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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창세기의 말씀 8,6-13.20-22
6 사십 일이 지난 뒤에 노아는 자기가 만든 방주의 창을 열고
7 까마귀를 내보냈다.
까마귀는 밖으로 나가 땅에 물이 마를 때까지 왔다 갔다 하였다.
8 그는 또 물이 땅에서 빠졌는지 보려고 비둘기를 내보냈다.
9 그러나 비둘기는 발붙일 곳을 찾지 못하고 방주로 노아에게 돌아왔다.
온 땅에 아직도 물이 있었던 것이다.
노아는 손을 내밀어 그것을 잡아 방주 안으로 들여놓았다.
10 그는 이레를 더 기다리다가 다시 그 비둘기를 방주에서 내보냈다.
11 저녁때가 되어 비둘기가 그에게 돌아왔는데, 싱싱한 올리브 잎을 부리에 물고 있었다.
그래서 노아는 땅에서 물이 빠진 것을 알게 되었다.
12 노아는 이레를 더 기다려 그 비둘기를 내보냈다.
그러자 비둘기는 그에게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13 노아가 육백한 살이 되던 해, 첫째 달 초하룻날에 땅의 물이 말랐다.
노아가 방주 뚜껑을 열고 내다보니 과연 땅바닥이 말라 있었다.
20 노아는 주님을 위하여 제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과 모든 정결한 새들 가운데에서 번제물을 골라 그 제단 위에서 바쳤다.
21 주님께서 그 향내를 맡으시고 마음속으로 생각하셨다.
‘사람의 마음은 어려서부터 악한 뜻을 품기 마련
내가 다시는 사람 때문에 땅을 저주하지 않으리라.
이번에 한 것처럼 다시는 어떤 생물도 파멸시키지 않으리라.
22 땅이 있는 한, 씨뿌리기와 거두기, 추위와 더위 여름과 겨울, 낮과 밤이 그치지 않으리라.’
복음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 8,22-26
그때에 예수님과 제자들은
22 벳사이다로 갔다.
그런데 사람들이 눈먼 이를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는 그에게 손을 대어 주십사고 청하였다.
23 그분께서는 그 눈먼 이의 손을 잡아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셔서, 그의 두 눈에 침을 바르시고 그에게 손을 얹으신 다음, “무엇이 보이느냐?” 하고 물으셨다.
24 그는 앞을 쳐다보며, “사람들이 보입니다. 그런데 걸어 다니는 나무처럼 보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25 그분께서 다시 그의 두 눈에 손을 얹으시니 그가 똑똑히 보게 되었다.
그는 시력이 회복되어 모든 것을 뚜렷이 보게 된 것이다.
26 예수님께서는 그를 집으로 보내시면서 말씀하셨다.
“저 마을로는 들어가지 마라.”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신앙의 눈>
오늘 복음에는 ‘눈먼 이’가 등장합니다.
그런데 ‘눈먼 이’란 어떤 사람일까요?
눈이 감겨 보지 못하는 이뿐만 아니라, 눈이 열려 있어도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하는 이, 곧 어둠에 덮여 빛을 보지 못하는 이를 포함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마치 장미꽃의 아름다움을 보지 못하고서 가시로 찔러 상처를 주는 것으로 알며, 불이 주변을 환히 밝혀줌을 보지 못하고서 태워 상처 입히는 것으로만 아는 것과 같습니다.
곧 상처를 볼 뿐, 상처에서 흘러나온 구원을 보지 못하는 이입니다.
이처럼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요한 1,5), 자신의 어둠에 갇혀 그 빛을 보지 못하는 이가 바로 ‘눈먼 이’입니다.
곧 진리이신 하느님을 알아보지 못한 이가 바로 ‘눈먼 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대체 무엇이 눈을 가리고 있는 것일까요?
어제 복음인 앞 장면에서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느냐? ~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느냐?”(마르 8,18)하고 말씀하셨는데, 여기서, ‘보다’라는 동사는 단순하게 시력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와 깨달음’을 포함합니다.
그러니 우리에게는 진리를 볼 수 있는 ‘영의 눈’이 필요한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세 개의 눈’을 가지고 있는 셈입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것을 보는 ‘육안’, 속을 들여다보는 보는 ‘심안’(마음의 눈), 그리고 복음의 빛으로 보는 신앙의 눈인 ‘영안’(영의 눈) 입니다.
우리는 신앙이 깊어가면서 ‘영의 눈’이 밝아져갑니다.
이는 <시편>에서 “당신 빛으로 빛을 보옵니다.”(시 35,10)라고 노래하고 있듯이, ‘성령의 인도로 하느님의 신비를 보는 눈’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눈먼 이의 두 눈에 ‘당신의 침’을 바르십니다.
