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마트폰의 알람은 아침 6시에 맞추어져 있다. 그러나 특별한 경우를 빼고는 알람이 울리기 전에 나는 일어나 침대에서 아내 곁을 살짝 빠져나온다. 아침을 준비하기 위해서다. 세수하고 나면 먼저 날달걀 두 개를 삶는다. 물이 끓으면 꺼서 6분 그냥 둔다. 그 시각이 반숙에 꼭 맞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달걀을 꺼내서 찬물에 넣어둔 뒤 당근과 브로콜리 적당량을 먹기 좋게 잘라 물에 넣고 소금 간을 한 다음 물이 끓으면 바로 꺼낸다. 우리는 이가 안 좋아 당근은 먹기 좋게 브로콜리와 함께 끓인 것이다. 주식으로 나는 모싯잎 송편을, 아내는 시리얼을 두유와 함께 먹는다. 반숙된 달걀은 까서 반으로 잘라 각각 접시에 놓는다.
양념도 없이 매우 맛없이 만든 생경한 먹거리지만 이것이 내가 준비한 아침 식사다. 6시 40분쯤 되면 아내가 일어나도록 아침 뉴스를 하는 TV 볼륨을 크게 높인다. 그럼 아내는 식사하러 늦어도 7시까지는 거실로 나온다. 내가 이렇게 주부 노릇을 시작한 것은 한 2년쯤 되어 간다. 아내는 3년 전 1월 넓적다리뼈 골절로 병원에 입원했다. 재활병실을 거쳐 2개월 넘어 입원했었는데 퇴원 후 그해 9월 마을 장터에 나가 쇼핑을 하다가 다시 넘어져 이번에는 반대편 넓적다리뼈가 골절되었다. 그때는 어깨뼈도 상처를 입어 다시 병원 신세를 지게 되었다. 그런데 퇴원 후도 보행이 시원찮아 뼈 사진을 찍어봤는데 두 번째 수술한 뼈가 잘 붙지 않아(의학 용어로 non union) 다음 해 6월 분당 서울대 병원에서 재수술하게 되었다. 그 뒤로 아내는 다시 넘어질까 조심스러워 결코 밖에 혼자 나가려 하지 않게 되었다.
교회는 아파트에서 승강기로 내려가 지하 입구에서 차를 타고 교회 지하 입구에 내리면 다시 승강기로 3층으로 올라가 예배를 드리고 집으로 온다. 그 사이도 혼자 걸으면 넘어질 것 같아 늘 내 손을 잡고 다녔다. 그래서 우리는 교회에서 잉꼬부부로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지금은 코로나 사태로 그나마 교회도 나가지 않고 집에서 온라인으로 예배를 드리니 더욱 외출하지 않게 된다. 오랫동안 집에만 있고 운동량이 부족하니 자연 다리에도 힘이 없고 팔에도 근육이 줄기 시작했다. 지금은 오래 서 있을 수가 없고 문밖출입은 더욱 불가능하다. 나는 음식이 까다롭지 않고 무엇이나 잘 먹지만 아내는 맛에 예민하다. 아내는 하나님이 주신 뛰어난 미각 즉, 절대 미각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나는 요리를 기권한 상태다. 지금은 간단한 가지나 도라지나물은 아내가 만들어준다. 그러면서 자기도 요즘은 맛이 없다고 한다. 매일 끼니가 되면 주부가 걱정하는 것은 점심엔, 저녁엔 무엇을 먹을까 하는 것인데 우리도 마찬가지다. 다음 끼니를 준비할 때가 되면 우리는 서로 얼굴을 쳐다본다. 답은 서로 노아이디어(no idea)다. 결국, TV 홈쇼핑으로 사다 냉동고에 넣어놓은 것을 꺼내 먹는 수밖에 없다. 가끔 그래도 딴 것이 먹고 싶으면 나더러 얼갈이나 시래기를 사다 달라고 한다. 어떨 때 고기가 먹고 싶으면 구워 먹자고 한우 채끝이나 안심을 그리고 장조림을 만들고 싶으면 홍두깨살을 사 오라고 한다. 내가 마트에 가서 무엇이 얼갈이인지 몰라 두리번거리다가 젊은 주부에게 물어보면 그녀도 몰라 쩔쩔맬 때도 있다.
