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과 평화
요한복음 20:19-31
주님의 부활의 은총이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빈다.
부활절기다. 십자가에 걸린 흰 천은 부활하신 주님을 의미하는 세마포 상징이다. 성령강림절 직전까지 부활절기 7주간 계속 걸어둔다.
부활주일 다음 날, 수원의 어느 큰 교회 목사가 전화를 하였다. 지금 인터넷에 십자가에 건 세마포 상징을 마리아 숭배라고 왜곡하는데, 해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마리아를 뜻하는 ‘M’자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게 어떻게 그런 오해를 설명해야 할지 물어 온 것이다.
가톨릭의 마리아 경배에 대한 과민증일까? 어떤 교회는 이 상징이 좋아 보이니 세마포 상징의 의미도 제대로 모른 채 일 년 내내 색깔을 바꾸어 걸기도 한다. 제대로 믿지 못하면 남의 이야기에 쉽게 휩쓸리게 마련이다. 이런 부활절 상징에도 자신감이 없으니, 어떻게 부활신앙을 가질까, 싶다.
부활절기는 7주간 계속된다. 그런 다음 오순절 성령강림절이 온다. 주님이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대림절이 4주간이고, 부활하심을 축하하는 절기가 7주간인 이유가 무엇일까? 아마 성탄보다 부활이 믿음을 갖기가 더 어려운 모양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부활에 대한 믿음을 갖는 것이 어려워서 오랜 훈련이 필요한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 전에 서산 해미읍성에 다녀왔다. 이곳은 유명한 가톨릭교회 순교지이다. 19세기 신유박해와 병인박해 당시, 무려 천여 명이 죽었는데 순교자의 이름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당시 해미읍성은 무관이 다스리던 군사시설이었기 때문에 변변히 기록을 남기지 못하였다. 그래서 무명 순교자의 묘지를 따로 두었다.
이곳 순교터는 여숫골, 또는 여수고개라고 불린다. 체포된 무리가 예수와 마리아 이름의 기도문을 반복했더니, 그 소리가 멀리 있는 사람들에게 ‘여수 여수’라고 들렸다. 얼마나 두려웠을까? 예수 그 이름 때문에 순교까지 작정했다면 그 이름의 의미가 무엇일까? 그들은 죽음의 순간에서도 ‘여수’와 평화를 함께 하였다. 그리고 부활에 대한 믿음과 소망으로 용기있게 죽음을 맞이하였다.
1)
예수님이 체포되고 십자가에서 처형당하신 후에, 나머지 무리도 결코 안심할 수 없었다. 골고다에서 일어난 끔찍한 십자가 사건으로 제자들은 큰 위기의식을 느꼈을 것이다. 앞으로 불어 닥칠 후폭풍을 염려하였다.
십자가 아래에서 도망친 제자들은 멀리 흩어지지는 않고, 다시 한곳에 모여들었다. 그들은 몹시 긴장했다. 숨죽이며 지낸지 사흘째이다. 제자들은 문을 굳게 닫았다. 그날 아침에 막달라 마리아 일행이 주님의 무덤에 다녀와서 빈 무덤과 함께 주님의 부활소식을 전했으나, 믿기 어려웠다.
사실 주님의 부활은 이미 예고된 일이었다. 예수님이 삼 세 번이나 말씀하신 일이지만, 그것을 곧이곧대로 믿은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여전히 공포에 질린 그들은, 아직 진리는커녕 눈에 보이는 사실조차 제대로 분별할 능력이 없었다.
이런 제자들의 두려움 한 가운데로 부활하신 예수님이 오신 것이다. 그들의 깊은 두려움 속으로 평화의 주님께서 직접 방문하셨다.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19).
부활하신 주님은 제자들 가운데 서신 채 이렇게 말씀하셨다. 부활 후 처음 만난 마리아에게 하신 그 ‘평화의 인사’(마 28:6)였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19).
본문에는 같은 인사말이 세 번이나 반복되고 있다.