이는 ‘귀 먹고 말 더듬는 이를 고치신 이야기’(마르 7,31-37)에서, 예수님께서 당신의 손가락에 ‘침’을 발라 귀먹고 말 더듬는 이의 혀에 대신 것처럼(마르 7,34), ‘영의 도유’를 통해 치유된 눈을 말해줍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무엇이 보이느냐?”
(마르 8,23).
혹 사람들만 보이나요?
이제는 ‘육안’으로 사람의 형상만 보지 말고, ‘심안’으로 그 사람의 아픈 마음을 헤아려 보고, ‘영안’으로 그 사람 안에서 구원을 펼치시는 하느님의 현존을 보아야 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두 눈에 ‘당신 손’을 얹어주시기를 청해야 할 일입니다.
주님,
겉 형상의 사람만 보지 않고, 그 사람의 아픈 마음을 헤아려 볼 줄 알게 하소서.
나아가, 그 사람 안에 구원을 펼치시는 당신의 현존을 볼 수 있게 하소서.
풀 한 포기에서도 당신의 능력을 보게 하시고, 베푸신 자비를 보는 눈을 열어 주소서.
지금 우리가 살아있는 바로 이 자리에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 당신을 보게 하소서.
제 행복은 오직 당신을 뵙는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무엇이 보이느냐?”
(마르 8,23)
주님!
제 눈이 상처를 볼 뿐, 상처에서 흘러나오는 구원을 보지 못했습니다.
빛이 어둠을 들통 내도 어둠을 볼 뿐, 빛을 보지 못했습니다.
하오니, 이제는 겉 형상만 보지 말고, 그 안에 펼쳐지는 구원을 보게 하소서.
당신의 빛으로 제 눈이 밝아지게 하소서.
당신의 영으로 제 영혼을 도유하소서.
바로 지금 이 자리에 함께 계시는 당신 뵙겠나이다.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이전으로 돌아가지 마라>
지난주 금요일 우리는 마르코 복음 7 장 끝부분 얘기를 들었습니다.
여기서 주님께서는 귀먹고 말 더듬는 이의 귀와 입을 열어주십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를 군중에게서 따로 데리고 나가서 고쳐주십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은 8장의 얘기로 눈먼 이를 눈 뜨게 하시는 얘기인데, 오늘은 주님께서 그를 마을 밖으로까지 데리고 나가 거기서 고쳐주십니다.
그런데 두 얘기 모두 다른 복음에는 없고 마르코 복음에만 있는 얘기이고, 두 얘기 모두 주님께서 그들을 따로 데리고 나가 은밀히 고쳐주시는 얘기입니다.
어쨌거나 이렇게 주님의 은밀함은 마르코가 좋아하고 강조하는 것인데, 두 가지 깊은 뜻이 숨어 있습니다.
첫째는 주님의 은밀한 사랑입니다.
내밀한 사랑이라고 해도 좋겠습니다.
주님의 공적이고 공개적인 사랑도 좋고 필요합니다만, 내게는 내밀하고 사적인 사랑이 더 좋고 더 필요합니다.
나만 사랑해주신다는 느낌 말입니다.
이는 아빠가 나만 데리고 가 선물을 사주시며 나를 특별히 사랑해주시는 것처럼 느끼게 해주시는데, 아빠가 내게만 이렇게 해주시는 것이 아닌 줄 알면서도 나한테는 이렇게 사랑을 느끼게 해주시는 것이 좋고 필요한 것과 같습니다.
가끔 그런 느낌이 있지 않습니까?
달이 모든 곳을 비추지만 내 창으로 들어온 달이 아주 특별한 느낌 말입니다.
세종대왕이 지었다고 하는 월인천강지곡이 있고 월천강이라는 말이 있지요.
월인천강(月印千江)은 달은 하나이지만 천 개의 강에 비춘다는 뜻입니다.
이것을 우리 믿음으로 바꾸면 하느님은 한 분이시고, 하느님은 존재하는 모든 것을 사랑하시지만,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 마음에 각기 달리 각인됩니다.
주님의 은밀함은 둘째로 감추심의 뜻이 있습니다.
당신의 신성을 드러내지 않고 감추시는 것입니다.
낮추심과 겸손하심의 뜻이 있고, 우리와 같아지심의 뜻도 있으며, 낮추시어 우리와 같아지시는 겸손한 사랑의 뜻이 있습니다.
이렇게 마을 밖으로까지 데리고 나가 밀애를 나눈 다음, 주님께서는 눈먼 이에게 마을로 돌아가지 말라고 하십니다.
“저 마을로는 들어가지 마라.”
마을로 들어가 사람들에게 떠벌이지 말라는 뜻도 있지만, 제 생각에 이전 생활로 돌아가지 말라는 뜻도 있을 겁니다.
