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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 또는
수행으로부터의 따뜻한 마음
김 정 빈
(작가, 위빠사나 호두마을 수행지도 법사)
큰아들이 돌아오던 날
어제 큰아들이 군에서 돌아왔습니다.
아내는 아들에게 다가가 아들을 살며시 안아 주었습니다.
저는 운전석에 앉아 그걸 바라보며 그냥 있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저는 사랑 표현에 서툰 70~80세대였던 셈입니다.
몸집이 작은 제 아들은 커다란 군용 백이 무거웠다고 말했습니다. 안쓰러운 마음과 함께 미안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들의 키가 작은 게 제 키가 작기 때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아들의 표정은 밝았습니다. 당연히 밝았을 게 아니냐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겠지만 세상사는 그처럼 단순한 것이 아닙니다. 제대 자체야 물론 홀가분한 일일 테지만, 그로써 얻어진 자유라는 선물에는 책임이라는 짐이 따라옵니다. 앞으로 어디에서 무엇을 해야 할지를 생각하면 막막해질 수도 있다는 의미입니다.
군을 마치자마자 곧바로 대학에 복학하는 젊은이들은 책무감이 좀 덜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제 아들처럼 대학교를 마친 상태에서 군에서 제대를 하여 사회에 진출하는 젊은이들에게는 앞으로의 일이 걱정으로 다가올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표정이 밝은 것은 아들이 자신의 미래에 대한 자신감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렇게 믿을 만한 몇 가지 근거를 갖고 있습니다. 아들은 자신이 장래에 사회적으로 성공을 하리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고 있으며, 저 또한 아들의 그 믿음을 믿습니다.
이 점에 대해 저의 경우를 말하자면, 저는 33년 전 미래에 대한 비전이 전혀 없는 막막한 채로 군에서 제대하였습니다. 제게는 돌아갈 학교도, 일할 직장도 없었습니다. 미래에 대한 확신은커녕 갈 길조차 희미했습니다. 그러나 어찌어찌 하다 보니 길이 열리고 마침내 글장이가 되었습니다. 한때는 일 년 내내 베스트셀러 일등을 유지한 책을 낸 적도 있습니다.
그때 얻은 이름에 의지하여 지금까지 글을 쓰며 살아오고 있지만, 더하여 ‘치열한 정신’과 ‘따뜻한 마음’에 관한 관심을 잃지 않으려고 애쓰며 살아오고 있지만, 이 행운은 운명이 도와준 덕분이지 제 능력이나 노력 때문만은 아닙니다. 전적으로 행운의 힘으로 된 일만은 물론 아니었지만, 그 덕을 꽤나 많이 보았다는 의미입니다.
행복했던 지난 한 해
여기에서 제가 하고 말하고 싶은 것은 바로 앞에서 언급한 ‘정신’과 ‘마음’입니다.
예전에 저는 이 두 단어에 대하여 전자는 지적인 인식을, 후자는 정서적인 느낌을 의미하는 것으로 정리한 적이 있습니다. 지금도 그때의 정리는 대체로 유효합니다. 그런 전제하에 저는 지금의 저의 정신과 마음에 대해 대체로 만족하며 살고 있습니다. 이 말은 지금의 제가 제법 행복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내는 제가 예술가여서 그렇다고 말합니다만, 저에게는 약간의 ‘조울기’가 있습니다. ‘조울증’이라는 정신질환이 있어서 이 말을 쓰기가 조심스럽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말 말고는 다른 적당한 말이 잘 생각나지 않아 이 말을 쓰도록 하겠습니다. 요컨대 저는 매우 고양되고 행복한 상태(조증)와 우울하고 무기력한 상태를 오고가는 경우(울증)가 가끔 있습니다.
그렇다고는 해도 전체적으로는 평온한 때가 가장 길고, 울증보다는 조증을 더 많이 경험합니다. 그런데 작년의 경우에는 특히나 조증― 즉, 마음이 한껏 행복하고 만족스러운 상태가 자주 일어났습니다. 그 조증은 제 평생을 통해 보더라도 처음 있는 정도로 높은 수준이었습니다.
그 상태에서 저는 “나는 지금의 이 상태에 전적으로 만족스럽다”는 기분이 됩니다. 저는 행복이라는 말의 정의를 “그 상태에 만족스러워서 더 이상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감정”이라고 정의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행복감을 꽤나 강하게 맛본 셈입니다. 그 행복감은 때로 사랑에 빠진 사람이 느끼는 희열의 수준까지 상승되었습니다.
저는 그런 수준의 높은 희열감을 전에도 가끔 체험한 적이 있습니다.
제가 지금 살고 있는 집(4년 전에 지은 제 집의 이름을 ‘감나무집’이라고 지었습니다)을 짓기 전, 저는 당시에 살고 있던 아파트에서 20킬로미터쯤 떨어져 있는 농촌 마을의 전원주택 한 채를 빌려 집필실로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침이면 늘 그곳으로 향하게 마련이었는데, 아내는 저를 현관에서 배웅하곤 하였습니다. 출근을 할 때 저는 아내와 포옹을 합니다. 포옹은 어느 날은 평상심으로 하게 되지만, 조증이 있는 시즌에는 다릅니다. 그때 저는 아내에 대한 열정적인 사랑의 감정에 사로잡히게 되고, 어느 때는 제가 지금 살아 있다는 사실에 감동이 되어 어쩔 줄 모르는 지경이 됩니다.
그래서 저는 아내를 꼬옥 안고 온몸을 관통하는 희열에 몸을 부르르 떨곤 하였습니다.
그런데 작년과 재작년에 자주 느낀 아내와 삶에 대한 사랑의 희열감은 그 수준 면에서 전에 느끼던 감동의 정도보다 훨씬 강렬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지금 제 집필실은 ‘감나무집’ 2층에 있습니다. 따라서 제가 아내와 떨어져 지내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아내와 지내는 시간이라는 면에서 볼 때 저는 여느 남편에 비해 두세 배 이상의 행운을 누리고 있습니다.
이처럼 함께 지내는 시간이 많다 보면 사람의 관계는 좀 심상해지게 마련입니다.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라고 해도 그런 점은 있게 마련이지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저는 작년에 아내를, 그리고 삶을 더욱더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다행한 것은 아내가 저의 열렬한 사랑의 감정을 담연한 태도로 받아들여 준 점이었습니다. 아내는 저의 이 같은 조증(희열감)이,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가라앉게 되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담담하게 저의 감정을 수용해 주었고, 실제로 얼마의 시간이 지나자 저는 평상의 마음을 회복하였습니다.
