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2년 12월 27일 화요일 성 요한 사도 복음사가 축일
제1독서 : 1요한 1,1-4
복 음 : 요한 20,2-8
주간 첫날, 마리아 막달레나는
2 시몬 베드로와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였다.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3 베드로와 다른 제자는 밖으로 나와 무덤으로 갔다.
4 두 사람이 함께 달렸는데,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빨리 달려 무덤에 먼저 다다랐다.
5 그는 몸을 굽혀 아마포가 놓여 있는 것을 보기는 하였지만,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았다.
6 시몬 베드로가 뒤따라와서 무덤으로 들어가 아마포가 놓여 있는 것을 보았다.
7 예수님의 얼굴을 쌌던 수건은 아마포와 함께 놓여 있지 않고, 따로 한곳에 개켜져 있었다.
8 그제야 무덤에 먼저 다다른 다른 제자도 들어갔다. 그리고 보고 믿었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나의 자유를 가로막는 감옥에서 탈출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감옥 간수를 매수해서 탈옥한다.
2) 가장 실력 좋은 변호사를 선임해서 감옥에서 벗어난다.
3) 다른 수감자들과 친해져서 탈옥을 함께 계획하고 실행한다.
아마 대부분 두 번째를 선택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법대로 해야 한다’라고 말하면서 말이지요. 그런데 누군가가 이렇게 말합니다.
“먼저 감옥에 갇혀 있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실제의 감옥만을 생각할 수 있지만, 자기의 자유를 가로막는
감옥에 갇혀 있게 만드는 것이 참으로 많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하느님과 함께하지 못하도록 나를 가둬놓고 있습니다. 돈, 명예, 욕심, 죄….
이런 것에 자유롭지 않으면서도 갇혀 있다고 생각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 감옥에서 탈출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갇혀 있는 감옥, 나를 자유롭게 하지 못하는 감옥이
무엇인지 먼저 알아보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매일 ‘돈’만을 외치고 생각하고 있다면 ‘돈’의 감옥에 갇혀 있는 것입니다.
매번 ‘명품’만을 생각하고 있다면 ‘명품’ 감옥에 갇혀 있는 것입니다.
누군가에 대한 ‘미움’이 가득하다면 ‘미움’ 감옥에 갇혀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도 세상의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에서 우리가 자유롭게 탈출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야 하느님 나라만을 바라보며, 그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성 요한 사도 복음사가 축일을 지냅니다.
예수님으로부터 가장 사랑을 많이 받은 제자라고 알려진 요한 사도는
오로지 주님 안에만 있으려고 노력하셨습니다.
늘 예수님 곁에 있었고, 십자가 죽음의 순간에서도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으며,
예수님 부활 소식을 듣고 제일 먼저 무덤 앞으로 뛰어갔던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보면, 무덤 안에 먼저 들어가는 것을
베드로에게 양보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랑받는 제자이니 무덤에 먼저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또 먼저 무덤에 도착했으니 그 무덤 안으로 먼저 들어가도 상관없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께서 교회의 반석으로 삼은 베드로를 존중합니다.
세상의 기준에서 벗어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오로지 주님의 뜻 안에서만 머물려는 것입니다.
우리도 사도 요한처럼 세상의 틀이 아닌, 오로지 주님과 함께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요한 사도가 선포하신 ‘영원한 생명’(1요한 1,2 참조)의 주인공이 될 수 있습니다.
“보고 믿었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우리는 성탄 8부 안에서 요한 사도의 축일을 맞았습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가장 사랑했고 또한 가장 사랑받았던 제자였습니다.
최후의 만찬 때 그리스도의 가슴에 머리를 기대어 식사를 하였고,
골고타 언덕까지 예수님을 따라 올라가 십자가 아래에 있었고,
마리아를 어머니로 모시고 그분의 아들이 된 제자였습니다.
또한 구약성경의 ‘새로운 벤야민’을 반영하기도 합니다.
곧 야곱의 열두 아들 가운데 벤야민은 주님의 “사랑은 받는 이”(신명 33,12)였듯이,
열두 제자 가운데 요한도 예수님께서 “사랑하는 제자”(요한 13,23;19,26;21,7;21,20)라 칭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요한은 베드로보다 빨리 무덤이 도착하였지만, 먼저 들어가지는 않았습니다.
