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선한 목자와 삯꾼 10:11~15
11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12 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물어 가고 또 헤치느니라
13 달아나는 것은 그가 삯꾼인 까닭에 양을 돌보지 아니함이나
14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15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우리에 들지 않은 다른 양들 10:16~21
16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그들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17 내가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것을 내가 다시 얻기 위함이니 이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느니라
18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
19 이 말씀으로 말미암아 유대인 중에 다시 분쟁이 일어나니
20 그중에 많은 사람이 말하되 그가 귀신 들려 미쳤거늘 어찌하여 그 말을 듣느냐 하며
21 어떤 사람은 말하되 이 말은 귀신 들린 자의 말이 아니라 귀신이 맹인의 눈을 뜨게 할 수 있느냐 하더라
---
[오늘의 말씀 요약]
삯꾼은 목자가 아니어서 이리가 오면 양을 버리고 달아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선한 목자시며 양을 위해 목숨을 버리십니다. 예수님이 목숨을 버리심은 목숨을 다시 얻으시기 위함입니다. 예수님께는 스스로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습니다. 이 말씀으로 인해 유대인들이 분쟁합니다.
---------------
선한 목자와 삯꾼 10:11~15
예수님은 사랑으로 우리를 돌보시는 선한 목자입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11절)라는 말씀은 예수님이 네 번째로 자신의 정체성을 선언하신 것입니다. ‘선한’에 해당하는 헬라어 ‘칼로스’는 ‘아름다운, 가치 있는’이란 뜻도 있기에, ‘진실한 목자’ 혹은 ‘모범적인 목자’로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선한 목자는 이리가 오면 양을 지키기 위해 자기 목숨까지 버립니다(11절). 그러나 삯꾼은 이리가 와서 양 떼를 공격하고 흩어도 양을 지키지 않고 자기만 살겠다고 도망칩니다(12절). 선한 목자는 양들을 사랑으로 보살피기에 양들이 그를 알아봅니다(14절). 그러나 삯꾼은 오직 ‘삯’에 몰두하기에 양들이 그를 알아보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자기 생명을 버리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시는 선한 목자입니다.
● 더 깊은 묵상
이리가 양을 물어 가려 할 때, 선한 목자와 삯꾼은 각각 어떻게 반응하나요?
내가 생명 다해 돌봐야 하는 양 같은 지체는 누구인가요?
------------
우리에 들지 않은 다른 양들 10:16~21
예수님은 그 우리에 들지 않은 다른 양들도 사랑으로 돌보십니다(16절). ‘다른 양들’은 ‘이방인’을 가리킨다고 봅니다. 예수님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한 무리가 되게 하시고 그들의 선한 목자가 되십니다. 예수님은 모든 양을 지키시기 위해 목숨을 버리시고, 다시 목숨을 얻으십니다. 아들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그를 죽음에서 일으키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가룟 유다의 배반이나 대제사장들의 미움 또는 본디오 빌라도의 판결로 이루어지는 듯 보이지만, 실상은 인류 구원이라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계명)에 따른 일입니다(18절). 영적 안목이 없이는 예수님이 전하시는 비유의 말씀을 알 수 없습니다(20절).
● 더 깊은 묵상
예수님이 스스로 목숨을 버리시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사랑하는 이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은 무엇인가요?
===========
선하신 목자께 붙들린 인생
하나님은 성경에서 그분의 백성을 지칭할 동물로 양을 선택하셨다. 양은 멍청하고 빨리 달릴 수도 없으며 시력도 형편없다. 이 세상에서 가장 지혜롭고 뛰어나고 통찰력이 깊은 사람도 기껏해야 양에 불과하다. 이는 우리 모두가 곤경에 빠져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좋은 소식이 있다. 우리에게는 믿고 의지하기만 하면 우리를 보호하고 강하게 해 주고 바로잡아 주겠다고 약속하신 보호자가 있다는 것이다. 양이 가야 할 길로 가는 것은 양 자신의 능력이 아닌 목자의 인도하는 능력 덕분이다. 전능하신 목자의 무한하신 명철은 언제나 충분하다. 그분은 우리가 펼쳐 보지도 못한, 우리 인생의 책 모든 곳을 자세히 아신다(시 139:16).
