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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몬느 베이유 Simone Adolphine Weil, 1909-1943)】 "세례받지 않은 가톨릭 신비주의자".
고통으로 불꽃을 피운 성자, 시몬 베유-3
신비주의로 가는 길
1937년 여름 베유는 이탈리아로 여행을 떠났다. 로마와 아시시, 피렌체 등을 방문했다. 밀라노에선 노동자 거리를 거닐었으며, 피렌체에선 메디치 가의 예배당에서 미켈란젤로의 조각을 보았다. 가장 매혹적인 것은 이탈리아 중부 움브리아의 아시시 마을이었다. 다정한 심성을 소유했다는 프란치스코 성인의 고향은 소박하고 정숙했으며, 한 편의 시를 대하는 듯 했다. 프란치스코의 삶 자체가 시였다. 성인은 이 아름다움을 완성시키기 위해 모든 것을 포기했다. 산타 마리아 델리 안젤리 성당(Basilica di Santa Maria degli Angeeli)에서 베유는 처음으로 무릎을 꿇었다.
1938년 봄에는 그레고리안 성가로 유명한 솔렘(Solesmes) 수도원에서 사순절을 지냈다. 이곳에서 그는 “순수하고 완전한 기쁨”을 찾을 수 있었다고 했다. 그러나 결정적인 체험은 어느 영국인 가톨릭신자를 만나고서 17세기 영국시인들을 알게 된 것이다. 그 가운데 조지 허버트(George Herbert, 1593-1633)의 <사랑>(Love)이라는 시는 아예 외워서 두통이 심할 때마다 혼을 실어 암송하곤 했다. 그리스도께서 내려오셔서 베유를 사로잡았다는 영적 체험도 이 시를 외울 때 발생했다고 한다.
“사랑은 내게 오라 하나
죄로 더럽혀지고 추악한 내 영혼은
뒷걸음질 치네.
그러나 사랑은 기민한 눈으로
들어오자마자 주저하는 나를 보시고
다가와 다정히 물으시네.
행여 내게 부족한 것이 있는지
이 몸은 여기 어울리는 손님이 아니라 대꾸하니
사랑은 말씀하시길, 그대가 그 손님이라.
오, 사랑이시여, 배은망덕하고 인정머리 없는
이 자가 말입니까?
저는 당신을 바라볼 수조차 없나이다.
사랑이 내 손 잡고 미소 지으며 말씀하시길,
나 아니면 누가 그 눈을 지었겠느냐?
그렇습니다, 주여. 제가 그 눈을 더럽혔나이다.
제 수치에 어울리는 자리로 가게 하소서.
사랑이 말씀하시길, 누가 멍에를 졌는지
너는 모르느냐?
사랑이시여, 그럼 제가 시중을 들겠나이다.
사랑이 말씀하시길,
너는 앉아 내 살을 먹어야 한다.
하여, 나는 앉아서 먹었네.
그럼에도 사랑하기를 계속한다면”
1938년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침공하고, 1939년 독일군이 프랑코 정권을 승인하고, 폴란드를 침공했다. 1940년 6월 14일 파리가 함락되고, 베유는 그해 10월에 마르세유(Marseille)로 갔다. 그곳에서 2년 동안 지내면서 고요한 침묵 속에서 놀라운 정신적 작업을 수행했다. <노트>, <신을 기다리며>, <전(前)그리스도교적 직관>, <그리스의 기원> 등을 썼다. 1941년에는 마침 마르세유에서 열린 가톨릭노동청년회(J.O.C)에 참석해 깊은 감명을 받았다. 공장이라는 황량한 환경 속에서 깨어있는 정신을 발견했다. 노동계에 스미는 그리스도교의 정신이 진리를 연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결정적으로 도미니코 수도원장 페렝(Perrin) 신부를 만났다. 페렝 신부는 동물적인 공격성을 지니지 않았다. 베유는 페렝 신부를 만나러 갈 때 “빵을 걸식하러 가는데 이곳에서는 수치를 당하지 않는 걸인의 심정이었다”고 고백했다. 베유는 도미니코회의 기관지에 <노예가 아닌 노동의 첫째 조건>이란 글을 게재했다. 베유는 여기서 노동의 단조로움을 인내하려면 영원한 빛이 필요하고, 노동이 아름다움을 회복하려면 ‘시(詩)’와 같은 종교에 귀의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베유는 페렝신부가 “젊은 유대인 교수로서, 정부명령으로 학교에서 쫓겨난 좌익투사인 한 여성이 원하는 바를 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편지를 써줘서 아르데슈(Ardèche)의 농민 철학자 구스타브 티봉(Gustave Thibon)을 만났다. 티봉은 “현미경의 한계를 초월하는 정신의 세계를 모르면 인간에게 맞는 지식을 얻을 수 없다”고 말한 철학자였다. 그는 밭이나 길에서 문득 떠오른 생각들을 노트에 정리하고 있었다. 베유는 단순히 ‘아는 것’과 ‘온 신경을 집중해서 아는 것’ 사이의 간격을 줄이기 위해 노동을 하고 싶어했다.
