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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지도자들의시험7:53~8:5
7:53 다 각각 집으로 돌아가고
8:1 예수는 감람산으로 가시니라
2 아침에 다시 성전으로 들어오시니 백성이 다 나아오는지라 앉으사 그들을 가르치시더니
3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음행 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
4 예수께 말하되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5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예수님의 답변8:6~11
6 그들이 이렇게 말함은 고발할 조건을 얻고자 하여 예수를 시험함이러라 예수께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7 그들이 묻기를 마지아니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이르시되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8 다시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9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양심에 가책을 느껴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10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11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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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요약]
예수님이 성전에서 가르치실 때, 종교 지도자들이 간음하다 잡힌 여자를 끌고 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고발할 구실을 찾고자 그 여자를 어떻게 할지 묻습니다. 예수님이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하시자 모두 떠나갑니다. 예수님도 그녀를 정죄하지 않으시며 다시는 죄짓지 말라고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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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지도자들의시험7:53~8:5
종교 지도자들은 기득권과 잘못된 종교적 신념으로 예수님을 적대시합니다. 그들은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신 일로 인해 예수님을 죽이려고 혈안이 되었습니다(5:18; 7:1). 예수님을 대중 앞에서 고발할 구실을 찾고자(6절) 그들은 간음 현장에서 여자를 붙잡아 옵니다. 간음을 행한 남자와 여자를 모두 데려와야 하는데, 여자만 데리고 와서 그녀에게 모든 죄를 덮어씌우며 예수님을 시험합니다. 모세의 율법은 간음한 남녀를 돌로 치라고 규정합니다(레 20:10; 신 22:22). 율법에 따라 간음한 여인이 죽을 위급한 상황에서 모두가 예수님의 말과 행동에 주목합니다.
● 더 깊은 묵상
종교 지도자들이 죄의 현장에서 잡아 온 여자를 예수님 앞에 세운 의도는 무엇인가요?
나는 누군가를 시험에 빠뜨리거나 정죄한 적은 없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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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답변8:6~11
예수님은 종교 지도자들의 의도를 아셨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여자에게 돌을 던지는 것이 옳지 않다고 하면, 율법을 위반했다며 예수님을 고발할 것입니다. 만약 모세의 법대로 돌로 치라고 하면, 예수님이 지금까지 보여 주신 사랑의 표적이 위선이었다며 비난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무언가를 쓰십니다. 그리고 일어나 답변을 하십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7절). 이 말씀으로 돌을 들고 서 있는 모든 사람이 죄인임을 상기시키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다시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무언가를 쓰시는 사이에 양심의 가책을 느낀 사람들이 하나둘 떠나가고 여자만 남습니다. 예수님은 여자에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11절)라고 하십니다. 죄 사함을 받은 자의 선택은 거룩한 삶이어야 합니다.
● 더 깊은 묵상
간음한 여인을 돌로 치려던 이들이 모두 떠나간 이유는 무엇인가요?
정죄의 돌을 버리고 내가 용납하고 보듬어야 하는 지체는 누구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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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까지 판단하려는 교만
세상에는 가짜가 참 많습니다. 때로 진짜보다 가짜가 더 진짜 같을 때도 있습니다. 어느 참기름 가게에 갔더니 ‘정말로, 진짜, 순 참기름만 판매합니다’라는 간판이 붙어 있었습니다. 오죽했으면 ‘정말로, 진짜, 순’이라고 몇 번이고 강조할까 싶었습니다. 그만큼 가짜가 많다는 뜻일 것입니다. 저는 많은 사람이 자주 정죄와 판단의 도구로 들이미는 율법적인 잣대가 하나님의 법을 가장한 가짜가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남을 정죄하고 판단하는 사람들은, 많은 경우에 도덕적으로 흠결이 적습니다. 술이나 담배도 입에 대지 않습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인정을 받고 직분도 얻습니다. 문제는, 그럴수록 자신의 판단이 절대적이라는 착각에 빠진다는 것입니다. 그 판단 기준이 정말로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인지는 중요하지 않게 됩니다. 많은 사람의 칭송을 받다 보면 교만이 하늘을 찌릅니다. 급기야는 예수님까지 판단하게 됩니다. 많은 사람이 진짜보다 가짜를 더 신뢰하는 세상, 가짜가 기준이 된 세상에서 우리가 붙들어야 할 진짜는 하나님의 법입니다. 그 법 속에 담긴 하나님의 마음과 하나님의 뜻입니다.