선한 목자 예수님은 우리를 옳은 길, 구원의 길로 인도하신다. 심지어 우리의 실수와 사람들의 가해도 주님이 우리를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 것을 막을 수 없다(시 23:3). 주님께 맡긴 인생은 우리 스스로도, 타인도 망치지 못한다. 누구도 선한 목자의 양을 망하게 할 수 없다. 그분은 우리 삶에 우리보다 더 많은 투자를 하셨다. 우리를 구하기 위해 자신의 피를 다 쏟아 내셨으니 말이다. 그분이 그렇게 아끼는 보물인 우리를 누군가 망가뜨리게 놔두실 리가 없다(사 43:4).
기도 먼저 / J. D. 그리어_ 두란노
============
요한복음 10장 15절
'선한 목자'와 '삯꾼'은 양을 대하는 그의 태도로 구별됩니다. 선한 목자는 양을 살피고 돌보는 것을 사명으로 삼는데, 삯꾼은 양을 통해 자신의 이익을 구하려 합니다. 이런 차이점은 양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버릴 수 있는 '헌신'과 '희생', 양을 버리고 도망하는 '무책임'과 '비겁함'으로 이어집니다.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은 그분께 속한 인생들을 위해 목숨까지 내어 주시며 책임을 다하십니다. 성도가 할 일은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을 순전하게 따르는 것입니다.
우리를 늘 돌아보시는 주님이 계신다는 것보다 우리 삶을 더 의미 있게 하는 사실은 없다. - 세스 루이스
오늘의 기도
주님, 양들을 위해 목숨까지 버리신 목자의 사랑에 감사합니다. 여전히 우리 안에 들지 않은 다른 양들을 향한 주님의 안타까운 심정을 품길 원합니다. 그들도 주님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도록, 그들을 목자이신 주님께 인도하는 복음의 통로 역할을 제가 잘 감당하게 하소서.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11,12절 양과 목자에 관한 비유가 계속 이어집니다. 그러나 이전(2절)과 같지 않음은 목자 앞에 붙은 수식어 ‘선한’ 때문입니다. ‘선함’은 도덕적 선량함이 아니라 양과 목자, 예수님과 그를 믿는 자의 친밀한 관계를 나타내는 단어입니다. 삯꾼이 ‘양을 버림’과 달리, 선한 목자는 양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버리고’ 내어줍니다. 예수님은 ‘삯’이 아니라 ‘사랑’ 때문에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내어주신 참 목자이십니다. 그러니 대가를 바라고 주를 사랑하고 있다면 그분의 양은 아닐 것입니다.
13~15절 남녀 간의 연합은 ‘앎’을 전제로 합니다(창세기 4장 1절). 둘 사이의 긴밀한 유대감도 서로 간의 앎이 없이는 불가합니다. 선한 목자가 양을 알고, 아버지가 아들(예수님)을, 아들이 아버지를 아는 것도 이와 같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생명을 십자가 그늘 아래 내어주심으로 하나님과 우리를 온전한 연합에 이르게 하십니다. 교제와 순종을 통한 인격적인 앎이 내게 있습니까?
16~18절 만물의 주이신 예수님은 무엇에도 구애받지 않고 ‘버릴 권한과 다시 취할 능력’이 있으십니다. ‘버릴 권한’이란 죽음을, ‘다시 취할 능력’이란 그분의 부활과 이 우리에 들지 않은 양들(이방인)을 구원할 능력을 의미합니다.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회복된 에덴의 정원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이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 아래 거하게 하실 것입니다(에베소서 2장 16~18절). 예수님은 자신의 목숨을 버리심으로, 우리로 부활의 생명을 얻게 하신 참 목자요, 참 구주이십니다.
내게 주시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19~21절 너울대는 꽃잎이 아름다운 것은 그것을 알아차리는 고귀한 눈맵시가 있기 때문이고, 빗소리가 반갑게 들려오는 것은 오래 참고 고대하던 간절한 마음 때문입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에게는 고귀한 눈맵시와 간절한 마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빛과 진리이신 예수님을 앞에 두고도 알아보지 못합니다. 요한은 그들의 참혹함과 세상의 비정한 풍경을 ‘분쟁’이라 표현합니다. 간절한 마음과 고귀한 눈빛으로, 우리 곁에 함께하시는 주님의 숨결에 감격해보십시오.
