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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춘무림(靑春武林) ] 제 4 장 강간(强姦).
[ 강간(强姦). ]
열흘 후.
찌는 듯한 무더위 속에 매미소리가 자자하게 울려오는 낙양의 중심부에 자리잡은 금문(金門) 안이었다.
미시(未時) 무렵, 수많은 행인들이 활보하는 거리의 중간어림에 자리 잡은 객잔을 겸한 주루인 진성루(辰星樓), 이곳에서 크고도 야릇한 웃음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히히히… 낙양 참 많이 좋아졌구먼. 한동안 못 본 새에 몰라보게 더 뷰티풀해 졌어.”
제멋대로 양인의 말을 섞어 지껄여 대는 어투...!
도천, 분명 그의 음성이었다.
실로 어처구니없었지만 바로 그가 이곳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던 것이다.
불과 열흘 전까지만 해도 중상을 입고 몸조차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상태로 나타났던 그가 벌써부터 술이라니...!
그만한 중상이라면 설령 화타(華陀)가 살아 돌아온다고 해도 그 짧은 시간에 쉽게 아물게 할 수 없었을 터인데도...!
하나 그럼에도 도천은 분명 주루 이층의 창쪽에 위치한 자리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는데, 날씨가 더워서인지 아예 상의까지 완전히 풀어헤친 자세로 의자에 몸을 기대고 있었다.
몸은 온통 붕대로 칭칭 감겨 있었지만 아픈 기색조차 별로 없었다.
술 또한 마셔도 보통으로 마시고 있는 게 아니었다.
현재 그가 앉은 탁자 위에는 안주 서너 가지와 한 되짜리 술 항아리가 무려 십여 개나 구르고 있었다.
더구나 술잔조차 보이지 않는 형상이 이건 아예 항아리 째 들고 마시는 눈치가 분명한 터이었는데...!
입증이라도 하듯 그는 또 술항아리를 집어 들고 벌컥벌컥 한참이나 술을 들이 킨 후에 탁-! 다시 탁자 위에 내려놓으며 크게 소리쳤다.
“크아아악! 역시 좋다! 한동안 입에 대지 못했더니 술벌레들이 아주 부르스를 쳐대는구만! 도무지 취하질 않으니 서너 말은 더 마셔야 소식이 오겠어.”
맞은편 의자에 앉아 물끄러미 지켜보던 훤백이 다소 걱정스런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괜찮긴 한거야?”
도천은 으적으적 안주를 씹다말고 훤백을 쳐다봤다.
“괜찮냐니, 뭐가?”
“벌써 한 말 넘었어.”
“카카카...! 이 정도로 취한다면 대장부가 아니지.”
도천은 별 해괴한 소릴 다 들어보겠다는 듯 고개를 쳐들고 또 한 번 특유의 대소를 흘려내었다.
훤백도 피식 실소를 흘렸다.
“뻗지만 말아! 업고 가자면 나만 힘들어질 테니까.”
“자식이 볼수록 쓸만한 물건이란 말씀이야?”
도천은 묘하다는 듯한 눈빛으로 이런 훤백을 바라봤다.
“너 궁금하지도 않냐?”
“뭐가?”
“우리가 만나게 된 게 벌써 열흘이 지났다. 한데 그간 네 녀석은 나에 대해 하나도 뭔가를 묻지 않았지? 어쩌다 이 꼴이 됐느냐는 것은 고사하고 이름조차도 아직 묻질 않고 있어! 이건 보통 사람들로서는 할 수 없는 행동인 것이다.”
그렇다면 훤백은 아직 도천의 이름조차 모르고 있다는 뜻이 아닌가...?
하나 훤백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휙, 고개를 저었을 뿐이었다.
“까짓게 뭐가 그리 중요해. 난 형이라 부르기로 했고 형은 그걸 허락했지! 그럼 우린 형제인 거야. 때가 되면 어련히 알아서 말해 줄 건데 귀찮게 뭐하러 물어?"
장군 멍군...!
도천은 히죽이 웃었다.
“자식! 그렇다면 내가 묻도록 하지. 훤백 대체 넌 누구냐?”
훤백은 담담하게 말을 받았다.
“이름은 아니까 됐고, 본(本)은 숭양이가(崇陽李家). 아버진 조그맣게 장사를 하시는데, 금판자 이세명이시라고 하셔.”
도천은 뜻밖이라는 웃었다.
“히히히... 상인의 아들이라! 필시 보통 상인이 아니시겠군. 자식을 이정도로 키워낼 분이라면 여간 통이 크지 않을게 분명하지. 난 도천(陶泉)이다! 무림에 몸담고 있는데 친구들은 나를 전신(戰神)이라고 부르지.”
“전신(戰神)...?”
순간 훤백의 얼굴에 흠칫 놀라는 기색이 떠올랐다.
그러나 다시 담담한 표정으로 바꾸며 이죽거렸다.
“굉장한 별호로군. 마치 금방이라도 염라대왕과 한판 뜰 것 같은 별호인데?”
도천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히히... 이래뵈도 내가 곧 무림에서 일(一)이 아니면 이(二)가 되는 몸이시다! 이런 나를 형으로 모시게 된 넌 무척 행운아인 셈이지.”
한두 번 나온 이야기도 아니고... 이쯤 되면 실로 대단한 자부심이 아닐 수 없었다.
기실 이 넓은 중원천지에서 누가 감히 이같이 스스로를 칭할 수 있을 것인지...!
하나 도천은 계속 눈에서 날카롭게 정광을 뿜어내며 말을 이었다.
“여튼 본의 아니게 네게 큰 신세를 지고 말았어. 이런 일은 처음 같은데 그냥 넘어갈 수도 없고... 뭔가 좀 해줘야 할 것 같은데 혹시 필요한거 없냐?”
훤백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신경 쓸 필요 없어. 떨어진 물건 업어다 조금 치료해준 것뿐이니까.”
“히히히... 졸지에 물건 신세가 됐군!”
도천은 다시 한바탕 웃었다.
“어쨌건 그건 네 생각이고, 난 신세지곤 못사는 놈이란 말씀이시다. 이걸로 신경 쓰게 하지 않으려면 제발 뭔가 좀 부탁해라.”
장난스런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도천의 눈에서 뿜어지는 섬광은 더욱 짙어지고 있었다.
훤백은 부득이 고개를 끄덕였다.
“형제가 된 것만으로도 충분하지만 정 그렇다면 무공이나 하나 가르쳐 줘. 난 꽤 무공이 고프거든.”
도천의 눈에 얼핏 기광이 스쳤다.
“무공 고파...?”
“아아, 집에서는 내가 학문으로 벼슬아치가 되길 바라지만 난 무공을 더 익히고 싶어. 그래서 눈동냥, 귀동냥 하면서 훔쳐 배우기도 하는 처지야.”
“부모님이 반대하신다면 난처한데?”
도천은 선뜻 내키지 않는 표정을 지었다.
“무림인이 되고 싶은 거냐?”
훤백은 휙,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냥 좋은 거지. 아버지의 뜻은 실로 단순한 거야. 상인의 아들이니 당연히 가업을 이어야 하겠지만 그 세계는 형제까지 팔아먹는 곳인데다가 오가면서 항상 위험에 처한다는 것이지. 그래서 벼슬아치가 되길 원하시는 건데, 하나 그곳 역시 크게 만만치는 않잖아? 온갖 권모술수가 난무하는 곳인 만큼 자칫하면 목이 달아나지. 위험한건 어디서나 똑같거든. 무공이라도 배워두면 앉아서 당하진 않을 거 아냐.”
말인즉 옳았다.
“팍팍 돌아가는군.”
이에 도천은 다시 히죽, 웃었다.
“내게서 어떤 무공을 배우고 싶으냐?”
훤백은 서슴치 않고 대답했다.
“내공(內功)이야. 외가무공(外家武藝)은 눈으로도 훔쳐 배울 수가 있어. 그렇지만 내가무공은 눈으로 봐서 배울 수 있는게 아니거든. 가장 배우고 싶은 것은 격공술수(擊功術數)인 셈인데 무지 센 놈으로 배워보고 싶어.”
도천은 당연하다는 듯 크게 웃었다.
“히히히... 아마도 하늘로 솟구치거나 장력(掌力)을 날리는 것이 부러웠던 모양이군! 하지만 배우려면 그것만으로는 안돼. 원래 내가기공(內家氣功)이란 두 개가 하나로 되어 있으니까! 그 중 하나가 우선 운기조식으로 체내의 내력(內力)을 키우는 단전심법(丹田心法)이고, 또 하나가 그렇게 키운 내공력을 밖으로 쏟아내는 격공술수(擊空術數)인 것이지. 이 두 가지가 병행되어야만 내공을 배웠다고 할 수 있는 거다.”
하나 훤백은 휙,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는데, 그래도 내가 배우고 싶은 건 격공술수야. 기왕이면 무지 센 걸로 배우고 싶어.”
“…….”
그러자 도천은 한참 고개를 들어 천장을 바라보더니만 마침내 뭔가를 생각해낸 듯 재미있다는 듯 야릇한 웃음을 머금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좋아, 원한다면 진짜 지독한 놈을 하나 가르쳐 주지! 내가 가진 것 중에 가장 무서운 놈으로”
“정말이야?”
순간 훤백의 얼굴에 크게 밝은 기색이 떠올랐다.
하지만 이들 두 사람의 이야기는 여기에서 더 이상 이어질 수 없었는데...!
까닭은 도천이 자리에서 몸을 일으킴과 함께 실로 우연이라 할 수밖에 없는 일이 벌어지고 말았던 것으로, 막 주루 이 층의 계단 쪽으로 올라오던 한 쌍의 기이한 차림을 한 남녀와 눈길이 마주치고 만 것이다.
“헛! 이게 누구야...!?”
