방법이 없기에 매우 안타깝고도 어려운 일입니다.
복음에서 들은 ‘참된 행복’에 관한 말씀은 우리가 그대로 받아들이기도 어렵고, 실제로 그 일이 나에게 가능하다고 진실로 대하기도 쉽지 않은 일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대하면서 그것이 거짓이라거나 잘못된 일이라고, 사람의 생각을 적용하여 해석해야 한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신앙인으로서 하느님의 뜻을 먼저 받아들이겠다는 태도는 중요하지만, 우리가 경험하지 못하는 내용대로 하느님의 축복을 우리보다 먼저 사신 분들이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어렵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인에게 주어지는 하느님의 축복은 세상의 일을 열심히 살았다고 하는 우리조차도 올바르게 이해하기는 어렵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사람이 온전하게 이해한다고 말하기는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축복을 입는 사람으로 세상의 삶을 살고 하느님을 만나는 시간이 되었을 때, 그 축복을 누리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겠습니까? 어떤 사람으로 살았을 때 가능한 소리이겠습니까? 삶의 기준은 나한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 있을 것입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세상에서 충실하게 사는 것이고, 그 삶의 결과에 따라서 하느님께서 나에게 당신의 축복을 내리실 것이며, 나는 그 축복에 참여하는 겸손한 사람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보다 먼저 살았지만, 이제는 세상의 힘겨움을 다 이기고,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축복에 참여한 성인들을 기억하면서, 우리가 세상의 삶을 마친 다음에 그분들이 누리는 영광에 참여하도록 우리를 위해서 기도하시라고 청할 시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