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안전한 지옥행 길 (설교문 요약)
#사소함과의타협
사탄은 결코 뿔 달린 괴물의 모습으로 찾아와 우리에게 단번에 파멸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는 가장 신사적이고 합리적인 ‘중재자’의 가면을 쓰고 찾아옵니다. 세련된 타협을 제안하며 영혼을 서서히 마취시키는 것, 이것이 사탄의 가장 깊은 본질입니다.
C.S.루이스의 통찰을 통해 사탄의 목소리를 들어보겠습니다.
"이런 건 죄다 사소한 죄가 아니냐고 말하고 싶겠지. 다른 젊은 유혹자들처럼 깜짝 놀랄 만한 죄악을 보고하고 싶어 안달난 꼴이 보이는구나. 하지만 명심하거라. 중요한 것은 네가 환자를 원수에게서 얼마나 멀리 떼어놓느냐 하는 것 한 가지 뿐이다. 아무리 사소한 죄라도 그것이 쌓여 인간을 '빛' 으로부터 '아무 것도 아닌 것' 으로 조금씩 조금씩 끌어올 수 있으면 그만이야. 만약 도박으로 그런 효과만 낼 수 있다면 살인을 유도하는 것보다 못할 게 없다. 사실 가장 안전한 지옥행 길은 한걸음 한걸음 가게 되어 있단다." (스크루테이프의 편지, 제 12편지 중)
단번에 낭떠러지로 밀어뜨리는 것이 아니라, 소리 없는 에스컬레이터에 태워 아주 천천히 지옥으로 내려가게 하겠다는 조롱입니다.
이 '한걸음 한걸음'의 영적 마취술은 수천 년 전, 이스라엘 백성을 세상의 노예로 붙잡아두려 했던 애굽의 바로 왕에게서 가장 완벽한 형태의 프로토타입(Prototype)으로 나타납니다. 출애굽이라는 거대한 영적 해방의 문턱에서 바로가 모세에게 던진 네 가지 협상 카드는 오늘날 현대 그리스도인의 영혼을 야금야금 갉아먹는 사단의 사소한 타협안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맞닿아 있습니다.
1. 장소의 타협: "무대는 애굽, 관객은 하나님?"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광야로 나가 하나님을 예배하겠다고 선언하자, 바로는 가장 먼저 성(聖)과 속(俗)의 영토를 구분하는 거룩한 경계선을 허물자고 속삭입니다.
"바로가 모세를 불러 이르되 너희는 가서 이 땅에서 너희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라." (출애굽기 8:25)
'이 땅에서', 즉 애굽의 시스템 안에서, 세상의 통제권 아래서 예배하라는 말입니다. "굳이 구별된 삶을 살겠다고 거칠고 험한 광야로 나갈 필요가 있느냐? 세상 속에서 적당히 섞여 살며 주일 아침에만 경건한 모양을 취하라!"는 부드러운 속삭임입니다. 겉보기엔 매우 합리적이고 포용적인 제안 같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가치관과 삶의 방식(애굽)을 그대로 품은 채 형식적 제단만을 쌓는 예배는, 사실은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예배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광야로의 물리적, 영적 단절이 없는 예배는 결국 사단의 손바닥 위에서 펼쳐지는 종교 행위의 박제일 뿐입니다.
2. 거리의 타협: "목줄 늘려주기, 딱 그만큼만"
첫 번째 카드가 거절당하자, 바로는 마지못해 너그러운 척 한 발 물러섭니다. 그러나 그 양보의 이면에는 더 교묘한 통제의 끈이 묶여 있었습니다.
"바로가 이르되 내가 너희를 보내리니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 광야에서 제사를 드릴 것이나 너무 멀리 가지는 말라 그런즉 너희는 나를 위하여 간구하라." (출애굽기 8:28)
"너무 멀리 가지는 말라!" 이 말은 사탄이 예배자들에게 종종 드리우는 거짓 안전펜스입니다. 적당한 신앙, 상식적인 수준의 헌신, 사회생활에 방해되지 않을 만큼의 온도를 유지하라는 경고입니다. 뜨겁지도 차지도 않은 미지근한 회색지대에 머무르며, 세상이 부르면 언제든 복귀할 수 있는 거리를 남겨두라는 유혹입니다. 영혼의 내비게이션 좌표를 완전히 하나님께 맞추지 못하게 하고, 언제든 세상으로 U턴할 수 있는 편도 차표를 쥐여주는 것, 그것이 바로 "너무 멀리 가지는 말라!"는 거리의 타협이 가진 본질입니다.