주님 사랑에 의해 신적인 사랑에 눈뜬 사람이 이전 인간적 사랑으로 돌아가지 말라는 뜻도 있지 않을까요?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영의 눈을 떠야 합니다>
눈먼 사람이 보게 된다면 얼마나 큰 기쁨이겠습니까?
그러나 보고 싶은 것도 많고, 볼 것도 많지만 정작 보아야 할 것을 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마르코 복음에서 ‘보다’라는 동사는 단순한 시력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이해와 깨달음’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생명의 빵’이신 주님과 함께 있으면서도 빵이 없다고 걱정하였습니다.
그래서 “너희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마르 8,18.21)는 꾸지람을 들었습니다.
참으로 보아야 할 것을 볼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예수님께서 눈먼 이의 두 눈에 침을 바르시고 그에게 손을 얹으신 다음 “무엇이 보이느냐?”하고 물으셨습니다.
“무엇이 보이느냐?”는 말은 단순히 ‘육안으로 보이느냐?’의 질문이 아닙니다.
'새로운 세상이 보이느냐?', '권능을 지닌 구세주가 보이느냐?’는 물음입니다.
우리는 흔히 눈을 ‘육안’, ‘심안’, ‘혜안(영안)’으로 구별합니다.
육안은 그야말로 밖으로 드러나 있는 것을 보는 눈입니다.
그러나 심안은 마음의 눈입니다.
품은 생각을 드러내는 눈입니다.
그 사람의 마음에 무엇을 담고 있느냐에 따라서 보이는 것이 다릅니다.
똑같은 것을 보아도 어느 사람은 긍정적으로 좋게 보고, 어떤 사람은 굽은 눈으로 봄으로써 자기 마음을 표출하게 됩니다.
어떤 이는 장미꽃을 보면서도 장미꽃의 아름다움은 보지 못한 채 가시만 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네 눈은 네 몸의 등불이다.
네 눈이 맑을 때에는 온몸도 환하고, 성하지 못할 때에는 몸도 어둡다.
그러니 네 안에 있는 빛이 어둠이 아닌지 살펴보아라.”
(루카 11,34-35)
영안은 신앙의 눈입니다.
영안은 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것을 보는 눈도 아니고 내 마음의 잣대로 판단하는 눈도 아닙니다.
영적인 눈은 하느님의 말씀에 비추어진 눈이요, 내 눈으로, 내 마음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눈으로, 예수님의 마음으로 보는 눈입니다.
그야말로 “당신의 말씀은 제 발에 등불, 저의 길에 빛이옵니다.”(시편 119,105)
영안을 가진 사람은 ‘예수님이시라면 어떻게 하셨을까?’를 먼저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이 세상일에 대해서는 많은 것을 알지만 자기가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가고 있는지는 모르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분명 눈먼 사람입니다.
지식이나 재물도 꼭 필요한때 쓰지 못한다면 눈먼 이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눈먼 이는 주님의 손길을 통해 사람들을 보았는데, 처음에는 걸어 다니는 나무처럼 보았습니다.
이것은 평상시에 익숙해져 있는 대로 본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눈먼 이가 다니면서 제일 많이 부딪친 것이 무엇일까?
그리고 주님께서 다시 손을 얹으시자 똑똑히 보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겉으로만 본 것이 아니라 주님의 권능을 보게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능력은 아버지 하느님 안에서 행하여지고 마침내 십자가를 통하여 구원을 이루신다는 깨달음을 얻기까지는 아직도 갈 길이 멉니다.
똑똑히 보기 위해서는 한두 번으로 안 됩니다.
반복과 훈련이 필요하고 서서히 알아보게 되고 깨치게 됩니다.
육안의 눈을 넘어, 마음의 눈을 뜨고, 영적인 눈을 뜨기까지 사랑과 정성으로 기도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세상 것에 눈이 멀면 결코 주님을 볼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무엇이 보이느냐?” 하시면 “예, 주님, 뚜렷하게 보입니다.” 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보게 되었으면 어두운 과거의 마을로 돌아가지 않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저 마을로는 들어가지 마라.”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하느님은 우리를 구조해주시는 분이 아니라 구원해 주시는 분입니다>
다가오는 사순시기, 예수님께서 몸소 겪으셨던 수난과 십자가 죽음의 신비에 대한 깊이 있는 묵상으로 우리를 안내할 따끈따끈한 영적 독서책이 막 도착했습니다.
제목이 특별합니다.
<나를 구하시지 않는 하느님>(로널드 롤 하이저 著, 생활성서)입니다.
로널드 롤 하이저 신부님은 오블라티 선교 수도회 소속이시며 헨리 나우웬 신부님 이후 대표적인 가톨릭 영성 작가로 손꼽히고 있는 영성가이십니다.
고통과 십자가에 대한 저자의 성숙하고도 친절한 안내가 돋보입니다.
