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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창세기의 말씀 6,5-8; 7,1-5.10
5 주님께서는 사람들의 악이 세상에 많아지고, 그들 마음의 모든 생각과 뜻이 언제나 악하기만 한 것을 보시고,
6 세상에 사람을 만드신 것을 후회하시며 마음 아파하셨다.
7 그래서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창조한 사람들을 이 땅 위에서 쓸어버리겠다.
사람뿐 아니라 짐승과 기어다니는 것들과 하늘의 새들까지 쓸어버리겠다.
내가 그것들을 만든 것이 후회스럽구나!”
8 그러나 노아만은 주님의 눈에 들었다.
7,1 주님께서 노아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네 가족들과 함께 방주로 들어가거라.
내가 보니 이 세대에 내 앞에서 의로운 사람은 너밖에 없구나.
2 정결한 짐승은 모두 수놈과 암놈으로 일곱 쌍씩, 부정한 짐승은 수놈과 암놈으로 한 쌍씩 데려가거라.
3 하늘의 새들도 수컷과 암컷으로 일곱 쌍씩 데리고 가서, 그 씨가 온 땅 위에 살아남게 하여라.
4 이제 이레가 지나면, 내가 사십 일 동안 밤낮으로 땅에 비를 내려, 내가 만든 생물을 땅에서 모두 쓸어버리겠다.”
5 노아는 주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다 하였다.
10 이레가 지나자 땅에 홍수가 났다.
복음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 8,14-21
그때에
14 제자들이 빵을 가져오는 것을 잊어버려, 그들이 가진 빵이 배 안에는 한 개밖에 없었다.
15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너희는 주의하여라. 바리사이들의 누룩과 헤로데의 누룩을 조심하여라.” 하고 분부하셨다.
16 그러자 제자들은 자기들에게 빵이 없다고 서로 수군거렸다.
17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아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어찌하여 빵이 없다고 수군거리느냐?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그렇게도 완고하냐?
18 너희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너희는 기억하지 못하느냐?
19 내가 빵 다섯 개를 오천 명에게 떼어 주었을 때, 빵 조각을 몇 광주리나 가득 거두었느냐?”
그들이 “열둘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20 “빵 일곱 개를 사천 명에게 떼어 주었을 때에는, 빵 조각을 몇 바구니나 가득 거두었느냐?”그들이 “일곱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21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두들기시고 깨시는>
오늘 복음 말씀에는 주님의 깊은 실망감과 안타까움이 배어 있습니다.
사실 다른 사람들, 예를 들어 바리사이나 율법 학자들과 헤로데와 같은 사람들이 당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그래도 이해할 수 있겠지만, 제자들마저 당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너무도 안타깝고 답답하고 실망스러운 것이었지요.
그래서 오늘 주님께서는 바리사이와 헤로데의 누룩을 조심하라고 하신 다음, 제자들이 하지 못하는 것들을 일일이 나열하시며 이렇게 꾸짖으십니다.
“너희는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그렇게도 완고하냐?
너희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너희는 기억하지 못하느냐?”
(마르 8,17ㄴ-18)
그런데 맨 마지막에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 가장 문제입니다.
오늘 복음은 8장 14절 이하인데 8장 1절이 4천 명을 먹이신 기적 얘기 아닙니까?
그러니까 오늘 주님의 말씀은 어제의 일을 오늘 기억하지 못하느냐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실은 기억의 문제가 아니고 깨닫지 못함이 문제이고 완고함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깨닫지 못하느냐, 그렇게 완고하냐 하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어제 조금 가지고도 수천을 먹인 엄청난 기적을 봤음에도 배에 빵 한 조각밖에 없다고 걱정하는 것은, 기억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제자들이 바리사이나 헤로데처럼 아직도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고, 깨닫지 못한 것은 완고하기 때문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왜 제자들은 바리사이들처럼 아직도 완고할까요?
제 생각에, 깨닫는 것은 깨어지는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내가 깨지지 않고서는 깨닫지 못합니다.
지금까지 내가 알고 있는 것이 깨지지 않고는 새로운 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지금까지 나의 선입견이 깨지지 않고는 새로운 눈이 열리지 않습니다.
그 단단한 나의 고정 관념이 깨지지 않고는 새로운 사고가 열리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이 아직도 바리사이와 마찬가지로 완고한 것은 그들 안에 형성돼 있는 것들이 너무도 단단하여 아직도 깨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제자들은 언제 깨지고 언제 깨닫게 될까요?
우리는 언제 깨지고 언제 깨닫게 될까요?