기도
주님의 사랑에 감격하고 감사하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게 하소서.
사람은 만남을 통해 그의 인격이 형성되고 삶의 내용이 채워지며 생애의 결말이 결정됩니다
그래서 어떤 부모, 어떤 가족, 어떤 선생, 어떤 친구, 어떤 사회와 민족을 만나느냐에 따라 그의 삶은 완전히 달라집니다
그래서 만남의 복을 간구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가장 복된 만남의 복을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선하신 목자를 만났기 때문입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요10:11) 예수님께서 선한 목자라 말씀하신 것은 온갖 거짓 소문과 의구심에 혼란스러워하는 백성에게 당신의 정체성을 분명히 밝히시려는 것입니다
즉, 우선 목자라 하심은 예언된 다윗 같은 그 목자이심을 밝히신 것입니다 "내가 한 목자를 그들 위에 세워 먹이게 하리니 그는 내 종 다윗이라 그가 그들을 먹이고 그들의 목자가 될지라"(겔34:23)
또한 선한 목자라 하심은 악한 목자가 많이 왔기 때문에 그들과 대비하시어서 우리로 분별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선한 목자이고 누가 악한 목자일까요?
선한 목자는 양을 위해 자기 목숨까지 내어주지만, 악한 목자는 자기를 위해 양을 과감하게 버립니다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요10:11~12)
악한 목자는 실컷 자기 배만 불리다가, "자기들의 배만 섬기나니"(롬16:18) 효용이 다하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선하신 목자인 까닭에 각각 우리를 아시고 우리를 위해 생명까지 십자가 제단에 내어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동안의 만남들이 어떠했든지 상관 없이, 그동안의 만남들 때문에 어떤 인격이 형성 되었든지 상관 없이, 선하신 목자를 만나면 그의 삶이 통째로 변화됩니다
악한 목자를 만나면 악해지는 것처럼 선한 목자를 만나면 선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한 일을 열심히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딛2:14)
그러므로 우리가 선함이 가득한 선한 목자의 양육을 받는 주의 손의 양떼가 되기 원합니다 "너희가 스스로 선함이 가득하고 모든 지식이 차서 능히 서로 권하는 자임을 나도 확신하노라"(롬15:14)
요한복음10:11-21절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은 예수님은 자신을 가리켜 선한목자라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앞에서 양의 문이요 목자라 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을 가리켜 절도요 강도라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 와서 예수님 자신을 선한목자로 유대인들을 삯군으로 말씀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선한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신다고 하십니다
양들을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버리신다는 말씀을 15절에 반복하십니다
다음은 삯군입니다
삯군은 12절에 이리가 오면 양을 버리고 달아난다고 말씀합니다
삯군인 까닭에 양을 돌보지 않는다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16절에 다른 양들도 내가 인도하신다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다른 양들이란 이방인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이방인들에게도 선한목자라 말씀합니다
여기서 예수님 당신을 가리켜 선한목자라 말씀하시는데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 처럼 선한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고 하셨습니다
선한목자되셔서 양들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버리시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선한목자의 관심은 오직 나를 살리는 것입니다
오직 나를 살리는데 관심이 있습니다
이리가 우리의 양을 헤치려고 하면 선한 목자 되신 예수님은 이리가 양을 해치지 못하게 합니다
자신의 목숨을 잃을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리의 손에서 양들을 지키십니다
선한목자이신 예수님의 관심을 우리를 살리고 구원하는 것에 관심이 있습니다
이 예수님을 알기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예수님은 줄곧 예수님 당신을 희생하셔서라도 나를 살리려고 하셨습니다
과거도 지금도 앞으로도 변치 않습니다 선한목자이신 예수님의 사랑에 감사할 따릅니다
나도 이 예수님의 사랑을 흘려 보내며 사는 우리 모두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삯군 목자와 다른 선한 목자라고 신적 자기 계시를 하신다.
그리고 양들을 위해 목숨을 버린다고 하시면서 억지가 아니라 하나님과 양들을 위해 자발적으로 십자가를 지실 것임을 천명하셨다.
