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래인궁 임인궁의 중요성과 역할
덕혜옹주(德惠翁主, 1912년 5월 25일 ~ 1989년 4월 21일)는 조선의 제26대 왕이자 대한제국의 초대 황제였던 고종과 귀인 양씨 사이에서 태어난 고명딸이다. 황녀로서 덕혜라는 호를 하사받기 전까지 ‘복녕당 아기씨’로 불렸다.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녀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덕혜옹주는 1910년 대한제국이 멸망한 이후에 태어났기 때문에 엄밀히 말하면 대한제국의 황녀였던 적이 없다. 따라서 '대한제국(또는 조선)의 마지막 황녀'라는 그녀의 타이틀은 사실 틀린 셈. 대한제국에는 황녀가 없었고, 조선의 마지막 왕녀는 철종의 외동딸인 영혜옹주였다.
고종이 59세일 때 얻은 늦둥이이자 당시 유일한 고명딸이어서, 덕혜옹주는 극진한 총애를 받으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이런 일화도 있다. 고종이 아기였던 덕혜옹주를 보기 위해 입실했을 때, 마침 유모 변복동 상궁은 누워서 덕혜옹주에게 젖을 물리고 있었다. 변 상궁은 일어나 예를 갖추려 하였지만, 고종은 덕혜옹주가 놀라거나 울까 봐 유모를 일어나지 못하게 하였다. 때문에 "천하의 황제 폐하 앞에 누울 수 있는 것은 변 유모 뿐"이라는 말이 돌 정도였다. 덕수궁에서 자라던 어린 시절에는 '덕수궁의 꽃'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덕혜옹주가 조금 자라자 고종은 덕수궁 준명당에 황실 최초의 유치원을 만들기까지 했으며, 150m밖에 되지 않은 거리인데도 덕혜옹주가 가마를 타고 다니게 했다.
▶ 고종의 고명딸. 순종, 의친왕, 영친왕의 이복 여동생이다. 생모는 복녕당(福寧堂) 귀인 양씨이다. 양씨는 본래 궁녀였다가 승은을 입어 덕혜옹주를 낳고 후궁이 되었다. 양씨의 친정 오빠는 백정으로 조선에서 가장 미천한 신분이었으나 여동생 덕분에 관복을 입고 궐에 출입하는 귀한 신분으로 벼락 출세했다.
▶ 덕혜옹주는 어린 나이에도 신분 고하에 대한 이해가 빨랐던 모양이다. 외삼촌인 양 상관이 덕수궁에 입궐할 때마다 "양 상관이 온다"며 하대하고 "아기씨의 외가는 어디입니까?"라고 묻는 궁인들의 질문에 생모 귀인 양씨의 친정이 아니라 적모(嫡母) 명성황후의 친정인 죽동이라고 대답했다는 일화가 남아 있다. 전통적으로 왕의 자녀는 생모가 누구이건 간에 모두 왕후의 자녀이기도 하였으므로, 덕혜옹주가 자신을 황제의 딸이라고 의식하고 있던 것을 엿볼 수 있다.
▶ 대중매체에서는 덕혜옹주를 비롯한 황족들이 일본에서 차별받으며 어렵게 살았다고 완전히 잘못 알려졌지만, 실제로는 일본 황족들과 동등하게 대우받았고, 적어도 신적강하 이전까지는 엄연한 상류층의 일원으로써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
당시의 조선은 지옥이였다. 고종은 나약한 왕,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였으며, 조선 왕실은 이왕가라는 새 직함을 얻고 왕공족이라는 신분에 편입해 일본 황실 다음가는 부를 축적했다. 오죽하면 황족 출신이던 이방자 여사가 영친왕에게 시집간다는 소식을 들은 그녀의 학습원 동기들이 다들 부러워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덕혜옹주를 비롯한 황족 일가는 자국의 소시민들이 지옥같은 삶을 보내고 있을때 일본의 극진한 비호 아래 왕공족으로써 뭐든지 최고만을 경함하며 의식주를 비롯한 신식 생활을 마음껏 누렸다.
더군다나 그 시절 상류층 여성들이 정략결혼으로 인해 불행한 결혼생활을 보내는 일도 허다했을 시절에, 그녀의 남편으로 선택된 소 다케유키는 훤칠한 외모에 도쿄제국대학 출신이라는 학력까지 지닌 엄청난 엘리트+엄친아였다.
▶ 비록 덕혜옹주가 평생을 신경쇠약과 조현병 증상에 시달리며 본인의 의지대로 삶을 살아갈 수는 없었지만, 일제치하 당시 소시민들의 삶과 비교한다면 황족으로 태어난 덕혜옹주는 주어진 환경을 다 누리지 못했을 뿐이지 평탄하고 안온한 삶을 살다 간 것이였다.
▶ 겉으로 보기에는 황녀의 대우를 받았을지라도, 덕혜옹주는 13살 어린 나이에 어머니와도 떨어지고 낯선 곳, 그것도 아버지를 독살했을지도 모르는 일본에 가서 늘 두려움에 떨어야 했다. 이방자의 기록이나 여자가쿠슈인의 일본인 학생의 기록을 봐서는, 자신도 독살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느낀 듯 하다.
