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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백파] ☆ 낙동강 1300리 종주 대장정 (47)
생명의 물길 따라 인간의 길을 생각한다!
☆ [낙동강 종주] * 경상남도 구간 ③ (남강 수계) 함양
2020년 11월 06일 (월요일) [독보(獨步)]▶ 재(再) 출행
* [합천-창녕보]→ 황강 하구→ 적포교 앞(20번 국도→ 우포늪)→ 낙서초교→ 진등산 박진고개(낙동강 조망)→ 1008번 지방도로→박진로→ 박진교(낙동강)→ 창녕 박진전투기념관(남지읍 월하리)→ 다시 박진교→ 영아지길→ 청아지→ 마분산 영아지 고개(팔각정 전망대)→ 신전리(우향)→ [남지읍 용산리 낙동강 대안에서 남강 합류]→ 학계리→ [남지체육공원]→ 남지 인도교
* [함안군 대산명 장암리 ◇ 의령군 지정면 성산리] ← 서남쪽에서 ‘남강’ 합류 ←(남덕유산, 뱀사골 발원 / 경호강-진양호 경유)
남지 기음강(낙동강)에 유입되는 남강의 물줄기
창녕군 남지읍 용산리 창나리(창나루)는 낙동강 남지개비리길 입구다. 창나리에서 나무계단을 타고 산으로 올라가면 마분산(馬墳山, 말무덤산)으로 가는 산길이고, 왼쪽의 낙동강 강안을 따라가면 남지 개비리길이다. 여기 창나루 전망대에 낙동강을 바라보면 그 대안에서 남강(南江)이 낙동강에 유입되는 풍경이 한 눈에 들어온다. 마분산 계단을 올라가 청나루전망대에서 바라보이는 남강 하구, 그 우측[北]은 의령군 지정면 성산리요, 좌측[南]은 함안군 대산면 장암리이다. 이 남강이 유입되는 남강의 하구와 낙동강을 일러 이 지역에서는 ‘기음강(岐音江)’이라고도 한다.
이제, 남지읍 용산리 창나루 건너편에서 낙동강에 유입되는 남강을 거슬러 올라가 상류에서부터 기음강(낙동강)에 이르는 유역의 유서 깊은 고을[지역]의 지리, 자연 생태, 명승, 역사, 문화 그리고 이 지역이 배출한 인물에 대해 탐구해 보고자 한다. 남강이 발원하는 최상류 지역은 경상남도 함양군이고, 함양의 여러 산곡에서 흘러내려온 물줄기가 산청군에서 합수하여 ‘경호강’이라는 이름으로 남류한다.
산청군 아래에는 진양댐 건설로 인한 거대한 담수호인 ‘진양호(晉陽湖)’가 있다. 진양댐을 지나온 물줄기는 남강(南江)이라는 이름으로 동쪽으로 흘러 크게 S자를 그리며 고도 진주시(晉州市)의 중심을 휘감아 흐른다. 그리고 진주의 남강은 그 방향을 북동쪽으로 바꾸어 여러 차례 S자 굽이를 그리며 의령군(宜靈郡)과 함안군(咸安郡)의 경계를 이루며 낙동강(洛東江)에 유입되는 것이다.
이 지역은 조선시대에 경상우도(慶尙右道)로 지칭하는 지역으로 낙동강을 중심으로 경상남도 서부지역인데, 백두대간 남덕유산과 지리산의 정기와 그 산곡에서 발원하는 청정한 물이 이 지역 특유의 역사와 문화를 창조하면서 심오한 철학과 의리의 학문이 발달하였고 역사적인 인물을 많이 배출했다. 먼저 남강 상류의 함양을 시작으로 산청, 진주, 함안에 이르는 물길을 따라 탐방해 내려올 것이다.
남강(南江)
함양, 남강(南江)의 발원지
남강의 발원지는 크게 두 영역이다. 하나는 백두대간 함양 지역에서 발원하는 본류인 ‘남강천(南江川)’이고 하나는 백두대간 지리산 권역에서 발원하는 물줄기이다.
함양 권역의 남강은 함양군 서상면 상남리 백두대간 남덕유산(1,508m) 남쪽에서 발원하는 남강천 물줄기를 '남강(南江)' 본류로 본다. 이 본류에 함양군 인의면에서 '지우천'이 유입된다. 그리고 함양군 백전면 백운리 백두대간의 백운산(1,279m)의 남쪽 산곡에서 발원하하여 내려오는 '위천(渭川)'에 함양의 남쪽 삼봉산(1,100m) 죽림리 산곡에서 발원하는 '구룡천'이 함양에서 합수하여 함양군 수동면 화산리에서 남강 본류에 유입된다.
지리산 권역의 남강의 발원지는 전라북도 남원시 운봉읍 주촌리 백두대간 고리봉(1,250m) 북쪽에서 발원하는 ‘주촌천’이 운봉을 경유하여 인월에서 남원시 아영면 일대리 백두대간 봉화산(919m) 남쪽에서 발원한 ‘풍천’을 받아들여 ‘람천’이 되어 흐른다. 한편 지리산 노고단(1,400m) 북쪽, 고리봉과 반야봉 사이 심원계곡에서 발원한 ‘만수천’이 남원시 산내면 부운리에서, 화개재(지리산 삼도봉과 토끼봉 사이) 북쪽 ‘뱀사골계곡’의 물이 ‘람천’에 합류하고, 람천은 함양군 마천에서 지리산 연하천과 백무동에서 흘러내려온 ‘덕전천’을 받아들여 ‘임천’이 되어 동쪽으로 흐른 뒤, 함양군 유림면 국계리에서 함양에서 내려오는 남강 본류에 합류한다. 여기부터 진양호까지의 남강을 경호강(鏡湖江)이라고 한다.
산청 경호강(鏡湖江)
경호강(鏡湖江)은 산청군 생초면 어서리 강정에서 진주의 진양호까지 80여리(약 32km)의 물길을 이르는 말이며, 국도 3호선과 진주-함양간 고속도로가 이 경호강을 따라 나란히 이어진다. 이곳 경호강은 강폭이 넓은데다 큰 바위가 없고 굽이굽이에 모래톱과 잔돌들이 퇴적되어 있어, 유속은 빠르면서도 소용돌이치는 급류가 거의 없으며 청정하고 아름다운 풍경을 보여준다. 이 경호강이 옛 진주시의 남쪽으로 흐르기 때문에 남강(南江)으로 붙여졌으며, 임진왜란 후에는 ‘촉석강’이라고도 했다.
경상남도 산청군의 경호강은 생초(면)에서 ‘초곡천’, ‘생초천’ 그리고 오부면에서 ‘방곡천’, 산청(읍)에서 ‘송경천’, 남서(면)에서 ‘금서천’을 받아들이고 그 아래에서 ‘정곡천’이 유입된다. 그리고 산청 신안(면)에서 ‘신동천’이 합류한 ‘양천’이 유입되는데 이 양천은 남명(南冥) 조식(曺植)의 뇌룡정(雷龍亭)이 있는 합천군 삼가(면)에서 흘러내려오는 물이다. 그리고 지리산 천왕봉 서쪽 중산리·내원사에서 발원한 ‘덕천강’은 경호강 아래 진양호(晉陽湖) 서안(西岸)으로 유입된다. 덕천강은 남명 조식이 말년을 보낸 산천재(山天齋)가 있고 남명 선생을 배향하는 덕천서원(德川書院)이 있다.