우리는 이처럼 한이 없는 선한 목자 예수님의 사랑을 입고 살아왔음에 감사해야 한다.
한편 저는 이 대목을 읽으면서 평신도 시절에는 목사님들이 선한 목자인가 삯군인가 잣대질하고
목사가 되어서는 자신이 삯군 목자도 못된다는 생각에 자책을 할 때가 많다.
삯군 목자는 삯을 위해서라도 양을 돌보기라도 하지만 저는 이도 저도 못되는 것 같다고 느껴지기 때문이다.
평신도 생활을 수십 년 하다 늦깎이 목사가 된 사람으로서 권면한다.
제가 그랬던 것처럼 목사님들을 평가하려고 하지 말고 내가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나 점검하시기 바란다.
자원하는 희생의 모범을 보여주신 예수님을 따라 하나님께 순종하고 교회의 지체들과 맡겨진 부서들을 섬기고 있습니까?
하나님과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 중 어느 것에 관심이 더 많습니까?
타인의 시선과 평가에 우쭐거리거나 섭섭해 할 필요 없이 우리도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감사로 예수님처럼 살아야 한다.
예수님께서 우리에 들지 아니한 양도 인도해야 한다고 하셨는데 예수님의 심정을 아는 성도는 그 분이 관심을 두시는 곳에서 섬기며 목자의 심정으로 영혼 구원하는 일을 해야 한다.
오늘도 예수님을 닮은 모습으로 세상이 모르는 기쁨과 평안을 품고 낮은 자리에서 섬기는 자가 되고 예수님의 손발이 되어 예수님이 가시고자 하는 곳에 가고 예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을 할 수 있는 삶이 되면 좋겠습니다.
선한 목자는 양을 위하여 자기의 목숨을 버리는 자입니다.
그런데 선한 목자가 자기의 목숨을 버리는 이유가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 때문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 이유가 말이 됩니까?
이리가 와서 양을 잡아먹으려고 한다면 목자는 죽을힘을 다해서 싸워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로마의 압제로부터 자신들을 구원할 메시아를 기대했습니다.
즉 다윗과 같은 용맹스러운 자를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순한 양처럼 오셔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십니다.
도저히 메시아로 믿을 수 없는 행동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선한 목자가 자기의 목숨을 버리는 근거를 목자와 양의 관계 속에서 발견하길 원하십니다.
그리고 그 관계의 근원을 가르쳐 주십니다.
바로 하나님과 예수님의 관계를 보기 원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과 예수님께서 맺으신 언약 때문에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께서 그의 양을 위해서 죽으셔야 합니다.
히브리서 9장 15-17절을 보면 “이를 인하여 그는 새 언약의 중보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를 속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유언은 유언한 자가 죽어야 되나니 유언은 그 사람이 죽은 후에야 유효한즉 유언한 자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효력이 없느니라” 언약은 마치 유언과 같습니다. 하나님과 언약을 맺으신 예수 그리스도가 죽어야 그 언약의 약속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리에게 죽는 선한 목자는 힘이 약해서 죽는 것이 아닙니다.
18절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사망에 굴복하실 필요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위하여 스스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십니다.
이것이 은혜이며 사랑입니다.
우리를 살리시기 위하여 예수님께서는 그의 몸을 사망의 권세 아래에 맡기십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죽음은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부활하심으로 우리의 부활을 이루시는 권세를 하나님으로부터 받게 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언약을 완성하심으로 이제 하나님의 양들은 선한 목자의 목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날 때부터 맹인 된 자가 세상의 빛을 처음 보았듯이 예수님의 목소리를 듣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의 빛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 빛으로 말미암아 영생을 알게 되고 누리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 우리에게 향한 은혜가 있습니다.
16절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그들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우리들은 유대인들이 아니었습니다.
유대인이라는 우리 밖에 있었던 이방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유대인의 우리 안에서 선한 목자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양만을 구원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에 들어가 있지 않은 다른 양, 즉 이방인이었던 우리를 동일하게 부르시어 하나님 나라로 이끌어 가실 것입니다.
