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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예레미야서의 말씀 17,5-8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사람에게 의지하는 자와 스러질 몸을 제힘인 양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라.
그의 마음이 주님에게서 떠나 있다.
6 그는 사막의 덤불과 같아 좋은 일이 찾아드는 것도 보지 못하리라.
그는 광야의 메마른 곳에서, 인적 없는 소금 땅에서 살리라.”
7 그러나 주님을 신뢰하고 그의 신뢰를 주님께 두는 이는 복되다.
8 그는 물가에 심긴 나무와 같아 제 뿌리를 시냇가에 뻗어 무더위가 닥쳐와도 두려움 없이 그 잎이 푸르고 가문 해에도 걱정 없이 줄곧 열매를 맺는다.
제2독서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1서 말씀 15,12.16-20
형제 여러분,
12 그리스도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셨다고 우리가 이렇게 선포하는데, 여러분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어째서 죽은 이들의 부활이 없다고 말합니까?
16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께서도 되살아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17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여러분의 믿음은 덧없고 여러분 자신은 아직도 여러분이 지은 죄 안에 있을 것입니다.
18 그리스도 안에서 잠든 이들도 멸망하였을 것입니다.
19 우리가 현세만을 위하여 그리스도께 희망을 걸고 있다면, 우리는 모든 인간 가운데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
20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셨습니다.
죽은 이들의 맏물이 되셨습니다.
복음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 6,17.20-26
그때에 예수님께서 열두 사도와
17 함께 산에서 내려가 평지에 서시니, 그분의 제자들이 많은 군중을 이루고, 온 유다와 예루살렘, 그리고 티로와 시돈의 해안 지방에서 온 백성이 큰 무리를 이루고 있었다.
20 예수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며 말씀하셨다.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
21 행복하여라, 지금 굶주리는 사람들!
너희는 배부르게 될 것이다.
행복하여라, 지금 우는 사람들!
너희는 웃게 될 것이다.
22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면, 그리고 사람의 아들 때문에 너희를 쫓아내고 모욕하고 중상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23 그날에 기뻐하고 뛰놀아라.
보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사실 그들의 조상들도 예언자들을 그렇게 대하였다.
24 그러나 불행하여라, 너희 부유한 사람들!
너희는 이미 위로를 받았다.
25 불행하여라, 너희 지금 배부른 사람들!
너희는 굶주리게 될 것이다.
불행하여라, 지금 웃는 사람들!
너희는 슬퍼하며 울게 될 것이다.
26 모든 사람이 너희를 좋게 말하면, 너희는 불행하다!
사실 그들의 조상들도 거짓 예언자들을 그렇게 대하였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오늘 말씀전례는 ‘참 행복의 길’과 ‘불행의 길’을 제시해줍니다.
오늘 제1독서인 <예레미아서>에서는 말합니다.
“사람에게 의지하는 자와 스러질 몸을 제 힘인 양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라.”
(예레 17,5)
“그러나 주님을 신뢰하고, 그의 신뢰를 주님께 두는 이는 복되다.”
(예레 17,7)
이를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우리가 현세만을 위하여 그리스도께 희망을 걸고 있다면, 우리는 모든 인간 가운데서 가장 불쌍한 사람들일 것입니다.”
(1코린 15,19)
이처럼 축복과 행복의 길은 하느님께 신뢰와 희망을 두는 것에 달려 있습니다.
사실 성경에서 '행복'은 하늘나라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강령입니다.
'행복'은 한마디로 하느님의 은총이며 그분의 영광에 참여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행복'으로 제시되고 있는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이신 당신이 다스리는 나라이기에, '행복'은 곧 하느님 안에 있으며, 하느님 자신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루카 복음사가는 마태오의 ‘여덟 가지 행복’을 네 가지로 함축시켜 말하면서, 동시에 ‘네 가지의 불행’도 함께 말하고 있습니다.
특히 이 선언은 제자들에게 직접 2인칭(너희)으로 선포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제자들은 부유한 자들과는 대조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이고, 배부른 사람들과는 반대로 굶주리는 사람들이며, 웃는 사람들과는 반대로 우는 사람들이고, 좋은 대우를 받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온갖 잔혹한 대우를 받는 사람들로 묘사됩니다.
이는 겉으로 보기에 마치 모순처럼 보입니다.
만약 우리가 현실의 세속정신에서 본다면 말입니다.
그러기에 이러한 행복 선언은 현실을 넘어 있는 것처럼 보이나, 실상은 현실 깊숙한 곳에 자리 잡고 있는 더 깊은 의미를 들여다보게 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진정으로 바라보아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제시해주는 동시에, 삶에 대한 태도의 방향 전환을 요청합니다.
한 마디로, 모든 축복은 첫 번째 축복, 곧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루카 6,20)에 들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 그들은 자신들의 약함과 죄스러움을 인정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오직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만 살 수 있다는 것을 알기에, 주님께 신뢰를 두고 의탁하는 이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동시에 자신들이 가진 것은 무엇이든 자신들의 것이 아니고 하느님에게서 받은 것임을 인정하는 이들입니다.
생명도, 건강도, 힘도, 돈도, 그 어떤 선이든 모두가 말입니다.
그래서 그것에 행복해 하고, 감사하고, 나누는 이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은 특히 마지막 것, “모든 사람이 너희를 좋게 말하면, 너희는 불행하다.”(루카 6,26)에 대해서만 잠깐 머물러 봅니다.
사실 우리는 자신에 대해서 누군가가 칭찬해주고 호의적으로 말해주고 좋게 말해주면 기뻐하고 행복해 하고, 반면에 꾸중하고 질책하며 나쁘게 말해주면 우울해하고 불행해 합니다.
그토록 우리는 타인의 평가에 예민하고, 비위맞추며 눈치보고, 타인의 말 한마디에 우지좌지 됩니다.
그것은 우리의 눈이 하늘을 보고 있지 않는 까닭일 것입니다.
곧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까닭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들로부터 좋은 말을 듣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혹은 인간적인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올바른 관계를 맺는 일’, 곧 ‘하느님의 뜻 안에서 관계 맺는 일’이 필요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단지 인간관계를 개선하여 좋은 관계를 맺고, 단순히 공동선을 위해서 살아가는 것도, 단지 인간적인 아름다운 세상이나 복지사회를 위해 살아가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오손도손 재미나고 즐겁게 살고자 하는 것도, 그저 열심히 사랑하며 미워하지 않고 살고자 하는 것만도 아닙니다.
사실 중요한 것은 미움을 벗어나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미움 속에서도 사랑하는 일입니다.
고통과 슬픔을 벗어나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고통과 슬픔 안에서 사랑하고, 바로 그것을 통하여 사랑하는 일일 것입니다.
그것은 사랑하되 '진리 안에서 사랑'(1요한 3,18)하는 일이요, ‘먼저 하늘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는’(마태 6,33) 일입니다.
사실 그리스도의 명령에 순종하여 곧고 좁은 길을 걷는 이들이 모든 사람에게 칭송과 존경을 받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 것입니다.
세상에는 어둠의 유혹과 은총에 대한 저항이 너무나 강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사람들로부터 좋은 말만 듣는 사람이 아니라 좋지 않게 말하는 사람이 있음은 당연한 일입니다.
물론 그러한 말이 예수님 때문이 아니라 자기 자신으로 말미암은 것인지는 살펴보아야 할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면, 그리고 사람의 아들 때문에 너희를 쫓아내고 모욕하고 중상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루카 6,22)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행복, 우리의 한 가지 목적>
왜 살까?
