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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2월 30일 금요일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
제1독서 : 집회 3,2-6.12-14 또는 콜로 3,12-21
복 음 : 마태 2,13-15.19-23
13 박사들이 돌아간 뒤, 꿈에 주님의 천사가 요셉에게 나타나서 말하였다.
“일어나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하여,
내가 너에게 일러 줄 때까지 거기에 있어라. 헤로데가 아기를 찾아 없애 버리려고 한다.”
14 요셉은 일어나 밤에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가서,
15 헤로데가 죽을 때까지 거기에 있었다. 주님께서 예언자를 통하여,
“내가 내 아들을 이집트에서 불러내었다.”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
19 헤로데가 죽자, 꿈에 주님의 천사가 이집트에 있는 요셉에게 나타나서 말하였다.
20 “일어나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가거라.
아기의 목숨을 노리던 자들이 죽었다.”
21 요셉은 일어나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갔다.
22 그러나 아르켈라오스가 아버지 헤로데를 이어 유다를 다스린다는 말을 듣고,
그곳으로 가기를 두려워하였다. 그러다가 꿈에 지시를 받고 갈릴래아 지방으로 떠나,
23 나자렛이라고 하는 고을로 가서 자리를 잡았다. 이로써 예언자들을 통하여
“그는 나자렛 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2020년에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2021년에는 아버지께서 돌아가셨습니다.
평생 함께하실 것 같았던 부모님께서 1년 사이에 모두 하늘 나라에 가시니
마음이 먹먹해지고, 잘 해드리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와 아쉬움이 늘 가득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고 부모님 물건을 정리하는데
큰 형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부모님 재산이 없어서 얼마나 다행이니?
다른 사람들 보니까 재산 분할 문제로 싸움도 많이 하던데, 우리는 그럴 일이 없잖아.”
사실 부모님께서 남겨주신 재산은 신앙심과 교육이었습니다.
주님 뜻에 맞게 사는 삶을 늘 강조하셨고,
또 한 가지는 끝까지 공부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가족 모두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며 바르게 살려고 노력하고,
책을 손에 놓지 않으면서 생활합니다.
많은 돈도, 세상의 높은 지위도, 그밖에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으로는
우리 가족 모임을 행복하게 할 수 있게 하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눈에 보이지 않는 정신적 가치가
가족들 간에 더 끈끈한 유대 관계를 만들어주었습니다.
오늘은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입니다.
이 가정을 성가정의 모범으로 삼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 가정이 부자였을까요? 아니면 세상 안에서 높은 지위를 가지고 있었을까요?
아니었습니다. 우선 이들의 가장인 요셉은 가난한 목수로 알려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정결 예식 때 바치는 제물도 가난한 사람이 바치는 비둘기였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무런 고통과 시련이 없었을까요? 그것도 아니었습니다.
이 가족을 보면, 예수님의 잉태 순간부터 고통과 시련의 연속이었습니다.
첫아기인데도 마구간에서 낳아야 했던 형편이었습니다.
에집트로 피난도 가야 했고, 12살 때 성전에서 예수님을 잃어버리기도 했습니다.
요셉 성인께서 너무 일찍 하느님 곁으로 가신 것
역시 인간적 관점에서는 커다란 시련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랑하는 아들의 십자가 죽음을
십자가 아래에서 직접 봐야 했던 어머니의 아픔을 떠올리면
고통과 시련이 없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맞습니다. 고통과 시련이 없어야 성가정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렇게 성가정은 이 세상의 가치가 아니었습니다.
바로 하느님 나라의 가치로 서로가, 서로를 위한
사랑의 마음에서 성가정은 시작했습니다.
단순히 신앙의 일치를 성가정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또 고통과 시련이 없어야 성가정도 아닙니다.
사랑이 우리 가정에 있는가를 먼저 바라봐야 합니다.
그 사랑 안에 주님께서 함께하시면서 진짜 성가정이 될 수 있습니다.