사실 매일 깨집니다.
우리는 야단 맞고 난 다음 깨졌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 '나 어제 깨졌다'고 하는데 '어제 한 소리 크게 들었다'는 얘기지요.
그런데 그 한 소리로 깨진 것 같지만 실은 금이 조금 간 정도입니다.
한 소리가 실은 큰 소리가 아니라 잔소리였던 것이고, 그래서 언젠가는 한 번 된통 깨져야만 했던 것입니다.
석수가 돌을 깰 때 백 번을 두들겨야 깨진다면 구십구 번을 두들겼어도 백 번째를 두들기지 않으면 헛것입니다.
그러므로 백 번째가 결정타(決定打)라고 할 수 있지만, 쉰 번째는 필요 없고 아흔아홉 번째는 중요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반대로 첫 번째부터 아흔아홉 번째까지 다 중요하지만, 실망 때문에 아흔아홉 번째에 그만두면, 다시 말해서 백 번째 두드리기를 하지 않으면 안 깨집니다.
제자들이 완전히 깨진 것은 주님께서 돌아가신 다음이고, 깨달은 것은 성령께서 그들 가운데 강림하신 다음입니다.
주님과 같이 다니며 오늘처럼 수없이 깨졌지만 안 깨지다가 주님의 수난 다음 완전히 깨진 것이고, 그런 다음에야 성령께서 들어오실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깨진 것이자 열린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오늘도 우리를 두들기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 말씀으로 매일 깨집니다.
“너희는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마르 8,17ㄷ)라며 오늘도 우리를 두들기시고 깨십니다.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말씀의 누룩을 챙겨라>
누룩은 부풀리는 힘을 갖고 있습니다.
이스트나 베이킹 파우더와 같은 일종의 발효제입니다.
그래서 빵과 술을 만드는 원료로 사용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는 누룩과 비슷하다. 어떤 부인이 그것을 가져다가 밀가루 서 말 속에 집어넣었더니, 마침내 온통 부풀어 올랐다”(마태 13,33)고 하시며 하느님의 나라를 누룩에 비유하기도 하셨습니다.
누룩이 좋은 것에 들어가서 부풀리면 그만큼 좋은 것으로 부풀려질 것이고, 반대로 나쁜 것에 부풀려지면 나쁜 것이 그만큼 커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좋은 누룩이 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바리사이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고, 그들이 하는 일은 모두 남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고, 잔치에 가면 맨 윗자리에 앉으려 하고 회당에서는 제일 높은 자리를 찾으며, 길에 나서면 인사받기를 좋아하고, 사람들이 스승이라 불러 주기를 바라는 사람들’(마태 23장 참조)이요, 예수님의 가르침을 거부하고 율법 준수에만 구원이 있다는 고정관념을 갖고 있었습니다.
율법은 우리를 노예로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유롭게 하고 자녀가 되도록 주어진 것입니다.
지나치게 엄격한 사람들은 선해 보이지만 하느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자유를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나치게 엄격함은 하느님의 선물이 아닙니다.
온순함이 선물입니다.
선함, 너그러움, 용서가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그리고 헤로데는 구원을 소유와 지배, 권력의 화려함 속에서 찾았습니다.
영적인 것을 추구하는 삶이 아니라 세상에서 부귀영화를 누리려고 한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그렇다면 ‘바리사이의 누룩과 헤로데의 누룩을 조심하라’는 말은 그들의 완고한 마음, 사고방식, 행태에 물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몇 마리로 4천 명이 넘는 많은 사람을 배부르게 먹게 해 주셨지만, 그들의 사고방식으로는 결코 빵의 기적을 베풀어 주신 예수님의 참뜻을 알아들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필리피서 3장 7절에서 바오로 사도는 “나에게 이롭던 것들을,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두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나의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의 지고한 가치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것들을 쓰레기로 여깁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그분 안에 있으려는 것입니다.” 하고 말합니다.
주님을 얻기 위하여 자신의 것을 모두 버린 바오로 사도가 부럽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나의 것을 버릴 수 있는 용기가 꼭 필요합니다.
사실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우리 마음 안에 나도 모르게 자리하고 있는 바리사이의 누룩과 헤로데의 누룩을 버려야 합니다.
바리사이, 헤로데의 누룩이란, 형식적이고 습관적인 삶의 자세, 잘못에 대해 벌주시고 나를 감시하시는 하느님으로 생각하는 시각, 재물에 대한 욕심, 부귀영화에 대한 동경, 기도는 하지 않으면서도 자동차에 십자가나 묵주를 매달고 있으면 하느님께서 보호해 주려니 생각하는 태도, 허영, 가식 등등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누룩은 버리고 하느님 말씀의 누룩을 부풀려야 하겠습니다.