왜 그리스도교를 믿을까?
왜 수도생활을 하고 왜 결혼을 할까?
그리스도인으로 살면 되지 왜 굳이 재속 프란치스코 회원이 될까?
왜 돈을 벌고 왜 일을 할까?
이런 거창한 질문을 받으면 대다수가 당장은 깊이 생각해본 적이 없거나 생각해봤어도 정답이 뭔지 몰라 당황하는 분이 있을 수 있지만, 알건 모르건 사람은 다 한 가지 목적을 가지고 살거나 뭣을 하는 겁니다.
한 가지 목적, 그것이 바로 행복입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은 이 주제를 다루고 있는데, 먼저 오늘의 독서 예레미야서는 아주 명쾌하게 행불행의 기준을 얘기하는데, 하느님께 의지하면 행복하고 인간에게 의지하면 불행하다고 합니다.
“사람에게 의지하는 자와 스러질 몸을 제힘인 양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라.
그의 마음이 주님에게서 떠나 있다.”
(예레 17,5)
사람에게 의지하면 불행하다는 것은 모든 고등종교가 가르치는 바이고, 석가모니가 깨달은 것도 바로 이것입니다.
그는 깨달은 다음 첫 마디로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이라 했지요.
하늘 위 하늘아래를 통틀어 나 홀로 존귀하다는 뜻인데, 이것은 나만 존귀하다는 뜻이 아니며 누구에 의해 존귀해지는 게 아니라 나는 나로서 존귀한 것이니 존재와 행복을 누구에게 의지치 말라는 건데, 사실 나의 존재와 행,불행이 남에게 좌우되는 그 자체가 바로 불행입니다.
그렇다면 남에게 의지치 않고 자신만 믿고 홀로 살고 행복하면 될까요?
이에 대해 예레미야서는 “스러질 몸을 제 힘인 여기지 말라.”(예레 17,5)고도 하는데, 남에게 의지하지도 말고 자신도 믿지 말라면 어떻게 하라는 것입니까?
남이건 자신이건 사람에게 의지하지 말고 하느님께 의탁하라는 거지요.
“그러나 주님을 신뢰하고 그의 신뢰를 주님께 두는 이는 복되다.”
(예레 17,7)
이것이 불교와 그리스도교의 근본적인 차이입니다.
이번 명절에도 어김없이 ‘새해 복 많이 지으소서.’라는 인사를 받았는데, 불교의 영향을 받은 것이고 올해도 복 농사 잘 지어 행복하라는 덕담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인사는 ‘주님의 복 많이 받으세요.’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물론 우리도 복 농사를 잘 짓긴 지어야 합니다.
비와 햇빛이 없이도 씨만 뿌리면 열매 맺을 수 있는 양 생각해도 안 되지만, 씨만 뿌려놓고 밭을 일구지도 작물을 가꾸지도 않으면 안 되는 것처럼, 행복의 씨인 하느님의 복을 가지고 우리도 농사를 잘 지어야 하겠지요.
우리는 하느님이 없이, 하느님의 사랑 없이 살 수도 행복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하느님 사랑 없이 내 사랑으로 행복을 일구겠다고 해도 안 되고, 거저 주시는 사랑이라고 그 은총 무시하여 합당한 노력 없어도 안 됩니다.
그래서 교회는 주부덕注賦德과 습득덕習得德을 얘기합니다.
주부덕이란 하느님께서 주시는 덕이요 습득덕은 우리가 습득하는 덕이지요.
그런데 천부적天賦的인 재능도 노력이 없으면, 예를 들어 음악적 재능이 천부적이어도 아무 레슨도 받지 않고 연습도 하지 않으면 안 되듯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애덕/caritas을 주셨어도 그 사랑으로 덕을 닦지 않고 덕을 쌓지 않으면 하느님이 주신 사랑과 애덕은 하수구로 흘려버린 물처럼 내 안에서 아무런 열매, 사랑의 열매를 맺지 못할 것입니다.
덕을 쌓는다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변덕을 쌓고 내 덕을 쌓는 게 아니라 하느님이 주신 덕을 쌓는 겁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느님의 은총, 다시 말해서 거저주시는 하느님 사랑을 공짜라 하여 내버려두는 것이 아니라 고귀하게 여겨 간직하는 것이요, 다른 사랑을 바라지 않고 하느님의 사랑을 사랑하여 간직하는 것이며, 내 인간적인 사랑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을 나누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으로 행복한 그리스도인이 되기로 마음먹는 오늘입니다.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보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참으로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사람마다 행복의 기준이 다르지만, 우리는 주님께서 원하시는 행복을 누려야 합니다.
이 시간 참된 행복에 눈뜨기를 기도합니다.
오래 전입니다만, 제가 꽃동네에 있을 때 만난 사람 중에 배영희 엘리사벳 자매님이 계셨습니다.
19살에 뇌막염을 앓고 나서 앞 못 보는 전신마비 장애인이 되신 분입니다.
그는 온몸이 마비된 채 누워계셨는데 얼굴이 항상 맑고 밝은 모습이었습니다.
미소가 너무 아름다웠습니다.
서른아홉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가 장애인이 된 후 ‘나는 행복합니다’, ‘소라의 꿈’, ‘당신이 머무는 곳’등 많은 영혼의 시를 쓰셨습니다.
그중에 ‘나는 행복합니다’를 읽어 드리겠습니다.
<나는 행복합니다>
아무것도 가진 것 없고
아무것도 아는 것 없고
건강조차 없는 작은 몸이지만
나는 행복합니다.
세상에서 지을 수 있는 죄악
피해 갈 수 있도록 이 몸 묶어 주시고
외롭지 않도록 당신 느낌 주시니
말할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생각할 수 있는
세 가지 남은 것은
천상을 위해서만 쓰여질 것입니다.
그래도 소담스레
웃을 수 있는 여유는
그런 사랑에 쓰여진 때문입니다.
나는 행복합니다.
나는 행복합니다.
이 자매님은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전신마비 장애인이요, 불행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하느님 안에서 아주 행복한 삶을 사셨습니다.
사람들은 더 많이 소유하고 더 많이 지배하는 데서 행복을 찾습니다.
많은 사람이 하고 싶은 일을 하고,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을 기쁨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영원한 행복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일시적인 행복감이 아니라 영원한 행복을 찾아야 합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을 알되 하느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불행하며, 이 모든 것을 모르나 하느님을 아는 사람은 참으로 행복하다.”고 하였습니다.
성 베르나르도는 “내 행복은 오직 하느님 곁에 있는 것, 내 주 하느님께 희망을 두는 일 뿐입니다.” 하고 고백하였습니다.
사실 행복한 사람이란 하느님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아는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을 자신 안에 모신 사람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남들은 말할 것도 없고 스스로도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가난하고 굶주리고, 울고, 미움을 사고, 쫓겨나고 욕을 먹고, 누명을 쓴 사람을 행복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런가 하면 누가 봐도 행복한 사람들, 부요하고 배부르고, 웃고, 모든 사람에게 칭찬받는 사람을 오히려 불행하다고 하십니다.
이는 세상의 논리와 복음의 논리는 다르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독서에서 예레미야 예언자는 말합니다.
"사람에게 의지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지만 주님께 신뢰를 두는 이는 복되다."