그리고 불안과 두려움 속에서 주님의 죽음을 슬퍼하던 그들에게 부활하신 몸을 보여주신다.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20).
부활에 대한 믿음과 기쁨(평강) 사이에는 어떤 연관성이 존재하는 것일까? 부활절기에는 흰옷을 입는데, 그것을 ‘콰시모도 게네티’, 곧 ‘어린아이처럼’이라고 부른다. ‘어린아이처럼’, 순진하게 믿으라는 뜻일까? 흰색은 평화를 상징한다.
예수님은 마음속에 불안과 두려움이 가득한 제자들에게, 장차 다가올 위기를 느끼며 염려하는 제자들에게, 미래에 대한 확신이 없어 방황하는 제자들을 향해 거듭거듭 선포하신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19, 21, 26).
사실 당시 제자들뿐만 아니다. 현대인이 앓고 있는 가장 일반적인 질병도 불안이다. 현대인들이 겪는 심리적 특징들 가운데 딱 하나를 든다면 마음의 평안이 없다는 것이다. 꼭 남들 때문이 아니다. 스트레스 탓이 아니다. 자기가 자신에 대해 ‘트러블메이커’ 역할을 한다. 내적갈등의 모습이다.
성금요일 기도회에서 우리가 나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한 ‘이기심, 교만, 욕망, 분노, 의심과 두려움’은 모두 내 안의 ‘트러블메이커’들이었다. 그것들이 내 안에서 평화를 빼앗아 간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두 가지를 약속하신다. 첫째는 ‘아버지가 나를 보내셨듯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고 하시고, 둘째는 ‘두려움과 죄로부터 이기도록 믿음과 평화를 주실 성령을 받으라’고 하셨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겠다는 든든한 언약이었다.
2)
제자들이 모여있던 그 현장에 열 두 제자 가운데 디두모라 불리던 도마가 없었다. 히브리어로는 ‘도마’이고, 헬라어로는 ‘디두모’인데 쌍둥이란 뜻이다. 후대에 그는 불명예스럽게도 ‘의심 많은 도마’라고 불린다. 다른 제자들이 도마에게 우리가 부활하신 주님을 보았다고 하자 그가 즉각 보인 불신 반응 때문이다.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25).
그래서 12제자 상징 중에서 도마의 상징은 ‘직각자’이다. 그만큼 까다롭게 따지고, 검증하는 인물로 평가 받았다. 사실 시시비비 따져 본다는 것이 결코 부정적인 의미는 아니다.
오히려 요한복음은 ‘따지는’ 인물인 도마를 흥미롭게 조명한다. 요한복음 11장에서 나사로가 죽었다는 전언을 듣고 예수님이 그곳을 방문하시려고 하자, 대부분이 말렸다. 성난 유대인들이 예수 일행을 향해 돌을 던지려던 그곳에 다시 가서는 안 된다고 만류한 것이다. 그때 도마가 나서며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요 11:16)고 앞장섰다.
그 뿐 아니다. 도마는 예수님이 죽으심과 부활에 대해 말씀하실 때에 구체적으로 그 길이 무슨 의미인지에 대해 물었다.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요 14:5).
예수님은 도마에게 저 유명한 명언인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요 14:6)라는 말로 대답하셨다.
그러니 도마를 가리켜 의심이 많으니 어쩌니, 불명예스럽게 부를 일이 아니다. 그는 매사에 신중하였고, 또 마음에 결심이 서면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대충 입말로 고백하지 않고, 몸말로 결단한 사람이다.
여드레가 지나서 예수님은 다시 제자들의 모임에 오셨다. 여드레는 곧 안식 후 다음 날로 제자들이 정기적인 모임을 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안식일이 지난 다음날, 제자들로부터 시작해 처음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부활하신 분의 임재를 믿음 안에서 확신하며, 정기적인 예배로 모였다. 그것이 오늘 우리에게까지 이어진 것이다.
