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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2 장-1 / 말썽꾼 2. ]
하남성의 북녘에 위치한 지난 북위의 도읍.
백오십여 년에 거쳐 영화를 꽃피웠다가 동위의 천도로서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다소 빛을 잃은 듯이도 보이는 고도(古都)낙양(洛陽).
그러나 지난날의 영화를 대변해 주듯 도처에는 일천삼백여의 사찰과 하늘을 찌를 듯한 성곽, 궁실, 탑, 묘당들이 화려하게 들어서 있었고, 온갖 중원문물과 교역의 교차점으로서 그 발전상이 결코 어느 지역에도 못지않을 만큼 융성한 곳이다.
특히 금기서화(琴棋書畵), 창검기진(槍劍奇陣) 등 문무(文武)는 중원에서도 가장 크게 발전해 있어 역대로부터 수많은 기인재사와 명장들이 쏟아져 나오는 곳이기도 했다.
*
적산서원(積山書院).
낙양의 북문 곁에 위치한, 천여 평이 넘는 학사(學舍)와 수 만평의 대지를 지닌 낙양에서도 손꼽히는 명망을 지닌 학당이었다.
엄하기로는 수도원에 버금갈뿐더러 조정의 한림학사들마저 때마다 수양을 하러 온다고 전해지는 곳.
선생은 명 황실의 이품문관을 지낸 바 있는 적산(積山) 구문용(鉤汶用)이란 인물로서 학문이 천문지리를 헤아린다고 일컬어지는 인물이었다.
한데 근자 수년 사이, 그로 하여금 내내 이맛살을 찌푸리게 하는 일이 하나 있었는데...!
*
미시(未時) 말경이었다.
맴맴...!
타는 듯한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칠월의 날씨 속, 적산서원은 언제나 같이 학사들의 글을 읽는 낭랑한 음성과 매미의 울음소리 속에 파묻혀 있었다.
학당 안에는 흑의문삼(黑衣文衫)에 단정히 문건(文件)을 쓴 이백여 학사들이 열 지워 앉은 채 글 읽기에 열중했고, 칠순 의 적산선생은 언제나처럼 학사들의 맞은 편 자리, 상단에 앉아 이러한 모습들을 살피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러나 그의 미간은 벌레를 씹은 듯 내천(川)자를 그리고 있었으며 시선은 줄곧 이백여 학사들의 가장 앞 열, 중심부의 한 자리에 고정되어 있었다.
이곳의 학사들은 여하한 배정된 자리에 서탁(書卓)을 놓고 수업을 하는 것을 기본으로 하되, 만부득이 한 경우가 아니면 절대 수업 중에 자리를 비울 수 없도록 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었음에도... 적산선생의 눈길이 고정된 자리는 텅 빈 채로 주인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요노옴...! 감히 또 땡땡이를 까?’
기어코 적산선생의 백미가 크게 한 번 꿈틀거리는가 싶더니 손이 탁! 서탁을 두드렸다.
“쉬거라!”
학당 안은 삽시간에 찬물을 끼얹은 듯 고요해 졌고 계속해서 적산선생의 입에서 노기에 찬 음성이 흘러나왔다.
“훤백(暄白)은 어디 갔느냐?”
순간이었다.
‘이학사(李學士)...?’
학사들의 얼굴에 일제히 크게 흠칫하는 기색이 스쳐갔다.
그러한 학사들을 내려누르듯 지그시 둘러보며 적산선생은 노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점심나절에 자릴 비운 녀석이 어딜 갔기에 내내 보이질 않느냔 말이다! 아는 사람 손들어!”
그러나 손을 드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웅성거림을 발하며 서로의 눈치를 살필 뿐.
탁-!
적산선생의 손이 한 번 더 거칠게 서탁을 두드리나 싶더니 기어코 입에서 불호령을 쏟아냈다.
“당장 찾아와!”
*
같은 시각 적산서원의 안쪽.
“드르릉...!”
서편에 위치한 야트막한 언덕의 느티나무 밑에 언제부터인가 한 소년이 책을 펼쳐 얼굴을 덮고 큰 대(大)자로 자빠져 코까지 골아가며 낮잠에 빠져 있었다.
육척의 후리후리한 키에 다소 마른 듯한 체구를 지닌 소년으로 입고 있는 문삼과 얼굴을 가린 문건을 봐서 그 역시 적산서원의 학사임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어처구니없는 노릇!
기실 적산서원은 조정의 한림학사들까지 수양을 쌓으러 올만치 규율이 엄격한 곳으로 오로지 학문을 닦는 것만으로 이름 높은 곳이 아니던가?
더욱이 소년이 얼굴을 덮고 있는 책의 표지에는 손오병사(孫吳兵史)라는 제목이 선명히 적혀 있었으니, 일반적 학문과는 거리가 먼 병법서였다.
분명히 농땡이꾼이 분명한 것이었다.
적산서원의 제자이면서도 수업시간에 빠져나와 가르침과는 다른 책을 읽다가 잠이 들었다고 봐야하는 것...!
이때였다.
“훤백~!”
자자한 매미소리를 뚫고 돌연 사방에서 왁자지껄한 외침성이 울려왔다.
그러나 얼마나 깊이 잠에 빠져 있는 것인지 소년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한 무리의 학사들이 당황해 느티나무 아래로 몰려온 것은 약 이각여 정도 후,
“얼씨구?”
“또 여기 있었군?”
“훤백! 어서 일어나!”
학사들은 급히 잠든 소년을 흔들어 깨웠다.
“응... 뭔데...?”
얼굴을 덮었던 책이 흘러내리고, 비로소 잠들었던 그는 부스스 눈을 떴다.
더불어 약관(弱冠)도 채 안 되어 보이는 그의 모습이 드러났는데...!
십팔 세쯤일까?
적당히 햇빛에 그을린 피부에 서글서글한 눈을 가진, 크게 호감이 가는 용모를 지닌 소년이었다.
특징으로는 눈에서 뿜어 나오는 유난히 밝은 정광을 들 수가 있었는데, 그것은 보는 이로 하여금 별스러울 만큼 대담해 보이는 느낌을 주었다.
하지만 인상이야 어쨌거나, 학사들은 곱지 않은 눈초리로 그를 보며 마구 볼멘소리를 해댔다.