찰나 도천도 올라오던 남녀도 일제히 대경실색의 표정이 되었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대체 이들이 누군가!
여인은 삼십 초반 정도의 나이로 화사한 백의궁장에 보기 드문 미모를 갖추었으며, 손에는 멋스럽게 만들어진 큰 부채까지 들고 있어 오가는 사람들 중 눈길을 주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반대로 사내는 그녀와 정반대로 무려 팔 척이 넘을 듯 어마어마하게 큰 체구에 더운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두터운 모피옷을 입고 있었으며, 손에는 태산이라도 단 번에 두 쪽을 내어버릴 듯 거대한 청룡언월의 장창을 움켜쥔 사십대 중반의 장한이었으니...!
호면천황(虎面天皇) 진광(晋光)과 우화동녀(雨火洞女) 구문옥(九門玉)!
그러했다!
열흘 전 그 밤, 피투성이의 몰골로 도천이 낙양에 모습을 드러내었듯 이들은 또한 지난 무산에서의 싸움 이후 계속 그를 추적해온 장본인들이었던 것이다.
그야말로 원수가 외나무다리에서 만난 격!
순간 진광과 구문옥의 눈에서 시퍼렇게 불이 튀었다.
“오라! 쇠신이 다 닳도록 찾아다니던 놈이 바로 여기 있었군! 어느 쥐구멍에 숨었나 했더니...!”
도천의 얼굴에도 역력히 당황한 기색이 떠올랐다.
하나 그는 곧 잔뜩 애교스런 웃음을 떠올려 보였는데...!
“헤헤헤... 이게 구문옥이랑 진광 아냐? 역시 우린 상당히 인연이 깊은 것 같어! 어때 구문옥, 기왕 인연으로 다시 만났으니 우리 이 참에 근사하게 한 번 할까? 질퍽질퍽 미치게 해줄 테니까!”
끝까지 농담!
순간 구문옥의 이마에 핏줄이 툭툭, 튀어 오르는가 싶더니 와라락! 손의 부채를 고쳐 잡으며 공격자세를 취했다.
“봐도, 봐도 내 정말 너 같은 놈은...! 죽여 버리겠어! 결단코 너만은 용서할 수가 없으니...!”
그러나 도천은 농담을 거두지 않았다.
“히히히... 좋다고? 하지만 여기에선 좀 삼가자구. 아무리 네가 항아리 돌리길 좋아한다고 해도 이런 곳에서야! 신나게 놀려면 좀 더 조용한 곳이 좋잖겠어?”
구문옥은 오만 속이 다 뒤집히는 인상을 지었다.
“기어코 오늘 너를 들개 먹이로 주겠다...!”
뒤따라 그녀는 아무것도 가릴게 없다는 듯 혼신 공력을 파초선 속에 집중시켰으니...!
우르릉...!
즉시 그녀의 몸에 엄청난 잠력이 일어났다.
그야말로 백주 대낮, 그것도 엄연히 왕법이 적용되는 낙양 한복판의 주루에서 난장판이 벌어질 판국인 것이다.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깨달은 훤백이 급히 도천에게 말했다.
“형, 동남쪽이야! 성 밖으로 나가서 사십리(四十里) 더!”
성 동남쪽!
도천은 즉시 고개를 끄덕였다.
“히히히... 그래! 구문옥, 성밖 어딘가에 분위기 좋은 러브객잔이 있데! 역시 항아리라면 거기에서 돌리는 게 더 좋겠어!”
구문옥의 안색이 홱 돌변했다.
“이게 또 도주하려고...!”
하지만 도천은 더 이야기 할 것도 없다는 듯 연기처럼 몸을 날려 쉭, 주루의 창밖으로 빠져나갔는데...!
“히히... 먼저 가서 방부터 잡아둘게 따라와!”
“역시 또...!”
깜짝! 구문옥의 얼굴에 더욱 당황한 기색이 떠올랐다.
그러나 결코 머뭇거릴 수 없는 처지!
“자식아! 너 거기 서지 못해?”
도천의 모습이 사라지기 무섭게 역시 날카로운 외침과 함께 연기가 사라져버리듯 호면천황과 더불어 주루에서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엎치락, 뒤치락 또 한바탕 소동이 일어날 판국인 것이다.
*
한데 문제는 훤백이 도천에게 귀띔한 성밖 동남쪽 사십 리 밖!
이곳에는 실로 뜻밖이라 할 수 있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아니, 뜻밖이 아니라 어쩌면 아주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는 상황일지도 모르는데, 본시 이곳에는 그야말로 대명이 천하를 뒤흔드는 대장원(大莊院)이 하나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서문세가(西門勢家)!
그러했다.
옛 한(漢)의 귀족이자 중원최대의 명문세가로 불리는 사대문중(四大門衆)의 하나로서 그 권세가 무림뿐만 아니라 황성에까지 미치는 바로 그 곳!
바로 유명한 명문세가가 여기에 자리 잡고 있었던 것.
특히 이르자면 이 대단한 문중이 언제 어느 때라고 약해진 적이 있었던가 마는, 근간에 이르러 서문세가의 세력(勢力)은 그야말로 최고조에 달했다.
까닭은 제십이대(第十二代) 서문세가주 금천수라(琴天修羅) 서문협(西門峽)의 탁월한 수완 때문!
그는 서문가의 십이 대를 통털어 가장 특출하다 전해지는 인물로서, 어린 시절부터 학문(學文)과 금기서화에 크게 능통했고, 무공(武藝)는 물론 상업 등 모든 분야에 걸쳐 천부적 능력을 지닌 것으로 알려져 있어 세인들은 이에 그를 금천군(琴天君)이라고 까지 불렀다.
*
한데 미시(未時) 말.
훤백이 도천에게 이쪽으로 가라고 귀띔을 한 시간은 공교롭게도 서문세가의 일례(日例)로 되어있는 실전수련(實戰修鍊) 시간이었던 것이니...!
본시 서문세가는 전통적으로 하루 한차례, 점심시간이 끝난 오시(午時) 후부터 미시 말까지 관례처럼 모든 인물들의 무공수련이 있었다.
미시 초에는 모두가 연무장(鍊武場)에 모여 합동으로 술수(術數) 수련을 했으나 중반 이후부터는 조를 나눠 실전에 버금가는 격렬한 수련을 하는 것이었다.
입증이나 하듯 과연 수만 평에 이르는 서문세가의 중심부 연무장에서는 현재 어마어마한 대회가 벌어지고 있었는데...!
방식은 전 가신들이 운집! 패를 둘로 나눈 후 어느 한쪽이 완전히 손을 들 때까지 무차별 서로를 공격해 가는 것이었다.
당연히 위험을 피해 내공(內功)은 사용하지 않고 목검이나 장봉으로만 승부를 겨루었다.
하나 아무리 내공을 사용하지 않는다 해도 개개인의 워낙 무공이 특출하다 보니 목검과 술수만으로도 노상 팔다리가 부러져 나가는 인물들이 속출했는데...!
“모조리 꺼꾸러뜨려 버려!”
“와아아아...!”
캉-!
“으아아앗...!”
입증이라도 하듯 연무장에서 치솟는 함성과 혼전은 과연 실전과 거의 다름없어 보는 이의 얼을 빠지게 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덤벼!”
퍽- 캉-!
“으아악...!”
특히 그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인물은 연무장의 정중앙에서 연신 포효를 터뜨리는 팔 척 거구의 청년이었다.
그는 시종일관 남들보다 절반가량이나 더 긴 목검을 휘두르며 마구잡이로 주위의 무사들을 후려쳐 꺼꾸러뜨리고 있었는데 그 위용이 실로 대단했다.
분명 내공을 사용치 않고 술수만으로 목검을 휘두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목검을 휘두를 때마다 주위에는 연신 폭풍 같은 검영(劍影)의 회오리가 일었고, 이로 인해 주위의 무사들은 추풍낙엽처럼 쓰러지거나 연신 피하기에 급급했다.
서문한랑(西門閑郞)!
바로 그러했다!
하남 최대의 무(武)의 귀재(鬼才)이자 서문세가주 금천군의 아들로 알려진 그가 이 실전 수련에 참여하고 있었던 것이다.
열이면 열, 스물이면 스물, 상대를 사방으로 쳐날려 버리는 엄청난 괴력!
지독히 거칠고도 무서웠다.
퍽- 퍽- 퍽-! 허나 끝없이 목검에 맞아 쓰러지면서도 망설이지 않고 서문한랑을 향해 계속 덮쳐드는 무사들의 용맹도 대단했다.
“소가주라고 봐줄 일 없다! 무조건 박살내!”
“흐아아아...!”
그야말로 벌 떼처럼 집중공격을 퍼붓고 있었던 것!
서문한랑 역시 연신 폭갈을 터뜨렸다.
“덤벼! 스치기만 해도 은 열 관을 상으로 준다!”
“와아아아...!”
콰자자작-!
“으아아악...!”
목검이 허공을 가를 때마다 섬뜩하게 울려 퍼지는 둔탁한 음향과 튕기는 핏줄기들!
말이 수련이지 이쯤 되면 진짜 실전을 방불케 하는 정경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한 한편.
이러한 정경들이 일목요연하게 내려다보이는 연무장 곁에 세운 한 높은 누각(樓閣)!
이곳에는 기도가 상상을 초월하는 몇몇 인물이 우뚝 서서 이러한 수련의 면면을 하나도 빠짐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그들 중 가장 앞쪽에는 서문한랑과 너무도 닮은 용모에 가슴까지 검은 수염을 길러 여덟 갈래로 길게 땋아 내린 팔 척 체구의 오십대 장한이 서 있었으니, 그가 곧 서문세가의 주인 금천군이었다.
주위에 시립한 인물들 역시 하나같이 기개가 뛰어난 인물들!