하느님 앞에서 가식은 있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말귀를 잘 알아듣지 못하는 줄을 알면서도 계속해서 말씀하시고 결국에는 빵의 기적에 관한 얘기를 상기시키시면서 “너희는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마르 8,21) 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이면 좋겠습니까?
“낫 놓고 기역 자도 모르느냐?” 아니면 “때가 되면 알리라.” 어떻게 받아들이든 능력의 예수님, 구원자 예수님을 앞에 두고도 근심, 걱정에 싸여있지 않기를 바랍니다.
스승과 제자 사이에 마음과 마음이 통하기가 그렇게도 어려웠으니 우리와 주님 사이의 통교는 오죽하겠습니까?
주님과 깊은 만남에 이르는 길이 아직도 멀기만 합니다.
오늘 한 발 주님께로 다가갈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깨닫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빵이 없다고 수군거리는 제자들의 모습을 묵상할 때마다 아스라이 옛생각이 떠오릅니다.
젊은 형제들의 선생 노릇을 할 때였습니다.
매일 수업만 하면 지루해하지 월 한 번씩 야외로 소풍을 다녔습니다.
보통 라면을 챙겨가 끓여먹고 오는데, 그날은 대축일인지라 삼겹살을 구워먹기로 했습니다.
형제들이 다들 잘 준비하는 것 같아 안심하고 소풍 장소에 도착했습니다.
그러나 웬걸, 가장 중요한 준비물인 가스버너를 안 챙겨왔더군요.
쫄쫄 굶고 돌아왔습니다.
다음번 갈 때였습니다.
이번에는 각별히 당부도 했습니다.
다들 대답들은 시원시원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도착해보니, 이번에는 현관 앞에 둔 고기를 또 깜빡하고 안 가져왔더군요.
이번에는 라면만 잘 끓여 먹고 왔습니다.
오늘 제자들도 비슷한 체험을 했습니다.
배를 저어 호수 한 가운데로 나오고 나서야 빵을 안 가져온 것을 알았습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의 ‘수련장’인 예수님으로부터 야단맞을까 봐 지레 겁부터 먹고 자기들끼리 이걸 어쩌지 하고 수군거렸습니다.
그런데 하필 그때 예수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던지셨습니다.
“너희는 바리사이들의 누룩과 헤로데의 누룩을 조심하여라.”
그 순간 제자들은 ‘누룩이라! 스승님께서 빵 안 챙겨 온 것을 아셨구나. 이제 혼 좀 나게 생겼구나.’며 혼날 마음의 준비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자기들끼리 “빵 담당자, 넌 도대체 정신을 어디다 두고 다니냐? 이게 벌써 몇 번째냐? 정신 좀 차려라.”며 웅성거리고 있었습니다.
참으로 코믹한 상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하신 누룩과 관련된 말씀은 전혀 다른 차원의 말씀이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완벽하게 오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누룩은 반죽을 부풀리게 만드는 역할을 하지요.
이 문맥상 ‘바리사이의 누룩’ ‘헤로데의 누룩’이란 말의 의미는 다분히 부정적인 의미입니다.
여기서 누룩은 ‘악한 기운’ ‘악한 세력’ ‘부정적 영향력’등을 의미합니다.
빵과 관련된 말도 전혀 아니었던 것입니다.
바리사이들과 헤로데가 지니고 있는 악한 기운, 악한 세력, 부정적 영향력을 조심하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사실 그들은 속 빈 강정 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겉은 그럴듯하게 꾸미고 다녔지만 내면은 형편없었습니다.
실제로는 ‘쥐뿔도 아닌’ 사람들이었는데, 엄청 자신들을 부풀린 사람들이었습니다.
겉으로는 하느님의 율법을 외치고 다녔지만 실제 삶은 하느님 사랑과 반대되는 율법지상주의, 사악, 교만, 거짓, 죄로 얼룩져있었던 것입니다.
남은 빵조각을 모은 광주리 숫자처럼 일곱 광주리, 열두 광주리, 예수님의 가르침은 더할나위 없이 완전하고 완벽합니다.
그분의 가르침은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의 깨우침의 길은 멀고도 먼 길이었습니다.
일곱입니다, 열둘입니다, 대답은 시원시원하게 잘 합니다만, 가르침의 핵심, 진수는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깨닫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완고함 때문입니다.
