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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예술의 황금시대, 1920년대 대구의 예술가들
- 음악가 박태원, 박태준 형제를 중심으로 -
최현묵(수성아트피아 관장, 공연예술학 박사)
1. 들어가며
1920년대 대구예술은 말 그대로 황금시대라 할 수 있다. 문학에는 이상화, 현진건, 이장희, 백기만, 윤복진 등이, 음악에는 박태원, 박태준, 현제명, 김문보, 추애경 등이, 미술에는 서동진, 박명조, 이인성, 이여성, 이쾌대 등이, 그리고 연극에는 홍해성이 활동하고 있었다. 이들은 대구 출신의 대구 예술인이자, 곧 당대 한국의 최고 예술인이기도 하였다. 이들의 공통점은 거의 모두 1900년대 시작한 대구의 근대교육을 받고 자란 20대들이라는 점이다.
본 연구는 이들이 과거 대구 읍성 서남부(현재 계산동과 청라언덕 인근)라는 지역적 범위 내에서 자라고, 배우고, 예술활동을 하였으리라는 추정과 대구제일교회가 설립한 ‘대남/신명 - 계성/신명’ 이라는 신교육 학맥, 그리고 그들이 남긴 각자의 기록과 사진 등을 참고로 그들 상호간의 예술적 교류를 알아보고자 하는 일종의 시론 성격이 강하다.
특히 음악가 박태원과 박태준 형제는 제일교회와 대남-계성으로 연결되는 신교육과 신사상을 받은 대표적인 대구예술가로서, 당대를 살아갔던 타 장르의 예술가들과 많은 교우관계를 맺고 있다. 이에 박태원과 박태준을 중심으로 1920년대 대구 예술계 지형도를 살펴보고, 그 각각의 생애와 활동을 통해 대구 예술의 황금시대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에 대한 단초를 알아보고자 한다.
2. 1920년대 시대상황
1919년 3.1운동 이후, 일제는 무단통치에서 문화통치로 전환하여 민족운동의 분열과 민족 개량화 정책을 추진하였다. 헌병을 동원한 무자비한 탄압 대신, 일정 부분 자유와 권한을 넘겨주는 척하며 교묘한 회유책을 동원한 것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19년까지 계속되던 애국계몽운동에 대한 좌절과 한계를 느낀 당대 지식인들은 크게 두 가지 방식으로 나뉘어져 예술운동을 전개하였는데, 유미주의적 퇴폐방식과 사회주의 운동방식이었다. 문학이 가장 대표적인 양상을 보였던 바, ‘백조’로 대표되는 낭만주의 문학과 ‘카프’로 대표되는 참여문학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일제는 문화를 표명한 문화통치 중에도 한국을 영구 병합하기 위한 다양하고도 교묘한 억압체제 구축 및 내면화 정책을 꾸준히 시도하였다. 일부 자치권과 참정권, 그리고 문화활동을 허용하였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허울 좋은 명색뿐이었다. 헌병경찰에서 일반경찰로 바꾸었으나 경찰과 경찰서 수는 3배 이상 증가되었으며, 학교에서 조선어를 가르치기 시작했으나 형식을 제2외국어로 가르쳤기 때문에 일본어가 오히려 국어로서 그 지위를 내면화시키기 시작하였다. 총독부 통치에 한국인의 참여를 보장하기 위하여 만든 중추원은 오히려 친일파 양성소 역할을 했으며, 한국경제를 활성화하기 위한 회사 설립의 간소화 정책은 오히려 일본기업의 한국 진출을 용이하게 하는 결과를 낳았다.
대구의 상황도 이와 다르지 않았다. 1906년 통감부의 지방기관인 이사청(理事廳)이 설치되고, 이토오의 통역관이며 수양아들인 박중양이 대구군수로 부임하여 중앙정부의 허락도 받지 않고 임의로 대구읍성을 허물기 시작하여 1907년 2월, 대구읍성은 완전히 흔적을 감추었다. 이로 인하여 읍성을 중심으로 하여 움직이던 대구상권은 서서히 대구역을 중심으로 넘어갔고, 읍성이 철거되고 만들어진 새로운 길(동성로, 북성로, 서성로, 남성로)을 배경으로 한 일본 거류민들이 주도하는 새로운 상권으로 재편되기 시작하였다. 이어 1910년 경찰권을 장악한 일본 헌병대가 대구 곳곳에 설치되었으며, 1915년 현재 미군부대 주둔지인 캠프헨리 지역에 일본군 제80연대가 주둔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와중에도 대구의 국권회복 및 애국계몽운동은 지속되었다. 1906년에 설립된 대구광문사, 1907년에는 교남교육회와 달성친목회 등이 설립되어 대구 지역의 계몽운동을 선도하였으며, 그들 중 일부는 대동청년단(1909년), 조선국권회복단(1915년), 대한광복회(1915년) 등이 결성되어 적극적인 독립투쟁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이 중 대한광복회는 경상도 일대를 중심으로 활동하다가 충청, 경기, 전라도, 평안도로 활동 반경을 넓혀 전국적인 조직으로 확대되었으며, 나중에는 북만주와 길림으로 그 활동영역을 넓혔다. 1927년 조선은행 대구지점에 폭탄을 투척한 의열단원 장진홍의사의 뿌리도, 알고보면 대한광복회로부터 시작한다.
