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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월 2일 월요일 성 대 바실리오와 나지안조의 성 그레고리오 주교 학자 기념일
제1독서 : 1요한 2,22-28
복 음 : 요한 1,19-28
19 요한의 증언은 이러하다. 유다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사제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어,
“당신은 누구요?” 하고 물었을 때,
20 요한은 서슴지 않고 고백하였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하고 고백한 것이다.
21 그들이 “그러면 누구란 말이오? 엘리야요?” 하고 묻자, 요한은 “아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면 그 예언자요?” 하고 물어도 다시 “아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22 그래서 그들이 물었다.
“당신은 누구요? 우리를 보낸 이들에게 우리가 대답을 해야 하오.
당신은 자신을 무엇이라고 말하는 것이오?”
23 요한이 말하였다.
“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
24 그들은 바리사이들이 보낸 사람들이었다.
25 이들이 요한에게 물었다.
“당신이 그리스도도 아니고 엘리야도 아니고 그 예언자도 아니라면, 세례는 왜 주는 것이오?”
26 그러자 요한이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나는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런데 너희 가운데에는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
27 내 뒤에 오시는 분이신데,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
28 이는 요한이 세례를 주던 요르단 강 건너편 베타니아에서 일어난 일이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우연히 텔레비전에서 우리나라를 처음 방문하는 사람들이
우리나라 곳곳을 여행하는 프로그램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외국인들이 우리나라의 모습에 감탄합니다.
거리가 깨끗하다는 것, 화장실도 너무 청결하다고,
고속도로 휴게소는 쇼핑몰 같다고, 지하철도 너무 편안하다고,
음식도 맛있고 사람들의 인심도 너무 좋다는 식의 칭찬 일색입니다.
외국인들이 감탄하는 모습이지만,
대한민국에 사는 우리는 당연하게 여기고 있을 뿐입니다.
가지고 있는 모든 것에 얼마나 감사하며 살고 있는지를 반성하게 됩니다.
저는 건강에 있어서는 누구보다도 자신 있었습니다.
그런데 좋지 않은 부위가 생겨서 수술해야 했습니다.
수술 후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건강했을 때 얼마나 감사했는가?’
그냥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건강 그 자체가 얼마나 큰 축복이었는지를 미처 몰랐던 것입니다.
결핍을 체험해야 감사하지 못했음을 반성하게 됩니다.
따라서 결핍을 체험하기 전에 미리 가지고 있는 것에 감사할 수 있다면 어떨까요?
조금 더 힘차게 그리고 현재의 기쁨을 느끼며 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유다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사제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어
“당신은 누구요?”(요한 1,19)라고 물었습니다.
그들은 요한이 그토록 이스라엘이 기다려왔던
메시아, 그리스도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요한이
“어떻게 알았는가? 당신들이 생각했던 그리스도가 바로 ‘나’ 맞소.”라고
말만 해도 사람들의 엄청난 섬김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은 그들이 원하는 대답을 하지 않습니다. 대신 이렇게 답변하지요.
“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요한 1,23)
이렇게 답변하셨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자기 자신에 대해 잘 알고 있었고,
자신의 몫을 감사하게 받아들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겸손하게 받아들였기에
예수님을 가장 잘 준비할 수 있었고,
교회 안에서 가장 존경받는 성인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가지고 있는 것에 감사하고 있는지를 다시금 묵상해 보았으면 합니다.
감사하며 사는 사람만이 주님의 마음에 드는 삶을 살 수 있으며,
기쁘게 주님과 함께 할 수 있습니다.
“나는 그 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복음은 세례자 요한의 자기 증언입니다.
광야에 살면서 요르단강에서 세례를 베풀고 있던 요한은
예루살렘에서 온 사제들과 레위인들에게 반복해서 질문을 받습니다.
“당신은 누구요?”(요한 1,19.21.22)
이 질문은 단순히 세례자 요한의 정체성을 묻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메시아와의 관계를 묻는 질문입니다.
곧 “그리스도와 당신의 관계는 무엇이요?” 라는 질문입니다.
요한은 그분과 관련하여, 자신의 신원을 부정과 긍정을 통해 고백합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요한 1,20)
“나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요한 1,23)
세례자 요한처럼 우리도 구세주 그리스도가 아닙니다.