그중에서도 금천군의 바로 뒤, 좌우에 선 금의인(金衣人)과 은의인(銀衣人)은 두 눈에서 화등 같은 정광이 이글거리는 것으로 보아 결코 금천군 못지않은 대단한 내력을 지닌 인물임을 느끼게 했다.
문득 은의인이 입가에 흡족한 미소를 떠올리며 말문을 열었다.
“헛헛... 실로 대단한 괴력이군요! 적기군(赤騎軍)은 개개인이 거의 하남에서 적수가 없는데, 십 개조가 반 시진 동안 집중공격을 했으되 소가주(小家主)의 옷깃 한 번 건드리지 못하고 있으니...! 미루어 소가주의 무공이 화경(和境)에 접어든 듯 합니다!”
그러나 금천군은 얼굴에 전혀 표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마치 무뚝뚝함이 특징인 듯 고개조차 돌리지 않고 입을 열었다.
“썩 좋다고 할 수는...! 섭우(葉羽), 그대가 보기엔 어떠한가. 저 정도면 군림대회(君臨大會)에서 버텨낼 만 한가?”
금의인이 형형하게 번뜩이는 시선을 연무장에 고정시키며 말을 받았다.
“미지수(未知數). 하나 위용이 높으시니 서열을 놓치지는 않으시겠지요.”
금천군의 고개가 천천히 끄덕여졌다.
“금천군의 아들이 최소한 그 정도는 되어야지. 남북 십삼성이 아무리 넓다한들 같은 연배로 한자리에 세울만한 아이들이란 역시 같은 사대문중의 자제들 외엔 상상조차 하기 싫다.”
실로 대단한 자부심이었다.
은의인이 다시 이야기를 이었다.
“황보가(皇甫家)의 아들이 가장 마음에 걸립니다. 그만 피할 수 있다면 무난할 것도 같사온데...!”
금천군은 무뚝뚝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구태여 욕심을 부릴 필요는 없는 것이다. 우리 서문가가 천하에서 부러울 것이 무엇인가.”
은의인의 입가에도 흡족한 미소가 떠올랐다.
“하긴 뉘라서 감히 본가의 힘을 따르겠습니까마는...!”
마찬가지라 할 자부심!
그러한 중에도 연무장의 혼전은 더욱 가열되고 있었다.
퍽-!
“크아아...!”
“덤벼라! 더 강하게! 옷깃만 스쳐도 은 열 관이라고 했다!”
“와아아아...!”
한데 바로 이때였다.
혼전속의 연무장에 실로 상상치도 못했던 상황이 벌어졌다.
“비켜! 급하다!”
돌연 서문한랑과 무사들의 함성을 뚫고 호통이 터지는가 싶더니 번쩍! 성 외곽으로부터 하나의 인영이 나타나 종횡무진하던 서문한랑의 머리를 세차게 짓밟고 다시 튀어 오르지 않는가!
“헛...!”
이에 종횡무진으로 거칠게 목검을 휘두르던 서문한랑의 안색이 일변했다.
하지만 누군가를 미처 확인하기도 전에 인영은 허공으로 도약해 연무장의 건너편으로 사라져 갔다.
그야말로 눈 깜박 할 사이에 벌어진 일!
워낙 창졸간의 일이라 서문한랑조차 어찌된 연유인지를 몰랐다.
이에 정신없이 혼전을 벌이던 그는 아마 수하들 중 하나가 머리를 친 줄로만 알고 급히 목검을 거두며 소리쳤다.
“정말 훌륭하다! 지난 수 년 동안 한 번도 머리를 허용한 적 없거늘... 누구냐! 약속대로 크게 상을 내리겠다!”
하지만 엉거주춤...!
“뭐였지...?”
주위의 무사들은 저마다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며 웅성거릴 뿐이었다.
“우리 중에는 없습니다. 외부의 인물인 듯 싶습니다만...!”
“어째...!?”
순간 서문한랑은 어이없다는 표정이 되고 말았다.
“본 서문세가에... 그것도 이 벌건 대낮의 연무장에 외부인이 침입할 수 있기나 하다는 소린가?”
분명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만치 서문세가의 경비란 황성을 방불케 할 만큼 철통같은 것이었기 때문...!
그럼에도 무사들은 당황한 표정으로 계속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대답했다.
“하오나 확실히 소인들 중엔 없습니다. 서(西)에서 와서 소가주의 머리를 차고 동(東)으로 사라졌사온데...!”
“뭐가 어째...!?”
서문한랑의 표정이 벌레라도 씹은 듯 더욱 기묘하게 일그러졌다.
한데 이때였다.
장내에는 또 다시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개자식!어디 갔어?”
처음 인영이 출현했던 방향에서 느닷없이 한 여인의 앙칼진 외침이 터지는가 싶더니 번쩍! 또 다른 두 개의 인영이 출현한 것이다.
하나 그들은 앞의 인영처럼 사라지지 않고 중앙에 내려서서 오히려 독살스런 시선으로 주위를 쓸어보며 날카로운 외침을 토했다.
“야! 방금 이리로 온 녀석 어디 갔어?”
그야말로 어처구니없는 사태!
서문한랑의 표정이 결국 악마구리처럼 일그러졌다.
“이것들이...?”
보니 일남일녀로 서문한랑보다 더 큰 덩치를 가진 사내와 궁장차림의 미녀!
바로 구문옥과 호면천황 진광이었다.
상황을 살펴볼 것 같으면 앞서 나타나 서문한랑의 머리를 밟고 사라진 인물은 훤백이 일러준 대로 도망쳐온 도천이었고, 구문옥과 진광은 말할 것도 없이 정신없이 그를 추적하다 여기까지 들어온 게 분명했다.
이에 한창 수련 중이던 서문가의 무사들은 일제히 손을 거두고 어이없다는 듯 이들 두 사람을 멀뚱멀뚱 바라볼 수밖에 없었는데...!
워낙 경황 중에 쫓아오느라 구문옥과 진광은 아직도 자신들이 어떤 상황에 처했는지 모르는 눈치였다.
급기야 화가 머리꼭대기까지 치민 서문한랑이 툭툭, 이마에 굵은 핏줄을 돌출시키며 찍어 누르듯 구문옥을 노려봤다.
“나 서문한랑... 비록 그다지 오래 살지는 않았지만 정말 이런 어이없는 것들이 있으리라고는...! 대체 너희 년놈들은 무어라 부르는 것들이냐?”
“이것들 진짜 딥다리 웃기네...!”
동시에 연무장 사방에 흩어져 있던 무사들 역시 살기 띤 눈빛으로 구문옥과 진광을 에워싸기 시작했는데...!
“어...?”
그러자 홧김에 앞뒤 가리지 않고 들어왔던 구문옥과 진광도 비로소 뭔가 심상치 않음을 깨달았다.
진광이 눈을 꿈벅거리며 그제야 크게 당황한 표정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러고 보니 대체 여기가 어디야??? 이 자식은 또 어디로 간 거지?”
하지만 더 의문을 느낄 틈도 없이 서문한랑의 살기 어린 외침이 그의 의문에 쐐기를 박았다.
“어디거나 말거나 너희 두 놈은 죽어 줘야겠다!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어! 흐아아압!”
뒤따라 그는 즉시 지금과는 달리 혼신지력을 목검에 주입시켜 마구잡이식으로 구문옥과 진광을 향해 휘둘러 갔고, 찰나 장내에는 즉시 벼락이 치는 듯한 굉음과 함께 무수한 검영이 하늘을 뒤덮었다.
쿠르-르르릉-!
"아악!"
구문옥과 진광으로서는 당연히 혼비백산할 수 밖에!
“대체 이게 뭐야? 진짜 여기가 어디길래!"
얼결에 정신없이 오긴 했지만 이쯤 된 이상 제아무리 천하의 고수라 할지라도 눈알이 핑핑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
그러한 반면 약 반 시진 후, 서문세가로 부터 팔십여 리 정도 떨어진 낙양 서문 외곽의 한 허름한 초옥(草屋)!
“크하하하하...!”
언제부터인지 이곳의 툇마루에서는 구문옥과 진광을 이런 궁지로 몰아넣고 도망쳤던 도천이 앉아 배를 잡고 웃고 있었다.
“웃겼어! 성밖 동남쪽 사십 리! 그곳이 서문세가였다는 말이지!”
그야말로 어처구니없는 노릇!
앞에는 훤백이 씨익, 역시 장난기 어린 미소를 짓고 앉아있었다.
“카카... 정말 절묘하다! 그 골치 아픈 놈들 따돌리기에는 사실 그보다 더 적합한 장소가 있을 수 없지! 대체 어떻게 순간적으로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었던 거야?”
하나 훤백은 그쯤이야 보통이라는 듯 대답했다.
“뭘! 형이 쫓길 정도라면 그냥 만만한 인물들이 아닐 것 같아서...! 어쨌건 다른 곳도 아닌, 뛰어든 게 연무장이었다면 미안하긴 하지만 아마 지금쯤은 둘 다 나란히 염라대왕 앞에서 신고식을 올리고 있을 거야.”
말인즉 옳았다.
기실 천하에 대명이 쟁쟁한 서문세가, 그것도 천여 무사들이 운집해 무공을 수련 중인 연무장에 누군가가 침입했다면 당연히 살신지화(殺身之禍)를 면하기 어려울게 뻔한 것.
그러나 도천은 거듭 재미있다는 듯 크게 웃었다.
“핫핫...! 진짜 골때긴 하는군! 하나 녀석들은 실로 만만치가 않아. 물론 크게 혼이야 나겠지만!”
혼이야 나겠지만 실로 만만치가 않다...!
이번에는 훤백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소리야? 서문세가라면 중경무림 최대의 사대세가 중 하나인데?”