진주 남강(南江)
진주 남강은, 진주종합경기장 앞에서 고성의 천왕산 북쪽에서 발원한 ‘영천강’이 유입되고, 진성(면)에서 ‘반상천’, 지수(면)에서 ‘지수천’이 북류하여 흘러들고, 의령에서 ‘의령천’-‘용덕천’이 유입되며, 함안군 군북(면)에서 ‘석교천’이 유입된다. 함안군 대산(면)에서는 ‘대산천’이 흘러들고 하류로 내려가서 의령군 지정면 두곡리에서 ‘봉곡천’과 ‘두곡천’을 받아들이고 나서, 남강은 곧 낙동강과 한 몸이 된다.
함양군 서상면 상남리 남덕유산(1,508m) 남쪽 계곡에서 발원하여 안의면·유림면, 산청군 금서면, 진주시 등지를 지나 경상남도 의령군 지정면 성산리와 함안군 대산면 장암리 경계에서 낙동강으로 흘러드는 남강은, 본류를 중심으로 장장 189㎞의 물길이다. 여기 남강이 낙동강과 만나는 곳이 이른바 ‘기음강(岐音江)’이요, 그 대안(對岸)이 창녕군 남지읍 용산리 창나루이다.
남강의 상류지역에는 운봉, 함양, 산청 등지에 내륙분지가 형성되어 지방 중심지로 발달했으며, 하류지역에는 진주평야를 비롯하여 의령·가야 등지에 충적평야가 펼쳐져 있다. 남강 유역의 연평균 강수량은 1,500㎜ 정도로 많은 비가 내린다. 예로부터 강의 하류지역에 수해가 잦았으나, 1970년 남강댐 건설로 홍수조절이 가능하게 되었고, 하류지역에 생활용수·농업용수·공업용수 및 전력을 공급한다.
강 유역에는 지리산국립공원을 비롯하여 덕유산국립공원, 지리산 대원사·실상사, 진주의 진양호·촉석루 등의 관광자원이 풍부하다. 88올림픽고속도로가 강 유역을 동서로 관통하고, 대전-통영간 고속도로가 경호강을 따라 남북으로 뻗어 있다.
함양(咸陽)
선비의 고장 함양(咸陽) ; 좌안동(左安東) 우함양(右咸陽)
* [함양군의 지리적 위치] — 함양군은 경상남도 동북쪽 백두대간 남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남쪽은 천왕봉을 비롯한 지리산 연봉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는 분지이다. 남강이 발원하는 최상류 지역으로, 함양의 동북쪽은 거창군, 동남쪽은 남강 줄기의 산청군, 서쪽은 백두대간 봉화산 너머 전라북도 남원시, 서북쪽은 백두대간 영취산-백운산 너머 장수군, 남쪽은 지리산 너머 하동군이 있다.
* [함양군의 연혁] — 삼국시대 중기까지 가야문화권에 속했으며, 백제와 신라의 경계에 위치하고 팔량치(함양과 남원의 경계)와 같은 백두대간을 넘는 교통로가 있어 7세기 초에는 백제와 신라의 세력이 맞부딪쳤던 곳이었다. 통일신라 757년(경덕왕 16) 천령군(天嶺郡)으로 개칭했으며, 고려 초에 허주(許州)로 개칭하고, 995년(성종 14) 도단련사를 두었다가 1012년(현종 3) 함양군으로 강등되었다. 조선 초인 1466년(세조 12) 함양군이 되었다. 조선 후기인 1729년(영조 5) 도호부로 승격되었다가 1788년(정조 12) 다시 함양군으로 강등되었다. 함양의 별호는 함성이었다.
* [함양군의 자연환경] — 백두대간의 남덕유산, 영취산, 백운산의 동사면에 남북으로 길게 자리 잡고 있으며, 그 지맥들이 사방을 둘러싸고 있는 전형적인 산간분지를 이룬다. 특히 북쪽에 덕유산국립공원과 남쪽에 지리산국립공원이 있는 한국의 대표적인 산악관광지이다.
북쪽으로 남덕유산(1,507m)에서 동남쪽으로 분기한 금원산(金猿山, 1,353m), 기백산(箕白山, 1,331m), 망설봉(望雪峰, 620m)이 자리하고 있고 남쪽으로는 지리산(智異山, 1,915m)을 비롯하여 제석봉(1,806m), 촛대봉(1,704m), 칠선봉(七仙峰, 1,576m) 등이 연이어 솟아 있으며, 북서쪽으로는 깃대봉(1,015m), 백운산(白雲山, 1,279m), 남쪽의 삼봉산(三峰山, 1,187m) 등 1,000m가 넘는 고산준령이 솟아 있다. 또한 군의 동부로 오면서 마안산(508m), 화장산(586m), 승안산(昇安山:309m) 등 비교적 낮은 산지들이 솟아 있다.
* [유서 깊은 함양의 유물과 유적지]
함양군에는 국가지정문화재(보물 6점, 사적 3, 천연기념물 4, 중요민속자료 2), 지방지정문화재(유형문화재 40, 기념물 10, 민속자료 2, 무형문화재 1), 문화재자료 28점이 있다.
함양(咸陽)은 안동과 함께 조선시대 영남사림의 본거지로 손꼽히던 유향(儒鄕)이다. 유교문화재로는 함양읍 교산리의 함양향교(咸陽鄕校,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25호)와 안의면 교북리의 안의향교(安義鄕校,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26호)가 있으며, 그밖에 수동면 원평리의 남계서원(藍溪書院,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91호), 청계서원(靑溪書院,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56호) 등이 있다. 주요 건축물로는 안의면 금천리의 함양허삼둘가옥(중요민속자료 제207호)과 지곡면 개평마을의 정여창고택인 함양정병호가옥(咸陽鄭炳鎬家屋, 중요민속자료 제186호)을 비롯하여 성종 때 무오사화와 관련이 있는 함양학사루(咸陽學士樓,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90호), 함양읍성의 남문이었던 함화루(咸化樓,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58호), 안의면의 안의광풍루(安義光風樓,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92호), 지곡면의 교수정(敎授亭,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76호) 등이 있다.
함양(咸陽) 지역은 백제와 신라의 격전지였고, 조선시대에는 유교가 발달했던 곳으로 문화재가 많다. 불교문화재로는 함양읍 교산리의 함양석조여래좌상(咸陽石造如來坐像, 보물 제376호), 수동면 우명리의 승안사지3층석탑(昇安寺址三層石塔, 보물 제294호), 승안사지석조여래좌상(昇安寺址石造如來坐像,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33호), 서상면 옥산리의 극락사지석조여래좌상(極樂寺址石彫如來坐像,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44호), 마천면 추성리의 벽송사3층석탑(碧松寺三層石塔, 보물 제474호), 덕전리의 함양마천면마애불입상(咸陽馬川面磨崖佛立像, 보물 제375호), 가흥리의 금대사3층석탑(金臺寺三層石塔,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34호), 안국암부도(安國庵浮屠,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35호) 등이 있다.
산성으로는 신라시대의 토성으로 서상면의 합미산성이 남아 있으며, 수동면 원평리의 함양사근산성(咸陽沙斤山城, 사적 제152호)과 서하면 봉전리의 황석산성(黃石山城, 사적 제322호) 등이 있다.
천연기념물로는 함양읍 대덕리의 함양상림(咸陽上林, 천연기념물 제154호)과 휴천면 목현리의 함양목현리의 구송(천연기념물 제358호) 등이 있는데, 함양상림은 20만 5,842㎡에 이르는 활엽수림대가 울창한 숲을 이룬다.