단지 그리스도를 증언하고 증거 할 뿐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증언하고
증거하고 있지는 않은지 살펴보아야 할 일입니다.
혹 우리가 그리스도를 스승이나 주인으로 따르기보다
자신을 스승이나 주인으로 내세우고 있지는 않은지,
그래서 사람들이 자신을 따르고 자신을 존경하도록
하고 있지는 않은지 살펴보아야 할 일입니다.
사실 우리는 스승이 아니라 제자이고,
앞서가는 자가 아니라 뒤따라가는 자입니다.
주인이 아니라 속해 있는 자요, 판단해야 하는 자가 아니라 응답해야 하는 자요,
구원자가 아니라 구원받아야 할 존재요, 해결사가 아니라
해결 받아야 할 존재입니다.
그리고 요한처럼 우리도 ‘외치는 이’가 아니고, 외치는 이의 ‘소리’입니다.
곧 ‘내 안에서 외치는 분’을 드러내는 소리입니다.
사실 소리를 내는 것은, 피리가 아니라 피리를 부는 이 입니다.
피리가 결코 스스로 소리를 낼 수는 없는 까닭입니다.
마치 붓이 스스로 글씨를 쓰는 것이 아니라
붓을 쥔 이가 글씨를 쓰는 것이듯이 말입니다.
곧 화살표 같은 존재인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자 요한은 자신이 피리를 부는 이가 아니라
피리를 부는 이를 담아내는 ‘소리’라고 말합니다.
사실 이는 진정 비워진 자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요한은 참으로 비워진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이제 우리도 채우는 데서 오는 기쁨이 아니라,
비워진 데서 오는 기쁨을 찾아야 할 일입니다.
자신을 드러내는 데서 오는 기쁨이 아니라,
자신을 비우고 타인을 드러내는 데서 오는 기쁨 말입니다.
사실 비워내야 하는 것은 다름 아닌 바로 우리 자신일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큰 적은 바로 우리 자신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자기 자신에 집착하는 사람처럼 추하게 보이는 사람은 없습니다.
자기 자신에 집착한 나머지
다른 이들을 자기 발밑에 두려는 것처럼 추한 모습은 없습니다.
그런데 요한은 자신의 발밑에 다른 이를 두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이 다른 이의 발밑으로 내려가려고 하나,
그 발밑에 내려갈 자격마저 없는 몸이라 고백합니다.
“나는 그 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요한 1,27)
본래 주인이 외출했다가 돌아오면 종이 그 신발 끈을 풀어주는 법인데,
요한은 그런 종의 일마저도 할 만한 자격조차 없는
부당한 몸이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자기 자신을 온전히 비운 까닭입니다.
오늘 우리도 요한이 받은 질문을 받습니다.
“당신은 누구요?”
<오늘의 말 · 샘 기도>
“당신은 누구요?”(요한 1,19)
주님!
화살표 같은 존재가 되게 하소서.
제 자신이 아니라 당신을 향하여 있게 하소서.
붓이 되어 당신의 말씀을 삶으로 쓰게 하소서.
피리가 되어 당신의 노래를 온몸으로 드러내게 하소서.
당신의 사랑만을 드러내게 하소서.
저 자신이 아니라 주인이신 당신을 섬기게 하소서.
제 삶이 당신 생명의 춤이 되고, 당신 축복의 강복이 되게 하소서.
저는 당신의 사랑받는 새끼, 당신의 귀염둥이 아들, 당신의 사랑이오니,
당신께만 속해 있게 하소서.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요즘은 처음 가는 길도 크게 걱정하지 않습니다.
내비게이션이 정확하게 방향을 잡아 주기 때문입니다.
자칫 길을 놓쳐서 다른 길로 갈지라도
내비게이션은 곧 새로운 방향을 알려줍니다.
요즘은 인공지능이 발달해서인지 더 빠른 길을 안내해 주기도 합니다.
내비게이션은 인공위성에서 알려주는 신호를 받아서 목적지를 향해서 갑니다.
2023년이 시작되었습니다.
신앙인은 하느님 나라를 향해서 길을 떠나는 사람입니다.
우리를 하느님께로 인도하는 내비게이션이 있습니다.
교회는 그것을 ‘식별’이라고 합니다.
먼저 우리의 올바른 식별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있습니다.
무엇이 있을까요?
