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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춘무림(靑春武林) ] 제2장-2 말썽꾼(2).
그러한 한편.
낙양의 동문 옆 번화한 주택가에 자리잡은 대장원(大莊園), 숭양이가장(嵩陽李家莊).
낙양의 사람이라면 코흘리개 아이들까지 알고 있는 낙양 최대의 거상(巨商)이자 대부호 중 하나인 금판자(金板子) 이세명(李世明)의 저택이었다.
금판자 이세명!
그는 본래부터 상가(商家)의 출신이 아니었다.
낙양의 가난한 한 소작농의 출생으로 대지주 아래에서 뼈가 휘도록 일을 해 간신히 생계를 연명하던 부모를 뒀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청년기에 접어들 즈음, 때 맞춰 희대의 풍운아 주원장이 원을 상대로 대풍운을 일으켰고, 이때 그는 전쟁터 속에서 흩어진 쇠붙이를 주워 모아 되파는 일을 시작했다.
여기에서 주어진 수익으로 밑천을 만든 후 상계(商界)에 뛰어들어 무역을 시작, 마침내 오늘 날에 이르런 입지적 인물이었다.
특히 어려웠던 시절을 잊지 않고 손닿는 데로 가난한 이들을 위해 선심을 베풀었기에 천하에 칭송이 자자한 터이었는데...!
하지만 무역상이다 보니 나름대로 고충도 적지 않았다.
일년 중 절반에 가까운 날들을 외지(外地)에서 보내는 생활을 하고 있었고, 이로 인해 주인이 비어있는 이가장(李家莊)은 대개가 가라앉은 분위기였다.
“핫핫핫핫...!”
그럼에도 유독 오늘만큼은 이가장에 온통 활기가 넘쳐흐르고 웃음꽃이 피었으니, 한 번 무역을 떠나면 짧게는 한 달, 길게는 석 달 이상을 외지에 머물어야 했던 그가 마침내 저택으로 다시 돌아와 있었던 것이다.
*
고대광실(高臺廣室)...!
왕성을 연상케 하는 장원 중심부에 자리 잡은 내실에서 이세명은 식솔들과 함께 둘러앉아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핫핫... 역시 어딜 가도 내 집 만치 편한 곳이 없어! 나도 이젠 늙어가고 있는 것인지...!”
다섯 척 반의 중간키에 아직도 치기가 다 가시지 않은 듯 홍안을 지닌 중년인...!
주위에는 집사(執事) 서천(敍天)을 비롯한 몇몇 호걸풍의 장한들이 둘러앉아 있었다.
특히 눈길을 끄는 인물은 이세명의 곁에 앉은 그의 처(妻) 노숙아(魯淑亞)였다.
그녀는 여자치고는 체구가 크다싶은, 여섯 척에 가까운 키에 푸짐한 몸매를 가지고 있었는데, 뛰어난 미모는 아니라 해도 달덩이 같이 환한 얼굴과 연신 온화한 미소가 흐르는 입술 등 얼굴에 온통 복록이 그득히 붙어 있었다.
그녀는 빙그레 웃음을 떠올리며 말을 받았다.
“고생 많으셨군요. 가셨던 길이 무난하셨다니 더욱 다행이고요. 북평(北平) 쪽은 별 일 없던가요?”
사뭇 호걸스러운 음성!
이세명은 흡족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야 장인어른께서 계시는데 무슨 일이 있으려고. 홍복강녕(洪福康寧)하시고 매사가 일사천리인 어른이신데!”
그는 집으로 돌아온 게 못내 기쁘다는 듯 연신 싱글벙글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안부 전하라 하시더구먼. 특히 요즘 들어 돈황(敦荒)쪽 움직임이 심상찮으니 조심하라고.”
노숙아는 습관처럼 후덕한 미소와 더불어 고개를 끄덕였다.
“이를 말씀인가요. 안 그래도 사방이 뒤숭숭한데.”
“하지만 이번은 좀 내용이 다른 것 같어. 이곳 낙양 쪽에서 크게 서기(瑞氣)가 일어나고 있다는 말씀이야.”
“낙양에서 서기가...?”