수용성 부족 때문입니다.
경청하는 능력의 부족 때문입니다.
자신을 낮추고 낮춰, 갈고 또 갈아, 마음의 문을 열고 또 열어, 최선을 다해 하느님 말씀에 귀 기울이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 살레시오회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한 개의 빵'>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달마누타 지방에서 바리사이들과 표징에 대한 논쟁이 있은 후에, 배를 타고 벳사이다로 건너가던 중에 일어났던 일입니다.
'제자들이 빵을 가져오는 것을 잊어버려, 그들이 가진 빵이 배 안에는 한 개 밖에 없었다.
~ 제자들은 자기들에게 빵이 없다고 서로 수군거렸다.'
(마르 8,14-16)
그러나 분명 '그들이 가진 빵이 배 안에는 한 개'(마르 8,14) 있었습니다.
그 한 개의 빵은 대체 어떤 빵인가요?
사실 그 빵은 마르타에게 “실상 필요한 것은 한가지 뿐”(루카 10,42)이라고 말씀하셨던 것처럼, ‘오직 필요한 하나인 빵’입니다.
그것은 더 이상 다른 것이 필요하지 않는, ‘전부인 하나인 빵’ 입니다.
비록 이 세상의 모든 것을 가졌다하더라도 이 ‘하나’를 가지지 못하면 아무 것도 가지지 못한 것이 되고마는, 이 '한 개'만 가지게 되면 모든 것을 가지는 것이 되는, 그런 ‘빵’입니다.
여기서 ‘배’가 교회의 표상이라면, ‘빵’은 바로 예수님의 표상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바리사이들의 누룩과 헤로데의 누룩을 조심하여라.”
(마르 8,15)
대체 바리사이와 헤로데의 누룩이란 무엇인가요?
그들의 삶의 방식, 곧 ‘말만 하고 실행하지 않고, 남에게 보이기 위하여 행동하며, 잔치에 가면 윗자리에 앉으려 하고, 길에 나서면 인사받기를 좋아하고, 사람들이 스승이라 불러주기를 바라는 위선적인 바리사이들의 삶의 방식과 소유와 권력과 화려한 방식으로 살아가는 헤로데의 삶의 방식입니다.
바로 이러한 그들의 삶의 방식을 조심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지녀야 할 누룩은 무엇인가요?
그것은 ‘말씀’이 아니고서야 무엇이겠습니까?
비록 씨앗으로 뿌려지지만 육십 배, 백배의 열매를 맺을 그 ‘말씀의 누룩’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말씀이 우리의 모든 삶을 부풀리게 할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누룩인 말씀의 빵’이 우리에게는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빵이 없다고 수군거리느냐?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의 마음이 그렇게도 완고하냐?
너희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마르 8,17)
그리고 오늘 복음의 마지막 구절에서 거듭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마르 8,21)
여기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깨닫다'(σινιετε)라는 단어는 ‘나란히 서다’, ‘함께(같이) 서다’라는 뜻을 지닙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 '한 개의 빵'을 깨닫기 위해서는 항상 ‘말씀이신 우리 주님, 그리스도 곁에’ ‘나란히 함께’ 서 있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그들이 가진 빵이 배 안에는 한 개 밖에 없었다.'
(마르 8,14)
주님!
실상 필요한 빵은 한 개면 충분합니다.
제게는 이미 당신이 있고, 당신만이 더 이상 다른 것이 필요하지 않는, 진정 필요한 한 개의 빵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을 가져도 당신이 아니면 아무 것도 가지지 못한 것이오니, 오로지 제게는 당신만이 전부입니다.
당신이 저의 임, 저의 주님이십니다.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걱정한다고 비웃지 말고, 사랑과 나눔을 실천해야 합니다>
1)
여기서 ‘바리사이들의 누룩과 헤로데의 누룩’은 바리사이들과 헤로데 당파 사람들의 ‘사고방식’을 뜻합니다.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부유함을 ‘하느님께서 내려 주신’ 복이라고 생각한 것이 그들의 사고방식이었습니다.
그들은, ‘부자들’은 하느님의 복을 많이 받은 사람들이라고 생각했고, ‘가난한 사람들’은 하느님의 복을 받지 못한 사람들(죄인들, 하느님의 벌을 받은 사람들)이라고 생각해서 무시하고 업신여겼습니다.
지금 예수님의 말씀은 그것은 아주 잘못된 사고방식이니 그런 사고방식에 물들지 말라는 가르침입니다.