“그는 나자렛 사람으로 불릴 것이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은 예수, 마리아, 요셉 성가정 축일입니다.
그런데 성가정이란 대체 어떤 가정을 말하는 것일까?
이에 대한 답을 오늘 복음에서 찾는다면,
‘성가정’이란 ‘말씀’에 따라 살아가는 가정이요,
‘말씀’에 순명하는, ‘말씀’이 성취되는 가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말씀이신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그분이 주인 되게 하는 가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두 가지 말씀의 성취를 전해줍니다.
하나는 “내가 내 아들을 이집트에서 불러내었다.”(마태 2,25)라는 말씀의 성취요,
또 하나는 “그는 나자렛 사람으로 불릴 것이다.”(마태 2,23)라는 말씀의 성취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들의 성취 안에는 모진 고통들이 함께 자리 잡고 있습니다.
곧 이 가정은 이집트에서 불려 나오기까지, 또 나자렛 사람으로 불리기까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쫓겨 다녀야 했고,
변방의 거류민으로 살아야 했고, 숨어 살아야만 했습니다.
그러니 고통이 없는 가정이 ‘성가정’이라는 말은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아니 어쩌면 ‘성가정’에는 고통이 필수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말씀의 성취에는 고통이 따르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가 있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성가정’이란
고통이 없고 편안하고 안정된 단란한 가정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함께 나누고 고통 속에서도 말씀이 이루어지는
장소요 자리가 되는 가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말씀을 이루는 사람이기에 앞서,
‘말씀이 이루어져야 하는 장소요 공간’이 되어야 할 일입니다.
그런데 말씀이 활동하고 성취되는 모습은 참으로 신기합니다.
무엇보다도 신비로운 것은 ‘말씀이신 분’께서
말을 하지도 못하는 아기 모습으로
우리 가정과 우리 공동체 안에 들어와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묘하게도 그 아기는 말을 할 줄 모르면서도 우리를 이끄십니다.
참으로 묘한 신비입니다.
‘말씀이시면서 말을 못 하는’ 이 아기는
때로는 침묵으로, 때로는 고통으로, 때로는 무력하기 짝이 없는 모습으로,
때로는 보이지도 않은 빈자리가 되어 우리네 가정, 우리네 공동체를 이끄십니다.
이렇게 아기 예수님은 우리 가정과 공동체의 주인이면서도
우리 모두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빈자리’로 계십니다.
마치 ‘가나안의 혼인 잔치’에서 주인공이면서도 보이지 않는 ‘빈자리’로 있는 신부처럼,
우리 가정 안에서도 ‘빈자리’로 계시면서 우리 모두를 품으시고 끌어안으십니다.
그러면서도 성취를 이루십니다.
그러니 ‘공동체의 빈자리’, 그곳이 바로 중심임을 보아야 할 일입니다.
곧 ‘자기 자신이 중심이 아님’을 보아야 할 일입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의 가정, 우리의 공동체 안에
말씀이 살아있는지 들여다볼 일입니다.
곧 ‘말씀이신 분’이 우리 안에 작고 낮고 무력하게
말 못하는 아기의 모습으로 살아계심을 볼 일입니다.
‘말씀’은 사랑하는 이 앞에서 항상 작고 낮은 이로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이 앞에서는 결코 자신을 높이거나 교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와 함께 계시는 예수님을 관상하는 것은
언제나 우리보다 작고 나약한 예수님 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보다 작고 무력한 예수님을 만났는가?
나를 사랑하기에 언제나 나보다 작은 모습으로
내 앞에 무력하게 낮아져 있는 그분을 말입니다.
심지어는 ‘없는 자’, ‘빈지리’가 되어 있는 그분을 말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일어나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가거라.”(마태 2,20)
주님!
말씀에 귀 기울이며 들은 말씀에 따라 살아가는 가정이 되게 하소서.
말씀이 살아있고 존중되는 말씀과 함께 친교를 나누는 가정이 되게 하소서.