어쨌거나 저는 작년에 제 평생을 통틀어 가장 행복한 일 년을 보냈습니다. 다만, 경제 문제가 때때로 저의 행복감에 걱정거리로 다가올 때가 있었지만, 이 점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겠습니다.
저는 제가 느꼈던 행복한 일 년을 회상하며 제 행복이 무엇으로써 구성되어 있는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짚어 보니, 제 행복은 여러 가지 요소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제 행복의 첫 번째 요소는 무엇보다 ‘건강’이었습니다.
사실 저의 건강은 평생에 걸쳐 썩 자랑할 만한 정도는 되지 못했습니다. 특별한 병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모든 것이 조금씩 부족했습니다. 충분한 건강을 10으로 놓고 질병을 그 10이 3 정도로 낮아졌을 때를 의미한다고 가정할 경우, 저의 몸 상태는 나쁘면 4, 좋으면 5 정도에서 오가는 수준을 유지하였습니다.
그런데 무슨 까닭인지 작년 봄부터 건강이 많이 좋아졌습니다. 따져 보면 여러 이유가 있을 테지만 이에 대해서도 일일이 말하지 않겠습니다. 어쨌든 이 같은 건강의 회복은 저의 행복의 기초가 되었고, 비단 제가 아니더라도 건강이 행복의 전제가 된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두 번째로 저를 행복하게 한 요소는 건강을 바탕으로 제가 일에 ‘몰두’하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건강이 좋지 않았던 지난 이십여 년 동안 저는 일 년 중 글을 쓰는 시간을 대체로 보아 2,3개월밖에 갖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나머지 9,10개월은 무얼 하느냐고 묻는 분이 있을 것 같습니다. 그 기간에 저는 글을 쓰는 2, 3개월이 시작되기를, 저의 4,5인 건강 상태가 8,9의 수준에 이르기를 기다립니다.
물론 그 기다림의 기간에 책을 읽기도 하고 사색을 하기도 합니다만, 그러나 그 기간은 글을 쓰는 기간에 비해 덜 행복합니다. 책을 읽고 사색을 하는 것도 집중의 일종이고, 집중은 마음을 평온하고 행복하게 하는 것이지만 그 집중의 정도는 책을 쓰는 것에 비하면 낮은 편입니다.
그런데 작년의 경우 건강이 좋아진 때를 기준으로 볼 때 거의 70퍼센트 정도를 글을 쓰는데, 또는 그와 대등한 창조적인 일(영상물을 제작하는 일)에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매일 매일이 아니라 프로젝트 하나가 이루어지는 과정 전체를 집중하는 날로 보아 그랬다는 의미입니다.
그 집중이 저를 행복하게 해 주었습니다. 집중은 마음을 한 곳에 모으는 것이고, 마음이 한 곳에 모이면 잡념이 없어집니다. 그리고 잡념이 없어진다는 것은 번뇌가 사라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행복은 이 번뇌 없는 마음을 전제로 자연스럽게 꽃피어나는 결과물입니다.
저의 집중은 당연히 생산성으로 이어졌습니다. 그 결과로서 저는 작년에 큰 성과물 두 개를 완성하였습니다. 그런데 그것들은 경제적인 면에서는 거의 소득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이 점은 물론 중요합니다. 그렇지만 지금 제가 말하고 있는 것은 이 점이 아니라 그 집중의 기간 동안 제가 행복했다는 사실입니다.
아내와 명상이 가져다준 행복
저를 행복하게 한 또 하나의 요소는 제가 그동안 거의 놓고 있다시피 했던 ‘명상’을 다시 시작하게 된 점입니다. 그러나 작년의 저의 명상 수행은 ‘열심히’가 아니라 ‘약간 노력을 기울이는’ 수준에 불과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마도 전에 수행을 했던 덕분이겠지만 작년에 명상은 저의 행복감에 크게 기여하였습니다.
제가 놓고 있던 명상을 다시 시작하게 된 것은 아내 덕분이었습니다.
그동안 저는 제가 명상을 시작한 1989년 이래로 아내에게 명상을 하라고 한 적이 없습니다. 권유 차원에서 두세 번 말한 적이 있을 뿐입니다. 또한 저는 제가 하는 명상이 저 자신은 물론 아내에게도 좋은 것이 되도록 유념하였습니다. 이런 저의 태도가 아내로 하여금 저의 명상을 후원해 주는 마음을 내도록 했었나 봅니다. 저는 아내의 지원을 받아 외국(미국과 미얀마)으로 나가 명상에 전념하는 기회를 여러 차례 만들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작년 8월의 어느 날, 아내는 오래 잊고 있었던 기억을 되살리기라도 한 것처럼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명상을 시작하였습니다. 그 때부터 저는 아내의 구루(교사)가 되었습니다. 저는 아내에게 명상을 하는 동안에 일어난 몸과 마음으로부터의 현상을 기록하도록 한 다음 하루에 한 번씩 그것을 점검하며 지도해 주었습니다.
아내의 명상은 나날이 진보하였습니다. 얼마의 시간이 흐르자 아내는 사물을 바라보는 데 있어서 전에 비해 보다 큰 마음의 여유 공간을 확보하는 것 같았습니다. 본래부터 성품이 부드럽고 온아한 사람인 저의 아내는 명상을 통해 그것을 더욱더 심화하는 듯 보였습니다.
어느 날 아내는 저에게 사람들이 ‘슬프고 안쓰러워’ 보인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남을 슬프게 보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에 대해 말해 주었습니다.
이 감정을 불교에서는 ‘자비심’이라고 부르는데, 자비는 사랑을 의미하는 자(慈)와, 동정을 의미하는 비(悲)가 합쳐진 말입니다.
자비심은 생명을 가진 모든 존재가 필연적으로 죽게 마련이라는 인식을 기반으로 일어납니다. 보다 넓고 보다 깊은 이 관점에서 볼 때 부자도 권력자도 불쌍합니다. 명예를 얻은 사람도, 외모가 아름다운 사람도 안쓰럽습니다. 그들 또한 언젠가는 죽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때를 당하게 되면 그들이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는 재산 · 권세 · 명예 · 미모 등은 아무 쓸모도 없는 것으로 변해 버리게 됩니다.
보다 멀고 긴 이 관점.