교육활동도 계속되었다. 대구지역 최초의 근대식 교육기관은 1899년에 설립된 사립달성학교였으며 그후 설립된 학교가 1900년 사립대남학교다. 대남학교(현 종로초등학교)는 대구제일교회 선교사 아담스에 의하여 설립되었고, 아담스는 1906년 중등과정인 계성학교를 설립하기도 하였다. 여학교로는 1900년 아담스와 함께 선교활동을 하던 브루엔 선교사의 부인인 마르타에 의해 신명여자소학교가 설립되고, 역시 마르타에 의해 1911년 중등학교인 신명여학교가 정식으로 설립되었다.
1916년 조선총독부 고등보통학교 관제 공포에 따라 기존의 사립협성학교을 인수하여 관립대구고등보통학교(현 경북고등학교)가 설립되고, 1921년 대구교남학교(현 대륜 중고등학교)가 개교하였으며, 1926년에는 대구여자고등보통학교(현 경북여자고등학교)가 설립되었다. 대구여자고등보통학교는 1915년 일본 거류민 자녀들만을 위한 학교였으나, 지역의 여론을 받아들여 한국인 여자학생들을 입학시키게 되었다. 이외 한국의 기술인력을 양성하기 위한 대구공립농림학교(현 대구자연과학고등학교)가 1910년에, 대구공립상업학교(현 대구상업정보고등학교)가 1923년에, 그리고 공업교육을 위한 대구공립공업보통학교가 1925년에 각각 설립되었다.
즉 대구의 1910년대는 대구읍성 철거, 국채보상운동의 실패, 신흥 일본 거류민 상권 도약 등의 상황 속에서 새로운 문물(천주교, 개신교, 근대교육 등)을 받아들이면서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던 시기였다. 그리고 1920년대는 그러한 환경에서 자라난 새로운 세대, 즉 근대교육과 종교를 받아들인 청년들이 다양한 민족운동과 문화활동을 전개하기 시작한 시기이다. 동시에 대한광복회와 같은 적극적인 무장 독립투쟁을 전개한 시기이기도 하다.
그리고 대구의 1920년대는 1919년 3.1운동이후 일제의 식민화 정책의 하나로 관립학교들이 속속 생겨나서 지역의 청년들이 일본의 교육정책 틀 안에서 교육을 받기 시작한 시기이기도 하다. 이는 과거 선교사들과 지역 유지들에 의하여 설립된 학교에서 교육받은 청년들이 서구의 문화를 직접 교육받았다면, 1920년대 교육은 일본을 통해 서구의 문화를 이식받기 시작한 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3. 1920년대 대구의 예술인들
1920년대 대구의 예술인들은 대체로 신문화를 받아들인 선대의 영향을 받아 개신교라는 종교적 배경과 신교육을 받은 청년문화라는 지형도를 형성하고 있다. 또한 대구읍성 철거 이후 형성되기 시작한 대구의 영역(주로 현재 대구시 중구 계산동 일대)을 중심으로 교유하고 활동한 시기이기도 하다. 특히 대구의 청년 예술가들은 당시 대구제일교회, 대남학교, 계성학교, 신명학교, 선교사 사택지 등을 중심으로 교유하고 활동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한 근거로 대구의 근대서양음악가 대부분이 제일교회를 다녔고, ‘대남 - 계성/신명’로 이어지는 학력을 소지했다는 것을 들 수 있다. 그리고 그와 같은 학력계보를 갖지 않았던 시인 이상화와 백기만이 3.1운동 당시 계성학교 학생 동원을 담당하였다는 점, 그리고 그후 이상화가 서울로 도피하여 박태원의 하숙집에 머물렀다는 점 등을 고려하면 이들의 만남과 교류지로 이곳이 활용되었다는 것을 쉽게 추정할 수 있다.