말씀이 항상 중심이요 주인이 되는, 말씀에 순명하는 가정이 되게 하소서.
말씀 안에서 서로의 고통을 끌어안고 십자가를 함께 지는,
말씀이 이루어지는 장소가 되는 가정이 되게 하소서.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예수님께서는 ‘소경’의 눈을 뜨게 해 주는 기적을 보여주셨습니다.
소경은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신 예수님! 자비를 베풀어 주세요.’
예수님께서는 ‘무엇을 원하느냐!’라고 묻습니다.
그러자 소경은 ‘보고 싶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소경의 눈을 뜨게 해 주셨습니다.
소경의 눈을 뜨게 해 주는 또 다른 기적도 보여 주셨습니다.
태어나면서부터 볼 수 없었던 사람의 눈을 뜨게 해 주셨습니다.
소경의 눈에 침을 발라 주셨습니다. 그리고 실로암 연못에 가서 씻으라고 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소경이 앞을 보지 못하는 것은 죄를 지어서라고 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것은 소경의 죄가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기 위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볼 수 있다는 것은 생존에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볼 수 있다는 것은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요소입니다.
볼 수 있다는 것은 삶의 기쁨입니다.
꽃, 새, 구름, 바다, 나무, 아이, 그림을 볼 수 있다는 것은 정말 큰 기쁨입니다.
스마트폰과 컴퓨터의 모니터는 우리를 더 넓은 세상과 연결해 주는 통로가 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으로 세상을 구원하셨습니다.
부자 청년이 예수님께 이렇게 물었습니다.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까?’
예수님께서는 ‘계명을 잘 지켜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부자 청년은 그런 것은 어려서부터 잘 지키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흡족 해 하시면서 그렇다면 가진 것을 모두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고 나를 따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부자 청년은 슬퍼하면서 떠나갔습니다. 가진 것이 너무 많았기 때문입니다.
만일 부자 청년이 그물을 버리고, 배를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던 제자들처럼 행동했다면
우리는 부자 청년의 뒷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율법학자도 예수님께 이렇게 물었습니다.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온 마음과 정성 그리고 힘을 다해서 하느님을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같은 마음과 정성, 그리고 힘을 다해서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율법학자는 이렇게 묻습니다. ‘누가 나의 이웃입니까?’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에게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묻습니다. ‘누가 강도당한 사람의 이웃이 되어주었느냐?’
율법학자가 대답하였습니다. ‘강도당한 사람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도 가서 그렇게 하여라.’
문득 생각합니다. 보는 것은 주체가 ‘나’ 입니다.
내가 보는 것이고, 내가 즐거운 것이고, 내가 행복한 것입니다.
그러나 듣는 것은 주체가 ‘남’입니다. 남이 말을 해야 들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영원한 생명은 보는 것으로는 어려운 것 같습니다.
영원한 생명은 듣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이스라엘의 신앙고백은 ‘들어라 이스라엘아!’로 시작합니다.
구약 예언자들도 모두 말씀을 듣고 전했습니다.
이사야 예언자도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나에게 오너라. 들어라 너희가 살리라.’라고 선포했습니다.
요한복음은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라고 전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들을 귀가 있는 자는 알아들어라.’
오늘은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입니다.
나자렛의 성가정은 보는 것이 아니라 듣는 것에서 시작되었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데서 시작되었습니다.
마리아는 천사 가브리엘의 말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이몸은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마리아가 결혼하기도 전에 아이를 잉태한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남모르게 파혼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러나 천사 가브리엘의 말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요르단 강에서 세례를 받았을 때 하늘에서 이런 소리가 들렸습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겟세마니 동산에서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이 잔을 제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
예전에 읽었던 글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비가 오는데, 키 큰 사람하고, 키 작은 사람이
우산 하나만을 가지고 비를 피해야 한다고 생각해 봅시다.