덕혜옹주의 조현병이나 신경쇠약 같은 정신질환이 아무 이유 없이 생긴 게 아니다. 암살을 두려워해서 소극적이었다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나름의 풍족한 생활을 했다는 것도 한 나라의 황녀로서 비판거리는 되지 않는다는 의견도 존재한다.
▶ 영친왕은 '이왕가의 수장'이라는 이름뿐인 명분이라도 있었고, 아내 이방자와 함께 유럽 여행을 다녀오기도 하는 등 나름 개인으로선 유복한 생활을 누릴 수 있었으나, 덕혜옹주는 그야말로 아무런 실권도 없었고 마음의 병으로 일반적인 생활조차 제대로 영위하지 못했다.
▶ 사실 이 부분은 미디어 매체의 과도한 왜곡으로 형성된 이미지가 오히려 덕혜옹주를 욕보인 측면이 강하다. 덕혜옹주는 말 그대로 수동적이고 평범한 그 시대의 보통 여성이었을 뿐이다. 그러나 미디어 매체에서는 마지막 왕녀라는 써먹기 좋은 소재를 가진 덕혜옹주를 어떤 식으로든 독립운동 및 애국과 연관지으려 하는 경우가 많다 보니 괜히 욕먹게 된 것이다.
덕혜옹주에게 어떤 역할을 기대하고, 그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하여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는 것은 썩 공정하지 않다. 한국사의 공주 / 옹주들은 대부분 덕혜옹주처럼 호강하며 살다 어른들이 정한 부마와 혼인해서 정치적으로 어떤 역할도 하지 않은 채 조용하게 살았으며, 애초에 태어났을 때부터 그녀들에게 기대하고 교육하는 것은 딱 그 정도 뿐이었다.
※ 래인궁은 천이궁이다.
천이궁이란?
- 밖에 나가 만나는 길흉, 득실, 후천조화, 기회를 만나는 궁. 교통안전 여부. 노년운, 운세,
- 복덕궁의 관록궁 .(복이 많은가, 적은가 여부)
육내궁(六內宮) : 명궁, 재백궁, 관록궁, 질액궁, 전택궁, 복덕궁
육외궁(六外宮) : 형제궁, 부처궁, 자녀궁, 천이궁, 노복궁, 부모궁 (육외궁은 천이궁을 제외하면, 모두 육친궁이다.)
육내궁과 육외궁은 응용상의 분야로서, 得失, 吉凶, 聚散을 나누며, 혹은 자신의 內事와 他人의 事를 나눈다.
천이궁은 육외궁에 속하므로 타인의 事에 나의 운명이 좌지우지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명반의 주인은 명궁이 아니라 천이궁 = 타인 = 국가 = 시국의 흐름에 있다.
※ 壬寅궁간 사화의 파급효과
1] 천량화록, 좌보화과는 형제궁에 入한다.
- 형제, 모친이 사람됨이 온화하고 남과 잘 지내며, 재록을 얻는다. 명성과 명예를 중시하고 체면을 차리며 풍도가 있다.
- 형제 자매의 힘을 빌려 서로 의지하며, 재록이나 식록을 얻기 쉬운 편이다.
- 형제 자매가 나의 귀인이다.
- 천량의 化氣는 蔭(그늘음)이다. ‘그늘 덕택, 덕택에, 돌보아준 덕분에'라는의미가 강한 성이다. ‘덕택에'사는 것이니, 천량은 모든 종류의 돌봄과 음덕, 귀신과 신명, 종교, 천우신조, 보호치료, 의료, 원칙, 감찰, 법률, 감독, 감호의 의미가 있다. 부모 조상 유명인사 지도층 등의 보호를 받을 수 있다.
- 천량 祿은 가족과 인연이 있으며 의외의 財(불로소득, 복권)를 불러오고, 가족사업에서 발전하며, 공중복무행업, 다른 사람 대신 해결하는 특성이 있다.
- 좌보 科는 귀인의 도움이 따른다. 다른 사람을 통해 직접적 보조를 받을 수 있다.
(이 명반은 대만제 명반으로 좌보화과 대신 천부화과로 표시되어 있다.)
2] 자미화권는 생년화권와 자화권로 천이궁(래인궁)에 좌한다.
- 외부 활동에서 자미 權은 내가 외부에서 대접받는 위치에 있다고 말할 수 있지만, 시대적 흐름 속에서는 외부의 권력에 내가 따라야 하는 입장으로 살았다. 지옥과 같은 조선에서 살지 않고 대접받는 환경에 거처하게 되었다.
- 權은 권력장악과 관련이 있는데, 내가 쥐지 못하면 따라야 하는 것이다. 쟁집(爭執) 마찰이 잘 일어나는 象이다. 예리한 칼끝이 밖에서 나를 향한 구조이다.
※ 한국에 들어오지 못한 상황에서 일본에선 패전과 신적강하의 여파로 다이쇼 덴노의 직계 황족 외엔 죄다 평민으로 강등되어 조선 황족들도 경제적으로 상당히 막막한 처지에 처해있었다. 오죽하면 의친왕의 장남 이건은 장사를 하며 근근이 살았을 정도였다. 영친왕과 이방자는 이건을 찾아갔다가 그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아 이건에게 미처 말을 걸지도 못하고 돌아오면서, '이제 우리도 저렇게 살아야 하는 건가…' 하며 괴로워했다고 한다
같은 황실의 사람이어도 차이나는 인생을 사는 것은 자기 운명에 의해서임이 보여진다.