2)
예수님께서 ‘재물’에 관해 가르치셨을 때, 바리사이들이 예수님을 비웃었다는 말이 루카복음에 있습니다.
"어떠한 종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한쪽은 미워하고 다른 쪽은 사랑하며, 한쪽은 떠받들고 다른 쪽은 업신여기게 된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
'돈을 좋아하는 바리사이들이 이 모든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비웃었다.'
(루카 16,13-14)
그런데 그 당시의 상황을 보면, 바리사이들과 헤로데 당파 사람들만 그렇게 생각한 것이 아니라, 유대인들의 일반적인 생각이었고, 사도들도 그 생각에서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주위를 둘러보시며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재물을 많이 가진 자들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
제자들은 그분의 말씀에 놀랐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거듭 말씀하셨다.
"얘들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
그러자 제자들이 더욱 놀라서,"‘그러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 하고 서로 말하였다.'
(마르 10,23-26)
“그러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 라는 제자들의 말은, “하느님의 복을 많이 받았다고 생각되는 부자들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다는 말인가?” 라는 뜻이고, 사도들도 그 당시의 일반적인 사고방식의 영향을 받고 있었음을 나타냅니다.
자본주의가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것과 같은 오늘날에는 그런 사고방식이 더욱 심하게 사람들을 사로잡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데, 세속적인 성공과 출세와 부귀영화를 ‘하느님께서 내려 주신’ 복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이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은 결코 ‘하느님의 복’이 아니라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하느님의 복’이 아니면 무엇인가?
어떤 경우에는 ‘사탄의 장난’인 경우가 있습니다.
물론 그런 것들을 전부 다 ‘사탄의 장난’이라고 말할 수는 없더라도, 어떻든 하느님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3)
'제자들은 자기들에게 빵이 없다고 서로 수군거렸다.' 라는 말은 빵이 없다고 제자들이 걱정했다는 뜻입니다.
복음서에 기록된 순서와는 다르게 제자들이 걱정한 일이 먼저 있었을 것이고, 그것을 보신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과 헤로데의 누룩을 조심하라고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14절의 '그들이 가진 빵이 배 안에는 한 개밖에 없었다.' 라는 말에서, ‘배 안에 있는 빵 한 개’를 ‘제자들과 함께 계시는 예수님’으로 해석하기도 하는데, 일차적으로는 ‘빵이 없었다’는 것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위해서는 ‘빵의 기적’을 행하셨지만, 제자들만을 위해서는 그런 기적을 행하시지 않았습니다.
어느 안식일에 제자들이 ‘배가 고파서’ 밀 이삭을 뜯어 먹는 것을 본 바리사이들이 시비를 건 일은(마태 12,1-2), 예수님과 제자들의 평소 생활이 어떠했는지를 잘 나타냅니다.
제자들이 빵이 없다고 걱정한 것에 대해서 믿음이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말하기 전에 “그들의 생활이 얼마나 고달팠을까?”를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유 있게 사는 사람들은 먹고사는 문제를 걱정하는 ‘가난한 이들’을 함부로 비웃거나 꾸짖으면 안 됩니다.
남의 고통에 공감하지 못하는 ‘사랑 없음’은 ‘죄’입니다.
신앙인이라면, 이웃이 또는 형제가 그런 문제로 걱정하지 않도록 적극적으로 사랑과 나눔을 실천해야 합니다.
4)
제자들의 걱정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빵의 기적’을 다시 생각해 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차려입을까?’ 하며 걱정하지 마라.
이런 것들은 모두 다른 민족들이 애써 찾는 것이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함을 아신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마태 6,31-33)
- 전주교구 상지원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인류의 타락 - 하느님의 좌절, 후회와 아픔 - 회개와 깨달음이 여정>
공부 중의 공부가, 평생공부가 사람되는, 참사람되는 공부입니다.
하느님 보시기에 참 좋은, 하느님을 기쁘시게 하는, 하느님께 영광드리는 공부입니다.
둘 같지만 결국은 하나입니다.
옛 현자의 말씀도 공부에 큰 도움이 됩니다.
“공부는 나를 깨달아 알아감으로 끊임없이 새로워지는 과정이다.
함께 하는 이가 있으면 공부가 더욱 즐거워진다.”
<다산>
날로 새로워지고 순수해지고 자유로워지는, 자비로워지고 지혜로워지는, 깨달아 알아가는 깨달음의 인생 여정이라면 얼마나 멋지고 아름답겠는지요!
“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또한 즐겁지 않은가?
