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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우표 없는 편지 원문보기 글쓴이: 청풍명월
☪ 『몽골제국과 세계사의 탄생』
제1장, 실크로드와 유목제국
경남 마산에서 만들고 꽤 알려진 ‘몽고간장’이란 게 있다. 몽골인이 세운 원元나라가 일본을 침략하려고 지금의 마산, 합포(合浦)에 주둔하며 시작된 것이 그 유래다. 그리고 조금 전 동료들과 한잔한 소주는 몽골이 원산이다. 그 몽골이 세계를 제패할 때, 고려는 원나라에 합병되어 90년 동안이나 집어삼키었다는 것은 억울하지만 현실이다.
예전에는 ‘몽고(蒙古)’라고 했지만 지금은 ‘몽골’이라고 하는 것은 한자음을 그대로 부르다 보니 그런 것일 것이다. 계단(契丹)이라 쓰고 ‘거란’이라 읽는 것처럼 말이다.
몽골인의 뿌리는 유목민이다. 유목민과 농경민은 인류 역사를 움직여 온 두 개의 수레바퀴로 어느 하나를 빼고는 총체적이고 균형 잡힌 세계사를 이해하기 어렵다. 동아시아뿐만 아니라 중앙아시아, 서아시아 그리고 러시아를 위시한 유럽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최초로 유럽과 아시아 대륙 거의 모두를 통합한 몽골제국이야말로 세계사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할 뿐만 아니라, 세계사를 읽는 ‘열쇠’가 아닐 수 없다. 저자는 말한다. “유라시아 대륙 거의 대부분을 통합한 몽골제국은 그 이전의 결정적인 고립성을 극복하고 유기적으로 통합된 하나의 세계로 나아가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고 이것은 몽골제국의 시대에 이루어졌다”라고.
저자 김호동 선생은 서울대 동양사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하바드대학교에서 ‘내륙아시아 및 알타이학’연구로 박사학위를 받고, 현재는 서울대 교수로 재직 중이다. 유라시아, 중앙아시아, 동아시아 관련 여러 저술을 남긴 학자로 책은 몽골과 실크로드의 관련성, 몽골이 세계 제패를 통한 세계사를 새롭게 조망하는 내용으로 되어있다. ‘실크로드와 유목제국, 세계를 제패한 몽골제국, 팍스 몽골리아, 세계사의 탄생’등 제목을 보면 그런 것 같다는 말이다.
지금까지 알고 있던 세계사는 유럽사 아니면 중국사 아니었나라고 생각되기도 하는, 편견을 바꾸기 위해서 저자의 이야기를 좀 더 들어보자. “세계사의 전개 과정을 체계적으로 설명하기 위한 모델들은 아주 많다. 이 책에서는 문명의 형성·발전·확산이라는 문제와 관련해 크게 두 가지 모델을 추출해서 논의를 진행하고자 한다. 그중 하나는 전파론(傳播論, Diffusionism)이라고 불리는 것인데, 정치·경제·문화적으로 먼저 고도의 수준에 도달한 하나의 지역이 주변의 다른 지역에 영향을 미치면서 역사를 변화시켜 나간다고 보는 관점으로, 이 같은 주장은 원래 20세기 전반 인류학 분야에서 처음 제기된 것이지만 기술·이념·언어 등을 설명하는 강력한 이론으로서 지금도 그 영향력을 잃지 않고 있다.
이와 상반되는 또 하나의 모델은 진화론(進化論, Evolutionism)이라 부를 수 있는 것으로, 각각의 사회와 문화가 독자적인 요인들에 의해서 형성·발전해 나간다고 보는 입장으로 다윈 이론과도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이 학설은 그러한 진화의 모델을 사회에 적용시킨 ‘사회적 진화론’과 사회와 문명이라는 단위가 시간을 종축으로 하여 일정한 단계들을 거쳐 발전해 간다고 하는 ‘사회발전 단계론’등으로 분화되기도 한다. 그러나 세계사의 실제적인 전개 과정을 살펴볼 때 이 두 가지 모델 가운데 어느 하나만으로 설명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며, 이 두 가지 가운데 어느 것이 더 중요하냐, 아니냐를 가늠하는 것 역시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런 점을 고려할 때 인류의 역사는 위에서 지적한 두 가지 유형의 합성형에 가까운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책에서 자주 많이 언급되고 있는 단어가 ‘실크로드’인데 이것을 처음 고안하고 정착시킨 인물은 독일의 지리학자 ‘리히트 호펜’이다. 그는 1877년 『중국(China)』이라는 대작을 출간하면서 중앙아시아를 경유해 인도 혹은 서방으로 연결하는 교역로를 ‘실크로드’라고 했다. 하나의 길이 아닌 여러 갈래의 길을 말하는 것으로 이 길을 통해서 비단이 중요 교역품이기도 하였지만, 말이 갖는 낭만적 느낌에 힘입어 널리 퍼졌고, 비단길·견가도(絹街道)·사주지로(絲綢之路)등 다양한 이름으로 번역되어 사용되었다.
지금의 실크로드는 크게 세 가지 루터로 되어있는데, 유라시아 대륙을 관통하는 ‘초원 루트’, 사막지대의 오아시스 도시를 경유하는 ‘사막 루트’, 남지나 해와 인도양을 통과하는 ‘해양 루트’가 그것이다. 이는 아프로-유라시아의 여러 문명과 지역을 연결하는 다양한 루트를 포함하는 것으로 ‘실크로드’라는 이름으로 포괄적으로 존재한다. 실크로드는 아직까지 진행 중이며, 그 서쪽 끝이 시리아가 아니라 로마라는 주장, 동쪽 끝은 우리나라 경주와 일본의 나라(奈良)라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유목민들은 농경민들보다 거칠고 야만적이었을까?