저주를 받는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내치시고 벌하시는 것이 아니라 나의 욕심으로 자기 파멸을 가져온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 의지하면,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큽니다.
우리는 스쳐 지나가는 이 세상이 아니라 천상의 행복을 바라보고 살아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우리가 현세만을 위하여 그리스도께 희망을 걸고 있다면, 우리는 모든 인간 가운데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
(1코린 15,19)
한번 마음을 살펴보면 좋겠습니다.
나는 하늘나라에 속해 있는지, 아니면 세상에 속해 있는지?
주님을 위해 살고 있는지, 자신을 위해 살고 있는지?
영원한 행복을 위해 살고 있는가, 아니면 현재의 만족을 위해 살고 있는가?
분명한 것은 지금의 상태가 나의 신앙의 현주소입니다.
예수님은 선언하십니다.
“보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결국 행복한 사람은 지금 배부르고 잘 지내는 사람이 아니라 '은총의 상태 안에 있으며, 하느님의 은총 안에서 정진하고, 하느님의 길을 따라 나아가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인내와 가난, 다른 이들에 대한 섬김, 사랑으로 위로의 길을 걷는 사람은 기쁘고 행복할 것입니다.
“참 행복은 그리스도인의 신분증”(프란치스코 교황)입니다.
참된 행복은 물질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잠언 30장 8절에서 9절의 말씀을 보면 “저를 가난하게도 부유하게도 하지 마시고 저에게 정해진 약속만 허락해 주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제가 배부른 뒤에 불신자가 되어 “주님이 누구냐?”고 말하게 될 것입니다. 아니면 가난하게 되어 도둑질하고 저의 하느님 이름을 더럽히게 될 것입니다.”라고 적혀 있습니다.
참으로 행복한 사람은 주님께 신뢰를 두고 그분을 차지하는 사람입니다.
오늘 화답송의 말씀입니다.
“행복하여라!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밤낮으로 그 가르침을 되새기는 사람.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 같아, 제때에 열매 맺고, 잎이 아니 시들어, 하는 일마다 모두 잘 되리라”
(시편 1,1-3).
여러분은 진정 행복하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주님의 말씀을 믿으십시오!
그리고 믿는다면 말씀대로 실천하십시오.
그리하면 반드시 행복해질 것입니다.
주님을 차지하십시오.
성모님께서도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루카 1,45)으로서 행복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사물의 거죽만 보고 그것이 전부인 줄 압니다.
그러나 믿는 우리는 우리에게 약속된 하느님 나라, 영원한 생명이 있고, 웃게 될 날이 있고, 받을 상이 크다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행복합니다.
곡식 단 들고 춤추게 될 날을 알기에 지금 눈물로 씨를 뿌릴 줄 압니다.
사실 오늘날의 불행은 모자람이 아니라 오히려 넘침에 있습니다.
넘치기 때문에 만족하지 못하며 감사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따뜻한 가슴을 잃어가고 남에게 행복해 보이려고 포장하다가 불행해집니다.
여러분은 제가 행복해 보입니까?
왜 행복할까요?
여러분을 만나서 행복합니다(믿거나 말거나).
여러분도 저 때문에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저를 보내신 하느님 때문에, 아니, 하느님을 차지해서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한번 옆 사람 좀 바라보세요!
그분 때문에 행복하십니까?
행복하시니 다행입니다.
그런데 이 마음이 얼마나 지속될 수 있을지…
한번 쥐어박고 싶은 분도 계시고 때로는 밥맛이 떨어질 때도 있을 것이고, 안 봤으면 속이 시원할 것 같은 마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바로 그 사람을 통해서 나를 단련시키시고 다듬어 주셔서 행복하게 만드신다는 것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지금 어렵고 고달프고 힘들더라도 부디 하느님 안에서 행복하시길 기도합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마태 5,12)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행복은 사랑해서 고생하는 것>
오늘은 루카복음의 행복 선언입니다.
그러나 이 행복 선언은 좀처럼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예수님은 먼저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불행하여라, 너희 부유한 사람들!”이라고 하십니다.
가난한 사람이 행복하다니 말이 됩니까?
아무리 봐도 세상에 가난한 사람들이 행복해 보이지는 않습니다.
또는 “행복하여라, 지금 굶주리는 사람들! 불행하여라, 너희 지금 배부른 사람들!” 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배고픈 게 행복하다면 음식은 왜 먹어야 할까요?
굶어 죽어가는 사람들을 그러면 도울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행복하여라, 지금 우는 사람들! 행복하여라, 지금 우는 사람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왜 우느냐면, 예수님의 “사람의 아들 때문에 너희를 쫓아내고 모욕하고 중상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라는 말씀대로 박해받고 모욕과 중상을 받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이 말씀은 ‘사랑’을 개입시키면 아주 잘 이해가 됩니다.
사랑하면 가난해지고, 굶주리게 되고, 겸손해지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사랑해서 고생하는 게 행복’이란 뜻입니다.
100세를 넘기고도 활발한 활동을 하신 김형석 전 연세대 교수가 내린 행복론의 결론입니다.
‘어린 왕자’는 작은 자신의 별에 꽃이 한 송이 피어난 것을 발견합니다.
어린 왕자는 그것을 위해서 가난해집니다.
자기 모든 에너지를 그 꽃을 보호하기 위해 쏟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먹이려고 배고파지고, 그것의 짜증을 다 받아내며 슬프고 겸손해져야 했습니다.
그러다 도저히 참지 못하고 그 꽃이 피어있는 자기 별을 떠납니다.
여행하던 중에 각자 행복을 추구하는 많은 사람들을 만납니다.
자기 별에서 혼자 왕 노릇을 하는 사람, 자신에게 칭찬해 주고 손뼉 쳐 주기를 바라는 허풍쟁이, 세상 고통을 잊으려 온종일 술만 마시는 술꾼, 돈만 아는 사업가, 의미 없이 혼자 사는 별에서 일만 하는 가로등 켜는 사람, 지식을 뽐내는 지리학자 등입니다.
이들은 부자이고 배부르고 인정받습니다.
그러나 외로워 보입니다.
지구에 내려온 어린 왕자는 비행기 조종사와 사막여우를 만나 우정을 싹틔웁니다.
사막여우는 관계를 위해 큰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그리고 그 관계가 깊어질 때 그 노력이 무색할 정도의 기쁨을 맛볼 수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이 경험을 통해 자신의 별에 있는 자기를 괴롭혔던, 그 사랑스러운 꽃 한 송이를 다시 기억합니다.
어린 왕자는 비록 가난해지고, 배고프고, 멸시의 대상이 될 수 있지만, 참 행복은 그것을 쏟을 수 있는 사랑하는 누군가가 존재함임을 깨닫고 다시 죽음으로 나아갑니다.
그러니 관계에서 오는 행복을 안다면 참행복은 ‘사랑해서 십자가를 지는 것’임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가난해지셨습니다.
하느님의 지위를 내려놓으시고 한 인간으로서 사시기를 선택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 사랑으로 변화됩니다.
안젤로라는 의사 선생님은 학생 때 삶의 의미를 발견하지 못해 힘들어했습니다.
성령 안수 기도를 받는 중에 가난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분의 뚫어진 손과 찔린 가시관이 곧 자신 때문에 가난해진 예수님임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것으로 예수님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저에게 예수님은 저의 배를 불리시는 분이셨습니다.
말씀을 깨닫고 싶었고 하느님이 저를 사랑하심을 느끼고 싶었습니다.
