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1
요한복음 19:17-27절은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 장면과 3개의 에피소드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한은 다른 복음서와는 달리 예수님의 처형 장면을 간명하게 기록합니다.
요한이 복음서를 기록하던 시기는 예수님 십자가에서 돌아 가신지 이미 60년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예수님의 죽음 자체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건입니다.
사도 요한은 그 와중에서 의미 있는 몇 가지 에피소드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말씀하고 싶은 멧세지는 무엇일까?
로마 군인들이 예수님을 총독의 관저에서 데리고 나갑니다.
예수님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해골 언덕으로 가십니다.
로마 군인들이 해골 언덕에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습니다.
예수님 양 쪽에는 강도들도 함께 못 박힙니다(요한복음 19:17-18절)
해골 언덕에 세워진 세 개의 십자가. 벌거 벗긴 채 십자가에 못 박혀 달려 있는 사람들.
겉으로 보기에는 예수님과 강도들의 모습이 똑 같아 보입니다.
예수님이 강도들 가운데서, 강도들과 같이, 강도처럼 죽어갑니다.
대제사장들의 원하던 그림입니다. 예수님을 제거하고 예수님에게 강도라는 프레임을 씌우기에
성공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요한은 예수님이 ‘자기 십자가를 지고 해골 언덕으로
가셨다’고 표현합니다. 원어 성경을 보면 ‘지셨다 표현 ’바스타조‘도 능동태입니다.
’가셨다‘는 표현 ’엨셀코마이‘도 능동태입니다. 억지로 끌려 가 처형 당하신 것이 아니라
’자기 십자가‘를 지시고 자발적으로 해골 언덕으로 가셨다는 뜻입니다.
성경의 예언을 이루신 것입니다.
...그가 자기 목숨을 죽음으로 내던지고 죄지은 사람들 가운데 하나로 여겨졌으며 많은 사람의
죄를 대신 지고 죄지은 사람들이 용서를 받도록 중재를 했기 때문이다(이사야 53:12)
오늘 날도 세상은 여전히 이런 저런 프레임을 만들어서 세를 불리기도 하고
대중들을 선동하기도 합니다. 명분이야 어떻든 속내는 당시 대제사장들과 같이
누군가를 희생시켜 자기 욕망을 채우려는 탐심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프레임에 갇히면 당시의 유대인들처럼 진리를 보는 눈이 가려집니다.
죄의 공범자가 됩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그런 악함까지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도구로 사용하십니다. 헤아릴 수 없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2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면서 로마 총독 빌라도와 유대인 대제사장 사이에 갈등이 생깁니다.
유대인들의 압력에 굴복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내어줌으로 자존심이 상한 빌라도가
유대인이 미처 생각하지 않았던 방법으로 복수?를 합니다.
예수님이 달린 십자가에 처형 당한 사람의 이름과 죄명을 적어 사람들이 볼 수 있게 합니다.
빌라도가 써서 십자가에 붙인 죄패가 신의 한 수?입니다.
‘나사렛 사람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는 명패입니다.
여기 못 박힌 사람의 이름은 나사렛 사람 예수요, 죄명은 유대인의 왕이라는 것입니다.
유대인의 왕이기 때문에 로마총독의 권한으로 십자가 형으로 죽였다는 말입니다
히브리어, 라틴어, 그리스어로 각각 쓰여 있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그 명패를 읽었습니다.
대제사장들은 그 내용에 전혀 동의할 수가 없습니다.
대제사장들은 예수님이 스스로 왕이라 해서 예수님을 죽이려 하였는데 팻말은 로마 총독이
예수님을 공식적으로 유대인의 왕이라고 인정하는 셈입니다.
대제사장들이 빌라도에게 몰려가 ‘유대인의 왕’이 아니라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고 고쳐 줄
것을 요구합니다. 빌라도가 일언지하에 거절합니다. “나는 내가 쓸 것을 썻다”.
세상적 관점에서 보면 참 아이러니 합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내어준 빌라도의 입을 통해서 우리들에게 ‘예수님이 왕인가?’
‘예수님이 무엇을 하였는가?’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진리가 무엇인가?’ 자문하게 합니다.
빌라도를 통해 예수님이 유대인의 왕이라고 만인들에게 선포합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로마 총독도, 유대인의 대제사장들도 유대인들도 하나님의 권세
아래 있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요한은 이 이야기를 통해 우리들에게 예수님이 만왕의 왕이란
사실을 증거합니다.