하느님께서 예수님의 고통을 면제하시지 않은 것처럼, 예수님도 우리의 고통을 면제해주시지 않는답니다.
너무나 신박한 표현들 앞에 개인적으로 깜짝 놀랐습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구조해주시는 하느님이 아니라 우리를 구원해 주시는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굴욕과 고통, 죽음에서 우리를 구해 주시려 개입하시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일이 벌어진 후에 굴욕, 고통, 죽음에서 우리를 구원해 주십니다.”
“예수님은 병에 대한 면역을 만들어 주시고 죽음을 피하게 해주신다고 약속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고 의롭게 하시며 고통을 감내할 힘과 영원한 생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일은 우리 삶의 마지막에 일어날 일들입니다.
우리는 삶의 여정에서 다른 모든 이가 겪는 굴욕과 고통, 그리고 죽음을 똑같이 겪을 것입니다.
십자가와 예수님의 부활은 구조하시는 하느님 아니라 구원하시는 하느님을 보여줍니다.”
부끄럽게도 우리 한국 교회 안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입니다.
예수님 인류 구원 사업의 정점인 골고타 언덕으로 올라가는 고통스런 여정은 생략하고 싶습니다.
그저 현세의 지속적인 축복과 끝도 없는 치유, 나와 내 가족만의 안녕만을 갈구하는 미성숙한 신앙이 판을 치고 있습니다.
가슴 아픈 사회 현실은 외면한 채 고상함과 경건함, 신비함과 달콤함만을 추구하는 ‘값싼 신앙’의 천박한 그림자가 남아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고통과 십자가는 외면하고, 승승장구와 만수무강만 추구하는 싸구려 신앙을 거부해야겠습니다.
고통과 십자가 없는 구원은 기대조차 하지 말아야겠습니다.
우리 가톨릭 교회의 분위기나 가르침은 조금 밋밋해보입니다.
가톨릭 교리는 지극히 상식적이고 통상적이어서 그렇습니다.
이성적이고 평범한 것이어서 그렇습니다.
그런데 사실 보편적이고 인간적인 것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 모릅니다.
우리 가톨릭교회에서는 고통스럽고 부당한 현실, 단박에 뒤집힐 것이라고 외치지 않습니다.
우리 눈앞에 신천지가 나타날 것이라고 사기 치지 않습니다.
지금 겪고 있는 이 끔찍한 병고 즉시 치유시켜 주겠노라고 과장하지 않습니다.
목돈을 갖고 오라고 협박하지 않습니다.
대신 우리 가톨릭교회는 고통스럽고 부당한 현실 앞에서도 너그러운 마음을 지니자고 초대합니다.
기도 속에 주님의 뜻을 찾아보자고 안내합니다.
호의적이지 않은 이 현실, 넓은 마음으로 받아들이자고 가르칩니다.
천천히 가자고, 인간의 때가 아니라 하느님의 때를 기다리자고 권고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눈먼 이를 치유하십니다.
그 과정이 참으로 놀랍습니다.
그를 군중 사이에서 따로 불러내십니다.
세상 다정하게 그의 손을 잡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십니다.
그리고 이런저런 접촉과 함께 그의 장애를 풀어주십니다.
그의 두 눈에 침을 바르시고, 손을 얹으십니다.
그의 머리 위에 손을 펼쳐 안수를 해주십니다.
“무엇이 보이느냐?” 등 자상하게 이것저것 물어봐 주십니다.
치유받은 사람 입장에서 묵상해보니 얼마나 은혜롭고 축복된 순간이었는지.
놀랍게도 주님께서 나를 선택하셨습니다.
굳이 그렇게 하지 않으셔도 될 일인데, 그분께서 내 손을 잡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가십니다.
가는 길에 이것 저것 물어봐 주십니다.
이름이 뭐냐? 어디 사는가?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는지? 그간 살아오느라 얼마나 힘들었는지?
예수님의 따뜻함과 자상함에 그의 눈에서는 쉼 없이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예수님과 손을 잡고 마을 밖으로 걸어가는 그 짧은 순간, 이미 그는 모든 것을 다 얻었습니다.
깨달았고, 치유 받았습니다.
구원받았고 영원한 생명을 얻었습니다.
육체의 치유는 사실 덤이었습니다.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되돌아가지 말고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1)
예수님께서 눈먼 이를 한 번에 고쳐 주시지 않고 단계적으로 고쳐 주신 것은, 우리의 신앙이 단계적으로 발전하는 것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하고, 눈먼 이를 고쳐 주신 다음에 하신 말씀, “저 마을로는 들어가지 마라.” 라는 말씀은, “과거의 삶으로 돌아가지 마라.”로 해석하는 것이 일반적인 해석입니다.