벗이 먼곳에서 찾아오면 또한 즐겁지 않은가?
다른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성내지 않으면 그 또한 군자가 아니겠는?”
<논어의 공자>
논어 맨처음 시작되는 공자의 인생 삼락의 말씀입니다.
전방위적으로 펼쳐지는 모든 삶의 장이 공부의 대상이요, 졸업이 없는, 죽어야 졸업인 인생학교의 영원한 현역의 학인임을 깨닫습니다.
더구나 오늘 창세기와 마르코 복음의 무지의 악에 눈먼 이들을 대하면 더욱 공부의 절대적 필요성을 느낍니다.
주님의 이런 사람들에 대한 좌절, 후회와 아픔이 그대로 전달됩니다.
이건 일부 특수한 사람들이 아닌 인간 대부분의 보편적 현실임을 깨달을 때 문제는 더욱 심각해집니다.
흔히 회자되는 “기계는 고쳐쓸 수 있어도 사람은 고쳐쓸 수 없다”라는, 또 “원판불변의 법칙”이란 말마디도 우리 마음을 무겁게 하고 낙관적 전망을 어렵게 합니다.
“어떻게 해야 하나?”
“어떻게 살아야 하나?”
“이렇게 살아도 되나?”
이런저런 물음이 저절로 나옵니다.
답은 회개와 깨달음의 선택, 그리고 훈련과 습관입니다.
오늘 제1독서 서두부터 말씀이 작금의 극심한 분열과 혼란, 부패하고 변질된 현실을 두고 하시는 말씀같아 섬뜻한 느낌도 됩니다.
흡사 온몸에 퍼져가는 암세포같은 세상 악의 현실을 보면 더욱 이런 느낌이요, 날로 심화되는 기후위기에 중병을 앓고 있는 공동의 집인 하나뿐인 지구를 보면, 과연 사람들에게 희망이 있는지 묻게 됩니다.
그대로 오늘의 현실을 두고 하시는 주님의 말씀처럼 들립니다.
단숨에 읽히는, 공감이 가는 제1독서 창세기 말씀 전반부 대부분을 인용합니다.
‘주님께서는 사람들의 악이 세상에 많아지고, 그들 마음의 모든 생각과 뜻이 언제나 악한 것을 보시고, 세상에 사람을 만드신 것을 보시고, 후회하시며 마음 아파하셨다.
그래서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창조한 사람들을 이 땅 위에서 쓸어 버리겠다.
사람뿐 아니라 짐승과 기어 다니는 것들과 하늘의 새들까지 쓸어 버리겠다.
내가 그것들을 만든 것이 후회스럽구나!”
그러나 노아만은 주님의 눈에 들었다.
노아의 역사는 이러하다.
노아는 당대에 의롭고 흠 없는 사람이었다.
노아는 하느님과 함께 살았다.
...세상은 하느님 앞에 타락해 있었다.
세상은 폭력으로 가득 차 있었다.’
무섭게 마음에 와닿는 오늘의 현실을 두고 하시는 말씀같지 않습니까?
여전히 반복되는 악의 현실에 과연 인간에게 희망을 둘 수 있는가 묻게 됩니다.
위 내용만 보면 성악설이 맞고, 앞서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되었다는 기사를 보면 성선설이 맞고, 또 둘 다 해당되는 역설적 인간 존재처럼 생각되기도 합니다.
저절로 고백하는 엊그제 인용했던 ‘산앞에 서면’ 이란 자작 애송시입니다.
“산 앞에
서면
당신 앞에
서듯
행복하다”
그리고 이어지는 후반부는 세상 피조물들을 홍수로 쓸어버리는 하느님의 엄중한 심판에 앞서 노아에게 하달되는 명령이요, 노아는 하느님께서는 명령하신 그대로 다 합니다.
우리 믿는 이들의 롤모델로, 하느님의 희망으로, 혜성처럼 등장한 노아입니다.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심기일전 분발하여 회개와 깨달음의 여정에 따라, 하느님 마음에 드는 노아처럼 한 번 의롭고 흠없이 살아보라는 주님의 원의를 감지합니다.
노아 ‘그는 하느님과 함께 살았다’ 라는, 히브리어 직역인 영어-“He walked with God”- 가 더 마음에 와닿습니다.
주님과 함께 걸어가는 것이 살아가는 것입니다.
두 발로 걸을 때 늘 ‘영원한 동반자’이자 길벗 도반인 주님과 함께 걷고 있다고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두려움과 불안은 저절로 사라질 것입니다.
