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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1월17일 “예수님을 바라보자” 히12장 1절~3절
신년 여행을 떠나면서 제가 “오래 보아야 예쁘다. 자세히 보아야 사랑스럽다. 음~ 너도 그렇다.”라고 불렀습니다. 눈에 제일 먼저 들어오는 것은 늘 관심을 갖던 것입니다. “뭐 눈에는 뭐 밖에 안 보인다.”는 말이 있지요. 관심에 따라 세상을 봅니다. 당구를 배우는 사람은 누우면 천정이 당구대로 보이고, 사람의 머리가 당구공으로 보일 겁니다. 낚시에 빠진 목사는 교인들이 붕어의 입으로 보일 겁니다. 저는 어디를 가든지 교회가 먼저 눈에 들어옵니다. 교회의 십자가를 바라보면 예수님이 생각나서 기쁘고, 교회에서 있었던 아름다운 기억들이 되살아나서 즐겁게 일합니다. 사람은 말하는 대로 살지 않고, 보여주는 대로 살지요. 그래서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말하지요.
오늘 읽은 12장 앞의 11장에서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인생의 경주를 잘 마친 사람들이 나옵니다. 1절에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라고 말합니다. 11장에서 하나님의 약속에 따라 살아서 하나님께서 크게 쓰신 사람은 열아홉 명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약속을 들었을 때에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세계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약속이 자신에게 이뤄질 것으로 확신하고, 살아왔던 자리를 과감하게 포기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곳을 향해 가면서 갖은 모욕, 조롱, 고생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현재의 고난을 하나님 약속하신 복에 비해 덜 중요하게 여기고, 끝까지 견뎠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복을 자신과 후대에게 이뤄졌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2016년을 아름답게 사는 비결을 가르쳐 주십니다. 2절에서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믿음으로 산 사람은 단순하게 예수님만 바라보고 방황하지 않고, 지금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사랑하면서 즐겁게 행하는 것입니다.
왜, 예수님을 바라봐야 합니까? 내 마음 내키는 대로 살거나 마지못해 살면 안됩니까? 예수님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복을 충분히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필요한 복을 다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님께 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유혹을 뿌리치고,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도록 희생제물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이 나의 왕이 될 때 나도 하나님나라를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선지자가 될 때 살아가는데 필요한 모든 지혜를 가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모든 허물과 죄를 용서받아서 평화를 누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필요한 기쁨이 충분합니다. 예수님 안에서 구원을 받고, 영생을 누립니다. 예수님은 믿음의 근원이자, 믿음의 목표입니다. 예수님 없이는 믿음이 성립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발을 딛고 달려갈 방향을 제시해 주십니다. 예수님은 신앙의 푯대입니다.
“바라본다.”는 말은 마치 사냥꾼이 사냥감을 응시하는 것과 같습니다. 화가가 그 모델을 주시하듯 곁눈질하지 않고 오직 그릴 대상만을 뚜렷이 바라보는 것입니다. 독수리가 조류 가운데 왕과 같은 존재인 이유가 있습니다. 독수리가 하늘 높이 자유롭게 날다가 사냥감을 보면 쏜살 같이 내려와서 낚아챕니다.
예수님을 바라볼 때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거룩한 족속, 왕 같은 제사장, 거룩한 나라와 같은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예배당에 들어서 십자가를 바라볼 때 저절로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이 생각나서 가슴이 설레고 주님께서 나를 향한 기대가 가득하면 아름다운 인생을 삽니다. 아침에 일어났을 때, 공부를 할 때, 일을 할 때, 밥을 먹을 때, 잠을 잘 때 저절로 예수님이 생각나면 마음이 즐겁고, 발걸음이 가볍습니다. 바울이 왜 우리에게 ‘무슨 일을 하든지 주께 하듯 하라.’고 했을까요? 작은 일을 할 때도 예수님께서 나를 통해 무엇을, 어떻게 하기를 원하실까? 생각하면 보잘 것 없는 우리가 존귀한 인생을 살 줄 믿습니다.