함양 학사루(學士樓)
경상남도 함양(咸陽)의 운림리에 유서 깊은 ‘학사루(學士樓)’가 있다. 학사루(學士樓)는 어느 때 지어졌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일설에 의하면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이 함양태수(咸陽太守)로 있을 때 창건하여 자주 올랐으므로, 학사루라 이름하였다고 한다. 통일신라시대에 지은 것으로 추정되며, 원래는 관아에 딸린 건물로서 옆에 객사가 있었고 동쪽에는 제운루(齊雲樓), 서쪽에는 청상루(淸商樓), 남쪽에는 망악루(望嶽樓)가 있었다고 전하며, 1380년(우왕 6) 왜구의 노략질에 의하여 관아와 함께 불타버렸으며, 1692년(숙종 18)에 중수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1910년경부터 함양국민학교 교사로 쓰여오다가, 1963년부터는 군립도서관으로 쓰였으며 1978년 겨울, 현재의 위치인 함양군청 정문 앞으로 옮겼다. 학사루는 정면 5칸, 측면 2칸의 2층 팔작지붕 건물로 주위에는 계자난간(鷄子欄干)을 둘렀으며,
신라의 역사서인 『국사(國史)』에 의하면 "고운(孤雲)이 벼슬을 버리고 가야산(伽倻山)에 들어갔다가, 하루아침에 관(冠)과 신을 숲 속에 벗어 버리고 훌쩍 떠나, 어디 가서 생을 마쳤는지 알지 못한다 했다. 그러므로 세상에서는 고운이 도(道)를 얻어 신선이 되었다고들 하는데, 이 고을에 있을 때를 두고 한 말이다. 고운을 사모하는 고을 사람들은 그를 사후의 호칭인 최 문창후(崔文昌侯)라 부르지 않고 반드시 생전의 호칭인 학사(學士)라 불렀으며, 관직을 떠났을 때의 이름인 고운이라 부르지 않고 반드시 그의 관직을 불렀으며, 송덕비를 세우지 아니하고 오직 누각에다 이름을 붙였다. 그러므로 누각의 이름을 학사루(學士樓)라 한 것은 그 유래가 오래되었다고 하겠다."라고 전하고 있다.
김종직(金宗直)이 함양군수 재임 때 학사루에 걸려 있던 유자광(柳子光)의 시를 철거시킨 것이,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戊午士禍)의 한 원인이 되었다는 말이 있다. 조선 초기 영남 사림파의 종사(宗師)로 명성이 높았던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 1431~1492)이 함양군수로 부임하여 학사루에 올랐는데, 그때 고향이 남원인 유자광(柳子光, ?~1512)이 함양에 놀러왔다가 써서 걸어놓은 현판을 보고, “어찌 이 따위가 여기에 시(詩)를 걸 수 있는가”라고 호통 치며 현판을 떼어 불태워 버렸고, 이 소식을 들은 유자광은 속으로 분을 삼키고 보복의 그날을 기다렸다고 한다. 유자광은 부윤 벼슬을 한 집안의 서자로 태어나 궁궐 문을 지키던 일개 갑사(甲士)였으나, ‘이시애의 반란’ 때 자청하여 싸움터에 나간 뒤부터 출세의 길을 걸었으며, 남이(南怡)장군 등을 역모로 무고해 그 공으로 군(君)에까지 올라 거들먹거린다 하여, 눈총을 받던 인물이며 학사루에서 일어난 이 현판사건은, 1498년 발생한 사림파(士林派)가 훈구파(勳舊派)에게 죽임을 당하는 무오사화의 불씨가 되었다.
학사루(學士樓)와 관련한 김종직의 시(詩)가 다. 학사루의 못가에 철쭉꽃이 활짝 피다(學士樓池上躑躅盡開)」 / 김종직
閑搜老物小園中 한서노물소환중 작은 동산에서 한가히 노물을 탐색하며
徙倚幽欄曲沼東 사의유간고소동 굽은 못 동쪽에서 그윽한 난간 기대있노니
千柄芙蕖俱已倒 천병부거구이도 천 줄기 연들은 이미 모두 사그라졌는데
兩株躑躅忽能紅 양주척촉홀능홍 두 그루 철쭉꽃은 갑자기 붉게 피었네
似從黃菊爭時令 사종황국쟁시령 마치 국화를 따라서 절기를 다투는 듯하나
可怕靑姨弄化工 가파청이농화공 서리 귀신이 조화를 희롱할까 두려웁구려
聞說神京更融煖 문설신경갱융난 들으니 서울에는 일기가 다시 따뜻해져서
桃梨櫻杏幻春風 도리앵행환춘풍 복숭아 배 앵두 살구가 춘풍에 변환했다네
남계서원(灆溪書院)
남계서원은 함양군 수동면 원천리, 남강천(남계) 앞에 있는 서원이다. 지금은 서원 앞으로 3번국도가 지난다. 남계서원은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고 지방민의 유학교육을 위하여 1552년(명종7)에 지었다. 1566년(명종 21)에 나라에서 ‘남계(灆溪)’라는 사액을 내려 공인과 함께 경제적 지원을 받게 되었다.
정유재란(1597)으로 불타 없어진 것을 1603년(선조 36)에 나촌으로 옮겨지었다가, 1612년(광해군 4) 옛 터인 지금의 위치에 다시 지었다. 숙종 때 강익(姜翼)과 정온(鄭蘊)을 더하여 모셨다. 따로 사당을 짓고 유호인(兪好仁)과 정홍서(鄭弘緖)를 모셨다. 별사는 1868년(고종 5)에 훼철되었다. 정여창을 모신 서원은 전국적으로 9곳에 이르며, 그 중 주된 곳이 남계서원이다. 소수서원에 이어 두 번째로 세워진 남계서원은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 때에도 존속한 47개 서원중의 하나이다. 2009년에는 사적 제499호로 지정되었다.
남계서원(灆溪書院)은 2019년 7월 6일, 제43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에서 16~17세기에 건립된 다른 8개 서원과 함께 오늘날까지 한국에서 교육과 사회적 관습 형태로 지속되어온 성리학과 관련된 문화적 전통의 증거이며 성리학 개념이 여건에 맞게 바뀌는 역사적 과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인정받아 '한국의 서원(Seowon, Korean Neo-Confucian Academies)'이라는 이름으로 한국의 14번째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이날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9개 서원은 소수서원(1543년), 남계서원(1552년), 옥산서원(1573년), 도산서원(1574년), 필암서원(1590년), 도동서원(1605년), 병산서원(1613년), 무성서원(1615년), 돈암서원(1634년)이다.
정여창(鄭汝昌)
정여창(鄭汝昌, 1450~1504)은 조선 성종 때의 대학자로 자는 백욱(伯勗), 호는 일두(一蠹), 수옹(睡翁)이다. 판종부시사 정지의(鄭之義)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판전농시사 정복주(鄭復周)이며, 아버지는 함길도병마우후 증한성부좌윤 정육을(鄭六乙)이다. 어머니는 목사 최효손(崔孝孫)의 딸이다. 본관은 경남 하동(河東)이나 그의 증조인 정지의(鄭之義)가 처가의 고향인 함양(咸陽)에 와서 살기 시작하면서부터 함양사람이 되었다. 자녀 균분 상속제가 지켜지던 당시에는 거주지를 옮길 때 처가나 외가로 옮겨가는 것이 그리 드문 일은 아니었다.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혼자서 독서에 힘쓰다가 김굉필(金宏弼)과 함께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서 학문을 연마하였다. 『논어』에 밝았고 성리학(性理學)의 근원을 탐구하여 체용(體用)의 학(學)을 깊이 연구하였다. 1480년(성종 11)에 성종이 성균관에 유서를 내려 행실을 닦고 경학에 밝은 사람을 구하자 성균관에서 그를 제일로 천거하였다.
