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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28일(火 , 음력 9월 30일) 교정의 날, 저축의 날
[1903년] 황성기독교청년회 발족
1903년 10월 28일, ‘황성기독교청년회’가 정동유니온클럽에서 창립 총회를 열었다. 105년 전 오늘, 참석자들이 헌장 초안에 만장일치로 서명함으로써 서울 YMCA가 첫발을 내디딘 것이다. 창립 첫 회원은 미국․영국 등 6개국 37명으로 구성했다. 청년회 설립은 1899년 기독청년 150여명의 서명을 받아 언더우드․아펜젤러가 한국 YMCA 창설을 촉구하는 서한을 북미 YMCA 국제위원회에 제출한 것이 계기가 됐다. 설립 초기, 고종은 청년회를 독립협회의 만민공동회와 유사한 정치단체로 생각해 내심 불안하게 생각했으나 곧 오해가 풀려 1908년 종로의 현 위치에 회관이 개관될 때는 황태자를 보내 축하해 주었다.
한국 사회에서 ‘청년’이란 말은 ‘청년회’가 처음 사용한 말이었는데 다른 단체가 너도나도 자기 명칭으로 삼으려 하자 청년회가 그 말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정부에 진정서를 내는 해프닝도 있었다.
청년회는 선교활동에 힘을 쏟고 농구․스케이팅․배구 등 근대 스포츠를 도입하는 것 못지않게 민족 독립운동에도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1906년 도쿄에 설립된 한국 YMCA는 2․8독립선언의 도화선이 됐고, 3․1운동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9명이 YMCA와 관계있는 인물이었다.
[1844년] 영국의 윌리엄즈, YMCA 창설
YMCA(Young Men's Christian Association)는 세계적인 기독교 평신도 운동단체로서 1844년 6월 영국 런던의 히치콕로저스 상점의 점원이던 조지 윌리엄스(Williams, George, 1821?~1905)가 12명의 청년들과 함께 산업혁명 직후의 혼란한 사회 속에서 젊은이들의 정신적·영적 상태의 개선을 도모하고자 설립하였다.
그후 유럽 각국으로 급속히 전파되어 1855년 프랑스 파리에서 세계 YMCA 연맹(The World Aliance of YMCAs)을 결성하였다. 제1·2차 세계대전을 치르면서 전쟁포로를 위한 사업과 난민구호 사업을 펼쳤다. 1955년 YMCA 창립 100주년을 기념하여 주체성 재확립을 위한 노력을 다짐하였고, 1973년 우간다 캄팔라 세계대회에서 캄팔라 원칙을 채택하여 YMCA의 새로운 시대적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사회적 관심과 책임을 강조하였다.
회원들은 YMCA 운동의 정신인 독일 경건주의에 따라 정신적 각성, 만인사제론에 입각한 평신도성의 자각, 선교에 대한 정열과 기독교 정신으로의 일치를 기본 원칙으로 하여 봉사정신을 발휘하고 있다. 제3세계 나라들로도 확장되어 2001년 현재 세계 120여 개국에 1만여 조직과 회원 3,000만 명, 지도자 70여만 명이 있다. /naver
[2005년] 국립중앙박물관 이전 개관
국립중앙박물관이 광복 60년 만에 경복궁 시대 막을 내리고 서울 용산에서 새롭게 문을 열었다. 국립중앙박물관은 28일 오전 10시 노무현 대통령 내외를 비롯한 각계 인사,주한 외국 대사들, 외국 주요 박물관 관계자 등 5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개관식을 갖고 역사적인 개막을 알렸다.
노 대통령은 축사에서 "국립중앙박물관이 광복 이후 여섯 차례나 이전해야 했던 안타까운 역사는 이제 막을 내렸다"고 선언했다. 노 대통령은 이어 "이곳(용산)은 지난 한 세기 동안 청나라와 일본,그리고 미국의 군대가 번갈아 주둔해왔던 곳"이라며 "이제 머지않아 미군기지가 이전하면 민족역사공원이 들어서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노 대통령은 또 "정부는 문화와 문화산업 발전에 집중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며 "문화관광산업 육성 계획을 차질 없이 추진해 2010년까지 세계 5대 문화산업 강국과 외래 관광객 1000만명 시대를 실현할 것"이라고 밝혔다.