이러한 질문과 편견은 유목민이 인류 역사에 출현한 것만큼이나 오래되었다. 유목민은 사마천의 기록처럼 ‘수축목이전이(隨畜牧而轉移), 축수초천사(逐水草遷徙)’로서 ‘가축을 기르며 이동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다. 기원전 7세기 러시아 남부 초원지대에 ‘스키타이’라고 하는 최초 유목국가가 세워진 뒤에 기원전 3세기경에는 흉노가 출현해 중국 최초의 통일국가인 진한제국과 대립하기 시작했으며, 이후 18세기 중반 유목민들이 세운 국가가 망할 때까지 2천 년 넘게 존속되었다.
중국의 역사는 만리장성을 사이에 두고 유목민과 농경민이 벌인 대결의 과정으로 보기도 하는데, 중국뿐 아니라 이란의 역사도 동북방의 투란인(유목민)과 남방의 이란인(농경민)의 대결이었고, 러시아의 역사도 북쪽의 삼림민(슬라브)과 남쪽의 유목민의 대결로 이루어졌다. 유목민과 농경민의 접촉과 대결은 세계사를 관통하는 보편적이고 중요한 테마다. 초원지대는 마치 벨트와 같이 유라시아 대륙의 동서로 길게 펼쳐져 있고 계절에 따라 이동한 유목민들이 그곳에 살았다. 그들은 서로 다른 종족일지라도 생활양식과 풍습 등에서 많은 유사점을 가졌었다.
몽골리아 주변 초원에는 흉노, 돌궐, 위구르, 몽골같이 강력하고 통일된 유목민제국이 건설되기도 하였지만, 중앙아시아에서는 그렇지 못했는데 그것은 아마도 주변의 농경국가와의 관계 때문이었을 것이다. 초원지대와 정주지대가 만나는 변경지대에는 유목민과 유목국가의 역사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볼 수 있는 대목이다.
흔히 중국의 만리장성을 농경과 유목의 경계로 보기도 하지만, 이것은 정치적인 목적을 위해 만들어진 인위적인 구조물에 불과한 것으로 오히려 중국인들이 변경지대에 사는 유목민들을 몰아내고 영토 팽창을 위해 세운 것이라는 견해도 만만찮다. 경계선이라기보다 변경지대라고 부르는 것이 현실적이라는 의미다. 만리장성은 중원 제국이 경계선을 인위적으로 확정지으려고 한 결과물일 뿐, 실제 강력한 억제력을 발휘한 것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영토만큼 광활하고 광대한 중국의 역사는 지금 우리가 인식하는 것과는 많이 다르다. 영토만 해도 진한시대는 지금의 반에 불과했으며, 한나라가 붕괴된 3세기 초부터 수당제국에 의해 다시 통일된 6세기 후반까지 350년 이상은 대혼란기였다. 혼란의 원인이 다름 아닌 북방 유목민의 대대적인 남하와 이주였다는 것이다. 그들은 마침내 화북지방을 정복하고 그곳에 농·목 복합적 성격의 호한융합(胡漢融合) 정권을 세우자, 한인들은 남쪽으로 쫓겨가 양쯔강을 중심으로 독자 왕조를 건설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소위 ‘오호십육국과 남북조시대’가 열리게 된 것이다.
혼란을 종식시키고 수당제국을 건설한 장본인이 바로 ‘한화된 호인’이었으니 학계는 그들을 관롱집단(關瀧集團)이라고 부른다. 당의 시조로 여겨지는 이초고발, 이매득 부자는 한인의 성과 선비족 이름을 갖고 있는 것인데, 당초 한인인데 선비식 이름을 사여받았거나, 그 반대인 것으로 보고 있다. 어느 쪽이든 그들에게는 유목민의 습속이 베여있다. 이매득의 손자 이호와 그의 아들 이병은 선비족 부인을 맞이했고 그 아들이 바로 당태조 이연(李淵)이다. 이연의 부인도 선비족으로 아들인 태종 이세민도 선비족 황후 사이에서 고종을 낳았다. 황실이 선비족 출신이라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다행히 당나라 군주는 농경 지역에서 생산된 물자를 유목민에게 공급해 안정을 유지했지만, 유목민 군주는 좋든 싫든 농경지역 국가와 상대해서 그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중국으로부터 물자를 획득할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 약탈과 교역뿐이었다. 교역이 평화적이고 안전한 방법이지만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상대의 동의가 없이는 교역이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중국은 황제의 정치적 권위를 인정하고 조공을 바치는 경우에만 교역을 허가했다. 여러 상황이 여의치 않자 유목민들은 불가피하게 무력에 호소할 수밖에 없게 되었고, 그것이 바로 약탈이었다.