이 관점을 가진 자비의 사람은 남을 비난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이 나를 욕할 때 그는 그 사람을 욕하는 것이 아니라 동정합니다. 그가 보다 멀고 긴 안목을 갖고 있지 못한 것을, 그가 스스로의 몸과 마음에 독을 만들어 퍼뜨리고 있다는 사실을 슬프게 생각합니다. 이것은 자비심을 가진 사람이 자아를 보호하려는 마음보다는(또는 그 마음과 함께) 타자를 위하고자 하는 마음을 더 많이 갖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기독교로 번안할 경우, 이 감정은 ‘아가페(agape)’의 사랑이 될 것입니다. 신의 인간에 대한 사랑, 그 사랑에 대한 보답으로서의 인간의 신을 향한 사랑, 그 결과로서의 인간의 인간에 대한 사랑이 아가페의 사랑입니다. 여기에서 ‘신’을 ‘진리’로 바꿀 경우, 아가페와 자비심은 완전하게 같은 의미의 말이 됩니다.
이 자비심과 아가페의 사랑은 나만을 생각하는 좁은 울타리를 무너뜨립니다. 그렇다고 해서 작년에 저와 제 아내가 그런 자비심이나 사랑을 경험했거나 체득했다고, 그럼으로써 나만을 생각하는 좁은 울타리를 무너뜨렸다고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저희는 다만 그를 향한 아주 조그만 ‘실마리’를 잡았거나 보았다고 말하고 있는 것뿐입니다.
그렇다고는 해도 이 ‘실마리’는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이 실마리로부터 우리는 참다운 행복으로 가는 첫걸음을 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비심은 동정심의 일종이고, 동정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 것은 나는 강하고 상대가 약할 때 일어납니다. 두 번째 것은 나와 상대가 함께 약할 때 일어나는데, 자비심은 이 두 번째 동정의 다른 이름입니다. 바꿔 말하여, 자비심을 가진 사람은 자기가 불쌍하기 때문에 남을 불쌍하게 여깁니다. 그에 비해 일반적인 동정은 자기는 불쌍하지 않은 상태에서 남만을 불쌍하게 여깁니다.
자비심으로서의 동정은 일반적인 동정보다 훨씬 아름답고, 훨씬 고귀하며, 훨씬 우아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하라”는 성경의 말씀을 저는 “선행을 하되, 그것을 강자의 약자에 대한 동정으로서가 아니라, 모든 인류가 동일한 약자라는 의미를 배경에 두고서 하라”라는 의미로 해석합니다.
그런 동정 · 이해 · 자비 · 사랑의 마음은 남들에게 이익을 주기 이전에 자기 자신의 내면에서 참다운 이익의 꽃을 피웁니다. 그런 동정 · 이해 · 자비 · 사랑이 훌륭한 것은 그것이 남들에게 이익을 주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그것이 보다 중요한 첫 번째 이유는 남들에게 이익이 주어지기 이전에 자기 자신부터 이롭게 한다는 데 있습니다.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자비심을 가진 사람은 자기 자신을 불쌍하게 여깁니다. 그리고 자신을 불쌍하게 여기는 마음은 자기 자신의 ‘에고’를 약화시킵니다. 그 다음, 에고의 약화는 집착의 약화, 욕망의 약화, 긴장의 약화를 유발하고, 이 자아의 약화로부터 남을 향한 동정이 생겨납니다.
이런 흐름을 통해 우리는 자비심을 일으키는 동안 거친 세파를 뚫고 나오는 동안 얼어붙었던 마음에 봄 햇살을 보낼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내 마음의 긴장 · 경직 · 탐욕 · 집착이 조금씩 조금씩 녹아내리게 됩니다. 이 ‘해빙(얼음이 풀림)’의 다른 이름이 마음의 여유로움 · 마음의 한가함 · 마음의 부드러움입니다. 그리고 여유 · 한가함 · 부드러움을 가진 마음은 평화롭고 행복합니다.
이 과정은 꽃의 향기로써 보다 더 잘 비유할 수 있습니다.
꽃은 향기를 만들고, 향기는 벌 나비와 사람에게 이익을 줍니다. 그렇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꽃의 향기는 벌 나비와 사람에 앞서 꽃 자신에게 먼저 이익을 베풉니다. 벌 나비, 즉 남들이 이익을 보는 것은 꽃 자신이 이익을 보고 난 다음의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자비와 사랑의 마음이 우리를 행복하게 해 줍니다. 그리고 그 행복은 자연스레 주변으로 퍼져나갑니다. 나의 행복이 너의 행복을 낳습니다. 첫 번째 행복이 두 번째 행복을 유발하고, 두 번째 행복이 세 번째 행복을 유발합니다. 바꿔 말하여, 행복한 사람은 자기 옆에 있는 사람을 행복하게 합니다.
웃는 사람, 기쁜 사람, 행복한 사람은 이런 식으로 남들에게 이익을 베풉니다. 따라서 그는 선행을 하지 않는 순간에도 선행을 하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그가 웃고 있고, 기뻐하고 있고, 행복해 하고 있는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남들을 이익되게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 이런 식으로 마음이 행복해져 가는 아내를 옆에 둔 제가 작년에 매우 행복했으리라는 것은 다시 말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예술에서 얻은 행복
그리하여 저와 아내는 행복의 길을 함께 걸어가는 친구(도반)가 되었습니다. 작가 생텍쥐페리는 “사랑은 마주 보는 것이 아니라 함께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만, 저희는 그런 부부가 되었습니다. 저희는 마주보는 관점에서는 부부였고,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관점에서는 영혼의 벗(soul mate)입니다.
나아가, 아내는 저의 ‘제자’이기도 합니다. 처음 우리는 강의하는 사람과 강의를 듣는 사람으로 만났습니다. 그 때문에 저는 아내와 연애를 하는 여섯 달 동안 ‘선생님’이라는 호칭을 들었습니다. 그로부터 이십육 년, 저는 다른 의미에서 아내의 ‘선생님’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저와 아내의 사이가 좋았을 것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하겠습니다. 사실, 비단 작년이 아니더라도 저와 아내는 거의 다투지 않는 편입니다. 연애 시절까지 합쳐 이십육 년, 저와 아내가 목소리를 높인 경우는 한 손으로 꼽을 정도입니다. 그런 아주 드문 경우를 제하면 저희는 평온한 부부 관계를 유지해 왔습니다.