존귀한 인생을 살려면 바라보는 대상이 존귀해야 합니다. 만날 게임을 바라보고, 텔레비전만 바라면 게임과 텔레비전의 세상에 빠져서 지옥 같습니다. 자신만 바라보는 사람은 헛된 욕망에 빠진 자신에게 속습니다. 친구와 세상을 바라보면 그들이 나보다 잘난 것 같아서 화납니다. 다른 사람은 경쟁자로 생각하면 내가 다른 사람의 노예가 됩니다. 다른 사람은 내가 은혜 받은 뒤 예수님을 바라보도록 인도할 대상입니다. 눈을 감으면 내 머리 속에 수많은 사람이 혼령처럼 떠오르면 괴로워서 아무 것도 제대로 못합니다. 지금 나를 혼란에 빠뜨리는 문제를 바라보거나 나에게 고통을 주는 다른 사람을 바라보면 낙심되어서 살 의욕이 사라집니다. 하지만 자신이 배신당하고 모욕당하고 조롱당하면서 승리하신 예수님을 바라볼 때 시원하게 문제가 해결됩니다. 닭이 물을 먹은 뒤 소화시키려고 하늘을 쳐다보듯이 우리가 무슨 일을 하기 전에 예수님을 바라볼 때 우리에게 필요한 지혜와 능력이 생깁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복을 누리려면 12장1절 끝에서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라고 합니다. 먼저 예수님이 인내하여서 성취하신 하나님 나라를 삶의 목표를 세우고 인내하면서 달리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오롯이 하나님의 뜻에 목표를 세우고 살다가 배신, 조롱과 모욕, 비방과 모함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과 관계를 깨뜨리는 하찮은 것에 눈을 돌리지 않고 오로지 한길로 십자가를 향해 걸어갔습니다.
인생을 마라톤에 비유합니다.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걷고 뛰지 못했습니다. 기어 다니다가 아장아장 걸음을 걸으면 부모들은 신기해합니다. 그러다 2,3살이 되면 걷지 않고 뛰어다닙니다. 걷다가 넘어지면 다시 일어나 걷습니다. 청소년이 되면 빨리 어른이 되고 싶어서 안달입니다. 아이들의 눈에는 어른들이 책임을 지지 않고 자유만 누리는 줄 알지요. 무책임한 짓을 하고 크게 후회한 뒤에 자신을 자책입니다. 자유는 피(고통)을 먹고 자란다고 하지 않습니까? 실패를 했다고 낙심하여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인생을 포기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존귀하게 살기를 바라십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살다보면 소풍가는 것 같을 때도 있지만 때론 전쟁터와 같을 때도 있습니다.
부부가 결혼할 때는 ‘당신 없이 못산다.’면서 가정을 이뤘습니다. 그런데 그게 얼마 갑니까? 6개월 정도까지는 콩깍지가 눈에 씌어서 깨가 쏟아집니다. 그러나 콩깍지는 1년이 지나지 않아서 벗겨지면 그때부터 상대방의 허물만 보이면서 세상에서 제일 꼴 보기 싫은 사람이 됩니다. 그렇게 전쟁 같은 나날을 보내다가 성숙한 관계가 되면 내가 있는 이유는 상대방의 부족한 점을 채워주는 것을 알고, 온 몸을 바칩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던 것과 같습니다. 둘은 서로를 바라보면서 “당신은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즐거워했습니다. 우리가 회복해야 할 관계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하나님 나라를 향해 살 때도 똑같습니다. 처음에는 많은 사람의 지지와 사랑으로 교회 오는 것이 즐겁습니다. 그런데 1이 지나면 사람들이 무심한 것 같고, 자신이 원하는 것이 채워지지 않으면 ‘믿어도 별 수 없구나!’ 하는 유혹이 생깁니다. 저도 목사가 되기 전에는 목사만 되면 내가 확 바뀌고, 세상이 나로 인해 혁명적으로 바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내가 예수님을 더 바라보지 않으면 내 하나도 주체하기 힘듭니다. 그러면 부모님 말 잘 듣고 회사에나 다니지? 하는 자괴감에 빠질 때가 있지요. 하지만 나중에 예수님을 뚫어지게 바라본 뒤에 그 생각을 하면 부끄럽기 짝이 없지요.