3] 무곡화기가 복덕궁에 入한다.
- 향수(享受)가 적거나 혹은 복이 있어도 누리지 못한다.
- 부정적 생각, 의심, 시비나 구설을 만들기 쉽다.
※ 인궁 자부 조합
- 천부는富, 자미는貴를 뜻하는데, 부귀를 모두 가지기는 어려우니 오히려 고독의 의미가 있는 성계이다.
- 완벽해 보이는 조합이나 현대사회에 적응력이 떨어지고 고립되기 쉬우며 지나치게 이상에 치우치기 쉬운 단점이 있다.
- 이러한 단점의 중심에는 자미와 천부의 성질상의 충돌이 자리해 있는데, 자미는 정신, 주동, 개창의 의미가 있는데 반해, 천부는 물질 수동 守成의 성질이 있어서 두 속성이 서로 충돌하기 때문이다.
- 흉성을보면 고립되고 재주는 없으면서 눈만 높아 이것도 저것도 이루지 못하면서 기회를 놓치는 삶을 살기 쉽다.
*큰 주성 둘이 한 궁에 집중되어 있으므로 뜻이 아주 높아 현실에 쉽게 만족하지 못하며, 그뜻을 다른 사람들이 이해해 주 지 못하므로 정신이 공허하기 쉽다. 또한 대궁의 칠살로 인해 화살위권적인 속성도 있어서, 위엄과 권위적인 측면을 고려 하느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경우가 많다.
- 공망성에 화개 등을 보면 종교나 이상, 예술, 자선사업 등에 몰두하여 청정하고 청고한 삶을 지향하게 된다. 보좌성이 짝성으로 비추면 개창력이있고 분발하게 되지만, 없으면 대궁의 칠살을 제어할수 없어 오히려 결단력이 부족한 것으로 변해버린다.
제1 무신대한 / 6 갑진대운
덕혜옹주가 점점 성장하는데도 일제는 덕혜옹주를 황적에 올려주지 않았다. 이에 고종이 직접 나서, 데라우치 마사타케에게 덕수궁 유치원에서 아이들과 함께 놀고 있는 덕혜옹주를 보여주며 "이 아이가 바로 내 딸이다"고 소개해 결국 황적에 올렸다는 일화가 있다.
▶ "일제가 대한제국 황실의 대를 끊으려고 했기 때문에 호적에 올리지 않았다"는 주장이 차라리 더 신뢰성이 있다. 사실 일제강점기 당시 덕혜옹주가 태어난 사실은 이미 한참 전에 조선총독부에 알려져 있었다. "덕수궁(소주방) 나인 양춘기가 여자아기를 낳았다"라고 기록되어 있었는데, 일본인들이 덕수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사사건건 감시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만약 덕혜옹주를 조선의 황녀로 인정하게 되면 다른 조선의 황족들까지 인정해야 하기 때문에, 일본은 덕혜옹주를 황적에 올리는 것을 일부러 미루고 있었다는 추측이 가능하다.
▶ 고종은 1919년 1월 21일 승하하였다. 당시 고종의 사망을 두고 일제에 의해 독살되었다는 설이 항간에 퍼졌다. 그날 고종의 병세가 위중하여 이완용이 궁에 머물며 숙직을 하였으며 궁전의 나인을 시켜 고종에게 식혜를 올렸는데 식혜를 마신 후 복통으로 급서한 것으로 전해진다. 고종이 독살당했다는 소문이 확산되자 일제는 《매일신보》에 기사를 내고 고종이 뇌일혈로 사망했다고 전했다. 하지만 고종에게 식혜를 올렸던 나인 2명도 잇따라 사망했는데 고종 승하 후 이틀 뒤 23일에 나인 김씨가 감기로 급사하고, 2월 2일에는 나인 박씨가 심한 기침으로 사망했다.
▶ 일제 강점기 경기도 경성부 덕수궁에서 태어나 경성일출공립심상소학교 재학 중에 일본의 강제적인 요구에 따라 유학을 명분으로 도쿄로 보내져 일본 황족들이 공부하는 학교인 여자 가쿠슈인에서 수학하였다. 당시 대한제국 황족들은 대개 일본으로 끌려가 사실상 인질이 되었기 때문에, 1925년 13살인 덕혜옹주는 일본으로 강제 유학을 가 황족과 화족의 영애들이 다니는 학교인 여자가쿠슈인(女子學習院)에 편입학되었다. 영친왕 부부는 덕혜옹주가 자신들의 자택에서 지내며 학교에 통학하는 것을 희망했으나, 일본의 반대로 옹주는 고향을 떠나자마자 가쿠슈인 내에 있는 기숙사 생활을 해야 했다.
※ 명궁 칠살
- 일반적으로 칠살은 將(장수 장)을 대표하며 전쟁터에 나가 싸우는 장수이다. 권력과 카리스마가 있고 실천력, 행동력, 관리능력이 뛰어나다. 깊은 생각과 정확한 판단력이 있으며, 이지적이고 승부욕이 많다.