지상 6층,지하 1층에 건물 길이 4004m가 넘는 새 박물관은 규모면에서 동양 최대이며 세계에서 여섯 번째다. 개관식에 이어 일반 관람객이 몰려들어 오후 내내 인산인해를 이뤘으나 실내 관람은 별다른 혼잡 없이 질서가 유지됐다. 무료 관람은 올해 말까지다. 1월1일과 매주 월요일은 연중 휴관일이나 첫 월요일인 31일은 정상 개관한다.
윤중식 기자 yunjs@kmib.co.kr / GoodNews paper / 국민일보
[1914년] 솔크 Jonas Edward Salk 출생
← Jonas Salk during a 1988 Centers for Disease Control visit
1914년 10월 28일 태어남 / 1995년 6월 23일 죽음
솔크는 최초로 유효한 소아마비 백신을 개발한 미국의 의사이다. 펜실베이니아의 피츠버그대학교에서 소아마비에 관한 연구를 시작했다. 1952년 미국에 5만 8,000명의 소아마비 환자가 발생하고 이로 인해 3,000명 이상의 어린이가 목숨을 잃은 사태가 발생하자 연구에 박차를 가했다. 기존의 이론으로는 항체를 형성하는 데 소아마비 바이러스의 활성인자가 필요하다고 알려져 왔으나 그는 비활성 바이러스가 필요하다고 확신했다. 그는 백신을 개발해서 인체실험을 시작했고, 그 실험은 자신과 가족들에게도 행해졌다. 1954년 미국의 180만 취학아동을 대상으로 임상실험이 이루어졌고, 1955년 4월 12일 마침내 백신의 효력과 안전성이 공식 발표되었다. 그 결과 1962년까지 새로운 소아마비 발생건수는 대략 1,000건으로 떨어졌고, 1995년 소아마비는 웨스턴 헤미스피어 전지역에서 사실상 자취를 감추었으며 이제 지구상에서 완전히 없애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그가 세상을 떠날 무렵에는 인간면역결핍 바이러스(HIV)에 감염된 사람이 에이즈 환자로 진행되는 것을 막는 백신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고 있었다. 프랑스 레지옹 도뇌르 훈장과 미국 자유훈장 등을 수상했다./브리태니커
[1955년] 미국의 컴퓨터 사업가 게이츠/William H. Gates 출생
1955. 10. 28 미국 워싱턴 시애틀~.
흔히 빌 게이츠로 불림.
마이크로소프트사(Microsoft)를 창설해 전세계 소프트웨어 산업을 주도해왔으며, 이로써 억만장자가 되었다. 고교시절부터 컴퓨터에 흥미를 갖기 시작한 게이츠는 이미 1967년 13세의 나이에 학교선배인 폴 앨런과 함께 자신이 다니던 레이크사이드 고등학교의 월급관리 시스템을 개발해 돈을 벌었다. 그리고 폴 앨런과 트래프오데이터(Traf-O-Data)라는 회사를 차려 프로그램을 개발, 돈을 벌기도 했다. 1975년, 하버드대학교 법학과 예과에 다니던 게이츠는 머지 않아 각 가정에서 퍼스널 컴퓨터를 사용하게 되리라는 기사를 보고 학업을 그만두고 폴 앨런과 함께 마이크로소프트사를 창설했다.
[1915년] 실업가 박용학/朴龍學 출생
1915. 10 28 강원 통천~.
1935년 원산공립상업학교를 졸업했으며, 1985년 미국 컬럼비아대학교와 1990년 서강대학교에서 명예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1955~73년 대한농산 사장, 1967년 대한선박 회장, 1968년 고려수산․금성방직․태평방직 사장, 1971년 미도파백화점 회장, 1973년 대한상공회의소 부회장 및 한․미경영자협의회 부회장, 1977~78년 대농그룹 회장, 1980~83년 섬유산업연합회 회장, 1981년 고려무역 회장 및 대한방직협회 회장, 1983~87년 전국경제인연합회 부회장, 1986년 민족통일중앙협의회 부의장, 1989~91년 코리아헤럴드 및 내외경제신문 회장 등을 지냈다. 1982년 한․중경영자협의회 위원장, 1984년 한국실명예방협회 회장, 1987년 전국경제인연합회 고문, 문예진흥후원협의회 회장, 1988년 한․일경영자협의회 회장, 1989년 대농그룹 명예회장, 1991년 한국무역협회 회장 등을 지냈다. 현재 대농그룹 명예회장, 《코리아헤럴드》 《내외경제신문》 명예회장으로 있다.