키 큰 사람에게 우산의 높이를 맞추면 키 작은 사람이 비를 맞게 되고,
키 작은 사람에게 우산의 높이를 맞추면 키 큰 사람이 비를 맞게 됩니다.
서로가 키가 다른 것에 대해 한탄하거나 탓하면 둘 다 불행해집니다.
또 서로를 탓하다 갈 곳을 못 가게 될 수도 있죠.
해결 방법의 하나는, 키 큰 사람이 키 작은 사람을 업고, 키 작은 사람은 우산을 들면,
비 맞지 않고 갈 곳을 가게 될 뿐만 아니라,
둘이서 서로의 믿음과 나눔의 경험을 창출해 낼 것입니다.
이렇듯, 모든 문제는 함께 해결할 수 있고 또 함께 해결하면서 성장의 기회를 얻게도 됩니다.”
기도와 마음을 열어주는 대화,
그리고 신뢰를 통해서 성가정을 이룰 수 있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
성가정 축일: 가해
오늘은 성가정 축일이다.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신 신비는 참으로 위대한 신비이다.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똑같이 가정이라는 공동체의 체험을 거쳐 우리의 형제가 되셨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강생의 신비는 이 가정이라고 하는 실체도 취하여 거기에 더욱 깊은 의미를 부여하고
하느님 사랑의 표지와 구원의 도구로 삼는다.
오늘 축일은 가정이 강생의 신비를 통해 구원을 위한 공간이 됨을 상기시켜 줄 뿐 아니라,
하느님 사랑의 신비에 대해 체험을 했던 나자렛 가정을
우리에게 구체적인 모범으로 제시하고자 한다.
즉 교회는 오늘 나자렛 가정의 구체적 체험을 거행하고자 하며,
그 체험을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모범으로 제시하려는 것이다.
집회서의 내용은 부모를 공경해야 할 의무를 강조하고 있다.
“너는 네 아비가 늙었을 때 잘 보살피고 그가 설혹 노망을 부리더라도
잘 참아 받고 네가 젊고 힘 있다고 그를 업신여기지 말아라”(집회 3,12-13).
이 말씀은 너무나 쉽게 노인들에게 무관심해 버리고,
마치 그들을 무슨 짐처럼 여기며 그들을 사회공공기관에 맡겨버리는 것이
잘하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오늘의 우리에게 하는 말 같다.
이집트 피난
오늘 복음의 내용은 한 가정이 겪는 고통스럽고도 극적인 사건들에 집중되고 있다.
요셉이나 마리아 혹은 아기 예수가 주인공이 아니라, 한 가정의 이야기로 전개되고 있다.
천사가 요셉에게 하는 말은 한결같이 “아기와 아기 어머니를 데리고”(13.20절)라고 하고 있다.
이는 어느 것도 따로 생각할 수 없는 단일한 결합상태를 의미한다.
이러한 분위기는 복음 전체에 흐르고 있다(14-15절.21절). 여기에는 심오한 의미가 있다.
즉 나자렛 가정의 가족들 사이에 이루어지고 있는 감정과 행동의 완전한 일치를 강조하고 있다.
서로 간의 봉사와 보호와 도움이 필요한 아기 예수에 대한 사랑이다.
아기 예수는 하느님의 아들이지만 인간적으로 나이 때문에,
또 그의 사명 때문에 닥치는 어려움에 대해 보호와 도움이 필요하다.
그래서 그 부모들은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고 하느님께서 보여 주시는
징표들을 알아듣고자 하는 마음 자세로써 아기를 보호하고 도와주고자 애쓴다.
즉 하느님의 구원계획이 그리스도를 통해 실현되게 하도록
이루어지는 하느님과 사람의 협력관계를 볼 수 있다.
가족들 상호 간의 사랑과 하느님께 대한
무한한 신뢰로 이 가정의 삶이 전개되고 있다.
나자렛 성가정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은 이것이다.