물론 베드로보다 더 젊은 요한이 더 빨리 도착할 수도 있었겠지만,
이는 동시에 ‘더 많이 사랑하는 이가 더 먼저 도착한다.’는 상징이기도 합니다.
또 ‘더 많이 사랑하는 이가 더 깊이 깨닫는다.’는 것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무덤 안으로 들어가 보기만 하지만,
요한은 들어가 “보고 믿었다.”(요한 20,8)라고 표현되고 있습니다.
사실 ‘빈 무덤’과 ‘구유’는 예수님께서 몸을 눕혔던 같은 한 자리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시작’과 ‘마침’, 곧 오실 때와 가실 때에 머무른 땅의 자리입니다.
그분은 ‘구유’로 우리의 출생을 성화시키시고, ‘빈 무덤’으로 우리의 죽음을 성화시키셨습니다.
그래서 요한 크리소스토무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분의 탄생이 당신 어머니의 동정성이라는 봉인을 뜯지 않으셨듯이,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실 때도 무덤의 봉인을 부서뜨리지 않으셨습니다.”
마치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무덤을 막은 돌을 통과해서 지나가신 것과 같습니다.
마태오복음에 따르면, 주간 첫날 아침 여인들이 무덤에 갔을 때,
예수님의 무덤은 봉인된 상태였습니다. 그 때문에
“주님의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오더니 ...
돌을 옆으로 굴리고서는”(마태 28,2)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또한 아기의 몸을 감싸고 있던 ‘포대기’가 구세주 탄생의 표시가 되듯이,
예수님의 시신을 감싸고 있던 ‘아마포 수의’와 머리를 쌌던 ‘수건’은 부활의 표시가 됩니다.
그렇습니다.
‘아마포’는 놓여 있었고, ‘수건’은 잘 개켜져 있었습니다.
이 두 개의 수동태는 하느님의 개입을 가리킵니다.
또한 이렇게 잘 단정된 ‘수의’와 ‘수건’은
제자들이 밤중에 시체를 훔쳐갔다고 말한 경비병들의 거짓 증언에 대한 반대 물증이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구세주의 ‘강생의 표시’와 ‘부활의 표시’를 동시에 봅니다.
이제 우리도 베드로와 요한처럼, ‘무덤’으로 ‘들어가서’ 보아야 할 일입니다.
또한 주님이 계신 ‘마구간’으로 ‘들어가서’ 보아야 할 일입니다.
자세를 낮추어 더러운 곳으로, 낮은 곳으로, 내려가 ‘들어가’야 합니다.
무덤의 돌문을 열 듯 우리 마음의 빗장을 열고서,
울고 있고 지친 이들이 있는 곳, 춥고 배고픈 이들이 있는 곳,
‘세상 속의 마구간’과 자신의 ‘마음속 마구간’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요한 사도의 축일을 기념하면서,
생명을 가져다준 ‘구유’의 아기 예수님과 ‘빈 무덤’의 부활하신 예수님을 동시에 만납니다.
이토록 우리는 더없는 사랑으로 우리 안에서 생명이 되신 분을 기립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빨리 달려 무덤에 먼저 다다랐다."(요한 20,4)
주님!
베드로와 요한이 무덤으로 달려가듯,
목동들이 구유로 달려가듯,
고귀한 경쟁에서 질세라 빨리 달리게 하소서!
무덤을 들여다보지만 말고, 안으로 들어가게 하소서!
그리하여, 비어져 나오게 하소서.
비어진 눈으로 보게 하시고, 본 바를 믿게 하소서.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다른 신부님들의 강론을 듣거나, 읽을 때가 있습니다.
같은 복음 말씀인데 저와는 다른 관점에서 해석하고, 설명하는 것을 봅니다.
어떤 신부님은 문학적인 접근을 하기도 하고,
어떤 신부님은 철학적인 접근을 하기도 하고,
어떤 신부님은 동양의 고전을 접목해서 접근하기도 합니다.
