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별당 건축의 한 표본으로 들 수 있으나, 구조는 비교적 간소하고 규모도 과히 크지 않다. 오른쪽 4칸이 대청이 되고 왼쪽 2칸이 온돌방인데, 전면에는 쪽마루를 깔았으며 온돌방의 벽 아래 부분에는 머름을 대었다. 주춧돌은 사각형의 귀가 높은 초석을 사용하였는데, 조선 후기의 주택 건물에서 많이 볼 수 있는 양식이다. 동춘당의 뒤쪽에는 동춘 선생이 거처하던 고택이 있고, 후손이 사는 송용억 가옥이 있다. [연락처 : 동춘당 관리사무소(042-673-6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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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류]; 설명 중“송준길 선생이 낙향하여 자신의 호를 따서 지은 별당”云은 동춘 선생의 부친 淸坐窩 宋爾昌(1561-1627)이 1610년대 초 지은 것을 동춘 선생이 1639년에 보수한 것임.
<참고문헌>;
<1>. 同春年譜; 癸未(1643년/仁祖 21)
二月立祠堂正寢及同春堂
淸坐公舊居歲久頹圮至是改構于舊基之稍北 浦渚趙相公翼作堂記 <同春堂記 => 稍東>
[2월에 사당, 정침 및 동춘당을 건립하였다. 청좌공의 옛집은 세월이 오래되어 무너져 가므로 이에 이르러 옛터의 조금 북쪽에 다시 지었다. 조 상공 익이 당기를 지었다.[참고; 堂記에는“조금 동쪽”<稍東>으로 되어 있음.]
<2>. 上浦渚趙先生 翼(癸巳/1653년)
... 先人構一堂。堗其兩楹。豁其四楹。以宜冬夏之居。丙子以後。頹壞殆甚。至癸未春。小生移建於舊基稍東近溪之地。鷄龍山在西。鳳舞山在南。皆爲堂之面目。名其堂曰同春。蓋取與物同春之義。倘蒙構惠記文。以寓戒誨之意。則謹當揭諸楣間。出入觀省。以替提耳之敎。傳示子孫。永以爲寶。敢此忘猥奉請。
[선인께서 이곳에 당 한 채를 세웠는데 두 칸에는 구들을 놓고 네 칸은 터서 넓은 대청으로 만들어 겨울과 여름으로 거처하기에 편리하도록 꾸몄습니다. 그러나 병자년 이후로 매우 심하게 퇴락하였으므로 계미년 봄에 소생이 본래 있던 곳에서 조금 동쪽으로 떨어진 개울 가까운 곳으로 옮겨 세우니 서쪽에 있는 계룡산과 남쪽에 있는 봉무산이 모두 이 당의 面目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당을 同春이라 이름 하였으니 대체로 만물과 더불어 함께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만약 경계의 뜻을 담아 기문을 지어 주신다면 삼가 楣間에 걸어 두고서 드나들 때 살피면서 직접 가르침을 받는 대신으로 삼고 또 자손에게 전하여 영원히 보배로 삼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감히 외람됨을 잊고 청해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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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옥류각의 오류; 시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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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 대전광역시 대덕구 송촌동 192
개요 : 이 건물은 조선 효종 때 대사헌, 병조판서, 이조판서를 지낸 동춘당 송준길 (1606~1672) 선생이 낙향하여 자신의 호를 따서 지은 별당으로 우암 송시열(1607~1689)이 쓴 현판이 걸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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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의 이름은 골짜기에 사시사철 옥같이 맑은 물이 흘러 내려오고 있다는 뜻으로 「옥류<玉溜>」라고 하였으며, 선생은 이곳에서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송애 김경여<松崖 金慶餘>, 창주 김익희<滄州 金益熙> 등 당시의 석학<碩學>들과 함께 학문을 연마하였다. 건물의 위쪽에 비래암 <飛來庵>이 있고 왼쪽에 있는 바위에 선생의 친필로 알려진 초연물외<超然物外>라는 글씨가 음각<陰刻>되어 있다.
