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년{단기2669년/AD336}병신, 춘정월, 왕이 <서천>에 이르러서 <우린>의 딸을 거두었다.
<모용황>이 <려{여,리,이}>에서 동쪽으로 얼음이 언 물{또는, 넓은 땅}을 건너서 행군하여 동생인 <인>을 습격하여 <평곽>에서 잡아 죽였더니, <동{통}수>・<곽충> 등이 <뉴벽>에게로 도망하여 왔다. 기묘년{<미천>20년,AD319}에 <최[비]>의 일이 있었던 이후 <외>는 <인>을 <요>{주/현}의 땅에 두어 득책으로 삼았었으나, 필경에는 서로들 싸우고 죽여서 없앴으니, 이를 두고 「날래고 사나운 고양이가 밤눈 어두웠던 격」이라 함이다.(<평곽>사재<반산>지서북진지남.고기,<뉴벽>,시위<평곽>태수,여<인>공수운).
2월, 큰 별이 서북으로 흘렀다. 왕은 <황>이 쳐들어올 것을 걱정하여 <상도>를 <동진>에 보내서 <황>이 동생을 죽이고 형수와 놀아난 죄를 송사하였으나, <진>사람은 <황>을 두려워하여 감히 죄를 논하지 않았다. 하5월, 종실의 여인들에게 <환도{=창남산성}>의 신궁에서 연회를 베풀었다.
○ 추8월, <동황성>에 명을 내려 역졸 5천인을 <환도{=창남산성}>로 보내서 <오룡궁>을 수리하게 하였고, <낙랑>인 2천․<대방>인 1천 및 <부여>인 2천에게는 <동황성{東黃城}>을 수리하게 하였으며, <취불아불화>를 시켜서 이 공역을 감독하게 하였다.(<동황성>은 <평양>의 남쪽에 있으며, 본래 <백제>의 땅으로 <신라>와는 가까이 있던 까닭에, <신라>와 <백제>가 연이어 화친하면서도 이 곳을 가지려 하였다. 왕은 이곳을 밀도로 삼고, 튼튼히 하여서 남쪽에 대비할 요충으로 삼고자 하였다.).
○ 10년{단기2673년/AD340}경자, 춘정월, 조서를 내리길; “농사는 천하의 대본이다. <복희>씨 시절에 먹고 입었던 것은 경작하여야만 먹고 입는 시절과는 같지 않다. 그대들 높고 낮은 사람들 및 백성들과 일없이 놀고먹는 이들 모두는 땅을 일구고 누에치기에 열심히 하시오.”하였다. 2월, 왕의 동생 <민>과 세자 <성>을 <황>에게 보내서 백양 3천두를 뇌물로 주었더니, <황>이 <오충>과 <조문>을 돌려보내주었다. 추7월, <환도{=창남산성}>의 <장안궁>이 완성되어, <주>태후의 행궁으로 삼았다.
<황>은 흑룡과 백룡 두 마리가 서로 머리를 부비며 사귀다가 <용산>에 뿔을 떨어뜨리는 것을 보고는, 새로이 지은 궁의 이름을 <화룡>이라 하였으며, 그 산 위에다가는 <용삭불사>를 세워서 공경들의 자제를 가르치는 관학으로 삼았다.
<석호>의 사신이 물{海}을 건너서 도착하였기에 <환도{=창남산성}>의 새로 지은 궁전으로 맞아들여 함께 <황>을 토벌하는 것을 논의하였다.
9월, <사천원>에서 사냥하였다.
○ 12년{단기2675년/AD342}임인, 춘정월, <해>씨가 왕자 <이련>을 낳았는데, 5색 구름의 서기가 있었다. 왕이 크게 기뻐하여 <해>씨를 소후로 봉하고, <해현>에게는 산장과 노비를 하사하였다. 2월, <재봉>에게 명하여 <환도성{=창남산성}>의 지붕을 고쳐 잇게 하였다. <람국>에게 명하여 <국내성(<환도>지왕재성야.비<유류왕>립<위나암성>야)>을 쌓게 하였다. 추8월, <환도성{=창남산성}>으로 천도하였다. 대략, 서진하려는 뜻이었다. <황>은 동진하고자 하였고, 상은 서진하고자 하였으니, 이들의 세력은 충돌할 것이었고, 그리 되었다.
○ 10월, <황>이 <용성>으로 천도하였다. 스스로 <고구리>를 먼저 평정한 이후에 <우문>을 멸하고서야 중원을 도모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이 말하길; “<고구리>를 치는 데는 두 길이 있습니다. 북쪽 길은 평탄하고 남쪽 길은 험하니, 저들은 필시 북쪽을 지킬 것입니다. 폐하께서는 의당 남쪽으로 가시어 불의에 나아가시면 <환도>를 취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 하였다. <황>은 그렇겠다고 여기고는 <왕우>에게 일만 여의 군병을 이끌고 북로로 나가서 대군을 끌고 온 듯이 하게 하였고, 자신은 강군 4만을 이끌고 남쪽 길로 들어왔다.
왕은, <황>의 대군이 북쪽에 있는 것으로 듣고, 동생 <무>에게 정병 5만을 데리고 나아가서 막게 하였으며, 자신은 늙고 약한 군병으로 <도읍>을 지켜 남로 침입을 대비하였다. 11월에 적들이 느닷없이 <사천>과 <니하>로 다가오더니{☞ 두 하천은 가까이 있다}, 대군이 꼬리를 물고 밀려왔다. <아단>과 <안평>성 등이 모두 함락되었다{☞ 두 성은 蛇川과 泥河에 인접했다}. 우룡장군 <아불화>가 힘을 다하여 <황산>에서 싸우다 죽었다. 적은 수가 많고 우리는 수가 적으니 지켜낼 수가 없었다. 상은 그때서야 적의 대군은 남쪽에 있으며, 저들의 술수에 빠졌음을 알았다. 상은 흩어진 군사를 모아서 <평양>으로 가려하였다가, 적 <한수> 등이 그곳으로 매우 급하게 다가오기에, 산림 속으로 숨으려 하던 차에, <해발>이 군사를 이끌고 <단웅곡>에 이르렀다. 이미 <환도성>이 함락되고 태후가 잡혔다는 소식에 통곡하였다. 이에 좌우의 사람들이 위로하며 아뢰길; “북쪽으로 간 군대가 <왕우>를 깨고 우리를 구하러 오고 있으니, 적들은 편안하지 않을 것입니다. 폐하께서는 응당 느긋하게 계시면서 사직을 살피십시오.”라 하였다. 적들이 <단웅곡>을 포위하자, <우신>이 계곡 속에 깔아놓았던 복병으로 이들을 깼다. 상은 <해발> 등을 데리고 몰래 <단령>을 넘어 <평양>에 다다랐다{☞ 平壤은 断岺 부근에 있었다}.
첫댓글 欽定大清一統志 卷四十五 吉林 牛山在打牲烏拉城東南 髙三十丈 起胍于佛門峯 髙一百七十二丈