자신의 기준으로 다른 사람을 재단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가짜를 앞세우느라 진짜를 뒷전으로 치우는 격입니다. 옳고 그름을 내 기준으로 판단하다가 복음 전파를 훼방하고,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가 실현되는 것을 막는다면 그보다 큰 죄는 없을 것입니다.
치열한 복음 / 김병삼_ 두란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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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절묵상:요한복음 8장 6, 11절
예수님은 죄인 편에 서십니다. 간음한 여인과 회중 앞에서 예수님이 땅에 '두 번'쓰신 것은(6, 8절) 하나님이 두 번 쓰신 십계명을 떠올리게 합니다(출 34:1).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경배하는 죄를 저지른 백성을 위해 모세가 중보했을 때, 하나님은 그들을 용서하시고 다시 십계명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계명을 어긴 죄인임에도 용서받은 것은 예수님의 중보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앞에서 죄인인 우리를 정죄하지 않으시고 변호해 주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죄인의 잘잘못을 가려 그를 심판함이 아니고 자기 죄를 미워해 죄에서 떠나는 것이다. - 맥스 루케이도
오늘의 기도
주님, 죄 가운데 살다가 주님 앞에 붙들려 온 여인의 모습에서 저를 봅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라고 말씀하시는 주님 앞에 철저히 회개하게 하소서. 주님이 십자가에서 저의 죄를 대신 지신 것을 기억하며, 정죄의 돌을 내려놓고 다른 사람을 용서하게 하소서.
요한복음7:53-8:11절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은 예수님은 사역이 목적이 멸망시키려 함이 아니라 구원하려 하심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먼저 잘못된 종교신념이 얼마나 무서운 가를 봅니다
3절에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음행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왔습니다
이유는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서입니다
일찍이 예수께서 안식일에 38년된 병자를 고쳐주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 38년된 병자를 고친 예수님을 죽이려고 혈안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고발하기 위해 예수님을 책잡기 위해서 음행중에 잡힌 여자를 예수님 앞에 세운 것입니다
율법에 의하면음행을 한 여자는 돌로 죽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여자를 살려주어야 한다면 예수님은 율법을 범하게 되는것이고
반대로 율법대로 돌을 던져야 한다면 지금까지 보여주셨던 사랑이 위선이 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음행한 여자를 데려와 예수님을 시험한 것은 유대인들이 얼마나 잘못된
종교적 신념을 가지고 있는가를 말하는 것입니다
율법의 잘못된 종교적신념이란 율법의 근본 정신을 즉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을
잃어버리고 단지 율법의 형식만을 지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하나님의 말씀을 말씀의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해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서가 아닌
지키느냐 지키지 않느냐로 본다면 우리 역시도 형식 주의 신앙이 되고 말것입니다
말씀으로 인격적인 교제가 있어야 합니다
가지에 붙어 있는 포도나무와 같이 말입니다
유대인들의 이러한 행동에 대해 예수님의 반응입니다
예수님은 사역이 목적이 멸망시키기 위함이 아니라 구원하려 하심을 보여주셨습니다
5절에 유대인들은 율법에 돌로 치라 명하였는데 당신은 어떻게 말하겠는가?