도천은 계속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알아! 서문세가가 대단하지 않다는게 아니라 그 녀석들이 실로 우습게 볼 녀석들이 아니란 말씀이지! 그래뵈도 자그마치 현 무림 최대의 두통거리인 혼천소마(混天素魔) 중의 둘이거든!”
“혼천소마...!”
순간이었다.
훤백은 자신도 모르게 가슴이 쿵! 내려앉음을 금치 못했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게 그의 기억에 의하면...!
우습게 여겨졌을지 모르지만 이들 혼천소마란 실로 보통의 인간들이 아니었다.
곧 현 무림에서 활약하는 서열 일에서 백까지, 총 일백 명의최대의 사인(邪人)들을 일컫는 것으로서, 일신의 무공이 하늘을 찌를 뿐만 아니라 기분에 따라 제멋대로 살상을 저지르고 다니는 가공할 인물들!
따라서 이들은 현 무림 최대의 고수라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무림인들은 물론, 일반 양민과 관군들에게까지 공적시(公敵視)되어 있는 최악의 악한들이었던 것...!
“그들이...!?”
이에 훤백은 내리 경악을 금치 못했지만 그러나 도천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히죽히죽 웃었다.
“히히히... 맞아! 그렇게 쉽게 죽을 것 같으면 소마라 할 수도 없지! 개개인의 기량조차 한 개 방파에 버금갈 정도로 무림맹에서 조차 골치를 앓는 놈들인데!”
실로 어처구니없는 노릇이었던 것...!
*
하지만 서문세가로서도 그들을 어쩔 수 없다는 것!
이런 도천의 말은 사실이었다.
입증이라도 해주듯 소동이 있은지 반시진이 지난 이 즈음! 그들은 확실히 생존해 있었다.
서문세가를 빠져나와 낙양 밖, 부소산의 한 숲 속에 주저앉아 눈이 휭휭 돌아가는 상태로 가쁜 숨을 내쉬고 있었을 뿐...!
“헉헉...! 교활한 자식! 약아도 진짜 지독히 약았어! 설마 우릴 서문세가로 유인할 줄이야...!”
얼마나 격렬한 접전을 벌였던 것인지 두 사람 모두 온 몸에 흠뻑 피를 뒤집어 쓴 상태였고, 옷이 거의 걸레처럼 너덜대고 있었다.
“죽여 버릴 거야! 도저히 이런 놈은 그냥 둘 수가 없어! 정말이지 난 그놈만은...!”
구문옥이 여전히 눈이 핑핑 돌아가는 우스꽝스런 표정으로 내리 뾰족하게 욕설을 내뱉었다.
꽤나 신경질...!
“확실히 뜻밖이긴 해.”
이런 그녀를 보며 진광이 씁스레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서문세가라 해야 지금껏 별거 아닌 걸로 봐왔는데 제법...! 특히 그 서문한랑이라는 애송이가 예사가 아니더군. 이 상태로 십 년 후엔 거의 적수가 없겠어.”
구문옥의 눈이 홱 뒤집어졌다.
“뭐예요! 오라버닌 지금 이렇게 혼이 나고도 오히려 칭찬을 하는 거예요?”
“응, 그래도 뭐 잘하는 건 잘한다고 해줘야 옳은 거지. 하남에 천하의 무재가 있다더니 서문가의 앞날이 크게 밝어.”
비록 천하에 악명 높은 혼천소마의 하나이긴 하지만 우직하게 생긴 외모만큼이나 어딘지 솔직한 데가 있는 위인인 것 같았다.
어두운 표정이 되었다.
“그나저나 이젠 어떻게 하지? 도망치는 상태를 보니 도천 그 놈도 몸이 어지간해진 치유된 것 같던데 계속 추적해야 하나?”
구문옥은 분노로 하얗게 안색이 변해 잘근잘근 입술을 씹었다.
“틀렸어. 그러기엔 시간이 너무 없고, 난 집회에도 참석해야 해요. 오라버니께서도 같이 가요.”
집회!
순간, 진광의 호랑이 같은 눈에 흠칫하는 기색이 스쳤다.
“서백(徐白)형 이야기 같은데... 너 가려고?”
구문옥은 계속 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가봐야지! 큰 오라버니잖아. 중대한 이야기가 있데요.”
진광은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망설였다.
“난 서백형 싫어. 솔직히 나도 좋은 놈은 못되지만 서백형은 어쩐지 꺼림칙해. 왠지 사람이 너무 음험한 것 같아서 말이야.”
그러자 구문옥은 진광의 사뭇 흉폭해 보이면서도 우직한 면모를 살펴봤다.
“그럼 오라버닌 어쩌시려고요? 늘 함께 다니시던 사승오라버니도 죽었잖아.”
적발야차 휘사승!
진광은 얼굴에 더욱 암울한 빛을 떠올렸다.
“사승... 좋은 놈이었지. 좀 악랄하긴 했지만 그래도 솔직하고 의리가 있는 친구였어. 나야 머리가 나빠 따라만 다녔지만 생각도 깊었고...! 역시 도천을 건드렸던 게 실수 같아. 이제 난 어째야 할지 모르겠어.”
구문옥은 그러한 진광을 보며 표정을 누그러뜨렸다.
“아무래도 소매가 사승오라버니를 끌어들였던 게 실수 같아요. 보람도 없이 사람만 죽게 했으니... 오라버니에겐 더 미안하구요.”
진광의 표정이 더욱 어두워졌다.
“할 수 없지. 어차피 죽고 산다는 건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니. 그렇게 보면 무척 많은 놈들을 죽였지만 지옥이라도 좋은데 갔을 거야. 누굴 속일 줄도 모르고 의리 있던 놈이니.”
“그럴 거예요.”
구문옥은 생긋 한 줄기 미소를 떠올렸다.
“어쨌건 혼자 다니시기 뭣하시면 이제부터는 소매와 같이 다녀요. 내가 사승 오라버닐 대신해 줄께. 우선 서백오라버니부터 만나 봐요.”
씰룩, 진광의 안면근육이 가는 경련을 일으켰다.
“꼭 서백형에게 가야 돼?”
구문옥은 단호히 고개를 끄덕였다.
“할 수 없잖아. 무림맹에서 우릴 뒤쫓고, 도천 같은 녀석을 따로 만나면 더욱 위험하니 대책이 있어야 해요.”
진광은 못내 망설여진다는 듯한 표정이었지만 급기야 무겁게 대답했다.
“그럼 일단 만나보기로 하지. 난 머리가 나쁘고 넌 현명하니 당분간 같이 다니도록 하자.”
역시 많이 우직한데가 있는 인물인 것 같았다.
또한 이야기를 미루어 보면 도천의 손에 죽은 휘사승과는 오랫동안 같이 다녔던 것 같은 눈치로 구문옥과는 그다지 잘 아는 사이가 아닌 듯 했고...!
같이 가겠다는 말을 들은 구문옥의 얼굴에 크게 기쁜 빛이 떠올랐다.
“그럼 어서 가요. 사실 난 무척 결벽증인데 왠지 오라버닌 믿음이 가.”
결벽증!
“응, 나도 네가 믿음이 간다. 다친 데는 괜찮아?”
구문옥은 한 번 더 생긋 미소 지어 보였다.
“괜찮아. 가벼운 외상뿐이니까. 이건 다 오라버니가 녀석들을 막아줬기 때문이지.”
이어 두 사람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숲을 떠나 어디론가 사라졌다.
천하에 악명 높은 혼천소마이면서도 별로 악당 같지는 않은 남녀들...!
결국 도천을 추적하는 것은 포기하는 듯한 눈치였다.
*
한편, 이런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초옥의 툇마루에 앉은 도천은 계속 기묘한 웃음을 터뜨렸다.
“히히히... 그래도 구문옥이나 진광은 그리 나쁘지 않아! 성격이 거칠고 살상이 지나치다는 것뿐이지. 정작 악랄한 것은 소마의 맏이인 서백(徐白)이야.”
훤백은 두어 번 이마를 주억였다.
“소문 들었어. 살수집단(殺手集團)인 청사(靑舍)의 주인이라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 못 죽인 사람이 거의 없다면서?”
도천의 안광이 차갑게 번뜩였다.
“옳다. 워낙 점조직이라 본거지조차 알 수 없는 천하의 해충(害蟲)들이지. 오랜 세월 동안 천하각파의 인물들이 괴멸시키려 했지만 모두 실패했어. 그것들을 없앨 수 있다면 세상에 크게 공을 세우는 일이 된다.”
훤백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이상해. 자객집단이라면 어차피 청부를 받아야 할텐데 본거지를 찾을 수 없었다는 것이. 청부를 하는 척 위장을 하고 접근해보면 될 것 같은데?”
도천은 다시 야릇한 웃음을 터뜨렸다.
“히히히...! 벌써 다 해봤어. 놈들의 역사가 벌써 백 년인데 그렇게 쉬울 것 같으면 누가 괴멸시켜도 벌써 괴멸시켰지. 찾는다 해도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지만”
도천은 자세를 바로잡으며 훤백에게 말했다.
“그건 그렇다 치고 이리로 바싹 와서 앉아봐. 시작하자구.”
느닷없는 말에 훤백은 어리둥절한 심정이 되었다.
“시작하자니, 뭘?”
“주루에서 말했잖아, 격공술수을 배우고 싶다고.”
“정말 가르쳐 주려고?”
“암! 지금부터 내가 하는 것을 잘 기억하는 거야. 어서 앞으로 와 등을 돌리고 가부좌를 틀어라.”
이에 훤백이 엉거주춤 그의 앞으로 가 가부좌를 틀고 앉자 도천은 서슴없이 두 손을 각각 그의 등 뒤 명문혈(命門혈)과 영대혈(靈台穴)에 붙이며 신중히 말했다.