이런 무던한 부부로서, 저와 아내는 ‘드라이브’를 즐깁니다. 저희는 시간이 날 때면, 또 데이트를 해야겠다 싶은 마음이 들 때면 차를 타고 교외로 나가곤 합니다. 그리고 그 차 속의 데이트는 작년의 경우 더욱 잦아졌습니다.
저희가 드라이브를 하는 곳은 저희가 사는 평택에서 3,40킬로미터 이내에 있는 인근 지역의 명소들입니다. 저희는 평택 · 안성 일대의 이곳저곳을 가보곤 합니다. 서해안과 안성의 용설리 · 금광리 쪽으로 가서 호수를 보기도 하고, ‘산장 휴게소’에 가서 아이스크림을 먹기도 하고, ‘운수암’에 들러 약수를 마시기도 하고, ‘사랑의 교회 수련원’에 가서 차를 마시기도 합니다.
그 중에서 저희가 가장 자주 가는 곳은 ‘미리내 성지’입니다(이곳은 김대건 신부님을 기리는 장소입니다). 몇 해 전에 저희가 사는 데서 그쪽으로 가는 자동차 전용도로가 생겨서 미리내 성지로 가는 길은 더욱 편해졌습니다. 제 집에서 그곳까지 가는 데는 20분 정도, 거기에서 차를 한 잔 마시고 나서 천천히 돌아오면 약 한 시간 정도가 소요됩니다.
그렇게 드라이브를 하면서 저는 아내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눕니다. 이야기의 소재는 작년의 경우 둘째 아들에 대한 내용이 많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고등학교 3학년생인 둘째 아들이 대학 입시를 앞두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반드시 아들 이야기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느 때는 이야기를 하지 않고 노래를 부릅니다. 노래 부르기는 주로 저의 몫입니다. 아내는 자기가 노래를 잘 부르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거기에 더하여 제가 노래 부르기를 워낙이 좋아하기 때문에 제가 노래를 부르는 것인데, 그렇기는 해도 제가 노래를 썩 잘 부르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부르는 노래는 가곡이 주를 이룹니다만 딱히 장르에 제한을 두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그때그때의 기분에 따라 장르를 바꿔 가며 노래를 부릅니다. 저는 낮은 목소리로, 그러나 아내가 충분히 들을 수 있는 정도의 음 높이로 노래를 부릅니다.
이처럼 차 안에서 노래를 부르는 것은 제 기분이 좋을 때마다 늘 나오는 버릇입니다. 저는 아들을 차에 태우고 있을 때나 친분 있는 분들을 태우고 있을 때에도 노래를 부를 때가 있습니다. 그러니 제가 혼자서 노래를 흥얼거릴 때가 많으리라는 것은 충분히 짐작이 될 것입니다.
다행한 것은 아내가 저의 노래를 매우 좋아한다는 점입니다. 아내는 저와 드라이브를 하면서 저의 노래를 들을 때 매우 행복하다고 합니다. 아내는 차 안에서 제 노래를 듣는 것을 좋아하고, 더불어 저와 드라이브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아내에게 그렇게 좋은 드라이브 데이트를, 저희는 작년에 일주일에 한두 번, 어느 때는 네댓 번씩이나 즐겼습니다. 그 데이트는 저를, 그리고 아내를 행복하게 해 주었습니다.
작년은 저희의 결혼 25주년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아내에게 은혼식다운 무슨 보답도 해 주지 못했습니다. 하와이에라도 다녀왔으면 싶었지만 건강도 건강이려니와 경제적으로도 그럴 여유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희는 결혼기념일을 전후하여 충남 대천 앞바다에 갔습니다. 그동안 아내의 건강이 안 좋아서, 거기에 저까지 건강이 안 좋아서 저희 부부는 불과 두 시간이면 갈 수 있는 이 바닷가에조차 갈 수 없었는데, 이제는 그 정도는 되겠다 싶어져서 간 결혼 기념 여행이었습니다.
평일, 사람의 발길이 드문 아침나절이었습니다. 저희는 한적한 모래 언덕 나무 밑에 앉았습니다. 공기는 서늘하고, 눈앞에 푸른 바다가 출렁거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아내를 위해 선물을, 노래 선물을 바쳤습니다. 제가 아내에게 불러 준 노래는 멕시코 민요인 <제비>였습니다.
정답던 얘기 가슴에 가득하고
푸르른 저 별빛도 아름다워라.
사랑했기에 멀리 떠난 님은
그 모습 언제나 꿈속에 있네…….
아내는 제 노래에 감동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내보다 오히려 제가 더 감동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음악이란(예술이란) 그 향수자와 마찬가지로, 또는 향수자보다도 더 그 창조자(연주자)를 행복하게 하는 법인데, 그때의 경우도 그러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음악이 저를 어떻게 행복하게 했는가의 이야기입니다만, 이 음악을 통한 행복은 제가 작년에 문순우 화백을 알게 됨으로써 더욱더 질이 높아졌습니다.
재작년, 안성에 사는 장석주 시인과 오랜만에 다시 만나 교분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문학인으로 등단하던 초기에 만난 장 시인은 저의 시집 《감꽃 마을》에 해설을 써 준 적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멀지 않은 곳에 살면서도 서로 연락이 없었다가 재작년에 다시 인연을 잇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한 해가 지난 작년의 어느 때, 장 시인은 저에게 문순우 화백을 소개해 주었습니다. 문 선생은 안성에서 큰 작업실을 갖고 작업(회화 · 사진 · 조소 등)을 하는 한편, 많은 지인들과 어울려 와인을 마시기도 하고, 음악을 즐기기도 하면서 지내고 있었습니다.
특기할 만한 것은 그 분의 작업 공간에 매우 우수한 성능을 가진 오디오와 아주 훌륭한 영사 시설이 갖추어져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문 선생의 작업실에서는 언제나 장르를 가리지 않는 다양한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고, 어느 때는 구하기 어려운 영상물이, 주로 음악과 관련된 영상물이 상영되었습니다.
어느 날 저는 문 선생의 작업실에서 안드레아 보첼리의 공연 영상을 감상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이탈리아의 이 유명한 가수를 저는 그때까지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날 보첼리는 저를 아주 매혹시켰습니다. 너무나 감동한 나머지, 저는 얼마 뒤에 제 가족을 포함하여 일곱 명의 팀을 구성하여 다시 문 선생 댁으로 가서 보첼리의 노래를 감상하였습니다.