유대인들의 질문에 어느쪽으로 말해도 예수님은 책잡히게 됩니다
예수님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유대인들은 대답을 재촉했습니다 그때서야 예수님은 7절에
"너희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라 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다시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쓰셨습니다
사실인지는 알수 없지만 예수님은 사람들의 죄를 적었다는 말이 있습니다
어째든 예수님의 말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라 치라는 말 때문에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 이들은 그 자리를 떠나가고 오직 예수와 여자만 남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여자에게 11절에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말씀하셨습니다
본 사건이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우리를 멸망하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구원하려 오셨습니다
예수께서 정죄하시지 않으시고 구원하러 오셨기에 오늘 내가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고 우리도 누군가를 정죄하려고 하는 돌을 내려놓고
반대로 정죄하려는 그 사람을 살릴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영혼을 살리는 우리 모두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예수님께서 아침에 성전에서 백성을 가르치시고 계셨는데,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음행중에 잡힌 한 가련한 여자를 무자비하게 끌고 와서 물었습니다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요8:4~5)
교활한 그들이 아침부터 예배와 말씀의 성전을 재판정으로 만들어버린 이유는 예수님을 궁지에 몰아 함정에 빠뜨리려는 것이었습니다 즉, 당시 로마의 식민지배 아래 있던 유대에는 사법권이 없었기 때문에 돌로 치라 하면 로마법에 걸리고, 돌로 치지 말라 하면 율법에 걸리는 상황을 만들어서 법적인 올무에 걸리게 하려 한 것입니다
또한 영적으로도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한 것입니다 즉, 예수님은 심판하러 오신 것이 아닌데, 심판하게 만들려고 한 것입니다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세상을 구원하려 함이로라"(요12:47)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요8:7)
그러자 이 말씀을 들은 그들이 양심에 가책을 느껴 어른부터 젊은이까지 하나씩 떠나고 오직 예수님과 그 가련한 여자만 남게 되었습니다 그때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물으시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요8:11)
참으로 우리가 이러한 복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8:1~2) 그런데 예수님도 심판하려고 하지 않으셨는데, 형제자매를 판단함으로 주제 넘게 자기가 스스로 재판관이 되는 자들이 많습니다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관이로다"(약4:11~12)
그러므로 우리는 비방하는 것을 버리고, 오직 서로 친절하게 하며, 서로 화목하기 원합니다 "비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엡4:31~32) 또한 오직 서로 덕을 세우기 원합니다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엡4:29)
예수님의 가르침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넘어뜨릴 구실을 찾으려고 간음하다 잡힌 여인을 끌고 와서 돌로 쳐죽이라는 모세의 율법을 거론하며 어떻게 할 것인지 질문한다.
예수님은 그 유명한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는 말씀을 하셨고 양심에 가책을 느낀 사람들은 돌을 땅에 던지고 떠나 버린 뒤 예수님은 여인을 용서하고 다시 죄를 짓지 말라시며 보낸다.
여기에 등장하는 간음하다 잡힌 여인은 우리의 모습이다.
성경에서 간음은 육체적 간음도 있지만 하나님을 떠나 다른 것을 사랑하는 것을 말하는데 우리가 예수님을 알기 전 하나님과 전혀 관계없는 삶을 살았고 예수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다른 것을 곁눈질하며 살고 있으니 사회적 지위나 교회의 직분으로 포장하려고 하지 말고 영적 간음의 죄를 지은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 여인과 우리의 차이는 죄가 있고 없는 것이 아니라 그 죄를 들켰느냐 아니냐 하는 것뿐이다.
그러한 우리를 예수님이 십자가의 사랑으로 용서하시고 여기까지 인도하셨으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은혜이다.
그러므로 죄책감 때문에 눌려 살아도 안 되고 다른 사람을 정죄하며 돌을 던져도 안 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율법을 사람을 살리기 위해 그 사람의 상황에 맞춰 적용하고 계심을 볼 수 있다.