‘자캐오 통장’을 만들었다는 신부님의 강론도 제게는 깊은 울림이 있었습니다.
신부님은 피정이나 특강 때 받은 강사료는 따로 모았다고 합니다.
축일에 받은 축하금도 따로 모았다고 합니다.
그 통장의 이름은 ‘자캐오 통장’으로 정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통장에 있는 ‘돈’은 어려운 이웃을 위해서 사용했다고 합니다.
때로 자캐오 통장을 개인적인 용도에 사용하고 싶은 유혹도 있었지만
아직은 어려운 이웃을 위해서 사용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자신이 한 강론을 자신의 삶을 통해서 실천하고 있으니
신부님의 강론은 살아있고, 힘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라는 시가 있습니다.
하나의 강론을 쓰기 위해서 묵상하고, 기도하는 사제들에게
하느님의 자비가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사제들 강론의 원천은 ‘복음’입니다.
교회는 우리에게 4개의 복음서를 전하고 있습니다.
‘마르코, 마태오, 루카, 요한’ 복음입니다.
마르코, 마태오, 루카의 복음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전하는 데 있어서, 예수님의 표징을 전하는 데 있어서,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전하는 데 있어서 비슷한 면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3개의 복음을 ‘공관복음’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공관복음에도 약간의 차이가 있는데 그것은 예수님의 ‘탄생’입니다.
마르코 복음은 아예 예수님의 탄생을 언급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공생활만 전하고 있습니다.
마르코의 공동체에는 예수님의 탄생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마태오 복음은 예수님의 족보를 언급합니다.
예수님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합니다.
유대인들에게 아브라함은 ‘신앙의 조상’이었습니다.
마태오의 공동체는 예수님께서 아브라함의 후손임을 강조하였습니다.
루카 복음은 예수님의 족보를 이야기하면서 아담의 자손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아담은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전합니다.
루카의 공동체는 예수님께서 이제 아브라함을 넘어서
모든 인간의 원형인 아담의 후손이며, 곧 하느님의 아들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성 요한 사도 복음사가’의 축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공관복음과는 다른 차원의 관점에서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공관복음이 사실과 현장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면
요한복음은 표징과 의미를 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탄생’도 새로운 관점에서 전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유명한 ‘로고스찬가’입니다.
알에서 깨어난 애벌레는 땅을 기어 다니는 것이 숙명입니다.
그러나 애벌레가 죽은 것처럼 보이는
‘고치’의 과정을 거치면 하얀 날개가 날린 나비가 됩니다.
이제 나비는 더 이상 땅 위를 기어 다닐 필요가 없습니다.
나비는 새로운 차원의 삶을 살게 됩니다.
요한복음의 로고스찬가를 읽으면
하늘을 힘차게 날아오르는 독수리의 웅장한 모습을 느낄 수 있습니다.
“한 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
그분께서는 한 처음에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고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 아버지의 외아드님으로서 지니신 영광을 보았다.”
오늘 성 요한 사도 복음사가의 축일을 지내면서
요한복음의 세계로 잠시 들어가면 어떨까요?
저는 요한복음 13장을 묵상하면서 하루를 시작하겠습니다.
주님의 애제자
-사랑의 사도, 성 요한-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당신은 드높은곳 오르시어서, 하늘의 그신비를 보시었으며
천주의 어린양과 교회의 신비, 크옵신 은혜입어 통찰하셨네."
천상 비밀을 계시 받은 복된 성 요한 사도 복음사가축일,
아침 성무일도 아름다운 찬미가 한 연을 나눕니다.
엊그제 성탄 밤미사 시 성체를 영할 때
177장 “만나를 먹은 이스라엘 백성” 성체 성가를 들으며
제 가장 좋아하는 성가를 확정 지었습니다.
그동안 가끔 들을 때마다, “참 좋다!” 생각했는데 새롭게 각인되었고
어제는 하루 종일 틈틈이 불러 보았습니다.
3절까지 내용도 다 좋습니다만 1절만 다시 소개합니다.
“이스라엘 모든 백성들은 만나를 먹으며,
저 광야의 험난한 길 사십년을 걸어갔네.
