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찰 입구의 석비 - 하마비(下馬碑)
하마비(下馬碑)는 어떤 구역 앞을 지날 때에는 신분의 고하(高下)를 막론하고 누구나 타고 가던 말에서 내리라는 뜻을 새긴 석비(石碑)를 뜻한다. 이는 조선시대부터 종묘와 궐문 앞에 보통 ‘대소인원개하마(大小人員皆下馬)’ 또는 ‘하마비(下馬碑)’라고 새긴 비석을 세워놓은 석비를 말한다.
또 왕장(王將)이나 성현, 또는 명사 ·고관의 출생지나 왕릉 앞에도 확대되어 세워졌는데, 이는 선열(先烈)에 대한 경의의 표시로 타고 가던 말에서 내렸음을 알 수 있다.
하마비는 애초부터 불교의 유물은 아니고, 사찰 앞까지 확대된 것은 조선의 불교 탄압과 깊은 관련이 있다. 숭유억불 정책을 썼던 조선시대의 유생들이 사찰에 들어와 갖은 횡포를 벌이고 불기를 부수고 사찰의 보물을 훔치는 등 훼불사건이 발생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조선시대의 불교 후원자였던 문정황후(文定王后 1501~1565 조선 제11대 중종의 계비(繼妃)이며, 명종의 어머니)는 선교양종의 수사찰(首寺刹)이었던 봉은사와 봉선사에는 유생의 출입을 금하고 주모자들을 투옥하자 유생들의 반발이 심했다.
급기야 봉은사 보우 대사(1515~1565)를 처벌해야 한다는 유생들의 상소에 화가 난 문정황후가 전국의 큰 사찰 입구에 다수의 하마비를 세우도록 명한 것이 사찰 하마비의 연유로 전해진다. 그 후 하마비가 서있는 사찰은 유생들의 폭악(暴惡)에서 어느 정도 피해갈 수 있었다고 한다.
심지어는 하마비가 있는 사찰은 부역 면제와 각종 공출 등 부담을 덜 수 있었고, 하마비의 위력에 매력을 느낀 일반 사찰에서는 하마비를 유치하기에 애를 썼다고 전해진다. 현재 하마비가 남아있는 사찰은 많지 않다. 양산 통도사, 양주 봉선사, 부산 범어사, 대구 파계사, 보은 법주사, 순천 선암사, 송광사 등 손꼽을 정도이다.
요즘 자주 듣는 하마평(下馬評)이라는 말도 이 하마비에서 유래했다. 궁권 밖의 하마비 앞에는 궁으로 들어가는 양반들을 말과 함께 기다리는 말잡이들이 모여 있었는데, 그들이 떠드는 대화 과정에서 정보교류가 활발히 이루어졌다고 해서 ‘하마평’이란 말이 되었다.
[출처] 사찰 입구의 석비 - 하마비(下馬碑)|작성자 일주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