[1913년] 대중가요 작곡가 박시춘/朴是春 출생
1913. 10. 28 경남 밀양~1996. 6. 30 서울.
본명은 순동(順童). 부유한 집안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릴 때부터 다분히 풍류적인 분위기를 즐기면서 자랐으며, 일본 유학시절 중학생의 신분으로 순회공연단을 따라다니면서 트럼펫․바이올린․색소폰 등 다양한 악기들의 연주방법을 익혔다. 특히 기타를 치는 솜씨가 뛰어났고 한때는 연예단에서 영사기돌리는 일을 하기도 했다. 우라타[浦田] 연예단 시절 〈몬테카를로의 갓난이〉․〈어둠 속에 피는 꽃〉 등의 곡들을 발표하면서 작곡가로 데뷔했다. 가수 남인수가 부른 〈애수의 소야곡〉이 히트하여 명성을 얻기 시작했으며, 이후 1930년대말부터 1960년대까지 40여 년 동안 무려 3,000여 곡이 넘는 대중가요를 작곡, 수많은 히트곡을 내놓아 가요사의 산증인으로 일컬어지기도 했다.
48년 럭키레코드사를 설립하였으며, 52년 오리엔트레코드전속작곡가, 56년 레코드작곡가협회장, 61~72년 연예협회 이사장, 1966년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부회장 등을 지냈다. 82년 신세계음향회장이 되었으며 1981년 이후 음악저작권협회 명예회장을 지냈다. 6․25 종군연예인유공자표창 보관문화훈장(寶冠文化勳章)을 수상하였으며, 주요 작품으로는 《신라의 달밤》 《애수의 소야곡》 《이별의 부산정거장》 등이 있다.
[1585년] 플랑드르의 지도자 얀센/Cornelius Otto Jansen 출생
1585. 10. 28 네덜란드 레르담 근처 아쿠오이~1638. 5. 6 스페인령 네덜란드 플랑드르 이프르(지금의 벨기에).
얀센주의로 알려진 로마 가톨릭 교회의 개혁운동을 이끌었다. 프로테스탄트에 반대하는 성서 해설서와 소책자들을 썼다. 대표적 저서로 1640년 그의 친구들이 출간한 〈아우구스티누스 Augustinus〉가 있다. 이 책은 1642년 교황 우르바누스 8세에게 이단 선고를 받았지만 얀센주의 운동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비중을 차지했다.
[1885년] 독립운동가 유상렬(柳相烈) 출생
1885. 10. 28 황해 평산~1923. 4. 7.
1919년 3월 평산군 누천(漏川) 장날을 이용하여 만세운동을 주동했으며, 일본경찰주재소를 습격했다. 그해 8월 황해도 지방에서 김치화(金致華) 등이 조직한 독립운동 비밀결사인 주비단(籌備團)에 가입하여 대단장 민승현(閔昇顯) 휘하의 소단장으로 10여 명을 이끌고 군자금 모집과 단원 모집 등의 활동을 했다. 민승현이 상하이[上海]로 망명한 뒤로는 대단장으로 활동했으며, 1920년에는 단원과 구장(區長) 들을 통해 군자금제공명령서를 발송하도록 하여 모금한 군자금을 상해 임시정부로 보냈다. 1921년 4월 18일 조창선(趙昌善)·서의배(徐義培) 등과 함께 일본밀정 이칠성(李七星)·이범락(李範洛)을 살해했으며, 친일파들을 조사해 사형선고장을 발송해 경각심을 불러일으켰다. 이러한 활동을 하다가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1921년 10월 6일 해주지방법원에서 사형 선고를 받고 공소했으나, 1922년 4월 12일 평양복심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되어 이듬해 순국했다. 1963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1874년] 중국의 혁명가 황싱[黃興, 1874~1916] 출생
자 극강(克强). 후난성[湖南省] 창사[長沙] 출생(10월 25일 출생했다는 기록도 있음). 우창[武昌]의 양호서원(兩湖書院)을 졸업한 후 탕차이창[唐才常]의 자립군(自立軍) 봉기에 가담하였다가 난을 피하여 1901년 일본에 유학하였다. 1903년 귀국하여 쑹자오런[宋敎仁] 등과 함께 화흥회(華興會)를 조직하고, 가로회(哥老會)와 결탁, 창사에서 거병(擧兵)하였으나 실패하고 일본에 망명하였다.