“너 정말 이러기야? 덕분에 또 학당이 뒤집혀졌잖아. 담탱이가 발광중이셔!”
담탱이...!
“아~”
그럼에도 소년은 서두르지 않았다.
학사들이 뭐라고 하건 자신과는 크게 상관이 없다는 듯한 모습으로 느릿느릿 상체를 일으켰을 따름이었다.
“그만 잠이 들어버렸군?”
학사... 이훤백(李暄白)!
미루어 이 소년이 바로 적산선생이 찾아오라고 불호령을 내린 장본인임을 알 수 있었다.
*
한편.
“어떻게 되었더냐! 아직도 찾지 못했단 소리냐!”
학당의 툇마루 앞에는 적산선생이 여전히 격노한 표정으로 호통을 치고 있었다.
앞에는 먼저 돌아온 듯한 학사들이 모여 어쩔 줄 몰라 하는 기색으로 싹싹 손을 부비고 있었고, 그러한 학사들을 보며 적산선생은 내리 울화를 터뜨렸다.
“어이가 없어도 유만부득이지, 가을 향시(鄕試)가 목전으로 다가왔는데 남보다 백배는 더 학업에 열중해야 할 녀석이 틈만 나면 쥐새끼같이 사라지니! 이래서야 다른 것은 고사하고라도 학당의 기풍이 안서지 않느냔 말이야!”
선생으로서는 당연한 노화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해할 수 없는 일은...!
세상이 다 그런 것이지만 당연히 많은 학사들이 모이다 보면 어딜 가나 그 중에는 이런 농땡이꾼이 한둘 정도는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하나 때문에 무려 이백여 제자들마저 수업을 중지 시키고 찾아오라 한 적산선생의 속심은 더욱 묘한 것이었는데...!
하나 이런 의문 따위야 아랑곳없이 적산선생은 계속 호통을 터뜨렸다.
“결코 있어서는 안 될 일이다! 참는 것도 한계가 있는 것인즉 학당의 기풍을 위해서
라도 오기만 하면 이 쥐새끼 같은 녀석을 당장...!”
그러나 이때 노기로 가득 찼던 그의 호통이 일순 딱 멈춰졌다.
“스승님!”
“오, 저기...!”
동시에 어쩔 줄 몰라하던 학사들의 얼굴에 밝은 빛이 떠오르고 시선이 일제히 뜰 맞은편으로 쏠려졌다.
이훤백!
나무 아래서 늘어지게 낮잠을 자던 그가 마침내 학사들과 함께 걸어오고 있었던 것이다.
한데 여기에서 또 한 번 알 수 없는 노릇은 바로 적산선생의 태도!
‘왔다...!’
나타나면 당장이라도 벼락을 칠듯했던 선생의 표정이 언제 그랬냐는 듯 싹 누그러져 버린 것이다.
그러한 선생 앞으로 다가온 훤백은 일단 시원시원하게 손을 모아 포권부터 보였다.
“사부님!”
“으흠, 흠...!"
적산선생은 주먹을 입에 댄 채 먼저 헛기침부터 두어 번 토해냈다.
“어디에 갔었더냐?”
훤백은 계속 포권을 한 채 큰 소리로 대답했다.
“뒷언덕 위에서 그만 잠이 들어버렸습니다!”
"끄흠...!”
적산선생은 한 번 더 헛기침을 토해냈다.
더불어 그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이 또한 걸작이었는데...!
“하긴, 뭐...! 워낙 날씨가 덥다보니... 그럴 수도 있긴 해...!”
‘그럴 수가... 있기도 하다고?’
순간, 둘러선 학사들은 일제히 홱 썩은 표정이 되었다.
하지만 적산선생은 아랑곳 하지 않았고, 너무 점잖게 입을 열었다.
“어쨌건 깼다면 됐느니, 수고 했느니라~ 씻고 오너라.”
수고는 왠 얼어 죽을 수고?
“예.”
훤백은 한 번 더 읍을 해보인 다음 성큼성큼 건물 뒤켠에 위치한 우물가로 걸음을 옮겼다.
‘대체 뭐야, 이게…?’
당연히 여타의 학사들이야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닐 수 없었다.
불호령을 치며 찾아오면 금시라도 퇴출령을 내릴 듯 했던 적산선생의 태도가 이렇게 바뀌고 보니 눈치가 곱지 않을 것은 당연하지 않는가!
설상가상, 적산선생은 훤백의 모습이 사라지자 오히려 학사들을 향해 벌컥 호통을 질렀다.
“너희 바보들은 뭐 해! 볼 일 끝났으면 냉큼 들어 가 수업을 계속 해야지! 어느 호떡집에 불난 일 있어!?”
‘씽...!’
어처구니없는 일에 학사들은 하나같이 퉁퉁 볼이 부었다.
하지만 당장 불만을 토할 수도 없어 그저 짜증 섞인 표정으로 다시 학당 안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는데...!
그렇다고 아예 말이 없을 수는 없다.
일단 적산선생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자 저마다 투덜거림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씨불... 대체 이거 뭐야? 땡땡이는 노상 그 놈이 치고 욕은 우리가 먹고! 솔직히 이거 말이 돼?”
“더 웃기는 것은 담탱 늙은이야! 사라지면 노상 잡아먹을 듯 화를 내다가도 막상 찾아오면 언제 그랬냐는 듯... 이럴 바에야 처음부터 찾지를 말던지! 대체 이유가 뭐야?”
학사들 중 다른 하나가 잔뜩 인상을 우그러뜨리며 불평을 토해냈다.
“뻔하잖아! 자식이 낙양거상(洛陽巨商) 이세명(李世明)의 아들이거든. 이세명이 엄청 바지바람을 일으켜 학당살림을 팍팍 도맡아 지원해 주고 있으니 지존처럼 모시는 거지, 뭘!”
낙양거상의 아들!
“아~ 촌지 좋다!”
학사들의 불만은 더욱 고조되었다.
“어쨌건 더는 참을 수 없어! 무슨 일이 있더라도 이번엔 단단히 버릇을 고치자구!”
필시 무슨 일이 벌어지고 말 듯한 상황인 것이었다.
*
아니나 다를까!
두 시진 후인 유시 초경.
학당이 하학(下學)을 하자 훤백이라 불리워진 소년은 즉시 다혈질의 학사들 십여 명에게 둘러싸였다.