약속한 땅이여, 오 아름다운 대지여,
영원히 젖과 꿀이 흐르는 그곳,
이 빵을 먹는 자는 그 복지 얻으리,
아, 영원한 생명의 빵은 내 주의 몸이라.”
올해는 제가 수도원 입회 후 만 40년이 되는 해라 더 각별한 느낌입니다.
얼마나 위로와 평화가 넘치는 멋진 가사에 곡인지요!
말씀이 살이 된 것이 성체요 바로 우리 사람입니다.
우리 하나하나가 주님의 성체를 영하면서 주님의 살아 있는 성체가,
영원한 생명의 참사람임을 확인하는 참 은혜로운 성가입니다.
우리 모두 오늘 축일을 지내는 주님의 애제자 사도 요한이 된 느낌입니다.
오늘은 어제의 첫 순교자 성 스테파노 축일이었고
오늘은 사랑의 사도, 주님의 애제자 요한 축일입니다.
두 성인이 너무나 대조적입니다.
요한이라는 뜻은 ‘주님께서 은혜로우시다’인데
참으로 천수를 누리며 은혜로운 삶을 살았던 요한 사도였습니다.
6년경 베싸이다에서 태어나 에페소에서 100년경 선종하셨다니
무려 90대 중반까지 장수했던 사도였습니다.
12사도 중 유일하게 피를 흘려 순교하지 않은 유일한 사도입니다.
예수님의 각별한 사랑을 받았던 애제자 요한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중요한 순간마다 대동한 베드로, 야고보, 요한이었고, 바로 이 요한입니다.
예수님의 편애를 받으면서도 질투의 대상이 되지 않았음은
그의 주님 사랑이 탁월했음을 제자들도 인정하지 않았겠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사도 요한의 상징은 독수리인데, 그 이유는 다른 복음서는 예수님의 구세 사업만 기술한 반면,
그의 저서 요한복음은 예수님에 관해 하느님의 아들로서의 신성을 주로 기록했기 때문입니다.
사도 요한은 인생 말년, 90대 중반 나이에 너무 노쇠하여
제대로 설교를 할 수 없어 항상 신도들의 부축을 받았다 합니다.
성 예로니모의 증언입니다.
요한은 항상 “자녀들이여, 서로 사랑하십시오.”라는 말을 몇 번이고 한 다음,
“이것은 주님의 명령이고, 이것만 지켜도 족합니다.”라고 말했다 합니다.
그래도 신도들이 같은 설교 내용에 대해 불평하자
“사랑은 그리스도 교회의 기초요, 사랑만 있으면 죄를 범하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합니다.
좌우간 사랑의 사도 요한답습니다.
당시는 물론 지금도 끈질긴 도전이 영지주의입니다.
신종의 영지주의는 여전합니다.
아마도 세상 끝나는 날까지 영지주의도 계속될 것입니다.
영지주의는 영육이원론, 성속이원론의 뿌리 깊은 이단입니다.
물질세계나 인간 몸을 죄악시했습니다.
육신은 감옥이요 무덤으로, 구원은 육신의 무덤에서 감옥에서 탈출이라 생각하여
육신을, 물질세계를 천시했습니다.
바로 이에 대한 결정적 답이 강생의 신비, 육화의 신비, 파스카의 신비입니다.
“정녕 그 말씀이 육신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서 사셨다.”
이 한 말씀이 결정적으로 영지주의 이단을 끝장낸 것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으니 인간의 몸도, 물질세계도 구원받아 거룩해진 것입니다.
영육(靈肉) 이원론을, 성속(聖俗) 이원론을 일거에 해결해 버렸습니다.
어디나 성(聖)과 속(俗)이 하나인 성속일여(聖俗一如),
강생의 신비로 거룩해진 몸이요 세상이 된 것입니다.
이래서 성체성가 177장이 그렇게 고맙고 반갑습니다.
오늘 제1독서 요한 1서 요한 사도의 말씀이 참으로 은혜롭습니다.
이 또한 영지주의에 대한 답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었다는 진리에 대한 애제자다운 요한의 고백입니다.