아파트에 살면 이웃에 누가 사는지 알지 못할 때가 많다. 그러나 나는 비교적 아파트에 사는 주부들을 많이 알고 있는 편이다. 쓰레기를 분류해서 늘 버리러 나가는데 그때마다 주부들이 안 체한다. 혹 애들을 데리고 외출하는 주부는 “5층 할아버지야, 인사해.”라고 가르친다. 애들은 깍듯이 배꼽 인사를 한다. 물론 나갈 때는 어른에게 양보하는 일은 없지만.
처음 내가 가사 일을 시작할 때는 짜증을 낸 일도 많았다. 꼭 내가 컴퓨터의 자판을 두들기다 말고 나와 밥을 해야 하며, 틈을 타 빨래하고, 청소하고, 쓰레기 분리수거까지 해야 하느냐고 투덜거린다. 그럼 아내는 자기는 60년 이상 그렇게 살았다고 늘 하는 말을 되풀이한다.
지금은 익숙해져서 이렇게 사는 것이 편하고 행복하다. 아내가 쓰러져서 뇌진탕이라도 생겼더라면 나 홀로 쓸쓸하게 밥해 먹고 있어야 할 터인 옆에 상대해 주는 아내가 있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가를 생각하기 때문이다. 내 친구도 아내를 여러 해 동안 돌보고 살았는데 아내가 세상을 떠나고 나니 외출했다가 집에 돌아오는 것이 두렵다고 말했던 생각을 한다. 외출했다 돌아와 아무도 없는 집에 불을 켜고 들어설 때가 가장 가슴 아팠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나더러 이제는 아내가 떠났으니 대전으로 날 찾아오겠다고 했는데 내가 미국 자녀들을 찾아보고 3개월 만에 왔더니 그는 그사이를 참지 못하고 사망해버렸다. 혼자 사는 것이 너무 힘들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내가 건강하게 옆에 있어 준 것만 해도 큰 행복이다. “성 평등이다. 고통을 분담하자.”라고 여성이 자기주장을 하고 맞서면 남성은 귀엽게 생각하고 도와주면 어떨까? 그런다고 오랜 전통인 가부장제가 무너진다고 호들갑까지 떨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창조질서가 무엇인가? 하나님은 대자연을 혼돈(chaos) 속에서 질서(cosmos)를 찾아 창조하셨다. 그리고 마지막에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그러나 남녀를 다르게 창조하시고 보기에 아름답다고 말씀하셨다. 남녀는 각각 다른 모습으로 서로 돕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살게 창조하신 것이다. 그러니 “이것은 남자가 할 일, 저것은 여자가 할 일”이라고 인간 중심으로 선을 그으며 자기주장을 하고 살 이유가 없다. 인간 중심의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름답게 살면 그것이 에덴의 삶이 아닐까? 서로 행복하면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이고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맞게 사는 일일 것이다.
가끔 인터넷으로 주문한 떡갈비로 점심 준비를 다 하고 식탁에 밥상을 차린 뒤 아내를 쳐다보면 아내는 아직도 연속방송에 열중해서 돌아보지도 않을 때가 있다. 그럼 나는 아내를 부른다.
“여보, 식사 준비가 다 됐어. 점심 먹어야지.”
그럼, 아내는 일어나 화장실에 간다. TV 드라마를 보느라 오래 참고 앉아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 나는 한마디 한다.
“아이 속상해.”
그러면서 후닥닥 놀란다. 이것은 사내가 아니라 여자가 쓰는 말투기 때문이다. 나는 여성 호르몬도 복용하지 않았는데 어느새 여자가 된 남자가 되었을까 하고 스스로 생각한다. 또 그러면 어쩌랴 서로 행복하면 그만이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