죄 때문에 수치스럽게 죽을 수밖에 없었던 여인에게 이날은 부끄러움이 찬양으로 바뀐 날로 기억될 것이다.
우리도 이런 주님께 찬양하고 예배드리는 은혜로운 하루를 보내길 바랍니다.
✔ 생명의 빛으로 살아가는 길은 무엇입니까?
➲ 정결한 삶으로 나아가야 합니다(7:53~8:9절).
사람들은 다 각각 집으로 돌아가고, 예수님은 감람산으로 가셨습니다. 다음날 일어날 상황에 대하여 영적 재충전을 하시기 위함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다음날 이른 아침에 성전에서 모여든 사람들 앞에서 가르치실 때에,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고발할 조건을 얻고자 간음한 여인을 끌고 왔습니다.
모세의 율법에 의하면 돌로 쳐 죽이라고 명령하고 있는데, 생은 어떻게 말할 것이요?라고 질문을 합니다. 예수님은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쓰셨고, 계속되는 질문에 예수님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7절).. 그리고 다시 몸을 굽혀 땅에 무엇인가를 쓰실 때, 어른부터 시작해 젊은이까지 하나둘씩 그 자리를 떠났고, 오직 예수님과 홀로 서 있는 여인만 남게 되었습니다.
율법의 잣대로 볼 때, 하나님의 계명을 완전하게 지키는 자는 없습니다. 그런데 결코 죄를 짓지 않고 사는 완벽한 사람이 있으면 나와서 간음한 여인을 돌로 치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죄의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죄를 판단하고 정죄하기에 앞서 먼저 내 자신 안에 있는 죄를 먼저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죄에 집중하기보다 자신의 죄의 문제를 더 심각하게 생각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어쩌면 사람들 앞에 서 있는 여인의 내 자신의 모습일 수 있음 또한 간과해서도 안 될 것입니다. 여인의 수치스러운 죄가 온 천하에 그리고 예수님 앞에 여지없이 드러났던 것처럼, 내 자신 또한 최후 심판의 때에 하나도 남김없이 드러날 거라는 사실을 늘 마음에 품고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육신의 안일을 버리고 온전히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경건의 훈련을 게을리하지 않으셨습니다. 나 역시도 늘 정결한 삶을 살아가고 노력하고, 애쓰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죄의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날마다 정결한 삶으로 나아가 어두운 세상에 생명의 빛으로 살아가는 삶이어야 하겠습니다.
➲ 긍휼의 은혜를 덧입어야 합니다(10~11절).
예수님께서 몸을 일으켜 홀로 남은 여인에게 ‘...여자여...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말씀 하셨습니다. 그녀를 고발했던 유대 지도자들은 율법의 모양만 지니고 있었을 뿐 율법의 고귀한 정신은 실천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동안 반복되어 오던 죄악의 습성을 과감히 내어 버리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용서를 베푸시고, 거룩한 삶을 당부하셨습니다.
죽음이라는 형벌에 처해 져야 했던 간음한 여인을 예수님은 용서하셨습니다. 이 여인을 용서하셨던 것처럼 예수님은 내 자신 또한 용서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용서받아야 할 은밀한 죄악의 모습을 주님 앞에 온전히 고백하며, 회개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백성으로 거듭난 삶을 위해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의 모습을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는(엡 4:22)
단호한 믿음의 결단과 행함이 있어야 합니다. 나아가 죄 사함의 은혜를 입었다면 이제는 과거를 돌아보지 말고 현재에 삶에 충실하며 하나님 앞에서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이 내 죄를 위해 죽으셨다는 것을 기억하며, 긍휼의 은혜를 덧입어 어두운 세상에 생명의 빛으로 살아가는 삶이어야 하겠습니다.
➲ 영적인 무지를 벗어나야 합니다(12~20절).