1905년 도쿄[東京]에서 쑨원[孫文] 등과 중국혁명동맹회를 조직, 그 서무간사(庶務幹事)가 되어 쑨원 다음가는 지위에 있었다. 이 후 광둥[廣東] ·광시[廣西] ·윈난[雲南]에서 여러 차례의 무장봉기를 지휘했고, 1911년의 광저우[廣州]에서의 봉기 때에는 죽음을 면하였다. 같은해 우창에서 혁명이 일어나자 혁명군 사령관이 되었으나, 한커우[漢口] 방위에 실패하였다.
상하이[上海] ·난징[南京]에 가서 혁명정부 수립에 분주, 1912년 성립된 중화민국임시정부에서는 임시 대총통 쑨원 밑에서 육군총장(육상)에 취임, 사실상의 수상이라 일컬어졌다. 이 무렵부터 쑨원파와 사이가 멀어졌고, 1913년의 위안스카이[袁世凱]에 반대하는 제2혁명에서는 난징에서 거병하여 실패하고 미국에 망명, 쑨원의 중화혁명당에는 참가하지 않았다. 제3혁명(1915) 후 1916년 위안스카이가 죽은 후에 귀국하여 쑨원과도 합작하였으나, 얼마 후(1916. 10. 31) 상하이에서 과로로 죽었다.
자유의 여신상 제막/1886
1886년 10월 28일 ‘자유의 여신상’ 제막식이 열렸다.
여신은 오른손에 횃불을, 왼손에 미국 독립일인 ‘1776년 7월 4일’이 적힌 명판을 들고 미국 뉴욕항 입구 베들로섬(리버티섬)에 우뚝 섰다.
1884년 7월 프랑스에서 제작된 여신상은 1885년 6월 해체된 후 ‘이제르’호에 실려 뉴욕에 도착했다. 1886년 받침대가 완공됐고 4개월간 조립과정을 거쳐 제막식이 거행됐다.
여신이 딛고 선 받침대에는 ‘너희 지치고 가난한 사람들을/자유롭게 숨쉬기를 갈망하는 무리들을/혼잡한 해안에 지쳐 쓰러진 가엾은 족속들을/머물 곳 없이 폭풍에 시달린 이들을 나에게 보내다오/나는 황금빛 문 옆에 서서 횃불을 높이 들리라’는 시가 새겨져 있다.
여신은 지친 사람을 넉넉히 품을 만큼 크다. 횃불 끝까지 더한 여신상의 높이는 46m. 머리 부분의 길이만 8.5m에 이른다.
자유의 여신상이 처음 구상된 것은 1865년. 프랑스 진보적 정치인들은 미국 독립 100주년을 맞아 동상을 선물하기로 했다. 이들은 미국을 ‘모든 인간은 평등하며 자유와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다’는 이념을 바탕으로 세운 모델국가로 여겼다.
여신상의 원래 이름은 ‘세계를 밝히는 자유’. 군주제와 싸우고 있는 유럽을 계몽의 길로 이끈다는 의미였다.
19세기 후반 이탈리아 폴란드 러시아 등 여러 나라 사람이 궁핍과 종교적 박해를 피해 미국으로 건너왔다. 항해 도중 10% 정도가 숨지는 고난의 여정을 거쳐 뉴욕항에 도착한 이민자의 눈에 처음 들어오는 것이 여신상. 그래서 여신상은 ‘민주 공화제’보다 ‘이민자의 어머니’로 상징이 바뀌었다.
이민자가 늘자 백인 중심 사회를 유지하려는 분위기가 형성됐다. 1924년 앵글로색슨, 신교도가 아닌 사람의 이민을 제한하는 법이 제정됐다.
시인 토머스 알드리치는 1895년 여신이 이민자를 위해 횃불을 들지 말고 그들을 저지해야 한다는 시를 발표했다.
‘…거칠고 잡다한 무리들이 몰려든다/…/자유여 하얀 여신이여/자유의 선물을 낭비하기 위해/신성한 너의 문을 두드리는 자들을/무쇠와 같이 강인한 손으로 저지하라.’