- 칠살이 묘왕지(인신사해궁)에 있고 살을 보지 않으면 성정이 기월동량과 같은 경향을 보이기도 하므로, 칠살이 있으면 꼭 사납다 또는 격렬하다는 선입견을 가져서는 안 된다.
- 칠살은 본래 가지고 있는 격렬함과 武적인 속성 때문에 살성을 보더라도 제압하는 힘이 있으나 너무 많은 살을 보면 살을 제압하느라 심력을 소비하므로 인생이 고생스럽다.
- 자유롭게 살 수 있는 환경에서 칠살은 조업을 떠나 외지나 외국에서 분투하고 고생하나 낯선 환경에 대한 적응력이 뛰어나다. 그러나 자신의 원치 않는 일을 해야하거나 상황이 불안정해지면 언제 어떤 적과 싸워야 할지 모르므로 민감하고 내심 의심과 염려가 많아 외강내유의 성향이 있으며 타라를 보면 더욱 그러하다. 이 명반은 타라 경양 천형 지겁 지공 절공 등 살성을 많이 보았고, 복덕궁 무곡화기로 인한 극심한 부정적 생각과 의심 염려로 인한 인생의 어둡다.
※ 무신궁간 사화의 작용
- 탐랑화록은 재백궁에 入하여 복덕궁 무곡화기를 沖한다. 재복선은 父母宮의 부질선이 된다.
- 천기화기는 노복궁에 入하여 형제궁 천량화록을 沖한다. 노복궁은 父의 관록궁이 된다.
- 록기충 작용이 발동한다.
- 선천화록에 대한화기가 충하면 있던 기회도 상실하거나 인연이 나빠지거나 손실이 발생한다.
- 선천화기에 대한화록이 충하면 모종의 사건이 시작되는데 이별의 되는 일이 발생한다.
★ 어린 아이 시기에는 사화의 움직임은 부모의 영향 하에서 움직이게 되므로 부모의 상황이 많이 반영이 되므로 부모궁 입장에서 풀이하여야 한다.
- 父의 입장에서 보면 부모궁(복덕궁) 생년화기가 질액궁(재백궁)을 沖하는 것이니 부친의 신체건강에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 무신대한 질액궁(재백궁)의 탐랑화록 발동의 결과는 관록궁(노복궁)천기화기로 가니 부친의 건강상의 문제가 부친의 직책과 연관이 되어지는 象이다. 命·財·官을 沖하는 것은 불길하다.
- 탐랑은 천동과 육합이다. 부친의 질액궁 탐랑궁에는 천요는 갑작스러움·권모술수·음모와 관련이 있고, 용지 천주는 음식과 관련이 있다. 탐랑은 질병적인 면에서 재액이 따르는 면이 있다. 록기충 작용이므로 음식으로 인한 재액사가 발생하게 되었다.
※ 무신대한에 부친 고종 사망 발생
- 1919년 1월21일은 음력 1918년 12월20일로 무오년 을축월 계유일이다.
- 7세 무오년은 무간 사화가 발동이 된다. 록기충 작용으로 모종의 사건으로 인한 부친과의 인연이 끊어졌다.
☞ 유년 사건이 일어나는 달은 유년 천이궁의 관록궁의 화기가 좌한 月에 발생하거나 沖하는 달에 발생한다.
- 무오년 천이궁의 관록궁은 갑진궁으로 태양화기가 해궁에 入한다. 음력6월이나 음력12월에 모종의 사건이 일어날 수 있다.
(대한하고 밀접한 관계가 있는 유년에는 이 작용력이 강하게 나오나 아닌 유년에는 이 이론이 안 맞는 경우가 많다.)
- 음력12월 을축월은 해궁으로 천기화록은 노복궁에서 형노선을 발동시켜서 형노선/유년부질선이 인동되고, 태음화기는 질액궁에서 부질선을 발동시키니 그 사건은 부친과 관련이 있다.
※ 대한 10년차 을축년 일본 강제 유학
- 유학과 관련이 되기 위해서는 관록궁, 전택궁, 천마궁, 부모궁이 인동되어야 한다.
- 명궁인 申宮에 좌하므로 역마지지에 앉아있기에 해외 출입하는 명조이며, 무간 천기화기가 축궁에, 관록궁 천량화록이 미궁에, 전택궁 문곡화과 문창화기가 축궁에 있기에 축미궁은 강력한 이동수가 발동하는 궁이다.
- 명궁 화기가 좌한 궁은 자신의 생사와도 관련이 있지만, 자신의 불만족이 드러나는 궁이 된다.
- 을축년 유학이 원하는 바가 아니였으며, 불안한 삶의 시작을 하는 상황으로 전개되었다.
- 노복궁 계축궁은 파군화록이 관록궁, 거문화권이 자녀궁, 태음화과가 질액궁, 탐랑화기가 재백궁에 入하여 부관선 자전선 부질선 재복선을 모두 인동시키는 궁이 된다.
