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배경
제 1차 영-란 전쟁이 끝난 지 11년 뒤, 1885년 8월 13일. 제 2 차 영-란 전쟁이 시작되었다.
제 1차 영-란 전쟁이 끝나고 네덜란드에서는 드 비트가 정권을 잡았다. 그는 해군력의 증강과 해상무역의 회복에 중점을 두었고 그 결과 1654년에는 강력한 함선 수십 척을 건조, 상선 수도 영국보다 5배 이상 보유할 수 있다. 그 무렵 영국 내에서도 큰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었다. 1658년 올리버 크롬웰이 사망하고 찰스 2세가 왕위를 이어 스튜어트 왕조가 복구되었던 것이다. 프랑스에 망명 중이던 찰스 2세는 크롬웰의 독재에 반대하던 왕당파의 추대로 왕위에 올랐다. 그는 원래 카톨릭 교도였으며, 망명 도중에 네덜란드로부터 푸대접을 받았기 때문에 네덜란드에게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영국과 네덜란드는 식민지 문제로 다시 전쟁을 벌이게 된다. 1663년 영국의 호르무스가 네덜란드 식민지를 약탈하였고, 아프리카 서부의 네덜란드 무역 거점을 공격하였으며 아메리카에서는 뉴 암스테르담을 무력으로 빼앗아 찰스 2세의 동생인 요크 공의 이름을 따 뉴욕이라 명명했다.
이렇게 되자 네덜란드는 드 루이터 제독에게 함대를 주어 영국 산선을 나포하도록 명령한다. 이 과정에서 양국 함대가 1664년 지브롤터 해협에서 충돌하게 되자 1665년 1월 14일 네덜란드가, 같은 해 2월 23일 영국이 각각 상대국에 대해 선전포고를 하면서 제 2차 영-란 전쟁이 발발하게되었다.
2. 로스토프트 해전의 경과
오프담 제독의 네덜란드 함대는 5월 중순 출항하여 영국 상선을 나포하였다. 이 때 요크 공의 영국함대도 네덜란드 함대를 찾아 출항하였다. 오프담 제독은 6월 1일 영국 함대가 보이는 Southwold 만에 도착하여 닻을 내렸다. 네덜란드 함대를 발견한 요크 공은 즉시 출항하였으나, 이틀 동안 서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6월 3일 아침 풍향이 바뀌자 영국 함대가 풍상(바람이 불어오는 쪽)의 위치를 점하게 되었다. 이 때 영국 함대의 선두는 루퍼트가 중앙은 요크 공이, 후미는 샌드위치가 각각 지휘하고 있었다.
전투는 6월 3일 새벽 3시 30분경부터 시작되었다. 영국 함대는 회열진으로 기동하다가 사정거리에 이르렀을 때 단종진을 형성한 반면, 네덜란드 함대는 처음부터 단종진을 형성하였다. 양측은 몇 차례에 걸쳐 풍상 쪽의 좋은 위치를 점하기 위해 기동하면서 이렇다할 전투는 하지 못하다가 영국 함대의 샌드위치 함대가 네덜란드 함대의 중앙을 들이받으면서 네덜란드 함대가 분리되었다. 오프담 제독은 자신의 기함 Endracht 호가 요크 공의 기함 로얄 찰스 호에 근접하게 되자 양측은 치열한 공방전을 펼친다. 그 와중에 네덜란드 함대가 쏜 포탄이 로얄 찰스 호의 탄약 창고에 명중하였으나, Entracht 호도 포탄이 탄약고에 떨어져 장교 5명과 수병 400명 이상의 사상자를 내고 위기에 빠졌다.
기함이 위험에 빠지자 네덜란드 함대의 사기가 크게 떨어져 많은 함선들이 전투를 포기하기 시작했다. 네덜란드 함대는 자국 연안으로 후퇴하기 시작했고, 에버첸 제독은 마스 강으로 항해해 갔으며, 트롬프 2세는 텍셀 섬으로 항해하였다.
로스토프트 해전에서 네덜란드 함대는 30척 이상을 잃은 반면, 영국 함대는 단 2척만 상실하였다. 그러나 네덜란드 함대를 추격하지 않은 요크 공은 많은 비판을 사게되었다. 이로 인해 요크 공과 루퍼트는 샌드위치에게 사령관직을 맡기고, 펜에게 참모장을 맡도록 하였다. 네덜란드에서는 패전의 책임을 지고 오프담 제독이 물러나고 아메리카 대륙에 체류 중이던 드 루이터 제독이 귀국하여 사령관직을 맡았다.
3. 결과
이 해전 이후 2차례 더 해전이 발발하여 4일간의 전투에서는 네덜란드가, 그리고 North Foreland 해전에서는 영국 측이 우세하였다. 해전이 끝난 뒤 네덜란드는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1665년 스페인의 펠리페 4세가 사망하자 프랑스의 루이 14세가 자신의 부인이 펠리페 4세의 장녀임을 내세워 당시 스페인령이었던 네덜란드 남부를 요구하였다. 펠리페 4세의 차녀의 아들인 카를로스 2세가 이 요구를 무시하자 루이 14세는 1667년 대규모 병력을 이끌고 스페인령 네덜란드를 침공하였다. 따라서 북부 네덜란드로서는 프랑스군이 자기 영토까지 침공하지 않을까 염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이러한 상황으로 인해 네덜란드는 다시 영국과 평화교섭에 나서 1667년 네덜란드 남부의 브레다에서 다음과 같은 조건으로 평화 조약을 체결한다.
1) 네덜란드는 북아메리카의 뉴 암스테르담을 영국에게 넘기고 영국은 남아메리카의 기아나를 네덜란드에게 양도한다.
2) 독일의 상품에 대해서는 항해법을 적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강화를 맺은 지 불과 5년 만인 1672년 양국은 세 번째 전쟁을 하게 된다.
출처 : www.seahistory.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