생략할 것 없이 전부 인용합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은 유령이나 투명 인간이 아니라 참사람이자 참 하느님이셨다는 고백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처음부터 있어 온 것, 우리가 들은 것, 우리 눈으로 본 것, 우리가 살펴본 것,
이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 말하고자 합니다. 우리가 그 생명을 보고 증언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에게 영원한 생명을 선포합니다.
영원한 생명은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을 여러분에게 선포합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감동적으로 와닿는 사도 요한의 증언이자 고백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와 사랑에 참여함으로
아버지 하느님과의 친교, 그분의 첫째 증인들과의 친교,
그리스도인들과의 친교로, 친교의 끈은 연속적으로 이어져
친교 중에 살아감으로 충만한 기쁨을 나누게 됩니다.
친교의 교회를, 친교의 기쁨을, 충만한 기쁨을 선사하는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애제자 요한의 주님 사랑이 유감없이 발휘됩니다.
수제자 베드로보다 빠른 사랑의 발걸음이었지만,
그의 겸손한 사랑은 수제자 베드로 다음에 빈무덤에 입장합니다.
베드로와 달리 애제자 요한은 말끔히 정리된 빈무덤을 일별(一瞥)하는 순간
전광석화(電光石火), 주님 부활을 믿었습니다. 바로 다음 묘사가 이를 입증합니다.
‘예수님의 얼굴을 쌌던 수건은 아마포와 함께 놓여 있지 않고, 따로 한곳에 개켜져 있었다.
그제야 먼저 다다른 다른 제자도 들어갔다. 그리고 보고 믿었다.’
“보고 믿었다”
요한 사도의 믿음의 눈, 사랑의 눈이 바로 빈무덤의 상황을 일별하는 순간
주님 부활을 믿은 것입니다.
여기서 저는 재미있는 주석을 읽었습니다. 모세와 예수님의 비교였습니다.
모세가 하느님을 뵈러 갈 때는 너울을 벗었지만
나와서는 빛나는 얼굴의 광채 때문에 백성들 앞에서는 너울을 썼다 합니다.
바로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심으로
이제 인성의 너울, 얼굴을 쌌던 수건 아마포는 쓸모없게 되어
그대로 신성의 얼굴로 아버지께 돌아가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부활하신 주님의 몸은 그리스도의 몸, 공동체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제 그리스도의 몸인 공동체로 부활하시어
늘 우리와 함께 계시는 임마누엘 하느님이 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공동체 형제들 하나하나의 얼굴이 예수님 얼굴을 반영합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성체성사의 은총이
우리 모두 주님과 함께 영원한 생명을 누리며 살게 하십니다.
그리고 주님 앞에 가는 날,
우리 모두 인성의 너울을 벗어버리고
예수님처럼 신성에 빛나는 얼굴로 하느님 아버지를 뵈올 것입니다.
의인이자 마음 바른 우리를 두고 하는 말씀 같은 화답송 아름다운 시편으로 강론을 마칩니다.
그대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의인에게는 빛이 내리고, 마음 바른 이에게는 기쁨이 쏟아진다.
의인들아, 주님 안에서 기뻐하여라. 거룩하신 그 이름 (시편97,11-12). 아멘.
예수님의 사랑받던 제자
박상대 마르코 신부
예수 성탄 팔일축제의 셋째 날에 교회는 성 요한 사도 복음사가 축일을 지낸다.
사도 요한에 대한 역사적 사실을 통상 그가 스스로 집필하였다고 알려진
요한복음 자체에서보다 공관복음에 더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사도 요한은 우선 갈릴래에 출신의 어부였다.(마르 1,19)
그는 시몬 베드로와 그의 동생인 안드레아와 함께
야고보의 형제요 제베대오의 아들로서 12사도의 명단에 들어있다.(마태 10,2)
복음사가 마르코는 사도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에게
천둥의 아들이라는 뜻으로 ‘보아네르게스’라는 별명을 붙였다.(마르 3,17)
이로써 두 사도는 매우 활동적이고 격한 성품을 가진 인물로 추정되며,
예수의 일행을 거부한 사마리아 사람들을 불살라 버릴 생각도 하였다.(루카 9,54)
요한은 베드로와 야고보와 함께 예수로부터 총애를 받아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모를 체험하기도 했다.(마태 17,1; 마르 9,2; 루카 9,28)
제베데오의 두 아들은 명예욕도 강하여 예수께서 영광의 자리에 앉으실 때,
오른편과 왼편의 자리까지 부탁 하였다.(마르 10,35-40)
이처럼 공관복음서는 사도 요한에 대하여 그의 이름을 擧名하여 상세히 보도하고 있다.