하느님은 어쩔 수 없이 양식을 내어놓으셨습니다.
어머니의 배를 채워야 할 젖을 아기에게 주는 것과 같습니다.
저는 그 양식을 먹으며 배가 부르게 되었습니다.
“그래, 너 나에게 많이 주었니? 난 네게 다 주었다.”
이런 행복을 추구하시는 분이 그리스도이셨고, 그 행복에 우리를 초대하고 계신 것입니다.
배불리려면 배고파져야 합니다.
마더 데레사는 수많은 배를 곯는 사람들 앞에서 항상 배가 고플 수밖에 없었고 그것이 행복임을 알았기에 행복하셨습니다.
김희아 씨에게 나타나신 예수님은 어떠실까요?
희아 씨는 모반 때문에 부모에게 버려지고 친구들에게 괴물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래서 손이 지우개가 되게 해 달라며 자기 얼굴이 까지도록 문지르셨습니다.
이때 예수님이 보였습니다.
자신보다 더 슬피 우시는 예수님을.
그분이 나의 처지를 위해 울어주시지 않으셨다면, 우리가 어떻게 그분이 우리를 덮어주기 위해 세상에 오셨음을 믿게 될 수 있을까요?
모든 순교자들은 이 세상의 지위를 버리고 그리스도 때문에 고통과 멸시를 선택하신 분들이었습니다.
어떤 강의에서 이런 내용을 들었습니다.
사랑을 배우게 하기 위해서는 우선 작은 십자가를 질 줄 아는 것부터 배우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일단 어린아이에게 햄스터를 한 마리 선물해 줍니다.
그 햄스터는 너무나 사랑스럽습니다.
정성을 다해 먹를 주고 아프지 않도록 보살펴 주었습니다.
사랑하면 십자가를 지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지만 햄스터의 평균 수명은 2~3년입니다.
금방 죽습니다.
이때 아이는 큰 상처를 받습니다.
부모는 “또 햄스터 키울 거니?”라고 묻습니다.
아이는 울면서 절대 안 키운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1~2년 지나면 또 키우고 싶다고 말합니다.
이번에 아이가 햄스터를 대하는 방식은 조금 다릅니다.
이제 내가 열심히 해 주어도 햄스터가 곧 죽을 것을 압니다.
그래도 열심히 행복하게 살게 해 줍니다.
사랑을 위한 자기 희생만이 사랑하지 않는 것보다 행복함을 알기 때문입니다.
언젠가 ‘추적 60’분이란 프로그램에서 오토바이 교통사고로 사망한 한 사제의 이야기가 방영된 적이 있었습니다.
오토바이를 탄 한 학생이 건널목을 건너는 신부님을 치어 사망하게 했습니다.
교구에서는 신부님이 살아 계셨더라면 그 학생을 용서했을 것이라며 학생이 감옥에 가지 않도록 배려했습니다.
그 신부님의 유품을 정리하던 중 찾아낸 물건이라고는 낡은 라디오 하나가 전부였습니다.
통장에도 적은 돈이 있었지만, 그것은 안 받으려던 강의료를 억지로 받아서 나중에 학생들에게 한꺼번에 선물하려고 모아놓으신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실제로 당신을 위한 재산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이 이야기가 매스컴에 보도되었고 세상 사람들은 사제의 그런 가난한 모습에 감동했습니다.
왜일까요?
느닷없이 준비도 못 하고 돌아가셨는데도 가난했기 때문입니다.
가난했다는 것은 그만큼 많이 베풀었다는 증거입니다.
그리고 그만큼 행복했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선택의 갈림길에 섭니다.
사랑해서 고생하는 행복을 추구할 것인지, 사랑 없이 편한 삶을 선택할 것인지.
- 수원교구 조원동 주교좌 성당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참된 행복은 축적을 통해서가 아니라 버림을 통해서 옵니다>
얼굴을 보아하니 ‘이 세상에서 나처럼 불행한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는 표정으로 살아가는 분이 계십니다.
그런데 하시는 말씀을 가만히 들어보니, 그 정도면 이 혹독한 세상에서 꽤 괜찮은 편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자신의 삶에 대한 기대치가 너무 높기에 그리도 불행한 삶을 살아가며, 살아생전 연옥체험을 하고 계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반대로 제가 보기에도 ‘정말이지 하느님께서도 너무하시지? 정말 하느님이 계시긴 한 건가?’ 할 정도로 힘겹고 참담한 삶을 살아가시는 분인데도 불구하고, 그 얼굴은 ‘이 세상에서 나처럼 행복한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 그래!’하는 얼굴이었습니다.
저는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행복과 불행은 참으로 상대적인 것이로구나!’ 하는 것을 말입니다.
그래서 떠오른 한 가지 생각, 그리 길지도 않은 우리 인생, 너무 그렇게 심각한 얼굴로 살아가지 말아야겠다는 것입니다.
너무 그렇게 사소한 일에 핏대까지 올리며 아등바등 살아가지 말아야겠다는 것입니다.
그 대신 어쩔 수 없이 제한된 우리네 인생 안에서 하루하루 가급적 만족하고 살려고 노력하며 작은 것에서 기쁨을 찾아야겠습니다.
사실 우리네 인간의 삶, 뭐 그리 대단히 기대할 것도 없습니다.
기를 쓰고 올라가 봐야 그 끝에 대체 뭐 그리 대단한 것이 있겠습니까?
수백 수천억을 모아봐야 그것이 우리의 행복을 보장해주지는 않는다는 것을 깨달아야겠습니다.
내 가장 가까운 사람들, 가족들, 동료들, 친구들과 일상 안에서 나누는 사소한 기쁨, 사실 그것보다 큰 행복은 찾기가 힘듭니다.
함께 걸어가는 이웃이 자신의 상처와 한계를 극복하고 당당히 자신의 길을 걸어가는 모습을 본다는 것, 그것처럼 제게 있어 큰 행복은 다시 또 없었습니다.
행복과 관련해서 지금에야 깨닫는 바가 한 가지 있습니다.
우리네 삶 가운데 행복의 순간은 의외로 많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행복의 씨앗은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 깊이 숨어있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많은 경우 행복은 결핍 가운데, 부족함 가운데, 시련이나 역경 가운데 숨어있다는 것입니다.
언젠가 한 공동체를 방문할 때였습니다.
감사하지만 부담스러운 극진한 환대가 매일 계속되었습니다.
매 끼니가 상다리가 부러질 정도였습니다.
매일 저녁 밤늦은 시간까지 성대한 파티가 계속되었습니다.
먹고 또 먹고, 마시고 또 마시고... 그 대신 운동량은 지극히 제한적이었습니다.
한 일주일 정도 반복되니 세상에 지옥이 따로 없었습니다.
반대로 바쁜 일이 있어 본의 아니게 몇 끼니를 건너뛰었습니다.
이윽고 촉각을 다투는 일들을 대충 마무리 짓고 나니 너무나 배가 고팠습니다.
가까운 순대국밥 집에 가서 김이 무럭무럭 나는 8천원짜리 순대국밥 한 그릇을 마주 대하니 너무나 행복해서 눈물이 다 나왔습니다.
우리가 매일 느끼는 결핍, 갈증, 배고픔, 부족함, 피곤함, 외로움, 슬픔... 이런 요소들이 사실은 행복의 원천이라는 사실을 잘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지니고있는 행복에 대한 개념, 곰곰이 한번 되새김질해보면 좋겠습니다.