#3
로마 병사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나서, 예수님의 옷 가지를 가져다가 네 몫으로
나누어 각 자 한 몫씩 챙깁니다. 당시 로마 제국은 죄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일 때 4명
1개조를 이루어 사형을 집행하게 했습니다.
죄수의 유품은 군인들의 몫으로 인정해 주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이 입은 옷이라야 속옷,
겉옷, 허리 띠, 머리 수건, 신발 정도입니다. 로마 병사들은 예수님이 입었던 겉옷과 허리 띠,
머리 수건, 신발을 하나씩 나눠 갖고 누가 속옷을 가질지 제비뽑기를 합니다. 속옷은 이음새
없이 위에서 아래로 통으로 짠 것이기에 4등분하면 아무 쓸모가 없기 때문입니다.
사도 요한은 왜 이 사건을 기록 했을까? 요한 사도는 로마 병사들의 행동을 보면서
시편 22편 18절의 성경 말씀이 성취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이 내 겉옷을 나눠 가지고 내 속옷을 놓고 제비를 뽑았다’
우연 같이 보이는 작은 일들도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있음을 알게 됩니다.
본문 속의 로마 병사들은 마지막 순간 예수님을 가장 가까이에서 만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을 죄에서 건지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시려고 십자가에 달려 있습니다.
어떤 면에서 그 현장에서 예수님을 뵙는다는 것은 특별한 은총입니다.
그런 은총 가운데 있으면서 그들이 얻은 것은 영원한 생명이 아니라 곧 썩어 없어져 버릴
천 조각입니다. 성령님께서는 이 이야기를 통해 오늘을 사는 우리 마음에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일상에서 예수님을 어떻게 만나고 있습니까? 우리가 구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영원한 생명입니까? 썩어 없어져 버릴 천 조각 같은 것입니까?
로마 병사들이 예수님의 옷을 나눠 가질 수 있는 권리는 그들의 손으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대가입니다. 현실적으로 예수님이 입으셨던 옷, 땀과 피에 절어 있는 그 옷이 그들
생활에 무슨 도움이 되었겠습니까?
별 생각 없이 해 오던 대로, 어쩌면 심심풀이로 한 제비뽑기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인간의 잔인함과 무정함을 봅니다. 사람들은 피를 흘리며 죽어 가고 있는데,
죽음을 슬퍼하는 사람들 앞에서 썩어 없어질 천 조각 하나 갖자고 제비뽑기 하는 로마
병사들의 모습이 우리들에게는 없을까요?
사람답게 사는 데 꼭 필요한 것들도 아니면서 내 손에 넣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다른 사람을 대하는 일은 없는지 돌아봅시다.
#4
병사들이 자기 잇속을 챙기는 동안에, 예수님의 어머니와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는 십자가 아래에 서 있습니다. 4명의 병사들의 모습과 4명의 여인들의 모습이 대비됩니다.
당신은 어떤 사람입니까? 우리 자신을 돌아보라 하심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참혹한 모습은 어머니가 눈 뜨고는 도저히 볼 수 없는 장면입니다.
마리아는 혼절하지도, 로마 병사들의 멱살을 잡고 흔들지도 않습니다.
슬픔을 삼키며 아들의 죽음을 바라봅니다. 십자가 위에서 괴로워하시던 예수님의 시선이
어머니와 마주칩니다. 예수님이 어머니에게 말씀하십니다. “어머님, 보십시오.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너무나 당연한 말 속에 담긴 의미가 무엇일까?
몇 번을 읽어도 잘 이해가 안됩니다. 이재철 목사님이 잘 풀어 설명해 주십니다.
삼풍 백화점이 붕괴되었을 때 18세의 유지환 양이 13일 만에 건강한 모습으로 구조되어
사람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죽은 줄 알았던 딸을 대견스러워 하는 엄마에게 딸이 말했습니다.
“엄마가 가르쳐 줬잖아요.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희망을 잃지 말라고...”
유양의 어머니는 고학력자도, 넉넉한 가정의 주부도 아닙니다.
병석에 누워 있는 남편을 대신해 생계를 도맡은 여인입니다.
유양은 여상을 졸업하고 취직해 가족의 생계를 돕는 소녀입니다.