1912년생인 화가 이인성도 연령의 차이를 뛰어넘어 이들과 교유했다는 것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들의 교우관계는 동요작가 윤복진을 매개로 삼고 있다. 윤복진은 작곡가 박태준의 동요 대부분을 작시한 월북작가인데, 이인성 유족이 보관하고 있는 사진첩에는 유난히 이인성과 윤복진이 함께 찍은 사진이 많다. 1939년 작곡가 박태준의 작곡집 『물새 발자욱』의 13곡 모두 윤복진의 동요로 되어 있는데, 이 작곡집의 표지화는 바로 화가 이인성의 판화작품이다. 즉 윤복진을 매개로 7살 위의 ‘제일교회-대남-계성’ 선배인 박태준과 5살 후배인 이인성이 서로 연결되고 있다.
이와 같이 1920년대 대구는 새로운 서구예술 장르를 받아들인 20대 예술가들이 활동하고 있었는다. 이들 모두는 지역과 학맥, 그리고 교우관계 등으로 인하여 서로 연결되어 있었으며, 그들 모두는 대구라는 지역적 한계를 뛰어넘어 한국 근대예술의 대표적 예술가들로서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즉 대구의 근대예술이 바로 한국의 근대예술이었으며, 그 진원지 역할을 수행한 것이다.
1) 1920년대 대구 음악가
1920년을 기점으로 대구의 음악가로는 박태원(25살), 김태술, 권영화(이상 22살), 박태준, 김문보, 추애경(이상 21살), 현제명(20살)을 들 수 있다. 이 중 박태원은 그 이듬 해인 1921년에 폐병으로 사망하였고, 그 외는 20년대에 각각 자신의 길에서 음악세계를 펼쳐갔다. 이들의 공통점은 모두 대구제일교회를 다녔고, 이곳에서 설립한 대남/신명 - 계성(신명)학교를 다닌 것이다. 모두 박태원이 지휘하던 제일교회 성가대를 통하여 서양음악을 접했고, 또 서양음악의 세계로 나아갔다.
박태원은 계성학교를 졸업하고 음악을 전공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음악의 세계를 떠난 것이 아니었다. 1916년 동생 박태준과 평양 숭실대학 문학부에 입학하였다가, 다시 연희전문학교 문학부를 다녔다. 이때 시인 이상화와 같은 하숙방을 사용하였다. 연희전문학교 시절 합창단원이자 독창자로 활동하기도 하였으며, 서울 YMCA 음악회에 수차례 독창자로 출연하기도 했다. 이후 박태원은 일본 영어학교에 유학을 하였다가 한 학기만에 고향에 돌아와 투병을 하다가 1921년 폐병으로 사망한다.
박태원은 계성학교 시절이나 유학 생활 중에도 틈틈이 대구에 내려와 제일교회를 중심으로 합창활동을 하기도 하고, 미국 민요와 가곡을 우리나라 말로 번역 혹은 번안하여 가르치거나 부르게 하였다. 그 중에 가장 대표적인 곡이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는 「클레멘타인」, 「올드 블랙 조」, 「스와니 강」 등이다. 또한 박태원은 대구 시절 시인인 이상화뿐 아니라 『금성』을 발간하여 대구의 시인 이상화와 이장희 등을 서울 문단에 소개한 백기만 등과도 친구로 지냈다. 그들의 우정을 엿볼 수 있는 글이 백기만의 『상화와 고월』에 남아있다.
상화의 냉동생활은 그에게 매우 의의 있는 토막이니 첫째, 상화의 영어力은 그때 태원이에게 배운 것이며 태원의 미성(美聲)에 심취하여 성악을 배우려고 애쓴 일도 있다. 아침 저녁으로 냉동 뒷산으로 오르내리며 발성연습도 하여 보았다. 그러나 상화는 고음의 발성이 만족치 못하였고, 음계의 조절도 졸렬하였다. 상화는 음악 애호가로는 자타가 공인할 수 있었지만은 음악가로는 소질이 부족하였다. 더구나 풍부한 성량과 유려한 성음을 가진 대무(大巫) 박태원의 앞에 상화의 성악은 맹꽁이 울음같이 들렸을 뿐이다.
박태준은 박태원의 동생이다. 어린 시절부터 그로부터 서양음악의 기초를 배웠으며, 풍금 연주를 배워 박태원이 성가대 지휘를 할 때, 반주자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박태준에게 있어 박태원은 형이자 음악 스승인 셈이다. 박태준이 1900년생이므로 1901년생 이상화, 1902년생 백기만과 친구가 되는 것이 맞으나, 어떤 연유에서인지 이상화, 백기만은 박태원과 친구 관계로 맺어져 있고, 박태준과는 연결점이 보이지 않는다. 그건 박태원이 음악뿐만 아니라 문학에도 관심이 많았으므로 자연스럽게 문학을 전공으로 삼은 이상화, 백기만, 이장희 등과 교우 관계를 맺었을 것으로 판단되며, 문학에 관심이 없었던 박태준은 그들과 친구관계를 맺지 않게 된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오히려 박태준은 그의 7년 후배인 동요작가 윤복진과 절친한 관계를 맺는다.