가난한 사람들, 슬퍼하는 사람들, 박해받는 사람들이 행복하다는 예수님의 말씀도 곁들여 묵상해보면 좋겠습니다.
산에 오르신 예수님께서는 군중들을 향해 장엄한 어조로 행복의 길을 선포하십니다.
천국에 오르는 길을 아주 쉽고도 명료하게 가르치고 계십니다.
천국에 이르는 길은 소유가 아니라 가난임을, 창이나 칼이 아니라 사랑과 자비임을 선포하십니다.
참된 행복은 축적을 통해서가 아니라 버림을 통해서 온다는 것, 참된 기쁨은 올라감이 아니라 내려섬을 통해서 온다는 것을 설파하십니다.
비록 죄인이고 너무나 보잘 것 없고 비참한 우리라 할지라도, 하느님께서 언제나 굳건히 내 안에 자리하시고 내 인생을 동반해주시니 깊이 감사드려야 하겠습니다.
부족하고 부끄럽더라도 나를 소중하게 여기고, 내 인생에 가치를 부여하고,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하고, 매 순간을 감사하면서 충만하게 살아가려고 노력한다면 어느새 행복은 우리 손안에 들어와 있을 것입니다.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행복론’이 아니라 ‘구원론’입니다>
1)
이 말씀의 ‘행복’은 구원받은 사람들이 누리게 될 영원한 기쁨과 영원한 행복을 가리키는 말이고, ‘불행’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이 당하게 될 심판과 멸망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행복론’이 아니라 ‘구원론’입니다.
‘어떻게 하면 행복을 얻는가?’에 관한 가르침이 아니라, ‘어떻게 해야 구원받는가?’에 관한 가르침이라는 것입니다.
2)
루카복음 16장에 있는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는 이 말씀을 생생하게 설명해 주는 비유입니다.
그 비유에 나오는 ‘라자로’는 아주 가난했고, 날마다 굶주렸고, 그리고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면서 날마다 울었을 것이고, 사람들로부터(나쁜 부자들로부터) 무시당하고 모욕당하면서 살았을 것입니다.
반대로, 그 비유에 나오는 ‘부자’는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았습니다(루카 16,19).
그는 배고픔이 무엇인지도 몰랐을 것이고, 날마다 웃으면서 살았고, 주변 사람들의 아첨에 취해서 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두 사람의 처지는 저승에서 정반대로 바뀌게 됩니다.
“부자가 저승에서 고통을 받으며 눈을 드니,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곁에 있는 라자로가 보였다.
그래서 그가 소리를 질러 말하였다.
‘아브라함 할아버지,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라자로를 보내시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제 혀를 식히게 해 주십시오.
제가 이 불길 속에서 고초를 겪고 있습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이 말하였다.
‘얘야, 너는 살아 있는 동안에 좋은 것들을 받았고 라자로는 나쁜 것들을 받았음을 기억하여라.
그래서 그는 이제 여기에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초를 겪는 것이다.
게다가 우리와 너희 사이에는 큰 구렁이 가로놓여 있어, 여기에서 너희 쪽으로 건너가려 해도 갈 수 없고 거기에서 우리 쪽으로 건너오려 해도 올 수 없다.’"
(루카 16,23-26)
3)
저승에 있는 ‘큰 구렁’은, 한 번 심판이 이루어지면 번복되지 않는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에 변경과 취소는 없습니다.
그런데 사실 그 ‘큰 구렁’은 이승에서 이미 부자 자신이 만든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부자들과 가난한 사람들 사이를 막고 있는 ‘큰 구렁’은, 가난한 사람들의 힘으로는 도저히 건너갈 수도 없고 극복할 수도 없는 ‘현실적인 장벽’입니다.
이승에 있는 그 장벽은, 또는 그 ‘큰 구렁’은, 부자들이 만든 것이고, 그것을 없애는 것은 부자들 자신들이 할 일입니다.
4)
‘가난’과 ‘굶주림’이 행복의 원인이 될 수는 없지만, 하느님 나라를 갈망하게 만드는 힘으로 작용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 라는 말씀은 “지금 가난하더라도 좌절하지 않고, 또 재물에 눈을 돌리지 않고 하느님 나라만 추구하는 사람은 그 나라를 차지할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라자로’가 가난하다는 이유만으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 것이 아니라, 착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 나라에 들어간 것처럼, 단순히 가난하다는 이유만으로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니고, 하느님 뜻에 합당하게, 의롭게 살아야 그 나라에 들어갑니다.
가난하기 때문에 더 탐욕에 사로잡히는 경우도 있습니다.
5)
‘부유함’은 그 자체가 ‘구원’을 방해하는 걸림돌이 됩니다.
사람들 중에는 “부자로 사는 것 자체가 죄는 아니다. 착한 부자도 많다.” 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런 주장을 하기 전에 먼저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더 쉽다." (루카 18,25) 라는 예수님 말씀을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 교회의 성인 성녀들 가운데에는 ‘부자였던’ 분들이 분명히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부자인 채로’ 성인품에 오른 분들은 없습니다.
인간적으로만 보면 ‘착한 부자’로 보이는 사람들이 있긴 한데, 예수님의 기준으로도 과연 ‘의인’으로 인정받을 수 있을지는 좀 더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착한 부자’ 라는 칭찬과 존경을 받는 것에 취하면 금방 교만해지고 위선자가 됩니다.
그것보다 더 큰 문제는 ‘부유함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부유함을 유지하려고 애쓸 때, 그것이 악한 일이 아니고 죄가 되는 일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마음이 이미 재물 쪽으로 기울어져 있는 상태가 되어버리기 때문에 그만큼 하느님에게서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받는 방법’을 묻는 부자에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어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루카 18,22) 라는 말씀은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살아 있는 말씀’입니다.
지금 부유하든지 가난하든지 간에, 누구든지 재물에 대한 애착심을 버리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 전주교구 상지원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참행복은 선택이자 훈련이요, 발견이자 은총이다 - 믿음, 희망, 사랑>
여기 요셉 수도원 수도자들은 늘 행복합니다.
누구나 행복할 수 있습니다.
행복은 선택이자 훈련이요 발견이자 은총입니다.
타고난 부정적인 것들에 절망하기로 하면 끝이 없습니다.
왜 짧은 인생 절망하며 불행하게 삽니까?
너무 억울하고 허무하지 않습니까?
선물로 주어진 한 번뿐인 인생의 유일한 목표는 행복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복하게 사는 것은 우리 모두의 권리요 의무요 책임입니다.
바로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행복하게 사는 것입니다.
거룩한 주일 미사전례를 선택하여 하늘 나라 행복 잔치에 참여하고 있는 여러분은 참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정확히 작년 9.29일부터 저를 행복하게 만든 시가 선물처럼 찾아왔습니다.
늘 나눠도 새롭고 좋아 또 나눕니다.
“산 앞에
서면
당신 앞에
서듯
행복하다”
여기 불암산 기슭에 자리잡은 요셉수도원에 37년째 정주하면서 늘 바라보며 행복해 한 것이 불암산입니다.
또 지금도 여전히 많이 나누는 <행복기도> 다음 대목도 저를 행복하게 합니다.