엄마는 늘 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희망을 잃지 말라’고 희망의 말을 들려 주었고
유양은 그 말을 생각하며 절망과 죽음을 이긴 것입니다. ‘엄마가 가르쳐 줬잖아요’
그 말을 듣는 엄마의 감격이 느껴집니다. 서로 바라보는 어머니와 딸의 시선이 어떨지 상상이
됩니다. 예수님과 마리아의 시선이 마주치면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 ‘어머님, 보십시오.
어머님의 아들입니다’가 그런 맥락입니다.
참혹한 십자가 아래 서 있는 마리아야 말로 예수님이 누구신지,
예수님이 왜 그토록 참혹하게 돌아가셔야 하는지를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입니다.
결혼도 하기 전에 천사의 예언을 들었습니다. ‘성령께서 네게 임하실 것이며 지극히 높으신
분의 능력이 너를 감싸 주실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날 거룩한 아기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릴
것이다“. 성령님이 시므온의 입을 통해 마리아에게 말합니다. “보십시오. 이 아기는 이스라엘
가운데 많은 사람을 넘어지게도 하고 일어서게도 할 것이며 비난 받는 표적이 되기 위해 세우심을
받았습니다. 칼이 당신의 마음을 찌를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많은 사람들의 마음 속 생각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어린 시절부터 이런 사실을 일깨워 주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육하였을
것입니다. 그런 어머님의 덕분으로 어머니의 아들답게 그리스도의 사명을 잘 감당하였다는
감사의 고백이 “어머님, 보십시오, 아들입니다”란 말 속에 녹아 있습니다.
유지환 양의 이야기를 들은 어떤 어머님의 고백입니다.
“무너진 건물더미에서 13일간이나 갇혀 있으면서 엄마의 가르침을 기억하고 힘을 얻었다는
18세 소녀의 말을 들으며, 저는 저와 제 아이들의 관계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았습니다.
제가 아이들의 귀에 못이 박히도록 한 말은 공부 열심히 하여 좋은 대학 가라는 잔소리
뿐이었습니다. 저는 그 동안 아이들에게 정말 필요한 인생의 지혜를 들려 줄 지혜를 갖고
있지 못했습니다“
나는 이제껏 내 아이들에게 어떤 가르침을 주었을까? 아이들이 훗날 역경에 처했을 때,
과연 내가 가르쳐 준 말에 힘을 얻고 일어설 수 있을까?
(요한과 더불어. 8권. 이재철. 331-341면)
#5
예수님이 요한에게 말씀하십니다. “보아라. 네 어머니다” 예수님이 세상을 떠나 가시면
마리아를 친어머니처럼 봉양해 줄 것을 부탁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때부터 요한은 예수님의 어머님을 자기 집에 모셨습니다.
한 두 달 모신 것이 아니라 마리아가 나이 들어 죽을 때까지 평생을 모셨습니다.
우뢰의 아들이라고 불릴 정도로 불 같은 성격을 가진 요한이 어떻게 평생 마리아를 모실 수
있었을까? 겉으로는 마리아를 모시고 있지만 마음 중심에는 늘 예수님을 모시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요한의 심령 속에 예수님의 생명의 말씀이 늘 흐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이 항상 함께 합니다.
그 증거가 요한복음, 요한 1서, 2서, 3서, 요한 계시록입니다.
#6
골고다 언덕 위에 세워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자기 아들을 내어주신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이 녹아 있습니다.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고 십자가의 굴욕을 참으시는
예수님의 고난이 있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기 까지 자신을 낮추시는 예수님의 순종과 겸손을
보여줍니다. 피 한방울, 물 한방울까지 자신의 생명을 다 쏟으시는 예수님의 자기 희생과
헌신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흘리시는 피 속에 죄사함/구속의 은총이 있습니다.
죄로 인해 하나님과 단절된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합니다.
예수님의 보혈이 흐르는 곳에 해골 같이 죽었던 심령이 다시 살아 납니다.
이기심과 욕망의 다툼만 있는 세상에서
골고다의 십자가는 우리에게 생명을 살리는 자기 희생과 자기 헌신의 삶을 살라 하십니다.
예수님을 우리 마음에 모시고 살 때 우리도 요한과 같이 사랑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 안에 계셔서 우리로 열매 맺는 삶을 살게 하겠다 약속해 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