우리는 선한 목자의 목소리를 들었기 때문에 우리에게서 나온 자입니다.
목자가 가자고 하면 가고, 풀을 먹으라고 하면 먹고, 물을 마시라고 하면 마시는 자입니다.
그러면 선한 목자의 목소리에 순종함으로 쫓아 가 하나님 나라에 도착해 있는 우리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가끔 우리의 삶 속에서 회초리를 맞을 때 좌절하지 마십시오,
그 회초리는 선한 목자에게 속한 양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선한 목자가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을 할 때 양을 살리기 위해 주어지는 은혜입니다.
우리 눈앞에 보이는 고난의 회초리는 하나님의 사랑 표현이며 영원한 생명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의지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죄에서 나와서 선한 목자가 원하는 곳으로 걸어가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도 선하신 목자의 목소리를 듣고 순종하시는 여러분들이 되길 소원합니다.
➲ 자기희생을 감내하시는 참목자이십니다(11~15절).
목자와 양의 비유를 이해하지 못한 유대인들을 향하여 예수님은 ‘나는 선한 목자라...’(11절) 말씀하십니다.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립니다. 목자는 자기 양들을 돌보며 인도하는 일에 생명을 걸어야 합니다. 또한 양들이 안전하고 풍요로운 삶을 살아가도록 하는 것이 선한 목자의 최고의 관심사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선한 목자인지, 삯꾼 목자인지는 양들을 위하는지 아니면 자기 자신의 이익을 위하는지에 따라 판명됩니다(12절). 에스겔 34장에는 악한 목자들에 대하여 양떼를 돌보지 않고, 맹수들의 먹이가 되도록 그냥 놓아두는 악한 목자들로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을 상징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거짓 목자는 양들을 위한 어떤 책임감도 갖지 않는 자(13절)입니다. 위험의 순간에 양 떼를 버리고 달아나 버립니다.
예수님은 다시 한 번 자신이 ‘선한 목자’이심을 상기시키면서 목자와 양의 관계를 ‘상호 앎’의 관계로 설명하고 계십니다(14절). 이는 서로 간의 친밀한 관계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 관계이기에 예수님은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15절) 자신의 양을 위해 목숨을 버리실 것이라고 선언하십니다.
참된 목자는 십자가의 정신을 따르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십자가의 정신으로 사랑하고, 희생하며 섬기는 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자녀들의 안전과 생명보다 자기의 안전과 이익을 우선시 한다면 이는 거짓 목자가 분명합니다. 참된 목자는 아버지의 심정을 품는 자입니다. 아버지가 자녀를 아끼듯이, 예수님은 아버지의 심정으로 자기 양들을 아끼며 보호하고 목숨까지 버리셨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목자는 양들을 위해 헌신하고 돌보며, 섬기고 희생을 감내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선한 목자로 사역하는 것이 내 자신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목회이며, 또 그런 마음으로 지금까지 왔는데, 여전히 자기희생이라는 부분에서는 상당 부분 부족함을 느끼게 됩니다. 자기희생을 감내하시는 참목자되신 예수님만을 그래서 온전히 따르는 삶이어야 하겠습니다.
➲ 자발적으로 순종하시는 참목자이십니다(16~21절).
‘나에게는 이 우리에 속하지 않은 다른 양들이 있다. 나는 그 양들도 이끌어 와야 한다. 그들도 내 목소리를 들을 것이며, 한 목자 아래에서 한 무리 양 떼가 될 것이다...’(16절,새번역). 우리 밖의 양들도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함께 모이게 됨으로써, 예수님으로 인하여 구원을 얻는 하나의 무리가 될 것임을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자기 양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선한 목자의 행동을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십니다. 예수님이 친히 당신의 목숨을 버리시는 이유는 타인에 의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유롭게 선택하신 희생이라는 것(17절)입니다.
즉, 예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셔서 그분의 뜻을 이루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생명을 버릴 권세도, 다시 얻을 권세도 가지고 계시기 때문이고, 하나님 아버지의 계명과 뜻에 대하여 자발적으로 순종하셨음을 밝히고 계십니다(18절). 이로 인하여 유대인들 사이에 다시 분쟁이 일어납니다(19~21절).