예수님은 의심하던 도마에게 또 한 번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신다. 심지어 옆구리에 손을 넣어 확인해 보라고 말씀하신다. 그런 후에 도마는 ‘믿음 없는 자’(아피스토스)가 아닌 ‘믿는 자’(아콜루테오)가 되었다. ‘아피스토스’(고전 6:6)가 그리스도인이 아닌 자를 뜻한다면, ‘아콜루테오’(계 14:4)는 그리스도의 인도를 따라가는 자이다.
도마는 이렇게 고백한다.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28).
마침내 도마는 위대한 부활신앙에 동참한 것이다. 도마가 고백한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은 베드로의 신앙고백 못지않은 훌륭한 신앙고백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를 때 그 ‘주’(主)란 표현(20, 25)에는 부활하신 분에 대한 신앙고백이 담겨있다.
도마는 뒤늦게 부활신앙을 갖게 되었다. 그 동안 남들은 다 믿는데 홀로 불신하니 얼마나 불편했을까, 참 불안했을 것이다. 그러나 도마의 불신과 불편과 불안이 믿음을 갖게 되면서 누구도 따르지 못할 만큼 강력한 신앙을 갖게 되었다.
그러니 당장의 내 불안, 내 불신, 내 불편을 두려워 말라. 오히려 내게 더 큰 믿음을 주실 것을 믿고 내 ‘트러블메이커’를 십자가에 못 박고, 부활신앙을 통해 확실한 믿음과 소망을 품기 바란다.
3)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문안하신 ‘샬롬’(평안, 평강, 평화)은 지금도 우리 모두에게 필요하다. 이 평화는 주님이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부활의 선물이다.
두려움과 공포, 불신과 의심, 희망을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평안이었다. 이 평화의 인사는 사람들이 가족 간에, 이웃을 만났을 때 가장 일상적으로 하는 인사말이지만, 이 평범한 인사가 부활하신 주님의 입에서 전달될 때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를 보여준다.
그 뜻은 일상적인 인사의 범주를 넘어 세상이 가져다주는 평안과는 다른 주님의 평안이다. 예수님은 일찍이 말씀하셨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 14:27).
이제 하늘로부터 오는 위로가 함께 하신다. 우리는 주님이 약속하신 “나의 평안”에 참여하는 길이 열린 것이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오심과 만남은 세상이 줄 수 없는 평화를 가져다준다. 모든 두려움과 슬픔을 이기는 기쁨을 일으킨다.
이것은 임시적이 아니다. 환경에 의해 지배받지 않고 오히려 환경을 변화시키는 영속적인 것이다. 이 평안은 갈보리의 폭풍이 지나간 후의 마음의 고요함이다. 이것은 자신의 아들을 아낌없이 내어 주신 분께서 하나님의 자녀 된 모든 이들에게 주시는 선물이다.
부활신앙은 우리를 믿음으로 초대하며, 믿음이 열어주는 생명으로 초대한다. 요한복음은 부활신앙을 통해 얻는 믿음이야말로 궁극적인 생명으로 주신다고 약속한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31).
한마디로 믿음으로 평화와 생명을 얻는다는 것이다.
교회는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믿음 위에 시작되었다. 그래서 부활절은 색동교회 뿐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교 교회의 생일이다.
신약학자 불트만은 “그리스도교는 십자가에서가 아니라 부활에서 시작되었다”고 말하였다. 교회의 근거는 부활이며, 사도들이 목숨을 걸고 증거 한 내용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었다. 순교자들이 목숨을 바치며 불렀던 노래도 ‘예수 마리아’였다. 그리고 뒤를 돌아보지 않고 여수고개를 넘어갔다.
그리스도교의 모든 교회는 예수님의 부활로 출발한 종교이다. 부활절은 모든 교회의 생일이다.
우리가 하는 ‘주님의 평화!’ 인사는 부활신앙으로 시작하고, 그런 평화를 만들어가는 삶 속에서 예수님과 더불어 풍성한 생명을 약속한다.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태어난 색동교회 창립 6주년을 축하드린다.
색동교회와 그리스도의 품 안에서 자매와 형제가 된 우리 모두에게 ‘예수님과 평화’를 누리는 행복과 감사가 넘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