어제 하늘의 표징을 요구하는 무지에 눈먼 바리사이들에 대해 탄식하며 좌절감을 표현했던 주님은 오늘 제자들의 눈먼 현실에 그대로 좌절감을 표현합니다.
얼마전 있었던 빵의 기적을 까맣게 잊고 빵이 없다고 걱정하는 정말 대책없는 무지에 눈먼 제자들이요 바로 우리 인간의 보편적 부정적 현실입니다.
이 또한 우리를 향한 질책처럼 들립니다.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는 마음이 그렇게도 완고하냐?
너희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너희는 기억하지 못하느냐... 너희는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마치 제가 받는 질책처럼 부끄러운 생각도 듭니다.
새삼 우리 인생 여정은 회개와 더불어 깨달아 나를 알아가며 주님을 닮아 순수해지고 자유로워져, 자비로워지고 지혜로워져 참나가 되어가는 '회개와 깨달음의 여정'임을 알게 됩니다.
날마다 주님의 거룩한 미사은총이 결정적 도움이 됩니다.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방주>
1995년의 일입니다.
저는 우체국장 하는 형제님의 권유로 우체국 보험을 들었습니다.
처음에는 부담이 되었지만, 우체국 보험은 제게 큰 힘이 되었습니다.
2년 후인 1997년에 IMF가 시작되었습니다.
형님의 사업이 힘들어지면서 제게 부모님을 모셔야 할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저는 급한 대로 교구 신협에서 대출을 받아, 부모님이 거처할 집을 마련했습니다.
우체국 보험이 만기가 되어 대출금을 갚을 수 있었습니다.
달라스 성당에 와서도 은행 계좌를 보았습니다.
입출금 계좌를 적금 계좌로 변경했습니다.
1년이 지나면서 적금 계좌에서 수익이 발생했습니다.
예전에 본당 신부님이 제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교우들이 정성껏 봉헌한 교무금과 헌금을 잘 관리하는 것도 사목자의 책임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달란트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달란트 관리를 잘한 종은 주인에게 칭찬받고 더 많은 달란트를 받는다고 하셨습니다.
오늘 하느님께서는 노아에게 ‘방주’를 만들라고 하셨습니다.
비가 내리지 않는 사막에 방주를 만드는 것은 어리석어 보이는 일었습니다.
그러나 노아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방주를 만들었습니다.
방주는 노아와 가족 그리고 노아가 데리고 들어간 동물을 살리는 구원의 방주가 되었습니다.
현대인들에게 노아의 방주는 어떤 의미일까요?
첫째는 ‘인간관계’라고 생각합니다.
함석헌 선생님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라는 글을 남겼습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 나를 도와줄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구원의 방주입니다.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갈 수 있었는데 억울함을 풀어준 친구가 있다면 그 친구가 구원의 방주입니다.
둘째는 ‘재물’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의 기준은 ‘돈’입니다.
돈이 있으면 집을 살 수 있고, 돈이 있으면 여행도 가고, 돈이 있으면 가난한 사람도 도울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열심히 일하는 목적도 돈을 벌기 위해서입니다.
셋째는 ‘건강’입니다.
인간관계가 좋아도, 재물이 많아도, 건강하지 못하면 인간관계와 재물이 구원의 방주가 될 수 없습니다.
인간관계가 나빠져도, 재물을 잃어도, 건강하면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다.
건강한 몸과 마음은 험한 세상을 헤쳐나갈 수 있는 구원의 방주입니다.
신앙인들에게 구원의 방주는 무엇일까요?
노아의 방주는 단순히 커다란 배가 아닙니다.
방주는 구원의 도구이며, 공동체의 상징입니다.
방주 안에 들어간 자들은 구원을 받았지만, 밖에 남은 자들은 홍수에 휩쓸려갔습니다.
이 방주는 오늘날 우리에게 교회를 떠올리게 합니다.
교회는 세상의 죄와 혼란 속에서도 신자들이 머물며 구원을 준비하는 곳입니다.
베드로 전서 3장 20~21절은 방주를 세례와 연결하여 말합니다.
"방주 안에서 물을 통해 구원받은 사람은 여덟 명뿐이었습니다.
이것은 세례를 상징합니다."
방주의 물은 세례의 물과 같습니다.
세례를 통해 우리는 죄에서 깨끗해지고,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나며, 구원의 공동체 안으로 들어오게 됩니다.