“너! 전에도 분명히 경고를 했었지? 하구한날 너 때문에 학당이 뒤집혀지니 이런 일 없도록 하라고! 우리들 말이 말 같지 않던가?”
다분히 위협적인 음성이었으나 한들 훤백은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한 태도로 그들을 둘러보았다.
“미안한건 알지만 자꾸 잠이 와서 말이야. 어쨌건 고의는 아냐.”
둘러싼 학사 중 특히 성급해 보이는 학사 하나가 눈을 부라리며 썩 앞으로 나섰다.
“그러니까 넌 잘못이 없는데 잠이 문제다?”
그러나 훤백의 태도는 여전히 태연했다.
“그렇진 않지만 제멋대로 오는 잠을 어쩌겠어. 미안하다 사과했잖아.”
“짜샤! 그럼 잠한테 이젠 보고하고 오라고 해!”
순간 학사의 주먹이 휙- 허공을 갈랐다.
동시에 그의 눈에 퍽- 불이 튀었다.
*
낙양의 서문(西門) 후미에 위치한 관서표국(關西驃局).
본시 이곳은 하남성의 유수한 표국 중에서도 가장 명망 높은 표국 중 하나였다.
누구나 알고 있듯 표국이란 대개가 지방 상인들의 물건을 도처로 호송해 주거나 개인의 안전을 위해 호위업무 등을 맡아 하는 곳!
따라서 이들의 흥망이란 얼마나 맡은 일을 신속, 정확히 행해 내느냐에 달린 것이며, 실패의 빈도가 높을수록 신용이 떨어져 문을 닫을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또한 이들의 발은 대단히 넓어 중원도처의 정사양도는 물론 녹림적당들과도 적당한 친분을 유지해야 했으니, 어찌 보면 무림인 중에 가장 인맥이 넓은 곳이 표국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렇게 보면 이곳 관서표국의 국주(局主) 칠해신풍(七海信風) 곽화담(郭華潭)은 단연 마당발을 자랑하는 인물!
무당의 속가제자로 널리 알려져 있는 그는 보다 무당의 무공을 응용해 스스로 창안해낸 십팔 수 선풍검법(旋風劍法)의 고수로 더 알려져 있을 뿐만 아니라 흑백양도 전체에 인맥을 지녀 그야말로 팍팍 잘나가는 인물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었던 것인데...!
*
한데 이러한 관서표국 앞에 휘적휘적 훤백이 나타난 것은 동료들과 시비가 있은지 약 반 시진 가량이 지난 후!
한 바탕 주먹다짐까지 일어난 마당이었지만 머리카락 한 올 흐트러짐 없이 너무나 멀쩡한 모습이었다.
흡사 언제 무슨 일이나 있었느냐는 듯한 것!
묘했다.
하지만 그의 모습은 분명 처음과 다름이 없었고, 유유자적 걸음을 옮겨 계속 하늘을 찌를 듯한 담장을 낀 관서표국의 우측 샛길로 들어섰다.
명망에 걸맞을 만치 관서표국의 규모는 대단한 것이어서 둘레는 담장만 해도 무려 오리(五里).
샛길로 얼마간 더 가자 뒤편 후원 쪽의 담장 주변은 가옥이 없었을 뿐더러, 성 안쪽 부소산(孚小山)의 한 자락을 껴 길까지 끊겨져 있었는...!
하지만 훤백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성큼성큼 담 주변을 따라 계속 기슭으로 올라갔다.
앞에는 빽빽한 소나무 숲이 나타났으며, 다시 일다경 정도를 더 걷자 저만치 끼고 걷던 표국의 뒷 담장 너머로부터 돌연 하앗, 하앗- 뱃속까지 찌르르하게 울려 퍼지는 날카로운 기합성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필경 관서표국의 연무장으로 표사들이 하오(下午) 수련을 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이런 인적도 없는 곳에...! 더욱이 무림인들이 무리지어 수련하는 연무장 주위라면 일반 사람은 겁을 먹어 접근할 리조차 없다.
하지만 훤백은 이러한 기합성에 익숙해져 있기라도 한듯 계속 태연자약하게 담장 쪽으로 다가갔고, 그러자 일순 눈앞에 기묘한 정경이 나타났다.
그가 도착한 숲에 가려진 관서표국의 높은 담 한 모퉁이. 기묘하게도 거기에는 흙과 돌무더기가 거반이나 쌓여, 누구나 올라서면 담장 안을 들여다 볼 수 있을 법한 그런 장소가 나타난 것이었다.
얼핏 보기에는 산사태 등으로 떠밀려온 흙더미 같기도 했지만 우연이라 보기에는 실로 괴이한 형태였다.
기실 대부분의 무림인들이 이렇듯 높은 담장을 쌓아올렸을 때는 당연히 외부인들이 함부로 안을 들여다 볼 수 없게 하기 위함이 분명한 것이고, 또한 이를 방지하기 위해 수시로 순찰까지 도는 판국에 이런 은밀한 곳에 흙무더기란 것은 너무도 공교롭지 않은가?
그럼에도 이곳에는 확실히 그런 흙무더기가 있었고, 더욱 기이한 것은 바로 훤백의 다음 행동이었다.
도착하자 그는 서슴없이 흙무더기를 밟고 담장 쪽으로 올라선 것이었다. 그리고 쌓인 흙무더기의 위까지 올라가 담장 안을 살폈다.
“흐압- 하앗-!”
예상한대로 그곳은 약 육백여 평에 가까운 관서표국의 연무장으로 백여 명의 표사들이 목검을 든 채 찌르기, 치기, 휘두르기 등 다양이 수식을 펼치며 열 맞춰 수련에 열중하고 있는 광경이 보였다.
한데 특이한 정경은 표사들을 지도하는 것으로 보이는 사범의 모습.
어느 방파이거나 지도사범이라면 일반적으로 무공이 높고 노련한 고수(高手)로서 지긋한 나이를 가진 인물이 대부분이기 마련인 것이다.
하지만 이곳의 교단(敎壇)에서 표사들에게 무공을 지도하고 있는 사람은 이제 고작 스물서너 살이나 되어 보일까 싶은 묘령의 한 백의처녀가 아닌가!