그 마을에 무슨 문제가 있었다고 속단할 수는 없습니다.
사람들이 눈먼 이에게 손을 대어 주십사고 청하였다는 말은, ‘안수’를 해 달라고(고쳐 달라고) 청했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어떤 병자나 장애자든지 간에 예수님께 손을 대기만 하면, 또는 예수님께서 손을 대기만 하시면, 다 낫게 된다는 소문을(마르 6,56) 들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눈먼 이를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신 것은, 사람들이 없는 곳으로 데리고 가신 것이고, 보는 사람들이 없는 곳에서 그를 고쳐 주신 것은, “병을 잘 고치는 의사”로만 소문이 퍼지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 여러 가지 동작으로 고쳐 주신 것은, 믿음이 없는 그에게 믿음을 심어 주기 위한 배려라고 해석됩니다.
“무엇이 보이느냐?” 라는 말씀은 ‘보는 일’은 그 자신이 스스로 해야 한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예수님께서는 눈을 고쳐 주시는 것까지만 해 주시고, 보는 것은 각자 스스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로 가는 길을 보여 주시고, 그 길로 인도해 주시지만, 그 길을 걸어가는 것은 우리가 스스로 해야 하는 일입니다.
2)
“저 마을로는 들어가지 마라.” 라는 말씀은 “과거의 삶으로 되돌아가지 마라.”, 즉 “이제부터는 새로운 인생을 살아라.”이고, “궁극적인 구원을 향해서 나아가라.”입니다.
그가 죄 속에서 살고 있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모르고 있었고, 모르고 있었으니까 안 믿고 있었고, 복음을 들을 기회도 없었을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여러분은 예수님 안에 있는 진리대로, 그분에 관하여 듣고 또 가르침을 받았을 줄 압니다.
곧 지난날의 생활 방식에 젖어 사람을 속이는 욕망으로 멸망해 가는 옛 인간을 벗어 버리고, 여러분의 영과 마음이 새로워져, 진리의 의로움과 거룩함 속에서 하느님의 모습에 따라 창조된 새 인간을 입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에페 4,21-24)
"여러분은 옛 인간을 그 행실과 함께 벗어버리고, 새 인간을 입은 사람입니다.
새 인간은 자기를 창조하신 분의 모상에 따라 끊임없이 새로워지면서 참지식에 이르게 됩니다."
(콜로 3,9ㄴ-10)
예수님을 만나서 ‘새 인생’을 살게 되는 일은 한 번에 끝나는 일이 아니라 날마다 노력해야 하는 일입니다.
세례를 받은 것으로 만족하고서 아무것도 안 하면, 고인 물이 썩는 것처럼 생명력을 잃게 될 것입니다.
앞으로 나아가지 않고 멈추어 서는 것은 사실상 뒤로 되돌아가는 것과 같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흔히 “걸레는 빨아도 걸레다.” 같은 말을 하지만, “예수님은 걸레를 깨끗이 빨아서 새 옷으로 만드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걸레’로 되돌아갈지, ‘새 옷’으로 살아갈지, 그것은 우리 각자가 스스로 선택하는 일입니다.
3)
복음서의 다른 이야기들에 “저 마을로는 들어가지 마라.”와 비슷한 말씀들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8장에 있는 이야기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몸을 일으키시고 그 여자에게, "여인아, 그자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단죄한 자가 아무도 없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 여자가 "선생님, 아무도 없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
(요한 8,10-11)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힌 여자를(요한 8,4) 예수님께서는 단죄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다시는 죄짓지 마라.” 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여자를 용서하시긴 했는데, 그 용서는 ‘무죄 선고’가 아니라 ‘집행유예 선고’입니다.
만일에 그 여자가 다시 죄를 짓는다면, 그때는 ‘가중 처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요한복음 5장에 있는 이야기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 뒤에 예수님께서 그 사람을 성전에서 만나시자 그에게 이르셨다.
"자, 너는 건강하게 되었다. 더 나쁜 일이 너에게 일어나지 않도록 다시는 죄를 짓지 마라."
그 사람은 물러가서 자기를 건강하게 만들어 주신 분은 예수님이시라고 유다인들에게 알렸다.
그리하여 유다인들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그러한 일을 하셨다고 하여, 그분을 박해하기 시작하였다.'
(요한 5,14-16)
벳자타 못 가의 병자’는 자기를 고쳐 주신 예수님께 감사를 드리기는커녕 박해자들에게 예수님을 신고했습니다.
그것은 받은 은혜를 저버린 ‘배은망덕’입니다.
구원을 향해 나아가기를 거부하고 과거의 삶으로 되돌아간 것입니다.
- 전주교구 상지원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개안(開眼)의 여정 - 무지(無知)에 대한 답은 개안뿐이다>
“내게 베푸신 모든 은혜,
무엇으로 주님께 갚으리오?