교만이 있습니다. 아담은 하느님과 같아지려는 교만 때문에 ‘죄’를 지었습니다.
욕심이 있습니다. 아합 왕은 자신의 포도밭이 충분히 있으면서도
나봇의 포도밭을 빼앗았습니다.
게으름이 있습니다. 어리석은 처녀는 등잔에 기름을 준비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신랑을 맞이하지 못했습니다.
인색이 있습니다. 부자는 가난한 라자로를 돌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품으로 갈 수 없었습니다.
질투가 있습니다. 사울 왕은 다윗을 질투하였습니다.
음욕이 있습니다. 다윗 왕은 우리야의 아내를 탐하였습니다.
분노가 있습니다. 화를 참지 못해서
공든 탑을 쉽게 무너트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칼을 쓰는 사람은 칼로 망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새해에는 우리를 하느님과 멀어지게 하는
영적인 장애물들을 피하면 좋겠습니다.
영적인 장애물을 피하는 것이 바로 ‘식별’입니다.
오늘의 독서는 식별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것과, 악의 세력을 따르는 것을
구별할 줄 알아야 한다고 말을 합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계명을 지키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알려 주신 길을
충실히 걸어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을 합니다.
그러나 안개가 자욱한 길을 운전하기가 쉽지 않은 것처럼
우리들의 삶에도, 식별을 하기 어려운 안개가 끼게 됩니다.
좋은 것과 가치 있는 것이 함께할 때는 식별을 하기가 어렵지 않습니다.
좋아하지는 않지만, 가치 있는 것들 중에서 가치 있는 것을 식별하기가 어렵습니다.
그 이유는 좋아하지 않는 것이 우리를 가로막기 때문입니다.
좋아하지만 가치가 없는 것을 식별하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훈련되지 않은 사람들은 비록 가치가 없다고 하더라도
지금 당장 좋은 것을 선택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좋지도 않고, 가치도 없는 것은 식별하기가 쉽습니다.
당연히 선택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힘든 식별의 시간이 왔을 때 가장 좋은 방법이 하나 있습니다.
‘예수님이시라면 어떻게 하셨을지’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올바른 식별을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첫째는 기도 습관이 필요합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샘이 깊은 물과 같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뿌리 깊은 나무와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둘째는 겸손입니다.
겸손한 사람은 바위 위에 집을 지은 것과 같습니다.
어떠한 시련이 다가와도 능히 이겨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꼴찌가 되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셋째는 회개입니다.
회개는 단순히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부유함보다 가난함을 선택하는 것이 회개입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건강보다 아픈 것을 선택하는 것이 회개입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오래 사는 것보다 일찍 죽는 것을 선택하는 것이 회개입니다.
넷째는 오늘 복음에서 본 것처럼 ‘주님의 길을 곧게 내며,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가 되어야 합니다.
행동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2023년도에는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할지라도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이라면 기꺼이 따라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이분은 내 뒤에 오시는 분입니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
오늘 복음에서는 요한 세례자의 증언을 소개하고 있다.
요한은 즈카르야의 아들로 제사장직을 이을 수 있는 혈통이었음에도
그 직분과는 거리가 먼 광야에서 생활하였다.
사람들은 그의 말과 행동을 보고 혹시나 그가 그들이 기다리던
메시아 그리스도가 아닌가 하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에게 메시아가 아닌가 하고 묻는 말에
그는 솔직하게 “아니다.”라고 했다(20절).
“엘리야요?” 하였을 때 또 아니라고 대답하였다(21절).
이 엘리야는 메시아가 오시기 전에 와서 반대자들을 처리해 주고,
물건이건 사람이건 깨끗한 것과 불결한 것을 가려주고,
흩어져있던 유다인들을 한데 모으리라 생각하였기 때문인데, 그도 아니라고 하였다.
“그러면 그 예언자요?”(21절) 하고 물었을 때 그도 아니라고 하였다.
이 예언자는 신명 18,15에서 모세가 한 말에 있는 예언자이다.
그러니까 “당신은 자신을 무엇이라고 말하는 것이요?”(22절) 하였을 때,
세례자 요한은 이사 40,3에 나오는 대로,
왕이 오실 때 그 길을 준비하라고 외치는 소리라고 하였다(23절).