1483년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8월에는 성균관 상사(上舍)의 동렬(同列)에서 그를 이학(理學)으로 추천하였다. 1486년 어머니가 이질에 걸리자 극진히 간호했으며, 어머니가 죽자 최복(衰服)을 벗지 않고 3년 동안 시묘하였다. 그 뒤 지리산을 찾아가 진양의 악양동(岳陽洞) 부근 섬진(蟾津)나루에 집을 짓고 대와 매화를 심으며 여기에서 평생을 마치고자 하였다. 1490년 참의 윤긍(尹兢)에 의해 효행과 학식으로 추천되어 소격서참봉에 제수되었으나, 자식의 직분을 들어 사양하였다.
성종은 그의 사직상소문의 끝에 “너의 행실을 듣고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행실을 감출 수 없는데도 오히려 이와 같으니 이것이 너의 선행이다.”라고 쓰고 사임을 허가하지 않았다. 그 해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예문관검열을 거쳐 시강원설서가 되었는데 이 때 정도(正道)로써 동궁(연산군)을 보도했으나 동궁이 좋아하지 않았다.
1495년(연산군 1) 안음현감(安陰縣監)에 임명되어 백성들의 고통이 부렴(賦斂, 세금을 과도하게 거두어들임)에 있음을 알고 편의수십조(便宜數十條)를 지어 시행한 지 1년 만에 정치가 맑아지고 백성들로부터 칭송을 들었다. 감사는 해결하기 어려운 옥사가 있으면 그를 만나서 물어본 뒤에 시행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판결에 의문 나는 것이 있으면 원근에서 그를 찾아와 판결을 받았다.
민사(民事)를 돌보는 여가로 고을의 총명한 자제를 뽑아 친히 교육하였고, 춘추로 양로례(養老禮)를 행하였다. 1498년 무오사화 때 종성(鍾城)으로 유배, 1504년 죽은 뒤 갑자사화 때 부관참시되었다. 중종 때에 우의정에 증직되었고, 1610년(광해군 2) 문묘에 승무(陞廡)되었다.
나주의 경현서원(景賢書院), 상주의 도남서원(道南書院), 함양의 남계서원(濫溪書院), 합천의 이연서원(伊淵書院), 거창의 도산서원(道山書院), 종성의 종산서원(鍾山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일두유집(一蠹遺集)』이 있다. 시호는 문헌(文獻)이다.
청계서원(靑溪書院)
청계서원은 조선 중기의 대학자 김일손(金馹孫)의 위패를 모신 서원이다. 경상남도 함양군 수동면에 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남계서원 바로 옆, 도보로 약 5분 거리에 있다.
원래 이곳은 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이 1495년 청계정사(靑溪精舍)를 창건하고 수학하던 곳이었으나 1498년 선생이 무오사화(戊午士禍)에 연루되어 그 해 7월 5일 이곳에서 붙들려가서 참형을 당하신 후 폐사되었다. 그러나 선생을 추모하는 영남 유림들과 관찰사 조민희(趙民熙) 등이 발의하여 1906년 정사(精舍)의 재건을 숙의하고 모금운동을 전개하였다. 1917년 남계서원으로부터 본 대지를 기증받아 묘우(廟宇)를 비롯하여 강당과 부속건물 그리고 유적비 건립을 착공하여 1921년에 준공하였다. 그 해 2월 16일 김일손 선생의 위패를 봉안하고 청계서원이라 현액 하였으며 매년 2월과 8월 중정일(中丁日)에 향사를 받드니 사후 416년 만에 비로소 선생의 확고한 사관과 유지가 찬연하게 빛을 발하게 되었다.
청계서원은 사당과 강당인 애락당, 동재 · 서재, 취도문 등 부속건물을 갖추고 있다. 또한 청계서원은 홍살문과 솟을삼문을 갖추었고, 그 외 기타 서원의 부속 건물들이 정렬해 있어 규모 면에서는 그리 작지 않으나 남계서원과 마찬가지로 학생이 기숙하는 재가 의외로 좁은 편이다.
1947년에 중수공사가 있었으며, 1983년 8월 6일 경상남도 문화재 제56호로 지정되었다. 1986년에 문화관광부에서 묘우(廟宇)를 중수하고 1987년부터 함양군에서 비각을 중수하였으며 묘우와 내삼문 및 경내 조경사업을 실시하여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김일손(金馹孫)
탁영 김일손(金馹孫, 1464~1498)은 직필의 사관(史官)이다. 무오사화로 희생되었다. 1498년(연산군 4) 최초의 사화인 무오사화(戊午士禍)가 일어났다. 스승인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사초(史草)에 실었던 것이 발단이었다. 장본인은 영남 사림파의 중심이자 사관으로 있었던 김일손(金馹孫)이었다. 사림파를 제거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활용한 훈구파의 정치 공작으로 김일손은 극형에 처해졌고, 그의 스승인 김종직(金宗直)마저도 부관참시를 당했다. 그러나 꺾이지 않았던 그의 직필(直筆) 정신은 짧은 생애에도 불구하고 후대까지도 그를 널리 기억하게 하였다.
김일손(金馹孫)은 자는 계운(季雲), 호는 탁영(濯纓), 시호는 문민(文愍)이다. 1478년 15세에 단양 우 씨와 혼인하였고 17세까지 조부에게서 글을 배웠다. 1486년 진사가 되어 식년문과 갑과에 급제하였다. 승문원 권지부정자와 정자 겸 춘추관 기사관을 역임하였으나, 진주 교수에 제수된 후 사직하고 귀향하여 운계정사(雲溪精舍)를 열고 학문에 전념하였다.
곧이어 당시 사림의 대표격이었던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 들어간 뒤, 다시 벼슬길에 나아가 승문원 주서, 홍문관 박사, 부수찬, 성균관 전적, 사헌부 장령, 사간원 정언을 거쳐 홍문관 수찬, 병조좌랑, 이조좌랑 등을 역임하였다.
1496년 문종의 비 현덕왕후의 묘인 소릉의 복위를 상소하고, 1498년 「성종실록」 편찬에 앞서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사초에 실어 능지처참(陵遲處斬)의 형을 받았다. 사후 중종 때에 홍문관 직제학, 현종 때에 도승지, 순조 때에 이조 판서에 각각 추증되었으며 목천의 도동서원과 청도의 자계서원에 각각 배향되었다.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서예가인 김현성(金玄成)의 후손이다. 현존하는 <서간문(書簡文)>은 획이 매우 교과서적이라는 특징이 있다. 초서에서 매우 정확하고 분명한 초서를 구사하였다. 작품으로 <질풍지경초부(疾風知勁草賦)>, <유월궁부(遊月宮賦)>, <취성정부(聚星亭賦)> 등이 남아 있고, 저서로는 『탁영집(濯纓集)』, 『회로당기(會老堂記)』, 『속두류록(續頭流錄)』, 등이 『속동문선(續東文選)』에 수록되어 있다. [출처] [함양 기행 10] 경남 함양군 청계서원|작성자 Amor Fati
함양 개평한옥마을
개평한옥마을은 경상남도 함양군 함양읍에서 8km 거리에 있는 지곡면에 위치하고 있으며, 지은 지 100여 년이 넘는 크고 작은 한옥 60여 채가 전통적인 분위기를 물씬 풍기며 자리 잡고 있는 마을이다. 예부터 함양은 선비와 문인의 고장으로 이름나 있는데 그 대표적인 인물이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이다. 비록 사화에 연루되어 유배되고, 다시 1504년 갑자사화(甲子士禍) 때 부관참시까지 당하기는 했지만 성리학사에서 김굉필, 조광조, 이언적, 이황과 함께 ‘동방 5현’으로 칭송되는 인물이다.