“주님, 눈이 열리니 온통 당신의 선물이옵니다
당신을 찾아 어디로 가겠나이까
새삼 무엇을 청하겠나이까
오늘 지금 여기가 하늘 나라 꽃자리 천국이옵니다
곳곳에서 발견하는
기쁨, 평화, 감사, 행복이옵니다
살 줄 몰라 불행이요, 살 줄 알면 행복임을 깨닫나이다.”
행복을 곁에 놔두고 왜 어리석게 불행하게 삽니까?
행복은 선택임과 동시에 발견임을 깨닫습니다.
눈만 열리면 무수히 발견되는 행복의 선물입니다.
어제 오후도 참 행복했습니다.
오늘 이 미사에 참석하고 있는 순수한 사랑으로 빛나는 인천교구 중3동 임마누엘 성당 별무리 청년회원들의 피정 지도 덕분입니다.
강의 내용도 청년회의 요청에 따라, “천국, 연옥, 지옥, 천사, 악마”를 주제로 하여 나눴습니다.
“천국은 인간의 궁극적 목적이며, 가장 간절한 열망의 실현이고, 가장 행복한 결정적 상태다.
천국에서 산다는 것은 그리스도 예수님과 함께 있는 것이다.
산다는 것은 그리스도 예수님과 함께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계신 곳에 생명이 있고 하늘 나라가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우리에게 천국을 열어 주셨다.”
이런 요지의 천국에 대한 강의였고, 천국은 죽어서 가는 것이 아니라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예수님과 함께 천국을 살아야 함을 강조했고, 모두가 면담고백 성사를 볼 때 보속도 동일했습니다.
피정 마치고 떠나는 동안 지상 천국 수도원에서 “주님과 함께 기쁘고 평화롭게 행복하게 사는 것”을 보속으로 주었고 모두가 웃음으로 화답했습니다.
행복은 선택입니다.
무엇보다 행복의 원천인 하느님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시편 한 구절, "주님께 아뢰옵니다. '당신은 저의 주님, 저의 행복 당신밖에 없습니다.'”(시편 16,2)라는 내용도 생각납니다.
구체적으로 하느님 믿음을, 희망을, 사랑을 선택하여 훈련하는 것입니다.
영성생활의 승패는 선택과 훈련에 달려 있습니다.
믿음을, 희망을, 사랑을 선택 훈련하여 습관화할 때 비로소 영적승리의 행복한 삶입니다.
첫째, 믿음을 선택하여 훈련할 때 참행복입니다.
예레미야 예언자의 가르침이 참 신선하고 명쾌합니다.
“주님을 신뢰하고, 그의 신뢰를 주님께 두는 이는 복되도다.
그는 물가에 심긴 나무와 같아, 제 뿌리를 시냇가에 뻗어, 무더위가 닥쳐와도 두려움 없이, 그 잎이 푸르고, 가문 해에도 걱정없이, 줄곧 열매를 맺으리라.”
바로 미사에 참석한 여러분을 두고 하는 말씀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전반부 행복한 사람들의 내면 상태를 말해 줍니다.
이런 행복한 이들과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이들이 사람에게, 자기 몸에 의지하는 자들입니다.
“사람에게 의지하는 자와, 스러질 몸을 제힘인 양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라.
그의 마음이 주님에게서 떠나 있다.
그는 사막의 덩굴과 같아, 좋은 일이 찾아드는 것도 보지 못하리라.
그는 광야의 메마른 곳에서, 인적 없는 소금 땅에서 살리라.”
그대로 하느님이 아닌 자기를 선택하여 믿은 이들이 스스로 자초한 결과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후반부 불행한 사람들의 내면 상태를 말해줍니다.
둘째, 희망을 선택하여 훈련할 때 참행복입니다.
희망이, 꿈이 없는 곳이 지옥입니다.
죽으시고 부활하신 파스카 그리스도 예수님이 우리의 궁극의 희망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믿음과 희망의 고백에 100% 공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여러분의 믿음은 덧없고 여러분 자신은 아직도 여러분의 죄 안에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잠든 이들도 멸망하였을 것입니다.
우리가 현세만을 위하여 그리스도께 희망을 걸고 있다면, 우리는 모든 인간 가운데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 나셨습니다.”
죽으시고 부활하시어 늘 우리와 함께 계신 그리스도 예수님이 우리의 궁극의 희망이요, 이런 희망의 주님을 선택할 때 참행복입니다.
셋째, 사랑을 선택하여 훈련할 때 참행복입니다.
오늘 복음의 전반부 행복한 사람들이 바로 하느님 사랑을 선택한 이들입니다.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행복하여라, 지금 굶주리는 사람들!
너희는 배부르게 되리라.
행복하여라, 지금 우는 사람들!
너희는 웃게 될 것이다.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면, 사람의 아들 때문에 너희를 쫓아내고 모욕하고 중상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그 날에 기뻐하고 뛰놀아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하느님 사랑을 선택할 때 궁극의 승리가, 참행복이 있습니다.
반면 외관상 행복해 보이는 사람들에 대해 불행을 선언하시는 주님입니다.
세상 것들 사랑에 빠지다 보니 하느님 사랑이 없습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부유한 사람들!
너희는 이미 위로를 받았다.
불행하여라, 너희 지금 배부른 사람들!
너희는 굶주리게 될 것이다.
불행하여라, 지금 웃는 사람들!
너희는 슬퍼하며 울게 될 것이다.
모든 사람이 너희를 좋게 말하면, 너희는 불행하다!”
불행한 이들에 대한 저주가 아니라 탄식이요 회개에의 촉구이자 호소입니다.
하느님 없는 행복은 얼마 못갑니다.
삶의 허무와 무지를, 시련과 고난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사랑하고, 지금 가난한 이들, 지금 굶주린 이들, 우는 이들을 돕고 함께 나누며 살라는 회개에의 촉구이자 호소입니다.
사랑이 답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할수록 이웃도, 가난도, 정결도, 순종도 그리고 일상의 삶 모두도 사랑할 수 있습니다.
모든 것 다 지녔어도 그 내면에 믿음이, 희망이, 사랑이, 기쁨이, 평화가 없다면 결코 행복할 수 없습니다.
바로 이 모두를 일거에 충족시켜주는 분이 하느님입니다.
참으로 생명과 사랑의 하느님을 선택하여 하느님께 믿음을, 희망을, 사랑을 두고 살 때 참행복이요, 이런 주님을 모시는 미사은총이 참으로 우리를 행복하게 합니다.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의 묵상글
<여러분은 누구에게 의지하고 무엇에게 의지하시는지요?>
사람은 누구나 행복을 추구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행복의 비결에 대해 논합니다.
예수님도 참행복을 선언하셨다고 루카와 마태오는 자신의 복음서에서 전해주고 있습니다.
마태오복음의 행복 선언은 산에서 이루어져 '산상설교'라는 이름이 붙여졌고, 루카복음의 행복 선언은 "예수님께서 산에서 내려가 평지에 서서"(루카 6,17) 말씀하셨다 해서 '평지설교'라 불리기도 합니다.
"산"이 하느님 현존의 장소를 상징한다면, "평지"는 우리와 같은 사람들, 죄인들이 사는 현장, 기쁨과 눈물과 다툼과 애증이 엉킨 실질적 공간을 상징합니다.
비슷한 가르침 일화에 서로 다른 공간적 배경을 설정한 데는 두 복음사가의 목적과 의도가 나름대로 있을 겁니다.
예수님께서 행복하다고 하는 이들을 보면, 하나같이 현세에서 무겁고 힘겨운 짐을 지고 있는 이들입니다.