제2 정미대한 / 16 계묘대운
▶ 아버지가 식혜를 먹고 얼마 안 있어 의문사한 뒤에 일본 사회에서 고립된데다 평소 독살에 대한 공포를 호소하곤 했는데, 이 역시 원인으로 작용했을 가능성이 있다.독살이 두려워서 보온병에 담아 가지고 온 물만 마셨다. 일본에서 덕혜옹주는 내내 신경쇠약에 시달렸다. 덕혜옹주는 이미 10대 후반 때부터 정신병 증상이 시작되어 등교 거부를 한다. 이후 올케 이방자는 의사를 불러 덕혜옹주를 진찰하게 했는데, 조현병 진단을 받았다.
▶ 그러다 1929년 기사년 5월 30일, 어머니인 귀인 양씨가 끝내 유방암으로 사망하자, 이때부터 처음으로 몽유병과 조현병(정신분열증) 증세를 보였다고 한다.
▶ 덕혜옹주는 신경쇠약으로 인해 등교 거부 상태였으나, 설상가상 졸업 이전의 시점이던 이때는 이미 정신질환 진단을 받은 데다 혼담까지 오가고 있어, 당시에는 여자가쿠슈인을 끝까지 다니지 못했다. 덕혜옹주가 학업을 마친 건 소 다케유키와 결혼한 이듬해인 1931년의 일이다.
▶ 고종은 사실 덕혜옹주가 8세 때 황실 시종 김황진의 조카인 김장한과 약혼을 시켰다. 김황진에게 아들이 없다고 하자 "그럼 조카라도 달라"고 해서 맺은 혼약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고종이 세상을 뜬 후 약혼은 무효화되고, 일본은 그녀를 일본인과 결혼시키려 했다. 영친왕과 이방자 부부 모두, 자신들에 이어 어린 옹주를 정략결혼의 희생양으로 삼으려 든다며 해당 혼사를 굉장히 불쾌히 여기고 심하게 반대했다고 한다. 특히나 이 시기 이미 몽유병이나 신경쇠약을 비롯한 정신이상 증세를 보이던 덕혜옹주를 치료할 생각도 하지 않고 한창수가 자신의 공적을 높이기 위해 결혼을 서둘러 진행한 탓에, 옹주의 건강을 위해서라도 더욱 반대를 해서 어떻게든 혼담을 깨려 노력했다고 한다. 물론 끝내 실패했지만. 이방자의 기록에는 "식사도 잘 하시고 조금은 조리 있게 말할 수 있게 되어 무사히 결혼할 수 있게 되었다."고 적혀 있는데, 그 말은 이미 증상은 지속되고 있으나 일시적으로 나았다는 뜻이 된다.
▶ 1931년 신미년 옛 쓰시마 번주 가문의 당주이자 백작 소 다케유키와 정략 결혼을 하여 1932년 딸 소 마사에를 낳았다. 그러나 이즈음 조울증, 우울장애, 반복성 우울 장애와 더불어 정신장애인 조현병(정신분열증) 증세를 처음 보였으며, 결혼 이후 병세가 악화되었다.
소 다케유키는 아픈 아내 대신 마사에를 데리고 여러 번 조선 황족들의 가족 모임에 참석하기도 했다고 한다. 아마 마사에의 양육도 다케유키가 도맡았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 사실 다케유키 집안 입장에서도 어디 내놓아도 부족하지 않을 아들을 단지 황녀라는 이유로 정신병까지 있는 여성에게 반강제로 장가보낸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덕혜옹주의 이복오빠 영친왕의 부인 이방자 여사의 집안도 애초에 황태자비 자리를 바라고 있었고, 영친왕과는 거의 반강제로 혼인한 것이였다.
※ 민족 감정 때문인지 소 다케유키는 오랫동안 한국에서 애꾸눈에 키가 작은 추남이라니느니, 꼽추라느니, 덕혜옹주를 폭행했다느니 하는 루머에 시달렸다. 아예 부부가 나란히 찍은 결혼 사진에서도, 다케유키는 지워버리고 덕혜옹주의 모습만 남겨 신문지상에 실었을 정도였다.
※ 정미대한은 천량생년록이 좌하며 명궁 무간 천기화기가 대한 천이에 좌하므로 이 대한에 자신의 삶은 불행하고 고달픈 일이 발생하며 그렇게 생각하기 쉬운 대한이다. 생년록이 좌했으니 금전적 환경은 좋을 수 있으나 개인사적인 부분에서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 천량生(년)祿과 태음大(한)祿의 삼합에 거문大(한)忌가 좌하므로 정미대한에 巳·亥宮은 중요한 의미가 있게 된다.
- 형제궁간 사화가 좌하는 궁은 형제(형제, 모친, 친구 등)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化忌 入궁에서 인연이 끊어짐을 의미한다.
- 1929년 기사년의 사화 무곡年祿은 무곡生(년)忌를 沖하므로 忌작용을 강화시키는 작용을 낳게 되는데, 문곡年忌가 노복궁에 入하니 모친의 사망이 정신세계에 악영향을 미쳤음은 당연한 상황이 되었다.
※ 선천 부처궁 병오궁의 궁간 사화 천동록은 부모궁 천기권 문창과는 노복궁에 入하니 이 대한에 만나는 이성인연은 나에게 잘해주는 남자가 되어진다. 대한은 시간개념이다. 그 시간이 지나면 색이 변색되어질 수는 있지만 그 시간 속에서 록권과가 入하면 吉작용이 있게 된다.
- 대한 6년차 1931년 신미년 여름경에 정략결혼을 하게 되었다.