노숙아는 변함없이 후덕하게 미소지었다.
“말씀이 틀리신 적이 없는데 혹시 서문세가란 말씀이실까?”
시선이 문득 맞은편의 장발의 중년인에게로 옮겨졌다.
그는 흑의경장 차림에 머리카락을 어깨아래까지 길러 치렁치렁 늘어뜨리고 있었는데, 돌 같은 얼굴에 강물처럼 깊숙이 가라앉은 눈빛이 필시 무림인, 그것도 예사의 고수가 아닌 것 같은 느낌의 인물이었다.
“중범(重梵), 자넨 그 쪽에 가까우니 뭔가 알겠지?”
중범! 중년인은 가볍게 흠칫하는 기색을 보였으나 곧 본래의 표정을 되찾으며 묵직하게 대답했다.
“서문대인, 예삿 분 아니지요. 확실히 큰 인물입니다.”
노숙아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뿐인가?”
중범은 묵직하게 두어 번 고개를 끄덕였다.
“아는바가 없어서... 그냥 그렇습니다.”
그러나 노숙아는 그러한 그가 더 미더운 듯 여장부다운 호쾌한 웃음을 토해냈다.
“하하... 지나치게 말을 아끼는군.”
이세명이 다시 노숙아를 보며 입을 열었다.
“그 밖에 얼마 전 내린 비로 합천지방에 또 큰 홍수가 진 모양이더구먼. 상련(商聯)쪽에서 도움을 주자는 말이 있던데 우리도 뭔가를 좀 해야 할 것 같아.”
“소문 들었지요. 또 강이 범람했다고.”
노숙아는 후덕한 미소와 함께 크게 고개를 끄덕인 후 이번에는 시선을 우측, 잠자코 듣고 있던 육십 세 가량의 노인, 집사(執事) 서천(敍天)에게로 돌렸다.
“서천, 올해 수익이 얼마던가?”
서천은 뭔가를 잠시 생각하는 듯 하더니 곧 조심스레 말을 받았다.
“세말(歲末)이 머니 확실히는 알 수 없습니다만, 이대로라면 대략 이십만 관이 좀 넘지 않을까 싶습니다. 현재 십만 관 가량이 들어와 있습니다.”
“그럭저럭 많이 했군. 오만 관을 보내게.”
순간이었다.
“오만...?”
이세명의 눈이 휘둥그레 뜨여졌다.
“절반이라면 너무 과하지 않아?”
노숙아는 변함없이 후덕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죽으면 싸 짊어지고 갈 것도 아니잖습니까? 당신 이름으로 베푸는 것인데 기왕 쓸 선심이라면 크게 쓸수록 좋은 게지요.”
기왕 쓸 선심이라면 크게 쓸수록 좋다...!
이세명의 얼굴에 엄청 난처한 표정을 떠올랐다.
“글쎄, 그렇다 쳐도... 임잔 너무 통이 커서...!”
아닌 게 아니라 후덕해 보이는 면모만큼이나 확실히 지나치게 통이 크다 싶었다.
묵묵히 있던 중범이 다시 입을 열었다.
“워낙 장강(長江)이셔서 그렇습니다. 덕(德)이 대대로 끊어지지 않으실 것입니다.”
이세명은 당혹스런 기색을 떠올렸으나 곧 커다란 웃음으로 바뀌어졌다.
“핫핫... 이러고도 망하지 않는 게 용타만... 어쨌건 마누라가 장강이라니 썩 기분은 좋군!”
이세명은 다시 노숙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한데 훤백이는 왜 보이지 않소? 꽤 늦는 것 같은데...?”
노숙아는 힐끗 서천을 한 번 살펴본 후 말을 받았다.
“곧 오겠지요. 다 큰 아이니 심려치 마세요.”
그러나 이 부분에 대해서만은 내내 웃음을 잃지 않던 이세명도 영 못마땅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하나뿐인 자식이라고 애지중지 키웠더니 걸핏하면 사고만 치질 않나, 아까도 적산선생이 오셔서 문제가 많으니 각별히 주의를 주라고 당부하고 가셨소!”
하지만 노숙아는 변함없이 웃으며 대답했다.