그 뒤부터 저는 자주 문 선생 댁을 방문하였습니다. 자연스레 문 선생의 부인과도 교분을 갖게 되었고, 문 선생의 여러 지인들과도 사귀게 되었습니다. 나중에 문 선생의 부인은 저에게 명상을 배우게 되었고, 저의 영상 제작을 여러 모로 도와주셨습니다. 또한 저희는 함께 중세 스페인의 탁월한 가톨릭 명상가인 ‘아빌라의 테레사’에 관한 전기를 돌려 가며 읽었습니다.
문 선생과의 교유를 통하여 저는 미술에 대한 관심과 더불어 음악에 대한 관심을 더 깊게 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저는 4년 전부터 생각해 오던, 강의와 공연을 묶는 프로젝트에 대해서도 좀 더 세밀한 연구를 하게 되었습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문 선생은 저에게 예술적 감흥을 고양시키는 기폭제로서 다가왔습니다.
그 같은 정황은 ‘내적 평화’를 추구해 온 저의 심리 공간에 ‘예술적 아름다움’이라는 또 다른 색조를 부여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둘은 서로 어우러져 ‘행복’을 만들고, 성장시켰습니다. 저는 그 행복을 ‘아내라는 이름의 친구’와 공유하였습니다.
두 아들로부터의 행복
저를 행복하게 한, 빼놓을 수 없는 또 다른 중요한 요소는 저의 ‘두 아들’입니다.
저에게는 이번에 제대를 한 아들 말고도 또 하나의 아들, 즉 작은아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두 아들은 지금까지, 특히 작년에 저를 아주 행복하게 해 주었습니다.
저는 자녀 교육에 큰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저의 자녀 교육 이야기를 들은 어느 출판사에서 그에 관한 책을 한 권 써 달라는 부탁을 받았을 정도로 저는 아들 교육에 심혈을 기울여 왔습니다. 앞에서 저는 글을 쓰지 않는 9,10개월 동안 책을 읽거나 사색을 했다고 말했지만, 이 점에서 보자면 그 기간에 저는 아들들을 지도하고 있었다고 말해도 되겠다 싶을 정도입니다.
아니, 그 이상입니다. 저는 일 년 열두 달 내내 아들들을 지도해 왔습니다. 그 지도의 핵심은 “사람은 어떻게 하면 행복해질 수 있는가?”였고, 그 행복을 달성하는 길은 ‘물 퍼 오기’와 ‘컵 줄이기’라는 ‘두 길’로 압축됩니다.
전자는 사회적 경쟁 환경에서 남들을 앞섬으로써, 즉 ‘우물가’에 나가 ‘물’을 퍼 옴으로써 얻어지고, 후자는 자신의 내면에 침잠하여 마음을 다스림으로써, 즉 욕심을 버리고 소욕지족에 도달함으로써 이루어집니다, 이 두 길을 중심으로 저는 전자에서 성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 후자에서 인격을 함양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 아들들을 지도해 왔습니다.
큰아들의 경우, 뉴질랜드에서 고등학교와 대학교 과정을 거치는 동안 저와 아들은 일주일에 두 차례씩 정기적으로 전화를 통한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우리가 나눈 대화의 내용은 행복이라는 목표와 그에 따르는 방법의 문제, ‘컵 줄이기’와 ‘물 퍼 오기’, 외국 생활에서 아들이 느끼게 되는 고독 - 고독의 원인과 그 철학학적인 의미, 고독에 대처하는 방법 등에 관한 것이 주로 많이 다루어졌습니다.
그와 더불어 한국인(동북아시아인)과 서구인들의 사고방식에 대한 차이에 대해서도 많은 토론이 있었습니다. 대체로는 2,30분, 길면 한 시간 이상 계속되는 이 전화를 통한 대화(토론, 상담)는 아들의 인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습니다. 마침내 아들은 “저의 마인드는 아빠와 95퍼센트는 같아요”라고 말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저는 아들이 저에게 ‘세뇌’되기를 원하지는 않았습니다. 저는 열린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늘 강조했고, 저 또한 그런 마음을 가지려고 애썼습니다. 대학생인 아들에게는 ‘단지 말뿐인’, 실천이나 인격의 뒷받침이 없는 교훈은 전혀 먹히지 않는 법이기 때문입니다.
대화는 아버지의 잘못된 생각이나 행동이 지적되면 곧바로 그것이 인정되고 받아들여지는 것을 전제로 행해졌습니다. 그리고 그런 열린 대화는 저의 발전에도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저는 한편으로는 아들을 지도하는 멘토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아들로부터 충고를 듣는 멘티이기도 하였던 것입니다.
이에 대해 저는 오래 전부터 아랫사람으로부터 배우기를 부끄러워하지 않기로, 제 잘못을 지적당하면 그것이 옳다고 여겨질 경우 곧바로 받아들이기로 정해 두고 있습니다. 이것은 제가 늘 마음에 모시고 있는 스승인 공자님으로부터의 영향일 수도 있고, 젊은 한때 ‘무지의 지’라는 중대한 가르침을 베풀어 준 소크라테스로부터의 배움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큰아들이 초등학교 5학년 때쯤의 일입니다. 저는 어느 때 아들에게 큰 실수를 하였습니다. 잠시 흥분했다가 곧 제 실수를 깨달은 저는 곧 아들에게 정식으로 사과하였습니다. 아들은 울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의 진심어린 사과를 받아들이면서 “괜찮아요, 아빠”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훗날 아들은 “그때 아빠가 저에게 죄인처럼 사과하는 것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어요”라고 말했습니다. 아마도 그때의 일이 마음에 깊이 새겨졌던 모양입니다. 그리고 다시 세월이 흐른 뒤의 어느 때 그와 비슷한 상황에서 큰아들이 저와 동일한 행동을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대학교 1학년생으로서, 방학을 맞아 큰아들이 돌아와 있을 때의 일입니다. 어느 때 작은아들이 큰아들에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형이 집에 오면 내가 반가워해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어. 그렇지만 내 감정은 그렇지 못해. 내 이성은 그래야 한다고 말하지만 내 감정은 그에 따라주지 않아. 난 형이 집에 돌아오는 게 별로 즐겁지 않아.”
이렇게 말하는 중학교 3학년생의 표정은 비장하였습니다. 작은아들은, 나도 이제는 형에게 충고의 말을 할 수 있다고, 또는 형의 권위에 도전할 만한 나이가 되었다고 생각하는 듯하였습니다.
작은아들이 말을 이었습니다.
