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빅토르 하라(1932-1973)라는 이름은 월드뮤직 매니아들이나 스페인어 및 라틴아메리카 문화 전공자, 8-90년대 노래운동 세대에게는 어느 정도 알려져 있는 듯하다. 빅토르 하라의 삶과 예술 세계를 주제로 한 논문도 몇 편 있고, 번역된 책들도 꽤 있다. 그러나 빅토르 하라의 노래가 그리스도의 복음으로부터 영감을 받았다는 점에 주목하는 이들은 그중에서도 드문 것 같다. 빅토르 하라는 갓 성인이 되었을 무렵 가톨릭 신부가 되기 위해 신학교에 입학했으나 곧 환멸감을 느껴 신학교를 뛰쳐나왔고 그 이후에는 교회 미사에 참례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신앙만은 온전히 버리지는 않았다.
<Plegaria a un labrador>(한 농민에게 바치는 기도)는 빅토르 하라의 신앙과 사회정치적 지향이 집약된 노래이다. 마이너 코드의 아르페지오에서 출발하여 후렴구에서 폭발하듯 내지르는 구조가 인상적이다. 한편으로 가사는 모든 교파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익숙한 기도문인 <주의기도>의 형식과 상당히 흡사하다. 가사 속에서 기도의 대상이 되는 ‘농민’에 당시 칠레의 가난한 농민들, 노동자들의 모습과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중적으로 투사되어있다.
“일어나소서.
저 산을 보소서.
바람과 태양과 물이 나오는 곳으로부터
강물의 흐름을 바꾸시는 당신이여.
영혼의 이랑에 씨를 뿌리는 당신이여.
일어나라.
그대의 두 손을 바라보라.
그대의 형제들에게 손을 내어 주고 함께 자라나라.
피로 뭉친 우리는 함께 나아가리니
오늘은 우리의 장래를 만들어 가는 날.
우리를 비참함 속에 가두어 두는 주인의 손에서 해방시키시고
정의와 평등의 왕궁이 임하옵시며 높은 산길에서 들꽃을 바람에 날리게 하듯
우리에게 불어오시며 불처럼 내 총의 총구를 깨끗이 해 주시며
당신이 이 땅에서 마침내 뜻을 이루시듯 우리에게 힘과 투쟁할 용기를 주소서
일어서라
그대의 두 손을 보아라
그대의 형제들에게 손을 내어 주고 함께 자라나라
피로 뭉친 우리는 함께 나아가리라
지금도, 우리가 죽는 그 시간에도
아멘”
본 번역문은 빅토르 하라의 아내 조안이 쓴 하라의 전기 <빅토르 하라: 아름다운 삶, 끝나지 않은 노래>의 한국어판(역자 차미례)에 나온 가사 번역본을 슬쩍 수정해 본 것이다. 하라는 성서를 읽다 느낀 영감으로 이 노래를 만들었다고 한다. 원래 이 노래는 가톨릭대학 섭외 담당 부총장의 재정 지원으로 열린 ‘제1회 칠레 새 노래 페스티벌’에서 발표하여 대상 수상한 곡이다. 페스티벌 전날 하라는 마지막으로 이 곡을 연습하면서 악단과 함께 자연스럽게 열정적인 무아지경의 기도 의식으로 옮겨갔다고 한다. (사실 칠레를 비롯하여 라틴아메리카의 로마 가톨릭 교회는 전세계 가톨릭 교회 중에서도 오순절 운동이 가장 활발하다. 현재 증가하고 있는 개신교 역시 오순절 계통이 많다고 한다.)
듣는 사람에 따라 이 노래의 낙관주의와 뚜렷한 정치적 지향성에 거부감을 느낄지도 모른다. 빅토르 하라가 치열하게 노래했던 당시 칠레의 상황과 현 2020년대는 사회정치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많이 다르기도 하다. 하지만 나는 노래란, 그리고 문화예술이란 하느님이 당신의 형상으로 인간을 창조하실 때 주신 선물이라고 믿는다. 이 선물을 통해서 우리 각자는 작은 창조자가 될 수 있다. 그리고 이 창조는 시대와 이념을 뛰어넘는다. 나는 이념을 넘어 노래에 담긴 복음에 대한 믿음과 희망에 마음이 끌렸다. 이 노래의 원곡자인 빅토르 하라는 강대국의 패권과 군부의 폭력 속에서 무기력하게 죽어갔지만 그의 목소리와 시는 그를 죽인 이들보다 더 오래 살아남아 새로운 복음으로 세상을 비추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