구원의 잔 받들고, 주님의 이름을 부르리라.”
(시편 116,17ㄱ)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벳사이다의 눈먼 이를 고치십니다.
상징하는 바, 참 깊고 오묘합니다.
점차 눈이 열려 좋아지는 시력은 그대로 개안의 여정을 상징합니다.
그동안 참 많이 강조했던 ‘마음의 병’이 무지였습니다.
마음을 눈멀게 하는 마음의 치명적 병이 바로 무지입니다.
바로 무지의 탐욕, 분노, 어리석음이 우리를 눈멀게 합니다.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게 합니다.
눈뜬 맹인들 얼마나 많습니까?
마음따라 보는 눈이요 마음따라 듣는 귀입니다.
마음의 눈, 심안이 날로 좋아져야 제대로 보고 제대로 들을 수 있습니다.
색맹, 문맹, 맹신, 맹목... 모두 눈멀 '맹'자가 들어갑니다.
분별이 불가능하니 얼마나 답답하겠는지요.
온갖 불행의 원인은 무지의 눈멈에 기인합니다.
오늘 옛 현자의 말씀은 배움의 여정과 함께 가는 지혜와 자유를 보여줍니다.
역시 개안의 여정에 끊이없는 배움이 좋은 도움이 됩니다.
“배움에도 용기가 필요하듯, 용기에도 배움이 필요하다.
무모한 용기를 앞세우는 사람은 주변 사람들을 어지럽힌다.”
<다산>
눈먼 무지의 무모한 사람들이 얼마나 세상을 어지럽히는지 작금의 현실이 증명합니다.
정말 편견, 맹신 등 무지에는 답이 없습니다.
이래서 날로 지혜로워지는 배움의 여정을, 진리탐구 여정의 삶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맨몸으로 범을 잡고 강을 건너려다 죽어도 후회 않는다는 자와는 함께 하지 않겠다.
신중하게 계획을 잘 세워 일을 이루는 사람과 함께 하겠다.”
<논어>
맹목의 사람과는 상종하지 않겠다는 현실주의적 현자 공자의 지혜로운 면모가 잘 드러나는 대목입니다.
사실 공부의 목적도 무지의 눈을 밝히는 개안에 있음을 봅니다.
회개와 깨달음의 여정 역시 날로 밝아지는 심안을 말해줍니다.
과연 날로 밝아지는 개안의 여정에 날로 좋아지는 영적 시력인지요?
육안은 어둬져도 심안은, 영안은 날로 밝아졌으면 좋겠습니다.
영적 성장에 도약이나 비약은 없습니다.
돈오돈수(頓悟頓修)라기보다는 돈오점수(頓悟漸修)입니다.
나무가 자라는 이치만 봐도 분명합니다.
점차적인 과정 중 성장이요 성숙이듯 개안의 영적 현실도 그러합니다.
초기 교회에서 예수님의 눈먼이에 대한 치유는 회개의 상징이었습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맹인이 예수님께 치유되어 점차적으로 눈이 열려 시력이 좋아지는 경우는 바로 세례 후 점차 좋아지는 개안의 여정을 상징합니다.
세례성사로 무지의 눈이 열린 후 평생 성사인 성체성사, 고백성사가 개안의 여정에 얼마나 결정적 도움이 되는지 깨닫습니다.
오늘 창세기 홍수가 그친후 노아의 이야기 역시 초기 교회에서는 세례의 상징이었습니다.
방주 안에서 물로부터 구원받은 노아는 즉시 지상의 표면을 걷지 않고 점차적인 일련의 과정을 겪은 후 때가 되자 물이 마른 후 비로소 지상에서의 삶을 시작합니다.
세례의 물로 구원받은 우리 역시 하느님이 만든 동터오는 새벽의 새날을 신뢰로서 걷는 데는 시간이 걸립니다.
평생 한결같이, 끊임없이, 개안의 여정에 항구하고 충실해야 함을 배웁니다.
살아 있는 그날까지, 죽는 그날까지 영원한 현역의 주님의 전사로 성공적 개안의 여정이 될 수 있도록 분투의 노력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창세기 후반부 노아의 봉헌 제사 시 봉헌의 향내를 맡으며 하신 주님의 다짐이 참 좋은 묵상감입니다.
“사람의 마음은 어려서부터 악한 뜻을 품기 마련
내가 다시는 사람 때문에 땅을 저주하지 않으리라.
이번에 한것처럼 다시는 어떤 생물도 파멸시키지 않으리라.
땅이 있는 한, 씨뿌리기와 거두기, 추위와 더위, 낮과 밤이 그치지 않으리라.”
얼마나 주님의 자비롭고 섬세한 배려의 사랑인지요!