“어렸을 때, 형이 장난감을 혼자서만 갖고 놀았어. 나는 재미없는 것만 갖고 놀아야 했단 말이야. 그때 내가 얼마나 마음이 아팠는지 알아? 그래서 나는 지금도 형이 좋아지지가 않아. 지금의 형이 좋은 사람이라는 건 알고 있어. 형은 똑똑하고, 밝고, 올바르고, 친절해. 그렇지만 내게는 전에 가졌던 형에 대한 부정적인 마음이 잘 없어지지 않아.”
저는 긴장하였습니다. 이럴 때 큰아들이 화라도 낸다면 형제간의 우애에 큰 금이 갈 게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우리 부부는 큰아들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런데 예상 외로 큰아들의 표정은 담담하였습니다. 큰아들은 말을 듣는 즉시 그것을 명쾌하게 정리하였는데, 그 정리는 ‘자기의 잘못에 대한 흔쾌한 인정, 사과’로 귀결되었습니다.
“네 말 그대로야. 그땐 내가 너무 했지.”
큰아들은 순순히 아우의 비판을 인정하였습니다. 그런 다음 진심을 담아 말했습니다. “그땐 내가 잘못했어. 지금이라도 용서를 해주면 고맙겠다.”
우리 부부의 놀랐던 마음은 가라앉았습니다. 파도는 일어나자마자 잦아들었고, 저는 두 아들에게 이런 경우 유념해야 할 몇 가지 요점을 짚어 주었습니다.
그 뒤부터 작은아들의 형에 대한 태도는 변하였습니다.
생각해 보면, 그때까지 작은아들은 형에 대해 이중적인 인식을 갖고 있었습니다. 한편으로 보면 예전의 형이 좋아지지 않지만, 다른 한편으로 보면 형이 잘나고 똑똑해 보였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그때의 화해에 의해 좋지 않던 감정이 사라지고 나자, 이제는 형의 잘나고 똑똑해 보이는 것만 남게 되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감정의 앙금 때문에 다 보지 못하고 있던 형의 지금의 모습 - 있는 그대로의 지금의 모습을 보게 된 작은아들이 어느 때 저에게 말하였습니다.
“형은 제 이상형이에요.”
그리고 재작년, 대학 입시를 위한 서류에 가족에 대한 의견을 적는 과정에서 작은아들은 형에 대해 ‘존경’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작은아들은 그 서류에 “저는 제 부모님과 형을 존경합니다”라고 적었던 것입니다.
물론 그 존경은 으레 존경하게 마련인 부모라는 대상에 덧붙여져 따라온 것이기 때문에 전적인 존경과는 다른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작은아들은 큰아들을 ‘존중’하는 것만은 분명하다고 하겠고, 저는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큰아들이 작은아들로부터 ‘존중(존경)’받는다는 사실, 그리고 그 존중은 큰아들이 작은아들을 그 이상으로 존중(존경)했기 때문이라는 데 생각이 미치자, 저는 이런 형제를 아들들로 가진 부모로서의 저 자신이 너무나 행복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아니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생각해 보면, 그것은 제가(저희 부부가) 두 아들을 존중해 준 것으로부터의 자연스러운 결과였습니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큰아들이 저로부터 겸허한 자세에 관한 멘토링을 잘 받아들이고 체화한 때문이기도 하였습니다.
저의 멘토링은 작은아들에게도 큰아들과 거의 동일하게 베풀어졌습니다.
큰아들과는 달리 작은아들은 한국에서 소년 시절을 보냈습니다. 그러다 보니 큰아들보다 더 많은 대화를 나누었으리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겠지만, 이 경우 또한 세상사는 그처럼 단순한 것이 아닙니다.
작은아들과는 대화의 면에서 볼 때 가까이 있다 보니 오히려 장점보다는 단점이 더 두드러지는 관계가 되었습니다. 작은아들이 고독감을 느낄 겨를이 없는(적은) 환경에 있었다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고독감을 느끼지 않으면 마음을 다스릴 필요성이라든가 정신 · 마음 · 영혼에 대한 관심이 적어지게 마련입니다. 따라서 그런 것들에 대한 내용을 중심으로 하는 저의 멘토링이 작은아들에게 침투할 여지는 상대적으로 큰아들에 비해 적었습니다.
그렇긴 해도 한국에서의 고등학교 과정은 학생에게 엄청난 부담을 강요합니다. 오후 네 시경에 정규 공부가 끝난다는 점에서는 큰아들과 작은아들이 같았지만 그 이후가 달랐습니다. 큰아들은 그 이후 현지 친구들과 어울려 음악 동아리를 만들어 보컬로 활동했지만, 작은아들은 그때부터 또다시 공부가 시작되는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이런 점에서 작은아들은 큰아들과는 또 다른 정신적 문제와 마주쳤고, 시간이 지나면서 저의 멘토링이 작은아들에게 침투해 들어갈 여지가 확대되었습니다. 조금씩 조금씩 작은아들은 저를 멘토로 받아들여 갔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저는 큰아들에게 했던 말을 작은아들에게도 똑같이 할 수 있었습니다.
“이제부터 우린 평생 친구로 지내는 거야, 알았지?”
두 아들의 다른 점은 이 말에 큰아들이 “네. 그럼요!”라고 자랑을 섞어 대답한데 비해 작은아들은 다만 고개를 끄덕였을 뿐이라는 점뿐입니다. 이것은 큰아들이 자기표현이 풍부한데 비해 작은아들은 말수가 적고 과묵하다는 차이에서 생긴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저는 두 아들을 친구로 얻었습니다. 그 점에서 저는 다시 세상에서 드문 행복한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한 명의 진정한 친구만 얻을 수 있어도 행복한 사람”이라는 격언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친구를, 그냥 친구도 아니고 아들을 겸한 친구, 제자를 겸한 친구를 두 사람이나 얻었으니, 거기에 더하여 아내까지도 친구이자 제자를 겸하고 있으니 저는 얼마나 행복한 사람입니까.
저는 진정한 친구를 ‘나의 속내를 알아주는 사람(知己)’, 또는 ‘나의 슬픔과 기쁨에 진심으로 공감해 주는 사람(隨喜, 同喜)’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저의 두 아들은 세상에서 저를 가장 잘 아는 사람들입니다. 물론 저의 아내는 두 아들과 더불어 세상에서 저를 가장 잘 알고, 저를 가장 잘 이해하며, 제 슬픔과 기쁨에 가장 깊이 공감해 주는 사람이니, 저는 세 명의 훌륭한 친구 · 지기 · 동희를 가진 사람인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나라 학부모가 가장 중요시하는 대학 입시의 계절이 왔습니다. 다행하게도 작은아들은 수능 시험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습니다. 60만 명 가량의 수험생 중에서 0.5 퍼센트 정도에 해당되는 성적을 거둔 것입니다.