우리는 이 방주 안에서 하느님께서 우리를 보호하시고 인도하심을 믿으며 살아가야 합니다.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들에 경고를 받고 경외심으로 방주를 준비하였다."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신앙 여정도 이와 비슷합니다.
때로는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는 일이 세상의 눈에 어리석어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믿음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신뢰하며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는 데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마음에 새기며 실천하는 것이 구원의 방주입니다.
홍수가 끝난 후, 하느님께서는 노아와 그의 가족에게 무지개를 통해 언약을 주셨습니다.
이는 다시는 물로 세상을 심판하지 않겠다는 하느님의 약속입니다.
이 언약은 단순히 자연 현상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와 맺으신 구원의 약속을 상징합니다.
이 약속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완성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통해 우리를 죄와 죽음에서 구원하시고, 새로운 생명의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성체성사를 통해 우리는 이 구원의 언약을 계속해서 새롭게 합니다.
우리는 이 언약을 믿고, 하나님의 약속 안에서 희망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오 복음 24장에서 "노아 때와 같이 인자의 때도 그러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노아의 시대처럼, 종말의 날도 우리가 예상치 못한 순간에 올 것입니다.
방주의 문이 닫히기 전에 준비된 자들만이 구원받을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어떤 방주를 준비하고 있습니까?
우리의 신앙과 삶은 정말로 하느님의 뜻에 맞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하느님께서 우리를 초대하시는 방주, 곧 교회와 믿음의 삶 안에서 우리는 깨어 있어야 합니다.
노아의 방주는 단순히 과거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의 신앙, 기도 생활, 성사 참여, 그리고 사랑의 실천이 바로 우리의 방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각자에게 방주를 준비할 기회를 주십니다.
우리는 그 방주 안에서 하나님께 순종하고, 서로를 사랑하며, 구원을 향한 여정을 걸어가야 합니다.
“너희는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 미국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지금 눈에 보이는 것에 매여서 걱정하고 두려워하는 것>
어느 대학 교수가 자기 수업을 듣는 학생들에게 간단한 테스트를 한다면서 시험지를 나눠주었습니다.
그런데 시험지에는 빨간 점 하나만 찍혀 있을 뿐이었습니다.
교수는 종이에 뭐가 보이는지를 적는 것이 테스트라고 말했습니다.
30분이 지난 뒤, 교수는 시험지를 걷어갔습니다.
교수는 곧바로 시험지를 보면서 학생들이 쓴 글을 읽어주셨습니다.
학생들은 하나같이 시험지 중앙에 찍힌 빨간 점에 관해 서술했습니다.
점과 종이의 비율, 가운데 찍힌 점의 위치에 관한 내용이었습니다.
교수는 이 모두를 읽어준 뒤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은 모두 오로지 빨간 점에만 집중했습니다.
주변의 하얀 종이에 관심을 둔 학생은 한 사람도 없었지요.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인생은 하얀 종이와도 같지요.
우리의 삶은 이 안에서 자유롭게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주 작은 부분인 빨간 점에 자기를 가두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은 무궁무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유롭게 살 수 있는 나를 빨간 점이라는 아주 작은 부분에 가두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그래서 할 수 있는 것을 하지 못하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닐까요?
따라서 자기 삶을 확장해야 합니다.
특히 전지전능하신 하느님과 함께 한다면 우리의 삶은 지금에서 계속 확장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의 누룩과 헤로데의 누룩을 조심하여라.”라고 말씀하시자, 제자들은 자기들에게 빵이 없다고 서로 수군거립니다.
바리사이들과 헤로데의 누룩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악’을 말합니다.
악이란 것은 눈에 훤하게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눈에 보이지 않는 ‘악’이 자기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까지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합니다.
그래서 조심하라고 말씀하신 것인데, 제자들은 빵이 없다는 것만을 이야기합니다.
앞서 교수님이 나눠 준 시험지의 경우와 똑같은 것 같습니다.
하얀 여백이 더 많은데도 불구하고 아주 작은 부분인 빨간 점에만 바라보는 학생들처럼, 제자들은 눈앞의 문제만을 바라보고 있을 따름입니다.
제자들은 주님과 함께 하면서 들었던 말씀, 또 보았던 기적들을 보면서, 자기 삶을 확장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빵의 기적을 이야기하셨던 것입니다.
지금 눈에 보이는 것에 매여서 걱정하고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 함께 했을 때의 기쁨과 희망을 바라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 삶을 확장해야 합니다.
눈앞에 보이는 문제에만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 우리와 함께하는 주님을 통해 자기 삶을 분명히 확장할 수 있습니다.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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