옥류각은 앞면 3칸, 옆면 2칸으로, 작은 골짜기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건물의 측면으로 출입하게 되어 있으며, 「옥류각<玉溜閣>」현판은 곡운 김수증<谷雲 金壽增>의 글씨이다. 누각 안에 들어서면 낮은 난간이 돌려진 넓은 대청과 온돌방이 있으며, 마루 밑은 석축을 쌓아 그 위에 덤벙주춧돌을 두고 굵은 두리기둥을 세웠으나, 골짜기 부분에는 팔각형 주춧돌을 사용하였다.
* 담당부서 : 관광과 ☏ 042-600-2431 E-mail:tour@metro.daejeo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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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류각 설명의 오류];
<1>. 위 부분은 동춘당의 설명이고, 아래 부분은 옥류각의 설명임.
<2>.옥류각은 동춘 선생 사후 그의 문인들이 1693년에 건립.
<참고문헌>
<1>. 霽月堂 宋奎濂(1630~1709)의 文集
閣在飛來洞 洞是同春先生平生杖屨之地 先生嘗有層巖飛玉溜之句 余與少輩謀創建小閣 遂以遺句爲扁[註; 玉溜閣 創建; 崇禎紀元後 66年 癸酉/1693년/肅宗 19]
[옥류각은 비래동에 있는데 동춘선생이 평생 머물던 자취가 서린 곳이다. 선생이 일찍이 지은(丙午/1666년)‘층층 바위에 날리는 옥같은 물방울<層巖飛玉溜>’이라는 시구가 있다. 내가 젊은이들과 더불어 조그만 누각을 세우고 마침 남기신 시구(玉溜)로 현판을 삼았다.]
<2>. 송규렴의 아들 玉吾齋 宋相琦(1657~1723)의 옥류각 상량문
[飛來庵水閣上樑文; 原文省略/崇禎紀元後 六十六年 癸酉三月 日 恩津 宋相琦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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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덕문화원 자료 |
회덕 동춘당(懷德 同春堂)
* 분 류 : 보물 제209호
* 소재지 : 대전광역시 대덕구 송촌동 192
* 수 량 : 1동
* 구 조 : 정면3칸, 측면2칸의 홑처마 팔작지붕 집.
* 재 료 : 목조
* 연 대 : 1643년 (인조21)
* 개 요 : 동춘당은 계족산 등줄이 동남으로 흐르다가 또 하나의 봉우리를 만드는데 이 봉우리가 계족산 제2봉 해발 320m의 응봉산(鷹峰山)이다. 응봉산의 한 자락이 서쪽으로 뻗어 구릉을 만들어 송촌동의 배산을 형성하게 된다. 응봉산 계곡 뒤에서 발원한 샘은 윗중리 뒤로 흘러 법동천을 만들고 응봉산 계곡 앞에서 발원한 개천은 중리동(백달촌)을 지나 오정동 양지말에서 버드내와 합수하여 금강으로 빠진다. 송촌 마을에서 보면 계족산은 조산(祖山)이고, 응봉산은 진산(鎭山)이다. 옛날 회덕현에서 보면 계족산이 진산이지만 백달촌에서는 계족산이 조산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동춘당은 응봉산 자락을 등지고 남향으로 배치되어 있다. 인간이 사는 집은 무엇보다도 환경에 민감하다. 환경요인을 크게 자연환경과 인문환경으로 나누어 볼 때 동춘당에는 이와 같은 두 가지 환경요인이 극명하게 작용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뜨겁고 습한 여름 기후에 대응하기 위해 바닥을 들어올려 마루로 만들고 추운 겨울에 대응하기 위해 한쪽은 온돌로 꾸몄다. 이 두 공간은 당시 쟁쟁한 인물들이 드나들던 곳이고 지역사회의 중요한 문화 공간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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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춘당은 동춘당의 아버지인 송이창 (1561~1627)이 세웠으며, 당의 일부가 허물어지자 1643년 (인조21)송준길선 생이 38세 때 중건한 별당 건물로서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이며 5량집이다. 