베유는 밭일이 끝난 저녁이면 티봉과 그리스어 공부를 하고, 복음서의 ‘주님의 기도’를 그리스어로 바꾸어 암송했다. 베유는 포도 따면서도 일과처럼 주님의 기도를 암송했다. 티봉에게 청해서 다른 집 포도를 따게 되면서, 포도원 주인은 “이만하면 농부 며느리도 되겠다”고 했지만, 허약했던 베유는 티봉에게 “지옥에서도 영원히 포도 따기를 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고 털어놓았다.
또한 시몬 베유는 앙리4세고등중학교와 고등사범학교를 다니면서 <행복론>의 저자이며 알랭(Alain)이란 필명으로 유명한 에밀 샤르티에(Emile Chartier, 1868-1951)를 만났다. 알랭은 베유에게 칸트나 스피노자 등의 책을 한 페이지씩 뜯어서 흰 종이에 붙이고, 그 여백에 독서노트를 써나가게 했다. 종이는 클수록 좋았고, 여백을 채워나가는 동안 치우침 없이 생각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는 것이다.
알랭은 늘 환상 속에 사는 자를 부르주아라 하고, 실제적 노동을 감당하면서도 늘 이들에게 기만당하는 자들이 프롤레타리아라고 했다. 사제와 교사 등 설교만 하는 자들을 경멸했던 알랭은 경제적 변혁을 맹신하는 사회주의자도 비판했다. 알랭은 정치적 급진주의란 언제든 압제의 길로 추락할 수 있는 권력에 민중의 편에서 저항하는 것을 뜻했다. 1차 세계대전에 일어나자 사병으로 전쟁을 경험하고 “전쟁은 젊은이의 영웅심을 부추기는 올무”라고 비판했다.
알랭은 스탕달처럼 하루에 두 시간은 무엇인가 읽고 쓰도록 가르쳤다. 글쓰기를 할 때도 한 번 적은 글은 고치지 말라고 했다. 글쓰기를 통해 더 깊은 사색과 명료한 의식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휘갈겨 쓰는 글씨도 경계했다. 정성껏 글씨를 쓰는 습관은 무모한 열정을 삭히고, 쓰고자 내용에 정신을 집중하도록 만든다. 호메로스의 시와 플라톤을 성경처럼 읽었던 알랭은 <정의집>에서, 정신은 “육체를 거부하는 것”이라 했다. 육체가 부들부들 떨 때 도망가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고, 분노로 타오를 때 세차게 때리는 것을 거부하고, 목마를 때 마실 것을 거부하고, 욕망으로 타오를 때 소유를 거부하는 것이다. 이런 완전한 거부를 “거룩함”이라 했다. 베유에게 집단적인 것의 우상적 성격을 가르친 것도 알랭이었다. 그리고 그리스도교 정신이란 권력을 거부하며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바라보는 것이라고 가르쳤다.
세례받기를 주저하다
페렝 신부는 시몬 베유의 세례를 기대했다. 하지만 베유는 세 차례에 걸친 편지에서 자신이 세례 받을 수 없는 이유를 설명했다. 베유는 “인류의 대부분이 유물론에 빠져 있는 지금 시대에 하느님께서 당신과 그리스도에게 속하되 교회 밖에 남아 있는 사람들이 있기를 원하시지 않을까요?” 하고 물었다.