약탈은 보복 공격을 당할 수도 있는 데다 설사 약탈에 성공한다 해도 변경이 초토화되면 점점 더 깊이 들어가야 하므로 위험부담이 더 커진다. 그래서 실크로드에 대한 유목국가의 관심과 목표는 중국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었다. 중국이 북방의 유목 세력을 견제하고 황제의 지배와 권위를 과시하기 위한 군사적·정치적 이유에서 실크로드로 진출한 것과 달리 유목국가들은 자신들이 필요로 하는 농경 지역의 물자를 확보하고 원거리 교역에서 발생하는 이익의 일부를 차지하기 위해 실크로드를 장악하려고 했다. 유목국가와 국제상인, 이 둘은 공생적인 관계를 맺으면서 사실상 실크로드를 장악하고 있었다. 돌궐, 위구르 제국과 소그드 상인들의 협력관계는 그것을 보여주는 좋은 예다.
중국 시안(西安)에서 6세기 말 북주와 수나라 시대 소그드인의 무덤이 여럿 발굴되었는데, 소그드인 상당수가 실크로드를 통해 중국에 들어와 중국 성을 가지고 살았다는 것이다. 이들의 성 ‘칸’이라는 음을 따서 강(康)씨로, 타쉬켄트의 ‘타쉬’가 돌을 뜻하므로 석(石)씨로 칭했던 것이다. 당현종 때 반란을 일으킨 안록산(安祿山)도 안씨 성을 가진 소그드인이었다. 그의 모친은 돌궐의 무녀였는데 소그드인 아버지가 죽자 안씨 성을 가진 소그드인에게 입양된 것이었다. 록산이라는 이름 역시 당시 소그드인이 믿던 조로아스트교의 영향이었고, 안록산의 뒤를 이어서 반란을 지휘했던 사사명(史思明) 역시 소그드인이었다.
소그드인은 중앙아시아에서 중국에 이르는 지역뿐 아니라, 중앙아시아 서북으로 비잔틴 제국, 서남의 사산조 페르시아 제국과 인도에 이르는 광범위한 무대로 교역 활동을 벌였는데, 이들의 교역 활동은 중국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으며, 풍부한 문헌에 힘입은 바 있지만, 당시 중국을 통치하던 왕조의 개방적 태도와도 무관하지 않다. 소그드인이 본격적으로 활동하던 3∼4세기부터 선비족 출신이 북중국에 건설한 북조 정권, 그리고 뒤이은 선비혼혈 집단이 건설한 수당왕조는 당제국의 개방성과 국제성에서 한인들이 건설했던 한·송·명과는 크게 달랐다.
지금의 이란인이 중심이던 소그드인은 투르크 유목민들에게 교역에서 발생하는 이익만 가져다준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보다 발달한 정주지대의 문화를 전달하는 ‘문명의 교사’역할도 했다. 돌궐인들은 7세기 말 유목민 가운데 최초로 독자적인 문자를 만들었고, 오늘날 몽골리아 초원 오르콘 강변에는 문자가 새겨진 비석들이 남아 있는데 투르크 문자 혹은 오르콘 문자로 알려진 이 문자는 원래 소그드 문자를 변형하여 만든 것으로써 그 제작과정에 소그드인들의 역할이 컸음을 추정할 수 있다. 소그드인들의 역할은 문화뿐 아니라 정치·군사까지 실크로드 지역에 그 영향이 매우 컸다고 할 수 있는 부분이다.
제2장, 세계를 제패한 몽골제국
이제 몽골제국이 어떻게 세계를 제패했는가를 살펴보자.
1220과 1221년 사이에 칭기스 칸이 이끈 몽골군이 서아시아를 광풍처럼 휩쓸고 지나갔다. 이를 직접 목격하고, 체험한 아랍의 역사가 ‘이븐 알 아티르’는 훗날 당시를 회상하며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여러 해 동안 나는 이 사건에 대해서 언급하기를 꺼려했다. 왜냐하면 그것은 너무 끔찍한 일이었기 때문에 그것을 기록으로 남기는 것으로부터 몸을 움츠렸고 자꾸 한 발자국씩 뒤로 물러났다. (…) 그러나 마침내 나는 그것을 기록하지 않는 것이 어느 누구에게도 유익하지 않으리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 내가 말하건데 이 사건은 모든 인류에게 덮쳤던 가장 거대한 재난이자 가장 무시무시한 재앙이었다. (…) 적그리스도라 할지라도 자기를 반대하는 사람은 파괴시켜도 추종자들의 목숨은 살려두겠지만, 이 타타르인들은 아무도 남겨두지 않았다. 남자와 여자와 어린아이를 학살하고, 임신한 여자의 배를 갈라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를 죽였다. (…) 이 재앙이 일으킨 불꽃은 멀리 또 넓게 날아가서 그것이 입힌 상처는 사방을 덮었다. 그것은 마치 바람에 휘몰리는 구름처럼 대지를 지나갔다.”
당시 무슬림의 눈에는 철천지원수처럼 여기던 적그리스도보다 몽골인이 더 잔혹하고 무서운 사람으로 보였다. 그전에 중국에서도 살육을 밥 먹듯 했는데 1213∼1214년 겨울에 중국의 90여개 군을 파괴하고 하북, 하동의 수많은 사람을 살해하고 금과 비단 소와 양, 말을 끌고 갔다고 중국측이 기록하고 있다. 견디다 못한 금나라는 1214년 수도를 개봉(開封)으로 옮겼고 1234년까지 20년 동안 계속된 전쟁으로 폐허가 되었다. 금의 기록에 의하면 1207년 하남에 768만 호가 살았으나, 금이 멸망한 뒤에는 100만 호에 불과했다고 한다. 몽골인에 대해 막연히 ‘야만적’이라는 이미지는 아마도 이런 살육 때문일 것이다.