무솔리니, 로마 진군/1922
← 로마진군 다음날 기자회견에 임하는 무솔리니(오른쪽에서 두번째). 검은 셔츠단이 무솔리니를 에워싸고 있다.
1922년 10월 28일 아침 이탈리아 파스타 임시 수상이 긴급회의를 소집했다. 무솔리니의 파시스트당 의용군인 '검은 셔츠단' 4만명이 로마로 진군했다는 긴급보고가 전달됐기 때문이었다. '볼셰비키 분쇄' '위대한 이탈리아'를 외치며 퀴리날궁을 향해 행진하는 이들을 제지하는 군경은 보이지 않았다.
무솔리니는 전부터 파스타 내각에 자신을 포함한 자파 간부들의 입각을 요구해 왔으나 협상이 결렬되자 로마 무력점령을 강행했다. 이날의 긴급회의에서는 계엄령을 내려 무솔리니군을 저지하기로 했으나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국왕이 계엄령에 서명을 거부하는 바람에 파스타는 사임했다.
10월 29일 국왕은 허약한 민주주의 정부 대신 '볼셰비즘으로부터 이탈리아를 구원'할 것처럼 보였던 무솔리니에 내각구성지시를 내렸고 무솔리니는 31일 수상이 되어 새로운 내각을 구성했다. 1924년의 총선에서 파시스트당은 65%의 지지를 얻어 정권을 장악했고,1933년 무솔리니는 선거법을 개정, 독재로의 행진을 준비했다./조선
[2004년] 미국 프로야구, 보스턴 레드삭스 86년 만에 월드시리즈 우승
← 베이브 루스
2004년 오늘 밤비노의 저주를 깨고 보스턴 레드삭스가 월드시리즈에서 우승했다.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를 4전전승으로 누르고 86년만에 우승의 감격을 누렸다.
보스턴 레드삭스는 1920년 구단주가 펜웨이 파크 건설 자금을 위해 최고의 투수인 베이브 루스를 뉴욕 양키스에 헐값으로 트레이드한 후 월드시리즈 우승과 인연이 멀었다.
그동안 4차례나 월드시리즈 무대에 섰지만 번번히 고비를 넘지 못한 보스턴 레드삭스를 사람들은 '밤비노의 저주'로 불러왔다.
밤비노는 베이브 루스의 애칭이다. /YTN
[1973년] 이집트 작가 타하 후세인(Taha Hussein) 사망
← 맹인이었던 이집트 작가 타하 후세인 20세기 아랍 문학을 대표하는 깨어있는 지성인으로 평가받았던 타하 후세인이 1973년 10월 28일 세상을 떠났다.
이집트의 중하층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3세 때 안질에 걸린 후 80년 이상의 세월을 실명으로 살아가야하는 비운에 처하게 된다. 이 일로 그는 무지와 가난을 혐오하게 됐고, 훗날 교육부장관이 되어 문맹 퇴치를 위한 교육에 힘썼다. ‘맹인’이라는 핸디캡은 그에게 있어 오히려 글을 창작케 하는 거름과도 같았다.
1914년 타하 후세인은 자신과 같은 맹인이자 아바스왕조의 시인인 아부 알알라 알마아리에 관한 논문으로 첫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카이로의 알아즈하르대학에서 아랍 문학 공부를 마친 뒤 라틴어와 그리스어 공부차 프랑스로 건너갔다. 이때 일생의 반려자가 될 프랑스인 쉬잔을 만나게 되는데 그가 그녀를 ‘달콤한 목소리’ 라는 애칭으로 불렀던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그녀는 그에게 눈이 되어주었다.
1921년 이집트로 귀국하자마자 카이로대학에서 고대사 및 고대 아랍 문학 담당 교수로 발령을 받았다. 그러나 아랍 고전시를 종교적 계율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해석한다는 이유로 곧 보수파들의 반감을 샀고, 이내 대학에서 쫓겨났다. 타하 후세인은 그 뒤 이집트 최초의 근대적 민족주의 정당인 와프트당에 가입해 국왕 세력과 영국 식민주의에 맞서 싸웠다. 그리고 1950년 교육부 장관이 되어 초등 교육의 의무화무료화를 이뤄냈다.