※ 관록궁 화과는 학문의 결실을 얻게 되는데, 관록궁 임간 좌보화과가 미궁에 좌하니 결혼하는 신미년에 학업도 완수하게 되었다.
※ 유년에 일어나는 일들이 보여지는 명반의 모습보다 더 많을 수 있음을 상담해본 상담가라면 경험을 했을 것이다. 그것은 각궁의 사화가 좌한 궁을 보지 않고 가기 때문이다. 궁간 사화가 좌한 궁이 유년에 들어가면 유년의 사화가 그 궁을 인동하지 않더라도 그 사화는 발동하는 것이 된다. 유년 명궁에 좌할 때, 삼합이나 협으로 인동될 때 이러한 작용이 있게 된다.
※ 천량生(년)祿의 도움의 그늘과 좌보生(년)科의 직접적인 도움의 손길로 학업 완수되었음을 알 수 있다. 타인의 도움이 없었다면 해결할 수 없는 옹주의 상태로 보아 천량생록과 좌보생과의 의미가 참 큰 명반이라는 것이 보여진다.
※ 선천화록과 대한화록의 삼방에 들어가는 궁이 이차 발생궁이 된다.
- 정미대한에 이차발생궁은 해궁 태양 녹존이 좌한 궁으로 선천 자전선/대한부관선을 인동시킨다. 결혼과 임신은 당연할 수 있게 된다.
- 巳·亥宮은 중요한 궁이 되는데 거기에 거문大(한)忌가 되니 이차발생궁에 문제가 생긴 꼴이다. 선천 자녀궁에 大(한)忌 入이니 자식인연이 좋지 못하다. 직접 양육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자식과의 인연이 오래 가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제3 병오대한 / 26 임인대운
그러나 마사에를 낳은 후 덕혜옹주의 조현병이 재발했고, 점차 부부 사이도 파탄이 난다.
▶ 덕혜옹주에게 조현병으로 추정되는 심각한 수준의 정신질환이 있었기에, 소 다케유키도 심적으로 고생을 심하게 했다. 그래도 당시 기준으로는 하는데까지 병수발을 하는 등, 아내에게 대단히 헌신적인 모습을 보여주어서 결혼생활이 생각보다 원만했던 편이다. 집에 정신질환을 앓는 가족을 둔 사람으로서 이 정도만 되어도 대단한 수준인 셈이다.
게다가 1945년 일제가 패망함에 따라 들어선 미군정(일본)은 1947년 신적강하를 통해 다이쇼 덴노의 직계 자손들을 제외한 방계 황족들과 화족들을 신적강하를 통해 평민으로 강등시켰고, 소 다케유키와 덕혜옹주 역시 그에 따른 특권을 상실해 생계 유지가 어려워졌다. 넓은 저택에서 다소 좁은 곳으로 집을 옮기고, 하인들도 다 내보내 마지막엔 하인이 딱 1명만 남았었다고 한다.
※ 병오대한 염정자화기와 무곡生忌로 寅·申궁로 대한의 이차결과궁이 되는데 명천선/대한재복선이 되므로 나의 감정선은 나빠지는 쪽으로 가게 된다. 1945년 일제 패망은 대한 10년차에 해당하니 10년간 재물적인 면보다 부부관계에서 본인의 정신세계 문제가 더 큰 문제인 것으로 보여진다.
제4 을사대한 / 36 신축대운
을사대한 1년차 1946 병술년에 정신병원 입원
1946년 덕혜옹주는 남편에 의해 마츠자와(松澤) 도립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1951년 다케유키와 덕혜옹주의 결혼을 주선했던 데이메이 황후가 사망하고, 1955년 덕혜옹주는 이혼을 당한다. 사실 이방자의 회고에 따르면 이 이혼은 다케유키와 영친왕, 이방자 세 사람의 논의 이후 결정된 합의 이혼이었다고 한다. 덕혜옹주가 정신질환자였기 때문에 오빠 부부인 영친왕, 이방자가 후견인으로서 대신 협의해주었다.
그리고 같은 해 다케유키는 가츠무라 요시에(勝村良江)라는 일본 여성과 재혼하였고, 이후 장남 다츠히토(立人), 차녀 와키(和木), 차남 나카마사(中正) 등 2남 1녀를 더 낳았다. 때문에 이 부분에서 "소 다케유키가 너무 성급한 거 아니었냐"고 비판받기도 하는데, 사실상 별거 상태가 10년 가까이 지속된 상태였기 때문에 아예 이해하지 못할 행동도 아니긴 하다. 게다가 쓰시마 종가의 당주로서 다케유키는 대를 이어야 할 책임도 어느 정도는 있었을 것이다. 이미 50줄을 바라보던 나이였으니. 어쨌거나 현재는 일본뿐만이 아닌 한국의 역사학자들도 소 다케유키에 대해서 "본인이 할 수 있는 만큼은 했다"는 평을 내린다.
※ 午未궁과 천량 염정은 육합이다.
- 인신사해궁의 명궁자는 부처와 자식 인연이 약한 경우가 많다. 부처궁과 형제궁이 육합이 되어지니 배우자가 다른 이성을 만날 수 있고, 자식과는 육합이나 서로 역마지지에 앉아서 동거기간이 유한적이다.