“한 번 더 이르지만 지금부터 넌 내게 몸을 맡기고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기억만 하는 거다! 괜히 당황하거나 해서 엉뚱한 짓을 하면 둘 다 크게 위험해 지니까!”
분명 지금까지 보여 온 도천의 태도와는 조금 다른 면모였다. 무슨 일이건 한 번으로 말을 끝내왔던 그가 두 번이나 주의를 주는 것을 보면 확실히 조심할 일이라는 게 분명하지 않은가.
“뭔진 모르겠지만 알겠어. 조심하지.”
“잘 기억해 둬라!”
그러자 도천은 얼굴에 더욱 신중한 표정을 짓는가 싶더니만 지체 없이 불끈 훤백의 명문혈에 갖다댄 두 손에 공력을 운집시켰다.
“내공의 시작은 어떤 것이건 단전(丹田)에서부터다! 기를 단전에 집중시켜 일단 백팔경락으로 회전 시킨 후, 사지팔해로 급속히 가져가는 것이지! 시작한다! 기해(氣海), 거궐(巨關), 기문(期門), 유부(兪府), 중부(中府), 천돌(天突), 백회(百會)...!”
“훕...!”
순간 훤백은 자신도 모르게 눈을 크게 휩뜨며 짤막한 경악의 외침을 토하고 말았다.
시작 소리와 함께 밀착된 도천의 장심(掌心)으로부터 돌연 무엇인가 내용을 알 수 없는! 펄펄 끓는 쇳물과 같은 엄청나게 뜨거운 기류가 뿜어 나와 배꼽 어림, 즉 단전혈로 운집되는가 싶더니만 곧 바로 사지팔해, 기경팔맥을 따라 벼락같이 폭주해 가기 시작한 것이었다.
흡사 불덩이의 해일이 들어와 몰려다니는 듯한 느낌!
하지만 고통이나 놀라움을 더 느낄 틈도 없이 도천의 다부진 외침은 계속 이어졌다.
“백회혈에서 기를 역순으로 틀어박듯 강하게 다시 단전으로 모은 후, 아래 중극(中極), 한부(寒府), 곡천(曲泉), 곤륜(崑崙), 금문(金門), 태위혈(太衛穴)로 움직인 다음 다시 역순으로 단전으로 가져간다! 이를 일주천이라 하며 이렇게 모여진 기를 단숨에 전신의 십이중천 백팔경락으로 퍼뜨린 후 극천(極泉), 소해(少海), 완맥혈(脘脈穴)로 가져가는 거다!”
도천이 투입시킨 진기(眞氣)는 비단 속도가 상상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기도 했을 뿐더러, 훤백의 전신으로 쫘악 퍼져나가 온 몸을 확확, 불덩어리처럼 마구 뜨겁게 달구었다.
그리고 다시 그게 단전으로 돌아온 후엔 두 줄기의 용트림하는 듯한 불길로 변해 도천이 말한 마지막 완맥혈에 이르렀을 때!
도천이 눈을 부릅뜨며 소리쳤다.
“손가락을 갈쿠리처럼 구부려 바닥을 한 번 길게 긁어!”
훤백은 손가락을 구부린 채 얼른 바닥을 긁어 올렸다.
찰나였다!
콰아아-앗-!
콱자자자작...!
“헉...!”
귀를 찢는 듯한 마찰음이 들리며 툇마루 바닥에는 경악스럽기 그지없는 상황이 벌어졌다.
도천의 말에 따라 훤백이 바닥을 긁자 돌연 체내의 불줄기 같았던 기류가 그의 손가락 끝으로부터 발출되었고, 두터운 나무판자로 된 마루바닥을 부챗살처럼 다섯 갈래로 쫙! 찢어발기며 사정없이 앞으로 쏘아가기 시작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 여력은 초옥의 벽에 까지 칼로 후려친 듯 다섯 줄기의 섬뜩하게 깊고도 긴 파흔을 남겨두고 사라졌는데...!
“대체 뭐야! 이게...!?”
훤백은 숨이 턱! 막히는 듯했다.
일반적인 경력이 쏟아지는 장력조차도 아닌 상상치도 못한 괴공!
길게 패여 있는 바닥과 벽의 파흔을 넋 나간 표정으로 바라보다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설마 이걸...! 내가 했다는 거야?”
하나 도천은 무슨 일이 있기나 했냐는 듯 퍼질러 앉아 히죽, 특유의 미소를 지어보였다.
“아니. 네 몸을 빌려 내가 한거다. 격공술수의 한 수법으로서 토조(土爪)라 하지. 땅의 손톱이란 뜻으로 전개되면 무엇이건 마음 먹은 대로 찢어발겨 버리지. 장력은 경력의 폭풍 같은 것을 일으켜 내는 수법이지만 이건 일종의 강기(?氣)의 변이수(變異手) 같은 것으로 장력마저 찢어내어 버린다! 약속했듯 내가 가진 무공 중에서 가장 센 놈이다!”
강기(?氣)도 아닌 그것의 변이수(變異數)!
“하지만 다시 일러도 네가 전개한 것은 아니야. 다만 난 이놈을 격발해내는 수법만 가르쳐 준 것이다. 느꼈겠지만 네게 투입시켜준 공력(功力)은 내 것이었지. 쉽게 가르쳐 주려고 진력으로 길을 알려 준거야.”
도천은 계속 흐물흐물 웃었다.
“어쨌건 약속은 지킨 거다. 이것으로 일차 신세는 갚은 걸로 하지.”
그러나 훤백의 놀라움은 여전히 가시지 않았다.
격발무공을 전혀 모르는 그라 할지라도 장력마저 찢어버릴 수 있다는 이 강기가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모를 리는 없었다.
특히 도천은 이 무공을 자신이 지닌 것 중에 가장 강한 것이라고 분명히 일러주기 까지 했던 것인데... 이것은 더욱 놀랍지 않을 수 없는 일인 것이었다.
기실 천하의 모든 무인 중에 자신의 독문 무공! 그것도 가장 강한 것이 라면 누구라도 그것을 남들에게 알려지지 않게 하려고 애를 쓰는게 당연한 이치가 아닌가!
한데도 도천은 이런 수법을 간단하게 자신에게 알려주고 있었으니...!
훤백은 크게 놀란 심정으로 물었다.
“무림인이 아니지만 난 무림인들이 독문무공을 얼마나 중히 여긴다는 것쯤은 알아! 이렇게 중한 무공을 함부로 줘도 돼?”
하지만 도천의 태도는 변함없었다.
별 일 아니라는 듯 히죽 웃었다.
“히히히... 자식! 네가 형님의 통 큰 것을 몰라본 모양이로군! 그렇다 쳐도 기우가 없는 한 오랫동안 그 무공을 쓸 수는 없을 거다! 빨라야 삼십 년 쯤 후? 그것도 간신히 흉내 정도만 낼 수 있을 거다!”
괴이한 소리!
훤백은 다시 어리둥절해지고 말았다.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배웠으면 당연히 사용할 수 있는 것 아냐?”
하나 도천은 홱, 고개를 저었다.
“이치상으로는 그렇지만 이 무공도 형님처럼 보통 통이 큰 무공이 아니거든! 다시 말하자면 이놈은 내력(內力)을 너무 엄청나게 잡아먹는단 말씀이야. 가볍게 전개하려 해도 최소한 삼십 년 공력, 내 수준으로 전개하려면 최소한 일갑자(一甲子) 이상의 공력이 필요하단거지. 따라서 지금부터 내공을 쌓는다고 해도 삼십 년 후에나 사용하게 되는 거야. 그것도 전력으로 쏘아내면 딱 한 번! 히히히히...!”
훤백은 그만 피식, 실소를 터뜨리고 말았다.
“괜히 좋아했군. 난 내력이 있으면 있는 만큼 발출한다고 들었는데.”
이런 그를 보며 도천은 다시 낄낄거리고 웃었다.
“정상적인 수법이라면야 그렇지! 하지만 이건 중원의 무공이 아니라구. 나도 이야기만 들었는데 이건 천축(天竺)의 밀종(密宗)인 브라흐만의 대법술(大法術) 중 하나라고 하더군.”
“천축밀종이라니...!”
쿵-!
찰나 훤백의 얼굴에 지금껏 놀란 중 가장 크게 놀란 기색이 떠오르며 자신도 모르게 벌떡! 자리까지 차고 일어섰다.
“무슨 소리야! 천축의 밀종이라면 같은 브라흐만의 승려들끼리도 전수를 않는다던데! 그건 소승(小乘)의 사문(沙門)이잖아! 이걸 어떻게 형이 배웠지?”
경악 그대로의 표정!
“이것 봐라...?”
일순 도천의 눈에 야릇한 안광이 떠올랐다.
“밀종의 내막도 알고... 생각보다 견문이 제법이잖아. 내게 전수해주신 분이 말씀해 주신 건데, 젊은 시절 우연히 천축으로 가셨다가 브라흐만의 한 선승(禪僧)이 우화(羽化)하신 동굴에서 얻었다고 하시더군. 어쨌건 이 무공에 대한 것은 이제 우리 둘만의 비밀이 되는 거다. 현 무림에서 이 무공을 아는 사람은 내게 전수해 주셨던 분과 나, 그리고 아마도 또 한 사람? 이렇게 넷 밖에 없으니까! 따라서 네가 자유자재로 이 무공을 전개할 수 있기 전에 세상에 드러나는 경우 살신지화(殺身之禍)를 입게 되는 것이다.”
사실이었다.
무림인들이라면 어떠한 기진이보 보다 무공을 더 소중히 여기는 법! 만약 훤백 같은 소년이 이런 초극의 수법을 안다는 것을 눈치 채면 어떤 일이 발생할지 불을 보듯 뻔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이때 훤백의 머릿속은 또 다른 복잡하기 이를 데 없는 문제로 골이 뻐개지는 듯 혼란한 상태가 되기 시작했는데...!