“제가 입교한다고 생각하면, 저 많고도 불행한 무신론자들에게서 멀어진다는 생각이 무엇보다 제일 괴롭습니다. 온갖 계층의 사람들 틈으로 들어가 그들과 더불어 지내고, 양심에 거리낄 것이 없는 한 그들과 똑같은 모습을 취하고, 저는 그들 속에 묻히고 그들은 제게 꾸밈없이 그들 본연의 모습을 보여 주기를 바라는 욕구가 제게는 있습니다. 그것이 제 소명이라고 생각해요. 있는 그대로 그들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제가 사랑하는 대상은 그들이 아니요, 제 사랑은 참된 것이 아닙니다.”
시몬 베유는 성직자와 평신도 사이의 거리보다 교회에 꼬박꼬박 출석하는 가톨릭 신자들과 불신자 사이의 거리가 더 멀고 벽이 또렷하다고 믿었다. 베유는 “사람들 앞에서 나를 부인하는 사람이 있다면 누구를 막론하고 나도 천국에 계신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할 것이다”라는 예수의 말씀이 교회에 속하지 않는 모든 사람을 싸잡아서 거부하는 말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그 말씀을 교회 출석 여부를 떠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실천하지 않고, 그분의 정신을 널리 전하지 않고, 기회가 닿는 대로 그분 이름에 영광을 돌리지 않고, 그분께 충실하기 위해 목숨을 바칠 각오를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으로 듣는다. 이런 점에서 시몬 베유는 신앙과 교회를 구분하고, 그리스도에 대한 충실성과 교회에 대한 사랑을 구분했다.
“저는 하느님, 그리스도, 가톨릭신앙을 사랑합니다. 비참하리만큼 미흡한 피조물도 그런 것들을 사랑할 수 있는 한에서요. 저는 성인들이 남긴 글과 성인전에서 본 그들의 모습을 사랑합니다. 단, 온전히 좋아할 수 없거나 도무지 성인으로 보이지 않는 이도 몇몇 있습니다. 저는 가톨릭전례, 성가, 건축양식, 예식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제가 정말로 사랑하는 이 모든 것과 상관없이, 엄밀한 의미의 교회에는 한 점의 애정도 없습니다. 교회를 사랑하는 이들에게 공감할 수 있으나, 저 자신이 그 사랑을 느끼진 않습니다.”
시몬느 베이유는 타인의 고통을 온전히 자기 것으로 만들고자 했다. 34세의 시몬느 베이유는 음식을 거부한다. 독일에 점령당한 프랑스 국민의 고통을 생각할 때 그녀는 음식을 입에 댈 수 없었다. 베이유는 자기 음식을 프랑스의 전쟁 포로에게 보내야 한다고 말했으며, 실제로 자신의 급식권을 수용소에 보내기도 했다. 이러한 고통의 감수성은 인간의 영역을 초월해 영적인 수준에 도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것은 신비한 종교적 체험에도 불구하고 영세를 받지 않으려 했던 그녀의 태도와도 무관하지 않다. 임종 직전까지도 영세받기를 거부함으로써 시몬느 베이유는 영세 받지 못한 자들의 고통까지 껴안으려 했던 것이다. 이 깊은 연민은 그녀가 껴안고자 했던 고통의 깊이에 비례한다.
그녀가 인도철학에 대한 관심이 많았음을 환기하기 바란다. 그녀의 행동은 해탈 직전에 다시 사바세계로 되돌아온 보살(Bodhisattva)의 행위와 유사하지 않은가. 이 세계에 단 하나의 고통 받는 중생이 존재하는 한 해탈을 포기하겠다는 보살 신화는 시몬느 베이유를 통해 온전한 육체를 얻는다. 이 보살이야말로 타인의 고통을 온전히 껴안은 존재가 아니겠는가.