박태준은 계성학교를 졸업한 후, 박태원과 함께 1916년 평양 숭실전문학교에 입학한다. 박태원이 사망하던 1921년 숭실전문학교를 졸업한 후, 마산 창신학교 교사로 부임하고, 이곳에서 「동무생각」, 「미풍」 등을 작곡한다. 이후 노산 이은상의 사촌동생인 김봉렬 여사와 결혼을 하고 1925년부터는 모교인 계성학교에서 교사생활을 하다가 1932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다. 교사생활 중에 그는 작곡집 『박태준작곡집』과 동요집 『중중 때때중』, 『양양 범버궁』을 발간하는데, 이 시기에 그의 대표작인 「오빠생각」을 작곡하여 전국민의 애창곡으로 알려진다.
박태준이 유학을 가기 전에 이미 대구에서는 음악을 전공하기 위하여 미국으로 유학을 간 인물이 세 명 있었다. 1924년 김태술, 1926년 현제명, 1927년 추애경이 바로 그들이다. 김태술은 박태원과 마찬가지로 대남 - 계성 - 숭실을 졸업한 후, 모교인 계성학교에서 교사생활을 하다가 미국으로 유학하였으며, 현제명 역시 대남 - 계성 - 숭실을 졸업한 후, 전주의 신흥중학교에서 교사 생활을 하던 중 유학하였다. 김태술과 현제명 모두 숭실학교 로드히버(H. A. Rodeheaver, 1980-1955)의 주선으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이들은 대구에서 박태준, 서문교회 권영화와 함께 교남사중창단을 구성하여 음악을 통한 계몽운동과 선교활동을 한 선후배 사이였다.
추애경은 대구사립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신명중학교를 졸업하였다. 역시 대구제일교회를 다니며 서양음악을 접했으며, 1921년 이화학당 대학예과에 입학하여 성악(소프라노)을 전공하였다. 1925년부터 모교인 신명중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하기 시작하였으며, 그 이듬해인 일본으로 건너가 피아노를 전공하다가, 다시 1927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추애경 역시 로드히버의 주선으로 이루어졌다.
미국으로 유학한 이들은 1927년 8월 인디아나에서 개최된 전미 하기음악대회에 참가하여 실력을 겨루었는데, 33개국 200여명이 참가한 이 대회에서 현제명이 성악 부문에서 1등상을 받았다. 이 중 김태술은 운동에도 뛰어난 실력을 선보여 1926년과 27년에 전미 정구선수권을 획득하여 타임지에 소개되기도 하였다. 김태술은 이후 음악에서 공학으로 전환하였고, 고향 친구인 추애경과 1928년 결혼하였으며, MIT공과대학에서 전기공학을 졸업하여 직장생활과 사업을 거듭하며, 귀국하기 않고 미국에 잔류하였다.
반면 현제명은 1929년 귀국하여 연희전문학교의 전임강사로 음악과 영어를 가르치며 활발한 음악 활동을 전개하였다. 1931년 「조선의 노래」로 동아일보 현상모집에 1등으로 당선된 후, 조선음악가협회를 창립하여 초대이사장직을 수행하기도 하였으며, 1936년 미국에서 명예음악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러나 1940년이후 친일의 길을 걷다가 해방을 맞이한다. 대구 출신의 최고 음악가이며, 한국 근대음악의 대표적 인물임에도 드러내놓고 높이 평가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이 시기에 행한 친일행적 때문이다.
한국인 최초의 바리톤 김문보는 박태준과 동갑으로서 그 역시 대구제일교회 - 대남-계성을 거친다. 그러나 계성학교를 졸업하지 않고 휘문의숙으로 전학하여 졸업하고, 일본으로 유학하여 우에노 음악학교에 윤심덕, 한기주 등과 함께 입학한다. 1924년 졸업하고 잠시 귀국하여 음악활동을 하다가, 1925년 같은 우에노 음악학교를 졸업한 일본인 소프라노 요시사와 나오코(吉澤直子)와 결혼하여 부부가 함께 일본과 한국, 그리고 서울과 전국을 대상으로 활발한 성악활동을 전개한다. 그러나 1938년 아내와 이혼한 후, 특별한 활동을 보이지 않는다. 마지막 기록은 1956년경 일본 동경에서 연주회를 가졌다는 소식을 끝으로 종적이 묘연한 상태다.