이곳 개평한옥마을에 일두 정여창'의 생가인 '정여창 고택' 또는 '일두 고택'이라 부르는 정여창 생가가 있다. '정여창고택'은 1570년 정여창 생가 자리에 지어진 이후 후손들에 의해 여러 번 중건 되었다. 현재 민속자료 제186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유적으로서의 명칭은 문화재 지정 당시의 건물주 이름인 '함양 정병옥 가옥'으로 되어 있다. '정여창 고택', '일두고택', '정병옥 가옥'은 모두 같은 곳이다.
개평한옥마을이 있는 지곡면에 들어서면 '함양 일두고택'이라는 커다란 간판이 보이고, 그 아래로 '오담고택', '하동정씨고가', '노참판댁고가' 등 의 표시가 보인다. 고풍스러운 고택도 여러 채 있어 비교적 마을 규모가 큰 개평한옥마을은 풍수지리설에 따르면 배 형상을 띄고 있는 마을 형태 때문에 우물을 만들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개울길을 따라 마을길에 들어서면 왼편으로 마을의 전설을 확인하게 해주는 ‘종바위’가 우물과 우울자리의 위치를 표시해주고 있는데 마을에서는 다섯 개의 우물 외에는 일절 우물을 만들지 않았다고 한다. 실제로 일본 강점기 때 이곳에 초등학교를 세우면서 새로 우물을 판 이후로 마을이 기울었다고 한다.
일만 제곱미터의 넓다란 대지위에 자리하고 있는 '일두고택'은 명당지로 소문나 있으며, 전형적인 경상도의 양반집 형태를 보여주고 있는데, 솟을대문을 비롯하여, 행랑채, 사랑채, 안채, 곳간, 별당, 사당 등이 자리하고 있다. 특히, 이곳 '일두고택'은 TV드라마인 '토지'에서 최참판댁의 촬영 장소로 알려진 곳이다. 솟을대문에는 다섯 명의 효자와 충신을 배출했음을 알리는 5개의 '정려'를 게시한 문패가 걸려 있고, 솟을 대문을 지나 바로 정면에 보이는 사랑채에는 흥선대원군이 썼다고 하는 '忠孝節義'와 김정희의 글씨라고 하는 '百世淸風'이라는 커다란 글씨가 걸려 있으나 고증은 안 된 상태이다. 사랑채에서 일각문을 지나 안채로 들어가면 안채의 대청마루 뒤로 사당 건물을 볼 수 있다. 안채 뒤편으로 사당 외에 별당과, 안사랑채가 따로 있다.
개평한옥마을은 14세기에 경주김씨와 하동 정씨가 먼저 터를 잡았고, 15세기에 풍천 노씨가 들어와 살기 시작 했다고 한다. 현재 마을에는 대부분 풍천 노씨와 하동 정씨가 살고 있다. 개평한옥마을은 530년 전통의 가양주인 지리산 ‘솔송주’가 유명하다. 하동정씨 문중에 대대로 내려온 솔잎으로 담그는 솔잎술로 1997년 후손들에 의해 복원, 개발되어 판매되고 있다. 개평한옥마을의 골목길은 골목마다 종가와 고가가 자리하고 있다. 1880년에 지어졌다는 하동정씨고가, 1838년에 지어진 오담고택, 또, 풍천노씨 대종가 등 골목길을 따라 걷다보면 전통 가옥들이 보인다.
[문화재 지정] ☞ 개평마을 [일두정여창묘역] 경상남도 기념물 제268호(2008.02.05 지정), [일두정여창선생사당비]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239호(1997.01.30 지정)
함양 팔경(咸陽八景)
푸른 산 맑은 물을 자랑하는 아름다운 고장이 함양(咸陽)이다. 함양팔경은 [제1경]은 우리나라에서 역사적으로 가장 오래된 상림의 사계절 풍경인 ‘상림사계(咸陽上林)’, [제2경]은 장엄한 지리산을 조망할 수 있는 ‘금대지리(金臺智異)’, [제3경]은 용추계곡과 기백산의 빼어난 경치가 있는 ‘용추비경(龍湫秘境)’, [제4경]은 농월정, 동호정, 거연정과 계곡 경치, 남계서원, 청계서원과 연계하는 선비문화의 ‘화림풍류(花林風流)’, [제5경]은 지리산 칠선계곡의 경치와 화살과 같이 빠르게 굽이쳐 흐르는 물인 ‘칠선시류(七仙矢流)’, [제6경]은 벽송사와 서암정사의 고즈넉한 풍경과 경이로운 석불의 ‘서암석불(西庵石佛)’, [제7경]은 남덕유산 아래로 펼쳐지는 구름바다의 신비로움이 있는 ‘덕유운해(德裕雲海)’, [제8경]은 백운사으로 부터 대봉산까지 이어지는 봄 철쭉의 아름다움인 ‘대봉철쭉’이다.
★ [제1경] 함양상림(咸陽上林) — 혹은, 상림사계(上林四季)
함양읍의 서쪽을 흐르고 있는 위천(渭川)가를 따라서 조림한 호안림(護岸林, 제방의 보호를 위한 숲)이다. 상림(上林)은 신라 진성여왕 때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이 함양태수로 있을 때에 조성한 숲이라고 한다. 당시 위천은 함양읍의 중앙을 흐르며 매년 홍수의 피해가 심했으므로, 최치원은 농민을 동원하여 둑을 쌓고 강물을 지금의 위치로 돌리고 그 둑을 따라 나무를 심어서 지금의 숲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대관림(大館林)이라고 하여 잘 보호 관리하였으나 중간이 파괴되어 상림과 하림으로 갈라졌으며 하림은 마을이 형성되었다. 상림의 아름다움은 봄의 신록(新綠), 여름의 녹음(綠陰), 가을의 단풍(丹楓), 겨울의 설경(雪景)이 아름답다. 그래서 ‘상림사계’라고도 불린다. 상림 속의 오솔길, 그 둑을 따라가면 120여종의 나무들이 청정 숲을 이루고 있다. 천연기념물 제154호.
★ [제2경] 금대지리(金臺智異)
금대지리는 경상남도 함양군 함양읍 마천면과 전라북도 남원시 산내면에 걸쳐 있는 ‘삼봉산’을 말한다. 해발 1,186m 삼봉산은 최고의 지리산 조망처이다. 금대암(金臺庵)에서의 장엄한 지리산(智異山) 조망이 펼쳐진다. 그래서 ‘금대지리(金台智異)’라고 한다. 동서로 길게 놓인 이 산은 북사면으로 많은 계류가 흘러내리고 북쪽 상산과의 사이에 좁은 계곡이 동서로 놓여 함양읍으로 통하는 통로가 되고 있다. 남서 사면에는 단진암, 백장암 등 여러 암자가 있고 삼림이 울창하다. 봉우리가 셋으로 되어 있어 삼봉산이라고 한다. 삼봉산을 넘어 지리산으로 가는 길목에 ‘오도재(悟道재)’가 있다.