비록 평소의 실력이 그대로 수치화된 것이었다고는 해도, 또 사회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는 것보다(물 퍼 오기) 더 중요한 것은 옳고 바르고 당당하고 정직하고 성실한 마음가짐이라고(컵 줄이기) 누누이 강조해 온 아버지인 저라고는 해도, 그 성적은 저에게 매우 기쁜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로부터 몇 달 동안 작은아들의 학업 성취를 음미하며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그 성적을 기반으로 작은아들은 자기가 원하는 대학교, 원하는 학과에 입학하였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성격이 밝아지고, 과묵한 성격 때문에 걱정이 되던 교우 관계도 개선이 되어 갔습니다. 얼마 전부터는 대학 오케스트라 단원이 되어 오보에를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음악은 저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아들의 인성에 행복을 이루는 한 원천이 될 것입니다.
큰아로부터의 황금율
한편, 저의 큰아들은 재작년에 외국어 시험을 거쳐서 들어가게 되는 특기병으로서 서울 한복판에서 군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작년에는 자기의 부대 안에서 단 한 명만을 뽑는 삼중의 선발 과정을 거쳐 부대 총사령관을 가장 가까운 데서 모실 기회를 얻었습니다.
별이 넷이나 달린 군인 최고 직위의 장군을 1미터 거리에서, 그것도 수시로 자주 접한다는 것이 육군 일등병에게 어떤 느낌일지는 군 생활을 해 보지 못한 분들에게는 상상이 잘 되지 않을 것입니다. 바꿔 말하여 저의 큰아들은 군 생활을 통해 남다른 특별한 체험을 풍부하게 할 수 있었습니다.
어느 때 아들은 고위 장성들의 부부가 모인 연회에서 한미 연합사령부 총사령관인 벨 장군의 부인을 가까이에서 접할 기회를 얻었습니다. 그때 아들은 벨 부인이 보여준, 남을 배려하는 우아한 태도에 감동했던가 봅니다(이에 대해서 자세히 말할 수도 있지만, 그러면 글이 너무 길어질 것 같아서 생략하겠습니다). 며칠 뒤에 휴가를 얻어 집에 온 아들은 그때의 경험을 제게 말하고 나서 “그런 부인을 가진 군인이 대장이 되지 않을 수는 없을 거예요” 하더니, “저도 그런 아내를 가질 수 있을까요?” 하고 물었습니다.
“좋은 과일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길이 생기는 법이야” 하고 제가 말했습니다. “다만 나는 그 분의 매너 있는 행동 자체보다는, 매너의 배경에 있는 그 분의 마인드에 유념하고 싶구나. 결국 그 마인드는 남의 고통을 함께 아파하는 마음이라고 할 수 있겠지.”
그런 다음 저희는 저희 부자가 열 차례 이상 토론한 스티븐 코비의 책 《성공하는 사람들의 일곱 가지 법칙》에 나오는 ‘성격적 접근’과 ‘성품적 접근’에 대해 재토론 겸 재정리를 해 보았습니다. 결국 저희의 대화는 사람에게 있어서 남들의 고통(어려움)에 공감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가진 것인지에 대한 것으로 확장되었습니다.
그로부터 얼마 뒤의 일입니다.
저는 승용차의 옆자리에 큰아들을, 뒷자리에 아내를 태우고 고속도를 빠져나오고 있었습니다.
톨게이트 여직원이 계산을 마치고 요금 카드를 돌려주며 “좋은 하루 되십시오” 하고 인사를 했습니다.
이런 경우 저는 대답을 해 주는 경우가 드뭅니다(요즘에는 대답을 합니다). 그냥 고개만 끄덕하고 마는 편인데, 그날 내 옆자리에서 아들이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아들은 그냥 그 말만 한 게 아니었습니다. 아들은 상대방이 들을 수 있도록 목소리를 한 톤 높여서, 상대방이 기분이 좋아지도록 목소리의 분위를 한껏 띄워서, 그것도 모자랐던지 조수석에서 몸을 반쯤 일으켜 왼쪽으로 여직원 쪽을 쳐다보면서 말하였던 것입니다.
“우리 아들, 참 특별하기도 하지.”
조금 뒤에 저는 칭찬의 의미로 이렇게 말해 주었습니다. 그러자 아들이 대답하였습니다.
“얼마나 힘드시겠어요?”
여기에서 저는 제 아들이 한 말 - 주의를 기울이지 않을 경우 쉽게 흘려 넘겨 버릴 수도 있는 “(저 분은) 얼마나 힘들겠어요?”라는 말이 갖는 의미를 곰곰 짚어 보고 싶습니다.
생각해 보면 거기엔 놀라운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제 아들이 잘났다고 말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제가 겪었던 실제 사실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하고 싶은 것뿐입니다. 그래야만 읽는 분들에게 강력하게 호소하는 힘이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제가 아니라도 누구든 이런, 또는 이와 유사한 의미심장한 일을 겪을 수 있습니다. 그때 여러분 앞에서 의미심장한 말이나 행동을 한 사람은 여러분의 자녀일 수도 있고, 부모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바꿔 말하여 저는 지금 “우리가 가끔 겪게 되는 일들 중에 숨어 있는 의미심장함” 중에서 한 가지를 들어 말하고 있습니다.
그 최대치로서 본다면, 제 아들이 한 말 “얼마나 힘들겠어요?”에는 인류의 가장 고귀한 정신이 담겨 있습니다. 이 말은 윤리의 황금율, 바로 그것의 다른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서양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인 “너희가 남에게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 또한 남을 대접하라”는 말씀을 ‘황금율(gold rule)’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이런 가르침이 비단 예수님만의 것은 아닙니다. 동서고금의 모든 위대한 영적 스승들은 한결같이 이 진리를 설파하였습니다.
예를 들어 공자님은 “네가 하고 싶지 않은 일을 남에게 시키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의 랍비 힐렐도 말했습니다. “우리 조상들이 받들어온 율법서를 단 한 줄로 요약하면, ‘네가 하고 싶지 않은 일을 남에게 시키지 말라’이다.” 부처님 또한 말씀하셨습니다. “자기를 욕하고 때리는 것에 대해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그러니 어떻게 남을 욕하고 때릴 수 있겠는가?”