“확실히 학문에는 별로 뜻이 없는 것 같지만... 그래도 때가 되면 뭐라도 할 것이니 안심하세요.”
“이런, 이런...!”
이세명은 난처한 빛을 떠올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특히 문제는 바로 임자야. 워낙 배포가 크다는 것은 알지만 자식 농사까지 이래서야...!”
못내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는 듯한 태도였다.
그러자 중범이 다시 묵직하게 말문을 열었다.
“안심하셔도 될 것입니다. 어리셔도 도련님 예삿 분 아니십니다. 태산(泰山)이십니다.”
“태산...?”
순간이었다.
이세명의 눈이 일순 세상에서 제일 괴상한 이야기를 들었다는 듯 휘둥그레졌다.
그것도 잠시 그는 다시 파안대소를 터뜨렸다.
“핫핫핫...! 자넨 아무나 다 장강에다 태산이로군. 그런 녀석이 태산이라면 난 하늘 아닐까?”
그러나 중범의 묵직하고도 진지한 태도는 변함이 없었다.
“물론 가주님께서 하늘이시라면 하늘이시겠지만, 그러나 도련님이 태산이시라는 것은 확실합니다.”
“핫핫핫...!”
이세명은 도저히 못 참겠다는 듯 더욱 크게 웃음을 터뜨렸는데...!
이때 문에 드리워진 발을 걷어 올리며 하나의 인영이 거침없이 성큼성큼 실내로 들어섰다.
“다녀왔습니다!”
“아... 도련님!”
훤백!
한창 화제의 대상이 되고 있었던 골치덩이였다.
하나 오가던 이야기가 뭔지 알리 없는 훤백은 우선 이세명에게 넙죽, 허리를 숙이며 큰 소리로 인사부터 해 보였다.
“오셨습니까, 아버님!”
이세명의 이맛살이 일순 잔뜩 찡그려졌다.
“호랑이 제 말하면 온다더니 역시 양반은 못될 놈이로군? 왜 이리 늦었어?”
훤백은 이세명의 앞에 척! 자리부터 잡고 앉았다.
“하학 후 볼 일이 좀 있어 마치고 오느라고 늦었습니다.”
이세명의 입가에 재미있다는 듯 야릇한 웃음이 떠올랐다.
“히히히... 우리집 도련님께서 볼일이라? 혹시 그게 힘없는 애들 두들겨 패고 다니는 일은 아니었던?”
훤백의 얼굴에 일순 움찔하는 기색이 스쳤다.
척 보니 하는 폼이 뭔가를 아는 듯한 말투 아닌가?
그러나 정색을 하고 슬그머니 모른 척 말꼬리를 돌렸다.
“무슨 말씀이신지...”
“솔직히 불어 임마!”
순간 이세명은 날카롭게 훤백을 쏘아봤다.
“너 방과 후 애들이랑 싸웠지! 왕창 상처를 입히지 않았냔 말이다!”
“아, 그거...!”
훤백은 황급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녀석들이 먼저 시비를 걸었습니다. 이유 없이 때리려 하기에 소자 정당방위(正當防衛) 수준에서 조금...!”
“조금인 정도가 코뼈에 어금니를 부수는 거냐? 무겁게 하면 아주 살인 하겠다?”
이세명은 도저히 참지 못하겠다는 듯 버럭 소리를 질렀다.
“오자 바로 적산선생께서 다녀가셨다! 듣자니 하구한날 학업은 제쳐두고 달아나 낮잠만 잔다고 하시던데?”
“아... 그거...! 그게 또 일부러 그러는 게 아니라 자꾸만 잠이 들어버려서...!”
훤백은 억울한 표정을 지어보이며 변명했다.
“어쨌건 싸움은 분명 제 잘못이 아닙니다. 미안하다고 사과를 했는데도 녀석들이 행패를 부려...!”
그러나 이세명의 노기를 가라앉히기엔 어림없었다.
“마! 네가 먼저 원인제공을 했잖아! 공부하러 간 놈이 잠이 오던?”
궁지였다.
