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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위일체주일: 교리를 기억하는 유일한 날>
오순절 성령강림일이 끝나면 교회력에 기묘한 공백이 생긴다. 성령이 불처럼 임하고, 교회가 탄생하고, 그 드라마틱한 절정이 지나간 직후의 일요일. 초대교회는 이 주일에 아무것도 배정하지 않았다. 라틴어로 'dominica vacans', 말하자면 '비어 있는 주일'이었다. 교회력이란 본래 사건의 달력이다. 성탄절은 하나님이 사람이 된 사건, 부활절은 무덤이 열린 사건, 오순절은 성령이 쏟아진 사건을 기념한다. 그런데 삼위일체주일은 어떤 사건도 기념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무엇을 하셨는가가 아니라 하나님이 누구인가를 축하하는 날이다. 교회력 전체를 통틀어 교리를 절기로 만든 유일한 사례가 바로 이 주일이다.
그렇다면 왜 이런 파격이 필요했을까. 그리고 왜 그토록 오래 걸렸을까.
아리우스의 그림자, 그리고 로마의 거절
삼위일체주일의 전사(前史)를 이해하려면 4세기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알렉산드리아의 사제 아리우스가 "성자는 성부에 의해 창조된 존재"라고 선언했을 때, 교회는 그 한 문장으로 뒤집어졌다. 니케아 공의회(325년)가 아리우스를 정죄했지만, 그의 가르침은 사라지기는커녕 고트족과 반달족 같은 게르만 부족들 사이에서 오히려 퍼져 나갔다. 수백 년이 지난 후에도 서유럽 상당 지역에서 아리우스주의는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었다. 이 긴 전투의 한복판에서 교부들은 매주일 삼위일체를 고백하는 예전(禮典) 요소들을 만들어 넣기 시작했다. 찬가, 응답송, 서문(Preface)이 그것이다. 대 그레고리우스의 성사집(Sacramentarium Gregorianum)에 삼위일체 서문과 기도문이 등장하는 것은 이 맥락에서다(Gregory the Great, *Liber Sacramentorum*, PL LXXVIII, 116-17).
여기서 요크의 알쿠인이라는 인물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8세기 후반 카롤링거 르네상스의 설계자이자 샤를마뉴 궁정의 지적 참모였던 알쿠인은 풀다 수도원의 수사들을 위해 봉헌미사(votive Mass) 모음집을 편찬하면서 삼위일체를 위한 봉헌미사를 만들었다. 이 미사는 월요일에 삼위일체, 화요일에 천사, 금요일에 십자가를 묵상하는 식으로 요일별 경건의 체계를 세우는 데 쓰였다. 알쿠인의 삼위일체 봉헌미사는 빠르게 확산되어 오순절 직후 주일에 이 미사를 드리는 관행이 북유럽 교회들 사이에서 자리를 잡게 된다. 10세기경에는 리에주의 주교 스테파누스(재임 903-920)가 삼위일체를 위한 독자적인 성무일도를 작성했고, 어떤 교회는 성령강림절 다음 주일에, 또 어떤 교회는 대림절 직전 마지막 주일에 이 예배를 드렸다.
그런데 정작 로마는 이 흐름에 찬물을 끼얹었다. 1061년에서 1073년까지 교황좌에 앉았던 알렉산데르 2세는 삼위일체 축일 제정 청원을 거절하면서 이렇게 답했다. 로마 교회는 이미 매일 「영광송」(Gloria Patri)을 통해 삼위일체를 공경하고 있으므로 별도의 축일이 필요하지 않다고 말이다. 이 거절에는 나름의 논리가 있었다. 삼위일체는 하루만 기념할 수 있는 주제가 아니라 모든 예배의 바탕이 되는 진리라는 것이다. 논리적으로는 옳았다. 그러나 이 논리는 교회 현장의 목소리를 과소평가한 것이었다. 북유럽의 신자들은 아리우스주의라는 오래된 적에 맞서 삼위일체를 "소리 내어" 고백하는 날을 원했고, 로마의 우아한 거절은 그 갈증을 해소하지 못했다.
토마스 베켓의 서품과 캔터베리의 선택
전환점은 뜻밖의 인물에게서 왔다. 1162년 6월 2일, 토마스 베켓은 캔터베리에서 사제 서품을 받았다. 바로 그 다음 날인 6월 3일, 성령강림절 후 첫 주일에 윈체스터의 주교 블루아의 헨리에 의해 캔터베리 대주교로 축성되었다(John Morris, *The Life and Martyrdom of St. Thomas Becket*, 1859). 헨리 2세의 충실한 대법관이었던 베켓은 대주교가 되는 순간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 사치를 버리고 고행복을 입었으며, 왕의 교회 장악 시도에 정면으로 맞섰다. 그의 첫 행보 가운데 하나가 바로 자신이 축성된 그 주일을 삼위일체 축일로 선포한 것이었다.