그는 수많은 작품을 남겼지만, 그중에서도 그의 성장 과정을 자서전적인 형식으로 표현한 ‘알아이얌(al-Ayyam나날들)’이 단연 으뜸이다. 후기 작품에서는 가난한 자의 역경과 적극적인 정부 개혁에 대해 점점 더 큰 관심을 보였다. 78세 되던 해인 1967년 회고록 〈무드하키라트 Mudhakkirat〉를 발표했다. 기존의 아랍 사상에 새로운 진보적 정신을 불러일으키며 이집트 문학 비평에 탁월한 역할을 담당했던 그는 유엔 인권상 수상소식을 들은 다음날 눈을 감았다.
[1980년] 전두환 대통령, 국가보위입법회의 의원 81명 임명
국가보위입법회의는 제5공화국 헌법(1980. 10. 27 공포) 부칙 제6조에 따라서 새 국회가 구성될 때까지 국회의 권한을 대행한 입법기관이다.
1980년 10월 발족하여 제5공화국 출범 이후 전개될 정치의 틀을 강압적으로 재조정하는 역할을 담당하였으며, 입법의원 81인으로 구성하였다. 조직과 운영을 위하여 국가보위입법회의법이 제정되었는데 그 권한과 기능은 국회와 같다.
제5공화국을 출범하기 위하여 그 기초가 되는 법률들을 제정한 혁명적이고 과도적인 입법기관으로, 특히 헌법 부칙 제6조 4항에 따라서 정치풍토의 쇄신과 도의정치의 구현을 위하여 헌법 시행일 이전의 정치적 또는 사회적 부패나 혼란에 현저한 책임이 있는 자에 대한 정치활동을 규제하는 '정치풍토 쇄신을 위한 특별조치법(1980. 11. 5 공포)'을 제정하여 구정치인들의 정치활동을 금지하였다.
[1977년] 자연보호협의회 발족
자연보호운동을 범국민적으로 전개하기 위한 단체로 국토를 소중히 보존하여 후손들에게 물려주자는 취지에서 자연보호협의회라는 이름으로 1977년 10월 28일 창립되었으며, 1979년 4월 자연보호중앙협의회로 개칭되었다. 자연보호를 위해 자연의 실태를 종합적으로 조사, 보호대책을 마련하고 국내외 관련단체와의 유대강화를 위해 1979년 1월에 국제자연보존연맹(IUCN)에 가입하였고, 제14·15차 총회에 대표를 파견하기도 했다. 기구로는 회장 밑에 사무국을 두고 전국 시·도·군·구에 자연보호협의회를 설치하고 있으며, 직장·지역단위로 조직된 자연보호회가 운영되고 있다. 이 밖에 자연보호명예감시관이 전국적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1978년 10월 5일 <자연보호헌장>을 제정·선포하였고, 격월간으로 《자연보호》지를 발간하고 있다.
[1958년] 요한 23세, 제262대 로마 교황에 선출
1881년 11월 25일 이탈리아 베르가모 ~ 1963년 6월 3일 바티칸
본명은 안젤로 G. 론칼리(Angelo Giuseppe Roncalli).
1904년 사제에 서임된 후, 1931년부터 교황청의 외교관으로 활약하다가 1953년에는 추기경, 베네치아의 대주교가 되었으며, 1958년에는 교황에 선출되었다.
6년간의 재임기간이었으나, 1962년 가톨릭의 교회쇄신과 현대에의 과감한 적응을 지향한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소집하고, 1963년 회칙(回勅) ‘지상의 평화’를 발표, 세계평화 ·남북문제 ·노동문제 등 현대 인류사회의 여러 가지 현안 해결에 큰 발자취를 남겼다. 또 65년 바티칸 제2차 공의회를 통해 가톨릭 내에 대변혁을 가져왔다.
[1919년] 미국의회, 금주법 가결
제1차세계대전 참전에 따라 전시의 식량절약, 작업능률 향상, 맥주를 만드는 독일인에 대한 반감 등 여러 사정이 얽혀, 금주운동을 전국화하자는 요구가 일었다. 그 결과 1919년 10월 미국 영토 내에서 알코올 음료를 양조·판매·운반·수출입하지 못하게 하는 미국헌법 수정 제18조가 연방의회를 통과, 각 주의 승인을 얻어 1920년 1월 발효되었다.