이상에서 보듯 1920년대 활동한 서양음악가 대부분은 대구제일교회와 그 영향권에서 음악을 시작하여 서울과 대구를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대한민국 근대음악의 선구자 역할을 수행하였다. 이들은 음악인만이 아니라 당시에 활동했던 타 장르 예술가들과도 친밀한 교우관계를 형성하였는데, 박태원을 매개체로 시인 이상화, 백기만, 이장희와 교우했으며, 그리고 박태준은 동요작가 윤복진을 매개로 하여 화가 이인성과도 교우했다. 또한 대구 서양화 1세대 인물인 서동진, 박명조와도 교우한 흔적이 발견된다.
2) 1920년대 대구의 문인
1920년을 기점으로 대구의 문인으로는 현진건(21살), 이상화(20살), 백기만(19살), 이장희(18살), 윤복진(14살)을 들 수 있다. 대구의 음악가들과 달리 대구제일교회와 대남 - 계성의 영향을 받은 인물은 윤복진 밖에 없다. 현진건은 한문사숙을 받다가 일본 세이오 중학교를 거쳐, 상해에서 호강대를 졸업하고 서울에서 기자활동과 작가활동을 병행하였으며, 이상화는 역시 집에서 사숙을 받다가 서울 중앙중학교를 졸업하였다. 백기만은 대구보통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와세다대학을 졸업하였고, 이장희는 백기만과 함께 대구보통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일본 경도중학교를 졸업하였다. 개신교의 영향을 받은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이들 활동 중에는 단연 백기만의 활동이 눈에 띈다. 시문학적 성과와 별개로 백기만의 활동은 사람을 모으고, 소개하고, 책을 만들고, 사후평을 쓰는 등의 활동을 통하여 시인 이상화, 이장희를 한국문단에 소개했을 뿐만 아니라, 타 장르 예술인들과의 교우와 사회활동에 앞장서서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친다. 1919년 3.1운동 당시 대구의 학생들을 규합하여 만세운동을 앞장선 것도 그였고, 일제 강점기 하에서도 항일의 지사적 풍모를 버리지 않았다.
그(현진건-필자 주)는 1900년 8월 1일생인데 1917년 그가 상해에서 돌아왔을 때 처음으로 알게 되었고 서로 뜻이 맞아서 곧 친밀해졌으며, 그와 상화와 상백과 나와 네 사람이 작문집 『거화』를 시험해 본 것도 그 해 일이다.
위의 글에서 보듯 백기만은 이미 1917년에 지금은 남아있지 않지만 일종의 동인지 형식의 책을 만들었다. 그리고 1923년 시 전문지 『금성』을 양주동과 함께 발행하고, 제3호에 이장희와 이상백을 끌어들여 동인으로 활동하게 한다. 그리고 『백조』 동인으로 활동하던 이상화와 현진건 등과의 교우도 계속한다. 또한 그가 1929년부터는 거의 시를 쓰지 않는 대신 근대시 최초의 『조선시인선집』 편찬, 『개벽』, 『여명』 등의 편집인으로 활동한다.
일종의 매개자로서 그의 역할과 성품은 시인 이장희가 죽었을 때, 그의 집에서 행한 행동에서도 잘 나타난다. 대구 부호의 아들이면서도 집의 도움을 전혀 받지 못하고 가난하게 지내다가 자살한 이장희의 시신을 보고 나오면서 그는 가만히 있지 않았다.
나올 때 대청을 내려 신을 신었으나 나의 흥분은 극도에 이르러 참을 수 없는 분노는 마침내 폭발되고 말았다. “큰 사랑에 가서 말을 좀 할 테다” 소리 지르고 달려갈 때 우허가 나를 잡고 “이 사람아, 상가에서 이것은 실수다”하면서 극력 말려서 그대로 돌아오고 말았다. 참다 못하여 상가에 사람을 보내어 장례만은 융숭히 하여야 된다는 경고를 하였더니 그 장질의 대답이 “참상이라 남몰래 화장을 하려고 한 것인데 여러분의 의사를 존중하여 장비를 아끼지 않고 성대히 하겠노라”는 회답이었다. 과연 장례만은 성대하였다. 대구의 인력거를 총동원하여 호상 인력거만 하여도 50여 대였었고 장지는 대구시 동북방 오리허 신암동에 있는 선산이었다.
시인 이상화의 묘비와 시비를 만들 때도 그의 매개자로서 역할이 잘 드러난다.
첫째, 1943년 상화가 서거하던 해의 가을에 향우들의 정성으로 묘전에 비석이 세워졌다. 발의는 내가 한 것이요, 서동진, 박명조의 설계로 김봉기, 이순희ㅡ 주덕근, 이흥로, 윤갑기, 김준묵 등 10여인의 동의를 얻어 일제의 탄압을 피하기 위하여 자택에서 하는 것으로 가장하고 비밀리 수행한 것이니 비면에는 ‘시인 백아(白啞) 이공(李公) 상화지묘(相和之墓)’라 음각하였을 뿐, 다른 문구는 일체 기입하지 않았다.