이쯤 되자 훤백도 아예 눈을 딱 감은 채 하늘이 무너져도 버티겠다는 듯 우겨대기 시작했다.
“글쎄 말씀드렸듯이 일부러 그러는 것도 아니고 저도 모르는 틈에 자꾸 잠이 들어 버리는 것이라서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 아마도 이유는 재미없는 공부보다 무공(武藝)를 더 배우고 싶어서 그런 듯 하온데, 아버님도 아시지 않습니까.”
“어째...?”
찰나 이세명의 눈이 세상에서 가장 어이없는 말을 들었다는 듯 부릅떠졌다.
“자식이 어디서 또 그 되어먹지도 않은 헛소리를! 장사꾼의 아들이 무공을 배우다니 어디 될 성이나 싶은 소릴 하는 거냐?”
그럼에도 훤백은 눈 한 번 깜박하지 않고 계속 말을 이었다.
“글쎄 거 뭐...! 상인의 아들이라 해서 무공을 배우지 말라는 법은 없지 않습니까? 무엇보다 건강에도 좋고 이 험한 세상에 호신도 할 겸...!”
“시꾸랍!”
이세명은 더 이상 거론할 가치도 없다는 듯 단호하게 훤백의 말을 잘라버렸다.
“한두 번 한 이야기도 아니다만 거기에 대해서는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아비는 네가 문관이 되거나 대를 이어 상인이 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지원도 할 수 없다.”
훤백 역시 더 이상 여기에 대해서는 거론치 않았다.
상황을 보면 이미 여러 차례에 거쳐 오간 이야기인 듯한 눈치 아닌가.
더불어 여기에서 풀린 의문!
학사인 그가 관서표국의 담장을 기웃거렸던 것은 무공에 대한 관심 때문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하나 부친인 이세명은 크게 반대하는 모습이었고, 이에 훤백은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그 밖에 또 부탁이 하나 있습니다. 소자 용돈이 좀 필요합니다.”
딸꾹!
순간이었다.
이세명의 눈이 휭 하고 돌아갔다.
“용돈이라고라...?”
괴상한 태도...!
기실 어느 집에나 자식들이 부모에게 용돈을 타 써려하는 것은 보통 아닌가.
한데도 이세명은 유독 그 한마디에 심장이 벌렁거릴 만큼 엄청난 충격을 받고 있었는데...!
그러나 뭐 사실 그럴 만도 한 것 같았다.
곧 따라 나온 훤백의 요구액이 그야말로 골을 때렸던 것이다.
“별로 많지도 않습니다. 금자(金子) 만 냥만 주십시오.”
“어째?”
이세명의 눈이 왕방울만치 휘둥그레지더니 급기야 어이없다는 듯한 웃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카카카...! 이게 또 발작을 시작했군! 금자 만 냥이 무슨 뉘 집 개 이름인줄 아나? 그만한 돈이면 한 고을을 통째로 살만한 거액이거늘...!”
확실히 황당하기 그지없는 요구였으나 무엇을 믿고 그러는지 그러나 훤백은 끝까지 떼를 썼다.
“반드시 있어야할 액수입니다. 꼭 좀 주십시오.”
“시끄랍! 나 그런 돈 없닥!”
이세명은 더 대답할 가치조차 없다는 듯 결국 꽥 소리를 지른 후 얼른 시선을 돌려버렸다.
이때였다.
잠자코 듣고 있던 노숙아가 뜻밖에도 기막힐 소리를 했다.
“그냥 달라는 데로 주세요.”
“줘...?”
찰나 이세명의 눈이 세상에서 가장 놀라운 말을 들었다는 듯 찢어지게 부릅 뜨여졌다.
기실 금자 일만 냥!
아무리 이세명이 낙양부호라 하지만 이는 실로 작은 돈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나 노숙아는 늘랍게도 별것 아니라는 듯 푸근하게 웃으며 계속 토를 달았는데...!
“저 아이가 용돈을 달라고 하는 것은 태어난 후 오늘이 두 번째입니다. 있으니 달라는 것인데 그것도 못준다면 부모의 위신 문제인 것입니다.”
“대체 뭔 소리야, 이게!? 당신 또 재벌 딸 티내는거 아냐?”