칭기스 칸이 몽골리아를 통일하고 제국의 기틀을 세운 것은 1206년으로 그전에는 몽골도 혼란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몽골이 처음 등장한 것은 《구당서》로 아무르강 상류에 거주하는 타타르(중국 문헌은 달단韃靼)로 8세기 중반까지도 몽골리아 초원의 패권은 위구르가 차지하고 있었으나, 투르크족과 몽골족 사이의 대치 상황이 9세기 중반 키르기즈인들의 공격을 받은 위구르 제국이 붕괴되면서 몽골인들의 이주가 시작되어 10세기 후반에는 몽골리아 중앙을 몽골인들이 차지했고, 몽골인은 추운 지방이던 아무르강 북쪽에서 중앙지역으로 이주하게 되었다.
위구르의 붕괴로 유목국가가 부재한데다 몽골리아 초원은 정치·경제적으로 피폐해져 그야말로 약육강식의 시대가 되었다. 몽골리아 초원에는 여러 유목민 혹은 반유목 씨족·부족들 사이에 결렬한 전쟁이 벌어졌고, 기존의 친족 조직은 급격히 분화를 일으키고 있었다. 정복되거나 붕괴된 씨족은 다른 씨족에 편입되는 등 분화되기 일쑤였고, 평등했던 사회는 영주, 평민, 노예라는 계급이 생겨났다. 이때 용맹한 많은 전사들을 거느린 지도자 간 싸움에서 최종 승리한 자가 칭기스 칸이었다. 그는 1206년 몽골제국을 건설하면서 천호제(千戶制)라는 것을 시행했고, 혈연과는 무관하게 다양한 유목민들로 구성된 조직의 우두머리였다.
칭기스 칸이 태어나기 전에 그의 증조할아버지 ‘카불’이 ‘칸’으로 추대되기도 했으나, 초원의 정치 혼란은 그를 그대로 두지 않았고, 증조할아버지가 죽고 후계자 ‘암바가이’는 타타르인에게 붙잡혀 금나라로 인도되어 처형되기도 했는데, 이때부터 몽골과 금나라는 피를 부르는 혈수(血讐)가 되었다. 칭기스 칸은 1167년 태어났고(1227년 원정 도중 사망) 그가 열 살이 되던 해 아버지 ‘이수게이’가 정적에 의해 독살되었는데, 이로써 칭기스 칸은 ‘그림자 말고는 동무도 없고, 꼬리 말고 채찍도 없는’그야말로 외톨이가 되었다. 그런데 그가 어떻게 유목민 전체 군주가 될 수 있었을까?
여러 가지 의견이 있으나 탁월한 리드십, 인간적인 친화력, 충성심과 복종·희생을 불러올 수 있었다고 보기도 하지만, 적에게는 가차 없이 잔인한 복수를 서슴치 않았던 그였다. 포용력과 단호함은 성공한 지도자에게서 흔히 찾을 수 있는 공통된 리드십이기 때문에 성공비결로 보기 어려울지 모른다. 아무튼 그는 자리 잡히지 않은, 국가가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친족조차 믿을 수 없는 상황에서 아버지마저 독살당하자 동족들은 그의 일가를 야멸차게 내던지고 떠나갔으며, 성장하는 과정에 기습적으로 공격을 당해 포로로 잡히기까지 했다. 물론 탈출에 성공하지만.
칭기스 칸의 입장에서는 친족은 믿을 수 없었고, 이족(異族)의 도움이 절실했다. 그는 지도자가 되기까지 이족과 동맹을 맺을 수밖에 없었다. 혼인동맹이 그것으로 ‘쿠다’라는 혼인 관계를 몽골어로 ‘사둔’이라 하는데 우리말 ‘사돈’과도 통한다. 칭기스 칸은 ‘콩기라트’출신의 ‘부르테’와 혼인을 맺었고, 콩기라트는 중국과 인접해 있었기 때문에 중국의 각종 물자를 수입해 경제적 풍요는 물론 전쟁물자인 철을 얻을 수 있었다. 칭기스 칸이 역경에서 벗어나 초원의 영웅으로 명성을 얻기까지 콩기라트의 도움, 아버지의 의형제였던 ‘웅 칸’의 지원, 자신의 의형제 ‘자무카’의 도움은 필수적이었다.
자신이 속한 씨족과 부족의 도움없이 아무 혈연관계는 없지만, 자신을 위해 헌신하고 충성하는 사람들로 조직을 만들고 그들의 강고한 결속력을 통해 몽골리아의 여러 유목집단을 하나씩 격파하거나 복속시켜 마침내 1206년 칸에 즉위했다. 이런 과정은 거란(요)제국을 건설한 야율아보기와도 흡사하다. 야율아보기는 즉위하자 형제들의 반란이 시작됐고, 그것을 진압한 뒤 2차 즉위를 통해 군주가 되었는데, 그도 자신이 속한 씨족과 부족의 군사력이 배경이 된 것은 아니었다. 일반적으로 유목국가 형성과 구조를 ‘부족연맹체’혹은 ‘부족연합국가’라고 하지만, 이것은 역사적 현실과는 부합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1206년 몽골인들은 오난 강 발원지 부근에서 9개의 흰 깃발을 세우고 칭기스 칸을 군주로 추대했다. 칸에 즉위한 뒤에 가장 먼저 한 일은 함께하던 부하들에게 1천 호씩 나누어 주는 상을 내렸다. 모두 95개 조직으로 그것을 지휘할 88명의 ‘천호장’을 임명한 것이었다. 천호는 다시 백호, 백호는 다시 십호로 나누어 백호장과 십호장을 임명했다. 95개의 천호는 크게 3개의 만호로 묶여 좌익·우익·중군으로 편성하였으며, 이 조직은 몽골군의 근간이 되는 사회·군사 조직으로서 장차 정복전을 수행하는데 핵심을 담당한 역할을 하게 된다.