해방 후 1948년 3월에 시단 초유의 ‘상화 시비’가 대구 명소 달성공원에 건립되었다. 그것은 김소운의 제창에 시단인들이 찬성한 것인데, 소운이 화주가 되고 이윤수를 비롯한 대구 죽순시인들의 협력을 얻어 사업을 완성한 것이다.
위의 글을 보면 대구 서양미술의 1세대인 서동진과 박명조의 이름이 나온다. 서동진은 이인성의 스승으로서 계성과 휘문을 졸업하였고, 대구 최초의 아트센터라 할 수 있는 대구미술사(大邱美術社)를 운영한 인물이다. 그리고 그는 교남학교에서 미술교사로 근무하였던 바, 당시 시인 이상화가 함께 교사로 근무하고 있었다. 박명조는 대구보통고등학교를 중퇴하고 일본인 화가 아래서 사숙을 받아 화가의 길을 걸어간 인물이다. 이처럼 백기만은 문인들을 하나로 모으는 역할만이 아니라, 대구의 미술가들도 하나로 묶어 일을 도모하는 역할을 수행한 것이다.
또한 백기만이 박태준의 형 박태원과 친분을 가졌다는 것은 이미 앞에서 밝힌 바 있다. 박태원, 이상화, 백기만의 우정은 대구와 서울로 이어졌고, 박태원이 페병으로 사망하자 이상화는 그을 추모하는 시를 『백조』 3호에 발표하기도 하였다.
이중의 사망
-가서 못오는 박태원의 애틋한 영혼에게 바침
죽음일다!
성난 해가 잇발을 갈고
입술은, 붉으락, 푸르락, 소리없이 훌쩍이며
유린당한 계집같이 검은 무릎에 곤두치고 죽음일다!
<이하 생략>
여기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동요작가 윤복진이다. 윤복진은 1925년 『어린이』지에 동요 「쪼각빗」으로 당선되었으나 이에 만족하지 못하고 1930년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에 각각 「동네의원」과 「스무 하룻밤」으로 당선하여 작가로서 지위를 공고히 한다. 윤복진의 동요는 작곡가 박태준에 의하여 거의 작곡이 된다, 그러나 윤복진이 월북하자 그의 동요는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바뀌거나 윤석중, 이원수 등에 의하여 개사된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동요가 「기러기」라 할 수 있다.
울밑에 뀌뚜라미 우는 달밤에 기럭 기럭 기러기 날아갑니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넓은 하늘을 엄마 엄마 찾으며 날아 갑니다. (윤복진)
가을밤 외로운 밤. 벌레 우는 밤 초가집 뒷산길 어두워질 때
엄마품이 그리워 눈물 나오면 마루 끝에 나와 앉아 별만 셉니다. (이태선)
엄마 일 가는 길에 하dis 찔레꽃. 찔레꽃 하얀 잎은 맛도 좋지
배고픈 날 가만히 따먹었다오. 엄마 엄마 부르며 따먹었다오. (이원수 시, 이연실 개사)
윤복진은 1907년생으로 박태준과 마찬가지로 대남-계성을 졸업하고, 일본 니혼대학 문과와 법정학부를 졸업하였다. 박태준과의 인연은 계성학교 7년 후배인 것 외에도 그가 본격적으로 동요시인으로 활동하던 시기인 1925년 이후 박태준은 모교 계성학교의 음악교사인 점도 작용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보다 결정적인 인연은 화가 이인성과의 관계에서 찾을 수 있다. 윤복진과 이인성은 다섯 살 차이임에도 불구하고 죽마고우처럼 지냈다. 화가 이인성의 사진에는 윤복진과 찍은 사진이 유난히 많은데, 그 중에 윤복진 시의 시화를 그린 그림을 앞에 두고 찍은 사진도 있다. (1930년 2월 26일, 동아일보에 실린 윤복진의 시 「벽에 그린 그 얼굴」그림 1 참조)
즉 윤복진을 사이에 두고 그의 동요를 작곡한 박태준, 그의 시에 그림을 그리거나 작곡집에 그림을 그린 이인성, 이렇게 세 명이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1939년 9월 윤복진의 가사에 박태준이 작곡한 작곡집 『물새 발자욱』의 표지는 화가 이인성의 판화 작품이다. (그림 3 참조)
결과적으로 1920년대 대구문인들은 타 장르 예술가들과 백기만과 윤복진을 매개로 하여 서로 가깝게 연결되어 있었다. 즉 박태원을 통하여 음악가들과 연결되었으며, 박태준은 윤복진을 통하여 이인성 등과 연결되어 있었다. 또 백기만을 통해 시인 이상화는 서동진, 박명조 등 대구 1세대 미술가들과도 서로 연결되어 있었던 것이었다.