그러면서 자기를 그렇게 보지 말고
오직 자기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 자격도 없는 사람이며,
이미 와 계신 분을 바라보라고 하였다(26-27절).
우리는 어떤가?
우리는 작고 크고 간에 자기가 한 일에 대해서
남이 알아주기를 바라면서 과대포장을 하여 드러내려고 하지나 않는지!
우리는 백마 병 환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백마 병이란 백마가 자기가 등에 태운 임금에게 모든 사람이 절을 하니까
자기에게 절을 하는 줄 착각하고 으스대며 거들먹거리는 것이다.
자신이 말이라는 것을 잊고 마치 임금인 것으로 착각하며 사는 어리석은 사람이다.
하느님의 자녀는 자신의 삶을 통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왜 행복한지를 드러내는 삶이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나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으로 주님을 드러내는 삶이다.
우리의 삶이 주님을 드러내고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 하느님 자녀의 몫이다.
요한 세례자의 삶이 이러하였다.
자신의 삶을 오로지 백성들이 주님을 잘 맞이할 수 있도록 그들을 가르치고
주님과 만날 수 있도록 살아갔던 분이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도 요한과 같이 하느님과 사람들 앞에 그분을 증언하고,
다른 사람들을 주님께로 인도하는 삶을 갖도록 기도하여야 할 것이다.
예수님은 발광체(發光體), 성인들은 반사체(反射體)
-이단에 대한 답은 성인들뿐이다-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동방교회의 4대 교부는 성 아타나시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와
오늘 축일은 지내는 성 대 바실리오와 성 나지안조의 그레고리오 주교 학자입니다.
오늘 축일을 지내는 두 분은 절친이었고 수도생활을 했으며 주교직까지 수행한 분들입니다.
330년 같은 해에 오늘날의 소아시아 터키 지역의 카파토키아에서 태어났으며
‘예수님은 하느님이 아니다’라는 예수님의 신성을 부인한
아리안 이단과 격렬히 싸우며 끝까지 정통 교리를 수호했던 분들입니다.
성 대 바실리오는 교회 역사상 성인을 가장 많이 배출한 가문 중 하나였습니다.
할머니 마크리나, 부친 바실리우스, 모친 에멜리야, 큰누이 마크리나,
두 동생 니사의 그레고리오, 세바스테의 베드로 모두가 성인품에 올랐습니다.
동방수도생활의 아버지라 할 정도로 수도생활에 대한 업적도 지대합니다.
성인의 회심에 결정적 영향을 주었던 이는 세바스테의 주교, 에우스타시아였으며
다음과 같이 바실리오는 회심 체험을 고백합니다.
“나는 어리석은 일들에 대해 시간을 많이 낭비했으며,
헛된 일에 나의 젊음을 거의 소진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어리석게 만든 지혜를 가르치는 일에 헌신했다.
그러다가 문득 깊은 잠에서 깨어났다.
나는 복음서의 진리가 내포한 경이로운 빛을 목도했으며,
이 세계의 왕자들의 지혜는 공허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대로 복음서를 통해 살아 계신 주님을 만난 회심 체험임을 깨닫게 됩니다.
성인은 병자와 가난한 사람을 구하는 데 매우 적극적이었고
아리우스파와의 투쟁을 계속하면서 동방정교회의 지도자가 됩니다.
성인보다 10년 정도 오래 살았던 절친인 나지안조의 그레고리오는
역시 아리우스 이단에 대항해 정통 교리를 수호하는데 큰 공적을 남겼으며
생애 후반은 수도원에 은거하여 저술활동과 수도생활에 전념합니다.
참으로 하느님과 그리스도 예수님을, 교회를 사랑했던 교회의 사람,
성령의 사람, 기도의 사람인 성인들은 이단에 대한 답임을 깨닫게 됩니다.
얼마 전 읽은 천사적 박사 성 토마스 아퀴나스 역시 얼마나 하느님을 사랑했는지
‘공부전에 바쳤던 기도문’이 참 아름답고 감동적이라 전문을 인용합니다.
“오, 형언할 수 없으신 창조주 그리스도님,
당신은 당신 지혜의 보고로부터 천사들의 세 품계를 가려,
저 높은 하늘 위에 배치하시고,
광대한 우주 질서를 참으로 아름답게 안배하셨나이다.