★ [제3경] 용추비경(龍湫秘境)
용추계곡은 남덕유산 남쪽 월봉산-거망산과 금원사-기백산 사이의 계곡의 빼어난 경치를 말한다. 맑은 계곡과 울창한 원시림이 있고 용추폭포(龍湫瀑布)가 있다. 용추계곡의 깊은 곳에서 모이고 모여서 이루어진 큰 물줄기가 용소(龍沼)로 떨어지는 장관을 연출하고 있다. 소로로 따라 올라가면 수정처럼 맑은 물이 조용히 흐르고 주변계곡의 절경이 몸과 마음을 자연에 동화시키고 만다.
★ [제4경] 화림풍류(花林風流)
예로부터 ‘좌안동 우함양’이라 했다. 함양은 안동에 버금가는 선비의 고장이다. 일찍이 묵향의 꽃이 핀 함양에는 사대부들의 학문과 문화가 만발했고, 동천(洞天) 중의 동천이라 할 수 있는 안의삼동(安義三洞)이 위치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정자가 즐비하게 들어서 있는 화림동은 함양 유림의 선비문화를 고스란히 간직한 동천이다.
화림동은 안의(安義)에서 장수(長水) 방향으로 난 육십령 고개를 거슬러 올라가는 계곡을 일컫는다. 화림동계곡은 골이 넓고 물의 흐름이 완만하다. 청량하고 풍부한 물줄기는 계곡의 만을 감아 돌면서 이곳저곳에 작은 못을 만든다. 더러는 너럭바위를 유연하게 타고 넘기도 하고, 하얀 포말을 일으키며 못으로 떨어지기도 한다. 화림동계곡은 정말 아름답다. 맑은 물과 너른 암반, 기암괴석과 늙은 소나무 숲이 어우러져 있고, 아름다운 승경이 절정을 이루는 곳마다 정자들이 연이어 자리하고 있다. 자연과 더불어 요산요수하며 음풍농월을 즐기던 함양의 선비들이 맑은 계곡과 수정 같은 옥수를 놓칠세라 건립한 정자다. 이러한 정자들은 주위의 자연과 조화를 이뤄 마치 수채화 같은 풍경의 연계 경관을 형성한다.
화림동 계곡은 해발 1,508m의 남덕유산에서 발원한 금천(남강의 상류)이 서상(면)-서하(면)를 흘러내리면서 계곡에 기이한 바위와 담(潭)·소(沼)를 만들고 농월정에 이르러서는 반석위로 흐르는 옥류와 소나무가 어우러져 무릉도원을 이루고 있는 곳으로 장장 60리에 이른다.
달을 희롱한다는 농월정과 배현경의 경모정, 장만리의 동호정, 방생의 차일암, 정여창의 거연정, 구름다리인 화림교 등이 있다. 선비와 정자들의 문화가 이곳에 있다. 계곡의 빼어난 절경과 함께 양반들의 풍류를 느껴볼 수 있는 곳이다. 그리고 안의(安義)를 지나 남계서원, 청계서원과 연계하는 선비문화를 찾아볼 수 있는 곳이다.
▶ 함양 농월정(弄月亭)
농월정(弄月亭)은 조선 중기의 학자인 지족당(知足堂) 박명부(朴明榑, 1571~1639)가 세운 정자로, 조선조 광해군 때 영창대군의 죽음과 인목대비 유배의 부당함을 간언하다 파직되자 낙향하여 은거하다, 인조반정 후 예조참판(禮曹參判), 한성좌윤(漢城左尹), 도승지(都承旨) 등을 지내고, 1637년 이곳에 농월정을 짓고 은거하며 후학을 가르쳤다고 한다.
농월정은 "달 밝은 고요한 밤에 암반 위 냇물에 비친 달빛을 한잔 술로 희롱한다"는 이곳은 정자 앞 널찍한 달바위와 어우러진 풍광이 아름다워 수많은 관광객이 찾는 함양의 대표 명소였으나 지난 2003년 화재로 소실됐다. 이후 함양군과 밀양 박씨 문중이 주동이 되어 ‘선비의 고장’ 함양 정자의 진수인 ‘농월정’이 12년 만인 2015년 8월에 복원되었다. 안의에서 약 4km 올라간 계곡에 있다.
농월정(弄月亭)은 수많은 반석들로 가득 차 있다. 이들 수많은 너럭바위 위를 혹은 옆을 쉴 새 없이 흐르는 투명한 물이 가히 옥류를 이룬다. 정자 앞 오른쪽 암반에는, ‘知足堂 杖銶之所’(지족당장구지소)"라고 붉은색의 크게 쓴 암각서가 있다. ‘지족당(知足堂) 박명부가 지팡이를 짚고 소요하며 산책하던 곳’이라는 의미이다.
농월정 가까이에 황암사 라는 사당(祠堂)이 있는데 이는 정유재란 때 황석산의 산성(山城)에서 왜군과 싸우다가 장렬히 순직한 인근의 주민들과 관군들의 넋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되었던 사당이다. 함양군에서 2001년도에 복원하였다. 조상들의 순국정신에 머리가 숙여지는 곳이다
▶ 함양 경모정(景慕亭)
농월정에서 계곡을 따라 2km 정도를 올라가면 서하면 호성마을의 경모정(敬慕亭)이 있다. 고려의 개국 공신으로 태조를 도와 후삼국을 통일한 무열공 배현경의 후손인 계은 배상매가 조선 영조시대에 산청에서 이 곳 함양군 서하면 호성마을로 이사를 와 후학을 가르치며 쉬던 곳으로 후손들이 이를 추모하기 위하여 1978년에 이정자를 건립하였다.
▶ 함양 동호정(東湖亭)
동호정은 함양군 안의면에서 26번 국도를 따라 장수방향으로 7km 상류의 계곡에 있다. 동호정은 남강천 담소(潭沼)중의 하나인 옥녀담(玉女潭)에 있으며 화림동 계곡의 정자 중 가장 크고 화려하다.
동호정(東湖亭)은 임진왜란 때 선조의 의주 몽진(蒙塵)을 도와 공을 세운 동호 장만리(章萬里)를 기리기 위해 그의 9대손인 가선대부 오위장을 지낸 장재헌 등이 중심이 되어 1895년 건립한 정자이며 1936년에 중수가 있었다. 후일 선조가 그 충절을 가상히 여겨 정려를 명하였으며 황산마을 입구에 정려비각(旌閭碑閣)이 있다.
장만리 선생은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인 서하면 황산마을에 내려와 지금 정자가 있는 곳에서 낚시를 즐겼다고 한다. 그리고 그 후손들은 선생이 즐겨 찾았던 그 물가에 정자를 세운 것이다. 바위와 짙푸른 숲, 여유 있게 흐르는 물줄기가 평온한 기운을 내뿜는다. 정자에 올라 바라보는 물과 너럭바위와 물 건너 숲의 풍경이 한가로우면서도 풍요롭다. 강 가운데에는 노래 부르는 ‘영가대’, 악기를 연주하는 ‘금적암’, 술을 마시며 즐기던 ‘차일암’이 있고, ‘차일암’은 수백 평의 널찍한 암반으로 물소리를 벗하여 풍류를 즐기던 곳이었다.
천연의 평탄한 암반위에 조성하여 초석은 쓰지 않았고, 기둥은 모두 원주를 사용하였는데 누하주(樓下柱)는 직경이 큰 재목을 틀어지거나 울퉁불퉁한 채로 대강 다듬어 사용하였다. 마루위의 기둥은 하부에 4각형으로 모를 줄인 초석형태의 부재를 사용하였다. 4면의 추녀 끝부분에는 활주를 세워 건물의 안정감을 높혔고 기둥위에는 2익공계의 공포로 장식을 하였으며 창방과 처마도리 장혀 사이에는 원형의 화반을 끼워 장식하였다. 겹처마에 팔작지붕형식이다.