요컨대 황금율은 ‘감정이입’의 문제입니다. 저는 나치 전범들의 재판을 다룬 영화 《뉘른베르크》에서 한 주인공이 “악이란 감정이입의 부재”라고 말하는 것을 본(들은) 적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말을 “선이란 감정이입 바로 그것”으로 번안할 수 있는데, 동서고금의 모든 철인들 또한 이런 의미의 말씀들을 남겼습니다.
요즘 일곱 명의 목숨을 앗은 살인 용의자 강호순의 사이코패스(psychopath)가 큰 관심을 끌고 있습니다. 사이코패스는 감정이입이 전혀 되지 않는 정신적 장애를 가리키는 의학 전문용어입니다. 남의 고통이 나에게 전혀 이해되지 않거나, 남의 고통을 보면서 조금의 동정심도 일어나지 않는 마음. 이 차가운 사이코패스의 마음은 뱀의 마음일지언정 사람의 마음일 수 없습니다.
좀 거창해진 감은 있지만, 어쨌든 제 큰아들이 한 말 “얼마나 힘들겠어요?”에는 이런 종교 철학적인 심원한 배경이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지난 해 서해안의 태안 기름 유출 사고 때 우리 국민 백만 명이 청소 봉사를 했다는 사실을 우리나라 국민으로서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그것은 깊은 수준의 감정이입이 없이는 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지금이 바로 약속한 그 때에요!"
감정이입과 관련된 이야기를 두 가지만 더 해 보겠습니다.
큰아들이 아르바이트를 하던 때의 일입니다. 한 아이가 할아버지와 함께 아이스크림을 먹으러 큰아들이 일하는 가게에 왔습니다. 손자의 손에 쥐어진 꼬깃꼬깃한 돈은 이것이 손자에게 매우 드문 기회임을 말해 주었습니다.
아이는 이 소중한 기회를 살리기 위해 여러 가지 아이스크림 중 하나를 고르느라고 이삼 분 가량 시간을 썼습니다. 그런데도 결심이 서지 않아 망설이고 있었는데, 그런 손자의 행동은 성미 급한 할아버지의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할아버지는 아이에게 상품을 빨리 고르지 않는다고 짜증을 냈고, 그 때문에 아이의 행복한 기분은 깨어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감정이입이 안 되는 할아버지. 그 할아버지는 손자에게 아이스크림을 사 주는 일이 실제로는 어떤 일인지를 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 경우 아이스크림은 손자의 행복을 위한 수단이지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닙니다. 손자의 목적은 행복, 또는 만족이라는 의미입니다. “아이스크림만 사 줬으면 됐지!”가 아니라, “아이스크림을 사 준다고 해도 행복이 파괴된다면 도대체 해 준 것이 무엇인가?”인 것입니다.
아들은 그 장면을 보고 하루 종일 마음이 아팠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나중에 큰돈을 벌면 그런 아이들을 행복하게 해 주고 싶노라고, 단지 나만 행복하기 위해 돈을 벌면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말했습니다.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이 되라”는 저의 가르침을 잊지 않고 있는 게 분명한 아들은, 보다 많은 이들을 행복하게 해 주기 위해서라도(물론 거기에는 자신의 행복 추구가 반드시, 그리고 우선적으로 전제됩니다만) 나중에 큰돈을 벌어야겠다는 이왕에 갖고 있던 결심을 이 일을 통해 더욱 강화하였습니다.
또 한 가지 사례도 바로 그 무렵에 있었던 일입니다.
저는 어느 날 갑자기 정신을 잃고 쓰러졌습니다. 그 때문에 하루 종일 거실에서 이불을 펴고 누워 지냈습니다. 그런데 그날 밤, 큰아들이 밤 한 시쯤 집에 돌아왔습니다. 늦게까지 아르바이트를 하고 한 시간 반 정도 열차를 타고 집에 돌아온 것입니다.
아들은 아내의 차를 타고 역에서 집까지 오는 동안 제가 쓰러졌다는 걸 안 모양이었습니다. 들어오자마자 아들은 나에게 달려와 저를 안고 울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말했습니다.
“아빠, 쓰러지시면 어떻게 해요?”
지금, 이 글을 쓰는 동안에도 제 눈에 눈물이 고입니다. 그러니, 당시의 제가 어떻게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한 남자로서, 한 아버지로서, 한 가장으로서, 한 작가로서, 나아가 사람은 마땅히 영혼의 순결과 고귀한 가치를 지향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진 한 인간으로서 살아온, 그러나 때로는 건강에, 때로는 경제에, 때로는 인간관계에 마음을 다치곤 했던 일들이 내 감정을 휘몰아쳐 왔습니다.
그러나 저는 되뇌었습니다.
“오늘 밤에도 별은 바람에 스치운다.”
“그러나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해야지.”
우리 세 식구는 서로 얼싸안고 울었습니다. 잠을 자고 있던 작은아들이 놀라서 깨어 일어났습니다. 이번에는 네 식구가 함께 울었습니다. 아들들 앞에서 제가 운 것은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습니다.
그때 큰아들은 울면서 말했습니다.
“오 년만 기다려 주세요. 그때부터 아빤 은퇴를 하고 쉬게 해 드릴 게요. 딱, 오 년만 기다려 주세요!”
그리고…….
어제 전역을 하던 날.
저녁 식사 자리에서 아들이 말했습니다.
“지금이 바로 그 ‘오 년 후’예요. 저는 곧 일할 거예요. 이제 가정 경제는 걱정 안 하셔도 돼요. 아빠는 경제와는 상관없이 아빠가 꼭 하고 싶으신 일을, 아빠가 꼭 하셔야 될 일을 하세요.”
아들은 제가 꼭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저의 에고를 약화시키는 데 힘쓰는 것(명상), 그럼으로써 마음이 따뜻해지고, 그 ‘따뜻한 마음’으로부터 영적인 ‘향기’를 품게 되는 것, 그런 다음 그 향기를 널리 퍼뜨림으로써 많은 사람들이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것입니다.
제가 큰아들이 하는 말의 의미를 음미하고 있는 동안 저의 아내가 저와 아들을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끝)
이 글은 위빠싸나 명상법을 다룬 저(김정빈)의 책 <즐거운 수행>에 서문으로 쓰인 것을 옮겨 온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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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행복하십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