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죽어야 할 의무는 없다.)
1910년 대한제국이란 나라가 망했다. 나라가 망하는 그 풍경은 지극히도 슬펐다. 날씨가 더워서 강제합병을 미루던 일본 측에 찾아가 합방을 재촉하며 나라 팔아먹는데 정신이 없었던 윤덕영, 이완용 등 매국노들이 있었다. 매국노의 풍경과 다른 풍경은 강제 병탄 소식에 울부짖어 통곡하거나 세상이 부끄럽다 하여 삿갓을 쓰고 가출을 한 사람도 있었다.
또 전재산을 모두 팔아 해외로 망명하여 독립군기지를 건설한 이도 있었다. 이러한 슬픈 풍경 속 전라도 구례에 매천 황현이라는 선비가 있었다. "내가 죽어야 할 의무는 없지만 나라가 선비를 기른지 오백년에 나라가 망하는 날 한사람도 죽는 사람이 없어서야 어찌 슬프지 않겠는가. 가을 등불아래 책덮고 천고를 회고하니 인간세상 식자노릇 해먹기 힘들다" 라고 했던 조선[대한제국]의 선비 매천 황현(梅泉黃玹..)
1910년 경술국치 직후 국권이 병탄되었다는 소식은 9월 6일 전라도 구례에 있던 매천 황현에게 전해졌다. 매천황선생은 죽음으로서 항거하였다. 이미 을사늑약으로부터 살 마음이 남아있지 않았다. 그리하여 마침내 절명시를 지은 후 더덕술에 아편을 타서 음독하였다. 아우 석전 황원이 달려와 입에 해독제를 넣으며 만류하였으나 응당 죽어야 한다며 거절하였다. 그리고 서서히 죽음을 맞이할 때 "죽기가 이리 어려운가? 독약을 마실 때 입에서 세번이나 떼었으니 내가 이토록 어리석은가?"라는 마지막 말을 남겼다 한다.
1910년 9월 10일, 선생의 향년 56세였다. 그의 아우 석전 황원 역시 훗날 1944년 2월에 나라의 광복이 오지 않는 것에 절망하여 굴원과 같이 스스로 강에 몸을 던져 죽음으로서 항거하였다. 안동 임청각의 종손이자 석주 이상룡의 아들 동구 이준형 선생 역시 이보다 앞선 1942년에 광복의 기미가 없자 시절을 한하며 스스로 세상을 떠났다.
나라가 왜국에게 강제로 병탄당하자 절명시를 남기고 음독하여
자정순국을 택한 지식인이었던 매천황선생은 본관이 장수, 영의정 황희 정승의 15대손이자 호조판서 황치신의 14대손이다. 임진왜란 당시 진주성에서 순국한 충청병사 황진 장군이 선생의 10대조이다. 고조는 황전, 증조는 황달수, 조부는 황직, 부친은 황시묵으로 친동생은 석전 황원(石田 黃瑗: 1870~1944) 이다.
매천은 생원에 합격하였으나 관직에는 출사하지 않았고 전라도 구례에서 학문연구를 하며 저술활동을 하였다. 그 대표적인 저서가 매천야록이다. 한편 교유관계를 살피자면 영재 이건창(寧齋 李建昌1852~1898]과 이건창의 아우 경재 이건승, 사촌아우 이건방과도 교분이 두터웠다. 이건창은 전주이씨 덕천군파로 정종의 후손인데 이 집안이 바로 양명학을 공부한 강화학파이다.
이건창 선생은 15세의 나이로 별시문과에 급제한 수재였다. 지금으로 치면 중2의 나이에 대과에 급제했으니 어리다는 이유로 4년후에 관직에 출사하였다. 관직은 승지에 이르렀는데 강직한 성품으로 3번이나 유배를 가기도 하였다. 당의통략의 저자로도 유명한 이건창선생은 47세의 나이로 요절하였지만 만약 을사늑약, 경술국치를 겪었다면 그 역시 매천과 같은 길을 갔을 것이다. 그만큼 그들은 평생을 함께한 동지였다. 이건창의 아우들인 이건승, 이건방도 매천 황현과 함께 절개를 지킨 당대의 의인義人이자 꺼져가는 나라의 운명을 걱정한 우국지사였다. 강화학파의 학통을 이어온 경재 이건승은 정원하, 홍승헌 등의 강화학파 선비들과 함께 서간도로 망명하였다. 이 분들이 바로 소나무와 대나무 그리고 바위처럼 굳건한 삶과 절개를 역사에 남겼다.
絶命詩 (절명시) / 매천 황현(1855~1910)
亂離溒到白頭年 백발이 성한 세월에 난리 속을 이르러니
幾合損生却未然 이 목숨 물리칠까 하였지만 그리 하지 못하였고
今日眞成無可奈 오늘에는 더 이상을 어찌할 수 없게 되었으니
輝輝風燭照蒼天 바람에 날리는 촛불만이 창천에 비치도다.
妖氛掩翳帝星移 요망한 기운에 가려 제국의 별 옮겨지고
久闕沉沉書漏遲 옛 궁궐은 가라앉아 글은 새고 느려터져
詔勅從今無復有 이제는 따르고 쫓을 조칙마저 다시 없을 것이러니
琳琅一綜淚千絲 옥같이 아름다웠던 우리 천가닥 눈물만 흘리도다.
鳥獸哀鳴海岳嚬 고국강산 찌그러져 짐승도 슬피울고 나는 새도 슬피우니
槿花世界己沉淪 무궁화 이 강산은 가라앉아 사라지고
秋鐙揜卷懷千古 세월의 등잔불 아래 천고의 한 덮어두니
難作人間識字人 인간세상에 식자노릇 해먹기 어렵다.
曾無支厦半椽功 일찍이 나라를 위해 반조각만한 공도 없었었고
只是成仁不是忠 다만 인자함을 이룰뿐 충이라고는 할 수 없었으니
止意僅能追尹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겨우 "윤곡"의 뜻을 따르를 뿐,
當時愧不攝陣東 의당, "진동"처럼 몰아부치지 못함을 부끄러워 할 뿐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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