우선, 가정의 참된 의미는 오직 서로 사랑할 수 있고
서로를 깊이 나눌 수 있는 곳에만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사랑은 모든 것을 이기고, 영혼과 육신을 결합해주며,
사랑은 삶의 극적인 어려움까지도 극복하도록 해 준다.
사랑이 없으면 가정은 무너지고 말며, 사랑이 식어 가는 가정에는
법적 조치도 사회적 대책도 아무 소용이 없다.
가정은 사랑과 그 사랑의 요구가 회복될 때만이 다시 살아날 수 있다.
두 번째 사실은 가정이 하느님의 계획의 일부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가정은 바로 사랑의 최대 표현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가정이 진정한 의미의 가정이 되려면, 나자렛 가정과 같이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빛과 영감에 항상 개방되어있어야 함을 의미한다.
가정이 근본적으로 종교적 차원을 가져야 하며
하느님께 대한 감각을 양성해야 할 의무도 있다.
세 번째는 나자렛 성가정이 사랑과 헌신으로 가득 찬 삶을 살았고
하느님께 온전히 개방되어있었기에 이 세상과 인간적인 문제에 개방되어있다는 점이다.
즉 예수님은 다른 사람들을 위한 사람이며,
마리아는 예수님이 형제들의 어려운 처지를 알고 느끼게 해주는
협력자 역할을 할 것임을 말해줄 것이다.
“그를 나자렛 사람이라 부르리라”(23절).
이 말씀은 나자렛이 아무런 명성도 없는 보잘것없는 동네이다(참조: 요한 1,46).
이 동네와 예수님을 연결하는 것은 당신의 겸손을 의미할 뿐 아니라,
모든 사람과의 결합을 입증하는 것이다. 가정은 개방된 공동체이다.
그것은 가정이 사랑에서 생기고 사랑 안에 자라기 때문이다.
사랑은 그 안에 폐쇄될 수 없다. 그렇다면 사랑이 아닐 것이다.
바오로 사도는 가정 안에서의 행동규범에 대해 짤막하게 이야기한다.
이것은 모든 어려움과 긴장 그리고 세대 간의 긴장 등을 안고 있는
가정생활이 처해있는 분위기에 대한 것이다(참조:콜로 3,18-21).
한 가정을 이루는 남편과 아내를 한 몸(창세 2,24)이라고 할 때,
그리고 부모와 자식을 연결해 주는 사랑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의 몸으로 실현되어야 한다.
이 그리스도의 몸이란 가정에 대한 하느님의 계획이 담겨있는 것으로써,
하느님의 말씀과의 항구한 일치가 가족들 모두를 하느님의 뜻 안에서
사랑 속에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러한 가정들과의 만남으로 서로 가르치고 충고함으로써
현대가 안고 있는 여러 가지 문제들,
즉 혼인의 의미, 부부 사랑, 생명의 가치, 자녀들의 가치, 자녀들의 교육,
부부 상호간의 신뢰 등에 대한 문제를 극복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이것이 개방된 가정의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진정 부부간의 넘치는 사랑과 자녀들의 기쁨에 찬, 웃음이 끊이지 않는 가정,
한평생 이루어졌으면 하는 이 놀라운 기적은
인간들의 깨어지기 쉬운 사랑을 감싸주고 하느님의 사랑의 징표로 바꾸어놓는
하늘로부터의 축복에 의해서만이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제 이러한 가정을 실제로 만들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
성가정 축일은 오늘의 가정이 지녀야 할 모든 가치
즉, 사랑, 헌신, 희생, 정덕, 생명 존중, 노동, 평화, 환희 등을
알아들을 수 있는 열쇠를 던져주고 있다고 성 요한 바오로 2세는 말씀하셨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은 우리에게 가정을 포함한 모든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중심을 제시합니다.
"일어나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하여..."(마태 2,13)
주님의 천사가 요셉의 꿈에 나타나 하느님의 뜻을 전합니다.
헤로데의 메시아 아기 살해 계획을 하느님께서 이미 알고 계셨으니까요.