참된 목자는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 양이나, 무리를 떠난 양에게도 관심을 두며 한 마리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살피는 목자입니다. 즉, 모든 사람을 품을 수 있는 목자가 되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삶에 대한 편견을 갖지 않으셨습니다. 모든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대속의 제물이 되어 주셨습니다.
내 자신 역시도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감사로 예수님처럼 섬기는 삶, 희생의 삶, 순종의 삶을 살아가는 선한 목자로 살아가므로 생명을 살리는 사명을 감당하는 삶이어야 하겠습니다. 영적 무지 속에서 깊은 잠을 자고 있는 자들이 생명의 주님을 알아가도록 하나님의 능력이 되는 복음을 선포하는 참된 목자로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자발적으로 순종하시는 참목자되신 예수님만을 온전히 따르는 삶이어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참목자가 되셔서 영적 풍요로움과 영생의 행복을 누리게 하신 예수님을 더욱더 신뢰하고, 순종하는 삶을 살아갈 뿐만 아니라 주님의 희생과 순종을 본받아 주님과 이웃을 위해 그리고 성도들을 위해 자기희생의 삶을 통한 선한목자로 사역해 나아갈 수 있기를(요 10:1~21절)...
“귀신이 눈먼 사람의 눈을 뜨게 할 수 있겠느냐?(21절)”
자신의 양들을 위해 생명을 내어 놓는 선한 목자처럼, 주님은 자신의 생명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스스로 내놓으셨습니다. 의로운 일을 위해 생명을 내어놓는 자들을 우리는 영웅으로 추앙합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생명을 내어줄 가치가 없는 죄인들을 향해 오셨습니다.
살릴 이유가 없는 이들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셨고, 하나밖에 없는 생명이지만 그 위대한 사랑을 위한 불쏘시개로 자신의 육신을 기꺼이 드리셨습니다.
주님은 생명의 주인이시고, 생명의 주관자이십니다. 하지만, 주님은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실 것을 믿었고, 그 믿음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셨습니다.
.잠시 하늘을 날며, 땅을 디뎌서는 결코 경험할 수 없는 설렘을 만끽합니다.
주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품에서 다시 살리심을 받는 더 큰 기쁨을 바라보며 자신의 몸을 거침없이 던지셨습니다.
그들은 주님이 귀신 들려 미쳤고, 이제 그 말을 들을 가치도 없다고 비방하였지만,
죽은 자도 살리시는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주님은 귀신들이 흉내 낼 수도 없을,
날 때부터 눈먼 자의 눈을 창조의 원형대로 회복시키실 수도,
자신을 드려 세상을 구원하실 수도 있는 권세가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빛으로 오셔서 어둠을 몰아내시고 생명으로 오셔서
사망의 권세를 물리쳐 승리하신 선한 목자와 동행하며,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을 세상 가운데 드러내어 친히 십자가에서 자신의 몸을 드려 증거하신 주님의 구원을 노래하는 복된 시간 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오늘의 말씀요약
예수님은 자신이 선한 목자라 하십니다. 삯꾼은 목자가 아니므로 이리가 오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지만,
예수님은 양을 위해 목숨을 버리십니다. 예수님이 목숨을 버리시는 것은 그것을 다시 얻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버릴 권세도,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십니다.
오늘의 말씀해설
양을 버리고 달아나는 삯꾼(10:11~13)
삯꾼은 달콤한 속임수로 양을 꾀다가 이해관계가 어긋나는 순간 돌아섭니다. 위기 때에 끝까지
함께하지 않습니다. 자기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양 떼를 저버리고 달아납니다. 삯꾼은 목자가 아니므로
양을 사수하며 돌볼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삯꾼은 양의 필요도 알지 못하고, 양에게 때를 따라
꼴을 마련해 주지도 않습니다.
그저 양의 젖과 털만 빼앗아 가는 약탈자일 뿐입니다.
당시 유대교 지도자들이 바로 이러한 삯꾼과 같았습니다. 이와는 달리 선한 목자는 양을 위해 기꺼이
자기 목숨을 버립니다. 이는 결국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심으로 멸망의 위기 가운데 있는 양들을,
자기 죄로 죽어야 할 죄인들을 구원하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선한 목자이신 것이 우리에게는 기쁜 소식 곧 복음입니다.