그것도 후리후리한 키와 보기 좋게 부풀어 오른 가슴, 개미처럼 잘숙한 허리에 갸름한 계란형의 분결같은 얼굴을 지닌 극히 빼어난 미모를 지닌!
특히 살구씨 같은 눈과 깔끔하고 곧게 뻗은 콧날, 앵두 같은 입술은 보기만 해도 뭇 사내들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할 정도였다.
옥의 티라면 눈에서 발출되는 빛이 타는 듯 강열하여 남에게 지기 아주 싫어하는 호승심과 함께 어딘지 모르게 야릇한 색기(色氣)가 보인다는 점이었다.
더욱이 옷차림새가 더 대담했다.
놀랍게도 백의처녀는 아예 상의를 벗은 상태로 표사들을 지도하고 있었으니, 착 달라붙는 붉은 속옷 차림에 하얀 어깨를 온통 드러내 놓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리 남녀의 격식을 그다지 따지지 않는 무림인이라고 해도 역시 이건 좀 심하다 싶은 모습이지 않는가?
더욱이 앞에 줄 지어 지도를 받고 있는 것이 모두 우락부락한 사내들인 터...!
그럼에도 백의처녀는 조금도 부끄러움이 없는 기색으로 매섭게 표사들을 향해 호령하고 있었다.
“수련에서 흘리는 땀 한 방울은 곧 실전에서 흘릴 피 한 방울과 같다! 땀을 많이 흘릴수록 피는 적게 흘리는 법이니 다음은 취선난보(醉仙亂步)를 시범보이겠다! 적의 눈을 현혹시키면서 치명적인 살수를 전개하는 신법의 하나다!”
백의처녀는 계속 성큼 교단에서 내려 서 홋! 날카로운 기합을 발하며 일단 다리를 어깨넓이로 벌려 중심을 잡았다.
뒤따라 힘있게 목검을 휘두르며 기기묘묘하게 몸을 앞으로, 뒤로, 좌로, 우로 움직이기 시작했는데...!
“좌삼(左三), 우이(右二), 전사(前四), 후륙(後六)! 회전, 다시 처음부터 하나, 둘!”
삽시간에 그녀의 주위에는 훙- 훙- 바람소리와 여러 개의 환영이 어른대기 시작했고, 움직임도 점차적으로 빨라져 폭이 주위 삼 사장까지 뻗어졌다.
더불어 동작이 여기에 이르자 백의녀는 기쾌하게 목검을 휘저으며 절묘하기 그지없는 검식(劍式)까지 전개하기 시작했으니...!
“변환식이다! 취선난보는 어떤 검식이라도 어울릴 수 있지만 특히 무당검의 소천성에는 안성맞춤인 셈이지. 조석기신(朝夕起身), 낙지매화(落地梅花)!”
그러자 지금까지는 다만 눈에 보일만큼의 속도로 보법 시범을 보여주던 그녀의 움직임이 크게 돌변했다.
모습이 순간 한 줄기 연기로 변한 듯 모두의 눈앞에서 꺼져 버리는가 싶더니, 그녀가 선 교단의 주위가 한 순간 쉭-쉭- 파공성과 함께 온통 수백 수천의 검영(劍影)과 번뜩이는 그림자로 뒤덮여 버린 것이었다.
분명 백의처녀가 본신의 무공을 전개하고 있는 게 확실했다. 그러나 속도가 너무 빨라 보는 이들로서는 그녀가 어떤 자세로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 구분조차 못할 지경이었는데...!
“와아!”
순간 백여 표사들의 입에서는 일제히 감탄사가 터져 나왔고, 동시에 흠칫! 담장 너머로 훔쳐보고 있던 훤백의 눈에도 일순 놀라움의 빛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의 눈에 떠오른 놀라움이란 표사들의 감탄과는 분명히 또 다른 것이었다.
표사들의 것은 백의처녀가 전개하는 놀라운 술수에 대한 찬탄에 가까운 것이었지만 훤백의 놀라움은 좀 더 내용이 다른, 흡사 오랜만에 좋은 무엇을 본다는 듯한 그런 것이었다.
‘소천성! 확실히 후삼식이다!’
바씩 긴장하여 눈 하나 깜박하지 않고 백의처녀를 주시했다.
이는 필시 그가 오래전부터 이곳 연무장의 수련을 훔쳐봐 왔다는 뜻과 일치하는 것!
하나 이러한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백의처녀의 움직임은 점차 빨라져 이젠 형체조차 구분되지 않는 속에 오직 외침만이 들리고 있었다.
“개창망외(開窓望外)! 추야류영(秋夜流塋)! 잠룡출해(潛龍出海)! 창응하산(蒼鷹下山)! 공작사시(孔雀斜翅)!”
윙- 윙-!
실로 놀랍기 그지없는 재간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시범은 결코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위력적으로 한 순간 주위 사오 장을 완전히 검영으로 덮어 버렸던 그녀의 움직임은 삽시간에 끝이 났고, 표사들의 감탄성이 한창 울려 퍼질 즈음에는 어느새 본래의 위치로 돌아가 쨍쨍한 음성으로 표사들에게 다시 설교를 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취선난보의 매서운 점이다! 같이 펼친 검식은 무당의 비기중 하나지만, 아무리 뛰어난 검식이라도 보법의 지원을 받지 못하면 위력을 발휘할 수 없는 것이지! 이런 점에서 보법이란 실로 중요한 것이니 반복 수련으로 취선난보를 자신의 것으로 익히기 바란다!”
“명(命)!”
표사들은 일제히 포권지례를 취하며 허리 숙여 그녀에게 감사의 뜻을 표했는데...!
이때였다.
우연의 일치였을까?
문득 백의처녀의 눈길이 그들의 어깨를 지나 훤백이 몸을 숨긴 담장 쪽으로 향해졌다.
찰나 그녀의 눈길을 의식한 훤백이 흠칫, 급히 몸을 숙인 것은 불문가지!
걸렸다간 뼈도 못 추릴 것이었다.
“쥐새끼!”
“훕...!”
그러나 훤백에게 있어 더욱 심장이 철렁 떨어질 만한 일은 바로 그 직후에 벌어졌다.
백의녀의 눈길을 피해 급히 담장 뒤로 몸을 숙이는 훤백의 귓가에 느닷없이 벼락호통이 터지며 번개같이 하나의 손이 그의 뒷덜미를 콱! 움켜잡은 것!