2주 전에 제가 어떤 권사님과 점심을 먹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권사님의 가족들은 제가 13년 전에 올 때와 모든 사람들과 모습이 너무나 좋게 변했어요?” 그러자 권사님은 “다 하나님의 은혜이죠.” 당시 권사님의 가족들은 예수님을 잘 믿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권사님의 속을 썩였습니다. 그러나 권사님을 가족들을 보면서 절망될 때 하나님의 절대적인 도움을 바라며 은혜의 자리에서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랬더니 세월이 지나 가족 모두가 하나님을 믿고 사람들에게 인정받습니다. 예수님만 바라보고 인내할 때 자신도 모르게 나와 주변이 변합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아름다운 삶을 살려면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하라고 합니다. 새해가 되어도 이전과 똑같은 삶을 산다면 예전의 삶의 자세로 살기 때문입니다. 마라톤 선수는 간편한 복장을 합니다. 속 옷차림의 운동복과 가벼운 운동화를 신습니다. 달리다보면 덥고 불편해서 더 간편하게 하고 싶습니다. 주님께 희망을 두면 배고프고, 욕을 먹어도 무시하고, 예수님만 바라보고 달립니다. 희망이 없는 사람은 아무리 맛있는 음식을 주고, 편안하게 해주어도 더 좋은 것을 주지 않는다고 불평합니다.
제가 신학대학원을 다닐 때 차를 네 번 갈아타면서 2시간, 왕복 4시간을 다녀도 피곤한 줄 몰랐습니다. 늘 입던 옷을 입고, 학교에서 늘 비슷한 반찬 3가지를 먹어도 즐거웠습니다. 나이가 들면 쉽게 분노하고 절망하는 것은 좋은 기억을 만들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몸은 노인인데 입만 열었다하면 어릴 적의 추억만 녹음기처럼 되새깁니다. 삶에 지치고, 앞이 보이지 않을 때는 아무리 맛있는 반찬을 먹어도 맛이 없고, 아무 비싼 옷을 입어도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으면 곳곳에서 나를 유혹합니다. 누가 유혹하지 않아도 내가 먼저 유혹에 넘어집니다. 별별 핑계를 대면서 선한 일을 하지 않으려고 궁리합니다.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희망입니다. 하나님보다 하찮은 것을 붙잡으면 두려워서 불평, 핑계, 교만, 수군거립니다. 하나님보다 하찮은 쓰레기는 빨리 치워야 합니다. 빨리 치우지 않으면 냄새가 나고 벌레가 생깁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으면 염려, 근심, 걱정이 우리의 마음을 갈라놓고, 건강을 갉아먹습니다. 날마다 예수님을 바라볼 때 하찮은 것을 과감하게 던져버리고, 하나님 나라를 향해 힘차게 달려갈 수 있습니다.
해바라기가 해를 바라보기 때문에 해바라기라고 부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은혜를 넉넉히 받을 때 사람들은 우리를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릅니다.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고 불순종의 삶을 살면 마음에 구름이 잔뜩 끼어서 하나님의 은혜를 가로막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새해를 신나게 살라.’고 권면합니다.
존귀한 인생을 살려면 우리에게 많은 응원꾼들이 있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본문 1절에서 이미 하나님의 약속에 따라 살아서 승리한 믿음의 선배들이 관중석에서 우리를 응원합니다. 예수님은 오늘도 우리를 위해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기도로 응원하십니다. 성령님은 우리가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말 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 친히 간구하십니다. 저는 여러분을 응원하여서 매일 기도문, 새벽기도회의 묵상 글, 사진을 보냅니다. 다른 사람을 내 좁은 생각으로 판단하여서 내가 의롭다는 것을 자랑하는 일은 나도 구원받지 못하고 다른 사람도 구원받지 못하도록 합니다.
저는 2016년에는 “어떤 사람도 하나님께로 인도하여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도록 하자.”고 하나님께 다짐했습니다. 어떤 사람도 하나님의 은혜를 받도록 하는데 포기하지 않을 겁니다. 여러분도 기도와 말씀을 통해 예수님을 오랫동안 자세히 바라보면 하나님의 위로를 크게 받으면 삶에 지치고, 두려움에 절망하고, 잘못 선택하여서 후회하고 낙심하는 사람을 응원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이제 불평과 비난을 쓰레기통에 던져버리고, 사랑하는 가족, 친구, 이웃에게 기도로 응원하고, “예수님을 바라보고 힘냅시다.”라고 따뜻한 말로 응원합시다.
“No Cross, No Crown!” 십자가의 인내 없이는 영광의 면류관이 없습니다. 매일 걱정, 근심, 질병, 자녀, 금전의 문제들이 우리를 무기력하게 만들어서 주저앉도록 유혹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포기하기 전에 스스로 포기하지 맙시다. 살다보면 비바람이 치고, 눈보라가 내릴 때에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라” 주님의 말씀을 붙들고, 벌떡 일어나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부유한 복을 누립시다.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신 예수님께 우리의 눈을 맞춘다면,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약속하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영광스런 모습을 회복하여 주실 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