그런데 요한복음서가 사도 요한의 이름을 단 한 번도 거명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반면 사도 마태오는 자기 복음서에 자신의 이름을 3번 기술하고 있으며(마태 9,9.10; 10,3),
사도가 아니었던 루카의 이름은 바울로의 서간에만 3번(골로 4,14; 2디모 4,11; 필레 1,24),
마르코의 이름도 사도행전에 5번, 서간에 4번 등장한다.
사도들을 중심으로 한 초대교회에서도 요한과 야고보는
베드로와 함께 믿음의 기둥처럼 존경받던 사도들이었다.(갈라 2,9)
유독 요한복음만은 ‘요한’을 거명하여 다루고 있지 않다.
그러나 복음서 전체에 사도 요한을 가리키는 부분은 많다.
요한은 딱 한 번 ‘제베대오의 아들들’(21,2-21장은 추가부분 편집)을 언급하고 있으며,
그 밖에 다른 대목에서는 막연히 ‘제자’로 표현되고 있지만
문맥상 사도 요한을 지칭하는 것이 틀림없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오늘 복음에서 보듯이 밑줄을 그은 부분의 ‘제자’는 모두 사도 요한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 외에도 요한복음에서 자신을 암시하는 ‘제자’로 언급된 대목을 정리하여 보자.
“다음날 요한이 자기 제자 두 사람과 함께 다시 그곳에 서 있다가
마침 예수께서 걸어가시는 것을 보고, ‘하느님의 어린양이 저기 가신다.’하고 말하였다.
그 두 제자는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라갔다.”(1,35-37)
“그때 제자 한 사람이 바로 예수 곁에 앉아 있었는데, 그는 예수의 사랑을 받던 제자였다.
그래서 시몬 베드로가 그에게 눈짓을 하며, 누구를 두고 하시는 말씀인지 여쭈어보라고 하였다.
그 제자가 예수께 바싹 다가앉으며, ‘주님, 그게 누구입니까?’하고 묻자
예수께서는 ‘내가 빵을 적셔서 줄 사람이 바로 그 사람이다.’하셨다.”(13,23-26a)
“시몬 베드로와 또 다른 제자 한 사람이 예수를 따라갔다.
그 제자는 대사제와 잘 아는 사이여서 예수를 따라 대사제의 집 안뜰까지 들어갔으나
베드로는 대문 밖에 서 있었다.
대사제를 잘 아는 그 제자는 다시 나와서 하녀에게 말하여 베드로를 데리고 들어갔다.”(18,15-16)
“예수께서는 당신의 어머니와 그 곁에 서 있는 사랑하시는 제자를 보시고,
먼저 어머니에게 ‘어머니,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하시고
그 제자에게는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하고 말씀하셨다.
이때부터 그 제자는 마리아를 자기 집에 모셨다.”(19,26-27)
“베드로가 돌아보았더니, 예수의 사랑을 받던 제자가 뒤따라 오고 있었다.
그 제자는 만찬 때에 예수의 옆자리에 앉아 있다가
‘주님, 주님을 팔아넘길 자가 누구입니까?’하고 묻던 제자였다.
그 제자를 본 베드로가 ‘주님, 저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고 예수께 물었다.”(21,20-21)
“그래서 예수를 믿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그 제자는 죽지 않으리라는 소문이 퍼졌다.”(21,23)
“그 제자는 이 일들을 증언하고 또 글로 기록한 사람이다.”(21,24)
위의 요한복음이 기술하는 대목들을 미루어 볼 때
사도 요한은 예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던 제자(애제자)였고,
공관복음이 거론하는 바로 그 사도 요한과 동일한 인물임이 틀림없다.