가난하고 굶주리고 미움, 내쫓김, 모욕, 중상에 시달리니 얼마나 고단하고 서러운 삶인지 체험이나 짐작을 통해 가늠할 수 있습니다.
마치 이 복음 내용에 실마리를 던지듯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위로합니다.
"우리가 현세만을 위하여 그리스도께 희망을 걸고 있다면, 우리는 모든 인간 가운데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1코린 15,19)이라고.
그렇다면 가난한 이들은 행복해지기 위해 내세만을 기다려야 할까요?
현세와 내세가 영 다른 양상일까요?
현세에서 힘들게 살면 내세에서 복 받고, 반대로 현세에서 누리고 살면 내세에서 불행할까요?
예수님의 말씀은 결코 이런 이분법적 결과론이 아닐 겁니다
가난해도, 울고 있어도, 미움받고 쫓겨나고 모욕과 중상에 시달려도, 그런 힘에게 자신의 행복을 빼앗기지 않을 수 있고, 반대로 배부르고 웃고 모두에게 칭송받아도 무엇이 행복인지 모르고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의 것이다."
(루카 6,20)
가난이 행복을 부르는 신비에 대해 예레미야 예언자는 제1독서에서 이렇게 선포합니다
"주님을 신뢰하고 그의 신뢰를 주님께 두는 이는 복되다."
(여레 17,7)
그렇습니다.
행복의 조건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제 힘과 사람에 기대기보다 하느님을 믿고 그분께 신뢰를 두는 것. 이 온전한 의탁이 부족하고 약하고 죄인인 가난한 이를 행복에로 이끕니다.
그러니 행복의 조건에서 가난이 차지하는 비중은 참으로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진정 하느님께 의탁하고 신뢰하는 삶을 사는 데는, 사람들이 추구하는 재물과 권력 명예가 오히려 방해거리도 될 수 있습니다.
내 주머니에 돈이 있고 내 말 한 마디면 움직이는 이들이 있고 내게 찬사를 보내는 이들에 둘러싸여 있다면, 그래서 감사를 모르고 내 힘만 믿고 산다면, 내 삶에서 과연 하느님을 떠올릴 수 있을까요?
예수님이 먼저 걸으셨고, 안토니오, 프란치스코, 글라라, 엘리사벳, 그밖의 많은 성인들이 따랐고, 지금도 무수한 이들을 매혹시키는 길입니다.
가난의 길, 주님을 소유하는 길, 행복의 길...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의 것이다."
(루카 6,20)
행복과 불행은 어디에 의지하고 있는가에 판가름난다고 성경은 역설합니다.
사람에게 의지하느냐 아니면 하느님께 의지하느냐.
육에 의지하느냐 아니면 영에 의지하느냐.
능력에 의지하느냐 아니면 섭리에 의지하느냐.
"사람에게 의지하는 자와 스러질 몸을 제 힘인 양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라.
그의 마음이 주님에게서 떠나 있다."
(예레 17,5)
"그러나 주님을 신뢰하고 그의 신뢰를 주님께 두는 이는 복되다."
(예레 17,7)
여러분은 누구에게 의지하고 무엇에게 의지하시는지요?
우리는 화답송에서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행복하여라, 주님을 신뢰하는 사람!"(시편 1,1)
시편의 시작이 "행복하여라!"로 시작하고 있다는 것 놀랍지 않으세요.
"그러나 불행하여라, 너희 부유한 사람들!
너희는 이미 위로를 받았다."
(루카 6,24)
여러분은 재산이 많습니까?
그래서 행복하십니까?
아니면 여러분은 찢어지게 가난합니까?
그래서 불행합니까?
대다수의 우리들은 대단한 부자도 아니요, 그렇다고 찢어지게 가난하지도 않을 겁니다.
먹고살만은 한데 조금 더 넉넉하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시겠지요.
지금 가난한 사람들이 행복하다는 주님의 말씀은 크게 수긍이 안 가지만, 지금 부유한 사람은 받을 위로를 충분히 받았으니 더 큰 위로는 필요없지 않겠느냐는 말씀은 토를 달고싶지 않을 정도로 수긍이 갑니다.
그렇다면 지금 조금 부족하게 느끼는 것이 나을까요, 아니면 지금 더 넉넉하고 나중엔 더 못받아도 상관없을까요?
퇴직금을 일시불로 지금 다 받는 것을 원하시나요? 아니면 조금씩 연금으로 죽을 때까지 받기를 원하시나요?
하느님 나라의 큰 행복을 위해서 지금 조금 부족하다시피 사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요?
언론매체를 통해 억만장자들이 하루 아침에 무너지고 비참하게 되는 꼴을 한번씩 접할 때마다 오늘 예수님 말씀이 딱 맞구나 생각하게 됩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부유한 사람들!
너희는 이미 위로를 받았다."
그런 부자들이 결코 불쌍하지 않고 통쾌하기까지 하니 그런 부자로 살기보단 조금 부족함을 느끼는 서민으로 살아가는 것이 참으로 복되구나 생각듭니다.
여러분도 그렇지요?
그러니 내가 좀 부자다 싶으면 얼른 다른 가난한 사람들에게 좀 나누십시오.
그리하여 항상 조금 아쉽다 할 정도로 만든다면 그게 바로 하느님 나라를 얻는 비법입니다.
그렇게 하느님 나라를 얻으시기를 축원합니다.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의 것이다. "
(루카 6,20)
아멘.
알렐루야!
- 작은형제회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하느님을 신뢰하는 사람은 고통과 슬픔 뒤에 밝게 드러나는 희망을 볼 수 있습니다>
인터넷을 검색하면서 재미있는 글을 읽었습니다.
“뱀이 길을 가다가 ‘톱’에 약간 상처를 입었습니다.
화가 난 뱀은 톱을 노려보다가 물었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입에 큰 상처를 입었습니다.
기력을 회복한 뱀은 톱을 몸으로 칭칭 감았습니다.
톱이 숨을 멎도록 하였습니다.
결국 뱀은 톱에 몸이 잘려 죽고 말았습니다.”
뱀이 참 어리석은 것 같습니다.
만일 뱀이 처음 상처를 받아들이고 톱을 무시했다면 입에 상처를 입지 않았을 겁니다.
입에 상처를 입었어도 톱을 무시했다면 죽지는 않았을 겁니다.
뱀만 그럴까요?
저도 어릴 때 뱀처럼 행동한 적이 있습니다.
친한 친구와 장난하다가 친구가 저의 공책을 찢었습니다.
화가 난 저는 친구의 책을 찢었습니다.
친구도 화가 나서 제 연필을 부러트렸습니다.
저도 화가 나서 친구의 가방을 찢었습니다.
결국 선생님이 아셨고, 친구와 저는 무척 혼이 났습니다.
그냥 공책이 찢어진 걸 무시하고 친구에게 그러지 말라고 했으면 연필이 부러지는 일도, 책이 찢어지는 일도, 가방이 찢어지는 일도 없었을 겁니다.
선생님에게 혼나는 일도 없었을 겁니다.
욱하는 성격 때문에, 순간의 화를 참지 못해서 본인은 물론 가족에게도 큰 피해를 주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속담은 이렇게 말합니다.
“빈대 잡으려다가 초가삼간 다 태운다.”
장자는 화를 참지 못하는 어리석은 사람에게 아주 좋은 글을 남겨 주었습니다.
제목은 ‘빈 배’입니다.