3) 1920년대 대구의 미술가
대구 미술의 역사를 이야기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시인 이상화의 형 이상정이다. 그는 1897년생으로 강의원(講義院)에서 공부하다 1912년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의 성성중학교를 마치고 국학원대학에서 미술과 상업을 공부하고 돌아와 오산, 경신, 계성, 신명에서 교사생활을 했다. 학생들에게 민족정신을 고취시키다가 조국에서 독립운동의 한계를 느끼고 1923년 만주로 망명하여 항일독립운동을 하였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가 계성학교에서 교사생활을 할 때, 대구 최초로 서양화 미술도구를 도입하여 미술을 가르쳤다는 사실이다. 대구 미술계 1세대인 서동진이 계성학교 시절 이상정에게 미술을 교육받았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상정이 1923년 대구 ‘교남 시서화연구회’의 회원으로서 1923년 제2회 전시회에 서양화 부문에 출품했다는 것을 보더라도 그가 대구 초기 서양미술 도입에 절대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1920년을 기점으로 대구의 미술가로는 이상정(24살), 서동진(21살), 이여성(20살), 박명조(15살), 이인성(9살), 이쾌대(8살), 김용조(5살) 등이 있다. 이들 중 1923년 교남 시서화 연구회 제2회 전시회에 참가한 작가는 이상정, 이여성, 박명조 등이 있다. 특히 이여성은 화가 이쾌대의 형으로서 당시 대구에 머물면서 독립운동과 화가로서의 활동을 겸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쾌대와 마찬가지로 사회주의 이념을 수용하여 6.25전쟁 직후 거제도 수용소에서 이쾌대와 마찬가지로 북한을 선택하여 북으로 갔다. 이인성, 이쾌대, 박명조, 김용조는 20년대 중후반부터 미술계에 입문한다.
대구 근대미술을 논함에 있어 제1세대는 서동진을 단연 꼽는다. 서동진은 계성학교를 다니다 중퇴하고 서울 휘문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미술공부를 하고 돌아와 대구에서 본격적으로 활동을 전개한다. 귀향한 후 그는 교남학교(현 대륜중고등학교)에서 미술교사를 무보수로 근무하면서 대구 최초의 아트센터라 할 수 있는 대구미술사(大邱美術社)를 설립하여 서양화 재료 및 자료를 제공하는 역할을 함과 동시에 미술에 재능이 있는 후학들을 제자로 받아들여 미술을 가르친다. 이 시기 그가 제자로 받아들여 가르친 인물이 바로 이인성과 김용조이다. 동시에 그는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문인들과도 교제관계를 맺어 이상화, 백기만 등과 친구를 맺는다.
같은 계성학교를 졸업한 작곡가 박태준과는 동갑(1900년생)이었으나 18살이라는 늦은 나이에 입학했기 때문에 서로 만날 수는 없었으나, 대구를 고향으로 둔 동갑내기라는 점, 그리고 대구미술사를 운영할 때, 문하생인 이인성이 박태준의 작곡집에 판화 그림을 그려준 점 등을 고려하였을 때, 서로 알고 지냈으리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또한 박태준의 형 박태원과 친구인 이상화와 서동진이 교남학교에서 같이 근무한 점 등을 고려한다면, 미술과 음악이라는 장르의 장벽과 관계없이 서로 교류하였을 것으로 쉽게 추정할 수 있다. 그리고 그 가교역으로 이인성의 5년 선배이나 죽마고우처럼 지낸 동요작가 윤복진의 역할도 있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박명조는 대구보통학교를 거쳐 대구고등보통학교에 진학하지만, 1923년에 자퇴하고 그 해 5월에 18살의 나이로 대구미술전람회에 이상정, 이여성 등과 함께 「초추(初秋)」 외 5점을 전시함으로서 주위사람들을 놀라게 한다. 그는 당시 대구에 거주하던 일본인 화가들에게 영향을 받은 듯 여겨지며, 1926년 9월부터 약 1년 6개월 동안 일본인 화가 이시이 하쿠데이(石井柏亨) 화숙에 입문하여 미술을 배우기도 한다. 그리고 1935년 조선미전을 마지막으로 작품 활동을 거의 하지 않는다. 그러나 1943년 이상화의 비문을 설계하는데 서동진과 함께 참여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여전히 그는 대구 지역에서 화가로 인정받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각주 22 참조)
대구 미술가들 중 이인성이야말로 대구 미술가들이 타 장르와 교류하는데 가장 의미있는 교류를 했다. 1920년대 문단의 스타였던 윤복진이라는 동요작가와 죽마고우처럼 지낸 개인적 친분이 가장 크게 작용했다. 윤복진의 동요가 신문에 실릴 때 삽화를 그렸을 뿐만 아니라, 작곡가 박태준의 작곡집 표지를 그리기도 했다. 현재 남아 있는 이인성의 사진 중에는 대구미술사 동료이자 후배인 김용조 화가와 윤복진이 나란히 찍은 사진이 있다.
