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 26:12 이삭이 그 땅에서 농사하여 그 해에 백배나 얻었고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
13 그 사람이 창대하고 왕성하여 마침내 거부가 되어
14 양과 소가 떼를 이루고 노복이 심히 많으므로 블레셋 사람이 그를 시기하여
15 그 아비 아브라함 때에 그 아비 종들이 판 모든 우물을 막고 흙으로 메웠더라.
위의 구절을 접하는 사람마다 거부가 된다는 것을 사모하는 분들이 간혹 볼 수 있다. 과연 거부가 된다는 것은 물질적인 부만 의미하고 있는지 살펴봐야 할 것이다. 이에 앞서 아브라함도 상당한 부자라는 것은 일반적으로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아브라함과 앞선 시대에 살았던 욥도 어마어마한 부자였다는 것도 익히 잘 알고 있다.
그렇다면 그런 부자들만이 족장이 될 수 있었던 것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다른 측면에서 살펴봐야 한다. 이 땅에서 누리는 부만 강조된 것인지 아니면 다른 세계를 의미하고 있는지 살펴야 할 것이다. 창세기는 족장시대를 가늠하는 역사적인 책만이 아니라 영적지침서라고 지난번에 언급한 바와 같이 신앙생활을 올바르게 하기를 원한다면 반드시 거쳐야할 책이다.
창 31:1 야곱이 들은 즉 라반의 아들들의 말이 야곱이 우리 아버지의 소유를 다 빼앗고 우리 아버지의 소유로 인하여 이같이 거부가 되었다 하는지라
위의 성경구절도 마찬가지로 이삭을 거쳐 제 삼대에 이르는 야곱에게까지 거부가 되는 장면을 언급하고 있다. 창세기를 읽다가 아브라함이나 이삭, 야곱의 삶이나 신앙을 닮고자 이름까지 개명하면서까지 자신의 존재성을 달리하는 분들도 있다. 뿐만 아니라 거부가 되기 위해 사업의 상호를 이삭이나 야곱을 선정하여 사용하는 분들도 있다.
이에 대해 언급하려는 것이 아니다. 왜 하나님은 이런 부자들을 선택하셔서 족장으로 세우고 이스라엘 나라 역사에 아주 중심적인 인물로 선정하셨을까? 마지막 족장이었던 요셉은 머나먼 타국 애급에서 국무총리가 되어 인근나라에서까지 숭상할 만큼 거부 중에 거부라는 것을 비신자까지도 알고 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거쳐 삼대에 이르는 거부는 타고난 거부일까? 아니면 자수성가형의 거부일까? 등등 비평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당시 왕이 없었던 시대였지만 족장으로서 그리고 제사장으로서 선지자로서 역할을 수행해 왔던 분들이다. 또한 신앙인으로서 지혜자로서 그 시대에 사람들을 지도해왔던 인물들이다.
여기서 부자만 된 것을 강조하고자 언급하려는 것이 아니다. 거부가 될 수밖에 없었던 신비로움을 찾아야 한다. 왜 그들은 거부로서 살아갈 수 있었던 배경이 무엇이며 수많은 부가 그들에게 주어졌는지를 살펴보고 우리들도 그런 거부로서 삶을 추구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으로 성경을 다시 읽기 시작한 것이다.
말씀을 읽다가 깨달은 것이 족장들이었던 그들이 얻은 부가 이 땅에서 누리는 부만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들이 소유했던 부는 자신들을 위한 부도 있지만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누기 위한 부였지 자신들의 안일을 위한 부를 축적한 것이 아니었다. 그런 부를 누르지 못하는 이들과 함께 나누고자 전개해 온 내용을 담고 있다.
또한 중요한 사실은 거부가 되는 부가 한꺼번에 일확천금을 얻듯이 얻어진 것이 아니라 어느 시점에 도달되었기 때문에 거부가 되었다는 것이 아주 중요한 내용이다. 창 12:5 아브람이 그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
아브라함도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기까지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한 것이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이나 거부가 되는 것이 자신이 원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전적인 부르심이 없다면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이나 거부가 되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가 없다면 가능할 수 없다는 것이다.
창 6:8에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는 원어적인 내용은 “하나님께 인도하시는 곳으로 도달하게 되었다”는 뜻을 담고 있듯이 방주를 만드는 것이나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도 그리고 거부가 되는 것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지 않으면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부르심과 인도하심 속에 주의 음성을 듣지 못한다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부르심과 인도하심 속에 주의 음성을 들었던 족장들이 거부가 되었다는 것은 영성의 대부가 되었다는 뜻과 동일한 내용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들이 부자가 되고 거부가 된 것은 영적인 훈련 속에 영적인 대부가 되지 않으면 부자나 거부가 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영성의 대부가 되었던 아브라함은 자신의 부인을 팔아넘기기도 했으며 이삭도 아브라함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부인을 팔아넘겼다.(창 26장) 야곱은 자신의 아버지와 형을 속이기도 했으며 여러 가지 모순된 장면들이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영성의 대가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끊임없이 주님의 음성을 경청했으며 인도하심을 순종했던 결과라고 본다.