그는 도천의 이야기가 끝나고도 한참 후에서야 두서없이 입을 열었다.
“한 가지 더 물을게 있어. 형은 지금 이 무공이 밀종 법문의 것이라서 그렇게 엄청난 내력이 소모 된다고 했는데, 만약 유사한 밀종 심법을 가진 사람이 전개하면 어찌 되는 거야? 그래도 그만한 내력이 필요해?”
도천도 이 질문에 대해서만은 고개를 갸웃했다.
“글쎄... 그건 나도 모르지. 그런 심법은 구경조차 할 수 없는 진귀한 것이니까. 알다시피 브라흐만의 법술은 천축 내에서도 아무나 지닌 게 아니야. 법력이 극히 지고한 사람들만이 쌓아올리는 것인데, 이런 법술들은 후세에 전해지지도 않아서 당대에 모두 사라져버리지. 그러나 만약 얻을 수만 있다면 일반무공과 똑같이 전개할 수 있을 것 같아. 어쨌건 지금으로서는 내력을 너무 소진시키는 게 확실해. 내 자신조차도 전력을 다해 발출하면 단번에 힘이 거의 탈진해 버릴 만큼 소모가 심하니까.”
실로 기가 찰 수밖에 없는 소리였다.
배운들 삼십 년 후에나 전개할 수 있을만한 무공에 그나마 한 번이라니...!
“그럼 뭐 거의 쓸모가 없단 거네. 전개할 때는 그야말로 일격필살이지만 대신 한 번에 상대를 제압하지 못한다면 형이라도 오히려 당한단 소리잖아?”
도천은 다시 크게 웃었다.
“때문에 나도 아주 위급할 때만 사용하지만... 어쨌건 위력하난 아주 엄청나지. 그렇듯 심법이나 격공수법이란 원래 상승의 것일수록 오묘한데가 있는 거야. 심법은 내력을 키워내는 것인데, 이놈은 상승의 것일수록 빠르고 강력하게 힘을 키워주지. 대표적인 게 소림의 달마역근경으로 이건 일반의 상승심법보다 거의 두 배 가량이나 내력을 키워주는 속도가 빨라. 십년간 집중해서 수련하면 이십 년에 가까운 내력을 얻게 되니까.”
달마역근경!
“그리고 짝이 되는 격공수법의 경우는 상승의 것일수록 발출해낼 때 체내의 힘을 증폭시켜 준다는데 의미가 있어! 예를 들자면 달마대수미신공(達磨大須彌神功)을 들 수가 있는데 이건 체내의 힘을 무려 두 배 가량이나 증폭시킨 위력을 나타내. 그럼 계산을 해보자구. 네가 만약 십 년간 역근경을 배워 대수미신공을 전개한다치면 기본 이십년의 공력에 격공수까지 도합 반 갑자 이상의 화후를 나타내는 거야. 그래서 무림인들이 미치게 상승내공을 얻고자 하는 거고.”
훤백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토조는 얼마나 증폭 시키는데? 대수미 정도 돼?”
“히히히... 자식, 달마신공이라면 천하가 모두 경원하는 개세신공인데 욕심은!”
도천은 한바탕 웃은 뒤 다시 이었다.
“그래도 그보단 눈곱만큼 나을 거야. 확실친 않지만 내가 전개해 보니 토조 이놈은 위력이 네 배 이상으로 증폭이 되는 것 같거든.”
달마신공의 두 배!
훤백은 그만 자신도 모르게 입을 쩍 벌리고 말았다.
“지금... 농담하는 거야?”
그러나 도천은 계속 웃었다.
“히히히... 아마도 사실이지? 잘은 모르지만 브라흐만의 법술이란 건 그것을 수련해낸 사람의 법력이 높을수록 그 단계가 오묘해 진다하지! 그렇게 따지자면 달마대사도 실상은 천축의 사문도(沙門道)로서 브라흐만의 법술을 닦았던 거야! 따라서 그의 무공도 여기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는데, 이 토조를 일구어낸 선승은 보다 차원이 높은 법력을 지닌 인물이었던 것 같아. 현재 내가 지닌 공력은 일갑자가 조금 넘지만 전력을 다해 이놈을 전개하면 이백 년이 넘는 화후를 드러내는 게 확실 해.”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소리였다.
“…….”
훤백은 더 이상 할말을 잊고 입만 벌일 수밖에 없었는데...!
도천은 히죽 웃으며 놀리듯 말했다.
“어쨌건 그걸 전개하려면 최소한 삼십 년의 공력이 필요하다. 한데 넌 욕심만 많아서 가장 센 격공수를 배우고자 하였으니 무용지물인 것을 배운 셈이지. 소원대로 해주긴 했지만 이제 어쩔래?”
“그건...!”
훤백은 말문만 더듬을 수밖에 없었다. 기실 도천의 말이 사실이라면 토조가 제 아무리 강력한 무공이라 할지라도 현재로서는 그림의 떡!
도천은 이에 또 한 번 특유의 웃음을 터뜨린 후 넌즈시 훤백에게 말했다.
“히히히... 마침 나에게 역근심법 만큼은 아니지만 거의 버금가는 심법이 하나 있어. 그것도 전수해줄까?”
역근심법에 버금가는 심법!
훤백은 일순 크게 반가운 기색을 보였으나 곧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냐...! 고맙긴 하지만 그만둬. 그렇게 되면 신세를 너무 지는 셈이라 부담스러워.”
도천은 기특하다는 듯 훤백의 머리를 톡톡, 두드렸다.
“자식! 내 아우가 아니더냐. 그렇지만 심법은 격공수법보다 한층 복잡해서 입으로는 전해줄 수가 없어. 내용을 책으로 엮어야 하니까 며칠 기다려봐.”
훤백의 얼굴에 크게 감격의 빛이 떠올랐다.
확실히 도천이란 보통으로 통이 크고 대범한 호걸임이 아닌 게 분명했다.
훤백은 자신도 모르게 그에게 포권을 취해보였다.
“형을 만난 게 큰 복인 것 같어. 언젠가 내가 또 갚을 날이 있겠지.”
도천은 고개를 쳐들며 크게 웃었다.
“히히히... 솔직히 네 녀석이 마음에 들거든! 다르게 만났다면 개목걸이를 씌워서라도 끌고 다녔을 거다!”
해괴한 소리였으나 훤백은 싱긋이 미소 지었다.
“어쨌건 오늘은 이만 가야해. 집에선 서원에 간줄 알고 있으니 얼굴은 비춰야지.”
한데 이때였다.
그들 외에는 결코 아무도 나타나지 않을 것 같았던 초옥에 실로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훤백이 막 툇마루를 내려와 걸음을 옮기려는 순간, 돌연 초옥의 측면에 난 사이 길로부터 타는 듯 붉은 경장을 차려입은 호리호리 인영이 모습을 드러내는가 싶더니 그들의 앞을 막아 선 것이었다.
“역시 여기 있었군? 우리 구면이지?”
“어라...?”
이에 훤백과 도천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크게 눈을 휩뜨고 말았는데...!
도천이 먼저 휘파람을 불어내며 입을 열었다.
“휘유~ 대체 왠 양귀비인겨? 갑자기 눈앞이 확 밝아지는데?”
그러했다.
너스레 같은 어조긴 했지만 그러나 확실히 나타난 홍의인영은 대단한 자색을 갖춘 처녀였다.
보기 좋게 부풀어 오른 가슴과 개미 같은 허리, 갸름한 계란형의 얼굴에 살구 씨 같은 눈과 깔끔하고 곧게 뻗은 콧날 아래엔 앵두빛 입술, 타는 듯한 눈빛은 특히 사내들로 하여금 어떤 강렬한 충동을 느끼게 했다.
비연녀(飛燕女) 곽나영(郭那塋)!
분명 지난 날 훤백이 담장 너머로 무공을 훔쳐본 바 있었던 관서표국의 비연녀 곽나영이었다.
한데 그녀가 어떻게 이곳에...!
이에 훤백이 빚쟁이라도 만난 듯 머뭇거리는 태도를 보이자 도천이 호들갑스럽게 질문해왔다.
“누구야? 아는 여자야?”
훤백은 우물쭈물 마지못해 대답했다.
“응, 관서표국... 칠해신풍 곽화담 어른의 소저이신데...!”
도천은 곽나영의 아래위를 훑으며 연신 너스레를 떨었다.
“아주 괜찮은 물건인데? 진짜 끝내준다, 야!”
얼핏 보기에는 영낙없는 저자거리의 건달 품세였다.
당연히 곽나영은 그런 도천은 아예 거들떠보지 않고 계속 훤백을 향해 미묘하게 미소 지어 보였다.
“요즘 왜 표국에 안 왔던 거지? 혹시 겁을 먹은 거야?”
“겁...?”
순간 훤백은 다시 흠칫했고, 그런 그를 보며 곽나영은 계속 미묘하게 웃었다.
“진작 알고 있었어! 넌 지난 이 년여 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수련 시간에 표국 연무장을 넘겨봤었지? 그러다가 한랑에게 들키고 나서부터는 발길을 끊은 것인데, 이름은 훤백, 숭양이세가의 아들이 맞지?”
훤백은 덜컥, 간담이 주저앉았다.
“그걸 어떻게...?”
그러했다.
확실히 도천을 만나던 밤 서재에서도 중얼거렸었지만 그는 지난 수 년 간, 하루도 빠지지 않고 관서표국의 담장 안을 넘겨다 본바가 있었다.
따라서 그 밤, 그가 그렇듯 곽나영의 무공을 파악해 기록으로 남길 수 있었던 것은 그만치 오랫동안 그녀의 무공을 관찰했기에 가능했던 것!
실로 대단한 집념이었지만, 하나 더욱 놀랍다 아니할 수 없었던 것은 또한 곽나영의 태도였다.