여인의 죄를 사하신 예수님은 ‘...나는 세상의 빛이니...’(12절)라는 놀라운 선언을 하십니다. 이어서 ‘...나를 따르는 사람은 어둠 속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어둠을 물리치는 빛으로 오셨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스스로 자신에 대하여 증언하니 그 증언은 참되지 않았다(13절)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어떤 일의 진실성을 밝히려면 반드시 두 사람의 증인이 필요하다고 율법에 기록(민 35:30;신 17:6)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율법과 전통은 잘 알고 있었지만, 정작 그것을 넘어 은혜와 진리로 오신 예수님은 전혀 깨닫지 못한 영적인 무지를 보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은 결코 혼자 있는 것이 아니고, 자신을 보내신 하나님이 함께 계시기 때문에 자신의 증언이 참되다는 것을 강조하셨습니다(14~18절). ‘...네 아버지가 어디 있느냐...’(19절a)며 다시 한번 그들의 무지를 드러냅니다. 이에 예수님은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라...’(19절b)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처음부터 어두움에 속한 자들이었고, 빛을 싫어하였고, 빛 가운데 거하기를 완강히 거부하였기에,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그분과 하나님의 깊은 관계를 이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과 대화하면서 점점 적대감이 깊어졌지만, 아직 예수님의 때가 이르지 아니하였기에 그들은 예수님께 손을 대지 못했습니다.
말씀을 듣고, 읽고, 묵상하는 이유는 예수님을 더욱 깊이 알아 가기 위해서입니다.
성경을 지식적으로 많이 알고 있다고 해도 예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를 알지 못하면 그건 믿음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내 틀과 내 고집에 빠져 예수님에 대해 올바로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제대로 이해하면서 믿음 생활을 할 때, 하나님 아버지와 영적 친밀함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나의 말과 행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야 하겠고, 철저하게 하나님을 인정하므로 나의 모든 삶과 행동이 참되다는 것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영적 어두움은 영적 무지를 낳습니다. 예수님이 내 인생에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되심을 분명히 알고, 믿음으로 어두운 세상에 생명의 빛으로 살아가는 삶이어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죄로 인하여 죽을 수밖에 없었던 자를 구원해 주신 은혜와 사랑을 매일 묵상하여 정결한 삶으로 나아갈 뿐만 아니라 영적인 무지에 빠지지 않도록 생명의 빛 가운데로 나아가 영혼을 더럽히는 어두움을 물리치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요 7:53~8:20절)...
오늘 본문은 간음하다 잡힌 여인의 이야기입니다. 유대인의 관례상 간음한 여인을 돌로 쳐서 죽이기 위해서는 현장에서 잡혀야만 합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간음한 여인만 잡혀 왔고 남자는 없다는 것입니다.
이 사건은 예수님을 고발하고자 미리 계획한 것처럼 보입니다.
많은 사람이 이 사건을 통해서 죄인을 용서하는 마음을 배우고자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간음한 여자와 같은 자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이 사건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미 계획된 시험 앞에서 예수님께서 손가락으로 땅에 무엇인가를 쓰기 시작하십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강조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땅에다가 무엇인가를 쓰시는 모습이 예레미야 17장 12-13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영화로우신 보좌여 시작부터 높이 계시며 우리의 성소이시며 이스라엘의 소망이신 여호와여 무릇 주를 버리는 자는 다 수치를 당할 것이라 무릇 여호와를 떠나는 자는 흙에 기록이 되오리니 이는 생수의 근원이신 여호와를 버림이니이다”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지 않는 자들을 성전의 땅에 기록하시는 모습입니다.
즉, 하나님의 심판을 땅에 기록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직접 무엇인가를 쓰시는 사건이 성경에 두 번 나옵니다. 첫 번째는 십계명을 돌판에 쓰시는 일, 두 번째는 다니엘서 5장에서 벨사살 왕 때에 하나님의 손가락이 석회 벽에 그 나라가 망할 것을 쓰시는 일입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여호와를 떠난 지를 알 수 있는 근거는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순종 여부로 구별할 수 있었습니다. 모세가 십계명을 받고 시내산을 내려올 때에 이스라엘 백성은 금송아지를 만들어 그것이 그들을 출애굽 시킨 하나님이라고 경배하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본 모세는 격분하여 돌판을 깨뜨려 버립니다.