영성의 대가는 아브라함이라기보다는 요셉으로 봐야 할 것이다. 자신의 꿈만 꾼 것이 아니라 그의 형제들까지 꿈을 꾸었던 그는 상당한 꿈을 꾸는 해몽가였으며 예언가였던 것이다. 특이한 자신의 언행을 보여주기 위해 채색 옷을 입었다는 것이 바로 자신의 영성을 자랑한 것이었다. 우리 주위에서도 무당처럼 자신의 영성을 자랑하는 분들에게 주의해야 할 부분이다.
이렇게 자랑하던 요셉은 형들의 모함에 의해 잠시 구덩이에 갇히게 되었지만 그 구덩이가 바로 하나님의 속이란 사실이다. 내게 영성이 일어나고 생겼다고 해서 자랑하고 다니지 말라는 것이다. 까불다가는 요셉처럼 험악한 일을 당하게 되는데 주체를 하지 못하고 자신의 영성을 까발리는 것이 허다하다.
이것이 영성만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비밀과 신비로움을 알았다고 해서 상대방에게 모두 다 알려주는 주책(주님이 책임져 준다는 조크)을 범하는 일들이 허다하다. 신학교 강사를 소개할 때 당부의 말로 강의를 할 때 한꺼번에 쏟아내지 말라고 경고를 해도 막무가내로 강의를 해대는 바람에 소개한 본인이 난감한 적이 있었다.
강단에 올라서면 할 말과 하지 말아야 할 말을 구분하지 못하고 쏟아내는 분들이 있다. 요셉처럼 자신이 깨달은 말씀이나 영성을 어느 누구에게 전하기 위해서 자신이 갖고 있는 것을 전부 쏟아내야만 직성이 풀리는 분들이 더러 있다. 요셉이 바로 이와 같이 자신의 영성을 쏟아내는 바람에 형들의 모함에 의해 구덩이에 갇히고 애급으로 팔려가게 된 것이다.
그러나 요셉은 애급에서 보디발 집에서 사환으로 있으면서 그 주인의 부인의 유혹으로 인해 감옥에 갇히게 되는 혹독한 일을 겪게 된다. 그 안에서 영성훈련을 쌓는 가운데 왕을 수발하던 사환들의 꿈을 풀어주는 바람에 왕에게 불려가 해몽하는 일로 인해 왕의 환심을 사게 되었다. 이에 빌미로 애급의 국무총리까지 올라가게 되었다.
많은 분들이 애급 총리가 된 요셉을 닮아가기를 위해서 헌금이나 기도나 특별한 신앙생활을 유도하고 있지만 상당한 영성가가 된 것을 언급한 서적이나 목회자들이 없다는 것이다. 물론 기독교인으로서 세상의 정부에 고위관리가 되는 것을 목표로 삼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요셉을 닮아가야 하는 부분이 현실적으로 고위관리가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부자가 되거나 고위관리가 되려면 그 어느 누구도 닮을 수 없는 신앙인으로 영성가로 거듭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땅에서 신앙인으로서 돈을 얻기 위한다면 영성의 길로 들어서지 않으면 안 된다. 욥도 자신의 가족들과 함께 매일 제사를 지낸 것처럼 영성훈련을 얼마나 경건하게 드렸으면 사단이 시기 질투하여 하나님께 간청하여 시험의 대상으로 만들었다.
이와 같이 돈과 영성의 거부가 되려면 사단의 시기질투를 각오해야 할 것이다. 아무나 거부가 되는 것이 아니다. 거부가 될 수 있는 그릇이 되어야 하는데 그릇이 되지도 못하면서 돈만 달라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얼마나 난감해 하실까? 그렇다고 해서 돈을 빌미로 영성훈련을 쌓게 된다면 그것마저도 모순의 굴레로 들어가는 것이다.
거부가 되기 위해서 영성을 쌓는 것이 아니다. 영성의 훈련을 쌓다보니 거부가 되는 은혜를 입는 것일 뿐이다. 돈이 생기면 어디에다 무엇을 쓰려고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주의 음성을 들으면서 주의 부르심과 인도하심 속에 절대적인 순종으로 인해 얻어지는 거부는 나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하나님의 은총이라는 것이다.
한국교회가 왜 침체가 되고 위기 속에 있는지 올바르게 분석해야 한다. 은사와 영성을 올바르게 강조해야 하며 하나님의 돈을 올바르게 사용해야 한다. 영성을 겸비하여 주의 음성 가운데 재정을 사용해야만 되는데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려면 올바른 영성운동이 전개될 수 있도록 새롭게 정비해야 할 것이다.
신 8:16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먹이셨나니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 출처/창골산 봉서방 카페 (출처 및 필자 삭제시 복제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