말대로라면 그녀는 오래전부터 훤백이 무공을 훔쳐보는 것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짐짓 모른 척 방치해 두고 있었다는 뜻이었으니...!
곽나영은 계속 기묘한 웃음을 머금었다.
“모르는줄 알았던 모양이군. 아무렴 표국의 사범인 내가 일년이 넘도록 연무장을 훔쳐보는 걸 눈치 채지 못했다면 말이 되겠어? 오래전에 사실을 알고 사람을 시켜 뒤쫓게 해봤던 거야.”
“…….”
“신분을 알고 보니 남도 아니더군. 우리 관서표국과 이세가는 상당한 친분이 있어. 이세가의 물건 호송은 대부분 우리가 맡아서 하고 있고, 그래서 그냥 모른 척 내버려뒀던 것뿐이야.”
순간 훤백의 목덜미가 빨갛게 달아올랐다.
속된말로 쪽팔리기도 하고... 그러나 곧 특유의 담담함을 되찾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게 여겨줘서 고맙군. 한데 여긴 어떻게 알고?”
곽나영은 훤백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말을 받았다.
“여긴 공부하길 지겨워하는 네가 서원에서 도망쳐 나올 경우 낮잠을 즐겨 자는 곳이지. 어쨌건 궁금한 게 있어서 왔어.”
상당히 관심 있게 훤백을 지켜본 것 같았다.
“보름 전, 표국 건물들의 기왓장 골 수효를 헤아린 일 말인데, 당시 넌 그걸 불과 반 시진도 지나지 않아 정확히 세어 냈었어. 신기한 생각이 들어서 그 날 후부터 나도 줄곧 그것을 해봤는데 아직까지도 정확히 헤아려내지 못했거든! 대체 어떻게 해낼 수 있었던 거지?”
훤백은 피식, 가벼운 실소를 머금었다.
“별거 아니야. 하늘만 쳐다보니 못하는 거지. 가끔은 땅도 좀 살펴 봐.”
이어 훤백은 가볍게 초옥의 처마 아래를 가리켰다.
“아...!”
순간 곽나영은 비로소 알았다는 듯 짤막한 경호성과 함께 궁금함이 풀렸다는 표정을 지었다.
낙숫물 자국!
비밀은 바로 땅에 패어진 낙숫물 자국이었다.
지면의 상태에 따라 크고 작고 패인 형상도 제각각... 확실히 이것이면 지붕위로 올라가 똑같이 생긴 기왓장 골을 세는 따위보다 일만 배는 더 빠르게 숫자를 셀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곽나영은 손벽을 치며 웃음을 터뜨렸다.
“호호호... 약았네! 맞았어. 이거라면 골을 헤아리는 건 간단하지. 눈 아프게 지붕을 쳐다볼 필요도 없고 특히 기왓장에서 떨어지는 낙숫물 자국은 이런 초옥보다 더 선명하니까.”
확실히 상상 밖의 지혜를 지닌 훤백이었다.
동시에 곽나영은 한 번 더 미묘한 시선으로 훤백을 주시하며 실로 뜬금없는 질문을 했는데...!
“훤백 너... 나 좋아하지?”
“뭐...?”
순간 훤백은 크게 얼떨떨한 심정이 되어 휘둥그레 눈을 치켜뜨고 말았다.
하지만 곽나영은 다 알고 있다는 듯 거듭 기묘한 미소를 머금고 말을 했는데...!
“다 알고 있어! 지난 일 년 내내, 설마 문사인 네가 정말 무공을 훔쳐보려고 기웃댄 것도 아닐 거고... 어때? 이렇게 된 이상 우리 정식으로 한 번 사귀어볼까? 몇 살 어리긴 하지만 넌 꽤 머리가 좋은 것 같으니까. 난 무지 세거나 머리가 좋은 사람이 좋거든!”
맹랑한 소리였다.
하지만 그녀의 이 같은 짐작은 크게 틀렸다.
기실 훤백이 담장을 넘겨본 것은 정말 무공을 훔쳐보기 위함이었던 것이니...!
훤백은 피식, 웃으며 결국 고개를 내둘렀다.
“일 없어. 난 여자를 훔쳐보려고 했던 게 아니니까. 목적은 무공이 맞아. 난 무공에 관심이 많거든.”
“학사인 네가 목적이 무공...?”
찰나 곽나영의 표정이 기묘하게 변했다.
“말도 안되는 소리! 감출 필요 없어. 혹시 한랑이 염려스러워서 그런다면 내가 막아줄 테니까!”
당황한 음성이었다.
하나 훤백은 가벼운 웃음과 함께 휙, 몸을 돌렸다.
“소저는 확실히 멋진 여자지만... 난 정말 무공이 배우고 싶었던 거야! 사귀자는 건 한 번 생각해 볼게. 바쁘니 그럼 다음에 봐.”
더 이야기할 시간이 없다는 듯 성큼성큼 급히 걸음을 옮겨 초옥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뭐가 이런...!?’
상황이 이렇게 되자 곽나영의 표정은 크게 돌변할 수밖에 없었다.
기실 대화 속에도 은연중에 비친 것이지만, 착각한 것이라 쳐도 수년이 되도록 무공을 훔쳐보는 훤백을 모른 척 해줬다는 것은 역시 적잖은 관심이 있었기 때문인게 분명한 것이었다.
와중에 훤백이 더 보이지 않자 짐짓 걱정이 되어 그를 찾아온게 분명한 셈이었는데, 그랬던 감정이 묵사발이 나고 말았던 것이니...!
그러나 확실히 괜찮은 여인인건 분명했다. 외모뿐 아니라 마음 씀도 그러하고, 다만 서문한랑과의 관계에서도 보여줬듯 여자치고는 색기(色氣)가 좀 지나친 게 아닌가 싶은 게 흠일 정도...!
한데 이때였다.
안 그래도 가뜩이나 엉망이 된 심정의 곽나영의 귀에 그야말로 희안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히히히... 거 꽤 쓸만한 암컷 같은데, 자식이 눈이 너무 높은가?”
흥미진진하게 지켜보고 있던 도천이 한 순간 배를 잡은 것이다.
“어쨌건 꽤 쪽팔리겠어! 사내에게 먼저 마음을 보였다가 멋지게도 채였으니...!”
원래 걸직한 말투를 즐기는 그이다보니 별다른 큰 뜻은 없었다.
하나 막상 채이게 된 장본인인 곽나영의 귀에는 이게 마치 천둥이 치는 듯 느껴지는 비아냥일 수도 있었는데...!
“뭐가 어째...?”
곽나영의 눈에 즉시 번쩍! 불꽃이 튀었다.
확실히 도천의 말은 불속에 기름을 끼얹은 격이 되고 만 것!
하지만 도천은 재미있다는 듯 실실 웃으며 언제나 처럼 그냥 계속 농담을 던졌다.
“어때? 정 아쉬우면 나라도 대신 사귀어줄까? 분위기도 더 좋은데 우리 한 번 할래?”
곽나영은 즉시 표정을 얼음장 같이 굳히며 싸늘하게 눈에 쌍심지를 돋웠다.
“열 받쳐 죽겠는데 이건 또 뭐라는 물건이야? 대머리, 대체 넌 누구지?”
“대머...?”
이번에는 도천의 표정이 엉망진창이 되었다.
그렇게 호방해 보였던 그였지만 묘하게도 대머리라는 것에 대한 열등감 같은 것은 자리 잡고 있었던 같았다.
하지만 곽나영 역시 독이 오를 만치 올라있는 상태라 계속 독설을 토했다.
“그래, 대머리! 늙지도 않은 주제에 훌러덩 까진 너 말이다! 붕대까지 감은 꼬락서니 하고...! 녹림적(綠林敵)이라도 되는 놈인가?”
도천의 눈이 쭉 찢어져 올라갔다.
“미치겠군...! 동쪽에서 채이고 서쪽에서 화풀이 한다더니... 내 앞에서 감히 나를 대머리라 불러?”
그러나 곽나영은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대머리라는 말에 도천이 화내는 기색을 보이자 그녀는 한 술 더 떠 계속 놀려댔다.
“별 웃기게 머리까진 놈을 다 보겠군. 머리카락이 한 올도 없다보니 햇빛을 너무 받은 나머지 실성을 했나! 주제에 나랑 하고 싶은 거야? 아랫도리도 아마 밋밋하겠지?”
바로 손을 허리춤의 장검으로 가져갔다.
“그렇다면 이겨봐! 이기고 나면 소원대로 하게 해줄 테니까.”
“갈수록 태산이라더니만...!”
도천 역시 울화통이 터졌다.
분명 농담은 잘못이었지만 곽나영의 인신공격 역시 장난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 말 사실이렸다? 솔직히 말해서 나 꽤나 밝히는 놈 맞다. 요즘 꽤 쏠려 있고! 후회하지 않겠지?”
촹-! 곽나영의 장검이 뽑혀졌다.
“물론이지! 하나 난 무당파(武當派)의 무공을 다 지녔다는 것을 알아야해. 네가 목숨을 잃어도 그건 자업자득이다.”
“히히히... 너무 무섭군. 이게 분명 호박이 넝쿨째 굴러들어온 것 같은데, 요즘은 수박밭에서 지내면 호박까지 생기나...?”
도천은 휙-! 한 손을 펼쳐 앞으로 뻗어냈다.
“그럼 어디 잘 익었나 품질부터 좀 보자!”
뒤따라 그는 뻗어냈던 손을 다시 안쪽으로, 흡사 뭔가를 끌어들이기라도 하듯 홱, 당겨 들였는데...!
“훕...!”
찰나였다.
자신만만하게 장검을 뽑아 버티고 섰던 곽나영은 그만 대경실색의 외침을 토하고 말았다.