95개 천호장 조직은 오늘날 군대와 비교하면, 대략 대대(약450명)보다 크고 연대(약2천명)보다는 약간 작은 규모로 9만5천 명이란 병력은 대략 6∼10개 사단에 해당한다. 당시 기준으로는 상당한 규모에 막강한 파워가 아닐 수 없다. 칭기스 칸은 천호 조직 이외에도 자신의 신변 보호를 위한 특수 친위부대를 조직했는데 친위대는 천호장, 백호장, 십호장 자제들로 충당되었다. 이들은 인질 성격이 강했으나 대략 1만 명에 달하였다. 친위대는 숙위(宿衛)와 주간 행차 시 호위(護衛), 전장에서의 전통사(箭筒士) 임무를 맡았는데, 이로써 준비를 마친 칭기스 칸은 이제 세계를 정복하기 위해 출전했을까?
그는 농경민과의 전쟁을 벌이기 전에 먼저 몽골초원을 공략했다. 처음에는 북방 삼림지역의 키르기즈, 오이라이트의 수렵 유목민을 복속시켰고 중앙아시아 위구르인과 카를룩인을 1209년과 1211년 자발적으로 복속하게 했으며, 탕구트(서하)는 복속에 냉담했기 때문에 1210년 원정을 감행했다. 탕구트는 수도가 포위되자 조공을 약속하므로 물러났다. 북중국의 강력한 금나라 정벌도 다르지 않았는데, 몽골이 재화를 얻을 수 있는 곳은 중국밖에 없었다. 그러나 금나라 정벌 명분은 조상들의 원한을 갚은 것이었다.
북방 여진족이 그 뿌리인 금나라는 쉽게 굴복하지 않았다. 화북지역을 초토화시켰음에도 정작 수도 중도(中都-현재 북경)는 오랫동안 함락시키지 못했다. 기마전에 능했지만, 성채를 공격하는 데는 무력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1214년 양측은 화약을 맺었고, 여자와 황금, 비단을 공물에 바치겠다는 약속을 받고 회군했다. 하지만 금은 화평조약을 깨고 수도를 황하 이남, 지금의 개봉으로 옮겨 전쟁을 계속했다. 1215년 전쟁은 재개되었고 황하 이북은 순식간에 폐허가 되었다. 그런데 1218년 중앙아시아로 보낸 사신단이 오트라스에서 몰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중앙아시아와 서아시아를 지배하던 강국 ‘호레즘’의 짓이었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서방원정이 시작된 것이다.
1219년 시작된 원정은 1225년까지 6년간 계속되었는데 이슬람권의 신흥강국인 호레즘은 멸망했고, 번영을 구가하던 도시들은 잿더미로 변했다. 칭기스 칸은 이들 지역을 지배할 의사가 없이 그대로 철수했다. 그러나 아들, 손자 대에 와서는 달라졌다. 세계 지배의 야욕이 생긴 것이다. 셋째 아들 ‘우구데이’가 왕이 되어 ‘카안’이란 칭호를 썼는데 이는 황제와 마찬가지로 칸들을 지배할 뿐 아니라 지상에서 유일무이한 최고 군주라는 뜻이었다. 그것은 유목국가로서의 성격에서 벗어나 정주민들이 거주하는 농경지대까지 정복하고 지배하는 세계제국이 되고자 한 것이었다. 몽골의 지배지역은 속민과 반민(叛民)으로 구분되고 반민은 정복전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칭기스 칸 사후의 전쟁은 단순한 응징이나 약탈이 아닌 정복을 통해 세계제국을 건설한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제3장, 팍스 몽골리아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이 미친 영향력과 평화를 의미하는 팍스 아메리카나, 로마 제국의 팍스 로마나, 스페인 제국의 팍스 히스파니카, 해가 지지 않는 영국을 의미하는 팍스 브리타니카에 빗대오 팍스 몽골리아라고 한 것 같다. 몽골제국은 결코 짧은 기간에 이룬 것은 아니었다. 1206년 시작해 1276년 남송을 무너뜨릴 때까지 70년이 걸린 셈이다.
몽골의 4대 황제 ‘쿠빌라이 칸’은 칭기스 칸의 손자로 대칸이 직접 농경지대를 지배하고 수도를 중도(북경)로 옮긴 뒤부터는 많은 기록들이 남아 있다. 대칸을 만나기도 한 마르크 폴로는
“각 지방으로 가는 주요 도로들 연변에 25마일이나 30마일마다 역참이 설치되어 있다. 이 역참에서 전령들은 명령을 기다리며 대기 중인 300∼400마리의 말들을 볼 수 있다. (…) 이러한 방식으로 대군주의 전령들은 온 사방으로 파견되며, 그들은 하루거리마다 숙소와 말들을 찾을 수 있다. 이것은 정말로 지상의 어떤 사람, 어떤 국왕, 어떤 황제도 느낄 수 없는 최대의 자부심과 최상의 웅장함이라고 할 수 있다. 그가 이들 역참에 특별히 자신의 전령들을 쓸 수 있도록 20만 마리 이상의 말들을 배치시켜 놓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이다. 또한 내가 말했듯이 멋진 가구들이 갖추어진 숙사들도 1만 개소 이상에 이른다.”
