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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의 부활
봄짓이 만연하다. 긴 사순절이 지나고 부활 아침을 맞으면서 감쪽같이 봄이 도착하였다. 사순절은 봄이 오는 시간의 길목에 자리 잡고 있었다. 3월 내내 꽃샘추위로 몸살을 앓더니, 바야흐로 노란 봄꽃을 피웠다. 겨울은 봄에게 쉬이 자리를 내어주지 않는다. 몇 차례 추위가 오락가락 하다가 마지 못해 자리를 양보하는 듯하다.
가장 먼저 봄소식을 알려주는 것은 발아래 핀 꽃이다. 봄보다 먼저 피어나 봄을 전하는 작디작은 꽃들은 아주 연약해 보이지만, 누구보다 이른 시간에 언 땅을 흔들어대는 담대한 풀이며, 당당한 꽃이다. 비록 무릎을 꿇어야 볼 수 있을 만큼 낮은 키로 피었지만, 복수(福壽)초, 바람꽃, 노루귀들은 봄의 전령과 같다.
사람들의 눈으로 확인 가능한 봄꽃들은 대개 노란색이다. 산수유, 개나리, 생강나무는 모두 나팔 모양이어서 “깨어라, 깨어라”를 외치는 듯하다. 봄이 가장 먼저 올라오는 제주도는 흰 노란 수선화로 들판이 흔천하다. 얼마나 흔하디 흔한지 말이 먹는 마늘이란, 물마농으로 불린다.
몰트만은 자서전에서 어린 시절의 봄맞이를 이렇게 회고한다. “이른 봄에 우리는 부활절의 횃불을 뛰어넘으며 ‘겨울이여, 안녕’이라고 노래하였다.” 제 자리를 내어 주지 않을 것처럼 버티던 겨울이 떠난 빈자리를 마침내 봄이 차지하였다. 아직 잎샘추위가 남아 있지만, 봄은 한동안 여왕의 의자를 지킬 것이다.
봄은 꽃 마중으로만 느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봄은 하늘로부터 또 거리마다 찾아온다. 그리고 사람들의 마음 속 깊이 봄의 마법을 부린다. 따듯하고, 부드럽고, 평화롭고, 흐믓하다. 봄을 누리는 사람마다 속살속살 만족스럽다. 봄의 마법과 같다.
겨울을 깨뜨리는 것은 꽃소식만이 아니다. 봄의 새싹이 단단한 흙을 뚫고 자유의지를 선언하듯, 부활은 불신앙의 검은 벽을 깨뜨리고 온다. ‘세계의 십자가 전(展)’ 전시 작품 중에 ‘파스카의 검은 벽’이 있다. 고난의 이미지를 감히 넘지 못할 벽으로 강조한 것으로, 오스트리아인 작가는 두꺼운 검은 마분지를 찢어서 이어 붙이는 방식으로 교회 강단 전면을 가렸다. 1995년 고난주간, 독일 멜랑히톤교회 강단과 회중 사이 전면을 가로막은 퍼포먼스였다. 작가는 전시가 끝난 후 여러 조각으로 나누었는데, 한 조각 커다란 선물을 받았다.
검은 벽은 우리 안에 드러나지 않는 무언가를 들추어내려는 의도처럼 느껴졌다. 누구나 인생에서 자신만의 검은 벽을 마주한다. 엄두를 내지 못할 벽, 무력감을 느끼게 하는 벽, 좌절을 반복하게 하는 벽, 그러나 도전과 도전을 통해 마침내 극복해야 할 검은 벽이다. 그 벽을 깨뜨려야 부활의 봄과 마주한다.
세상의 모든 그리스도인은 부활주일이면 삶은 달걀을 나누며 축하한다. 삶은 달걀은 혼자 먹는 것이 아니다. 정교회 그리스도인들은 달걀을 서로 부딪치며 깨뜨리기 퍼포먼스를 한다. 굳게 닫힌 돌무덤을 깨뜨리는 부활절 놀이다. 사람들은 서로 부딪치면서 “주님의 정말 부활하셨습니다”라고 외친다. 부활 신앙은 단단하게 굳은 불안과 불신을 깨뜨려야 가능하다.
<꽃들에게 희망을>(트리아나 포올리스)이란 노란 이야기책이 있다. 그림보다 글씨가 많은 어른을 위한 동화로 1980년대의 베스트셀러였다. 나는 생일을 맞은 애인에게 선물하였다. 그래서 그 여성은 중년에 들어 부쩍 꽃을 좋아하게 된 듯하다. <꽃들에게 희망을>은 알이 애벌레가 되고 번데기가 되고 결국 나비가 된다는 이야기다. 나비가 되려면 여러 차례 자신의 낡은 껍질을 벗어야 했다.
나비는 꽃들을 찾아다니며 부지런히 희망을 배달한다. 부활의 꽃처럼 노란 그 책은 어렵고 위험한 시절을 살던 사람들에게 용기를 전해주었다. ‘절망하지 말아라, 너를 둘러싼 벽을 깨뜨려라. 그리고 네 안에 있는 잠재력, 그 희망의 씨앗을 발아하고, 싹을 틔워라.’ 부활 신앙은 내 삶의 이야기를 노랗게 물들인다. 그렇게 인생의 새봄을 맞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