이세명은 그야말로 오금이 벌벌 떨리는 꼴이 되었다.
“설마... 이 골빈 놈...! 저 첫 번째 사건을 잊진 않았을 터인데?”
필경 무엇인가 괴상한 일이 있었던 것임에 틀림없었다.
하지만 노숙아는 그러한 이세명을 쳐다보지도 않고 부드러운 웃음과 더불어 훤백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내가 주마. 대신 싸우고 다니지 않는 거다?”
훤백은 그러한 모친이 크게 미덥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하겠습니다.”
순간 이세명은 목에 핏줄까지 세운 채 빽 소리쳤다.
“안돼! 죽어도 난 못줘!”
훤백은 그런 그에게 오히려 넙죽 절을 올려 보였다.
“금자 만 냥이 결코 적은 돈이 아닌데 아버님께서 주신다니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습니다. 하해 같으신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뭐?”
이에 이세명이 어리둥절해 하는 사이 훤백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성큼성큼! 밖으로 걸어 나가기 시작했다.
“열흘 후까지 주시면 되겠습니다. 부도수표는 사양합니다. 그럼 소자는 이만!”
“얌마! 내가 언제 준다고 했어? 죽어도 못준데두!”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이세명은 마침내 기대고 있던 목침까지 휙! 집어 던졌다.
집사 서천이 그만 쿡, 실소를 터뜨렸다.
“크크크...! 어째 볼 때 마다 가주님과 도련님은 서로 바뀌신 것 같다는 느낌이 드는군요.”
“바뀌다니?”
“도련님께서 워낙 엉뚱하시다는 것은 잘 알고 있지만, 그렇다 쳐도 장주님은 아이 같으시고 도련님이 더 어른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입니다.”
중범이 끼어들어 아주 점잖게 한 마디 거들었다.
“그게 장유(長幼)를 떠나서 그릇차이가 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쪽박으로 바닷물을 다 퍼 담을 수 없다는 이치인 것입니다.”
“이것들이 지금 누굴 놀리나? 그 소린... 내가 쪽박이라 이거야?”
기어코 이세명의 입에서 또 한 번 비명 같은 외침이 터졌는데, 그러나 중범은 여전히 눈을 딱 감고 아주 점잖게 말을 이었다.
“역시 그릇 크기에서 차이가 나 보이는 것은 어쩔 수가 없는 것입니다. 내생에는 부디 마님과 바꿔서 태어나시는 게 어떨까 싶습니다.”
“이런...!”
이세명은 절대 더 이상 노기를 참지 못하겠다는 듯 둥둥, 소매를 거더부치며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불난 집에 부채질이라더니... 중범이 너마저 배신 때리지?”
하지만 그것이 끝이었다.
이세명이 더 이상 소리칠 새도 없이 그의 몸을 향해 뭔가 희뿌연 백광이 한 번 번뜩 하는가 싶더니, 그의 의복 윗도리가 십자(十字)모양으로 길게 갈라져 나풀거린 것이다.
“헛...!”
이세명은 자신도 모르게 눈이 홱 돌아갔고, 중범은 계속 느긋하게 다음과 같은 말을 뱉었다
“도전하지 마십시오. 정히 해보고 싶으시다면 목을 씻고 오시면 되겠습니다.”
실로 기가 막힐 노릇.
이세명은 끝내 목에 핏줄을 세우고 미치겠다는 듯 소릴 내질렀다.
“됐어! 피곤해서 난 그만 쉬러 갈래! 너희 끼리 잘해 봐라! 난 이래서 정말 집이 싫어!”
“핫핫핫... 제일 좋다하실 때는 언제고!”
이세명을 제외한 중인들은 일제히 커다란 웃음을 터뜨렸다.
주종과 상하가 따로 없는, 그야말로 괴짜라고 봐야할 정도로 기묘한 유대관계를 지닌 집안...!
그러면서도 놀랄 만치 화목함을 유지하는 집안임을 알 수 있는 면면들이었다.
첫댓글 잘 보고 갑니다
잘밧어요
즐독했어요
잘 보고 갑니다. 감사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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