- 천량과 염정은 가족 간의 일로 엮이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가족 간의 책임과 의무에 관련된 부분에 대해서는 책임감 있는 행동을 하는 경우가 많다.
- 염정은 품질(品秩), 위계질서의 성이며 천상은 인성으로 약속,신용, 책임감의 성이다.
- 염상조합은 성격상 책임감이 강하고 감정이 풍부하며 처사에 신중하고 조심스럽다.
※ 을사대한 궁간사화
1) 대체로 인신사해궁이 대한의 명궁이 되는 경우 거처지 이동이 있게 되는데, 인신사해궁 명궁자인 경우 더욱 두드러지게 거처 변동이 발생한다. 태음大(한)忌가 질액궁에 入하여 질병적인 이유로 입원하며 사는 세월을 가지게 되었다. 병오대한의 상황을 생각하면 당연한 결과인거 같다. 다른 병과 달리 정신병은 좋아지기 쉽지 않다.
제5 갑진대한 / 46 경자대운
▶ 덕혜옹주의 입원비는 이혼 전까지는 다케유키, 이혼 후에는 영친왕이 냈다. 당시 돈으로 월 1만 엔에 달하는 거액의 병원비를 다달이 지불했다고 한다. 당시 대졸 초임 평균 연봉이 약 6,500엔 정도 했으니, 당시로서도 상당히 큰 금액임을 알 수 있다. 현재 시가로 계산해 보면 약 30만 엔 가량에 해당하는 금액이라고 한다.
그야말로 거금을 대납한 것이었는데, 당시 영친왕은 더이상 왕공족이 아니어서 예전처럼 풍족하지도 않았다. 신적강하나 이승만 정권의 황실 재산 강제 국유화 등으로 대부분의 재산을 몰수당한 시점이었기에, 원래 살았던 이왕가 저택마저 헐값으로 내놓는 지경에 이르렀다. 집세를 핑계로 참의원에서 공건물을 빌렸다고 서류에 쓰고 돈을 줄 정도로 빈털터리나 다름없는 상황이었는데, 그 와중에 거액의 병원비를 내주고 있었던 것이다. 더군다나 이 시대가 가족이라 해도 정신질환자를 어떻게 대했는지를 알면, 영친왕이 동생에게 정말 최선을 다했음을 알 수 있다.
▶ 덕혜옹주의 딸 마사에(정혜)는 어머니와 사이가 소원했다고 전해지는데, 아버지 다케유키가 재혼할 즈음인 1955년에 1살 위의 스즈키 노보루(鈴木昇)라는 일본인과 결혼하여 분가했다. 노보루는 마사에와 마찬가지로 와세다대학 영문과 출신으로, 중학교 교사이자 시인이기도 했다. 결혼한 후, 흔히 하는 것처럼 마사에가 남편의 성씨를 따른 게 아니라, 마사에는 '소'라는 성씨를 유지하고 남편이 마사에의 성씨를 따라 '소 노보루'가 되었다. 이는 장인어른인 소 다케유키의 요구였다고 한다.
그런데 1956년 8월 26일 아침, 갓 결혼한 새댁이었던 마사에는 유서를 남기고 실종되었다. 이때 마사에가 현해탄(대한해협)에 뛰어들었다는 루머도 있으나, 유서에 의하면 마사에는 야마나시현과 나가노현을 경계로 하는 고마가타케 산에 자살하러 간다고 했다. 사실인지는 불명. 분명한 것은, 이후 마사에를 본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사실이다.
▶ 1962년 기자 김을한과 영친왕의 부인 이방자의 협조로 대한민국으로 영구 귀국하여 창덕궁 낙선재 내의 수강재에서 거주하였다. 김을한은 그녀의 귀국을 위해 박정희 당시 대통령 권한대행 겸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에게 결례임에도 불구하고 어렵게 부탁하여 국적을 회복시켜 돌아오게 해주는 등 신경 써주었다고 한다. 이때 박정희는 "고종에게 딸이 있었느냐?"며 깜짝 놀랐다고 한다. 원래도 남자 왕족이 아니라 왕위계승권이 없어서 이복오빠들에 비해 주목을 덜 받았는데, 정신병이 재발한 후로 오랫동안 언론에 등장하지 않은 탓에 세상 사람들에게 많이 잊혀졌기 때문이다.
5.16 쿠데타로 권력을 탈취해 집권한 박정희 정권은 한국이 공화국으로 확실히 기반을 잡아 옛 황족들이 이제 더 이상 정치적 위협이 되지 않을 거라고 판단했기에, 영친왕을 비롯한 생존 황족들 중 아예 일본인으로 귀화한 이건을 제외한 나머지 황족들 모두에게 귀국을 허락했다. 이는 정통성 확보 차원도 있었는데, 국민의 선거가 아닌 무력 쿠데타로 정권을 잡았기에 정통성이 딸리는 군사정권으로서는 과거 대한제국 황족들을 불러들여 대한민국은 대한제국을 계승했다는 것과, 자신들은 그 대한제국을 계승한 대한민국의 합법정부이기에 황족들을 데려올 수 있다는 걸 광고하고 박정희 정권의 정치적 기반을 확고히하려는 목적이었다.