동호정은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로 세워진 단동의 중층 누각건물이다. 내부에는 배면의 중앙 칸을 막아 구성한 판벽이 남아 있는데, 거연정과 마찬가지로 방을 들였던 것으로 보인다. 정면의 좌측으로 통나무를 깎아 만든 계단을 두어 누로 오르게 하였고, 4면 모두 기둥의 바깥쪽으로 약 30cm 정도를 연장하여 계자난간을 둘렀다. 마루는 장마루가 깔려 있는데, 이것도 원래는 우물마루였다고 한다.
동호정 천장에는 화려한 그림이 그려져 있는데 눈에 띄는 것은 물고기를 입에 물고 있는 용의 조각이다. 보통 용 그림이나 조각을 보면 여의주를 물고 있는 데 이곳의 용은 물고기를 물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 함양 거연정(居然亭)
동호정에서 1km 상류에 또 하나의 선경(仙境)이 눈앞에 펼쳐진다. 거연정(居然亭)이다. 고려 말 전오륜의 7대손 가선대부 동지충추부사를 지낸 화림재(花林齋) 전시서(全時敍)가 처음 ‘억새로 정자[草亭]를 지어 지내던 곳이다. 1640년(인조 18)경 그는 서산서원을 짓고 거연정의 위치에 억새로 만든 초정을 처음 지었다. 화림교 앞에 세워져 있는 ‘花林齋全公遺墟碑’(화림재전공유허비)에는 “옛 안의현 서쪽 화림동에 새들마을이 있으니 임천(林泉)이 그윽하고 깊으며 산수(山水)가 맑고 아름답다. 화림재 전공(全公)이 세상이 어지러워 이곳에 은거했다”라고 쓰여 있다.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서산서원은 훼철되었다. 지금의 정자는 1872년 전시서의 7대 손인 진사 전재학·전계진이 억새로 된 초정(草亭)을 철거하고, 서산서원의 재목으로 거연정(居然亭)을 중수해 오늘에 이르렀다.
화림동계곡을 흐르는 남강천 암반 위에 건립된 거연정은 매우 특별한 형태를 보여준다. 거연정은 화림교(花林橋)를 건너야만 진입할 수 있다. 화림교는 무지개다리, 즉 홍교(虹橋)다. 아치형 다리를 뜻하는 오교(吳橋)라 하기도 한다. 화림동계곡의 한가운데 위치한 거연정은 계곡의 기암과 주변의 노송이 함께 조화를 이루어 매우 아름답다.
정자는 계곡 가운데 있는 넓고 편평한 큰 바위 위에 세워졌는데 굴곡이 심한 천연 암반의 형태를 그대로 활용하기 위해 정자의 아랫부분은 주추를 놓고 그 위에 기둥을 세웠다. 앞면 3칸 옆면 2칸 규모의 2층 누각건물이다. 내부에는 벽체(뒷벽)를 판재로 구성한 판방을 1칸 두고 있는 유실형(有室形) 정자다. 겹처마에 합각지붕 형식으로 하천내의 자연암반 위에 조성된 정자 건물로 주변의 뛰어난 경관과 멋진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으로, 이름 그대로 ‘내가 자연에 거하고, 자연이 나에게 거하니” 세상일을 잊게 하는 곳이다. 함양 지역의 정자 중에서도 으뜸으로 꼽히는 곳으로 명승 86호로 지정되어 있다.
거연정은 우리나라 별서정원의 전통적 형식인 계원(溪園)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창덕궁 후원의 옥류천, 담양의 소쇄원, 보길도의 부용동 정원처럼 계곡 주위에 정자와 더불어 약간의 정원 시설을 조성한 이러한 고정원이 계원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그러나 이러한 계원의 원형은 정자다. 별서는 본래 아름다운 산수 속에 자리한 소박한 정자로 거연정이 계원의 원형이라 할 수 있다. 또한 거연정을 비롯해 화림동계곡에 줄지어 있는 정자들은 각각의 작은 계원을 계속 연결하고 있어, 화림동천을 거대한 하나의 계원으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 함양 군자정(君子亭)
군자정(君子亭)은 조선 성종 때의 성리학자이며 조선5현의 한분이신 정여창(鄭汝昌, 1450~1504) 선생을 추모하기 위하여, 후세 사람들이 세운 것으로 선비들이 계곡을 끼고 앉아 시문을 주고받았던 곳이다 이곳 경상남도 함양군 서하면 봉전리는 정여창(鄭汝昌)의 처가가 있던 마을로, 정여창이 처가에 갔을 때에는 현재 군자정이 세워진 유영대에 자주 들렀다 한다.
군자정은 정선 전씨(旌善全氏) 입향조인 전시서(全時敍)의 5대손 전세걸, 전세택이 정여창 선생을 기리기 위해 1802년 건립한 누정(樓亭)으로, 건립 후 몇 차례의 보수가 있었으나 그 내용은 알 수 없다. 봉전리 마을 앞으로 흐르는 남강천변 암반 위에 세워져 있으며 고려시대에 처음 건립된 정자로 알려진 거연정(居然亭, 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433호)으로부터 약 150m 정도 떨어져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이나 정면의 주칸을 5자, 측면의 주칸을 4자 정도로 잡아 규모는 작은 편이다. 군자정 역시 천연의 암반위에 단동(單棟)으로 세운 중층 누각건물로서, 내부에는 방을 들이지 않고 모두 틔워 놓았다. 정면의 우측으로 판재로 만든 계단을 두어 누로 오르게 하였고, 4면 모두 기둥의 바깥쪽으로 약 15~18cm 정도를 연장하여 계자난간을 둘렀다. 마루는 장마루가 깔려 있는데, 이것도 원래는 우물마루였으나 후에 변형된 것으로 현재 함양군에서 원형복구를 추진 중에 있다.
그밖에도 서하면에서 백전으로 넘어가는 계곡의 수많은 절경과 서상면의 부전계곡, 남덕유산자락의 영각사, 덕유교육원등 수없이 관광명소가 많아 1년 내내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 [제5경] 칠선시류(七仙矢流)
지리산 천왕봉 북면의 깊은 골짜기인 칠선계곡(七仙溪谷)의 경치가 아름답고 계곡물이 화살과 같이 빠르게 굽이쳐 흐른다고 해서 칠선시류(七仙矢流)라고 한다. 칠선계곡은 칠선이 노닐었다는 지리산(智異山)의 대표적인 계곡으로 험난한 산세(山勢)와 수려한 경관(景觀), 그리고 지리산의 원시림(原始林)을 그대로 지니고 있다. 계곡의 길이가 18km이며 7개의 폭포수와 33개의 소를 가지고 있는 계곡이다. 칠선계곡을 통하여 천왕봉에 오르는 등산은 지리산 국립공원에 예약을 해야 가능하다.
★ [제6경] 서암석불(西庵石佛)
벽송사(碧松寺)와 서암정사(西庵精舍)의 고즈넉한 풍경과 경이로운 석불(石佛)이 있는 곳이다. 칠선 계곡의 초입의 산중턱에 있다. 서암은 인근 벽송사의 암자이나 사찰의 역사와 규모에서는 벽송사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방문객이 많이 오는 곳이다. 바위로 뚫어 만든 대방관문(大方關門)이란 문을 지나 석굴법당(石窟法堂)에 들어서면 불상은 말할 것도 없이 벽이며 천장까지도 섬세한 조각들로 가득 차있다. … 함양 지리산 서암정사로 들어가는 석주문(石柱門)에 석주에 새겨진 주련이다.