“뭐야!?”
대경실색한 훤백은 찰나 고개를 돌려 상대를 확인하고자 했는데, 보다 빠르게 인영은 훤백의 몸을 번쩍 들어 사정없이 연무장 한 가운데로 집어던졌는데...!
“너는 무림인으로서 실로 범하지 말아야할 금기를 범했다! 남의 무공수련을 훔쳐보면 눈알을 빼고, 훔쳐 배우면 사지의 맥을 자른다는 것을 모르는가!”
거의 불가항력이라 할 정도로 무서운 힘!
쾅-!
“어이쿠...!”
훤백의 몸은 허공을 날아 거칠게 연무장의 복판에 내동댕이쳐졌다.
“헛...!”
“누구냐!?”
순간 연무장에서도 대뜸 적잖은 소란이 벌어졌다.
누군가가 자신들의 수련을 훔쳐보고 있다는 것을 꿈에도 상상치 못했던 표사들이었다.
이에 지도하던 백의녀까지 놀라움을 금치 못하는 표정으로 내팽개쳐진 훤백과 담장 쪽을 번갈아 주시했는데...!
“흐흥, 딴에는 열심히 한다고 하는가 보지만 헛 수련을 하는군! 지척지간에서 무공을 훔치는 쥐새끼 하나 간파하지 못해서야...!”
더불어 담장 너머로부터 한 번 더 우렁우렁한 음성이 울림과 함께 하나의 거대한 인영이 독수리처럼 쫙! 치솟아 중인들의 앞에 내려섰다.
“아...!”
“소협은...!”
표사들과 백의녀의 입에서 한 번 더 놀라움의 경탄성이 터졌고, 장내에는 곧 다시 안정된 기운이 돌아왔다.
나타난 인물은 서른 살 가량의 나이로 상상을 불허할 만치 위맹한 웅자를 지닌 이십 후반의 한 금의청년이었다.
무려 팔 척이 넘어 보이는 장대한 키와 탁탑천왕 같이 떡 벌어진 넓은 어깨!
특히 네모꼴의 각진 구릿빛 얼굴에 불덩이 같은 신광이 일렁거리는 눈은 범인들로서 마주 보기 조차 어려울 정도의 기백을 보이고 있어, 이쯤 되면 삼척동자라도 예사롭지 않은 인물임을 알아볼 수 있을 정도!
설상가상 허리춤에는 일반 무림인에 비해 두 자나 더 길어 보이는 대장검(大長劍)을 두르고 있어 보기만 해도 오금이 저릴 정도의 위압감이 풍겨졌다.
이러한 모습으로 그는 연무장 가운데에 뒹구는 훤백과 주위의 표사들을 쓰윽, 훑어 본 뒤 성큼성큼 서슴없이 백의처녀에게 다가섰다.
“오랜만이로군 나영(那塋).”
필경 관서표국의 사람들과는 잘 아는 듯한 눈치.
백의처녀 역시 가벼운 웃음과 함께 두어 번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요란하게도 나타나는군. 사람 놀라게 하는 게 유행이야?”
청년은 핫! 하고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요란하게 나타나지 않으면! 한데 꼴이 그게 뭐야? 속옷 자랑이라도 하고 있었던 건가?”
백의처녀의 입가에 계속 야릇한 웃음이 번졌다.
싫지 않은 표정이었다.
“더워서 벗은 거지! 아무렴 어때? 비치지도 않는데.”
청년은 다시 고개를 훤백에게 돌렸다.
“두 번만 더웠다가는 알몸으로 지내겠군. 어쨌건 쥐새끼를 잡았어. 저 놈, 무공을 훔쳐 배우는가 보던데?”
그러나 백의녀의 반응은 실로 뜻밖의 것이었다.
그녀는 청년의 말에 조금도 놀라울 게 없다는 듯 피식, 웃음을 떠올렸다.
“뭘, 그냥 호기심에 훔쳐본 것이겠지. 어차피 무공과 무관한 사람이니까.”
마치 훤백을 알기나 한다는 듯한 태도.
순간 청년의 눈에 기묘한 빛이 떠올랐다.
“아는... 녀석인가?”
백의처녀는 교단 옆에 벗어두었던 상의를 찾아 걸치며 휙,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냥 차림새를 봐서. 저건 적산서원 학사(學士)들의 옷이야. 적산서원에 대해서는 들어봤지?”
청년은 야릇한 표정을 짓더니 곧 우습다는 듯 대소를 터뜨렸다.
“헛헛... 주제에 학사라...!”
솥뚜껑 같은 손으로 덥석 훤백의 멱살을 움켜잡아 일으켜 세웠다.
“한데 책벌레가 남의 집 담장은 왜 기웃대? 무공과 관련이 없다면 야한 속옷이라도 훔쳐보려 한건가?”
“아아...!”
하지만 첫 인상에서 대담성이 느껴졌듯 훤백의 표정에는 이상할 정도로 겁을 찾아볼 수 없었다.
이는 마치 하학 후 동료들에게 둘러싸였을 때와 같은 모습이었다.
큰 소리로 말했다.
“누군가 했더니 서문한랑(西門閑郞)이구먼?”
“뭐...?”
흠칫! 오히려 놀라움의 빛을 보인 것은 청의청년이었다.
“나를 알고 있었나?”
훤백은 계속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암! 서문세가(西門勢家)의 후계자이자 하남(河南) 최대의 무재(武才)이지. 뼈 부러지는 줄 알았네! 난 이훤백이야.”
“이훤백...?”
서문한랑의 얼굴에 일순 어리둥절한 빛이 떠오르는가 싶더니 어이없다는 듯한 웃음을 흘렸다.
“헛헛... 점점 더 귀엽구만? 알면서도 내게 감히 반말을 지껄여? 정말 한 번 죽어볼래?”
즉시 시퍼렇게 날이 선, 보기에 조차 섬뜩한 대 장검을 뽑아 썩, 훤백의 목에 들이댔다.
“더욱이 너는 실로 큰 실수를 했다! 우리 무림인들에게 있어 남의 무공수련을 훔쳐본다는 것은 곧 눈알을 빼내는 것에 해당하는 중죄다. 비록 무림과 무관하다 할지라도 우리에겐 우리대로의 법칙이 있는 법이니 장님이 되어줘야겠다!”