그런데 아직 밤이었을텐데도 천사는 "날이 밝는 대로..."라고 하지 않습니다.
행간에 "지금 당장"이라는 조건이 붙은 듯합니다. 그만큼 긴박하다는 뜻이겠지요.
"요셉은 일어나 밤에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마태2,14)
요셉은 즉각 행동을 개시합니다. 밤은 길 떠나기에 좋은 시간이 아닙니다.
게다가 갓난아기와 산모까지 보호하며 움직여야 했지요.
하지만 요셉은 기꺼이 순종합니다.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마태 2,15).
요셉의 순종은 성자의 생명을 구할 뿐만 아니라
과거 예언자를 통해 하신 하느님의 말씀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도록 협력한 것입니다.
이는 이집트로 떠날 때만이 아니라, 헤로데가 죽은 뒤
이집트를 떠나 나자렛에 정착하기까지의 과정에서도 동일하게 이루어지지요.
오늘의 복음 안에서 하느님과 요셉의 손발이 얼마나 착착 맞는지 감탄이 나옵니다.
먼저 하느님 입에서 말씀이 떨어지고, 곧 요셉이 순종하고,
그로써 기록된 말씀이 이루어집니다.
오늘 복음은 그것도 세 차례(마태 2,14.21.22)나 반복해서 보여주지요!
요셉은 하느님께 순종하고, 마리아는 요셉을 통해 움직이시는
하느님께 대한 믿음으로 요셉을 따릅니다.
순종의 뿌리에는 상호적 믿음과 존중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과 하느님 백성은 신랑과 신부로 비유되지요.
하느님과 요셉도 그렇게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신랑이신 하느님과 신부인 요셉, 두 존재 사이에 오가는
신뢰와 따름과 이루어짐의 역동은
혼인의 축복으로 엮인 모든 부부들에게 선사된 관계의 원형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다른 시각에서 보면, 하느님과 하느님 백성은 아버지와 자녀 관계입니다.
그렇다면 마찬가지로 아버지 하느님과 아들 요셉의 관계를 통해
세상의 모든 부모-자녀 관계를 관상할 수 있습니다.
요셉과 성모자의 안전을 염려하고 개입하시는 아버지 하느님과,
그분께 대한 무한한 신뢰로 그분 뜻을 듣는(행동으로 옮기는) 아들 요셉.
여기서도 믿음이 우선입니다.
서로에 대한 헌신과 존중, 공경과 사랑의 뿌리는 믿음입니다.
제1독서는 부모와 자녀 관계를 이야기합니다.
"주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는 이는 제 어머니를 편안하게 한다"(집회 3,6).
말씀에 귀 기울이는 것은 경외심에서 나오는 행동입니다.
하느님을 경외하는 이는 인간을 경외합니다.
그의 안에 하느님께서 존재하심을 믿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 하느님을 경외하는 것과
사람을 경외하는 것은 한 뿌리입니다.
"행복하여라.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
그분의 길을 걷는 모든 사람 ... 너는 행복하여라. 너는 복을 받으리라"(화답송).
그래서 화답송은 제1독서에 대한 응답으로
주님을 경외하는 이들이 받는 축복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제2독서 안에는 가정생활 안에서뿐만 아니라
세상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선사된 덕목들이 나열됩니다.
읽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흐뭇해지는 아름다운 말씀들이지요.
"선택된, 거룩한, 사랑받는, 동정, 호의, 겸손, 온유, 인내, 용서, 평화, 감사, 지혜, 순종..."
"그리스도의 말씀이 여러분 가운데에 풍성히 머무르게 하십시오"(콜로 3,16).
사도 바오로는 그리스도인 가정과,
더 나아가 모든 교회 공동체의 본질을 이야기합니다.
바로 "말씀"입니다. 오늘 말씀 안에 드러난 모든 아름다운 덕목들은
이 "말씀"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이들에게서
피어나는 꽃들이고 "말씀"이 맺은 열매들입니다.