주님은 인간의 내적 악의 현실을 이해하고 다시 한번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잘 살아보라고 선물처럼 주시는 삶의 기회들입니다.
자연 리듬, 계절의 자연스런 흐름처럼 무리하지 않고 순리대로 살면서 공동의 집인 지구를 잘 관리해야 할 막중한 책임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작금의 현실은 어떠한지요?
무분별한 탐욕으로 지구 자원의 오용과 남용으로 인해 섬세한 균형과 조화는 깨지고 기후위기 등 지구의 병도 날로 깊어져 가는 위중한 상황입니다.
개안의 여정에 필히 생태적 회개의 여정이 함께 가야 함을 봅니다.
지옥에는 한계가 없습니다.
무한한 탐욕에 따라 살 것이 아니라 개안의 여정과 더불어 자연 리듬, 자연의 흐름에 따라 순리의 지혜로운 삶을 살아야 함을 배웁니다.
많이 기도하고 많이 공부하고 많이 나누면서, 동시에 적게 쓰고 적게 먹고 적게 활동하면서 관상적 지혜의 내적 삶에 힘썼으면 좋겠습니다.
날마다 주님의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개안의 여정, 회개의 여정에 참 좋은 결정적 도움이 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저희 마음의 눈을 밝혀 주시어,
부르심을 받은 저희의 희망을 알게 하여 주소서.”
(에페 1,17-18)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욕망과 교만으로 닫혀있는 우리의 눈>
지난 설날에 반가운 메일을 받았습니다.
잠시 메일을 소개하고 싶습니다.
“찬미 예수님! 안녕하세요. 신부님.
육군 장교로서의 직업군인 생활을 정리하고 2018년 신학교에 입학한 게 엊그제 같은데 제가 다음 주 2025년 2월 6일 목요일 오후 2시, 명동성당에서 부제 서품을 받게 되었습니다.
제가 신학교에 입학하기 전 성소에 대한 고민을 지니고 있을 때, 성소국장 신부님께서 성소국 홈페이지에 올려주는 오늘의 묵상 말씀이 직업군인으로서의 군 복무 생활을 그리스도인으로서 기쁘게 생활하는 데 큰 도움이 되곤 하였습니다.
성소국 홈페이지에 상담 글을 남기면 답변도 주시며 휴가 내어 종종 성소국에 방문하면 차 한 잔 주시면서 상담해 주시던 국장 신부님, 그리고 예비신학교에서도 함께 용기에 불어 넣어 주시던 가브리엘 신부님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그때를 생각하면 제 인생에서 그리스도를 전해주심과 동시에 거룩한 부르심에 대한 내비게이션의 역할을 해주셨던 신부님께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이제 곧 부제 서품을 받게 되면 성직자가 되는데 더욱 기쁜 마음으로 직무에 충실하고, 사제직을 향해 더욱 기쁘게 나아가겠습니다.
신부님께서 지금 미국 댈러스 한인 성당에서 사목하시는 줄로 알고 있습니다.
먼 곳에서 늘 건강과 기쁨, 은총 가득해지시길 기도드리며 저도 더욱 기쁘게 정진하고 있겠습니다.
한국은 설날이네요!
2025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부족한 제가 젊은 군인에게는 ‘마른 땅’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랑으로 이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느님을 닮은 사람을 창조하셔서 이 세상을 다스리게 하셨습니다.
컴퓨터에 바이러스가 들어오면 작동이 잘되지 않듯이 하느님을 닮은 사람에게도 ‘사탄’이라는 바이러스가 들어왔습니다.
그 바이러스는 하느님을 닮은 사람의 마음을 병들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하느님의 뜻을 저버리고, 전쟁과 폭력으로 하느님이 창조한 세상을 파괴하고, 타락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물의 심판’으로 병든 세상을, 타락한 세상을 다시 회복시키려 하셨습니다.
노아에게 방주를 만들도록 하셨고, 물의 심판이 끝난 후에 하느님께서는 노아에게 새로운 세상을 맡겨 주셨습니다.
40일 동안 방주에 있던 노아는 넓은 세상이 그리웠습니다.
40일이 지난 후에 노아는 방주의 뚜껑을 열고 까마귀를 날려 보냈습니다.
까마귀는 물밖에 없는 곳을 한참이나 날다가 돌아왔습니다.
노아는 이번에는 비둘기를 날려 보냈습니다.
비둘기는 올리브 잎을 하나 가지고 왔습니다.
노아는 이제 물이 빠지고 땅이 조금씩 드러난 것을 알았습니다.
노아는 다시 비둘기를 날려 보냈고, 비둘기는 이제 마른 땅에 머물며 배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비둘기에게 마른 땅은 새로운 삶의 보금자리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심판하는 방법을 포기하셨습니다.
인간의 자유의지를 박탈하지도 않으셨습니다.