섬칫한 소리!
그럼에도 훤백은 여전히 눈 하나 꿈뻑하지 않았다.
히죽 웃으며 더욱 큰 소리로 말을 하는 것이었다.
“웃기는군! 주인도 가만있는데 객이 왜 그래? 치우라구! 내동댕이쳐져 뼈가 부숴질 것 같은 것만으로도 충분하니까. 기실 너만한 남자가 내 목을 잘라봐야 어디 도움이나 될 것 같던가?”
“어째…?”
담대했다.
“그러지 말고 차라리 우리 친구가 되자구! 보아하니 쉰 세대 냄새가 나지 않는 것 같은데, 좋지?”
“친구...?”
순간 서문한랑의 얼굴에 더욱 황당하다는 기색이 떠올랐다.
“헛헛... 자식! 말하는 것 좀 보게. 솜털도 벗지 않은 놈이 호랑이 간을 빼먹었나?”
필시 무슨 변이 일어나도 나고 말 듯한 분위기!
이를 깨뜨린 것은 백의처녀였다.
“하는 짓들하고...! 커다란 남자가 똑 같이 놀려고 하는군!”
교단 쪽으로 갔던 그녀가 상의를 다 챙겨 입고는 다시 이들의 곁으로 다가선 것이었다.
서문한랑의 얼굴에 다시 흠칫 하는 기색이 스쳤다.
“똑 같다...?”
백의처녀는 한심하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잘못 든 길에 기합소리가 울려 들여다본 것이야. 그런 사람을 상대로 칼부림이라도 하겠다는 거야?”
순간 서문한랑은 커다랗게 대소를 터뜨렸다.
“핫핫... 분위기 깨고 있군! 칼부림은 무슨! 사실 나 천하의 서문한랑이 유생의 목을 잘라봐야 욕밖에 더 먹겠어? 그저 겁이나 줘서 다시는 못하게 하려했을 뿐인 거지!”
화통한데가 있었다.
“놈! 용기가 가상해서 봐준다! 하지만 그냥은 안돼! 또 같은 짓을 할지 모르니까.”
대뜸 연무장 주위, 건물들을 가르키며 말을 이었다.
“벌로서 지금부터 너는 표국 전체 건물들의 기와가 모두 몇 줄인지 정확히 헤아리고 가는 것이다! 지붕 위로 올라가서도 안 되고 표시를 해서도 안 돼! 오로지 건물 아래서 눈으로만... 한 줄이라도 틀리면 한 발짝도 나갈 수 없다는 것을 명심해라!”
백의처녀가 황당하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말도 안돼! 표국 안에는 대형 건물만도 오십여 채가 넘을뿐더러 대소 전각이 백여 채지. 그 많은 건물의 기와 줄을 무슨 수로 아래서 세지?”
하지만 서문한랑은 일언지하에 말을 잘랐다.
“그러니 벌이지. 다 세려면 눈알이 빠질 거다! 며칠이 걸리건 어쨌건 한 줄이라도 틀리면 돌아가지 못하는 거다.”
그는 주위의 몇몇 표사들에게 훤백을 감시하라 이른 뒤 휙, 몸을 돌려 백의처녀와 함께 곧 연무장에서 사라졌다.
*
그로부터 일각.
그가 내린 엄명대로 멀지 않아 표국 건물들의 지붕 위와 아래에는 실로 보기 드문 기이한 진풍경이 펼쳐졌다.
뉘엿뉘엿 저무는 햇살 속, 지붕위에는 무공을 수련하던 표사 하나가 올라가 열심히 몸을 움직이며 기와 골을 헤아리고 있었고, 아래에는 훤백이 마치 그것을 구경이라도 하는 것처럼 올려다보고 있는 것이었다.
이것은 바로, 둘 다 건물의 지붕을 엮은 기와장의 골 숫자를 헤아리고 있었던 것으로, 표사가 숫자를 헤아리는 이유는 당연히 훤백이 그것을 정확히 헤아렸는지 알기 위해 수자 파악에 나섰던 것.
‘구백 팔십 칠만 십육... 십칠...!’
하지만 문제는 한 두 채도 아닌 무려 백여 채에 이르는 표국내 모든 건물들의 기왓장 골 수였다.
이것이 워낙 많다보니 아래에서 올려다보며 눈으로 헤아려 가는 훤백은 그렇다 치고, 위에서 헤아리는 표사 역시 할 짓이 아니었던 것!
‘헛...! 또 까먹었다! 이런 젠장...!’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게 건물의 기와들이란 것은 거의가 똑같은 모양새를 한 터이라 올라가 세는 표사조차 번번이 헛갈려 숫자를 놓치는 사례가 발생하곤 했었던 것이니...!
아래서 감시하는 표사의 얼굴에 까지 불쌍하다는 빛이 역력히 떠올랐다.
‘이 자식 죽었구만? 올라가서 헤아리는 놈도 번번이 숫자를 놓치는 판에 어떻게 저 많은 골을 헤아린단 말인가? 최소한 열흘 밤은 세워야겠다. 그것도 운이 좋아야 가능할 것이고...!’
*
그럴 즈음 표국의 건물 중에서도 가장 크고 화려하다고 할 수 있는 중심부에 자리잡은 본전(本殿).
서문한랑은 백의처녀와 함께 사십오 세 가량의 나이에 고슴도치 수염을 가진 웅풍의 한 중년인을 만나고 있었다.
서문표국의 주인인 칠해신풍(七海信風) 곽화담(郭華潭).
무당의 속가제자이자 스스로 일가(一家)를 이룬 선풍검법(旋風劍法)으로 도처에 이름이 자자한 그였다.
곽화담은 싱글벙글 연신 웃음을 지으며 서문한랑를 맞이하고 있었다.
“헛헛… 소가주(小家主), 오랜만이구려. 한동안 뵙지 못한 사이 가일층 풍도가 헌앙해 지신걸 보니 그간 더욱 큰 진전이 있었던 것 같소.”
“별 말씀을! 국주님께서 어여삐 봐주시니 그렇게 보일 따름이지요. 여전히 무림의 말학일 뿐입니다.”