뿐만 아니라, 오늘 복음에서 보듯이 사도들 중에서
예수님의 빈무덤을 가장 먼저 목격하고 믿었던 자들이 바로 베드로와 요한이다.
요한이 빈무덤에 먼저 도달하였지만,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베드로를 기다린 것은
초대교회 안에서의 베드로의 首位的 위치를 암시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따라서 초대 교부들이 사도 베드로와 사도 요한을
초대교회의 직무와 열정, 권위와 사랑, 首弟子와 愛弟子, 직무교회와 사랑교회 등으로
각각 표현한 것은 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문제로 남는 부분은 사도 요한이 정말로
요한복음, 요한 서간들, 요한 묵시록의 著者인가 하는 것이다.
오늘날에 이르러 성서학자들은 성서원문비판과 성서주변연구들을 근거로
이들 기록들이 요한의 저작이 아니라는 주장을 펴고 있다.
요한은 늦어도 60년경에 순교하였고, 통상 요한의 작품이라고 인정되었던 이 기록들이
거의 빨라도 90년 이후에 집필되었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요한복음의 놀라운 신학적 내용과
묵시록에 담겨있는 구약성서에 관한 해박한 지식들을
갈릴래아 어부 출신의 요한이 혼자 소화하기에는 너무 벅차다는 것이다.
요한 서간들이 다루고 있는 영지주의적이고 그리스도론적이며,
윤리적이고 종말론적인 이단사상은 역사적으로 볼 때 1세기에 등장한 사조들이라는 것이다.
이런 주장들이 요한 사도의 親著性을 완전히 깨는 것은 아니다.
약간의 異見이 있더라도 다수의 의견을 따르는 것이 美德이라고 여겨진다면,
사도 요한이 그 저자라고 인정할 수도 있다.
아니면 사도 요한의 직접적인 증언을 토대로 요한의 제자들이 집필하여
스승의 이름을 붙였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중요한 사실은 사도 요한이 예수님의 각별한 사랑을 받던 제자로서
다른 누구보다 스승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에 동참함으로써
받았던 사랑만큼 스승을 사랑했고 또 그렇게 추종했다는 것이다.
부활 날 아침 무덤에 간 제자들
조욱현 토마스 신부
오늘은 사도 요한의 축일이다.
본시 전례는 성탄 다음 날을 성 스테파노 축일로 정하였고
그다음 날을 사도 요한의 축일을 지내게 하고 있다.
스테파노 성인은 교회사에서 첫 번 순교자이시다.
교회는 예수님을 처음으로 생명을 바쳐 증거 하신 성인을 먼저 지내게 하고 있다.
그리고 그다음 당신의 일생을 통해 그분이 사랑이심을 증거한 요한 사도를 오늘 기리고 있다.
이것은 우리가 우리의 신앙을 우리의 목숨을 바치면서까지도 증거 해야 하는 것이며,
우리의 삶이 항상 사랑의 삶으로써 증거의 삶이 되어야 함을 말해 주고 있다.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의 부활을 알리는 빈 무덤 이야기가 나온다.
요한은 베드로보다 먼저 달려가 무덤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무덤에 먼저 들어가지 않고 베드로 사도를 기다리고 있다.
여기서 베드로의 으뜸 수위권이 나타난다.
베드로가 먼저 무덤에 들어가고 자신은 그 뒤를 따라 들어가
주님의 부활을 믿은 첫 사람이 된다.
무덤 안에는 수의가 흩어져 있었는데
예수님의 머리를 싸맸던 수건은 한 곳에 잘 개켜져 있었다고 한다.
이 수건은 얼굴에서 치워진 것이다.
지금까지 하느님을 본 사람이 없고,
하느님을 만난 모세의 얼굴도 수건으로 가려야 했다.
얼굴이 너무나 빛나서 바로 볼 수가 없었다.
그러기에 하느님의 얼굴은 인간으로서 관상할 수가 없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을 봄으로써
우리는 하느님의 영광을 볼 수 있으므로 더는 수건이 필요 없게 되었다.
요한은 실제로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고 복음에서 말하고 있다.
