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지안시에 서있는 광개토왕비 비문은 고구려가 부여에서 나왔음을 밝히고 있다. “옛날 시조 추모왕(주몽)이 나라의 터전을 잡을 때 북부여로부터 나왔는데, 그는 천제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하백의 딸이다.”
주몽이란 본래 활을 잘 쏘는 사람을 뜻하는 부여 말이다. 고구려의 시조 주몽은 죽은 뒤에 ‘동명성왕’이라는 시호로 일컬어졌다. 그런데 ‘동명’은 부여를 세운 사람의 이름이었다.
중국 한나라 왕충이 쓴 ‘논형’에는 고구려 건국설화와 비슷한 내용의 부여 건국설화가 나온다. 활을 잘 쏘는 동명이 나라의 박해를 피해 새로운 땅을 찾아 ‘부여’를 세웠다는 내용이다. 고구려에서 갈라져 나와 한강 유역에 나라를 세운 백제의 건국설화에도 동명이 등장한다. ‘삼국사기’는 “동명의 후손에 구이라는 이가 있었다. 처음 대방의 옛땅에 나라를 세웠는데, 마침내 동이(東夷)의 강국이 되었다”고 적고 있다.
이처럼 부여, 고구려, 백제는 모두 동명이라는 영웅을 주인공으로 하는 시조설화를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다. 고구려와 백제는 모두 부여계 사람들이 세운 나라였다.
‘부여’는 건국설화뿐 아니라 고구려·백제의 역사에서도 지속적으로 등장한다. 고구려가 졸본(지금의 환런)에 도읍할 당시의 국호는 ‘졸본 부여’였다. 고구려라는 이름이 쓰이기 시작한 것은 2대 유리왕이 국내성(지금의 지안)으로 천도하고 난 이후부터다. 주몽이 한때 왕궁으로 사용했던 오녀산성의 ‘오녀’라는 이름도 부여→푸위(‘扶餘’의 중국식 발음)→우뉘(‘五女’의 중국식 발음)→오녀로 정착한 것이라고 현지사람들은 말하고 있다. 오녀산성이란 부여의 산성이라는 뜻이다.
백제 역사에서도 부여라는 명칭은 심심치 않게 발견된다. 부여족이었던 백제는 왕실의 성을 부여씨로 했다. 538년 웅진에서 사비로 천도한 성왕은 국호를 백제에서 남부여로 고쳤다. 수도 사비의 이름이 훗날 부여로 바뀐 것도 우연은 아니다. 이처럼 부여는 고구려·백제 왕실의 뿌리이자 우리 역사의 원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