百千江河萬溪流 백천강하만계류 백천 강물 만 갈래의 시내로 흘러
同歸大海一味水 동귀대해일미수 바다에 돌아가니 한 물맛이네
森羅萬象各別色 삼라만상각별색 삼라만상이 온갖 가지가지 모양이여
還源元來同根生 환원원래동근생 근원으로 돌아가니 원래 한 몸이라
서암정사의 백미인 석굴법당(石窟法堂). 극락으로 통하는 안양문(安養門)을 여는 순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바닥을 제외한 전 사방과 천장 암벽에 아미타부처님을 비롯한 8부신중과 10대 제자가 빼곡하게 자리하고 있고, 구름을 타고 가는 비천상과 10장생도 보는 이로 하여금 환희심에 젖게 한다. 조각된 상을 가져와 짜 맞춰 놓은 게 아니다. 사천왕상처럼 자연석에 하나하나 다 조각을 한 것이다. 원응 스님의 원력에 힘입어 석공 홍덕희 거사가 11년 동안 햇빛도 거의 보지 못한 채 불력으로 조성한 석굴법당이다. 석공의 솜씨를 형언할 길이 없다. 그저 압도될 뿐이다.
서암정사의 역사는 인근에 위치한 벽송사부터 시작된다. 원응스님이 벽송사와 인연이 닿은 건 1961년. 출가 후 화두 하나에 온 몸을 던졌던 스님은 예기치 않은 늑막염으로 고생하다 결국 정진을 잠시 멈췄다. 몸부터 추스르고자 부산 선암사를 떠나 지리산 이 곳 저 곳을 다니다 벽송사로 발길이 닿았던 것이다. 당시 벽송사는 폐허로 변해 있었다. 6·25전쟁 당시만 해도 인민군 야전병원으로 사용된 사찰이다. 인민군 유격대와 군경간의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으니 벽송사는 물론 그 주변 역시 황망하기 그지없었다. 그 후 40여년에 걸친 불사 끝에 사격을 갖췄다.
★ [제7경] 덕유운해(德裕雲海)
함양의 북쪽 남덕유산 아래로 펼쳐지는 구름바다의 신비로움을 말한다. 남덕유산은 지리산 다음으로 넉넉하고 덕이 있다고 하여 덕유산(德裕山)이라고 하고 덕유산의 연봉들이 남쪽 끝자락에 위치한다고 하여 남덕유산이다.
★ [제8경] 대봉철쭉
백운산은 전북 장수군 반암면과 경남 함양군 백전면에 이르는 산이며 백운산으로부터 경남 함양군 서하면과 병곡면에 걸쳐있는 대봉산까지 이어지는 봄 철쭉의 아름다움을 이야기 한다.
백두대간이 품은 함양(咸陽)
유서 깊은 안택길지 함양은 백두대간이 품고 있는 고을이다. 저 동쪽의 김천의 황학산-대덕산에서 넘어온 백두대간이 무주의 덕유산을 이루어, 향로봉(1,614m)을 주산으로 한 거대한 산체가 중봉-동업령-무룡산-삿갓봉을 경유하면서 장장 15km의 산줄기가 줄기차게 남하(남서향)하여 남덕유산(1,507m)에 이른다. 남덕유산은 함양군의 최북단에 있는 백두대간의 산이다.
백두대간은 남덕유산(1,507m)에서 서남향으로 계속 이어져 내리는데, 경상도와 전라도의 경계를 이루면서, 육십령(함양군과 장수군과의 경계)-영취산(1,076m 금남·호남정맥 분기)-백운산(1,279m)-월경산-전라북도 남원의 봉화산(919m)-고남산-여원재를 경유하여 지리산 영역인 고리봉-정령치-만복대-성삼재로 이어진다.
백두대간은 성삼재에서부터 거대한 산줄기가 동쪽으로 이어지는데, 성삼재-노고단(1,507m)-피아골 갈림길-삼도봉-화개재(뱀사골 갈림길)-토끼봉-명선봉(연하천 대피소)-삼각봉-형제봉-벽소령(대피소)-덕평봉(1,522m)-칠선봉-영신봉(1,652m, 세석평전대피소, 낙남정맥 분기)-촛대봉(1,704m)-연하봉-장터목(대피소)-제석봉-지리산 정상 천왕봉(1,915m)에서 하늘에 맞닿고, 계속 동북쪽으로 이어지는 산줄기는 왕등재-밤머리재(59번 도로)를 지나 산청의 웅석봉을 마지막으로 남강에 임한다. 이렇게 함양은 북쪽-서쪽-남쪽으로 백두대간이 휘감아 품고 있는 안택길지의 고을이다.
한편 백두대간 남덕유산에서 동남향으로 분기하는 산줄기는 월봉산(1,281m)-금원산(1,353m)-기백산(1,331m) 지맥이 동쪽의 거창군(居昌郡)과 경계를 이루면서 남하한다. 이 산줄기는 계속 남하하여 산청군(산청군)과 동쪽의 합천군(합천군)과 경계를 이루는 황매산(1,113m)에 이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함양은 북쪽의 남덕유산을 중심으로 그 서쪽과 남쪽에는 백두대간이 대붕(大鵬)이 알을 품듯 함양을 끌어안고 있는 형국이고, 함양의 동쪽은 기백산 줄기가 거창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그리고 이 백두대간과 기백산 지맥 사이의 모든 산곡에서 발원하는 청정한 물이 함양(군)에서 합수하여 남강의 본류를 이루어 남하하는 것이다. 함양의 남강천(南江川)이 산청에 이르러 경호강(鏡湖江)의 이름으로 흐르다가 진주 남강(南江)이 된다.
* [함양의 추억] — 지리산, 백두대간의 산군을 오르는 거점인 함양
나에게 있어서 함양(咸陽)은, 이 지역의 고산거봉을 등산할 때, 늘 산행의 거점이 되는 곳이다. 특히 함양을 기점으로 하여 지리산 천왕봉(1915m)에 오르는 경우, 칠선계곡이나 백무동계곡(-장터목산장)이나 한신계곡을 들어갈 때 함양을 거치게 된다. 서울에서 백무동 입구까지는 직행고속버스가 있다. 그리고 산청의 대원사 계곡이나 산청의 중산리 계곡(-법계사)에서 지리산 천왕봉을 오르고 나서 백무동 계곡으로 하산하는 경우에 함양이 그 안착지가 되었다. 지리산을 들어갈 때마다 수없이 찾은 곳이 함양이었다.
2012년 봄에는 함양을 경유하여 지리산을 조망하는 함양의 오도재-삼봉산(1,187m)을 올랐고, 2013년에는 함양의 백운산(1,279m)을 올랐으며, 2014년 12월에는 함양의 영각사에서 남덕유산(1,507m)에 올라 백설의 눈꽃산행을 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2016년 한여름에는 무룡고개에서 금남·호남정맥이 분기하는 영취산(1,187m)을 오르기도 했다. 이어서 영취산에서 분기한 장수의 장안산(1,237m)을 오르기도 했다.
2018년에는 거연정이 있는 화림계곡에서 시작하여 함양의 황석산성-황석산(1,190m)-거망산(1,184m)을 종주하고 함양8경의 하나인 용추폭포-용추계곡으로 하산하기도 했다. 남강의 최상류의 산중도시 함양은 참으로 환경적으로 아름답고 청정하기 그지없는 곳이기도 하지만, 영남 사림의 한 축을 이루는 고절한 학문(學問)과 아름다운 정자 문화가 발달하고, 선비들의 그윽한 풍류(風流)가 깃들어 있는 곳이다. …♣ <계 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