당신은 참 빛과 참 지혜의 원천이요, 최고 원리이시니,
제 아둔한 정신을 당신의 투명한 빛살로 환히 비추시어,
제 안에 타고난 뿌리 깊은 두 가지 어두움,
곧 죄악과 무지의 어두움을 말끔히 거두어 내소서.
당신은 어린아이의 혀를 달변으로 키워내는 분이시니,
날카로운 통찰력과, 오래 오래 간직하는 기억력,
유순하게 배울 줄 아는 겸손과, 철저하게 파헤치는 해석력,
그리고 사리를 분별할 줄 아는 슬기를 허락하소서.
진리 탐구를 시작하는 저의 정신을 밝게 비추어 주시고,
힘차게 정진할 수 있도록 손잡아 이끌어 주시며,
모자람 없이 완성할 수 있는 힘과 지혜를 허락하소서.
당신은 참 하느님이시며 참 인간으로서 영원히 살아계시며 다스리시나이다. 아멘.”
얼마나 깊고 아름답고 겸손한 기도문인지요!
말 그대로 모든 이단에 대한 답이 들어있는 기도문이요,
참으로 그리스도 예수님을 깊이 사랑했던 기도의 사람,
성령의 사람, 교회의 사람인 성 토마스 아퀴나스였습니다.
지난 12.31일 선종하신 베네딕도 16세 교황 역시
여기에 그대로 해당되는 성인이라 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바로 오늘 이런 관점에서 보면 말씀 이해도 확연해집니다.
요한1서는 당시 요한계 교회 공동체가
얼마나 치열한 이단들, ‘그리스도의 적’과 대결 중인지 알게 됩니다.
요한 사도 역시 다음의 간곡한 말씀을 통해 정통 교리의 수호자임을 알게 됩니다.
“아버지와 아드님을 부인하는 자가 곧 ‘그리스도의 적’ 입니다.
여러분은 처음부터 들은 것을 여러분 안에 간직하십시오.
처음부터 들은 것을 여러분 안에 간직하면,
여러분도 아드님과 아버지 안에 머무르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그분께서 우리에게 하신 약속, 곧 영원한 생명입니다.
그분께서는 기름 부으심으로 여러분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십니다.
기름 부음은 진실하고 거짓이 없습니다.
여러분은 그 가르침대로 그분 안에 머무르십시오.
자녀 여러분, 그분 안에 머무르십시오.
그래야 그분께서 나타나실 때 확신을 가질 수 있고
그분 앞에서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성령의 기름 부음 받음으로 진리를 깨닫게 되고 그분 안에 머물게 됩니다.
참으로 그분 안에 머무를 때 무지에서 벗어나 자신을 알고 주님이신 그분을 앎으로
저절로 겸손과 지혜의 사람이, 교회의 사람, 성령의 사람, 기도의 사람이 되니
결코 이단에 떨어지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바로 이의 모범이 복음의 세례자 요한입니다.
성령의 은총으로 주님을 사랑하여 주님을 알면 알수록
참 자기를 아는 겸손에 이르게 됩니다.
모든 적그리스도의 이단자들은 주님도 모르고 자기도 모르는
무지의 교만에 눈먼 자들입니다.
오늘 복음의 세례자 요한의 고백은 얼마나 아름다운지요!
“나는 그리스도도 아니다. 나는 예언자도 아니다.
다만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
나는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런데 너희 가운데에는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이신데,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
정말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만나 그분 안에 머무르는 참 빛이신 주님의 증언자,
참으로 겸손한 주님의 빛을 반사하는 주님의 반사체인 세례자 요한의 고백입니다.
참 빛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이 발광체發光體라면
겸손한 성인들은 예외없이 시종여일, 일편단심 주님만을 사랑하며
모두가 참 빛인 주님을 반사하는 반사체反射體이자 증언자로 살았습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주님 안에 머물러
발광체이신 참 빛이신 주님을 반사하는 반사체로,
겸손한 진리의 증언자, 협력자로 살게 하십니다. 아멘.
세례자 요한의 정체
박상대 마르코 신부
오늘 복음은 요한복음의 프롤로그(서문)에서 이미 언급된
세례자 요한의 증언활동(1,6-8.15)이 본격적으로 보도되는 부분이다.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요한의 활동 자체가
전적으로 이미 와 계신 예수에게 매어 있다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이미 세상에 와 계신 메시아를 알아볼 수 있는 증인과 표징을 주셨다.