그러나 실제로 완벽하게 실시되기가 어려웠을 뿐만 아니라 밀조·밀매 등에 따르는 범죄가 크게 늘어나 1933년 헌법수정 제21조에 의해 폐지되고, 금주는 각 주법이나 지방조례에 의한 권한이 되었다. 현재 금주를 주법으로 정하고 있는 곳은 미시시피주(州)뿐이다.
[1636년] 미국 하버드대학교(Harvard University) 창립
미국 매사추세츠주(州) 케임브리지시(市)에 있는 사립 종합대학.
1636년 매사추세츠 식민지 일반의회(General Court)의 결의에 따라 설립되었으며, 1939년 도서와 유산을 기증한 J.하버드 목사의 이름을 따서 하버드대학이라 명명하였다.
영국의 옥스퍼드대학교와 케임브리지대학교의 학료(學寮) 제도를 모방한 조직으로 출발하여, 식민지시대에는 목사 양성에 필요한 종교교육을 의무화했다. 그러나 1869년부터 40년간 학장을 지낸 C.W.엘리엇은 독일 유학의 경험을 살려 전문적 학문연구기관으로 개혁하고 선택과목제를 도입하였는데, 이 제도는 뒤의 개인지도제 및 전원학료제 실시와 함께 미국 대학 커리큘럼(교육과정)의 원형이 되었다.
[1492년] 콜럼버스 쿠바 발견
1492년 8월 3일 콜럼버스(Columbus, Christopher, 1451~1506)가 탄 산타마리아호와 니냐호·핀타호의 3척이 팔로스항을 떠나 카나리아제도를 거쳐 서쪽으로 항해하여 많은 어려움을 극복한 끝에 10월 12일 새벽 콜럼버스가 산살바도르섬이라고 이름붙인 바하마제도의 한 섬을 발견, 상륙하였다. 또한 부근의 섬들을 돌아보고 쿠바섬·아이티섬(히스파니올라섬이라고 이름붙임)에 이르러 아시아의 일부라고 판단하고 이곳에 39명을 식민시킨 다음 귀항길에 올랐다(1493년 1월).
콜럼버스가 쿠바섬을 발견한 당시에는 시보네족(族)·타이노족 등 5만여 명의 원주민들이 고도로 발달된 농경생활에 종사하며 평화롭게 살고 있었다. 에스파냐인은 1511년 D.벨라스케스를 파견하여, 1514년에는 전 지역을 정복하고 식민지 체제를 확립하였다. 원주민들은 사금(砂金) 채취와 농장 노동 등으로 혹사당한 데다 1528년의 대(對)에스파냐 반란, 1530년의 악성 유행병 등으로 거의 전멸상태에 이르렀다.
그밖에
2000년 내국인 출입이 가능한 강원랜드 ‘스몰’ 카지노, 강원도 정선 폐광촌에 국내 처음으로 개장
2000년 국내 민간항공 사상 최초인 대한항공 조종사 파업
1999년 ‘고문 기술자’ 이근안씨 자수
1995년 수출 1,000억달러 돌파
1991년 한국-루마니아, 문화협정 체결
1986년 ‘10.28 건대 점거농성 시위’, 26개대 학생 2,000여명이 건국대에서 시위, 3일간 철야농성
1982년 포르투갈, 군정에서 민정으로 이양
1982년 스페인 총선에서 사회노동당 승리
1982년 이스라엘,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서 축출
1980년 고고학회, 경남 욕지군도서 중석기 문화유적발굴, 한국고고학 전국대회서 보고
1980년 사우디아라비아 대(對)리비아 단교 선언
1974년 서독-소련 정상회담
1963년 북한, 노동신문을 통해 소련을 '수정주의'로 비판
1962년 소련, 미국에 굴복하고 쿠바기지 철수를 명령
1951년 육군대학 창설
1947년 공창(公娼) 폐지령 공포
1940년 이탈리아군, 그리스 침공
1937년 몽고 자치정부 수립
1914년 종이 크로마토그래피를 개발한 영국의 싱 출생. 1952년 노벨화학상 수상
1913년 독일-터키 군사협정 체결
1912년 동경에서 유학생학우회 창립
1837년 일본 도쿠가와 바쿠후(幕府)의 마지막 쇼군(將軍) 도쿠가와 요시노부(德川慶喜) 출생
1704년 영국의 철학자 존 로크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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