- 묵상 질문: 삯꾼과 목자의 차이는 무엇인가요?
- 적용 질문: 삯꾼이 아닌 선한 목자와 같은 모습으로 양을 돌보기 위해 내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요?
양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목자(10:14~18)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은 자신의 양뿐 아니라 그 우리에 들지 않은 다른 양, 즉 이방인도 인도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선민의식에 빠진 유대인뿐 아니라 이방인까지 구원할 계획을 갖고 계십니다.
이는 모든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기를 원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기도 합니다(롬 1:16; 딤전 2:4 참조).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 죽음을 자원하는 마음으로,
자발적으로 선택하신 것입니다. 그런 예수님의 사명은 양을 위해 목숨을 희생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부활로 이어집니다. 예수님은 다시 살아나셔서 우리에게 영생의 소망을 주십니다.
이는 예수님이 생명의 주인이시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 묵상 질문: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이 하시려는 것은 무엇인가요?
- 적용 질문: 마음 불편했던 그(그녀)의 영혼 구원을 돕기 위해 지금 무엇을 희생할 수 있나요?
오늘의 기도
갈 길 모르는 어리석은 양과 같은 저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주님,
그 그늘 아래에 참된 자유와 생명이 있음을 믿습니다. 세상의 다른 음성에 흔들리지 않고,
저를 대속하신 주님의 음성에만 귀 기울이게 하소서.
사40:11 / 렘31:10 / 겔34:11 / 벧전5:2~4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라 내 양 떼가 노략거리가 되고 모든 들짐승의 밥이 된 것은 목자가 없기 때문이라 내 목자들이 내 양을 찾지 아니하고 자기만 먹이고 내 양 떼를 먹이지 아니하였도다 - 에스겔 34:8
그 때에 너희가 너희 악한 길과 너희 좋지 못한 행위를 기억하고 너희 모든 죄악과 가증한 일로 말미암아 스스로 밉게 보리라.(겔 36:31)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 그들은 부패하고 그 행실이 가증하니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다 치우쳐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시 14:1~3)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시 23편)
예수께서 길에 나가실새 한 사람이 달려와서 꿇어 앉아 묻자오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막 10:17~18)
그러므로 여러분이 일깨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지금 내가 여러분을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에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여러분을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하게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행 20:31~32)
양들의 큰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를 영원한 언약의 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 내신 평강의 하나님이
모든 선한 일에 너희를 온전하게 하사 자기 뜻을 행하게 하시고 그 앞에 즐거운 것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가운데서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히 13:20~21)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벧전 2:24~25)
너희 중 장로들에게 권하노니 나는 함께 장로 된 자요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요 나타날 영광에 참여할 자니라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억지로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득을 위하여 하지 말고 기꺼이 하며맡은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양 무리의 본이 되라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관을 얻으리라.(벧전 5:1~4)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빌 3:21)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골 3:1~4)
강도 만나 죽은 자를 지나치지 않고 포도주와 기름을 부어 상처를 싸매시고,
자신의 사랑을 내어 드려 다시 올 때까지 돌봄을 받도록 맡기신
그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자신을 드려 우리를 살리시고 끝까지 함께 하시며
다시 오실 그리스도를 만나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 되는
영광을 누리는 인생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결코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반석 위에 그 구원을 노래하고,
주님을 담대하게 증거하고 전하는 증인의 삶을 살아가기에
부족함이 없도록 성령으로 오늘도 충만케 하여 주시옵소서.
보이지 않는 곳마다 기쁜 구원의 소식 전하시는 선교사님들의
아름다운 발걸음마다 축복하여 주시고,
그 구하는 것에 넘치도록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기쁨으로 나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고통 가운데 신음하고 있는
열방의 백성들에게 한없는 긍휼을 베푸사
회복과 치유의 역사를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분열과 다툼, 분노와 미움, 어둠과 방황 가운데 헤매는
이 나라와 백성에게 빛으로 생명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믿음이 새로워지는 성령의 새 바람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감사와 찬양을 아버지께 올려드리며,
우리의 길과 진리와 생명 되신 예수님의 거룩하신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