중국은 전한시대부터 ‘짠(站)’이라고 하는 역참제도가 있었고, 고려도 그랬지만 몽골의 역참제도는 중국 땅에만 1천 4백여 개소에 말 5만 필, 노새 6천 700필, 수레 4천량, 배 6천 척이 준비되어 있었다. 역참을 관리하는 참호(站戶)는 사신이나 여행자들에게 갈아탈 말을 제공하고 숙식을 제공했는데 그에 관해서는 엄격히 규정했다. 예로 사신은 매일 백미 1되, 면(麵) 1근, 술 1되, 고기 1근, 유염잡지초(油鹽雜支鈔-용돈) 10문, 겨울에는 석탄 5근이 지급되었으며 따른 시종에게도 백미 등이 주어졌다.
몽골의 역참 제도는 이전의 그 어떤 교통·통신 네트워크보다 발달하고 포괄적인 것이었지만, 그런 이유로 인하여 인적·물적 유통을 지나치게 역참 시스템에 의존하는 결과를 낳고, 참호들의 부담이 가중되었으며, 또 몽골 특유의 문서 행정은 역참의 사용 빈도를 높이는 결과를 낳았는데, 지방 현에서 발생한 일을 중앙에 보고하고 다시 해당 현으로 내려오는데 최대 16회에 걸쳐 문서가 오고 갔다고 한다. 결국 몽골제국 말기에는 역참제가 초기의 활력을 상실하고 중단되기에 이르렀다.
황제의 명령 문서를 조칙 또는 성지라고 하는데, 현존하는 한문 자료들 가운데는 몽골 황제의 칙령을 한 단어씩 직역해 작성한 것이 상당수 남아 있다. 행정문서는 물론 사찰이나 도관(都官)에 하사되어 비문으로 새겨진 자료들도 이런 직역문으로 대칸이 몽골어로 내린 구두 명령을 ‘자를릭’이라 불렀고, 그것을 한문으로 직역한 것을 성지(聖旨)라고 했다. 성지는 대칸의 명령이라는 뜻이다. 직역이 아니라 우아하고 고급스러운 한문으로 옮긴 것을 조칙(詔勅)이라 하며, 황후의 명령은 의지(懿旨), 제왕의 명령은 영지(令旨), 고승의 명령은 법지(法旨)라고 했다.
1976년 전라남도 신안 앞바다에서 발견된 중국(元)선박에서는 모두 2만 2천여 점 물건들이 나왔는데, 그 가운데 1만 8천 점이 청자, 백자, 청백자 등 도자기였다. 배는 원나라 후기인 1323∼1350년 사이 중국 경원(慶元-寧波)을 출발한 것으로, 서아시아인들의 기호에 맞춰 송대에는 사용하지 않던 코발트블루 염료를 사용하여 청화백자를 만들어 인도양을 통해 대량으로 수출하던 것이었다. 무슬림 상인들은 몽골 귀족들이 특히 좋아하던 보석류와 청자를 수출해 막대한 이익을 남기기도 했는데, 이란어로 ‘랄(lal)’이라 불리는 루비는 중국서도 랄(剌)이라고 불렸고, 대칸의 즉위식에 썼던 관모에 달린 260캐럿의 홍랄(紅剌)은 현재 20∼30억 원을 호가하는 정도다.
원나라 시대 중국을 찾았던 마르크 폴로가 쓴 『동방견문록』은 한 때 유럽에서 《성경》다음으로 많이 읽힌 책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1269년 중국으로 향했고, 26년 뒤인 1295년 비로소 고향인 베네치아로 돌아왔다. 오고 가는 사이를 빼고도 17년간 중국에 머물렀다. 그는 ‘허풍쟁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었는데, 그래서 그의 기록을 믿을 수 없다는 의견도 만만치 않다. 문제는 그의 책을 여행기로 보는데 있다는 것이다. 원래 제목이 ‘세계에 관한 서술’로 [유럽을 제외한] 세계에 대한 체계적인 설명과 묘사가 담겼다. 그는 자신이 직접 경험한 것은 물론 다른 경로로 입수한 내용과 일화를 추가하기도 했다. 다만 오늘날처럼 표절이 문제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출처를 밝히지 않은 것뿐이었다. 그의 중국 여행은 내륙과 해양을 통한 외지인들의 방문과 체류를 장려한 쿠빌라이와 같은 통치자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볼 수 있다.