이제 그분은 우리에게 그분의 영광을 사랑을 증언하고 있다.
예수님과 나누었던 친교는 제자들만 누리는 특권은 아니었다.
요한은 이 친교를 전 교회 공동체가 나누기를 바라고 있다.
우리는 신앙인으로 그분과 진정한 친교 안에 살고 있는가?
또 나의 형제자매들과 진정한 사랑의 관계를 맺고 살아가고 있는가?
그렇게 산다면 이것은 우리의 특권이 아니라,
우리가 누리는 이 특권을 다른 사람들도 누리게 하여야 한다.
이 특권은 끝까지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
이 특권을 계속 누리기 위해서는 우리가 매 순간 사랑의 삶을 살기 위해
나를 주님 앞에 낮출 수 있는 삶, 사랑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하느님의 사랑을 살고 실천하면서
우리는 주님께서 당신을 낮추셔서 사람이 되신 그분을 닮을 수 있다.
우리도 성탄을 지내면서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 태어나는 신비를 체험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삶 속에서 그분과 나누고 있는 친교의 기쁨이 나의 것으로만이 아니라,
다른 모든 이에게 전할 수 있는 사랑의 증거자가 되어야 한다.
이것이 오늘 사도 요한의 축일을 지내는 의미이다.
주님께 모든 것을 의지하며 우리의 삶을 이어 나갈 수 있어야겠다.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제자
반영억 라파엘 신부
사랑하는 사람을 가슴에 품고 있다는 것은 행복입니다.
또한,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면 그 사랑을 표현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감추려 해도 어디선가 그 속내를 드러내게 됩니다.
물론 없는 사랑을 있는 척해도, 오래가지 못합니다.
주간 첫날, 마리아 막달레나는 시몬 베드로와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다른 제자에게 달려갔습니다.
주님의 빈 무덤을 확인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하고 말하였습니다.
그 말을 들은 베드로와 제자는 무덤을 향해 함께 달렸습니다.
듣자마자, 그것도 달려갔다는 것이 그들의 마음을 드러내 줍니다.
스승을 사랑하는 마음이 거기 있습니다. 역시 주님은 그런 그들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아닌 다른 제자가 먼저 무덤에 다다랐습니다.
젊어서이든 주님을 더 사랑해서 빨리 달렸든, 이유는 모르겠으나 먼저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무덤을 들여다볼 뿐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베드로가 들어가서 본 후에야 들어가서 보고 믿었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던 제자는 주님을 배반했던 베드로이지만,
그를 받아들이고 베드로를 여전히 으뜸 제자로 인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죄를 지었지만, 여전히 그는 주님의 제자이고,
죄를 범했지만, 그는 여전히 제자들의 맏형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던 제자는 그것을 알기에 그에게 자리를 내어준 것입니다.
그 모습이 바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보여준 모습입니다.
그는 주님을 사랑하기에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압니다.
그는 주님께서 자기를 사랑해 주신 것(요한13,23; 19,26; 20,2; 21,7.20)처럼 베드로를 사랑했습니다.
우리의 삶은 어떠합니까?
상대방의 어떤 과거를 알게 되면 그것이 우리를 끌고 다닙니다.
그래서 그는 낙인이 찍히고 미래가 없는 것처럼 취급합니다. 그러나
“과거 없는 성인 없고 미래 없는 죄인은 없습니다.”
“우리는 있는 그대로 사랑해야 합니다.
나는 넘어지지 않았는데 저 사람은 왜 넘어졌을까?”
판단하고 단죄하지 말고 “자비와 연민의 눈길”로 봐야 합니다.
“의인은 자신의 판단과 판결을 미안해합니다.
의로운 판결은 편견이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받는 만큼, 주님을 사랑하는 만큼 우리의 마음도 커졌으면 좋겠습니다.
‘기쁨을 나누면 배가되고 슬픔을 나누면 반이 된다’는 옛말이
‘기쁨을 나누면 시기, 질투가 되고 슬픔을 나누면 약점이 된다’고 바뀌었다 하니 안타까운 일입니다.
모든 것을 품을 수 있는 마음!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