말씀이 우리 안에 머무를 때
요셉처럼 우리도 하느님의 말씀이 이루어지고 완성되도록 돕는 협력자가 됩니다.
하느님과 요셉이 손발을 착착 맞추어
주거니 받거니 한 역동적 교감이 우리의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람 사이에서도 그렇게 쿵짝이 잘맞으면 신명이 나는데,
말씀과 그런 역동 안에 살아간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입 꼬리가 귀에 걸릴 만큼 행복하지 않습니까?
그런 길 안에 들어선 여러분 모두를 축하하고 존경합니다!
여러분의 가정과 공동체가 나자렛 성가정처럼
이렇게 말씀(예수님)이 중심이 되어 신명나는 자리가 되길 축원합니다!
서공석 요한 세례자 신부
오늘 복음은 요셉이 마리아와 예수를 데리고 이집트로 갔고,
또 이집트에서 돌아온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물론 역사적 사실을 보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다음, 초기 신앙공동체가 구약성서의 언어를 빌려,
예수님에 대한 그들의 믿음을 표현하는 관정에 발생한 이야기입니다.
예수는 구약성서가 약속한 인물이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마태오 복음서의 것입니다.
그 복음서는 유다교 출신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기록하였습니다.
그들에게 구약성서의 가치는 절대적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는 구약성서가 이미 예고한 인물이었다고 믿었습니다.
그들은 구약성서가 구세주에 대해 한 약속들이
예수 안에 모두 이루어졌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은 옛날 이집트를 탈출하면서
그들과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믿는 신앙공동체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마태오 복음서 공동체는 예수가 이스라엘의 운명을
요약하는 분이라는 사실을 말하기 위해
예수가 태어나자 이집트를 다녀오게 만들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천사가 요셉의 꿈에 세 번 나타난 것으로 말합니다.
구약성서에서 천사와 꿈은 하느님이 인간에게 말씀하실 때 등장합니다.
천사와 꿈은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통신 수단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천사가 시키는 대로 요셉이 즉시 행동하는 것은
우리에게 상기시켜 주는 바가 있습니다.
창세기 12장에 나오는 아브라함의 이야기입니다.
하느님이 아브라함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네 고향과 친척과 아비의 집을 떠나 내가 장차 보여 줄 땅으로 가거라.”
아브라함은 이 말씀을 즉시 행동으로 옮깁니다.
창세기는 인류 역사의 시작에 아담과 하와가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도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카인의 살인, 노아 시대의 타락한 생활, 바벨탑을 짓는 인간의 방자함 등
인류는 태어나자마자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죄의 역사를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는 역사를 시작한 인물입니다.
마태오복음서는 요셉이 천사의 말씀을 따랐다고 반목해 말하면서,
아브라함이 말씀을 따른 사실을 상기시킵니다.
하느님의 말씀만 믿고 길을 떠나서 이스라엘의 아버지가 된 아브라함입니다.
요셉은 천사의 말을 듣고, 길을 떠나
아기 예수의 생명을 보호하고, 키우는 아버지가 됩니다.
이스라엘의 역사가 시작하는 순간에 아브라함의 순종이 있었듯이,
예수님으로 말미암은 그리스도 신앙의 역사가 시작하는 순간에
요셉의 순종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신앙인은 하느님을 신뢰하고 따르는 사람입니다.
신앙인은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자기의 미래를 보장하려 하지 않습니다.
순종은 높은 사람이 시키는 대로 따라 하는 피동성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순종은 하느님을 영접하고, 그 하느님을 중심으로
세상과 자기 자신을 보면서 감행하는 하나의 모험입니다.
하느님이 자비로우셔서 우리도 자비롭고,
하느님이 사랑하셔서 우리도 사랑하는 노력을 하는 모험입니다.
그것이 모험인 것은 그 결과도, 그 대가도 보장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에게 하는 순종은 주인의 눈치를 보면서 처신하는 노예의 비굴함이 아닙니다.