“배로 강을 건널 때 빈 배가 다가와 부딪치면 비록 성급한 사람일지라도 화를 내지 않는다.
그러나 그 배에 사람이 타고 있으면 비키라 소리친다.
한 번 소리쳐 묻지 못하면, 다시 소리쳐 묻고 그래서 안되면 세 번 소리쳐 묻는다.
또 그래도 안 되면 나쁜 소리가 나오기 마련이다.
아까는 화내지 않고 지금은 화내는 까닭은 아까는 빈 배였고 지금은 사람이 타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자신을 비우고 생의 강을 흐른다면 누가 해하겠는가.”
멀리 미국에 있지만 한국의 소식을 듣게 됩니다.
뉴스는 연일 정치에 관한 소식을 전합니다.
법과 원칙에 의해서 시비가 가려질 겁니다.
물이 흘러 바다로 가듯이 정해진 시간이 지나면 안정을 찾을 겁니다.
그럼에도 마음이 흔들리는 것은 저의 마음을, 빈 배로 만들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뉴스를 보는 시간에 성경 말씀을 듣고, 음악을 들으니, 마음이 한결 편해집니다.
본당에서도 그렇습니다.
쉽게 해결될 수 있는 문제도 감정이 생기면 일이 복잡해지곤 합니다.
작은 상처를 무시할 수 있다면, 나의 마음을, 빈 배로 만들 수 있다면 폭풍우 속에서도 평온을 찾을 수 있을 겁니다.
신앙은 먼저 행하면서 자라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먼저 주님의 말씀을 경청하면서 자라는 겁니다.
오늘 성서 말씀에서 우리는 행복의 기준을 보게 됩니다.
그것은 소유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원하는 것을 채우는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제1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주님을 신뢰하고 그의 신뢰를 주님께 두는 이는 복되다.
그는 물가에 심긴 나무와 같아 제 뿌리를 시냇가에 뻗어 무더위가 닥쳐와도 두려움 없이 그 잎이 푸르고 가문 해에도 걱정 없이 줄곧 열매를 맺는다.
행복하여라! 악인의 뜻에 따라 걷지 않는 사람, 죄인의 길에 들어서지 않으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 오히려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밤낮으로 그 가르침을 되새기는 사람, 하는 일마다 모두 잘되리라.”
고통과 슬픔은 먹구름처럼 다가오지만 그것이 하늘의 태양을 없애지 못합니다.
하느님을 신뢰하는 사람은 고통과 슬픔 뒤에 밝게 드러나는 희망을 볼 수 있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걸어간 길입니다.
예언자들이 걸어간 길입니다.
성인과 성녀들이 걸어간 길입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가난, 고통, 죽음까지도 기꺼이 받아들였던 이 시대의 신앙인들이 걸어간 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행복은 소유함에 있지 않다고 선포하십니다.
가난할지라도, 슬픔 속에 있을지라도, 고통 중에 있을지라도, 박해를 받을지라도 하느님께 신뢰를 두는 사람은 행복하다고 하십니다.
하느님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그들의 슬픔, 고통, 아픔을 위로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부유할지라도, 성공했을지라도, 권력을 가졌을지라도, 풍족한 삶을 살고 있을지라도 하느님께 신뢰를 두지 않는 사람은 불행하다고 하십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날 때 가지고 갈 것은 재물, 권력, 명예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늘에 쌓아야 할 것은 사랑, 헌신, 나눔이기 때문입니다.
니체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멀리 있는 길을 항해하는 배가 폭풍을 만나지 않고 조용한 바다로만 갈 수는 없다.
멀리 있는 길을 항해하는 배에서 폭풍은 벗과 같은 것이다.”
어떤 분은 어쩌면 지금 삶의 먼 항해 길에 폭풍을 만나고 계실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지금 삶이라는 배가 험한 파도에 몹시 흔들리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삶의 여정에서 다가오는 폭풍우를 피하고, 그 폭풍우 벗어나기를 기도하기보다는, 그 폭풍우를 이겨내고 그 폭풍우와 맞서 싸울 힘과 용기를 청할 수 있기를 기도하였으면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그 폭풍우의 한가운데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주님을 만날 수 있고, 그 주님의 힘을 느낄 때 우리는 어떤 힘든 상황 속에서도 참된 삶의 기쁨과 행복을 맛볼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우리가 가야 할 곳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곳은 영원한 생명의 나라입니다.
“현세만을 위하여 그리스도께 희망을 걸고 있다면, 우리는 모든 인간 가운데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셨습니다.
죽은 이들의 맏물이 되셨습니다.”
- 미국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우리의 가치는 하느님 안에서만 드러납니다>
많은 이가 현금보다 신용카드를 사용합니다.
그렇다면 현금의 가치는 없어진 것일까요?
당연히 아닙니다.
현금도 그 가치는 변함없습니다.
여기에 만 원짜리 지폐가 있습니다.
이 지폐가 매우 더럽다면 어떨까요?
또 구겨져 있다면?
만 원의 가치가 아니라 9천 원의 가치가 될까요?
구겨지고 찢어지고 또 더러워도 똑같이 만 원입니다.
스스로 자기를 쓸모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래서 스스로 포기하고 좌절한다면, 구겨지고 찢어지고 또 더럽다면서 만 원 지폐를 버리는 것과 똑같습니다.
자기 가치는 전혀 변하지 않습니다.
어떻게든 만 원이 만 원인 것처럼, 나의 가치도 변함없이 그대로입니다.
그 가치를 알아야 잘 사용할 수 있습니다.
만 원이 구천 원이라고 단정하지 않아야 만 원으로 쓸 수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어떻게 자기 가치를 이용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느님께서 만드신 나의 가치가 쓸모없을 리가 없습니다.
특히 하느님께서 강조하신 것을 보면 ‘사랑’에 의해 나의 가치가 결정됩니다.
사랑 그 자체이신 하느님과 일치해야 하느님처럼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 사랑은 받는 사랑이 아니라, 주는 사랑이었습니다.
사랑할 수 없는 이유를 만들다 보면 자기 가치를 스스로 떨어뜨리는 것입니다.
사랑 안에서, 사랑의 실천을 통해 하느님께서 주신 나의 가치를 발견할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의 행복 선언은 새로운 희망을 품게 됩니다.
가난한 사람, 지금 굶주리는 사람, 지금 우는 사람, 또 사람의 아들 때문에 모욕과 중상을 당하면 행복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의 관점으로 봤을 때는 불행한 사람처럼 보이는데, 오히려 그 반대인 부유한 사람, 배부른 사람, 웃는 사람, 남에게 좋은 말을 듣는 사람이 불행하다고 하십니다.
바로 하느님께 의지하느냐, 세상에 의지하느냐에 따라 행복의 기준이 바뀌는 것이었습니다.
가난하고 굶주리고 울고, 모욕과 중상을 당하는 사람은 자기 힘으로는 지금 상황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하느님께 의지하고 하느님과 함께 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과 함께 하니 거룩한 사람이 될 수 있고, 그래서 하늘 나라에 가까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재물과 사람들의 인정 속에 머물러 있는 사람은 하느님을 잊게 됩니다.
하늘 나라에서 멀어지게 됩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우리의 가치는 하느님 안에서만 드러납니다.
그래서 자기 가치를 부정하는 삶이 아니라, 계속해서 하느님께 의지하면서 자기 가치를 높여야 합니다.
특히 사랑의 실천을 통해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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