한편 베유는 사회구조가 된 교회를 문제 삼았다. 베유 자신은 집단적인 데 잘 휘둘리는 성격이라고 밝히고 있으며, 만약 이 순간 독일청년 스무 명이 앞에서 나치스의 노래를 부르면 자신의 영혼 일부나마 당장 나치스가 될 것이라 했다. 그래서 가톨릭교회에 존재하는 애국심이 겁난다고 말했다. 애국심은 조국에 대한 감정인데, 그런 애국심은 치명적이라고 말한다. 예를 들어, 십자군 전쟁이나 종교재판을 용인했던 성인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런 성인들은 몹시 강력한 어떤 것에 눈이 멀었던 것인데, 그게 바로 ‘사회구조로서의 교회’다. 성인조차 그렇다면 “한 없이 연약한 저 같은 인간에겐 얼마나 해롭겠느냐”고 베유는 묻는다. 베유는 교회 문턱에 자신이 있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말했다.
1942년에 또 다른 중요한 만남이 있었는데, 카르카손의 조에 부스케(Joë Bousquet, 1897-1950)였다. 부스케는 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가 1918년 5월 27일 바이이 전투에서 독일군이 발포한 탄환에 척추를 관통당해 하반신 불구가 되어 평생 자택 침실에서 보낸 시인이며 소설가였다. 열정적인 대화를 나누고서, 나중에 부스케에게 보낸 편지에서 베유는 “당신은 세계의 현실을 고스란히 자신에게 실재시키는 특권을 지녔습니다.”라고 했다. 그 몸에 ‘전쟁’이 머물고 있기 때문이다.
“불행에 관해 생각하기 위해서는 불행을 몸에 못처럼 깊이깊이 박아넣어 그것을 지니고 있어야만 합니다. 사고가 그것을 줄곧 뚫어지게 바라볼 수 있을 정도로 강함을 지니기까지, 그것을 오래 지녀야만 합니다.”라고도 했는데, 시몬 베유는 세계의 불행에 진실로 공감하며, 불행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는 자만이 사랑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십자가에서 살해당하면서, 세상 끝까지 고통으로 번민한 예수가 그런 사람이었다.
1937년 4월에 시몬 베유는 이탈리아 여행을 하던 도중에 밀라노에서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최후의 만찬》을 관람하였고, 이후 아시시에 있는 산타 마리아 대성당의 조토가 그린 프레스코를 관람하면서 신적 영감을 받는다. 여기서 지금까지의 자신의 삶에 커다란 전환점을 맞게 되었다. 1938년에 두 번째로 이탈리아 여행을 하면서 이를 다시 체험한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나치즘의 역사적 배경을 일리아스에 서술된 폭력을 예로 삼아 1939년에서 1940년까지 장편의 수필인 《일리아드 또는 폭력의 시》(L'Iliade ou le poème de la force)로 정리한다. 이후 나치 독일의 군대가 체코슬로바키아의 수도인 프라하를 점령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그녀가 고수하던 평화주의에 회의를 갖는다. 나치즘이 오래 가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은 곧 바뀌게 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녀의 눈에는 공산주의가 희망이 될 수는 없었다. 오히려 프롤레타리아를 탄압하는 싸워야 할 적으로 간주한다.
1940년에 시몬은 고대 인도철학에 깊은 관심을 갖고 바가바드기타와 우파니샤드를 열심히 읽는다. 그러나 같은 해 6월에 독일군이 파리에 입성하자 베유 가족은 툴루즈를 거쳐 마르세유로의 피난길에 나선다. 피난의 와중에도 시몬은 자신의 내면적 성찰에 관한 내용을 수첩에 적었고, 그 내용이 그녀의 사후에 《카이에르》(프랑스어: Cahiers)라는 책으로 출간되었다. 시몬이 이 시기에 마니교, 그노시스의 원전과 관련 서적을 읽으면서 그리스도교의 본질과 발전에 대해 깊이 연구한다. 같은 해에 샤를 드 골이 자유 프랑스를 선언하자 이에 반대하면서도 나치 독일의 만행과 프랑스 점령에 항의하는 등의 레지스탕스 활동을 하였다. 그러나 이도 오래가지 못해 끝내 베유 가족 전체가 영국으로 망명하여 런던에 정착한다. 1942년에는 가족들과 함께 미국으로 여행을 하였고, 이때 그녀는 뉴욕을 방문하고 그곳에 큰 영감을 얻었다. 그러나 미국 여행에서 돌아온 후에 건강이 악화되었고, 결국 영양실조와 결핵으로 쓰러진 시몬 베유는 1943년에 켄트주 애시포드에 위치한 요양소에서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