4) 1920년대 대구의 연극인
음악가 박태원이 1914년 계성중학교 졸업학년 때, 연극 『대공포 강도』란 제목의 연극에서 주인공인 순경으로 출연하여 대공포 강도를 체포하는 연기로 호평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 당시 공연된 작품은 『대공포 강도』가 아닌 『육혈포 강도』로 추정된다. 『육혈포 강도』는 1912년 우리나라 신파극의 원조인 임성구의 혁신단에 의하여 만들어진 신파극이었다. 내용은 신출귀몰하는 권총을 가진 강도를 신입 순경의 끈질긴 추격 끝에 잡지만, 결국 그 총에 숨진다는 내용이다. 대구에 신파극이 최초로 공연된 것은 1913년 말 이기세의 유일단 공연이다. 이때 기록을 보면 “밤마다 만원의 성황”을 이루었다고 되어 있다. 이를 참고로 하면 계성학교의 대구 신극 공연사에 있어서도 상당히 일찍인 셈이고, 어쩌면 비록 학생 공연이지만, 대구사람들에 의한 최초의 연극 공연이 될 수도 있는 상황이다.
그러나 신파극이 아닌 서구 근대극 형식의 연극 공연은 1921년 7월 18일이다. 공연은 일본 동경유학생들이 극예술협회를 조직하여 1921년 여름방학을 기하여 부산, 김해, 마산, 경주, 대구, 목포, 서울, 평양, 진남포, 원산 등지에서 공연한 작품이다. 이 당시 이들의 연극은 한국 연극사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왜냐하면 명실상부하게 서구 근대극 형식의 공연이 한국에 최초로 공연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참여한 인물들도 조명희, 홍난파, 김우진, 윤심덕, 홍해성.... 등 1920대 한국의 대표적 예술가들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더욱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이때 김우진과 공동 연출을 맡은 홍해성은 바로 대구의 ‘대남-계성’ 출신이었으며, 한국 최초의 근대적 직업 연출가였다. 홍해성은 1896년생으로 박태원과 함께 계성학교를 다녔다. 그렇기 때문에 극예술연구회 대구공연에는 당시 대구의 젊은 예술가들이 신문물에 대한 호기심과 오랜만에 만나는 홍해성 때문에 많은 관람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비록 그 이후에 홍해성이 대구의 예술가들과 어떤 교류를 나누었는지는 정확하게 자료로 남은 것은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일본에서 유학과 실전 연극을 공부하고 서울로 돌아온 1927년부터 독보적으로 연극 활동을 전개한 바, 대구 출신의 대남-계성 출신의 예술가들을 중심으로 끊임없이 교류하며 예술적 자극을 주고받았으리라 판단할 수 있다.
4. 나오며
1920년대는 대구예술의 황금시대였다. 그것도 20대 예술가들에 의한 황금시대였다. 이들은 대구의 예술가이자, 당대 한국의 예술가였으며, 현대 한국예술의 뿌리들이 되었다. 그들은 대구라는 동일 지역, 동일한 근대교육, 종교를 바탕으로 서로 교류하며 소통함으로써 새로운 예술의 경지를 개척했다. 박태원과 이상화처럼 친구로, 박태준과 윤복진처럼 선후배로, 서동진과 이인성처럼 스승과 제자 사이로 서로 격려하고 자극을 줌으로써 자신의 예술세계를 확장시켜갔다.
예술간의 장르 역시 넘나들었다. 문학과 음악, 음악과 미술, 미술과 문학이 서로 어우러졌다. 서로의 예술 세계에 대한 존중과 흠모가 있었고, 애정이 있었다. 이상화가 박태원의 목소리에 반해 혼자 동산에 올라 성악을 연습하는 장면이나 윤복진의 동시에 삽화를 그리는 이인성의 모습을 상상해보면, 이들이 서로 얼마나 아끼고 사랑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심지어 3.1운동 거사후 도피생활을 했던 이상화가 서울의 박태준의 하숙집에 기거했다는 기록을 보면, 그들의 우정이 동지적 결속으로도 느껴진다.
이러한 1920년대 대구예술인들의 소통과 교류는 현재 대구 예술계에 전해주는 메시지가 있다. 그것은 세대와 세대, 장르와 장르를 뛰어넘는 교류와 소통이 각자의 예술 영역을 더욱 넓혀주고 깊어지게 할 것이며, 지역을 뛰어넘어 한국과 미래로 갈 수 있는 단초가 되리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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