대신에 하느님께서는 새로운 방법을 찾으셨습니다.
그것은 외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시는 것입니다.
외아들은 하느님 나라에 대한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의로움과 하느님의 거룩함과 하느님의 뜻이 드러나는 세상을 말씀하셨습니다.
전쟁, 폭력, 정복으로 이루어지는 평화가 아닌 나눔, 희생, 사랑으로 이루어지는 참된 평화를 말씀하셨습니다.
성공, 명예, 권력으로 이루어지는 행복이 아닌 자비, 인내, 희생으로 이루어지는 행복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이미 하느님의 나라를 체험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밀과 가라지’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인간의 죄와 인간의 잘못 때문에 세상을 심판하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가라지를 뽑으려다가 밀을 뽑을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밀과 가라지는 품종이 다른 것이 아닙니다.
지금은 가라지의 모습일지라도 뉘우치고 회개하면 밀이 될 수 있습니다.
지금은 밀의 모습일지라도 악의 유혹에 빠지면 가라지가 될 수 있습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옹기장이와 진흙’의 비유를 이야기합니다.
옹기장이 손에 있는 진흙은 무엇이 될지 모릅니다.
다만 옹기장이의 뜻에 따라서 화병도 되고, 그릇도 됩니다.
다만 중요한 것은 화병이든, 그릇이든 쓰임새에 맞게 사용되면 됩니다.
주어진 나의 삶에 감사한다면 자비하신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새로운 세상을 보여 주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소경의 눈을 뜨게 해 주셨고, 소경은 이제 새로운 세상을 보았습니다.
욕망과 교만으로 닫혀있는 우리의 눈을 순명과 겸손으로 새롭게 뜰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은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네.”
- 미국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성장형 마인드셋>
중국 고전 서적인 이담속찬(耳談續纂)에 등장하는 유명한 고사성어가 있습니다.
삼세시습 지우팔십(三歲之習至于八十),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말입니다.
지금이야 기대 수명이 80을 훨씬 넘었지만, 그 옛날에 80까지 산다는 것은 거의 ‘세상에 이런 일이’라는 프로에 나올 정도였을 것입니다.
그만큼 사람은 바뀌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 바뀌지 않을까요?
뇌과학자의 말에 의하면, 우리 뇌는 새로운 습관을 형성하고 새로운 기술을 배우며 심지어 우리의 사고방식을 바꿀 준비가 되어 있다고 합니다.
얼마든지 바꿀 수 있는데, 스스로 할 수 없다는 단정을 지으면서 바뀌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미국 심리학자 캐럴 드웩은 마음을 고착형 마인드셋과 성장형 마인드셋으로 구분합니다.
그는 어느 정도의 지능, 성격, 윤리관을 가진 사람이라면 원하는 바를 충분히 이룰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렇다면 어떤 마음, 어떤 마인드셋을 가져야 할까요?
답을 구하기 힘든 어려운 문제에 고착형 마인드셋을 가진 사람은 ‘역시 나는 이런 문제를 풀 수 있을 만큼 머리가 좋지 않아.’라는 마음을 갖고, 성장형 마인드셋을 가진 사람은 ‘아직 문제를 풀지 못했네.’라고 말합니다.
당연히 성장형 마인드셋을 가져야 합니다.
‘아직’의 힘을 믿어야 합니다.
충분히 변화될 수 있으며, 할 수 있는 것이 너무 많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일을 너무 쉽게 할 수 있을까요?
그러나 ‘아직’이라는 마음을 가지고 계속 노력한다면 나를 통해 하느님의 일이 완성된다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벳사이다에서 눈먼 이를 고쳐 달라는 청을 받습니다.
그런데 두 번에 걸쳐서 낫게 하십니다.
먼저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신 다음, 그의 두 눈에 침을 바르시고 그에게 손을 얹으신 다음, “무엇이 보이느냐?”라고 물으십니다.
그는 “사람들이 보입니다. 그런데 걸어 다니는 나무처럼 보입니다.”라고 대답하는 것을 볼 때, 완전하게 회복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주님께서는 다시 그의 두 눈에 손을 얹으십니다.
그러자 똑똑히 보게 됩니다.
우리 신앙인 역시 이와 같지 않을까요?
처음부터 주님의 뜻을 선명하게 아는 사람이 있을까요?
그냥 어렴풋이 짐작할 뿐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손길에 계속 맡기면서 선명하게 주님의 뜻을 바라볼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성장형 마인드셋의 모습입니다.
‘아직’은 부족하고 나약한 우리이지만, 분명히 계속해서 주님 뜻에 다가서면서 주님과 일치할 수 있고, 그 안에서 하느님의 일이 완성됨을 보게 될 것입니다.
주님의 뜻을 뚜렷이 볼 수 있도록 계속해서 성장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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