이 얼마나 절망스러운 이야기입니까? 거룩한 십계명을 받았는데 인간은 지킬 능력이 없음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다시 십계명을 돌판에 새겨 이스라엘 백성에게 줍니다. 이렇게 무능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왜 하나님께서는 또다시 십계명을 주시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공의를 꺾지 않으시겠다는 표현입니다.
십계명은 만나를 담은 금 항아리와 아론의 싹 난 지팡이와 함께 언약궤 안에 놓여 있습니다. 이 언약궤를 덮는 것이 속죄소인데 속죄소는 그룹들이 날개를 펴서 속죄소를 지키고 있습니다. (속죄소를 다른 말로 시은좌입니다) 속죄소는 하나님의 공의가 드러나는 곳입니다.
거룩하지 않으면,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죽을 수밖에 없는 곳입니다. 바로 이곳에 속죄 제사를 지내기 위해 대제사장이 일 년에 한 번씩 속죄소에 피를 뿌립니다. 왜냐하면 인간들은 누군가의 피를 뿌리지 않으면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언약궤 안에 들어가 있는 세 가지의 물건들은 인간이 죄인이며 얼마나 희망이 없는 존재인가를 고발하고 있는 상징적인 물건입니다.
예수님께서 처음 땅에 쓴 이름은 아마도 여인의 이름이었을 것입니다.
율법을 어기고 간음한 죄로 그녀는 여호와를 떠났기에 그녀의 이름이 땅에 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간음한 여인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우리의 이야기입니다.
마치 우리의 이름을 예수님께서 쓰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여인의 이름을 지우십니다.
그리고 자신의 이름을 써 내려가십니다.
마치 언약궤가 우리를 고발하여 그룹이 우리를 치려고 할 때 예수님께서 그의 몸으로 막으시는 것과 같습니다. 자신의 몸을 십자가에 돌아가심으로 말미암아 그의 피가 속죄소에 뿌려지는 것과 같습니다. 전에는 제물의 피가 속죄소에 뿌려졌습니다. 문제는 짐승의 제물은 매년 뿌려져야 합니다. 그 피로 우리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뿌려졌을 때는 더 이상의 피 뿌림이 요구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는 완벽하게 우리를 구원합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스스로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있는 자가 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이름을 지우신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이름 대신에 자신의 이름을 쓰셨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5장 21절에서 중요한 진리를 가르쳐 줍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는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이 얼마나 은혜로운 말씀입니까?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인간의 몸으로 오신 것만으로 은혜인데 그가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감당하십니다. 우리의 죄를 감당하시겠다는 것은 우리가 받아야 할 저주와 심판을 대신 받으십니다.
예수님께서 10절에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라고 물으십니다. 그 여인의 대답은 “주여 없나이다”입니다. 우리를 정죄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사탄은 우리를 유혹하며 삼키려고 항상 우리를 노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지적하듯이 사탄은 결코 우리를 정죄하지 못합니다.
그들은 우리를 시험할 능력은 있어도 정죄할 능력은 없습니다. 이 얼마나 감사할 일입니까? 우리를 정죄할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밖에는 없으신데 예수님께서 정죄하지 않으신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죄를 범하지 말라고 강권하십니다. 우리가 죄를 범하지 않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율법을 잘 지켜서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을 해서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닙니다. 주신 은혜가 감사해서 주의 율법을 지키는 것입니다. 주의 은혜에 감사함으로 주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하루를 살아가면서 우리가 간음한 여인과 같은 존재였다는 사실을 고백해야 합니다.