일각대문을 들어서면 주위는 간결하게 담으로 둘러쳐져 있고 동춘당은 뒤쪽에 저만치 물러나 앉아 있다. 마치 사랑방에 정좌하고 있는 사대부의 모습이다. 특별히 주위를 꾸미지 않았고 다만 고송을 비롯한 몇 그루의 나무만 심어져 있다. 기호학풍을 그대로 표현해 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동춘당은 평면으로 보아 전체 여섯칸집으로 우측 4칸은 대청이고 좌측 2칸은 온돌방인데 방 북측 상부에 반침을 내어 붙였다. 대청의 창호는 방쪽을 제외하고 3면 모두 띠살문으로 하였으며 그중 앞쪽과 우측은 들어열개로 했다. 이 들어열개 창호는 우리나라 건축에만 있는 독특한 것으로 이미 오래 전부터 사용되어 온 창호 형식이다. 고려 때 건물인 부석사 무량수전이나 수덕사 대웅전에서도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상당히 오래된 역사를 지닌 것이라 하겠다. 들어 열개의 창호의 특징은 한국 건축 공간이 자연과 조화를 이루려는 강한 자연동화 사상이 깃들어 있는 것이기도 하다. 이것을 들어 열음으로써 외부의 자연공간과 내부공간이 하나로 되어 내부 공간에 앉아 있지만 결코 내부공간이 아닌 자연속에 앉아 있는 것이 된다. 이처럼 동춘당의 4분합 들어열개를 모두 접어 들 쇠에 걸면 인공공간은 곧 보다 큰 하나의 공간으로 확대되어 외부의 자연공간과 일체가 되고 곧 자연인으로 동화가 되는 것이다.[下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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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타 資料의 오류
동춘당(보물 제209호-
대덕구 송촌동 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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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중기의 학자이던 동춘당 송준길선생이 지은 별당 건물이다.
비교적 간소하며 규모가 크지 않은 건물로 단아한 조선중기의 건축 양식을 잘 보여 준다 건물 정면에 1678년 우암 송시열 선생이 '同春堂' 이라 쓴 현판이 걸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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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德區史; 대덕의 문화전통<2006년 발행> 중 오류
* 동춘당
문화재 지정 보물 제209호
이 건물은 원래 동춘당 송준길(1606-1672)의 부친인 송이창(1561-1627)이 지은 별당이나, 임진왜란 후 퇴락함에 따라 송준길이 인조 21년(1643) 원래의 위치에서 동쪽으로 약간 옮겨 중건한 것이다. 조선조 효종 때 병조판서를 지낸 송준길은 관직에서 물러나 이곳에서 선비들과 교유하였다.[下略]
<1>. 임진왜란 발발 1592년-1598년까지 이므로 동춘당 건립 이전임.
<2>. 동춘당 건립이 1610년대 이므로 병자호란(1636년) 이후로 보는 것이 합리적일 것임.
* 옥류각
문화재 지정 시 유형문화제 제7호
옥류각은 동춘당 송준길이 34세 때인 인조 17년(1639) 계족산 자락 송촌에서 개울을 거슬러 올라간 계곡에 세운 중층의 정자이다. 동춘당은 여기서 우암 송시열, 시남 유계, 송애당 김경여, 창주 김익희 등 당시의 석학들과 더불어 학문을 논했다고 한다.[下略]
<1>. 동춘 사후 20여 년 후, 제월당 송규렴 및 문인들이 1693년에 건립.
<2>. 옥류각 건립 당시에는 설명 속 인물들이 모두 사망한 뒤이며, 1648년의 비래암 회동으로
고증<우암 송시열; 비래암고사기>되고 있음.[戊子九月市南兪公棨來訪仍與尤庵諸生會飛來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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