3. 세대의 타협: "당대로 끝나는 마침표 신앙"
세 번째 타협안은 다음 세대로의 신앙 계승을 단절시키려는 가장 악랄하고도 영악한 세대 분리 전술이었습니다.
"그렇게 하지 말고 너희 장정만 가서 여호와를 섬기라 이것이 너희가 구하는 바니라 이에 그들이 바로 앞에서 쫓겨나니라." (출애굽기 10:11)
아내와 어린아이들은 남겨두고 '장정만' 가라는 제안은, 신앙의 씨앗을 대대손손 이어갈 '미래'를 저당 잡히라는 뜻입니다. "너만 열심히 믿고, 아이들은 세상 공부 바쁘니 나중에 믿게 하라"는 오늘날의 세태와 얼마나 닮아 있닌지요. 부모 세대가 구원의 방주에서 안온한 단맛을 즐기는 동안, 자녀들은 애굽의 거친 세속적 파도 속에 수장시키는 이 지독한 전술은 가정을 파괴하고 공동체의 미래를 말살합니다. 신앙이 다음 세대로 이어지지 못할 때, 그 신앙은 당대에 소멸하는 박물관의 유물이 되고 맙니다.
4. 소유의 타협: "물질을 볼모 잡힌 채 드리는 빈손의 예배"
열 재앙의 엄중한 심판대 앞, 벼랑 끝에 몰린 바로는 마침내 가장 질기디질긴 마지막 최후의 타협안을 꺼내 듭니다. 이번엔 모든 백성을 보내주겠다면서도, 현대인들에게 가장 민감한 '아킬레스건'을 끝끝내 붙잡아 멥니다.
"바로가 모세를 불러서 이르되 너희는 가서 여호와를 섬기되 너희의 양과 소는 머물러 두고 너희 어린 것들은 너희와 함께 갈지니라." (출애굽기 10:24)
몸은 가되, 재산의 상징이자 예배의 제물인 '양과 소'는 애굽에 두고 가라는 물질적 타협안입니다. 바로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가축(물질)을 드림이 없는 '빈손의 예배'는 영혼의 알맹이가 빠진 껍데기뿐인 허울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말입니다. 또한 자신들의 재물이 애굽에 볼모 붙잡혀 있는 한, 이스라엘은 결국 세속의 미련을 끊어내지 못하고 다시 그 물질을 찾아 애굽으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다는 '타락한 인간의 세상으로의 회귀 본능'을 꿰뚫어 본 것입니다. 물질을 세상에 볼모 잡힌 영혼은 결코 참된 자유인이 되어 애굽을 떠나는 '엑소도스(ἔξοδος)'의 길을 걸어갈 수 없습니다. 돈의 노예가 된 상태로는 결코 하나님만을 온전히 주(主)라 시인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단의 '물질의 볼모' 전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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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단 하나도 남길 수 없다."
오늘 우리 각자는 바로가 쳐놓은 4가지 그물 중 어디쯤 걸려 허우적대고 있습니까? 세상 속에서 적당히 섞여 예배하고(장소의 타협), 세상의 눈치를 보며 안전거리만 재고 있으며(거리의 타협), 내 자녀의 신앙은 입시와 성공 뒤로 미뤄둔 채(세대의 타협), 물질만은 움켜쥔 채 빈손 예배만 드리고 있지는 않습니까?(소유의 타협).
지옥행 전용 에스컬레이터는 언제나 부드럽고 안락하게 움직입니다. 그래서 지옥으로 걸어들어가는 이들은 그것이 지옥행인지조차 깨닫지 못합니다. 실로 두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바로 앞에서 단호하게 선언합니다. "우리 가축도 우리와 함께 가고 한 마리도 남길 수 없으니" (출애굽기 10:26)
이것은 단순히 가축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애굽에 대한 미련을 한 조각도 남겨두지 않겠다는 철저한 결별의 선언이었고, 사탄에게 타협의 틈 1미리도 내어주지 않겠다는 믿음의 결단이었습니다.
출애굽(ἔξοδος)은 부분적인 순종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주일만이 아니라 삶 전체를 원하시고, 예배의 순간만이 아니라 우리의 자녀와 물질과 미래까지도 원하십니다.
단 하나도 남기지 않는 순종, 단 한 걸음도 뒤로 물러서지 않는 예배, 사소함과의 타협 없는 믿음 위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애굽의 종이 아니라 자유인으로 세우십니다. 결국 참된 자유인은, 세상에 묶이지 않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세상에 묶이지 않은 사람은 오직 하나님만 예배하는 사람입니다.
권도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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