제4장, 몽골과 세계사의 탄생
우리는 지금 ‘지구촌’이라는 말을 밥 먹듯이 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15∼16세기를 ‘대항해의 시대’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그전 13∼14세기 몽골이 세계를 지배한 시대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인지 모른다. 그러나 학자들은 몽골시대가 남긴 영향에 대해 그다지 관심을 나타내지 않는다. 그것은 별다른 영향과 유산을 남기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때문인지 아니면 농경지대의 정주문화를 중시하고, 유목민들의 세계를 소홀히 여기는 편견 때문인지? 최대 육상 제국을 건설한 몽골 시대는 정치적 통합으로 유라시아 대부분을 ‘역참’이란 네트워크로 연결했다. 대륙을 관통하는 육상 교역로는 물론 인도양을 가로지르는 해상 루터까지 공전의 대성황을 이루었던 시대다. ‘대항해의 시대’는 선행된 이런 ‘대여행의 시대’가 있었기 때문에, 세계관의 변화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남송이 함락되고 중국 전역이 몽골의 지배 아래 들어온 지 9년째 되던 해인 1285년 쿠빌라이 칸은 ‘변방의 도지(圖志)를 모두 모아 그것들을 하나로 엮음으로써 제국의 강역(疆域)이 얼마나 무궁한지 나타내자.’고 한 주청을 받아들여 비서감(秘書監) 책임자로 이슬람인 ‘자말 앗 딘’을 임명해 정복지역에 대한 지지(地志) 편찬 사업을 추진했고, 1291년 1차로 755권을 완성했다. 또 이를 보완 수정하여 1303년 테무르 시대(성종)에는 총 500책 1,300권의 『대일통지(大一統志)』라는 지리역사서를 만들었으나 명대에 대부분 사라져 현재는 남아 있지 않다.
14세기 초에 만들어진 이것은 현재 실물이 전하지 않지만, 15세기 초 조선에서 만든 〈혼일강리도(混日疆理圖)〉(1402년-태종 2년, 현재 일본 교토 용곡대학 도서관 소장)에서 간접적으로나마 몽골 시대가 세계관의 변화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짐작하게는 해 준다. 또한 1375년 만들어진 〈카탈루니아 지도〉는 프랑스 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데, 여덟 면의 양피지에 그려진 지도로 네 면이 동방을 묘사했다. 동방의 지리적 정보에 관한 한 이 지도는 유럽에서 만들어진 가장 유명한 지도로서 유럽인들이 동방에 대하여 근대적 세계관을 갖기 시작했음을 보여준다.
카탈루니아 지도는 마르코 폴로를 위시해 동서교류가 활발히 이루어진 몽골제국 시대를 배경으로 ‘동방’을 다녀간 유럽인들이 전달한 풍부한 지리 지식이 없었다면 만들어지지 못했을 것이다. 몽골제국의 후원 아래 ‘서방’에 대한 풍부한 지리적 정보를 담은 과거와는 다른 세계지도가 만들어진 것처럼, 세계를 향한 유럽의 개안(開眼) 역시 몽골시대가 있었기 때문에 비로소 가능했던 것이다.
이외에도 몽골이 남긴 유산과 영향은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데, 고려에서는 1273년 1만 2천 명이 탐라로 피신한 삼별초의 난을 평정했고, 1274년 2만 7천 명을 동원한 1차 일본 원정, 7년 뒤인 1281년 10만 명과 3천 500척의 함대를 동원해 2차 일본 원정은 태풍이라는 기후 조건과 함선의 구조적 결함, 효율적 전투 문제 등으로 모두 실패했지만, 그 정도 해상 작전을 수행할 다른 어느 나라도 찾아볼 수 없다. 후일 정화에 의한 아프리카 대원정, 콜럼버스의 대항해도 몽골의 이와 무관하지 않다.
정화(鄭和, 1371∼1434)는 명나라 영락제의 명을 받아 1405년부터 28년에 걸쳐 대규모 선단을 이끌고 전후 일곱 차례에 걸쳐 인도양을 항해 한인물이다. 운남 출신인 그는 한족이 아니라 무슬림으로 주원장이 운남에 군대를 보내 몽골세력을 몰아낼 때 열 살 남짓한 소년으로 끌려가 환관이 되었고, 쿠데타로 집권한 영락제에게 발탁돼 해상원정업무를 부여받았던 것이다. 그의 출항은 2만 7천 명을 헤아리는 대선단에 60여 척의 함선 등 200여 척으로 이루어졌으며, 함선의 적재량이 3천 톤 규모로 콜럼버스의 기함인 산타마리아호가 200∼600톤이었던 데 비하면, 실로 어마한 규모가 아닐 수 없다. 정화는 아메리카는 물론 심지어 북극과 남극까지 진출했다는 주장이 있기도 하나 구체적 증거가 없기 때문에 입증되지는 않는다.
그의 이런 대원정은 어떻게 가능했을까. 국력과 기술력, 경제력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지만, 남송을 거처 몽골제국 지배기에 확립된 해양지배력과 해외무역에 적극적이고 개방적인 태도, 지배층의 해상무역 적극 후원으로 가능한 일이었다. 반면 콜럼버스는 쿠바에 상륙해 그곳을 마르코 폴로가 말한 황금의 땅 ‘지팡구(일본)’가 틀림없다고 믿었다. 또 오늘날의 미국 땅은 몽골의 황제 ‘그린 칸’이 사는 ‘킨사이’시로, 그린 칸에게 페르디난드와 이사벨라 국왕의 친서를 전달하겠다는 결의를 다지기도 했다. 콜럼버스가 처음 상륙한 섬을 ‘서인도 제도’로 불리는 것은 그곳을 ‘인도’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당시 인디아는 오늘의 인도와는 다르고, 콜럼버스 시대 ‘인도=인디아’는 동방을 칭하는 다른 이름으로, 마르코 폴로도 그렇게 믿었듯이 몽골의 대칸은 인도를 지배하는 군주이며, 콜럼버스는 자신의 배가 인도에 도달했다고 믿었던 것이었다.