그도 그럴 것이 도천이 손을 안으로 끌어들이기 무섭게...! 느닷없이 보이지 않는 어떤 막강한 기류가 마치 밧줄로 전신을 조이듯 압박하여 자신의 몸을 쫘악! 도천 쪽으로 끌어들이기 시작했던 것!
“천근추(千斤錐)!”
비로소 크게 심상치 않음을 느낀 그녀는 급급히 전신의 공력을 발끝에 집중시켜 끌려가려는 몸을 우선 고정시켰다.
드드득...!
하지만 도천이 뿜어낸 무형의 잠력은 너무도 엄청났다.
끌려가지 않으려 혼신의 힘을 다해 진력을 발치에 집중시킨 그녀였으나 의도와 달리 몸은 점차 도천 쪽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하아앗-!”
하나 표사들을 가르치는 사범일 만큼 역시 곽나영도 만만치는 않았다.
상황이 여의치 않자 그녀는 빨아들이는 도천의 힘을 역이용, 번쩍! 그에게로 신형을 날리며 벼락같이 장검을 휩쓸어 가기 시작한 것이었다.
“무당소천! 신룡출해!”
콰아아앗-!
찰나 초옥의 툇마루에는 실로 엄청난 정경이 벌어졌다.
곽나영이 검식을 전개하기 시작하자 귀를 찢는 파공성과 더불어 한 순간 전체가 번갯불 같은 검기로 뒤덮이기 시작한 것!
하지만 도천을 만났다는 자체가 불행이었다.
기실 그는 무림 최대의 사인이라 불리는 혼천소마를 무려 셋이나 한꺼번에 상대했던 초고수!
그만한 인물이다 보니 도천은 살수(殺手)가 금시라도 사지를 걸레쪽으로 만들어 버릴 듯한 경황에도 자리에서 일어서지 조차 않았다.
대체 어떻게 몸을 놀리는 것인지 무수한 검망 속에서 다만 상체만을 전후좌우 기쾌하게 놀려 피해 나가며 웃음까지 터뜨렸는데...!
“히히히... 제법 칼놀림을 하긴 하는구먼? 너무 힘들어 보이는데 그냥 한 번 맞아줘?”
동시에 그는 오른손을 비수같이 세워 벼락같이 날아오는 곽나영의 장검을 후려쳤다.
콰창-!
“앗...!”
순간이었다.
초옥의 처마 밑에는 또 한 번 상상치도 못할 일이 벌어졌다.
도천의 손날과 부딪친 곽나영의 검!
원칙대로라면 마땅히 그의 손이 잘라져 피가 뿜어져야 당연할 것인데 어처구니없게 곽나영의 장검이 박살이 나 사방으로 튀어가 버렸던 것!
“뭐야, 이게!”
곽나영의 안색이 완전 사색이 되어버릴 것도 당연한 이치!
하지만 놀랄 일은 그뿐이 아니었다.
순간 잠시 멈칫하는 사이, 도천이 섬전같이 콱, 그녀의 완맥혈을 움켜쥔 후 곽나영의 허리를 끌어안은 것!
“분명히 네 입으로 약속했으니 유감없는 거다!”
“이 무슨...?”
이에 곽나영은 그야말로 얼굴이 잿빛이 되어버렸는데, 보다 먼저 도천의 손이 쫘악! 그녀의 옷을 찢었다.
즉시 하얗게 농익은 처녀의 가슴과 미끈한 다리, 은밀한 비소가 밝은 햇빛 아래 숨김없이 드러났다.
“그만둬! 무슨 짓이야!”
곽나영은 그야말로 숨이 멎는 듯한 심정이 되었지만 그러나 한 번 시작한 도천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약속은 약속인거야! 뭐 보아하니 농익은 태도하고 처녀는 아닌 것 같은데, 사실 뭐 나도 썩 괜찮은 놈이니까 이대로 그냥 한 번 하자구!”
“앗...!”
더불어 곽나영은 자신의 하체 은밀한 곳으로 불덩이처럼 뜨겁고 거대한 무언가가 밀려들어오는 것을 깨닫고 찢어질 듯 눈을 휩떴다.
순간 도천은 격렬히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고, 곽나영은 그대로 수반되는 격한 통증과 함께 아득한 뭔가에 고개를 홱 제끼고 말았는데...!
“아...!”
매미소리가 쏟아지듯 울려오는 툇마루에서 뒤따라 흐르기 시작한 야릇한 비음!
분명 그것은 원통하다거나 고통스러워서 들리는 것만은 아닌 듯 했다.
그리고 약 이 각여...!
누군가들에게 있어서는 영겁과 같은,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이 흐른 후, 초옥의 툇마루에는 다시 질식할 듯한 정적이 돌아왔다.
실로 어이없는 사태긴 했지만... 어쨌거나 도천은 만족한 표정으로 특유의 웃음을 히죽 흘리는 모습으로 퍼질러 앉아있었고, 곽나영은 찢어진 의복을 대충 걸친 채 돌처럼 굳은 표정으로 그런 도천을 노려보듯 바라보았다.
한데 묘한 것은 곽나영의 표정이었다.
분명 노한 듯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있는 표정과 눈빛이었으나 기이하게도 독기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고도 일각이나 더 긴 시간이 흐른 후, 급기야 곽나영이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도천을 향해 입을 열었다.
“대머리! 대체 넌 누구지?”
끝까지 대머리...!
도천의 안색이 다시 홱 돌변했다. 하지만 잠시, 그는 곧 어이없다는 듯 크게 웃었다.
“히히히...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한 모양이군. 그래도 내 여자가 되었으니 봐준다! 어쨌건 대단했어. 생전 처음 대한 명기였다구!”
칭찬인건지 뭔지...!
어쨌건 단순한 농담만은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곽나영은 계속 돌처럼 굳은 표정으로 물었다.
“솔직히 말해 봐. 이름이 뭐야? 이만한 무공에... 분명 무명소졸이 아닐 거야!”
한들 도천이 제대로 대답할 리 있겠는가.
“히히히... 물론 바지저고리는 아니지만...! 그러나 밝히기 싫은 걸? 너 같으면 이런 경황에 이름씩이나 알려주겠니?”
번쩍! 비로소 곽나영의 눈에 다시 독기가 서리는가 싶더니 지긋이 입술을 깨물었다.
“그런 태도는 용서할 수 없어. 어서 이름 대!”
그러나 도천의 태도는 변함없었다.
“싫어! 사서 칼 맞기 싫거든. 그냥 좋은 기분으로 끝내는 거야. 너도 꽤 좋아서 엉덩일 놀렸잖아?”
곽나영은 더욱 힘줘서 입술을 깨물었다.
“헛소리 말고 나 책임져. 아니면 그냥 두지 않을 거야!”
책임...!
또 한 번 어처구니없을 노릇이 벌어지기 시작한 것...!
기실 그녀라면... 서문한랑까지 별로 탐탁치 않게 여겼던 처지! 한데 그랬던 곽나영이 느닷없이 도천에게 책임이라니?
하지만 도천은 히죽 웃으며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
“히히히... 역시 완전히 반한 모양이지? 확실히 내가 세긴 세단 말씀이야. 하지만 책임씩이나...!”
참으로 웃지 못 할 노릇이 계속 벌어지고 있는 것이었다.
도천은 계속 어영비영 소피라도 보려는 듯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쨌건 뭐 이만한 여자에 책임을 지라하면 못질 것도 없지만... 그러나 지금은 안돼! 난 워낙 할일이 많거든. 다친 김에 잠시 머무는 것뿐이라서 곧 떠나야 해. 그러니 정 사귀고 싶으면 조신히 기다려 봐. 대찬 성격 보니 한 번 마음 줄 땐 야무질 것 같구먼.”
기다리라...!
그렇지만 곽나영의 귀에 이런 소리가 들릴 리 없었다.
그녀는 계속 도천을 노려보며 매몰차게 말했다.
“솔직히 그래! 즐기는 것은 좋아했지만 마음 준 놈은 없어. 네게 줄테니 가져. 대신 이제부터는 같이 다녀야 해.”
그러나 무슨 헛소리냐는 듯 도천은 웃으며 성큼성큼 걸음을 옮겨 측간으로 향했다.
“히히히... 말 같지도 않은 소리. 공사다망한 몸이 혹까지 달고 어떻게 움직이라고...!”
“이름도 못 대겠다! 같이 가지도 못하겠다! 이런 얍삽한 놈 같으면 오히려 내가 믿지 못해! 차라리 죽여 버리겠어!”
순간 곽나영은 더욱 힘주어 입술을 깨물었고, 결국 피가 터져 턱을 타고 흘러내렸다.
*
그로부터 약 반 시진 후.
“뭐가 어쩌고 어째?”
서문한랑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앞에는 거반이나 찢겨져 나간 옷을 입은 곽나영이 입술을 깨문 채 독기어린 표정으로 서 있었고,
“대체 어느 놈이 이런 짓을...!?”
상황을 보면 필경 서문한랑을 찾아와 도천에 관한 이야기를 한 게 분명했다.
서문한랑은 얼굴을 짓구긴 채 으스러지게 주먹을 움켜쥐었다.
“정말 사나운 날이군! 혼천소마 놈들이 대낮부터 가내로 침입해 들어와 살상을 벌이지 않나. 그러더니 이번엔...!?”
곽나영이 얼음장 같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호들갑 떨건 없어. 몇 대 맞은 것뿐이니까. 도망치기 전에 그냥 좀 잡아주는 거야. 보기 드문 고수 같으니 수하들이 좀 필요할 거야.”
서문한랑의 이마에 급기야 툭툭, 혈관이 튀어 올랐다.
“그 자식 어디 있어-!”
첫댓글 즐독했어요.
즐독입니다
감사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 감사 합니다....................
잘읽었습니다
즐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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