이 결정에는 단순한 개인적 기념 이상의 의미가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세속 군주의 뜻에 따라 대주교가 된 사람이, 자기 축성일을 "하나님이 누구인가"를 선포하는 날로 지정한 것이다. 이것은 자신의 충성이 더 이상 왕에게 있지 않음을 알리는 신학적 성명서가 아니었을까. 베켓은 8년 뒤 헨리 2세의 기사들에 의해 캔터베리 대성당에서 살해당했고, 순교자로 시성되었다. 그의 순교는 캔터베리에 부여된 삼위일체 축일의 권위를 비극적으로 강화했다. 영국 교회에서 이 축일의 인기가 유독 높았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아비뇽의 교황, 정통성의 증명
캔터베리에서 시작된 관행은 서유럽 전역으로 퍼졌지만, 로마 교회가 이를 보편 축일로 받아들이기까지는 170년이 더 걸렸다. 결국 이 축일을 전 교회에 공포한 것은 1334년 교황 요한 22세였다. 그런데 이 교황의 처지가 대단히 흥미롭다. 요한 22세는 로마가 아니라 아비뇽에 거주하던 교황이었다. 로마에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루트비히 4세가 세운 대립교황 니콜라우스 5세가 버티고 있었다. 추기경들 상당수가 그를 폐위시키길 원했다. 더 심각한 것은, 이 교황이 "성인들은 최후 심판 때까지 하나님의 직접적 현존(직관, visio beatifica)을 누리지 못한다"는 연속 설교를 했다가 신학적 논란에 휩싸여 있었다는 사실이다.
고립된 교황이 자신의 정통성을 증명해야 할 절박한 필요가 있었다. 삼위일체 축일의 보편적 제정은 그 정치적 맥락 안에서 읽어야 한다. 이미 북유럽 교회가 오랫동안 지켜온 관행에 교황의 인장을 찍어줌으로써, 요한 22세는 자기가 교회 전통의 정당한 수호자임을 선언할 수 있었다. 프란체스코회의 존 페컴(캔터베리 대주교, 1292년 사망)이 작성한 삼위일체 성무일도가 이 축일의 공식 예식서로 채택되었고, 성령강림절 직후 첫 주일이 축일 날짜로 확정되었다(Francis Mershman, "Trinity Sunday," in: The Catholic Encyclopedia, Vol. 15, 1913, 58.)
아타나시우스 신경, 일 년에 단 한 번의 고백
삼위일체주일에는 고유한 전례 요소가 하나 더 붙어 있다. 아타나시우스 신경, 라틴어 제목으로는 *Quicumque vult*(구원받고자 하는 자는 누구든지)라 불리는 이 신조는, 44개의 운율적 구절로 이루어진 삼위일체와 그리스도론의 압축판이다. 아타나시우스의 이름이 붙었지만 실제 저자는 아타나시우스가 아니다. 5세기 말에서 6세기 초 갈리아(오늘날의 남프랑스) 지역에서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아를의 카이사리우스의 설교에 인용되었고 아우구스티누스의 삼위일체론(De Trinitate, 415년)의 용어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J. N. D. Kelly, *The Athanasian Creed*, London, 1964).
중세 서방교회에서 이 신경은 주일 아침기도(Prime)에서 정기적으로 낭독되었다. 1662년 영국 공도문(Book of Common Prayer)에서는 한 해에 19번이나 낭독하도록 규정되어 있었을 정도다. 그러나 19세기에 이르러 신경 안의 정죄 조항들, 특히 "이 신앙을 온전히 지키지 않는 자는 영원히 멸망하리라"는 구절이 "지나치게 가혹하다"는 논란에 휩싸이면서 빈도가 급격히 줄었다. 로마 가톨릭에서는 1960년 개혁으로 이 신경의 전례적 사용이 일 년에 딱 한 번, 삼위일체주일에만 남게 되었고,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로는 사실상 사라졌다. 루터교에서는 주요 교회 축일뿐 아니라 삼위일체주일에 반드시 이 신경을 고백하는 전통이 살아 있다.
이것은 단순한 전례사의 한 페이지가 아니다. 삼위일체에 관한 가장 정밀한 고백문이 일 년에 단 하루만 들리게 되었다는 사실은, 교회가 교리를 어디에 놓고 있는지를 드러낸다.