※ 김장한과 약혼한 적이 있었던 덕혜옹주 입장에선 김을한은 시아주버님이 될 뻔한 인물이기도 하다. 참고로 김을한의 아내 민덕임은 어린 시절 덕혜옹주와 함께 덕수궁 준명당 유치원을 다닌 친구이기도 하다.
▶ 덕혜옹주의 유모 변복동은 이때까지 살아있었는데, 덕혜옹주가 탄 비행기가 김포국제공항에 착륙하자 창덕궁에서 순정효황후 윤씨가 보낸 상궁들과 함께 입국장 앞에서 비행기를 향해 큰절을 올리며 연신 "아기씨!"라 불렀으며, 덕혜옹주의 초췌한 모습을 보고 통곡했다.
돌아온 덕혜옹주는 주변 사람들을 거의 알아보지 못했지만, 창덕궁으로 돌아오자 옛 기억이 살아났는지 궁 안을 돌아볼 때 연신 눈물을 흘렸다. 자신을 맞이한 친척들 앞에서 옛 황실 예법을 그대로 따라 황실의 큰어른되는 순정효황후 윤씨에게는 모로 꺾어 큰절을 올리고, 아랫사람되는 이우의 아내 박찬주가 자기한테 절을 할 때는 앉아서 고개만 끄덕이며 인사를 받았다. 그것을 본 사람들은 전부 울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본인이 조선의 궁(宮)으로 돌아왔다는 것을 확실히 인지한 것이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이후 죽을 때까지 간간히 잠깐 동안 정신을 차릴 뿐 끝내 정상인으로 돌아오지는 못했으며, 덕혜옹주의 간병 및 간호는 유모이던 변복동과 올케 이방자의 몫이 되었다. 변복동은 1972년 8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는 순간까지도 옹주만을 걱정했다고 한다.
▶ 고종의 손자인 이석의 증언에 의하면, 덕혜옹주는 복상궁이란 이름의 상궁의 시중을 받으며 살았다고 한다. 이석이 면회를 가서 덕혜옹주에게 절을 하며 "고모님"하고 불렀지만 치매와 정신착란 때문에 아무 반응없이 천장만 쳐다보고 있었다고 한다. 시중을 들던 상궁의 기록에 의하면, 가끔 딸의 이름(마사에)을 부르며 슬픈 표정을 지었다고도 한다.
※ 칠살명궁자의 자녀궁에는 항상 거문이 좌한다.
- 칠살 명궁자는 자녀에 대한 아픔이 있게 된다. 거문의 暗星 작용이 발동하게 되기 때문이다. 또한 申궁 칠살은 자녀궁이 巳宮에 거하므로 서로 떨어져서 지내는 세월이 있게 된다.
※ 갑진대한 태양화기는 전택궁에 入하여 자녀궁을 沖하니 자녀관련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선천 자전선 거문·겁살·화성·태양大忌가 발생하니 거화양격국처럼 자살 격국이 형성되어 버렸다. 태양과 거문은 전서에서 자살한 星이다. 자미두수 책들에서 겁살에 대한 얘기가 많지 않은데, 겁살도 상당한 흉성 작용이 있다. 한다면 해버리는 특성이 있고, 반항 폭행 등과 같은 거친 면이 있게 된다. 대한 자녀궁은 死地로 죽음과 연관지어지는 일들이 발생가능하다.
※ 갑진대한 염정화록 파군화권 무곡화과는 부관선과 재복선에 좌하므로 왕족 신분을 나의 직업과 연관지으면 국가가 관리적인 측면에서 나의 상황을 좋게 봄을 의미한다.
- 전택궁에 대한사화가 入하게 되면 부동산이나 거처지 변화가 있게 된다.
- 1962년은 임인년으로 인궁 천마궁에 좌하여 귀국을 하게 되었는데, 천이궁이 래인궁으로 타궁에 속하니 타인의 영향으로 거처지 변동을 이룰 수 있게 되었다.
제8 계축대한 / 76 정유대운
1985년 전남편 소 다케유키가 일본에서 사망했다. 4년 후인 1989년 4월 21일, 덕혜옹주도 78세를 일기로 창덕궁 수강재에서 뇌졸중으로 사망한다.
※ 계축대한은 金의 墓地이면서 12운성상 死地에 속한다. 명궁 천기화기가 入하는 대한이다.
- 묘궁과 축궁은 같은 天干을 사용하므로 계축대한 계간은 질액궁 계간의 작용도 함께 하게 되므로 탐랑大忌의 작용은 배가 된다고 할 수 있다.
- 대한이 명궁 무간 화기가 좌하여 있으면 그 대한에는 명궁자 자신에게 흉적인 일이 발생하는데 이 명반에서는 死地에 드니 죽음과 관련이 있게 된다.
- 癸干 탐랑화기는 재백궁에 入하여 복덕궁을 沖하니 직접적으로 생사에 관계가 있게 된다.
- 기사년은 무곡年祿이 재복선 쌍忌를 인동시키고, 음력3월은 무진월로 탐랑月祿이 파군大祿과 삼합으로 명천선을 인동시킨다. 命·身宮이 流月에서 인동되었다.
☆ 홍대 혜안의 별자리 자미두수 연구소에서는 기초반과 실전반 수업을 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