서문한랑 역시 깎듯 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이러한 그가 더욱 믿음직스러운 듯 곽화담은 크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일신에서 전에 비해 더욱 큰 잠력이 느껴지고 있소. 이것만 봐도 공부가 등붕조극(騰鵬朝極)에 이르렀음이 분명할진데, 서문세가의 앞날이 참으로 밝소.”
곽화담은 은근한 눈초리로 백의처녀와 그를 번갈아 보며 계속 말을 이었다.
“한데 어쩐 일로 이렇게 어려우신 걸음을...? 혹시 본 표국에 뭔가 불미스러운 일이라도 있었던 것이오?”
서문한랑은 크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온 것은 성중에 볼일이 있었기 때문이지만, 아버님께서 안부 여쭈라고 하시더군요. 가까운 시일 내에 한 번 뵙고 싶다고...!”
“대가주(大家主)께서 나를…?”
일순 곽화담의 눈에 얼핏 기이한 광채가 스쳐갔다.
그러나 그는 곧 그런 기색을 지우며 너털웃음 터뜨렸다.
“헛헛...! 참으로 황송한 일! 덕망 높은 어르신께서 남의 물건이나 운송해 먹고 사는 사람을 보고자 하신다니 놀랐소이다. 아니해도 조만간 문안을 드릴 참이긴 했지만...!”
마치 눈앞에 상대가 있기라도 한 듯 크게 포권을 취해 보였다.
“여하튼 알겠소이다! 어르신께서 부르신다면야 발이 부르트게 달려가야 마땅한 터, 날짜만 주시면 즉시 가겠노라 전해 주시오. 기왕 오신 걸음이니 소가주께서는 함께 석반(夕飯)이나 나눕시다.”
서문한랑 역시 정중하게 사의를 표했다.
“아껴주시는 국주의 아량에 감사드릴 따름입니다.”
곽화담은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백의처녀를 향했다.
“나영(那塋)! 장차 중경 무림 최고의 웅주가 되실 분이시다! 대접에 소홀함이 없도록 각별히 아랫것들에게 일러라.”
“예, 아버님.”
백의처녀는 미묘한 웃음과 더불어 고개를 숙여 보였다.
미루어 이름이 곽나영! 곽화담의 딸임을 알 수 있었다.
*
일각 후.
짹짹거리는 새 소리만 자자한 관서표국의 후원.
곽화담의 집무실을 물러나온 서문한랑과 곽나영은 산책이라도 하듯 나란히 관목들이 들어 선 소롯길을 걷고 있었다.
곽나영의 입가에 줄곧 야릇한 웃음이 번지고 있었다.
“사실이란건가?”
“뭐가?”
“서문가주께서 아버지를 만나고자 한다는 것.”
고개를 가로저었다.
“있을 수 없잖아. 하남최고의 웅주이신 분께서 한갓 군소방파 축에도 들지 않는 작은 표국의 국주를 보고자 하신다는 것은...! 사실이라 쳐도 그런 일로 아들까지 보낸다는 것도.”
서문한랑의 입에도 야릇한 웃음이 떠올랐다.
“그러게 의문이지?”
느닷없이 손을 뻗쳐 곽나영의 펑퍼짐하고도 탐스러운 엉덩이를 쓸어안듯 썩! 끌어 당겼다.
“뭐 의문이 있으면 또 해답도 있게 마련이지!”
가볍게 그녀의 입을 맞춘 후 그녀를 들쳐 안고 옆의 관목 숲으로 들어섰다.
그러고는 한 아름이 넘을 듯한 거목 아래에 그녀를 세운 후 서슴치 않고 쑥! 손을 그녀의 하의(下衣)속으로 집어넣었는데...!
즉시 손끝으로 전해지는 매끄럽고도 부드러운 감촉.
서문한랑은 즐기는 표정으로 계속 가장 은밀한 곳을 떡 주무르듯 만지기 시작했다.
실로 무례하고 음탕하기 그지없는 짓 같았다.
하나 더욱 놀라운 것은 곽나영의 태도였다.
서문한랑의 손이 자신의 가장 소중한 곳으로 들어오거나 말거나 은밀한 곳을 만지거나 말거나 그녀는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라는 듯 순순히 그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있었다.
아니, 오히려 그 장본인은 더한 움직임을 하고 있었다.
열정적으로 번쩍이던 눈에 묘한 색기가 엿보이는 듯 했던 첫 인상이 맞았던 것일까?
서문한랑의 손이 자신의 은밀한 곳에 들어오자 그녀는 즉시 뜨거운 입맞춤을 해 그의 입 속에 자신의 혀를 집어넣었으며, 더불어 그녀 역시 서문한랑의 두 다리 사이에 달린 물건을 자기 것인 양 마구 주무르고 있었다.
손끝에 전해지는 그녀의 은밀한 곳이 순식간에 질펀하게 젖어들고 있었다.
“여전하군! 하남 제일의 색녀(色女)지, 아마?”
그러나 곽나영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계속 입술로 그의 눈, 코, 입 등을 마구 부비며 말했다.
“실없는 소린 치워. 기회가 되니 즐길 뿐이야. 아무하고나 이러는 것도 아니고! 나 뜨거워졌어! 어서...!”
맹랑한 일이었다.
서문한랑도 급히 그녀의 바지를 끌어내린 후, 자신 역시 고이춤을 풀고 사정없이 자신의 것을 그녀의 속에다 깊숙이 삽입해 넣었다.
“악...!”
기다렸다는 듯 곽나영의 입에서 순간 짤막한 교성이 터졌고 관목숲 속은 곧 헉-헉- 하는 가쁜 숨소리와 질탕한 열기로 가득 찼다.
실로 누구도 예기치 못했던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다시 일각 쯤 지났을까.
한바탕 폭풍이 지나고 두 사람이 다시 숲 속에서 나왔을 때는...! 서문한랑의 입가에는 흡족한 미소가 번졌고, 곽나영의 눈동자에선 아직도 열기가 덜 식은 듯 기묘한 빛이 번들거리고 있었다.
그녀를 보며 서문한랑은 입가에 계속 미묘한 웃음을 지으며 나른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요물이라고 해야 할지... 굉장해! 도무지 적성에 차 하는 것을 한 번도 보지 못했으니.”
확실히 곽나영은 성에 안찬다는 듯 노릿한 눈빛으로 그를 보며 말했다.