우리는 땅에 쓰였던 이름을 가졌던 자들입니다. 그
런데 우리를 위해 예수님께서 자신의 이름을 쓰시고 우리가 받을 저주와 심판을 감당하십니다.
여러분이 이 은혜를 풍성히 누리시길 소원합니다.
그리고 그 은혜 때문에 오늘 하루도 순종하는 삶이 되시길 소원합니다.
참된 은혜를 안다는 것만큼 이 세상에서의 축복은 없습니다.
너는 그 악을 행한 남자나 여자를 네 성문으로 끌어내고 그 남자나 여자를 돌로 쳐죽이되
죽일 자를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의 증언으로 죽일 것이요 한 사람의 증언으로는 죽이지 말 것이며
이런 자를 죽이기 위하여는 증인이 먼저 그에게 손을 댄 후에 뭇 백성이 손을 댈지니라 너는 이와 같이 하여 너희 중에서 악을 제할지니라.(신 17:5~7)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주께서 심판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시 51:4~5)
거역하며 주께서 그들 가운데에서 행하신 기사를 기억하지 아니하고 목을 굳게 하며 패역하여 스스로 한 우두머리를 세우고 종 되었던 땅으로 돌아가고자 하였나이다 그러나 주께서는 용서하시는 하나님이시라 은혜로우시며 긍휼히 여기시며 더디 노하시며 인자가 풍부하시므로 그들을 버리지 아니하셨나이다.(느 9:17)
영화로우신 보좌여 시작부터 높이 계시며 우리의 성소이시며
이스라엘의 소망이신 여호와여 무릇 주를 버리는 자는 다 수치를 당할 것이라 무릇 여호와를 떠나는 자는 흙에 기록이 되오리니 이는 생수의 근원이신 여호와를 버림이니이다.(렘 17:12~13)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마 7:1)
비판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 정죄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요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눅 6:37)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 5:12)
이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제사장마다 매일 서서 섬기며 자주 같은 제사를 드리되 이 제사는 언제나 죄를 없게 하지 못하거니와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그 후에 자기 원수들을 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실 때까지 기다리시나니
그가 거룩하게 된 자들을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느니라.(히 10:10~14)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요일 1:9~10)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골 3:12~14)
보라 내가 도둑 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 요한계시록 16:15
천지 만물을 창조하시고 세상에 모든 시간과 공간을 섭리하시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친히 그 죄를 담당하시고 우리를 죽음과 심판의 어둠에서 빛으로 건져내신 은혜를 찬양합니다.
세상을 바라볼 때 손가락질의 정죄의 마음을 내려놓고,
우리 눈에 있는 들보를 떼어내는 참 깨달음의 신앙으로 회복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 십자가에서 고통과 수치 가운데 죄를 알지도 못한 자들을 위하여
자기의 생명을 내어 놓으신 그 한없는 사랑으로 말미암아 허락된
믿음의 권세와 기쁨을 날마다 세상 가운데 드러내고 전하는 주님의 제자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열방 곳곳마다 증인의 삶을 살기 위하여 땀 흘리고 눈물로 기도하는
선교사님들의 모든 발걸음과 가정과 사역위에 기름 부어주시고
구하는 것에 넘치게 채우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날마다 누리게 하여 주시옵소서.
고통과 질병으로, 전쟁과 가난과 핍박으로 말미암아 신음하는 연약한
백성들에게 치유와 회복의 광선을 비춰 주시고,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공의가 그 땅 가운데 퍼져 나가고
세워지는 역사를 바라보게 하여 주시옵소서. 분열과 다툼,
미움과 죄악으로 덮혀 버린 이 나라와 백성을 불쌍히 여겨 주시고,
하나님의 공의의 잣대로 충성된 일꾼들을 일으키시고
마지막 때에 새롭게 쓰임 받는 거룩한 제사장 나라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감사와 찬양을 아버지께 올려드리며, 우리의 영원하고 선한 목자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하신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