그렇다면 정화와 콜럼버스의 차이는 무엇일까. 중국은 왜 해양진출을 포기했을까? 명나라는 1433년 정화의 항해를 끝으로 해양 진출의 막을 내렸다. 그것은 원이 물러났다고 하지만, 몽골의 위협 때문이었다. 1449년 급기야 명 황제 영종이 ‘오이라트’라고 불린 서몽골 세력에게 포로로 잡히는 일까지 벌어졌다. 해양이 아니라 내륙지방에 신경 써야 할 일이 많았던 것이다. 반면 유럽에서는 중국과 정반대의 일들이 생겨났다. 콜럼버스에 이어, 1497∼1498년 ‘바스코 다 가마’가 아프리카 최남단 희망봉을 돌아 인도 서해안에 도착했고, 1519∼1522년에는 ‘마젤란’이 세계일주에 성공했다. 결국 차이는 항해술의 차이가 아니라, 내륙과 해양에 대한 관점의 차이였다. 유럽은 해양으로 진출하는 엄청난 투자와 수입을 보장했지만, 중국은 더 긴박한 내륙의 위협을 막아내는 데 있었다.
다시 말해 정화의 원정은 인도양에서 만이(蠻夷)들을 조공케 함으로써 황제의 집권을 정당화하고 대원제국에 손색없는 대명제국임을 과시하고 싶었던 것이었다. 유럽이 바다로 나가 새로운 부의 원천을 탐구하는 동안 중국은 만리장성을 공고히 쌓고, 내륙과의 싸움에 국력을 소비한 것이다. 또 오스만제국은 기마 전사들로 이루어진 집단이었지만, 1455년 비잔틴의 수도였던 이스탄불을 함락시킨 뒤 점차 해군력을 강화해, 신생로마제국을 무너뜨리고 대서양으로 나아가 영국, 아일랜드, 스웨덴까지 진출하기도 했으나 18세기 들어서면서 해군은 위축되고 지중해에서의 장악력을 상실하고 말았다. 오스만제국 또한 중국과 마찬가지로 해양진출이 아닌 내륙세력인 이란의 사파비 왕조와 대결을 벌였기 때문이다. 오스만과 이란의 군사대결은 사파비 왕조가 절정을 이룬 17세기 전반까지 한치의 양보도 없는 대결이 계속되었다.
중국과 오스만제국은 실력보다 의지의 문제로 해양에 대한 헤게모니를 유럽에 넘겨주었고, 멘탈리티 문제에서도 유럽과는 근본적으로 달랐던 것이다. 몽골제국의 세계 지배가 종료되고, 중국은 명나라에 이어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가 들어섰고, 중앙아시아는 티무르 제국에 이어 킵착 초원에서 내려온 우즈벡인들의 국가가 들어섰으며, 인도에는 티무르의 후예인 ‘바부르’에 의한 무굴제국이 들어섰다. 또 이란은 트루크계 유목집단을 핵심으로 한 사파비 왕조가 세워졌고, 소아시아는 중앙아시아에서 이주해간 투르크계 유목민들이 건설한 오스만 왕조가 건설되었다.
이 제국들을 건설한 집단은 예외 없이 유목민 습속과 기마군단의 힘을 배경으로 정권을 장악했으나, 해양세력과는 거리가 멀었다. 하지만 그들은 몽골제국의 정치적 카리스마를 모방하려 하였고, 비슷한 멘탈리티를 갖고 경쟁했다. 모두 ‘육상 제국’을 지향했고, 설령 강력한 해군력을 갖고 있었다 하더라도 어디까지나 부차적인 것으로 내륙 문제를 위해서는 언제든지 해군력을 희생할 수 있었다. 영국과 스페인, 포르투갈, 네덜란드 같은 나라에서 찾아볼 수 없는 것으로 16∼17세기 유럽과 비유럽이 걸어간 근본적인 차이가 아닐 수 없다. 유럽의 지속적인 해양 진출이 가져온 ‘대항해의 시대’는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명확하다. 몽골의 지배가 남긴 명암이 바로 유럽과 비유럽의 운명을 갈라놓은 것이었다.
이제 이 책의 결론을 살펴볼 차례다. 요점을 정리해 보면 이렇다.
13세기 초 건설된 몽골제국은 70년의 끊임없는 정복전으로 유럽과 인도 일부를 제외하고 유라시아 대륙 대부분을 석권했다. 초기 약탈적·파괴적 성격이 점차 희석되면서 농경지대 경제와 문화에 이해도가 넓어지고 정주문명의 후원자가 되기도 하였으며, 광역의 교통 네트워크를 만들어 세계각지를 연결하고 교류하게 했다. 대륙의 가장 먼 지역에 관해서도 소상한 정보를 갖게 되고, 아프리카를 포함한 정확한 세계지도가 제작되었으며 세계역사를 처음으로 편찬하기도 했다. 이렇게 세계사의 탄생은 몽골뿐 아니라 유럽까지 공유할 수 있었던 역사적 경험이었다.
몽골제국 시대 내륙과 해양을 통한 교역은 그 어느 때 보다 활발하였고 문물의 교류 역시 전前시대와는 비교도 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럽과 비유럽이 서로 다른 길을 걷게 된 것은 의지의 차이로 ‘대항해의 시대’주인공이 되지 못한 것은 의지의 문제지 결코 능력의 차이 때문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18세기 중반 만주족이 건설한 청제국이 최후의 유목국가를 정복함으로써 유목제국은 막을 내렸지만, 유라시아를 움직여 온 두 개의 축 가운데 하나인 초원의 국가는 영원히 사라지지 않았고 그들이 남긴 ‘세계사의 탄생’이라는 축복은 영원히 계속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