순종은 인간이 하느님으로부터 초능력을 얻어
자기 자신을 더 훌륭하게 만드는 작전이 아닙니다.
오늘 복음에 요셉은 천사의 말이 있자, 곧 예수와 마리아를 데리고 길을 떠납니다.
그는 하느님의 말씀을 영접하여 새로운 출발을 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느님에게 순종하여 새로운 삶의 터전을 그 후손들에게 제공하였듯이,
요셉은 순종하여 하느님이 베푸신 생명을 영접하고 자라게 하여,
예수가 하느님의 생명을 마음껏 살아 보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인간이 하느님에게 순종하는 것은,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영접하여,
이웃에게 베풀고 나누며 이웃을 사랑하는 삶이라는 하나의 모험을 감행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성가정 축일입니다.
이 축일은 1920년에 처음으로 제정되었습니다. 그 이전에는 없었던 축일입니다.
현대산업사회의 출현과 더불어 가정의 존엄성이 훼손되었습니다.
과거 농경사회에서 가정은 소중하였습니다.
그러나 근대 기술 산업사회는 가정의 존엄성을 훼손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가정의 중요성을 환기시키기 위하여 이 축일을 제정 공포하였습니다.
예수님도 요셉을 아버지로, 마리아를 어머니로 한, 하나의 가정에 자랐습니다.
생명이 태어나 성장하면서 사랑과 섬김을 배우는 곳이 가정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영접하여 마리아와 예수를 데리고 길을 떠난 요셉과 같이,
우리의 가정도 말씀을 영접하여 함께 길을 떠나는 곳이 되도록 하자는 축일입니다.
어린 예수가 요셉과 마리아의 보호를 받으면서,
하느님의 말씀을 영접하고, 그 말씀 따라 길을 떠나는 방식을 배웠듯이,
우리의 가정에서도 자녀들이 말씀을 영접하고,
그 말씀을 따라 길을 떠나는 방식을 배우게 하자는 뜻이 담긴 축일입니다.
각자가 자기 한 사람 더 잘되자고 노심초사하는 세상입니다.
자기 자신의 중요성만 알고, 주변 사람들의 필요와 그들의 고통을 외면하는 우리의 세상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멀리서 찾을 필요가 없습니다.
가정의 구성원들이 서로 이해하고 사랑하고 용서할 때, 그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한 가정이 어려움을 겪는 이웃을 불쌍히 여기고, 도울 때
그 가정의 자녀들이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방식을 배웁니다.
결손 가정에서 자라는 이웃, 가장이 어려움을 겪는 이웃,
집안에 장애인 혹은 환자가 있는 이웃을 위해
우리가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는 사실을 자녀들이 깨달을 때,
그 가정에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배우는 생명이 자라는 것입니다.
자녀들이 말씀을 듣고 길을 떠나는 가정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주변에는 경제적으로 여유를 갖지 못하면서도
어려운 이웃을 위해 가진 것을 나누고,
희생적으로 봉사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어려운 이들을 온 가족이 함께 찾아보고,
외로운 이를 집안에 초대하여 위로하는 경우들도 우리는 봅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가르치고 배우는 가정들입니다.
가정은 그런 나눔과 섬김을 배우는 장소가 되어야 합니다.
자녀들을 욕심과 허세만을 위해 살도록 키울 수도 있고,
공부 잘하라고만 다그치며 키울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자기 주변에서 들을 줄 알아야 합니다.
가정은 자녀들이 말씀을 듣고 배우는 장소입니다.
자녀들을 아침저녁 강제로 기도하게 하라는 성가정 축일이 아닙니다.
가난하고 외롭고 고통당하는 이웃을 위해 우리가 실천해야 할 하느님의 일을 깨닫고,
인생길을 떠나는 자녀를 키우는 가정이 되도록 하자는 축일입니다.
하느님의 일은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는 데에 있습니다.
예수님을 듣고 배워서 사랑하고 섬길 줄 아는 생명이 자라는 가정이라야 합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