삼위일체 이후인가, 성령강림 이후인가
삼위일체주일이 교회력에 남긴 가장 미묘하면서도 결정적인 흔적은 그 이후의 주일들을 어떻게 부르느냐에 있다. 성공회와 전통 루터교는 이 기간의 주일을 '삼위일체 후 제○주일(Sundays after Trinity)'이라 부른다. 반면 개혁 전 로마 가톨릭은 '성령강림 후 제○주일(Sundays after Pentecost)'이라 불렀고, 1969년 전례력 개혁 이후에는 '연중시기(Ordinary Time)'라는 새 이름을 도입했다. 같은 기간에 세 가지 이름이 공존하는 셈이다.
이것은 명칭의 차이를 넘어 신학적 강조점의 차이를 드러낸다. '성령강림 후'라고 부르면, 이 시기는 성령이 임한 사건의 여파 속에서 살아가는 시간이 된다. 교회의 사명과 선교, 성령의 역동적 역사가 전면에 선다. '삼위일체 후'라고 부르면, 이 시기는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에 대한 고백을 기반 삼아 성화의 여정을 걷는 시간이 된다. 하나님이 누구인가에 대한 확인 위에 그리스도인의 일상이 놓이는 것이다. 어느 쪽이 옳다고 단정할 문제는 아니다. 다만 여기서 분명한 것은, 어떤 이름을 선택하느냐가 교회가 한 해의 후반부를 어떤 렌즈로 살아가느냐를 결정한다는 사실이다.
20세기 후반 전례 쇄신 운동이 일어났을 때, 루터교와 성공회 일부에서도 로마 가톨릭의 영향을 받아 '성령강림 후'라는 명칭을 채택하기 시작했다. 미주리 시노드 루터교회(LCMS)가 1982년 예배서 *Lutheran Worship*을 도입하면서 이 변화에 합류했지만, 동시에 전통적인 1년 주기 성서정과와 '삼위일체 후' 명칭도 유지했다. 그래서 오늘날 LCMS 안에서도 어떤 교회는 '삼위일체 후 제15주일'을, 다른 교회는 '성령강림 후 제16주일'을 지키는 흥미로운 공존이 벌어진다.
교리를 축하한다는 것의 의미
삼위일체주일은 설교자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주일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무리도 아니다. 삼위일체를 설명하려다 이단에 빠진 비유의 역사가 화려하기 때문이다. 물, 얼음, 수증기 비유는 양태론이고, 세 잎 클로버 비유는 삼신론의 함정에 가깝다. 그래서 아타나시우스 신경은 설명하는 대신 경계선을 긋는 전략을 택했다. "위격을 혼동하지 않으며, 본질을 나누지 않는다(neque confundentes personas neque substantiam separantes)."
이 전략에 중요한 통찰이 숨어 있다. 삼위일체는 이해의 대상이기 이전에 경배의 대상이라는 것이다. 삼위일체주일이 교리의 날이라고 해서 강단이 조직신학 강의실이 되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교부들이 삼위일체 교리를 정립한 것은 학문적 호기심 때문이 아니라, 예배의 대상이 누구인지를 분명히 하기 위해서였다. 아리우스에 맞서 니케아가 "성부와 동일 본질(homoousios)"이라는 한 단어를 쟁취한 것은, 신학 용어의 승리가 아니라 예배의 승리였다. 우리가 무릎 꿇는 대상이 피조물인가 창조주인가를 가르는 한 단어. 삼위일체주일은 그 한 단어를 매년 기억하라는 교회력의 요청이다.
교회력은 이야기의 달력이다. 베들레헴의 구유에서 시작하여 골고다의 십자가를 지나고, 빈 무덤을 거쳐 오순절의 불길에 이르는 서사. 그 서사가 끝난 자리에 삼위일체주일이 서 있다. 모든 이야기가 다 펼쳐진 뒤, 교회는 한 발 물러서서 묻는다. 이 모든 이야기의 주인공은 도대체 누구인가. 성부가 성자를 보내시고, 성자가 성령을 보내시고, 성령이 교회를 세우신 그 전체 드라마를 관통하는 한 분의 하나님. 삼위일체주일은 그 물음 앞에 교회를 세워두는 날이다.
그러니까 이 축일은 사건이 '없어서' 교리를 기념하는 것이 아니다. 모든 사건이 가리키는 궁극적 실재를 기념하는 것이다. 그래서 삼위일체주일은 교회력에서 가장 늦게 태어났지만, 어쩌면 가장 깊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글. 최주훈 목사 (중앙루터교회)
#교회력과절기 #삼위일체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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