그 증인이 바로 세례자 요한이요, 그 표징은 그가 베푸는 회개의 설교와 세례이다.
세례자 요한의 증언과 표징활동은 우선 세 부류를 향하여 수행된다.
첫째 부류는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예루살렘의 지도자들,
즉 대사제, 율법학자, 그리고 바리사이파 사람들이다.
둘째는 이스라엘 백성이고,
셋째는 요한 스스로가 거느리고 있던 제자들이다.
이 세 부류는 요한이 자신의 임무를 마칠 때쯤
예수께서 직접 관여하여야 할 부류들로 이첩된다.
예수께서도 공생활 한 가운데서 이 부류들을 향하여 자신의 肉化목적을 관철 시킨다.
예수는 백성의 지도자들과 “구약”과 “신약”의 표징을 놓고 논쟁을 벌여야 하며,
결국 이들의 모함으로 죽음을 맞게 된다.
예수의 구원 활동은 요한이 관여한 이스라엘 백성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이 백성을 뛰어넘어 온 인류와 온 백성을 지향한다.
예수께서는 요한의 제자들 중 대부분을 자신의 제자로 받아들였고,
신분과 출신에 관계 없이 새로운 제자단을 구축하여
그들을 사도로 파견하심으로써 자신의 구원 활동이 이 땅에 지속되게 하신다.
오늘 복음은 예루살렘에서 파견된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의 질문과
세례자 요한의 답변을 들려주는 대목이다.
우선 지도자들의 질문은 두 가지로 요약된다.
하나는 세례자 요한의 정체성에 관한 심문 성격의 질문이고,
다른 하나는 그가 베푸는 표징, 즉 세례의 의미에 관한 질문이다.
첫 번째 질문에 대하여 요한은 자신이 그리스도도 아니고, 엘리야도 아니고,
또 이스라엘이 기다리는 어떤 예언자도 아니라고 분명히 밝힌다.
요한의 활동을 지켜본 사람들은 충분히
그가 “그리스도”(메시아)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하였고,
아니면 메시아 이전에 오게 될 “특사”(말라 3,1)나,
아니면 야훼께서 나타나실 무서운 날을 앞두고 파견된
“엘리야”(말라 3,23-24)로 생각하였던 것이다.
이에 요한은 자기가 이들 중 어느 누구도 아니고,
지극히 겸손하게 어쩌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요한은
“나는 예언자 이사야의 말대로 ‘주님의 길을 곧게 하여라.’(이사 40,3)하며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요.”하고 대답한다.(23절)
요한은 이렇게 자신이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분명히 밝힘으로써
오히려 자신의 증언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게 된다.
요한의 증언 임무는 자기 자신과 이미 와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관계를 명확한 대비구조 안에 성립시키는 것이다.
대비구조는 요한-예수, 소리-말씀, 선구자-메시아, 종-상전, 無-全部 등으로 표현될 수 있다.
이렇게 요한은 자신을 청저하게 비하시켜 이미 와 계신 그리스도를
최대한 앞으로 부각 시킴으로써 자신의 임무를 완수하게 되고,
나중에 예수로부터 엘리야(마태 11,14; 17,12; 마르 9,12-13)로 인정 받고,
여자의 몸에서 태어난 가장 위대한 자(마태 11,11)로 격상되는 등
자신의 정체성을 인정받게 된다.
요한이 베푼 물의 세례는 그리스도교의 세례성사와 가장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
그는 오직 물로써만 세례를 베풀었지만,
그리스도교의 세례는 물과 성령으로(요한 3,5) 이루어진다.
요한의 세례는 죄의 용서를 가져오는 세례로서
도래하는 하느님 나라의 준비를 위한 것이지만,
그리스도교의 세례는 하느님 나라의 영원한 생명을 보장하는 의미로 발전된다.
아무튼 세례자 요한은 이스라엘 백성 모두를
“빛”이신(요한 1,7) 그리스도께로 인도해야할 사명을 가지고 활동하지만,
처음부터 이스라엘의 지도층 부류는 보고도 보지 못한,
듣고도 깨닫지 못하는 반대자의 편에 선다.
이로써 그들과 예수 사이에 벌어질 끊임없는 갈등과 분쟁이 벌써부터 예고된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