“무공은 어떤지 몰라도 네 힘이 시원찮다는 것을 알아야 해! 산만한 덩치에 겨우 이각을 못 버티니...! 그래서야 훗날 처첩들이나 제대로 갈무리 하겠어?”
“핫핫...!”
서문한랑은 그만 자신도 모르게 대소를 터뜨렸다.
“비연녀(飛燕女) 곽나영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온다는 것은 실로 상상조차 못할 일이거니와...! 첩실들이라면야 네가 관리를 잘해주면 되겠지!”
첩실들을 관리한다...!
순간, 곽나영은 커다랗게 대소를 터뜨렸다.
“하하...! 이 몸을 처(妻)로 맞아들이기라도 하겠다는 것 같군? 하지만 어려울 거야. 난 다만 즐길 뿐, 이런 따위로 반드시 혼인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아. 확실히 넌 괜찮은 남자지만 내 취향도 아니고.”
서문한랑은 피식, 실소를 흘렸다.
“그렇다 해도 내가 좋아하고 있으니 소용없어! 혹시라도 나 외에 다른 놈을 받아들였다는 사실을 알면 난 반드시 그놈을 죽여 버릴 거니까!”
그러나 어림없었다.
“말 같은 소리를 좀 해! 아무렴 이 곽나영이 그렇게 쉽게 죽을 남자를 남편으로 받아들이겠어? 내 남편은 최소한 장차 천하의 주인이 될 사람이 될 것이야!”
실로 대단한 발언이었으나 서문한랑 역시 결코 만만치는 않았다.
“핫핫...! 그렇다면 역시 나로군! 무림이 아무리 넓다한들 주인이 될 사람이라면야 이 서문한랑 밖에 더 있겠나? 길어야 석 달 후면 증명이 될 거다.”
석 달!
곽나영의 얼굴에 순간 당혹해하는 기색이 스쳤다.
“석 달 후라니...! 그 말은 혹시 너도 군림대회(君臨大會)에 나간다는 소리야?”
일순 서문한랑의 표정에서 미소가 지워졌다.
“암! 나가고말고! 난 석 달 후 서문가의 대표로 나가 반드시 철기(鐵騎)의 후계가 될 것이야!”
철기의 후계...!
곽나영은 의외라는 듯 잠시 그를 바라보다 곧 피식, 실소를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
“날고 기는 인재들이 모래알같이 널린 게 중원인데...! 어쨌거나 잘해 봐. 난 강자(强者)가 좋으니까! 정말 그렇게 된다면야 난 정말 네 여자가 될 수도 있어. 아랫도리 힘은 역시 좀 불만이지만...!”
“아~ 물론 그것도 좀 키워보기로 하지! 기다려 봐! 코피를 열댓 말은 쏟고 제발 살려달라고 싹싹 빌게 해 줄테니! 핫핫핫...!”
실로 기가 막힐 대화였다.
더욱이 군림대회, 철기의 후예, 이런 것들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이때였다.
“소가주!”
이렇게 대화를 주거니 받거니 하며 걸음을 옮기던 두 사람의 귓가에 홀연 누군가의 급한 음성이 들려오더니, 곧 관서표국의 표사 하나가 급급히 몸을 드러냈다.
그는 당황스레 두 사람에게 포권을 취하며 황급히 입을 열었다.
“보고 드립니다! 한 시진 전에 엄명하신 분부, 적산서원의 애송이에게 기왓장 골수를 세라고 하신 일이 완료 되었사옵기에 알려드리고자 온 것이온데...!”
“뭐라...?”
서문한랑의 얼굴에 일순 크게 어리둥절한 기색이 떠올랐다.
“완료되다니? 누구 말이더냐? 확인하라고 한 너희들 말이더냐? 아니면 그 학사 놈 말이더냐?”
표사는 땀을 뻘뻘 흘리며 상상조차 못할 이야기를 꺼냈다.
“속하들도 그렇고 그 애송이 놈도 그렇습니다. 전체 기와의 골 숫자는 도합 이천 칠백 오십 사만 육천 칠백 구십 삼 줄이었사온데, 애송이가 정확히 그것을 세어 낸 것입니다. 검증까지 거쳤습니다.”
“검증까지 거쳤다?”
자신도 모르게 서문한랑의 입이 쩍, 벌어졌다.
“지붕위에 올라가서 센 것도 아니고 아래에서...! 그것도 눈으로만 그 많은 기왓장의 골수를 불과 한 시진 만에 헤아려 낸다는 것은 도저히 인간의 능력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다! 혹시 애송이의 말만 듣고 대충 보고하는 것이 아니냐?”
“설마 그럴 리가...!”
표사의 얼굴에 떠오른 당황한 기색이 더욱 짙어졌다.
“확실히 속하들도 헤아렸습니다! 처음엔 한 사람만이 올라가서 헤아렸사오나 번번이 숫자를 놓쳐 결국 열명이 올라가 표시까지 해가며 헤아렸습니다. 결과 숫자는 확실히 파악이 된 것이온데, 어찌된 일인지 그는 우리보다 훨씬 빨리 기왓장의 골들을 다 헤아렸습니다.”
실로 기막힐 노릇이 아닌가.
“말도 안 되는...!”
서문한랑의 얼굴에 떠오른 놀라움의 빛이 더욱 커졌다.
“있을 수 없다! 본시 우리 서문가의 무공수련 중에는 안력수련(眼力修鍊)이란 것이 있다! 곧 눈의 정확함을 키우기 위한 수련으로 녀석에게 준 벌과 동일한 것이다. 대빵 엄명으로 나도 해본 바가 있지만, 고작 스무 채의 건물을 정확히 헤아려 내기까지 꼬박 하루가 걸렸고 눈알이 빠질 뻔 했거늘...!”
급히 물었다.
“그 놈 어디 있나?”
표사의 얼굴에 낭패한 기색이 떠올랐다.
“갔습니다. 마치면 돌려보내라고 하셨기에...!”
서문한랑의 표정이 돌같이 굳어졌다.
‘보통 녀석이 아니었군...! 그러고 보니 칼을 목에 대도 눈 한 번 꿈뻑하지 않았던 태도도 그렇고... 이리되면 혼을 내준다고 했던 내가 오히려 우스개 감이 되어버린 셈 아닌가...?’
확실히 그럴 수도 있는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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